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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코로나 시대 교회를 ‘나가다’

한백교회 2020 12 13의 하늘뜻나누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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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교회를 나가다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요한복음4,21)

 

 

코로나 시대에 대면예배를 중단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그 중단의 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일요일에 교회 가지 않고 집에서 지내는 것이 좀 낯설기도 했지만 나름 꿀 같은 휴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한데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교회당도 눈에 밟힙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도 시간이 더 지나면서 사라져갑니다. 반년이 지나고 1년이 다 되어가면서 사람들은 어느덧 몸도 마음도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긴 시간 교회를 나가지 않을 때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두 가지 장치가 빠르게 무장해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장치는 모호한 죄의식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습관입니다. 이 두 가지 최후의 보루가 거의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지난 5월 말에 예장 통합파 교단이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절반 이상의 교회(54%)가 온라인예배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온라인을 이용한 적이 전혀 없는 교회가 73%니 되었으니, 코로나 사태는 많은 교회로 하여금 온라인 예배를 활용하도록 강제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교단 목회자들의 65%가 온라인예배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걸 봐서는, 대면예배가 재개되면 온라인예배를 중단할 교회가 꽤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덧 12월이 되고, 코로나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마지못해서라도 온라인예배를 실시하는 교회는 더 많게 되었을 것이고, 코로나가 지나간 뒤에 온라인예배를 병행할 교회들도 훨씬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추정컨대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나가지 않고 온라인을 이용해서 예배에 참석하려는 이들이 더 많아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한데 온라인예배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인터넷을 통한 예배 참석자가 늘어난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귀속의식이 크게 낮아질 것이고, 대신 느슨한 공동체들에 더 다양하게 연결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성서를 읽으니 오늘 읽은 요한복음구절이 예사스럽게 읽히지 않는군요. 이 교회를 다닐지 저 교회를 다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입니다. 사실 요한복음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공동체입니다. 그 시대는 유대주의가 하나의 종교로 제도화되던 시기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신앙의 많은 소종파들을 배제했습니다. 그리스도파가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해서 그리스도파에 속한 사람들은 유대교에 남을지 그리스도파와 함께 이스라엘 종교에서 떠날지를 두고 정체성의 고민이 이만저만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또 그리스도파도 내적으로 빠르게 세력화되고 있었습니다. 이 종단이 정통인지 저 종단이 정통인지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지요. 이에 대해 요한복음공동체는 승천한 주께서 재림했는데, 그분의 재림은 비대면적 양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장한 것이 파라클레토스이지요. 우리말 성서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이 존재는 어느 파도 독점할 수 없는 의 형식을 지닌 분입니다. 그이가 이 종파도 저 종파도 아닌 그리스도인 각각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해서 아무도 보았고 만졌다고 주장할 수 없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하여 베드로도 바울도 야고보도 그 어떤 대단한 사도도 특별한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신자 각각은 내면에서 그분과 대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면성의 신앙이 권력화되었기 때문에 등장한 것입니다. 내가 신을 보았다느니 신의 소리를 들었다느니, 신이 보낸 사도들의 문서들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느니 하는 주장이 권력이 될 때, 요한복음저자는 신의 비대면성의 신학을 주장한 것입니다.

최근 드라마들 중에는 시간을 달리하는 이들 간의 교신을 소재로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공간을 달리하는 이와의 교신은 오늘날의 과학적 성과를 통해 얼마든지 가능해졌습니다. 최근에는 여러 명과 함께 화상으로 대화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고요. 우리의 예배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대화는, 아직 과학이 성공하지 못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들이 그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가령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시그널이라는 드라마는 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인데, 20년 전의 형사와 20년 후의 형사가 망가진 무전기로 대화를 합니다. 또 지금 방영되고 있는 카이로스라는 드라마든 1개월 전과 후의 사람이 휴대폰으로 하루에 단 한 번, 1033분에 교신을 합니다. 다른 방식의 시간의 대화를 다루는 드라마도 있습니다. 2016년에 방영된 도깨비나 작년에 방영됐던 호텔 델루나는 죽지 않는 존재, 그래서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와 죽는 존재, 곧 시간의 한계 속에 사는 존재 간의 대화를 다루는 드라마입니다. 이들 드라마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아직 이룩하지 못한 시간의 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예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스토리를 이어가는 드라마들도 있습니다. 2012년의 신의(神醫)인연왕후의 남자옥탑방 왕세자, 2014년의 신의 선물142017년의 고백부부, 2018년의 아는 와이프, 올해 방영된 엘리스등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모든 드라마들에는 현실이든 과거든 부조리함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 부조리함은 권력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이루어낸 어떤 커뮤니케이션 장치로도 해소되지 않는 부조리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죽었고 다른 누군가는 그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들은 그런 일조차 알지 못합니다. 물론 그것은 과학 때문이 아니라 과학을 지배하는 권력 때문입니다. 이때 드라마들은 권력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세계, 그 안에서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대면적 세계의 질서와는 다른 시간의 존재와 소통하는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도모합니다.

다시 처음 애기로 돌아가 봅시다. 코로나 시대 많은 교회는 대면예배를 중단하거나 제한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들의 출석률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교회의 모습은 더욱 절망스럽습니다. 예배를 강행하면서 중소감염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때로는 대감염의 슈퍼감염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치명적인 감염증으로 사회 전체가 붕괴 위기에 있고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 아래 겨우겨우 삶을 지탱하고 있는데, 교회는 고통을 함께 하려는 어떤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람들 간의 증오를 부추기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교회는 혐오의 장소가 되어 가고 있었고, 많은 신자들도 교회를 사실상 떠나고 있었습니다. 대면예배 중단 이전에도 신자들의 이탈은 심각했던 것입니다. 2000년부터 본격화된 신천지로의 이탈도 그런 예의 하나였습니다. 거리의 개신교 극우주의가 소란을 피우선 2018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신자들은 23%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바꾸려는 노력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 더 화려하고 더 소란스럽게 교회를 보이게 하려는 데 집착했습니다. 화려한 사랑의교회와 소란스러운 거리의 극우개신교도들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밖의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서로 경쟁적으로 더 힘이 센 교회를 만들고 그런 힘을 시사하는 스펙 만들기에 집착하는 그리스도파들을 보면서, 이 교회도 저 교회 아닌, 영으로 예배하는 세상을 증언했던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말하지 않으면 돌들이 증언할 것이라는 루가복음19,40의 말씀처럼 목사들이, 신학자들이 말하지 않자 코로나가 엄습했던 것은 아닐까. , 이런 해석은 너무나 위험한 주장입니다. 신이 잘 나가던 한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무수한 이들의 희생을 감수했다고 말한 욥기식의 섣부른 신학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코로나19 사태는 권력화된 교회의 추한 모습을 가리고 있던 색바랜 베일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갈가리 찢어놓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신자들의 다수는 교회를 떠나 유랑길에 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보여주었고 들려주었던 것, 그런 신앙과는 다른 것을 알고자 여러 방식으로 교신을 시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백은 그들에게 어떤 내용과 형식의 교신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게속 해왔지만 지금은 더욱 더 힘을 기울일 때가 온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