[주간경향] 1187호 (2016. 08. 02)에 실린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다섯 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7261721271&code=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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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교인’과 귀족영성
성령운동의 역사와 자본주의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movement)적 성령운동 이론가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20세기 북미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의 역사를 3번에 걸친 ‘물결’(wave)로 유형화했다. 그에 의하면 ‘제1의 물결’은 1900년대 초의 ‘오순절운동’, ‘제2의 물결’은 1960~1970년대의 ‘은사주의운동’, 그리고 ‘제3의 물결’은 1980년대의 ‘신사도운동’이다. 한데 여기서 신사도운동은 그 기원을 1980년대로 소급할 수 있으나 1990년대에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으니, 시기를 정정하는 게 낫다.
한편 피터 와그너가 말하는 성령운동을 내 식으로 말하면, 개신교적 감성이 일으킨 종교적 열광주의 현상이다. 소리의 현상인 방언, 몸의 현상인 경련, 그리고 그런 현상과 결합해서 나타난 몸과 정신의 치유 등이 성령운동의 핵심적 구성요소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시기다. 성령운동의 첫 번째 물결이 휘몰아치던 시기는 미국의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 이들이 자본주의의 야만적 폭력성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던 때다. 두 번째 물결은 소비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배제와 박탈의 새로운 양상이 심화되던 시기에 일어났다. 그리고 세 번째 물결은 신자유주의적 체제로의 변동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던 때다. 요컨대 세 번의 성령운동의 물결은 모두 자본주의적 구성 양식의 급격한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특히 그 변화 과정에서 심각한 고통의 상황에 놓인 이들 사이에서 성령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이성적인, 즉 계산 가능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개신교적 감성의 정치를 통해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구를 찾아내려는 현상이 바로 성령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때 성령운동의 지도자는 대중의 감성을 집단적으로 고조시키는 전문가다. 그이를 매개로 해서 성령운동의 대중은 절망이 희망으로 반전되는 몸과 정신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물결인데, 이와 관련해서 하나 더 이야기할 것이 있다. 앞의 두 번의 물결은 자본주의적 변화 과정에서 주변화된 대중 사이에서 더 강렬하게 발생하며, 그 지도자들도 그런 체제에서 배제된 자 중의 하나였다. 한데 놀랍게도 세 번째 물결의 주요 대중은 사회적으로 결코 주변화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자산능력을 보유하고 좋은 직업을 가졌으며 향후에도 상승 가능성이 막힌 이들이 아닌 계층 출신이 많다. 그리고 지도자들도 대개 매우 성공적인 사회적 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한국에서 1970~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성령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조용기와 순복음교회다. 그의 성령운동의 출발점은 1954년, 전후(戰後) 사회적 보건의료체계가 철저히 붕괴된 상황에서 방언과 병고침으로 유명했던 나운몽의 성령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성령운동을 포장하는 신학적 서사를 채운 것은 미국의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적 성령운동의 담론이었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물결의 담론이 결합되어 조용기 현상의 서사를 구성한 것 같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시민K, 교회를 나가다》를 보라.)
신앙의 감성적 기획으로서의 ‘귀족영성’과 1990년대
한편 신사도운동적 성령운동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80년대 초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부 성령운동 계열의 선교전문 신앙단체들에 의해서다.(마라나타선교회, 예수전도단 등) 하지만 1980년대 말 온누리교회가 ‘경배와 찬양’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교회 성장의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고, 1990년대 말 이후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다.
‘경배와 찬양’이란, 예배의 모든 요소가 설교자에게 집중되어 있는 전형적인 예배 형식을 파괴하고, 설교자만이 아니라 찬송, 공간구성과 운용, 조명 등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따로 그리고 서로 간섭하며’ 일으키는 메시지 효과를 통한 해체적 예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워십 디자이너라는 기획자의 전문적 역할이 중요하다. 아무튼 이러한 해체적 예배 기획은, 설교자의 말을 통해 이성적 해석을 자극하는 개신교의 전통적 예배 양식과는 달리, 예배참여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종교적 메시지를 체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성령운동과 친화적이다.
그렇다면 왜 성령운동과 친화적인 종교성이라는 캐릭터를 갖는 온누리교회에 수평이동을 거듭하던 교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일까? 앞의 연재글에서 말했듯이, 이들 수평이동을 반복하던 교인들은 정보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이들이며, 그러한 능력에 걸맞게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들이 많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종교시장에서 이들의 까다로운 종교성을 유념하며 종교상품적 이미지로서의 교회적 캐릭터를 창출한다. 즉 이들은, 소비사회의 소비주체적 시민에 대응되는, ‘주권교인’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왜 사회적 소외계층들이나 선택한다는 성령운동적 신앙에 집단적으로 매료된다는 것인가?
한국계 독일 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무한긍정의 정신으로 무장하며 더 높은 성과를 위해 끊임없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상을 강조한다. 성공한 자라고 멈추거나 속도를 늦출 수 없다. 그 순간 그이는 추락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를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바로 신자유주의적 세상이다. 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든 쉼 없이 자기를 불태우며 노동해야 한다.
문제는 노동의 대열에서 낙오된 자만이 추락의 위기를 겪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성공을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몸과 정신의 자원이 과도하게 소진되어 버림으로써 ‘추락’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많은 이들이 소진성 질환에 걸린다. 소화기 계통의 질환들, 대사증후군(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심혈관계 질환, 우울증, 조울증 등에 시달리는 것이다. 나아가 소진성 질환에 걸리지는 않았어도, 추락의 예감 속에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말했듯이 이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가족이 파괴되고 사회적 관계가 무너진 자들이 아니다. 아니 그 반대다. 무기력증이나 소진성 질환 같은, 이미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추락한 이들이 더 잘 걸린다는 증상에, 모든 것이 건재한 듯 보이는 중상위층의 귀족적 시민들도 고통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이러한 증후는 1997년 외환위기와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경배와 찬양’으로 표상되는 온누리교회적 영성이 전국화된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즉 중상위계층 사이에서도 소진성 질환이 만연한 가운데 이러한 질병의 치유를 위한 종교적 기획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온누리교회의 성령운동은 그 중 가장 성공한 종교상품에 속한다. 예배에서 무대와 객석, 대중과 설교자로 양분되던 중심-주변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설교자의 강론에 집중되었던 메시지가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들 속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특히 ‘경배와 찬양’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찬양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가 중심축을 형성하여 건반과 타악기와 어우러지고 이것을 율동 섞인 찬양대의 팝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예배 대중의 감성을 자극한다. 대중은 찬양대와 함께 노래하고 율동하면서, 찬양대의 관람자인 동시에 일원이 된다. 그리고 찬양 이끔이가 그 사이사이에 간단명료한 멘트를 던져 대중과 함께 하는 경배 예배의 메시지를 명료히 한다.
이 멘트들은 네러티브 없이 한두 단어, 한두 문장 정도에 그친다. 하여 그 멘트는 전체 예배 속의 일부이면서도 예배에 견고히 묶여 있지 않고 따로 튀어나와 예배 대중의 개인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하여 예배 대중 개인이 겪고 있는 실존 상황과 맞부딪친다. 그런데 그 멘트의 내용은 대부분 축복과 윤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하여 예배 대중은, 전통적 예배의 집단성과는 달리, 개개인을 호명하여 축복을 선사하며 삶의 신앙적 규범을 부여하는 예배와 만난다. 이것이 ‘경배와 찬양’이 만들어내는 예배의 이팩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치유의 작용이 시작된다.
한데 종종 이 예배는 보다 본격적인 치유집회와 만난다. 온누리교회에도 손기철 장로라는 과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전문적 치유사가 활약했다. 목사 자신이 퇴마사(exorcist)였던 은사주의적 교회들와는 달리, 한 평신도가, 그것도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이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최근에는 그의 집회에 이단시비가 일면서 그의 집회는 온누리교회와 분리되었지만, 초기에 이것은 이 교회 성장의 주요 요소였다.
그의 집회는, 방언과 경련 등이 뒤섞이면서 무질서한 상태에서 은사체험과 치유가 일어나는 전통적인 치유집회와는 달리, 매우 질서 있게 진행되며 윤리적 강론의 비중이 매우 크다. 또 일반적 은사주의 퇴마사들은 병원의 치료(therapy)와 적대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는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고 치유(healing)와 병행할 것을 권고한다. 현실의 모든 것을 상실한 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의지하는, 하여 일반 의료체계와 극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치유를 실현하려는 은사주의적 치유집회와는 달리,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축복의 징표를 얻어낼 수 있고, 사회 질서에서 일탈하지 않는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청이 동반된 축복을 강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집회는, 제3의 물결에 속하는 일반적 성령운동처럼, 자신의 것을 다 걸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신앙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온누리교회가 표상하는 성령운동의 영성은 귀족적이다. 신앙에 삶을 다 걸지 않아도 되는 이들에게 닥친 삶의 위기를 축복으로 되돌려준다. 동시에 축복의 수혜자들에게 윤리를 부과한다. 즉 온누리교회적 귀족영성은 신비체험이자 윤리적 재무장의 과정이다. 내가 이 연재 서두에서 강조했던 중간범주의 존재들이 윤리를 통해 웰빙적 삶을 추구하고 나아가 사회의 계몽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것과 잘 결합되는 신앙의 양식이 이 교회의 귀족영성 속에 구현되고 있다.
캐릭터 교회들과 신자유주의
1960~1990년 사이 대성장기에 대형교회들은 대개 유사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있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독재자의 그것처럼 일종의 영웅주의가 대성장기를 이끌었다. 한데 ‘주권교인’들이 수평이동을 거듭하는 가운데 그들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대교회들은 종교시장의 상품으로서 교회를 대외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캐릭터를 필요로 했다.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그런 현상을 선도했던 대표적 교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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