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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저들이 들어와도 되는 곳(이사야서 56,8)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영상(2020 05 03)
제목_ 저들이 들어와도 되는 곳
성서_ 이사야서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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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Cheol Lee

20200503 한백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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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들어와도 되는 곳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을 모으시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미 나에게로 모아들인 사람들 외에 또 더 모아들이겠다. (이사야서56,8)

 

 

고대 유다국 시대 요시야 왕실에서 안식일(shabath)에는 모든 이들, 심지어 노예나 이방인,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는 법률이 반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 이스라엘국에도 있었던 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군주국 시대에는 아마도 이 법이 실제로 시행되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유다국에서 이 법은 농민과 난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요시야 왕실은 농경지인 세펠라 지역 농민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던 정부였고, 그 무렵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스라엘국 출신 난민을 노예화하고 사병화함으로써 왕실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귀족의 권력에 압박을 받고 있었지요. 하여 안식일 법은 지지세력을 더욱 견고히 하고, 반대세력의 위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7일마다 왕실 명령이 지켜질 수 있었더라면 요시야의 개혁은 굉장한 효력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까지 없던 법을 잘 준수하는지를 일일이 체크하며 통제할 길은 없었습니다.

안식일 전통이 본격적으로 자리잡던 때는 에스라 사제 시대 이후인 5세기 후반부터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경에는 거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이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안식일 규정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야훼가 그랬듯이 제7일에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것, 군주국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안식일에는 일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멀리 이동하는 것도 금지한다는 것 등이다.

이는 식민지 재건공동체 시절 안식일은 군주국 시대와는 달리 쉼을 선사하는 날이 아니라 백성의 자격을 규정하는 날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백성이 백성답지 않았기에 나라가 멸망했던 과거를 답습하지 않도록, 그날을 반드시 지켜야 하며, 지키는 방법은 노동과 이동의 금지였던 것입니다.

팔레스티나는 군주국이 멸망하고 식민치하에 있던 사회에서 재건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몇 개의 정치적 단위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시온 산(mountine of Zion) 일대에 형성된 재건공동체(유대아 재건공동체)의 주역은 페르시아에서 귀환한 고대 유다국 출신 유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재건공동체를 나름 견고히 세우기 시작한 때가 바로 안식일의 제도화가 본격화된 기원전 5세기 말이었습니다.

군주국을 세우려는 시도들은 이미 한 세기 전에 좌절되었습니다. 그리고 5세기 말 이후 재건공동체의 정치적 성격은 사제들과 평신도 귀족들의 과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체제는 그들 사제와 평신도 귀족 분파들 간의 치열한 정쟁을 통해 규정되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 정쟁의 주요 논점은 누가 이 야훼공동체의 백성인가였습니다. 이 공동체의 핵심이념의 고리가 안식일이니, 이 정쟁은 성전의 안식일 제사에 참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56,8은 바로 이 시기에 안식일 제사에 참여하는 주체에 관하여 도발적인 논점을 제기하는 문맥의 결론입니다. 다 함께 읽어봅시다.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을 모으시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미 나에게로 모아들인 사람들 외에 또 더 모아들이겠다.’”

쫓겨난 이스라엘이란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이들을 말할 것입니다. 한데 그들 외에 더 모아들이겠다고 야훼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을 하는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는 기원전 8세기 유다국의 예언자였는데, 이 선언의 시기는 기원전 3세기쯤이니 이사야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여 학자들은 이 익명의 예언자를 이사야서에 포함된 예언자 중 세 번째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라는 점에서 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한데 3이사야더 포함되어야야 한다고 말한 이들 중에는 국외자(nekar)나 성소수자(saris)도 들어 있습니다. 그들을 옹호하며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안식일은 지키는 것이 그 사회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가치가 된 시기입니다. 이때 유대아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난무했습니다. 저들 때문에 나라가 망했고 저들 때문에 식민치하에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3이사야는 그들도 백성이다’, ‘그들도 안식일 제사의 일원이다’, 그러니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서기 2세기 후반 이후 그리스도파는,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이스라엘과는 구별되는 집단임을 강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사는 그런 논지를 폈던 이들을 변증가(apologists)라고 부릅니다. 이들 변증가들이 강변한 주요 논점의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종파가 아니라 안식일 다음날을 주의 날로 받드는 종파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그리스도파 사이에서 안식일 예배는 점점 사라졌고 주일예배가 대체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은 새로운 안식일인 것입니다. 요컨대 주일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누구인가를 확정하는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런 전통에 가장 충실한 집단 중 하나는 뭐니뭐니해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일 것입니다. 주일예배 출석률은 그 어느 교회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입니다. 서양의 경우 교육수준이 높고 자본과 상징자본을 많이 보유한 이들은 출석률이 낮아지는 게 일반적인데, 한국에서 그런 교회들의 출석률이 더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주일예배에 대한 충성도가 이렇게 높은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인 것이지요.

한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대정신으로까지 자리잡게 되자 주일예배에 목숨 걸다시피 했던 개신교 신자 사이에서 변화의 기조가 역력하게 나타났습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의 두 번에 걸친 조사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첫 번째는 신천지로 인한 감염확산이 불길처럼 번져서 확진자가 2백 명 선을 막 넘고 있던 무렵인 2월 말에 실시한 조사인데, 개신교 신자의 70% 이상이 주일 대예배 중단에 찬성했습니다. 또 확진자가 100명 이하로 떨어지던 4월 초 조사에서는 대면예배 중단에 대해 90% 가까운 이들이 찬성했습니다. 조사기관이 한국개신교의 주류성향을 대변하는 중도보수적 단체여서 이 조사는 한국개신교 신자들의 일반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빠른 전환이 가능했을까요? 여러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개신교 신자 다수에게 대면예배는 절대적 위상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대면예배 중단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내가 보기에는, 평신도 중 많은 이들은 이미 코로나 사태보다 훨씬 전에 예배의 절대성을 해체하고서도 상처받지 않는 신앙을 찾고 있었습니다. 다만 출석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출석체크 하듯 예배 참여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는 출석률이 높은 이들이 종교적 자원뿐 아니라 교회가 주는 사회적 자원에 더 가까이 접근할 것이라는 계산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형교회의 경우에 말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과 목사들, 열렬한 평신도 엘리트들 사이에서 벌어진 대면예배를 둘러싼 논란은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과열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논의를 훑어보면서 주장은 서로 반대편에 있지만 논리는 비슷한 경우를 적잖이 발견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면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라거나, 지금은 대면예배를 자제하는 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논리가 그렇습니다. 양쪽 모두 하나의 선택을 의 가치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회의 안전에 위해가 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은 아닙니다. 단지 합리적 선택일 뿐입니다.

대면예배를 실시하는 교회에는 유난히 노인이 많고 사회적으로 열악한 여건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대면예배 중단에 공공선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왜 저런 교회들엔 그런 이들이 많은지를 물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한데 묶어서 무지한 자들이라고 비난할 수 있게 되며, 바로 저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재앙에 빠지게 된다고 낙인찍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3이사야의 비판처럼 우리식의 종교성에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것입니다.

대면예배 강행 교회에 대한 비판과 똑같은 논리로 우리는 신천지 종단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더욱이 이단이라는 극단적 낙인이 덧붙여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비판받을 만한 교리를 갖고 있고, 사회적 공공의식도 너무나 저열합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이 종단에 왜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이 그렇게 많은지를 묻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결국 우리는 쉬운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우리 공동체로 더 많은 이들을 초대하려면 저들이 들어와도 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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