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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2020년 3월1일 삼일만세운동을 기리는 온라인예배
제      목_ 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성서본문_ 마가복음 5,33

2019 03 01_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기_마가복음 5,33.pdf
0.22MB

https://www.youtube.com/watch?v=iYpDHx4NdFI

 

 

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한백교회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마가복음5,33)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시작되어 약 1년간 세계를 휩쓴 이른바 스페인독감은 감염자가 전 세계적으로 5억 명이나 되고 이 중 2,500만에서 1억 명이 사망하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독감이었습니다. 이 파괴적 재앙에서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이 질병을 무오년(1918) 독감이라고 불렀는데, 이 병에 감염된 이는 755만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 인구의 44% 이상이 감염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중 14만 명이 죽었는데, 놀랍게도 면역성이 낮은 노인들의 사망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일반적 독감과는 달리 이 질병은 청년층의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감영자와 사망자 통계는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거한 것인데, 최근 학자들은 이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감염되고 사망했다는 주장을 폅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인 염병(장티푸스)만큼이나 심하게 앓다가 금새 사망하곤 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서 화장터나 공동묘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 상황이었고, 야산에서 시신을 태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무단통치기의 식민지 당국은 허둥대며 원칙없는 방역을 실시했는데, 그것을 연구한 어느 연구자는 당국의 강권적 방역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조선 대중은 이 무오념 독감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조선의 대중은 이 질병의 공포를 어떻게 견뎠을까요. 도처에서 굿판이 벌어졌겠지요.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며 축귀의례가 사방에서 수행되었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물론 아닐 것입니다. 공포가 깊을수록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희생제의를 드렸을 것이고, 그중에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보았던 것 같은 인신제사도 있었을 법합니다. 혹은 흥분이 깊어 화를 자주 내고 폭력이 횡행하기도 했겠지요. 아비가 아내와 자녀에게 폭력을 일삼고, 나아가 집단이 공격할 대상을 찾아내어 그이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퍼붓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흥분되어 있던 대중이 기미년(1919) 만세운동에 나섰습니다. 쌀값을 비롯해 온갖 물가가 치솟고 있던 시절, 전염병의 고통에 시달리고, 무단통치 식민당국의 폭력적 방역에 사람들은 저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에게 성내며 완력을 휘두르곤 하던 대중이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선 것, 그것이 만세운동입니다. 고통당하는 이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재앙을 예감하면서 서로를 증오하고 파괴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며 서로를 위해 소원을 빌어주고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는 염원 공동체를 외친 것, 그것이 바로 기미년 만세운동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날을 기리는 ‘101주년 기념일입니다. 한데 올해는 그때 조선 대중이 그랬던 것처럼 질병의 공포 속에서 이 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라고 이름 붙은 전염병에 한국의 모든 대중이 공포의 휩싸여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투명하고 가장 체계적인 방역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중하지만 차분하게 당국의 방역 활동에 조응하여 질병 예방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한데 20,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되었습니다. 감염 확진자의 수가 18일부터 증가의 가속도가 붙는 듯하더니 20100명이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상승하여 어제까지 확진자가 2,337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증가 속도가 급가속하고 있는 것보다 더 문제는 지역감염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전체 감염 확진자의 86.5%가 대구와 경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해서 당국은 감염 4단계 중 가장 중한 심각 단계경보를 발령하여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을 막으려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상황에 있습니다.

한데 이렇게 대구경북에서 지역감염을 야기시킨 슈퍼감염자는 대구신천지교회의 일부 신자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는 신천지교회를 매개로 전국으로 확산될지 모른다는 우려스런 상황에 있습니다. 하여 이 종파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되었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국제적 신용의 하락을 초래했습니다. 하여 현재 당국의 방역 활동의 상당부분은 주로 신천지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신천지 교파의 공공안전에 대한 몰인식으로 인해 방역활동이 성공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해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은 강권을 동원해서 베일에 싸인 신천지 조직을 최대한 색출하고 조사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방역이 끝난 뒤에는 이 종단이 끼친 인적사회적 폐해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이 종파의 지도자들과 적극적 슈퍼감염자들은 피해자들의 피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법적인 문책 작업이 얼마나 잘 될지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종파의 모든 신자를 악마적 존재로 낙인찍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만 명이 넘는 이들, 그들 중 다수는, 비록 타인에 대한 배려나 책임에 무감각한 이 종파의 신앙양식에 동조한 책임이 있지만, 그들을 그 모습대로 인정해주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종교성이 책임 있는 신앙으로 개혁되도록 노력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도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은, 다소 맥락에 다르기도 하지만, 저의 이런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라는 이의 중병 걸려 사경을 헤매는 딸을 치유하기 위해 가는 길에 하혈하는 여성이 치유받는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이 텍스트에는 두 명의 아픈 여성이 등장합니다. 둘 다 이름이 없습니다. 굳이 이름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어, 신원을 확인됩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명시된 여성은 자신의 아픔을 대신 전해줄 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여성은 아무도 대신 말해주지 않습니다. 한데 그 여성이 겪고 있는 고통의 현상은 하혈하는 것입니다. ‘12간 그랬다는 것의 의미는 항상 그렇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그녀는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어느 질병을 앓고 있고, 그것은 하혈하는 증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성의 병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거동에는 문제가 없으며, 그것에서 낫기 위해 가산을 다 탕진할 정도로 자기의 고통에만 집착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더 중하고 더 절박한 이들을 위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 듯이 보입니다.

하혈로 인한 몸의 고통이 별 것 아니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거동할 만큼은 되었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얘깁니다.

어쩌면 그녀에게 더 중한 고통은 문화적 배제로 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레위기15,19~30에는 하혈하는 여성은 월경 때문이든 질병 때문이든 부정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부정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해서 타인을 만나도, 이야기를 나누어도 안 됩니다. 그녀는 영구히 자가격리 대상이어야 합니다. 근데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녔고 예수의 옷깃을 잡기도 했습니다. 예수까지 부정 타게 한 것이지요. 마치 144천 명에 속하기 위해, 즉 구원받는 이가 되기 위해 교주가 가르친 전도행위를 하고자, 독감에 걸려 힘든 상황임에도,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신천지 종파의 슈퍼감염자 아무개씨처럼 말입니다. 그 사회의 상식에 의하면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여성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 ...... 이제 병에서 나으시오.” 예수는 자신을 부정 타게 한 여성을 포용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을 격려합니다. 자기 고통에만 집착하며 살았을 뿐일 텐데 말입니다. 요컨대 그녀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가 이제 타인을 배려하며 살기를, 그렇게 성찰할 시간을 기다린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그녀가 야기한 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대신 말해줄 이 없는 사람들은 병에도 더 잘 걸리고,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더 민폐를 끼치게 됩니다. 해양지구물리학자인 존 머터(John C. Mutter)재난 불평등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101년 전 오늘, 전염병에 창궐한 가운데 타인의 다른 아픔들에 공감하고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만세운동을 벌인 대중을 떠올립니다. 그들 대부분은 얼마 전까지 자기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집착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그들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세운동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