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늘뜻나누기(설교)

타자들의 평화체제

이 글은 한백교회 2018년 5월6일에 했던 예배의 하늘뜻나누기 원고입니다.

[경향신문]과 [공동선]에 4.27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대에 가득 찬 글을 기고했는데 이 하늘뜻나누기 글은 4.27 판문점 선언문을 읽으면서 다소 실망스런 의견을 제시하고자 쓴 것입니다.

-----------------------------------

 



타자들의 평화체제

 





너희가 ......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요한복음4,21

 

 

 

 

 

 

 

지난 427일 남북정상회담은, 남북한이 분단되고 두 개의 국가체제가 형성된 지 70년 만에 가장 획기적인 선언문을 만들어냈습니다. 양국 정상이 함께 발표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하 판문점 선언)라는 제목의 발표문에 따르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양국 정상이 굳건히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양 정상은 올해 안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평화체제란 그동안 한반도를 규정해왔던 남북한 간의 적대적 공존의 질서에서 상생적 공존의 질서로 전환된 사회의 도래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 체제는 판문점 선언에서 명시되고 있는 것처럼 남3, 혹은 남4자가 공동으로 협의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필시 러일도 끼어들려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길고 복잡한 난관들이 무수히 도사리고 있겠지요. 그럼에도 판문점 선언을 말하면서 김칫국을 사정없이 들이키는 것은, 이 선언을 전환점으로 해서 지향해왔던 질서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적대적 공존의 질서에 의해 구축된 남한사회를 편의상 반공사회라고 한다면, 이 반공사회를 지키려는 보수주의세력 핵심부에 개신교 다수파가 있습니다. 과거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남한사회에서 서북출신의 월남(越南) 개신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친미적이고 극우적인 반공주의 성향을 저는 서북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는 오랫동안 남한 개신교 다수파의 골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록 세월이 흐르면서 이 골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살이 붙고 옷을 입기도 했지만, 그 골간을 이루는 뼈대의 틀은 변함없었지요.

이렇게 반공사회󰠚보수주의󰠚개신교 다수파󰠚서북주의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거대한 지배연합을 구축하는 근본 논리로 작동했던 시대의 종언이 바로 판문점 선언을 통해 선포된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으로 반공사회적 지배연합은 치명적인 붕괴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 핵심논리인 반공주의가 회생할 가능성까지 훼손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절망적 지지율 상황에서도 입에 달고 다녔던, “좌파 아마추어 정권은 곧 몰락할 것이라는 주장은 반공주의가 다시 먹혀드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과거 민주정권의 실패는 그런 희망적 확신의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판문점 선언은 반공주의가 보수주의를 묶어낼 내적 동력을 크게 파손시킨 것입니다. 판문점 선언이 추구하는 상생적 공존의 질서가 이제까지 보수주의로 결속되어 있었던 많은 지배세력을 결정적으로 분화시키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 2014년 드레스텐 선언에서 박근혜 전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서 제시되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으로 만들었던 한반도 신경제지도에서 보다 구체화되었던 것이 판문점 선언을 통해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으니 전통적 지배세력은 더 이상 적대적 공존의 질서의 틀 안에 묶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들은 이제 시베리아 철도나 서부실크로드 고속도로의 대열에 앞 다투어 나서게 되지 않을까요.

개신교 다수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실상 지배하는 파워엘리트들 다수는 이미 반공주의라는 냉전질서보다는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어떤 것도 해체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영의 사도들이 되었고, 교회는 그들의 가치관을 적극 종교제도에 반영해왔던 것입니다. 사실 개신교 다수파는 이미 IMF 이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장로대통령이니 보수대연합이니 하는 논리에 포획되어 있었다가 박근혜 정권의 붕괴와 함께 그 연합에서 이탈하는 기미를 보여 왔습니다. 그런데 판문점 선언은 그들이 새로운 지배연합에 참여할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높여 놓은 것이지요.

이제 판문점 선언이후, 즉 평화체제를 향한 전환의 시대는, ‘낡은 보수주의와의 대결이 아니라, 새로운 보수주의와의 대결이 필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하여 이 획기적인 선언은 평화체제라는 종착지에 다가온 것 아니라 어떤 평화인가를 둘러싼 새로운 싸움의 시작을 의미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개신교 소수파인 진보적 분파가 한반도 분단극복의 문제를 선도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1990년대 중반 경, 남북 간의 소통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기에 개신교 진보세력은 당시 매우 막강한 국제기독교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남북 종교간 대화를 실현시켰지요. 또 남한사회 내에서 인간띠 잇기 대회(1993)통일희년운동(1995) 같은 매우 성공적인 대중운동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성공적인 활동의 한복판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하 88 선언)은 개신교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탈분단의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오래된 원칙에 덧붙여서 민주화 원칙인도주의 원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컨대 평화체제는 정부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주체로 참여해야 하고, 소수자(혹은 타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88 선언에서 첨가된 이 두 가지 원칙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 선언에서 엄청난 변화의 길을 열어 놓았고, 그 내용 또한 지금까지 어떤 선언문보다도 훌륭한 주장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신경제지도기획들이 꼼꼼하게 담겨 있과 대비해서, 시민참여의 문제나 인권의 문제는 거의 혹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여 시민사회는 판문점 선언이후, 평화체제의 과정에 좀더 적극적인 주체로 참여해야 하는 과제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88 선언의 후예인 개신교 진보파는 판문점 선언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평화체제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인권의 문제가 간과되지 않는 평화체제 기획을 위해 눈을 번뜩이며 논의 과정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파 운동의 역사에서 요한복음4, 일명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로 알려진 텍스트는 이와 비슷한 현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 텍스트는,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사마리아를 경유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수가(Sychar)라는 곳의 어떤 우물가에서 한 여성과 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최근 고고학자들은 수가는 고대 이스라엘국의 가장 중요한 국가성소인 세겜과 같은 곳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야곱이 묻힌 곳이라고 말하고 있듯이(7,14~16), 예수 시대에도 사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지요.

그러니까 예수는 유대아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에 사마리아의 가장 중요한 성소인 세겜에서 그곳의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그에게 두 성소의 예배는 이제 모두 끝났다고 선언합니다. 가령, 반공사회의 핵심장소인 서울과 공산주의의 핵심장소인 평양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적대적 공존의 질서속에 있는 이에게, 그 질서가 서로를 강화시키고 있는 체제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판문점 선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판문점 선언이 지향하는 상생적 공존의 질서는 아직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공사회와 공산사회라는 두 개의 상호 적대적인 사회, 적대적 공존의 질서에 의해 구축해왔던 국가라는 은 가시적인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평화체제는 추구하는 것이지 아직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처럼 요한복음예루살렘의 예배도 세겜의 예배도 더 이상 의미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두 개의 성소, 그 성소로 대표되는 사회들이라는 두 개의 몸의 해체를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왔다.”(4,23) 중요한 것은 이 아니라 라는 것입니다. 제도가 사라진 곳에 꿈이 자리를 잡습니다.

한데 판문점 선언그 꿈을 그리면서 전통적 보수주의 연합이 해체되고 거기에서 이탈하고 있는 자본과 개신교 다수파 일부에게 설계도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멋진 집이 그려져 있지만 아직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집의 설계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그림은 아름답지만 대다수를 불행하게 하는 집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 영과 진리가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4,26) 그이는 영과 진리인 동시에 다음 장에서 특정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는 자, 생명의 빵이고(6,48) 보지 못하는 이에게 진리를 보게 하는 세상의 빛이며(9,5) 죽은 이를 살리는 부활이고 생명인 존재입니다.(11,25) 그러니까 타자에게 빵이고 빛이고 부활인 존재인 것입니다.

하여 요한복음의 영, 이 영이 꿈꾸는 그림은 상생적 공존의 질서인 평화체제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자를 위한 평화체제를 향하는 것입니다. (올빼미)

'하늘뜻나누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병이 되어 염병과 맞싸우다  (0) 2020.04.13
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0) 2020.04.13
그들도 '하느님의 백성'이다  (0) 2018.04.02
묵시록의 지혜  (0) 2018.03.05
‘전능한 신’은 없다  (1) 2017.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