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분도출판사에서 발간된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에 에필로그로 수록된 글.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프롤로그•21세기 민중신학의 동시대성을 향한 말걸기
1부 민중을 말하다
1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얼굴들: 민중신학과 여성의 타자화
2 경계 밖에 선 그이들: 민중신학과 성소수자
3 늦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청년, 민중신학과 만나다
4 타자로서의 난민과 환대의 선교
2부 시대를 말하다
1 유혹하는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영성
2 쫓겨나는 민중: 젠트리피케이션과 오늘의 민중신학
3 방법으로서의 통일: 탈분단 상황에 대한 민중신학적 성찰
4 잔여—주체, 포스트휴먼과 마주하다
아포리즘•민중신학, ‘어디로?’: 그 원천을 질문하면서
3부 개념을 말하다
1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
2 공公과 인권, 촛불의 열망과 더불어 생각하는 ‘공’公의 의미
3 논란의 중심, 민중 메시아
4 민중신학의 성서텍스트론
5 민중신학의 교회론
에필로그•‘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포스트-‘1987년 체제’의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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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포스트-‘1987년체제’의 민중신학
세대론
1980년대 중・후반, 당시 비판적 사회운동가들과 이론집단 사이에서는 맑스주의적 인식론과 사회해석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민중신학 이론운동가들과 활동가들(1)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신학계 일각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2세대’라고 불렀다. 누가 먼저 이렇게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용어는 도처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함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했다. 누구를 가리키는 표현인지, 학자들에 국한된 것인지, 이론운동가・활동가・목회자를 포함하는 것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맑스주의’와 연계된 신학적 내용을 지칭하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거의 합의되지 않은 채 사용되었다.
그런데 ‘제2세대’로 명확히 분류되었던 이들 자신이 이 용어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선배 민중신학자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신학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른바 ‘세대론적 개념화’의 시도를 적극적으로 모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대론을 펴기보다는 이 두루뭉술한 호칭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게다가 ‘제2세대’는, 제1세대‘와는 다른, 자신들 특유의 논리를 펴면서도 선배 민중신학자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연계성을 설명하는 데 더 몰두했다.
민중신학의 세대론을 이론화하려는 시도는, 제2세대 민중신학 운동의 주요한 ‘이론운동가’였지만 동시에 제3세대 민중신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최형묵에 의해서 1990년에 처음 제기되었다.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신학사상》 69(1990. 여름호))에서 그는 민중신학의 세대분류 기준을 ‘신학자의 분류’가 아니라 ‘신학경향의 분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세대’ 운운했던 이들이 자초했던 혼란을 명쾌하게 정리한 것이다. 실제로 소장민중신학자이지만 서술형식과 내용에서 선배 민중신학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이들이 많았다. 또 제1세대로 분류하는 것에 누구도 의문을 달지 않는 이들도 1980년대에 맑스주의적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런 혼란에 대해 최형묵은, 신학자가 아닌 ‘신학경향의 차이’로서 민중신학의 세대론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이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반적인 신학사적 분류법에 따르면 신학경향의 차이란 서양의 어떤 신학사적 계보와 연결되는지와 관련이 있다. 루돌프 불트만의 계보인가 칼 바르트의 계보인가, 에반젤리컬 신학(evangelical theology)의 계보인가 에큐메니컬 신학(ecumenical theology)의 계보인가 등등. 그러나 최형묵은, 한국민중운동과의 연관성을 민중신학의 내적 구성요소로 해석했던 서남동의 관점에 따라, 한국민중운동과 조응하는 신학적 경향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세대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비판담론들의 시대해석에 있어 명확한 차이가 있다. 1970년대는 박정희 군부독재체제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서구민주주의적 합리성’에 의존해서 시대를 해석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980년 광주’의 체험 이후, 한국사회의 비판담론들 속에는 반미 기조가 강하게 불타올랐다. 이미 1970년대 이후 세계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대화하고 종교들이 만나며 인종들이 화해하는 탈냉전 기조의 ‘데탕트(Détente)의 시간’ 속에 있었지만, 한국인들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냉전의 시간’을 살고 있었기에 ‘반미’란 서구적 합리성 전반에 대한 불신을 의미했다. 이렇게 기각된 서구적 합리성의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동구사회주의적 합리성’이었다. 데탕트 시대의 동구사회주의가 아닌, 냉전시대의 비타협적 변혁론을 강조하던 사회주의의 합리성 말이다. 당시 무수한 민중신학적 이론운동가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이러한 변혁의 갈망을 품은 담론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여 1980년대 비판담론의 시대해석들과 대화하면서 민중신학의 제2세대는 새로운 신학적 경향을 나타내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민중신학 운동의 전개를 ‘이론적 실천’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스러운 분류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이 있는데, 이 시기에 제출된 수많은 민중신학적 연구물들이 한국민중운동과의 연계성보다는 서양의 진보적 신학 계보와의 연계성을 조명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형묵의 기준에 의하면 이러한 논문들은, 민중신학적 연구들이긴 하더라도, 민중신학의 저항의 계보 ‘밖’에 위치한다. 하여 세대론적 해석은 민중신학의 전개를 살피는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은 세대론에 주목하고 있다. 제목 속에 들어 있는 ‘동시대적’(contemporary)이라는 표현처럼, 민중신학을 동시대 비판담론들과의 조합을 통해 민중문제에 개입하려는 담론적 실천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데 최형묵이 개념화한 세대론적 시각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기초해서 김진호는 1997년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시대와 민중신학》 4(1997))에서 ‘민중신학의 제3세대’를 천명했다. 그것은 1990년대 이후 논의되기 시작한 새로운 문제의식들과 궤를 같이 한다. ‘1980년대’라는 시간성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지향하는 ‘거대한 변혁(great revolution)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거대한 변혁’의 문제틀이 현실에서 관철된 것은 대통령직선제와 대통령 권한의 국회 분점이라는 엘리트정치 중심적 개헌에 국한되었다. ‘1987년 체제’는 여기까지였다. 이 민주헌법에서 대중은 여전히 권력의 주체가 되지 못했고, ‘법 밖의 타자’에 대한 법률적 혹은/그리고 사회문화적 고민은 결여되어 있었다. 하여 ‘1980년대’라는 시간성 속에는 동시에 ‘프리-1980년대’적인 배타주의적인 권위주의적 요소가 샴쌍둥이처럼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 논점들이 1990년대 이후 제기되었다. 민중신학도 이러한 비판적 논점과 맥을 같이 하면서 ‘제3세대’론을 폈던 것이다.
이러한 ‘제3세대’론은 그 담론적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세대론을 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제2세대 민중신학 담론들이 제1세대와 구별짓기를 시도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된다. 거기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라는 시간성 속에서 기독교운동이 직면한 상황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80년대에 그 시대성을 선취한 것은 민중신학의 전문연구자들이 아니라 ‘이론운동가들’과 ‘활동가들’이었다. 그 무렵에는 대규모의 매우 역동적인 기독교 청년, 학생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시대 민중민주운동에 참여한 비기독교권의 활동가들과 긴밀한 연대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하나로 엮는 신념과 이론의 배후에는 맑스주의가 있었다. 이것은 개신교계의 청년, 학생들에게 심각한 내적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하여 그들은 민중신학자들에게 맑스주의와 어떻게 동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할 것을 거세게 요구하였고, 이에 대한 공식적인 첫 번째 응답이 1987년 박성준의 글 〈한국 기독교의 변혁과 기독교 운동의 과제〉(《전환》(사계절, 1987))였다. 이후 일련의 민중신학적 작업들은 이러한 요구를 좀더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즉 민중신학이론가들의 주된 신학활동은 요청에 대한 응답이지, 제2세대의 필요성에 대한 강변이 아니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개신교계는 급속도로 사회운동이 쇠퇴하였다. 이는 민중신학 이론가를 향해 ‘응답하라’고 요구할 활동가 주체의 부재를 뜻한다. 하여 민중신학 연구자들 스스로가 지난 시대의 한계를 짚어내고 새로운 신학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해내야 했다. 요컨대 ‘제3세대 민중신학’은 ‘제3세대론’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한편 제1, 제2, 제3세대의 민중신학적 담론은 각기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등, 대략 10년 주기의 시대해석들과 조우하면서 전개되었는데, 이중 제3세대 민중신학은 2010년대가 끝나가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1987년 체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고 그 내외적 위기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1987년체제’를 향한 제3세대의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와 제2세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는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였다. 권위주의 체제의 전반부는 사회에 대한 국가의 폭력으로 점철되었지만, 후반부는 국가폭력이 경제성장과 결합되어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이 사회를 병영화(兵營化)함으로써 추진한 강도 높은 산업화는 커다란 성공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권유린과 노동탄압을 대가로 지불한 성공이다.
하여 박정희 정권기의 많은 민중민주 운동은 독재체제와 국가주도의 산업화의 폭력성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타났다. 독재정권의 무단통치, 그리고 야만적 산업화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저항운동을 주도한 것은 기독교와 대학의 진보적 청년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도적 저항에 비판적 성직자들과 대학교수 등도 다수 가담했다. 그런데 이 시기 저항운동의 특징의 하나는 그 지적 자양분이 서구적 합리성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서구사회의 합리성은 권위주의적 정권이 민주정권으로 이행하고 야만적 산업화가 보다 인간적인 산업화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 시기 한국사회의 가장 급진적인 저항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1979년 갑자기 박정희 정권이 내파하고, 이듬해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정당성은 급격하게 실추했다. 이에 쿠데타 세력은 설득보다는 공포의 정치를 통해 국민적 통합을 이룩하려 했다. ‘북한에 의한 안보위협’이 광주에서 내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선 부득이하게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포정치로 정권의 정통성은 국민에게 인준받지 못했다. 저항은 더 확산되었고 급진화되었으며 조직화되었다. 또한 저항이론들은 훨씬 더 체계화되었다. 이때 저항이론의 체계화에 영향을 미친 지적 자양분은 ‘비타협적인 동구사회주의적 이론들’이었다. 이전 시대의 저항담론의 토대가 되었던 서구민주주의적 합리성이, ‘5.18 광주’ 이후 한국의 저항세력에게선 기각된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신군부의 광주 학살극을 사실상 승인했다는 주장이 폭넓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이러한 저항이론들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향한 밑그림들’이 등장했다. 이 시대는 수많은 논쟁들의 시대였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벌어진 ‘한국사회성격 논쟁’ 혹은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개신교 청년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아이덴티티 논쟁’도 대단히 격렬했다.
이 모든 논의들은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다양한 갈망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2) 그런 점에서 이 모든 밑그림들의 지향점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재정부와 연결된 일체의 사회적 체계를 민주주의적 체계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기획들이다. 하여 1980년 이후의 민주주의 요구들은, 그 이전의 예언자 같은 선도적인 갈망의 외침과는 달리, 사회설계자들의 기획과 같은 형식을 띠었다. 그런 담론의 기조를 이 시대 이론운동가들과 활동가들은 ‘과학적’이라고 불렀다.
제1세대를 대표하는 안병무도 ‘1980년 광주’의 기억을 성찰하면서 폭로와 증언을 넘어서 민중신학적 사회설계들을 제시했다. 이 시기에 제시된 여러 가지 그의 신학적 키워드들, 가령 공(公), 탈(脫)과 향(向), 통일헌법 등이 그것을 시사하는데, 그의 신학의 진수 중 진수인 ‘오클로스론’은 동시대 각 분야의 민중론자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기획에 속한다.
그의 오클로스론이 성립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발견은 ‘유언비어’다. 〈마가복음〉이 오클로스의 예수 이야기라는 주장은 안병무 이전에 일본의 신학자 다가와 겐죠(田川建三)에게서 먼저 나왔다. 오클로스가 병자, 세리, 창녀 등 ‘비귀속적 박탈계층’이라는 것도 다가와의 발견이었다.(3) 그런데 다가와는 그런 오클로스가 〈마가복음〉을 만들었다고 했지 그것이 ‘역사의 예수’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반면 안병무는 이 복음서에서 역사의 예수를 읽으려 했다. 문제는 안병무의 독법의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1970년대의 안병무는 이에 대해 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 5.18 광주의 경험을 거치면서 그는 실마리를 찾아낸다. ‘유언비어’(流言蜚語, rumor)에 대한 착상이 그것이다. 공적 언어가 아닌 말, 공적 언어에서 배제된 말, 그러나 공적 언어의 은폐를 폭로하는 말, 이것이 그가 발견한 유언비어다.
안병무는 〈마가복음〉 이야기의 특성을 유언비어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불의한 권력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원통해 하던 대중이 그이에 대한 자신들의 기억들을 풀어놓기 시작하고 그것이 모이고 스토리를 이루다가 누군가에 의해 채록됨으로써 이 복음서가 탄생한 것이라는 얘기다.
놀랍게도 이것은 그동안 〈마가복음〉에서 역사의 예수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던 서구 예수학계의 한계를 돌파하는 실마리가 된다. 이제까지 서구 예수학계는 예수와 전달자를 나눔으로써, 예수의 고유한 말과 행적을 발견해내려 했다. 하지만 안병무는 다르게 보았다. 구술전승인 유언비어에는 지배적 언어가 왜곡하고 은폐한 진실을 기억하고 전달해내는 대중의 어법이 들어 있다. 이렇게 〈마가복음〉에는 예수에 대한 대중의 기억이 들어 있고, 그 기억 속에는 지배층에 의해 은폐, 왜곡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 즉 예수와 〈마가복음〉 사이의 불연속성에서 예수를 물었던 서구 예수학계와는 달리 연속성에서 물은 것이다.
그런데 그 대중의 정체는 오클로스다. 여기서 다가와가 발견한 ‘비귀속적 박탈계층’이라는 게 빛을 발한다. 그들은 마을에 속한 농민이 아니다. 마을의 질서를 통제하는 회당에서 배제된 이들이다. 회당을 지배하는 바리사이에게서 마을 밖으로 배제된 존재로 해석된 자들인 것이다. 해서 예수가 회당 안에서 바리사이와 안식일 논쟁을 벌인 후 바리사이가 예수를 적대하기로 하자, 예수는 더 이상 회당 안에서 활동할 수 없었고 마을 외부의 공터인 ‘호숫가’에서 활동했다. 바로 그곳에는 오클로스가 있었다. 그렇게 보자, 서구 예수학계가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공간이동을 나타내는 구절들을 이 복음서 저자의 첨가구로 본 것과는 달리, 역사의 예수의 활동을 보여주는 중요 구절들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유언비어에 대한 안병무적 관점이 실마리가 되어 역사의 예수, 그이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민중신학적 해석이 가능해졌다. 그이는 오클로스와 더불어 하느님나라 사건을 일으켰다. 그 나라는 이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부름받는 나라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배척된 자들, 하여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자로 취급되는 자들, 그런 이들이 ‘하느님나라의 민(民)’이 되는 체제, 바로 이것이 안병무가 말하는 하느님나라다.
그러나 1980년대적 성찰의 결과임에도 안병무의 오클로스는 동시대 역사의 주목거리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시대는 ‘흩어진 자들’, ‘존재가 산산이 부서진 자들’, ‘자아가 붕괴된 자들’보다는 ‘속한 자들의 거대한 연대’가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다. 이 시대의 밑그림들 대부분은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거대한 연대를 이루는 ‘주체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고 있었다.
그 시대는 ‘연대’(soliderity)의 시대였다. 1980년대 중후반 경 전국의 대학생들을 엮는 거대한 연대체들을 만들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벌어진다. 또 노동자들도 공장단위로, 지역단위로, 업종단위로 연대체를 결성하고 대대적인 공동투쟁을 기획한다. 사회운동단체들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대학생-노동자-시민을 엮는 대규모 저항운동들이 벌어졌다. 이는 1987년 엄청난 규모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어져 독재체제를 종식시키는 법적, 제도적, 담론적 변화를 이룩한다. 즉 독재정권이 민주정권으로 이행되는 것을 넘어서, 독재에서 민주로의 레짐체인지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레짐 체인지를 향한 대대적인 사회적 투쟁의 대열에서 민중신학의 두 가지 다른 흐름이 주목되었다. 하나는 ‘민중교회운동’이다. 1980년대 초 신군부에 의해 신학대학에서 강제퇴출된 일단의 신학도들이 민중신학자들의 영향으로 노동자교회나 농민교회, 빈민교회 등을 만들었다. 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 교회들이 개별적으로 탄생하여 각기 활동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단별, 지역별, 범주별(농촌, 도시빈민, 노동 등) 연대체로 결속하였고, 이는 다시 모든 민중교회들을 엮는 연합체로 결성되었다는 데 있다.
이렇게 민중교회들은 집단인격체로서 서로 교류하면서 기성 교회들과는 다른 조직, 예전, 담론을 통해 새로운 교회적 실험을 열정적으로 모색한다. 특히 전통적인 ‘포교적(전도적) 교회’가 아닌, 주위의 민중운동과 연대하는 ‘선교적 교회’를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나아가 지역별, 범주별로 사회운동단위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활동했다.
민중교회운동은 신학대학이나 교단, 전문신학자들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민중교회운동에 참여한 목사와 신자들은 고군분투하며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비록 전체 교회에 비하면 절대소수이고 그마나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미자립의 소형 교회들이었지만, 독재체제의 돌진적 산업화(rush-to industrialization)의 주역 혹은 동맹자들이었던 대다수 교회들과는 달리, 민중적인 민주체제를 지향하는 교회운동으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적 전환’, 곧 독재체제에서 민주체제로의 전환이 농익어갈수록 민중교회운동은 변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거대한 연대의 시대는 내적인 차이보다 함께 추구해야 할 외적 의제가 더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제도화되는 시기 이후 사회의 각 부문은 각자의 과제와 각자의 욕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게 된다. 그것은 ‘연대’보다는 ‘차이’가 더 중요한 정치행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차이의 정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민주화의 시대는 소비자본주의의 시대와 겹친다. 그리고 지구화도 거의 함께 찾아왔다. 그런데 지구화가 밀물처럼 사회의 전 영역으로 밀려드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떠밀리면서부터다. 민주화-소비자본주의-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이렇게 세 요소가 얽히면서 한국사회의 각 행위자들은 자신들 각자의 ‘차이’를 마치 상품처럼 욕망의 형식으로 지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한경쟁의 전쟁에 돌입해야 했다. 하여 그 시대는 ‘차이’를 매개로 하는 전문화의 시대였다.
민중교회들도 다르지 않았다. 민중교회운동에 참여한 교회들은 예배공동체이자 운동의 단위였고 사회복지의 수행자이기도 했다. 여기서 각 교회들이 안고 있던 내적 차이들은 언제나 부차적이었다. 그것보다는 단일대오의 연대가 중요했다. 그래서 여러 요소가 결합된 복합적 주체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 거대한 연대의 한 부문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민주화-소비사회화-신자유주의화의 시대로 빨려 들어가면서 민중교회들 각자는 내적 차이들의 중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 교회적 전통을 강화하거나 더 실험적 교회가 되거나, 아예 교회를 떠나 사회운동의 일부가 되거나 복지기관이 되거나 ......, 어느 경우든 전문적 행위자가 되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민중교회운동이 더 이상 집단인격체적 연합운동의 성격으로 전개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민중교회운동은 1990년대 이후에는 다른 여러 양식으로 분화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오르게 된다. 그 과정에 민중신학은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함으로써, 이 경로에서 민중신학의 역할은 단절된다.
두 번째 흐름은 한창 아이덴티티 논쟁 중에 있던 1980년대 청년・학생들과 연결된 재야의 전문신학자들의 이론적 실천으로 나타났다. 아이덴티티 논쟁이란, 1980년 ‘5.18 광주’ 이후 비타협적인 동구사회주의적 합리성이 청년층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서 개신교 청년들 사이에서 벌어진 기독교세계관 논쟁을 말한다. 개신교적 아이덴티티를 강조하는 그룹과 맑스주의와 개신교 신앙이 조합된 새로운 신앙적 아이덴티티를 갈망하는 그룹 간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이는 개신교 청년・학생운동 진영을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여기서 후자에 속하는 청년들은, 당시 진보적 청년・학생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벌어지던 맑스주의 학습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중신학자들을 향해 전통적 교회의 아이덴티티와는 다른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1987년 박성준이 ‘새로운 아이덴티티’로서의 민중신학론을 폈을 때,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동맹을 추구하던 개신교 청년들은 열광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어서 강원돈은 기독교 세계관을 맑스주의적 언어로 재구성하는 일련의 작업을 왕성하게 수행하였다. 그에 의하여 ‘물(物)의 신학’이라고 명명된 이 신학적 작업은 안병무와 서남동 등 제1세대적 민중신학을 맑스-레닌주의적 유물론과 모순 없이 결합시키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런데 새로운 아이덴티니로서의 물의 신학은 세계관에 관한 논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기독교와 맑시즘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미 조직과 조직, 이념과 이념 사이에 폭넓은 연결망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그 대화는 기독교 전통과 맑스주의와의 접점을 찾아 재해석하는 방식이 중심을 이루고 었었다. 또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서도 맑스주의와의 대화가 모색되었지만, 해방신학에서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도구에 가까웠기에 세계관의 치열한 갈등을 덜 겪을 수 있었다. 반면 민중신학 제2세대는 기독교 전통을 해체하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주장하였기에 긴장의 정도가 매우 깊었다.
하여 민중신학에 우호적인 교회 사역자들조차도 제2세대의 담론이 교회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하곤 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제2세대 담론은 기독교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학생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사실 몇 안 되는 연구자들이 다른 것까지 감당할 여력은 없었다. 요컨대 제2세대 담론의 현장은 진보적인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운동의 자리였다. 그리고 그에 부응하듯, 기독교사회운동 진영에서는 그 글들이 열렬히 탐독되었다. 수많은 학습집단이 조직되었고 수많은 이론운동가들이 매개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들이 묶어낸 학습자료들이 사적 팸플릿 형식으로 무수히 제작, 유포되었다.
1980년대 청년・학생운동에서 이론운동가 현상은 일반적이었다. 민중신학도 예외가 아니다. 한데 대체로 이론운동가들은 전문연구자들의 아카데믹한 맑스주의 이론을 현장의 운동이론으로 변환시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민중신학적 이론운동가들의 주된 역할은 달랐다. 제2세대 민중신학적 텍스트들이 매우 난해했기에 그것을 해설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에 기반을 둔 성서 해석은 어떠해야 하는지, 신・교회・구원 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기독교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등, 운동 현장보다는 신앙의 일상적 현장에서 필요한 신학적 지식을 구성하는 일에 복무했다. 하여, 제2세대의 주역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자칭 ‘운동의 신학’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정작 그들의 문건들은 운동보다는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고 그것을 일상적 신앙의 해석에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결국 운동의 신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레 학습교재 제작 현상을 낳았다. 비기독교권에 비해 재정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후원체계가 잘 갖추어진 기독교권의 청년・학생운동기관들은 재원을 마련하고 이론활동가들을 조직하여 교재 제작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까지 교단 단위의 혹은 초교파적인 기독교 청년・학생운동기관들 중 교재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붐을 이루었고, 그중 몇 개는 수만 권이 판매되는 놀라운 열독현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의 양보를 이끌어냄으로써 1987년 헌법개정에 성공했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더 이상 갈망의 대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 후 10년 만에 사실상의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민중신학 제2세대의 역사에서 이론운동가로 참여했던 이들은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전유할 수 없었다. 우선 기독교 사회운동은 이 시기에 궤멸적 위기에 직면했다.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냉전시대의 비타협적 맑스-레닌주의적 해석에 의존하던 진보운동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민주주의적 공론장이 다양해지면서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기독교는 오히려 권위적 공론장으로 쇠락해 버리고 있었다. 또한 시민사회영역이 확대되면서 시민운동의 공간이 생겨났고 수많은 개신교 활동가들이 시민운동 영역으로 옮겨갔다. 이는 민중신학 텍스트를 읽어줄 독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한편 진보적 활동가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개신교는 빠르게 보수주의화되고 있었고, 이는 기독교 네트워크에서 민중신학의 자리가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이것은 일견 세대론적 의미의 민중신학의 종말을 의미할 수 있었다. 신학대학이나 학술지에서 민중신학 논문들은 간간이 발표되었지만 그것은 사회운동과는 무관했고 사회적 변화를 둘러싼 논의에 개입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민중현장을 증언하는 것도 거의 아니었다.
그런데 세대론적 민중신학의 계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론운동가 경력의 연구자들 일부가 1990년대 초부터 모임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유형의 교회의 사역자이기도 했다. 또 그들의 일부는 기독교 외부에서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담론의 장에 개입하여 민중신학적 담론을 계속 펴기도 했다. 바로 그들이 1997년에 ‘제3세대 민중신학’의 출범을 선언했다.
‘1987년 체제’와 제3세대
글을 쓸 공간도 읽을 대중도 사라진 상황, 이것은 민중신학자들에게 뿌리 뽑힘의 체험이었다. ‘새로운 아이덴티니’를 강조했던 만큼 기독교 전통 내에서 그들이 있을 곳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 범주의 바깥에서 그들은 여전히 기독교 신학자들이었다.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민중신학자들의 유물론적 신학은 허구라고 비판했다. 많은 시민론자들은 민중의 시대는 끝났고 이젠 시민을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뿌리 뽑힘의 체험 덕에 민중신학자들은 기독교에 대해 보다 근원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고, 과거 열렬히 추구했던 비타협적인 맑스-레닌주의적 유물론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성찰할 수 있었다. 또 민주화와 함께 도래한 시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1997년 ‘민중신학의 제3세대’론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 문제제기에 대해 스스로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명료한 경계의 해체’였다. 기독교, 한국, 민족, 유물론, 민중 등, 지난 시절 명확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범주들이 실은 시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팽창과 수축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경계 자체가 무수한 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하게 운동하는 경계들의 메커니즘은 권력의 작동 양식에서도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권력은 특정한 주체에게 독점된 것이 아니고, 그 작동 양식도 폭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권력은 도처에서 발생하고 그것의 작동 양식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시권력’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내면의 독재자’에 대한 문제제기도 민중신학의 주제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민중신학자들의 실존적 고민의 산물만은 아니다. 기독교사회운동의 요청은 없었지만, 시대의 변화가 그러한 문제의식을 요청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민주주의적 제도화가 본격화되었는데 이 과정은 권력의 공공화(公共化) 과정이 아니라 사사화(私事化)를 의미했다. 거시권력에서 일상의 미시권력까지 거의 모든 시민적 주체들이 자신이 점유할 수 있는 권력의 장을 더 많이 확보하고자 무한경쟁을 벌였고 그것을 맘껏 향유하는 권리를 위해 집착했다. 1987년 개정헌법은 대통령 직선제와 대통령 권한의 국회분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즉 통치의 최고수위권의 분점에 집중된 것이지만, 그 효과는 이렇게 전 사회를 권력게임의 장으로 변모시켰고 전 국민의 권력게임 중독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1987년 민주헌법은 권력 사유화의 레짐(regime)이 되었다. 제3세대의 일부 민중신학자들에게 포착되었던 ‘1987년 체제’는 그랬다.
한편 ‘1987년 체제’가 구체화되는 데 있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는 ‘소비사회화’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체제가 등장할 무렵 내구소비재산업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바야흐로 소비사회로의 전환의 기점이 바로 이 시기인 셈이다. 소비사회는 대중을 소비자로 호명하는 사회다. 소비자는 소비능력과 상응하면서 그 권력의 크기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런 메커니즘을 제약할 민주주의적 제도화가 미비했다. 아니 오히려 부추겼다. 요컨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소비사회는 권력의 사유화와 무한경쟁화를 강화시키는 나쁜 조합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제3세대 민중신학은 이러한 ‘1987년 체제’를 비판적으로 대면하면서 출범했다. 권력의 사유화와 무한경쟁화가 모두에게 사회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고, 이러한 고통을 회피하려는 방어적 행동의 하나가 가학성의 현저한 증가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가해 메커니즘의 하이어라키(hierarchy)에서 아래로 갈수록 고통의 밀도가 심화되고 있다는 비판적 문제의식이다. 하여 제3세대 담론들은 고통의 메커니즘을 읽는 데 주목했다. 제1세대 민중신학을 ‘증언의 신학’이라고 하고, 제2세대를 ‘운동의 신학’이라고 부른다면, 제3세대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은 아마도 ‘고통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문제는 제3세대 민중신학이 핵심 주제였다.
고통의 문제는 1997년과 2008년에 사회를 거의 파탄지경으로 몰아붙인 금융자본주의적 위기를 경유하면서 이젠 민중신학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비판담론들의 가장 중요한 의제의 하나가 되었다. ‘헬조선’이라는 말 속에는 자신들의 삶의 현장을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악마성의 일상화로 이해하는 대중의 막막한 자괴감이 들어있다. 그런데 그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든,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할 때조차 그 악마적 질서에 거슬러서 살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몸이 아프고 정신이 병들었다. 혹은 그 대신에 증오를 품는다. 그런데 그 증오를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 개신교는 그런 증오를 부추기는 최전선에 서 있다. 하여 증오의 촉진자로서 개신교는 한국사회 해석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즉 민중신학의 고통 연구는 신자유주의의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악마적 신성의 해석에서부터 증오의 촉진자로서의 한국교회에 관한 해석에까지 폭넓게 주제를 확장했다.
한편 고통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제3세대 담론이 주목한 또 다른 주제는 ‘타자’다. 사회적 고통이 증오로 옮겨가는 가해의 메커니즘에서 ‘타자’의 문제가 부각된다. 어떤 경우는 기존의 타자화된 존재가 공격의 대상으로 다시 지목되기도 하고, 새로운 타자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타자의 생성 과정에서 타자화 담론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증오를 정당화시키는 편견의 기재가 작동하며, 그것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타자)는 증오를 정당한 처벌처럼 오인하게 된다. 한데 이러한 편견과 오인의 기재는 배타주의적인 기독교 신학의 담론과 매우 닮았다. 이는 증오의 메커니즘 자체가 신학적인 비평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또한 담론상의 유사성 탓인지 실제로 기독교가 증오의 사도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과 신앙, 그리고 교회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평이 요청된다. 제3세대 민중신학의 ‘타자’에 대한 담론은 바로 이러한 현상과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개입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타자화 메커니즘뿐 아니라 타자화된 존재의 주체에 관한 논의도 제3세대의 주요 주제였다. 타자화된 존재는 자아의 붕괴를 체험하면서 무능력화되는, 즉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곤 하며, 때로 그로테스크한 괴물적 주체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타자의 언어 붕괴 현상이 포착되는데, 서남동은 일찍이 이것을 ‘한(恨)의 소리’라고 규정한 바 있다. 요컨대 이는 ‘언어가 되지 못한 고통의 소리’라는 것이다. 하여 언어질서 속에서 해독 불가의 텍스트가 바로 ‘한의 소리’다. 그런 점에서 서남동이 말한 ‘한의 사제로서의 민중신학자’의 역할은 그 소리를 언어화하는 자, 그리하여 시민사회에 그것을 번안해주는 자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3세대는 서남동을 재해석하면서 민중신학적 윤리로서의 ‘증언의 정치’를 제안한다.
한편 1980년대에 제기된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이 오늘날 다시 주목되고 있는데, 그것은 ‘속할 곳을 잃어버린’ 오클로스가 바로 현대의 타자론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오클로스론은 그들 자신이 사회적 실어증의 한계를 돌파하여 구술체로서의 예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나아가 〈마가복음〉이라는 문서 텍스트를 탄생시킨 것처럼, 타자화된 존재의 재주체화를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민중의 자기초월은, 합리적 계산법으로 해명할 수 없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제3세대는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타자의 재주체화를 예수사건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제3세대 민중신학 연구자들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매체도 독자도 사라진 담론적 폐허 위에서, 게다가 그들이 활동해왔던 장의 외부로 밀려난 떠돌이로서 담론 생산자의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이 여정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제3의 장소’들이었다. 그중 첫 번째 ‘제3의 장소’라면 교회다. 교인과 비교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기독교도와 타종교인 나아가 비종교인의 경계가 모호해진 교회, 또 목회자와 평신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찬송과 노래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성서와 신문의 경계가 모호해진 교회다. 해서 이 교회들에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 성향의 신자들뿐 아니라 멀티신자 유형(4)의 신자들이 적지 않다. 1980년대 말 이후 이런 교회들이 몇몇 등장했다. 김경호는 그런 교회를 가리켜 ‘민중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라고 명명했다. 실제로 이들 교회들의 사역자들은 제3세대적 감수성으로 민중신학을 구현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했다.
두 번째 장소는 연구공동체다. 여기서는 신학과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경계가 해체된 담론들이 실험되었다. 또 아카데미즘과 현장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담론들이 생산되었다. 세 번째는 교회 바깥의 매체들에서 기독교 신학적인 담론들이 소통되었다. 물론 이것은 민중신학 만의 성과는 아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자들의 활동은 어느 누구 못지않다. 아무튼 이들 매체들은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든 않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신학자들의 텍스트를 필요로 했다. 또 그 매체의 소비자들은 기독교도든 아니든, 신학자들의 해석을 탐독했다.
제3세대 민중신학은 여전히 주류신학계나 주류교회와 소원한 관계에 있다. 도리어 타종교나 비종교권 학계와 더불어 한국사회의 대중현실과 정치에 대해 논하는 공론장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동시에 제3세대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무대는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려는 멀티신자 성향이 강한 종교인들, 그리고 종교와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자 하는 비종교적 대중과 나누는 공론의 장이다.
제3세대 담론은 점점 활동 영역이 확장되고 있고, 그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물론 아직 제3세대는 신학계에서 낯설다. 또 제2세대가 권위주의 체제를 민주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에 비해 담론적 성과가 미미하다. 그런데 어쩌면 제3세대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권위주의적 독재체제가 민주체제로 전환된 것이 제2세대와 제3세대로 나뉘는 계기가 된 것처럼, 1948년 냉전적 반공국가레짐이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탈냉전적 평화체제로 이행하는 뚜렷한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6.12 북미정상회담’ 이후 전 세계에는 한반도의 탈냉전화에 이르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현실적 문제의식이 확산되었지만, ‘6.13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보궐선거’ 결과는 한국인들 자신에게는 ‘4.27’과 ‘6.12’가 탈냉전을 향한 비가역적이고 신속한 변화의 징후로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탈냉전적 평화레짐 시대의 민중신학은 민중문제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해석을 요청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의 제4세대의 등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
참고자료
강원돈, 《물의 신학》(한울, 1992)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시대와 민중신학》 4(1997)
김진호・김영석 엮음, 《21세기 민중신학》(삼인, 2013)
박성준, 〈한국 기독교의 변혁과 기독교 운동의 과제〉, 《전환》(사계절, 1987)
서남동, 《민중신학 탐구》(한길사, 1983)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한국신학연구소, 1990)
이상철, 《탈경계의 신학》(동연, 2012)
이숙진,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종교―코칭프로그램의 자기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25(2014)
정용택, 〈지금, 민중신학에서 ‘운동’과 ‘현장’이란 무엇인가?〉, 《진보평론》 62(2014 겨울)
최형묵,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 《신학사상》 69(1990 여름호)
미주
(1) 1980년대 민중민주운동에 복무하던 이들 사이에는 이론운동가들과 활동가들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었다. 여기서 이론운동가들은 일반적인 학문제도 밖, 운동현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문적인 학자 집단과는 구별된다.
(2) 더 나아가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남한 정권 전체가 미국의 신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는 저 서구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해방과 민주주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고리였다.
(3) 농민은 땅에 ‘귀속된’ 박탈계층이고 노동자는 공장에 ‘귀속된’ 박탈계층이라면, 오클로스는 그 사회에서 귀속성이 부정된 박탈계층이라는 것이다.
(4) ‘멀티신자’(multi-believers)란, 한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신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의 진리들과 의례들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신자를 가리킨다. 한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신심을 갖는 종교성은 서양의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지배적인 종교 양식으로 확정된 것인데, 오늘날에는 멀티신자적 신앙 유형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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