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길교회 2020 12 06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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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요한복음〉 4,21)
지금 시각은 새벽 3시53분입니다. 날짜는 12월3일, 목요일이고요. 아마도 여러분이 이 녹음을 청취할 때는 12월6일, 주일예배 때이겠지요. 그러면 시간은 오전 11시 몇분쯤 되겠군요. 어쩌면 그 날짜 그 시각이 아니라 다른 날 다른 시각에 청취하는 이도 있겠군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교는 같은 시간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나눌 때 참석자들이 공유하는 이야기였는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파일을 통해 참여하는 이는 예외적인 참여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그런 예배는 아득한 옛날 풍경 같이 느껴집니다.
요즘 한국 드라마를 보면 종종 시공간을 달리하는 이들이 서로 교신하는 것을 골격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2016년 제가 열렬히 시청했던 〈시그널〉이라는 드라마가 대표적입니다. 또 지금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카이로스〉도 시간대화를 골격으로 하고 있지요. 과거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교신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스토리가 펼쳐지는 드라마는 굉장히 많습니다. 2012년의 〈신의〉와 〈인연왕후의 남자〉와 〈옥탑방 왕세자〉, 2017년의 〈명불허전〉 등은 시간을 넘나드는 퓨전사극 드라마이고, 미스터리 사건을 파헤치는 2014년의 〈신의 선물―14일〉과 2018년의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그리고 올해 방영됐던 〈엘리스〉가 있습니다. 또 부부간의 사랑 회복 스토리를 다루는 2017년의 〈고백부부〉와 2018년의 〈아는 와이프〉도 있지요.
시간의 대화를 다르게 설정한 드라마도 있습니다. 죽지 않는 존재, 그래서 시간 속에 살지 않는 존재와 죽는 존재, 곧 시간 속에 사는 존재의 대화를 다루는 드라마입니다. 가령 2016년에 방영됐던 〈도깨비〉와 작년에 방영된 〈호텔 델루나〉가 대표적이지요.
제가 드라마를 좀 많이 보는 편입니다. 아무튼 최근 한국에서 시간의 대화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이렇게 많은데, 최근 우리는 시공간을 달리하는 예배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교신이지요.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드라마들의 특징은, 과거와 현재라는 다른 시간대를 사는 이들의 교신이든, 영원과 순간을 사는 존재들 사이의 교신이든, 그런 교신을 통해 서로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과거와 현재의 교신을 통해 과거 사건이 바뀌기도 하고 현재가 재구성되기도 합니다. 해서 교신은 수많은 현재와 과거를 만들어내지요. 그리고 영원을 사는 존재와 찰라를 사는 존재 사이의 대화도 두 당사자를 변화시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드라마들은 말 그대로 ‘교신’에 관한 것입니다. 서로 교신하면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사건이 달라지고 결국 다른 시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예배는 어떤가요? 많은 목사님들은 ‘설교’를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반면 기도는 신을 향해 드리는 간구로 해석했지요. 그러니까 예배의 기본 골격은 수직적인 교신입니다. 한쪽은 바뀔 수 없는 절대적 무엇이고 다른 쪽은 회개하라는 요구 앞에서 끝없는 갱신을 요구받는 존재의 만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해서 예배당은 위와 아래, 앞과 뒤 같은 이분법적 구도로 공간배치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익숙히 기억하고 있는 예배에는 거의 고정되다시피 한 순서들로 채워져 있고 그 안에서 무수한 반복적인 어구가 되풀이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에 대한 상징들로 예배는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각에 설교를 하는 저는 지금의 나가 아니라 과거의 사람인 나입니다. 물론 과거의 사람인 나는 새벽 골방에서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각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12월3일 새벽 3시53분부터 그 직후까지입니다. 휴대폰의 녹음어플을 켜고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는 저는, 보이지 않는 새길의 여러분들을 상상하면서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새길의 교인들을 상상하면서 이야기하는 동안 저는 조금씩 저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체험합니다.
요즘 국제바둑대회도 온라인 대국을 치룬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바둑계의 세계1인자가 한국기사인데, 그분의 이름은 최정입니다. 근데 얼마전 최정 9단이 무명의 중국신예기사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때 바둑 해설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신예기사가 언택트대국이 아니라 컨택트대국을 치뤘다면 이기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고요. 온라인을 통해 바둑을 두다보니 상대가 세계 1인자임에도 주눅들지 않고 바둑을 둘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세계 1위의 기사가 짓는 표정, 동작 하나하나가 신예기사에게는 엄청난 압박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근데 온라인대국은 그런 두려움을 없애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배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택트한 방식으로 수행되는 예배는, 그 수직적 구조, 무한반복되는 영원성의 메시지에 빨려들지 않는 신자들을 탄생시키게 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이 해석의 주체가 되는 것이지요. 설교자나 성서 본문이나 예배의 반복적 어구가 영원성이라는 무게를 가지고 신자들을 내리 누르고자 해도 그것에 순순히 동화되지 않는 자존적인 신자가 등장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사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경부터 교회는 이미지가 급격히 추락하게 됩니다. 이는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때부터 교회는 실망한 신자들로 들끓게 되고, 그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열정을 다했던 교회를 떠나서 떠돌이 생활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실망신자의 떠돌이화’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다른 일각에서는 ‘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이런 관심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주목할 만한 점이었습니다. 왜냐면 신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교회를 그 인너써클 멤버십이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해석해왔는데, 가나안 성도 연구는 떠난 이들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 성도 연구는 중요한 성과이기도 합니다.
한데 저는 가나안 성도 연구의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 연구가 이른바 서양의 세속화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론이란,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는 종교성이 약화되고 세속성이 강화되기 때문에 종교의 위기가 일상화된다는 주장입니다. 즉 사회가 발달할수록 종교는 그 힘을 잃어간다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서양 백인 중심주의적 시선을 전제로 합니다. 실제로 서양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사회의 발전이 종교성의 약화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서양사회도 교회는 평소 신자들이 격감해서 예배당이 텅 비어 있지만, 이른바 포스트모던 신종교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성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예배 대신에 명상이나 요가 수행을 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아시아적 종교성을 수입한 포스트모던 신종교 현상이 서양에서 재해석되면서 새로운 영성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해서 기성종교는 위기를 맞았지만 신종교적 종교성은 서양에서도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이른바 유사종교적 행위들이 크게 활발해졌습니다. 팬덤 현상이나 한국의 촛불과 태극기 현상은 유사종교성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서 세속화론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 틀린 문제설정입니다.
게다가 가나안 성도 연구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 종교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해석하는 데 결정적 문제가 있습니다. 실은 실망에 찬 나머지 교회를 떠나 떠도는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은 더 열렬히 종교적 고민을 하면서 독서도 하고 공부도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난 이후 종교성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더 열렬한 종교적 질문으로 가득한 이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해서 저는 ‘가나안 성도’ 담론이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을 탈종교적이라고 보고 있는 한, 그 논의는 한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얘기가 곁가지로 흘렀네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떠돌이 신자들은 목사들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자존성 없는 신자가 아니라 자존성이 강화되는 종교인이 되는 중요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매우 성숙한 종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퇴행적 종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 태극기집회에 나오는 할아버지들처럼 교회에서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강성배타주의적 신자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들 모두는 해석의 주체가 된 이들입니다. 해서 저는 그런 현상을 ‘떠돌이 신자의 주권신자화’라고 부른바 있습니다.
아무튼 신자들의 떠돌이 체험은 신자들의 주체화를 더 강화시켰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언택트 시대에 비대면예배 현상은 어떨가요? 분명 신자들의 떠돌이 현상이 강화될 것이고, 그들의 종교적 주권도 더 강화될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언택트한 예배는 교회가 아무리 전통적인 수직적이고 반복어구로 가득한 예배를 수행하더라도, 세계 1위인 최정에게 주눅 들지 않은 무명의 중국기사처럼, 교회의 수직적으로 경직된 종교성에 휘말리지 않는 신자들이 많아지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해서 제가 오늘 말씀 나누고 싶은 것은, ‘언택트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숙한 주권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일독을 하겠다느니 하는, 독서가 될 수 없는 성서 읽기를 하는 이가 아니라 해석하는 자로서 성서를 읽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설교를 듣는 이가 아니라 설교를 듣고 해석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해석하는 자이면서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서 읽기에 관해서 한 가지 예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제가 최근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에게 딸이 나 밥 안 먹어”라고 말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말을 해석할 수 있을가요? 삼지선다 문제로 합시다. 1번, 입시에 지친 나머지 짜증 나 있던 딸이 엄마가 밥 먹어라 하자 순간 화가 치밀어서 ‘안 먹어!’라고 말했다, 2번 다이어트 중인 딸에게 엄마가 밥 먹어라라고 말하자 짜증이나서 안 먹어라고 말한 것이다, 3번 연기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던 딸이 엄마와 연기 대사를 맞추고 있었다, 이중 정답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느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나요?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렇게 물으니까 한 사람이 답은 4번입니다,라고 말했어요. 또 다른 사람이 말했어요. 정답은 5번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 물음은 정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예요. 무수한 정답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밥 먹어’, ‘안 먹어’라는 엄마와 딸의 대화만으로는 우리는 아무런 해석도 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 물음을 해석하려면 그 전무맥락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로 들어가 보면, 〈로마서〉 1,27에서 바울은 ‘그 남자들이 순리에 따르지 않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은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은 얼핏 동성애 반대 구절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문맥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그 구절만 따로 떼어내어 읽는 것은 아무런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그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살피지 않고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읽기 위해 문학적, 역사문화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해석은 해석자들이 자신이 직간접으로 겪은 것을 해석에 개입시키면서 수행됩니다. 그런 성서 읽기가 필요합니다. 성서에 대한 문학적, 역사문화적 연구를 소개하는 이, 그 성서 구절을 읽는 데 연결될 수 있는 영화 애기를 하는 이, 소설을 이야기하는 이,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 등등이 함께 성서를 대화하면서 읽을 때 그 성서 구절은 더 훌륭하게 독서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를 독서 가능한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떠돌이 신자로서 주권신자가 되어가는 이들에게 걸맞는 예배의 모델은 지금과 같은 수직적이고 상투적인 말로 가득한, 해석의 여지라고는 별로 없는 예배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성서 읽기 모임 같은 게 새로운 예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 각자가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대화하는 마당에서 만들어내는 성서 읽기 모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예배가 되는 것, 그러는 가운데 성서를 읽고 실천하는 것을 고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언택트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더 많이 상상하고 더 새롭게 만들어내는 대화나눔의 마당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언택트 시대에 제가 제안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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