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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적의 밥

한백교회의 하늘뜻나누기(2010.08.01)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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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밥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다니엘서18

 

 

시리아 북단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는 사람들과 한 상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인데, 놀랍게도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귀화한 이방인들이 다수 포함된 공동체였다. 당시 유대교 회당은 물론이고 1세기 말까지의 예수 공동체에서 이런 풍경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주의 친형제인 야고보 파 사람들이 방문한다.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다. 헬라계 회당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유대 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급진파 헬라주의자들이 반란 모의죄로 처형된 예수를 들먹이며 성전과 민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회당 군중이 그들을 집단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지도자 스테파누스가 돌팔매 처형을 당했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도주함으로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때 도주한 일부 헬라파 유대인들이 안티오키아로 왔고, 이곳에서 다른 예수 추종자들과 연대하여 예수의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주민들은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에 은거하며 조심스레 모임을 지속해왔던 다른 예수파 집단들은 이 사건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예수의 추종자라는 사실이 정부는 물론이고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시절에, 자신의 신앙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을지를 암암리에 모색하던 중에 발생한 일이다. 그러던 차에 헬라계 회당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유대 종족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성전에 대한 비판은 신중한 행보가 아니라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는 각각의 소그룹들이 보다 큰 예수공동체로 네트워크되어 가던 중이었다. 다른 집단들과의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일종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는 리더의 형성과정이기도 하다. 이 네트워크 공동체의 중심에는 주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주의 형제인 야고보 등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로 예수의 친형제인 야고보와 그와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가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베드로 등은 그 위상이 제2격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는 여성 제자그룹과 기층민중그룹인 오클로스 출신 제자들이 이탈하였다. 필경 헬라파 회당에서 발생한 사건도 이러한 지도력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 유대주의적이고 더 성전적 믿음에 충실한 이들이 중심에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난 뒤,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불리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소문이 들린다. 과거 예루살렘에서 도주한 급진 헬라파 인사들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전해졌다. 야고보가 이끄는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는 안티오키아의 이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헬라주의자들이 이방인을 함부로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 더욱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이 볼 때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이었다. 하여 베드로가 이 공동체로 파견된 것에는 바로 이러한 사명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베드로는 이방인 귀하자들과 한 상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야고보파 인사들이 당도했고, 난처해진 그는 얼른 자리를 피합니다. 이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는 곧바로 싸늘하게 식어버립니다. 공동체는 갈등에 휩싸였고, 베드로와 바울은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불거져 나온 식사 금기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예수파가 회당에서 축출됨으로써 이 식사 논쟁은 일단락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전통인 이방인과의 식사 금기에서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하여 야고보로 대표되는 유대주의자들은 훗날 역사의 반동적 세력으로 기억됩니다. 더욱이 이 기억은 와전되어 수구주의자 혹은 보수파의 상징으로 낙인찍히게 합니다. 하지만 실은 야고보파는 정치적으로 강경한 반로마주의 세력이었습니다. 당시 반로마를 선택한 급진 유대주의자들은 거반 이방인과의 식사 문제에서 이와 같이 강한 배타주의를 선호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 사회에서 뿌리 깊게 형성된 신앙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1장 배후에 놓인 시간은 바로 이러한 신앙 전통이 형성되던 때였습니다. 이 문서의 줄거리를 보면, 유대를 패망시킨 바빌로니아 제국의 황제 느브갓네살의 환관으로 선별된 네 명의 유대인 청년들은 훈련기간에 황제가 하사한 음식을 먹지 않고, 부정 타지 않은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주장들이 토비트서, 유딧서」 「희년서, 마카베오서, 다니엘서와 비슷한 시기(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3~2세기)에 저작된 책들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책들이 다루는 내용에 읽힌 시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문서들에서 이방인들의 음식과 유대인의 음식을 나누고,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덕목으로 얘기하는 전통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이 시기는 지중해 사회에서 문자 혁명이 일어난 시기입니다. 많은 문서들이 양산되었고, 그것을 필사하는 서기관 계층이 폭넓게 등장한 시기입니다. 또한 이 시기는 귀족도 아니고 양민도 아닌 계층, 노동에서 상당한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된 계층이 폭넓게 등장하던 그 시기입니다. 바로 이들에게서 이른바 서기관 계층이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이 시기에 지중해 사회는 빈부격차가 크게 나뉘었습니다. 대지주들이 여기저기에 땅을 병합하고, 그 땅을 관리인에게 맡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그밖에도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많은 토호들이 도시로 몰려가 살던 때입니다.

하여 많은 촌락에는 토호들이 사라졌고, 그 빈 곳에 이들 서기관 계층이 지도력을 대체하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요컨대 이들 소자산가 계층은 헬레니즘 시대 대중적 사회 통합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통합의 중요한 매체 역할을 한 것이 종교였음을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바로 이들이 중심이 되는 종교운동을 반영하는 책들이 앞서 언급했던 다니엘서, 토비트서, 희년서, 마카베오서입니다. 그리고 그 책들에 등장하는 공통된 요소의 하나는 음식 금기 같은 것입니다. 이방인의 것을 거부하는 전통을 더 급진화하여 먹거기 같이 일상적인 것까지도 엄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적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적의 것을 먹지는 않겠다는 비타협적 태도입니다. 이러한 비타협적 태도를 먹거리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지중해 지역 일대와 유대사회에는 일상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내면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주목되기 시작합니다. 주로 지혜문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인식입니다. 그것은 악이 내면으로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 마치 적이 우리의 강토 안으로 쳐들어와 지배하듯이, 의인화된 존재로 우리 몸 안으로 쳐들어와 지배한다는 상상입니다. 바로 악마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악마가 몸 안으로 들어와 존재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는 바로 음식입니다. 몸 안으로 들어와 몸을 부정타게 하는 것, 바로 악마의 몸으로 변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음식 금기를 일상화하는 신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적의 음식에 대한 금기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적이 준 음식을 거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모두 밖에서 들어온 것이 내면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문자의 혁명은 문자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이렇게 내면의 문제를 중요한 종교적 요소로 변모시킵니다.

이러한 적의 밥에 대한 공포와 저항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신앙의 견고한 틀로 정착하게 됩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던 음식 금기 논쟁은 비유대지역에서도 강력한 유대주의적 신앙의 내용으로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의 사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원리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이지요.

야고보파는 이러한 전통에 충실하였던 것입니다. 원리주의에 대한 철저함은 그들로 하여금 반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영을 북돋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원리주의적 신앙이 종종 열정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정신적 배후인 것은 이러한 맥락과 궤를 같이 합니다.

한데 원리에 대한 충실함은 종종 현장을 고려하는 눈을 흐리게 합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비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방인들, 곧 유대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러한 인식의 틀을 마치 법처럼 내면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현장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신격화된 통치자를 기리는 제의 때 배급되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만성화된 영향실조 상황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은 많이들 그렇게 했습니다. 이때 법은 그이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굴레로 작동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음식 금기 신앙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신학이 됩니다. 야고보 파가 주도하는 운동에 오클로스 파나 여성 제자들이 이탈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탈현장적 원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반영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장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신앙, 원리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신앙은 타인을 옥죄고 괴롭힌다는 점에서 잘못된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