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전남 5개 노회가 주관한 심포지엄 '5.18과 기장 교회 - 기장 교회의 민중항쟁 참여와 그 신학적 의미 고찰'이 코로나19로 인해 몇 차례 연기되다가 지난 9월14일(월)에 온라인 심포로 열렸다.
발표된 글과 발표자는 다음과 같다.
제1발표: 5.18민중항쟁과 기장 교회의 참여 - 광주・전남지역 교회 중심의 역사적 고찰(김희헌. 향린교회 목사)
제2발표: 5.18광주민중항쟁과 기장 교회, 그 영향과 전망(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제3발표: '언더클래스'에게 말을 허하라 - '5.18사건' 해석의 두 키워드와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김희헌, 최형묵의 글 속에는 기장 교회의 주보, 회의록 등에서 새로 발굴된 자료들이 사용되었다. 이 심포의 주최측은 너무 늦었지만 기장의 5.18신학을 만드는 데 초석이 되고자 하려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했던 심포지엄 영상은 곧 기장 총회 게시판에 공개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발표된 글은 [기장회보](2020.08.27)의 별책부록에 게재될 예정이다.
추회측에 허락을 받아서 여기에 나의 글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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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클래스’에게 말을 허하라
‘5.18사건’ 해석의 두 키워드(데모스 v.s.오클로스)와 위기의 한국민주주의
‘말할 수 없는 자들이 타인(데모스)의 말로 말하다’
―5.18사건의 절대공동체와 언더클래스 ‘시민군’
정치학자 최정운의 《오월의 사회과학》(1999)은 ‘5.18광주사건’ 연구에서 가장 빛나는 사회과학적 성과로 꼽힌다. 여기서 그는 사실 규명 중심의 차가운 사회과학 대신에, 광주시민들의 경험과 꿈을 감정이입하면서 거기에 이론의 옷을 입히는, 감정이 살아 숨쉬는 새로운 사회과학을 제안한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으로 표현된 ‘오월의 사회과학’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과학적 연구를 통해 그가 주장하는 핵심 논지는 그때 거기에서는 ‘절대공동체’(the absolute community)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1980년 5월20일에 절대공동체가 “꿈 같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력 앞에 거의 모든 광주의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공포를 이겨내고 저항의 공동체로 결속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공동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단순한 항쟁공동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재산도 계급도 성(性)도, 이제까지 사람들을 구별짓고 차별을 작동시켰던 요소들이 무의미해지는 평등공동체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자 김상봉은 그 연대를 ‘밥・피・총의 연대’라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세력에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서로주체성의 현실태’, ‘씨ᄋᆞᆯ들의 뜻으로 된 나라(이념형)가 현실 속에 강림한 사건’이라고 절대공동체를 자신의 언어로 부연한다.
한데 최정운은 5월20일에 일어난 저 기적적인 사건은 그 이튿날부터 내적 와해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시민군’과 시민 사이의 계급적 이질감이 갈등으로 이어졌고, 저항공동체의 현장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공동체로부터 떼어내려는 가족주의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해서 공동체 외적 요인인 국가폭력에 의해 광주항쟁이 종식됨으로써 절대공동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28일 이전에, 그러니까 21일부터 28일까지는 절대공동체가 ‘내적’으로 변질되어 해체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반면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을 수용, 재해석한 이들은, 20일의 공동체만을 주목했던 최정운과는 달리, 폭력의 절대적 가해자인 국가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기 전까지 광주는 계속 ‘절대공동체’ 상태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내적인 분열 요소에 대한 논점을 생략하고 외적인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이상적 연대체로서의 ‘절대공동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5.18 정신의 요체’라는 주장이다. 김상봉 교수가 말한 ‘밥・피・총의 연대’가 그렇고,1)3 사회학자 심영희 교수의 ‘고통받는 광주’에서 ‘저항하는 광주’로 그리고 ‘공동체 광주’로 전환되어가는 1980년 5월의 ‘탈바꿈(Verwandlung, transformation)의 프레임’이 그렇다.2) 그리고 가톨릭 신학자 김인국 신부는 예수가 설파한 ‘하느님나라의 계시적 구현체’로서 ‘5.18광주’ 사건을 특화시키고 있는데, 이 주장 역시 절대공동체는 외적인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존엄한 항쟁공동체라는 점에 방점이 찍힌 해석이다.3)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의 성명서 〈5.18 광주민중항쟁 20주년을 맞이하여〉(2000.05.15.)도4) ‘1980년 5월 사건’을 절대공동체로 규정한다. 그것은 하느님나라의 범례적 구현체다. 특기할 것은 이 성명서는 ‘5.18사건’을 협의의 ‘광주’뿐 아니라 목포, 신안, 진도, 함평, 무안, 해남을 포함한 ‘광의의 광주’로 보고 있다. 즉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를,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여 ‘광역의 광주’ 관점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문제’를 사회과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느냐에 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절대공동체론은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멋진 해석이 될 수는 있어도 이론적으로는 약점을 해소할 수 없게 된다. 강인철의 연구는 바로 이런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는 인류학자 터너 부부(Victor Witter Turner & Edith Turner)의 ‘리미널리티’(liminality)와 ‘커뮤니타스’(communitas) 개념을 끌어와 감정 문제에 관한 이론적 보완을 시도하였다.5) 그것을 통해서 광주시민들이 절대공동체를 구현해내는 초월의 체험에 대해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인철의 분석도, 최정운을 재해석했던 다른 연구자들처럼, 절대공동체의 내적 위기를 읽어내려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회학자 김명희는 한국의 감정인문학 연구자들이 발명한 ‘공감장’(共感場, sympathetic field) 개념을 활용하여6) 5.18사건 당시 광주시민들의 ‘감정동학’(emotional dynamics)을 해석하였다.7) 그는 이 연구에서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에 대해 어떠한 명시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최정운의 ‘오월의 사회과학’이 일종의 ‘감정 사회학’적 문제설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20년 가까이 지나서 저술된 김명희의 연구를 위한 징검돌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땐 사회과학에서 감정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낯선 것이었지만, 오늘에는 감정이 중요한 사회과학적 주제의 하나로 부상했으니, 명시적으로 참조했든 아니든, 최정운의 텍스트는 감정 연구자에겐 중요한 전거(referance)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이 5.18사건 당시 가공할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초월한 항쟁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전통적 공동체의 인습적 차별주의까지도 초월하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지만, 그런 감정적 결속이 어떻게 작동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와해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논리적 추론에만 의존하고 있다. 반면 김명희는 공감장이 어떻게 형성되고 해체되는지에 관한 감정동학을 담론(discourses)과 기구들(apparatuses)의 작동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최정운의 이론의 공백을 보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김명희의 연구는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의 인식론적 한계도 보충하고 있다. 말했듯이 최정운은 1980년 5월20일에 구현된 공동체적 사건을 절대공동체의 결정체로 해석한다. 이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그가 ‘5.18광주사건’을 ‘특권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5월20일의 사건을 특권화하여 그날의 절대공동체를 오염되어서는 안 되는 ‘순정체’라고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반면 김명희는 1980년 5.18사건 당시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공동체적 사건과 2014년 4.16참사에 대한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공동체적 사건이 어떻게 서로 연동되면서 공감장을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하여 ‘4.16담론’ 속에 ‘5.18의 기억’이 소환되고, ‘5.18담론’ 속에 ‘4.16의 기억’이 소환된다. 그리하여 ‘4.16의 공감장’과 ‘5.18의 공감장’에서는 시공간을 달리하는 두 공동체적 체험’이 서로 교차하면서 엮이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변화해서는 안 되는 순정체’에 집착하는 도그마적 인식론을 넘어선다.
하지만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을 수용・발전시켰던 여러 연구자들은, 그가 그것의 내적인 해체요인을 읽어내려 했던 것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가폭력의 가해자인 ‘나쁜 권력’과 희생자인 ‘국민’8)을 대비시키는 이원도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때 희생자인 ‘국민’이 희생자로만 남아 있지 않고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여 맞서는 항쟁공동체가 되었다. 한데 이 항쟁공동체는 모든 차별을 해소하는 평등공동체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절대공동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절대공동체의 적은 늘 ‘외부’에 있다는 점이다.
한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우리가 경험해온 것에 의하면, 국가가 종종 폭력의 가해자였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국민 혹은 시민도 가해자의 역할을 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즉 국민 대 비국민, 시민 대 비시민, 성다수자 대 성소수자, 계급(class) 대 하위계급(underclass) 등, 사회 각 범주 간의 차별과 배제, 그리고 폭력이 무수히 발생해왔다. 그렇다면 5.18광주사건에서 절대공동체론 계보의 여러 주장들은, 부당한 국가를 문제시하는 데 유용하지만, 부당한 사회적 차별을 사유하는 데는 별다른 통찰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근데 최정운은 절대공동체의 적은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의 절대공동체론은 내적 차별을 사유하는 전향적 안목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도 다른 연구자들의 한계를 빗겨가지 못했다.
그는 21일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에 대항하여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하는 사건을 주목한다. 이제 5.18광주사건의 절대공동체는 ‘총을 잡은 사람들’과 ‘총을 잡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는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증언록에 의하면 ‘시민군’ 중에는 공사장 인부, 구두닦이, 넝마주의, 술집웨이터, 부랑아, 날품팔이 등 언더클래스들이 굉장히 많았다.9) 요컨대 ‘시민군’과 시민 사이의 투쟁을 둘러싼 차이와 갈등이 (절대공동체 이전의) 전통적 공동체에서 내재해 있던 사회적 차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그는 직시하고 있었다.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에 깊은 공감을 표하면서 그것을 신학적이고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김상봉은 이 대목에서 ‘총의 공동체’라는 은유를 통해 “시민공동체는 자기들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노예화하려고 하는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해서 더불어 싸운 공동체, 전사들의 공동체였다”고 주장함으로써, 광주의 항쟁공동체가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잘 결속되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반면 최정운은 그런 잘 결속된 듯한 외양과는 달리 여기서 균열의 징후를 읽고 있다.
한데 최정운은 일단의 대중이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게 되면서 5.18광주사건의 절대공동체가 ‘국가’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독특한 주장을 편다. 문제는 현대의 무정부주의론에 기반을 둔 그의 분석에서 주로 ‘언더클래스’가 무장하여 ‘시민군’이 되었다는 점, 그것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언더클래스라는 용어는, 칼 맑스가 정의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는 달리, 계급적 자의식으로 무장한 ‘주체가 될 수 없는 자’, 즉 ‘계급적 주체가 될 수 없는 계급’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언더클래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연관된 소제들은 알콜중독, 마약중독, 가정폭력, 범죄율, 무능력 등이다.
더구나 광주 같은 오래된 지방도시에서 언더클래스는 온 동네 사람들로부터 천대받는 대상이었다. 어른들은 자녀들이 공부하지 않을 때마다 그렇게 살면 아무개처럼 된다는 말을 수없이 자녀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무능력의 상징이었고 게으름의 표상이었으며 부도덕하고 불량한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자였다. 그런 언더클래스는 불완전 노동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건달처럼 아무 할 일 없이 지내야 했다. 당연히 그들은 가난했고, 그 현실에서 벗어날 가망도 거의 없었다.
그런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민주주의의 논리가 그들을 어떻게 포용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도난당한 이들 자신에게 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적인 추상적 기표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증언록에 의하면 그들은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배가 불러서’ 저러고 있다고 생각했다.10)
그런데 대학생들이 군인들로부터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칼에 찔리고 총탄 세레를 받는 것을 보면서, 이들 언더클래스들은 저들이 자신들이 함께 해야 할 이웃임을 불연듯 느꼈다.11) 하여 ‘욱’하는 마음으로 군인들을 막아섰다.12) 그러자 그들도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평생 처음 들어본 칭찬이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섰고 총을 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계엄군과 일전을 벌였다. 칭찬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점점 더 고무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가장 적극적인 주역이 되어갔다. 어떤 시민들보다 더 적극적인, ‘악에 맞서는 전사’가 된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에서 희생하는 자이어야 존재할 가치를 인정받았던, 아니 때로는 그래도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학대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가난한 저학력의 중년 여성들이 교회에서 방언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새로운 ‘비언어적 언어’, ‘일상의 언어질서 밖의 언어’로 무장하게 되었을 때 그이들은 갑자기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나아가 은사자로서 받들여지곤 했다. 그것이 그들, 언더클래스 여성들을 주체화시켰다. 한데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때 그들을 둘러싼 배제와 모멸의 언어들이 그들을 다시 속박했다. 하여 많은 방언하는 여성들은 그 비일상적 언어 세계 안에서 악과 전쟁을 벌이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비슷한 일이 5.18광주사건에서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때 거기의 언더클래스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섰고 점점 더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그리고는 가장 비일상적인 무기인 총을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그들은 일상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총을 버릴 수 없는 이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언더클래스가 계엄군과 맞선 것은 절대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주권의식이 발현된 결과일까. 어쩌면 절대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전사’가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관심도 아니었던 의제를 위해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싸우는 전사로 말이다. 그렇다면 언더클래스인 ‘시민군’은 시민이 되기 위해 무장한 것인지도 모른다.13)
그 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 광주 곳곳에 세워진 조형물들을 보면 항쟁의 전사들은 거의 대부분 ‘젊은 근육질의 남자’로 표상되었다. 그 근육질의 젊은 남자 표상이 총을 든 언더클래스를 시민사회가 소비하는 주된 방식이다. 즉 그들은 누가 보아도 용맹스런 전사여야 했다. 그런 이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시민이 된다. 세계의 질서 속에서 결코 승리하는 전사로 살아갈 수 없는 ‘루저’들인 언더클래스는 세계 속에서 힘을 뽐낼 수 있는 근육질의 주역일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시민이 될 수 없다. 살아서는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그들 다수는 목숨을 걸고 계엄군과 맞서는 가장 적극적 주역이 되었다.
그런데 5.18담론은 그들 개개인을 기억할까. 그들이 어떤 집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과정에서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들의 바이오그래피(biography)를, 그들의 사회전기를 사람들은 관심이 있을까. 도청을 사수하다 죽임당한, 윤상원을 제외한 16인의 사회전기를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어쩌면 그런 사회적 망각은 시민사회의 묵시적 합의가 아닐까. 언더클래스가 시민이 되고 나아가 열사가 될 때 그들의 바이오그래피는 은폐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정리하자면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론은 계급도 성도 신분도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는 공동체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가 상상하는 이상적 가치에 규율된 이들만의 절대공동체에 관한 해석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절대공동체론의 내적 해체 요소를 분석하고 있음에도, 5.18담론을 성화(聖化)시키기만 했던 절대공동체론 계보학의 한계를 그 역시 극복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는 자들이 말하고 기억하다’
―언더클래스/오클로스가 만든 절대공동체의 자아의 서사 〈마가복음〉
이 점에서 민중신학적 개입은 유의미하다. 왜냐면 민중신학은 시민 혹은 민족적 민중론의 내적 한계를 돌파하면서 민중론을 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중신학적 민중론의 중심에는 ‘오클로스’(οχλος)라는 그리스어가 있다. 이 단어는 제2성서 곳곳에 간간이 등장하는데,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마가복음〉이다. 그리고 오직 이 복음서에만 오클로스는 다른 단어와 대체 불가능한 특별한 의미로 등장한다. 바로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마가복음〉의 오클로스에 대한 해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서 그들은 ‘속하지 못한 자’로 정의될 수 있다. 그들은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속하지 못한 자이고, 일상적 삶의 네트워크의 중심인 마을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자다. 그들은 악령이 지배하는 질병에 걸린 자들이었고 불결한 성(性)으로 낙인찍힌 존재였으며 불온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였다. 여기서 속하지 못한 자라는 낙인은 타인에 의해 규정된 것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다. 죄인이라는 포괄적 규정에 포박된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인해 동족과 이웃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릴 자로 낙인찍혔다. 해서 그들은 하느님나라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아니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지 죄인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할 때만 그 나라의 변두리 끝에, 죄인들의 공간에 유폐된 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항상 죄인이어야 하기에 자신의 언어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말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 그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한계 안에서만 말하고 행하는 것이 허락된다. 〈마가복음〉 5,21 이하의 12년간 피를 흘리는 여자가 그랬다. ‘12’란 숫자는 11과 13사이의 자연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열두 광주리, 그리고 〈묵시록〉 마지막 부분에 새로 도래할 크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의 열두 대문과 그곳을 지키는 열두 천사 등, 이스라엘 담론 전통에서 ‘열둘’은 모든 것을 채우는 완전수다. 그렇다면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았다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그이의 전 생애가 이 병과 함께 한다는 뜻이겠다. 한데 이스라엘의 율법 전통에 의하면 ‘피를 흘리는 여자’는 그것을 접한 다른 이를 부정타게 한다.(〈레위기〉 15,19~33) 해서 그는 자신이 불결한 자라는 사실 외에는 어떤 것을 말해서도 안 되고 행해도 안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마가복음〉 5,34에 의하면 그는 예수를, 아니 소심하게도 그의 옷깃을 만졌고 예수는 그런 그에게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하였소”(ἡ πιστις σου σεσωκεν σε)라고 말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이 말을 한 또 다른 이는 시각장애인이자 거렁뱅이인, 이름도 알려진 바 없고 단지 ‘티매오의 아들’(바르티매오)이라고 불린 자가 유일하다.(10,52) 둘 다 예수에게 다가가는 것이 사람들에 의해, 관습에 의해, 규범에 의해 제지된 자였다. 그러나 그이들은 자발적으로 그 질서의 감옥을 탈출했고, 그것이 예수로부터 이런 치하의 말을 들은 이유였다.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는 이런 서사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말해서도 행동해서도 안 되는 존재이지만 그들이 예수와 얽히면서 훗날 그 예수를 기억했고 말하는 주체가 되었다. 자신들의 언어로 말이다. 그런 이들 각자의 예수 기억이 서로 교차하고 얽히면서 구성된 기억 덩어리가 바로 〈마가복음〉이다.
한편 민중신학의 오클로스론은 그들의 억눌림의 체험을 ‘말하지 못함’으로 묘사한다. 거라사의 악령 들린 이는, ‘망자의 공간’(the dead space)14)을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니고 자해를 한다거나 손발을 사슬로 묶어 놓아도 풀어버리는 자라는 세간의 그로테스크한 평판으로 기억되는 존재다. 그의 존재는 타인의 혐오적 시선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있다. 그 자신은 성서 텍스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실은 말을 하는 대목이 있다. 예수가 “당신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묻자 “레기온(군대)이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그 말은 그의 말이 아니다. 그 안에서 그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의 말이다. 필경 그는 그 사회의 낙인찍기의 가장 심각한 피해자인 탓에 위악적인 존재로만 자신을 드러낼 뿐 자신이 그런 처지로 내팽개쳐진 현실을 하소연하며 변명할 언어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아니 그것을 유실했다.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가 붕괴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가 그의 언어를 빼앗았다. 도난당한 언어 때문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자’다.
민중신학은 말을 도난당한 민중의 언어를 ‘한’이라는 감정언어로 표현한다. 그것은 말이 되지 못한 소리, 언어체계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데 실패한 소리다. 한데 그 소리는 그런 이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한’을 해석한 것은 서남동이 1979년에 발표된 세 편의 글에서 두드러진다. 〈한의 사제〉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소리의 내력〉 등이 그것이다. 그 해에 안병무는 〈전달자와 해석자〉와 〈예수와 민중―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라는, 오클로스론을 본격화하는 글을 썼다. 당시 안병무와 서남동은 차이보다는 접점이 긴밀하게 드러나던 때였다. 누구의 텍스트가 원본인지 모를 만큼 유사한 용어, 유사한 해석이 뒤섞였다. 하여 서남동의 ‘한’과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은 자연 서로 뒤얽히며 서로를 규정하고 해석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렇게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언어를 도난당한 이들의 주체적인 말하기/말되찾기 사건으로서의 〈마가복음〉의 해석을 토대로 하여 전개된다.
서남동은 한의 자리는 ‘죄’라고 말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은 자신의 언어로 말할 능력을 도난당했기에 그들은 언어가 되지 못한 절망의 소리, 곧 ‘한’으로 그 감정을 표출해야 했다. 그것이 말이 되지 못한 소리이니 말의 세계 안에 사는 이는 그 소리를 해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해서 그 소리를 듣고 해독하며 번안해주는 이가 필요하다. 서남동은 그런 이를 ‘한의 사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과제를 짊어진 자가 바로 민중신학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한’의 강조점은 ‘말하지 못함’에 있다.
한편 안병무는 그런 서남동의 ‘한’ 개념을 공유하면서도, 말 못했던 이들이 말하게 되는, 저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은 자신을 묘사할 언어를 도난당한, 상처받은 민중의 자기 치유의 서사다.15) 안병무는 그것을 예수사건이라고 보았고, 〈마가복음〉에서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안병무에게서 예수사건은 ‘오클로스 민중사건’이다. 그리고 오클로스 민중사건의 결과로 예수를 이야기한 것이 〈마가복음〉이다. 그리고 이 복음서에서 그는 예수 당대에 일어났던 예수-오클로스 민중사건을 발견해낸다. 하나 더, 안병무는 그 사건이 자기 자신의 시대에 재현되었다고 말한다. 곧 ‘전태일 사건’이다. 요컨대 ‘예수 당대의 예수-오클로스 사건’→‘〈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사건’→‘전태일 사건’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그는 일종의 절대공동체 같은 민중신학적 공동체론을 읽어낸다.
한편 안병무는 예수 당대의 예수-오클로스 사건이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 데는 이야기의 ‘전달자’로서의 오클로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를 좀 과하게 도식화해서 말하면, ‘발화자-전달자-해석자’라는 틀이다. 이 세 다른 역할의 수행자가 예수에서 〈마가복음〉으로 이어지는 예수 이야기의 집단적 저자인 셈이다. 한데 이 세 역할 수행자는 모두 오클로스라는 언더클래스적인 사회적 범주의 사람들이다. 곧 ‘체험의 유사성이 기억의 유사성을 낳는다’는 명제가 안병무의 역사의 예수 해석에 활용된다. 곧 〈마가복음〉에서 역사의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 그는 오클로스가 예수 이야기의 발화자-전달자-해석자였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16) 속하지 못한 자, 그런 배제의 경험을 공유했던 이들이 기억하고 말하게 된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속할 예수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가 ‘전달자’를 처음 이야기한 것은 1979년이지만 그것을 보다 명료하게 해석하게 된 것은 1980년 5.18광주사건을 경험한 뒤였다. 그때 군부정권은 광주에서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고 있으니 현혹되지 말라고 모든 대중매체를 동원하여 공표했다. 하지만 5.18광주사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퍼져나갔고, 그 안에서 대중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가 진실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것에 착안해서 그는 예수와 〈마가복음〉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5.18론을 펴지는 않았지만, 전태일 사건에서 5.18광주사건으로 이어지는 담론적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컨대 그에게서 ‘예수사건→〈마가복음〉 사건→전태일 사건→5.18광주사건’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절대공동체’적 담론의 계보가 그의 민중론의 토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클로스 개념은, 말했듯이,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용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근데 이 복음서에서 오클로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라오스’(λαος)라는 단어다. 〈마가복음〉에 단 두 번 등장(7,6; 14,2)하기 때문에 오클로스가 라오스와 대비되고 있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1성서의 헬라어 번역판인 셉투아긴타(70인역성서)에서 1350여회나 나오는 ‘라오스’라는 단어를, 셉투아긴타 구절들을 수차례 인용하고 있는 〈마가복음〉 채록자가 모른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더구나 여기서 이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야훼의 법을 반포할 때 그 법 앞에 모인 백성’이다. 즉 야훼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러니 모를리는 없다.
한편 라오스와 같은 의미의 단어로 더 널리 알려진 그리스어는 데모스(δημος)다. 그리스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이 데모스하면 더 잘 알만한 단어를 셉투아긴타는 라오스라고 표기하고 있다. 한데 라오스든 데모스든 그들은 과거 이스라엘의 영도자였던 아브라함-이삭-야곱 같은 족장들이나 다윗-솔로몬 같은 군주들과 대비되는 존재다. 그 시대엔 족장이나 군주만 야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였다. 한데 모세가 법을 반포했다. 그리고 그 법 앞에 모인 이들이 그들, 라오스다. 이제 그들이 야훼와 마주하는 자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실은 이 설화는 모세 시대의 정신을 담은 것이 아니다. 법을 반포했던 유다국의 요시야 왕정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백성이 주인이다라는 선언을 요시야 왕실의 법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of Athens)나 아리스도텔레스가 데모스의 정치를 주장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아리스도텔레스에 의하면 데모스는 ‘부자’와 대비될 뿐 아니라 ‘빈자’들과도 대비된다. 그것은 부자-빈자 사이의 중산층이 데모스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와 아닌 자를 가르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자나 빈자는 사회를 이끄는 주역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반면 데모스야말로 진정한 사회의 주역이다. 왜냐면 그들은 보편성의 주체이기 때문이다.17)
라오스/데모스가 그런 의미인데, 〈마가복음〉의 대중은 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필시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이 복음서는 오클로스의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습적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 ‘(대안공동체에) 속한 자’18)가 되었기 때문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해서는 안 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말로 예수 이야기를 구성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규범 속에서는 오클로스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자, 말해서는 안 되는 자다. 겟세마네로 예수를 체포하러 온 가야바의 사병들이 오클로스이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 자들도 오클로스다. 일상의 질서 속에서 오클로스는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는 자이다. 그런 편견이 일상의 질서를 지배했다. 한데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는 라오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이 라오스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라오스야말로 예수를 배척한 자들이다. 예수는 나자렛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라오스가 아니라 오클로스가 예수 담론의 진정한 주역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이 단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한 것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모든 서사와 규범을 무화시키려고 했던 때문이다.
병든 이가 예수로 인해 병이 나았을 때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 질서의 일원이 된다는 이야기는 오클로스가 라오스가 됨으로써 그 차별이 해소된다는 담론 전략을 담고 있다. 반면 〈마가복음〉의 전형적인 담론 전략은 ‘휘파게’(ὑπαγε)라는 명령형 그리스어 동사와 관련이 있다. ‘가라’는 뜻의 이 단어는 ‘따르다’라는 뜻의 아콜류떼오(ακολουθεω)와 대비되어 쓰이는 단어다. 후자는 제자의 따름을 가리키는 단어다. 반면 휘파게는 제자는 아니지만, 예수와 같이 떠돌이 예언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지역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자를 가리킬 때 쓰였던 단어다. 그런데 ‘휘파게’라는 말을 받은 이들 중에는 오클로스들이 있다. 바로 그들이 〈마가복음〉에서 예수사건의 주체가 된 오클로스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고대그리스를 포함해서 많은 진보적 담론들이 추구했던 ‘데모스/라오스의 정치’가 있다면, 〈마가복음〉은 ‘오클로스/언더클래스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민중신학의 주장이다. 안병무-서남동은 그런 관점에서 동시대 대다수 저항담론들과 다른 논점을 제기하였다. 물론 그들도 때로 데모스/라오스의 정치를 강변하기도 했다. 민족・민주・민중의 정의로운 국가를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병무-서남동은 동시에 그런 국가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너머를 주장한다.
민족・민주・민중의 정의로운 국가를 강조하는 논의들의 공통된 문제는 ‘외부의 악한 적’에 대한 ‘우리의 대동단결’만을 이상화한다는 점에 있다. 악한 적 앞에서의 대동단결은 전투를 앞둔 공동체로서는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략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이 선이라고 말하면 그 공동체는 내적인 성찰의 기회를 잃게 마련이다. 내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안에는 자신의 체험을 곧이곧대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악과의 전투를 수행하면서 꿈꾸는 세계에서 사람들(시민들)과 동등하게 앉을 자리를 배정받지 못했다. 아니 배정받지 못했다기보다는 이제까지 그런 자리가 항상 없었다는 좌절과 절망이 그들이 겪은 세계의 체험이었다. 한데 그들은 그런 의심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의심은 불온한 것이기 때문이다.
5.18광주사건 당시 언더클래스들은, 데모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보면서 ‘배가 불러서 저런 걸 하지’라고 말하는 대신, 이제까지 한 번도 자신들을 공동체의 멤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들을 마치 자신의 가족인 양 여기면서 그들의 방패막 역할을 할 때, 그들은 비로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문제는 5.18광주사건 이후 증언록, 즉 기억의 사후 수집록에서 시민들은 시민군으로 참여한 저 언더클래스들의 박탈경험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심지어 언더클래스 자신도 자신의 박탈 체험을 중심으로 그 사건을 해석하고 진술하는 대신 시민과 학생의 이상적 꿈의 언어로 덧입은 채 자신의 고난에 대해 말했다.
반면 안병무와 서남동은 5.18광주사건에 대해 깊은 해석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저 유실된 언어, 아니 시민사회에 의해 도난당한 언어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그런 인식론적 문제의식을 발견하는 데 광주의 기억들을 부분적으로 활용했다.19)
그런데 안병무-서남동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신학적 해석은 거의 20년 연하의 저항시인인 김지하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다. 김지하는 1969년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그 무렵 그는 필화사건으로 도주하다 체포되고 출소했다가 다시 체포되는 생활을 반복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내용에서나 형식에서 놀라운 실험적 글쓰기를 시도하였다. 물론 그의 글은 언제나 유통이 금지되었다. 그때 그의 글을 입수하고 유포시켰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이자 후원자가 바로 서남동이었다. 그리고 서남동은 안병무와 수없이 대화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발전시켜갔다. 오클로스 개념이나 한 개념은 그렇게 해서 민중신학적 키워드로 제시되었다.
안병무-서남동에게 영향을 미친 김지하의 문제의식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풍자냐 자살이냐〉(1970) 등의 초기 저작들이다. 이 글은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던 시인 김수영에 대한 조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면에는 김수영을 1960년대 저항시인의 전범으로 해석하려는 ‘창비’ 그룹의 백낙청의 민족-시민문학론에 대한 그의 비판이 들어있다. 여기서 김지하가 문제제기하는 것은 ‘동학운동’→‘3.1운동’→‘4.19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저항의 계보 속에 정착 민중은 기입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김지하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원귀(ghost)다. 한데 그들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는다. 살아서도 천대받고 죽어서도 그 시대 변혁의 기록들 속에서조차 남겨지지 못한 존재들이다. 해서 그는 시인으로서 그 ‘소리의 매체’가 되고자 했다. 곧 그 ‘한의 전달자’가 시인이라는 것이다. 서남동의 ‘한의 사제’론은 바로 김지하의 ‘한의 전달자’ 주장의 신학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지하-서남동-안병무로 이어지는 민중론적 문제제기를 지금 여기서 소환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행보 속에서 그런 민중론의 결여가 초래한 문제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민주정권이 집권하고 있을 때도 오클로스/언더클래스 같은 민중은 민주화운동의 기념비 속에 포함되지 못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5.18담론도 예외가 아니다. 흔히 한국의 민주화에 동조하는 모든 이들에게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절대공동체론’ 같은 담론이 맹활약을 펴고 있다. 그런데 민주화의 성지에 관한 5.18담론은 빠르게 양극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격차화에 어떠한 제동도 걸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5.18담론은 그런 문제의식을 외면하면서 형성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재해석이 요청된다. 민중신학의 오클로스론과 한의 해석학은 5.18광주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체험을 말하지 못한 채 죽임당한, 혹은 여전히 언더클래스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원귀로서 아우성으로만 남아 있는 그들의 한의 소리를 기록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 그것이 바로 한의 신학이고 오클로스론의 요체다.
코로나19 시대에 5.18 절대공동체는 어떻게 재현되어야 할까
그런데 군부쿠데타도, 극우주의 정권도, 촛불혁명도 다 지나고, 지금 우리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고 있는 것은 치명적인 감염증의 등장이었다.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이른바 코로나 사태는 그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질병으로 인해 사망한 자와 중증 질환자 수가 현재로도 천문학적인데,20) 점점 더 악화일로에 있다. 게다가 경제상황은 건강의 훼손 문제보다도 훨씬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갈 것이라는 말이 경제학자들에 의해 떠돌고 있다. 닥터둠(Doctor Doom)이라는 별명의 재앙론자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재앙이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the greater depression)일 것이라고 진단했다.21) 카르멘 라인하트 세계은행 수석부총재(Carmen M. Reinhart, 하버드대학 석좌교수)도 “코로나19 이후의 경제 상황은 대공황 당시와 비견될 만하고, 2차 대감염이 없을 거라는 가정을 해도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았다.22)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전대미문의 대재앙의 비대칭성이 현저하게 깊다는 점이다. 사회적 취약계층이 더 깊은 재앙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 다비드 푸르체리(Davide Furceri) 국제통화기금(IMF) 연구부 차장이 이끈 연구팀이 쓴 논문 〈코로나19는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최근의 판데믹 사례들에 비추어〉(“COVID-19 will raise inequality if past pandemics are a guide”)23)에 따르면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에볼라, 지카 등 판데믹 사태를 초래한 바이러스 감염증에 대처한 세계 175개국 정부들의 대응이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조사결과에 의거해서 전대미문의 대재앙을 초래한 코로나 사태도 취약계층에게 더 큰 불행이 될 것임을 추론하였다.
코로나19의 피해가 가장 적은 나라에 속하는 한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신천지 종파, 사랑제일교회, 중소형 교회들, 콜센터, 물류센터, 그리고 극우적 광장집회 등, 중하위계층이 더 많은 종교집단이나 기타 취약집단의 장소들에서 집단감염이 더 많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오클로스 관점으로 해석된 5.18론의 중요성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5.18광주사건’의 정신에 기반을 두고 구축되어온 한국의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체제와는 다른 국가를 만드는 데는 큰 성과가 있었지만, 그 나라는 오클로스/언더클래스를 위한 나라가 아니었다. 심지어 민주주의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던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도 사회적 양극화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더 악화되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소수의 특권층만이 독점하던 자원의 배분 구조가 민주체제 아래에선 개선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의 늪에 빠져버린 이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요약하자면,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는 계곡이 더 깊고 넓어졌다. 이때 정치적 주체화의 관점에서 전자를 데모스/라오스라고 한다면, 오클로스/언더클래스는 사회적 자원 배분체계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개선할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유실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데모스/라오스 중심의 민주주의였다. 오클로스/언더클래스는 그런 국가를 만들기 위한 도구이긴 했어도 사회를 운영하는 주요 원리의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5.18정신의 해석의 기조가 ‘데모스적/라오스적’ 민주주의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의 요소는 사회양극화다.24) 게다가 코로나19는 그러한 위기의 요소가 일으키는 위험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여 사회양극화를 넘어서는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국민주주의의 초석적 사건(founding event)이라고 할 수 있는 5.18광주사건의 해석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데모스/라오스의 시선으로 이 사건이 해석되어온 것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 사건 안에는 데모스적 사건만이 아니라 오클로스/언더클래스 사건이 있었다. 한데 일부 오클로스/언더클래스는 일종의 명예시민의 일원으로서 기억되었고 그밖에 다른 오클로스/언더클래스는 기억되지 않았다. 기억된 오클로스/언더클래스는 ‘열사’(patriotic martyr)의 일원 혹은 그에 준한 이가 되었을 경우다. 그래야만 절대공동체를 계승하는 기억공동체의 일원으로 초대될 수 있다. 이때 열사가 된 이는 열사로서만 존재가 규정된다. 그에게 사적인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기억하는 과정에서 그에 관한 사적인 기억을 소거시킨 초기 그리스도교 주류집단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기억공동체에서 기억을 구성하는 해석의 주체가 데모스/라오스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참여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여기에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구성주체의 자격을 규정하는 것은 데모스/라오스의 몫이었다.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말한 ‘몫 없는 자’들이 주체화되어 만들어낸 결과인 민주주의에서, ‘몫 없는 자’들 중 주체화에 실패한 탓에 오클로스/언더클래스가 된 것이 아니라, 데모스/라오스의 주체화를 위해 죽어야 했던 초석적 살해(founding murder)의 피해자/희생양이 그들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희생양이 된 자들만이 그 나라의 기억의 전당에 헌당되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오클로스/언데클래스론은 바로 이것을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다. 하여 역사의 예수를 복원하는 것처럼, 실재했던 오클로스/언더클래스,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복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사회의 양극화가 극한적으로 심화되어 사회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오늘의 사회에서, 오클로스/언더클래스 중심의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데모스/라오스 중심의 사회에서 열사로서만 기억공동체의 일원으로 초대되는 것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데모스/라오스의 해석에 의해 가려졌던 그이들의 일상의 경험들을, 흙먼지 풀풀 날리는 마른 황톳길의 기억들(김지하)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떤 제도를 만들어내야 하는지, 어떤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중신학의 주장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바로 그런 해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예수사건의 기록물이다. 하여 한국민주주의의 초석적 사건으로서의 5.18광주사건이 20세기 한국에서 재현된 예수사건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새로운 해석 작업은 오클로스/언더클래스의 기억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기억록을 다시 읽고 그들의 꿈이 간직된 제도를 상상하는 것, 하느님나라의 역사적 잠재태에 더 가까운 민주주의의 꿈을 그려내는 것, 5.18사건은 그렇게 재해석되어야 한다. □
[주]
1) 이명원, 〈피·밥·총 나누던 5·18, 그 만남의 공동체. 5.18철학 제창한 전남대 김상봉 교수〉, 《오마이뉴스》(2007.10.07.)(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32840)
2) 심영희, 〈파국적 충격에서 탈바꿈으로: 5.18경험의 재조명〉(제18회 중민포럼 2019.05.15.). ‘탈바꿈’은 울리히 벡의 용어다.
3) 김인국, 〈하느님 나라와 오월의 절대공동체〉, 《신학전망》 190(2015.09)
4) 《정의・평화・통일자료집》(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2000).
5) 강인철, 〈변혁의 리미널리티와 해방의 커뮤니타스―광주항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 《신학전망》 205(2019.06).
6) ‘공감장’은 전남대학교 감정인문학연구단이 공감의 감정이 공동체에 공유되는 담론의 장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전남대학교 감정인문학연구단 엮음, 《공감장이란 무엇인가: 감성인문학 서론》(길, 2017).
7) 김명희, 〈국가에 대항하는 가족―세월호 연대의 감정동학과 루트 패러다임〉, 《탐라문화》 56(2017.10).
8) 이때 ‘국민’은 국민 일반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선택된 특정한 국민일 수도 있으며, 혹은 우발적으로 선택된 국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직접적 피해자인 국민과 피해자가 아닌 국민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9) 황석영 공저, 《(증언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창비, 1985).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은 그가 ‘액체근대’(liqid modern)라고 부른 모더니티의 둘째 단계에 오면 ‘전적으로 유용성을 상실한(totally useless) 존재가 대대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바로 언더클래스를 두고 내린 그의 결론이다. 또 일본의 사회학자 시부야 노조무(渋谷望)는 언더클래스를 법의 밖으로 내몰린 위험한 존재가 된 자들, 즉 ‘항상적인 예외상태’(例外状態が恒常化)에 있는 자라고 규정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들의 연장선 상에서 ‘(절대적) 무능력화’와 ‘비존재화’ 그리고/혹은 ‘그로테스크함’이 오늘의 민중 문제의 요체라고 보았다. 즉 이제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기는커녕 치명적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자이고 파멸적 자기 해체 상황에 놓여 있는 자이며, 그리고/혹은 흉물스럽고 위험한 존재로 대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존재가 언더클래스다.
10) 《광주5월 민중항쟁 사료전집》(풀빛, 1990), 230・289쪽.
11) 김정한, 〈5.18 광주항쟁에서 시민군의 주체성〉, 《사회과학연구》 18(1)(2010), 138쪽.
12) 《광주5월 민중항쟁 사료전집》, 715~716쪽.
13) 김정한, 〈5.18 광주항쟁에서 시민군의 주체성〉, 141~143쪽.
14) 〈마가복음〉 5,3에 의하면 그가 사는 공간을 ‘무덤 사이’(εν τοις μνημασιν)라고 말한다. 한데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시신을 안장하는 전통은 매우 드물었다. 그보다는 상류층은 일반적으로 동굴에 두었다가 유골만 남게 되면 유골함에 넣었고, 서민층은 시신들을 유기시키는 장소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무덤 사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해서 나는 이것을 ‘망자의 공간’으로 옮겼다.
15) 〈마가복음〉의 예수 서사를, 말할 수 없었던 자가 말하게 되는 민중의 자기 치유의 사건으로 보는 민중신학적 〈마가복음〉 해석에 대하여는 김진호, 〈“목이 잘린 암탉”―‘그을린 사랑’, ‘마가복음’, 세월호 이야기에서 부활을 성찰하다〉, 《공동선》(2015. 5+6월호) 참조.
16) 〈마가복음〉의 예수 서사를, 말할 수 없었던 자가 말하게 되는 민중의 자기 치유의 사건으로 보는 민중신학적 〈마가복음〉 해석에 대하여는 김진호, 〈“목이 잘린 암탉”―‘그을린 사랑’, ‘마가복음’, 세월호 이야기에서 부활을 성찰하다〉, 《공동선》(2015. 5+6월호) 참조.
17) 신철희, 〈‘민’(demos) 개념의 이중성과 민주주의(demokratia)의 기원〉, 《한국정치연구》 2(2013 06) 참조.
18) 그들이 〈마가복음〉 공동체의 일원이다.
19)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언더클래스 개념과 연결시켜 재해석한 김진호, 〈오늘의 민중 문제와 오클로스론의 ‘현재성’―안병무의 예수역사학 다시 읽기〉(기장신학자대회. 2020.02.10.~12) 참조.
20) 2020년 8월21일 현재 전 세계 확진자 수는 2,300만 명이 넘고, 사망자는 80만 명이 넘는다.
21) 이용성, 〈루비니 “세계 경제, V자・L자 아닌 I자형 ‘수직 낙하’ 목전”〉, 《조선비즈》(2020.03.25.)(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25/2020032505495.html)
22)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 과거와는 다르다―하버드대 라인하트・로고프 교수, 블룸버그 인터뷰〉, 《내일신문》(2020.05.20.)(http://m.naeil.com/m_news_view.php?id_art=349994)
23) https://voxeu.org/article/covid-19-will-raise-inequality-if-past-pandemics-are-guide
24) 김용복, 〈5.18과 민주화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동북아연구》 15(20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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