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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죽음 공간'에서 사는 자(2010 07 11)

한백교회 2010년 7월 11일에 있었던 하늘뜻나누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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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공간에서 사는 자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욥기」 7장 16절

 

또 한 명의 연예인이 자살했습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던, 이른바 한류스타였습니다. 곧바로 그의 죽음은 상품화됩니다. 그의 연기, 그의 노래,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의 말, 그의 몸, 그의 옷, 그와 얽혀 있는 온갖 것이 상품가치를 지녔던 시간은 이제 종료되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제거함으로써 더 이상 소비사회의 공간 속에 소비될 육체가 사라진 시간에도 그는, 그의 죽음은 상품이 되어 소비됩니다.

그 이틀 후(7월2일), 대학동창인 친구의 부친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친께서 안치된 장례식장에는 화환이 없었고, 같은 규격과 디자인, 같은 글꼴이 새겨진 깃발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고인의 대학동창들, 그가 활동했던 기관이나 회사, 고향 향우회, 자녀의 직장 등에서 보낸 깃발들입니다. 해서 깃발들을 보면 고인의 이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숫자가 많을수록 더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을 물론입니다.

한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깃발의 내용들은 자랑해도 될 만한 이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숫자는 고인의 성공 정도와 비례합니다. 그리고 깃발들의 위치도 서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컨대 깃발들은 장례식의 죽음의례의 공간적인 장치의 하나로서, 고인을 둘러싼 경제학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 죽음의 의례는 그이가 가진 상징자본의 효용가치를 전시함으로써 그이의 주변 사람들 간에 거래의 관계망을 구축합니다.

한편 신문 부음기사를 연구한 한 논문에 의하면, 부음기사는 모든 죽음을 공지하는 미디어적 공간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특정한 죽음들이 주로 기억됩니다. 여성보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사회적 권력을 상징하는 특정대학과 특정 직업, 특정 출신지역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부음기사로 표상되는 죽음의 기억 양식은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일종의 경제적 지표인 것입니다.

어쩌면 저 자살한 연예인은 이러한 치밀한 경제의 망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발적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를 둘러싼 경제학은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상품화하였고, 이렇게 존재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씩 상품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따라 그를 둘러싼 거래 관계에서 벗어난 자신은 삭제되어야 했습니다. 존재의 자유를 상실한 자, 그런 이를 ‘노예’라고 부릅니다. 대중스타가 될수록 그는 더욱 더 자본의 긴박된 노예로 전락해야 했습니다.

삶의 공간에서 그는 노예와 같다는 자의식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아팠습니다. 몸이 아팠고 정신이 아팠습니다. 완벽한 외모, 완벽한 육체로 상품화된 그의 몸이, 정신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런 상태를 누구에게 얘기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상품이 되어간다는 것은 그의 인간관계가 상품으로서의 그와 무관하게 엮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서 그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이들 누구도 타인에게 그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몸이, 정신이 아팠지만, 완벽한 몸과 정신을 가진 대중스타로서 기억될 뿐입니다.

그가 죽은 뒤 한 측근이 그가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완벽한 상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우울증은 병력(病歷)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팠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거나 갔더라도 기록되지 않는 치료를 받았겠지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의 유대 자치구에서 널리 회자되던 문학작품인 「욥기」에서 주인공 ‘욥’은 오래전부터 회자되던 전설적인 의인의 이름입니다. 전설상의 그는 부자였고 인격자였으며 하느님 앞에서 올곧은 의인이었습니다. 곧 그이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의 롤 모델로서 기억되었던 상징적 존재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동일시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자신을 기획했고, 필경 살아 있는 욥임을 자처한 사람들과 그들 주위의 관계망이 그 사회의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에서 욥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점에서 최악의 지점으로 추락한 자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하느님과 천사 사탄이 벌인 내기의 희생자입니다.

하여 소설의 그는 유래 없는 번영을 구가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에 느닷없는 절망의 나락에 내던져진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당대의 존경받던 현자들은 모든 실패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의 욥은 바로 이런 지혜의 가르침과는 다른 실패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하루아침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욥은 지옥 같은 삶을, 희망이라곤 흔적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을 매일 겪으며 살아야 합니다. 몸과 정신이 갈가리 찢겨져 나갔습니다. 잠을 자려 해도 잠이 들 수 없습니다. 악몽이 그를 사로잡았고, 한줌의 안주할 영혼의 땅도 헤집어 버렸습니다.

‘아,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다. 이렇게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이제 사는 것이 지겹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다가와 다구칩니다. 잘못을 뉘우쳐야 회생할 수 있다고, 속히 하느님의 길로 되돌아오라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비아냥대기도 합니다. 재산만 믿고 교만하게 굴다가 저렇게 된 것 아니냐고, 언제까지 있는 척할 수 있겠느냐고...... 그것 보라고, 재산을 거둬가 버리니 금새 저렇게 하느님을 저버리는 말을 지껄이고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는 탄식하듯 소리칩니다.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둬. 그냥 이러다 죽어버리게 말이야. 아니 지금 바로 죽어버리고 싶다고.’

불경하게도 자살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준 생명을 감히 끊어버리겠다고, 참담한 말을 지껄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이란 생각한다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망 상황에서 넋두리처럼 말한다고 자기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실행에 옮기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실패로 귀결되곤 합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자살은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 사이의 거리가 급격하게 와해되는 순간 실행됩니다. 죽음의 공간이 더 이상 먼 곳에 있지 않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순간 자살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개의 사람들은 우울증이나 약물에 의한 환각에 빠질 때 그런 순간을 체감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타인의 극한적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내재화할 때 그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소설의 욥이 그런 자살 충동에 사로잡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소설에서 그는 자살하지 않았으니, 그런 충동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다고 억지 추정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본문에서 보듯 욥은 ‘삶의 공간’을 저주하며, 차라기 죽기를 바라는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니고, 살아 갈 것에 대한 욕망도 기대도 없습니다. 그는 마치 무덤가를 배회하는 거라사의 광인처럼, ‘죽음 공간’에서 사는 자입니다.

다시 자살한 그 연예인 얘기로 돌아갑니다. 그는 많은 것을 얻은 행운아이지만,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처럼, 성공을 대가로 자기 존재를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해서 그는 죽음 같은 존재가 되고, 그로 인한 병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파서, 너무나 아파서, 마지막까지 인습적 질서와 논쟁하고 있던 욥과는 달리,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몸이, 정신이 붕괴되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또 다른 자기를 체험합니다. 죽음 충동입니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자발적 자기 파괴는, 유서도 남길 여유도 없이 죽음의 공간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난 돌이킬 수 없는 일탈 행위는, 소비사회의 상품으로 전락한 몸들에 대한 경고의 몸짓일지도 모릅니다. 육체가 상품이 됨으로써 점점 자아 파괴를 체감하고, 서서히 죽음의 공간 속으로 스스로를 유폐시켜 가는 이들에게, 곧 죽음 공간에서 사는 모든 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 해지를 권고하는 예언자의 메시지로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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