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당시로선 꽤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우리 안의 파시즘]에 글 하나를 실었다. 그 덕에 나는 '내면의 파시즘' 그룹으로 분류되었고, 핫한 계간잡지였던 [당대비평]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나름 할 게 많았던 시절이다.
그리고 작년, 임지현 선생으로부터 우리안의 파시즘 2.0 계획에 저자로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조금 겁나서 다른 이에게 떠넘기려 했는데, 결국 내가 했다. 그때 만큼 치열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너무 시들시들해진 글쟁이가 된 탓이겠다. 암튼 고육지책으로 완성했다.
책은 제법 반응이 좋다. 나는 시들어가도 독서문화는 아직 생기가 있나보다. 글을 여기에 실을 수는 없어, 첫번째 소절 전문과 이어지는 소절의 제목만 옮긴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5827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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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그 퇴행적 대중의 출현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을 중심으로
파시즘과 정치종교
1938년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이 유럽의 후발 국민국가 중 일부가 파시즘적 정치체제로 귀결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정치종교’(politische Religion)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파시즘 체제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 지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대중은 적에 대한 증오를 가득 품은 민족주의적 구원신화에 환호한 것인데, 이는 종교적 종말론의 세속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종교와 정치의 불온한 만남을 그는 정치종교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데 그런 대중은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다.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는 ‘짝퉁’ 귀족예술인 통속예술이 매스미디어와 만나면서 대중예술로 전화되면서 이 새로운 예술양식의 소비자인 대중이 탄생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대중예술의 구경꾼들이다. 조나단 크래리(Jonathan Crary)는 이런 구경꾼(observer)의 체험에서 대중이 역사적 주체로 전화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의하면 그 구경꾼은 ‘배회하는 자’(flaneur)다. 파리의 아케이드를 배회하는 자, 이 거대도시의 이 판타지적 자극들에 노출되어 신경증적 불안을 내재한, 분열적 존재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러한 신경증적 대중이 그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과 얽히면서 계급의식이 약화되고 특정 정당이나 노조에 무관심한, 원자화된 개인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상주의적 유토피아, 그런 추상적 비전에 헌신하는 심리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대중의 심리상태가 민족주의적 구원신화를 유포하는 파시스트의 주장에 열광하는 정치적 대중으로 재탄생하는 토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데 이들 대중을 선동한 파시스트적 구원신화는 가공할 적에 대한 공포와 결합되어 있다. 대중이 겪고 있는 이 모든 질곡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농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구원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적 존재가 이끄는 정치연합의 열렬한 수행자가 되라고 한다. 법학자이자 나치즘적 정치신학 주창자인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데살로니카후서〉 2,7의 ‘무법자’(아노모스, ανομος)인 준동을 ‘억제하는 자’(카테콘, κατεχον)가 바로 그 영웅이라고 말한다. 결국 나치당과 그 지도자 히틀러는 카테콘이라는 애기다. 저 종말의 시간이 도래하기 전, 모든 것이 결단 나는 그 단절의 시간 전까지, 이 잠재적 시간에 대중을 적그리스도로부터 보호하는 자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정치종교는 무정형적 대중이 정치적 대중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다루는 하나의 정치신학적 해석체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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