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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예수운동과 1세기 팔레스티나의 다른 민중운동들 -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2005년도에 쓴 글로 추정되나 어디에 실린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나상윤 목사께서 그 출처를 알려주었다. 내 글의 출처를 그가 알려줬다. 게다가 이 글이 실린 곳이 내가 쓴 책  [예수역사학]에 실린 것이란다. 11장 <1세기 팔레스틴 민중운동들의 통시적 연계성>이라는 제목의 글과 같은 글이라고. 이 책이 2000년도에 출간된 것이니 이 글이 저술된 시기는 2005년도가 아니라 2000년 이전이다.
저자가 어디서 낳았는지 언제 낳았는지도 잊은 글은 퍽이나 슬펐겠다. 다행히 나 목사님이 이 글의 한을 풀어줬다. 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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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운동과 1세기 팔레스티나의 다른 민중운동들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1

 

최근 북미를 중심으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예수의 역사성연구에서는 예수와 예수운동을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즉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들 사이의 40년 어간의 괄호 쳐진 기간에 예수사건을 전승한 담지자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예수운동들의 존재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이 예수운동들이 실재 예수에 가장 근접 가능한 역사적 실체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 역사학에 유의미한 학문적 위치를 갖는다. 이때 전승의 과정을 나타내는 데 운동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승계 행위의 집합성(collectivity)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최근 북미의 역사의 예수 논의는 전승주체들의 개체성(individuality)에 몰두했던 고전적 가정들을 넘어서는 예수 역사학의 성과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인식론적 전제 위에서 사회학적 연구가 성서 비평학과 결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요컨대 최근의 연구 경향에 있어서, ‘예수운동은 사회운동으로서 포착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전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역사의 예수의 활동을 운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동의하는 바, 분명 예수는 일단의 추종자 집단과 더불어 활동을 펼쳤으며, 그 활동은 지배체제에 대한 명백한 대항적 지향의 추구와 연결된다. 또 그러한 지향 아래 대중을 설득하여 지지자층으로 동원하려는 일련의 목적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 활동의 내용과 지향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든 않든, 위와 같은 가정에 이견을 제시할 이는 없으리라.

이 점에서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이 예수의 실천을 평화적-비폭력적 사회운동으로 보면서, 젤롯당의 전복적-폭력적 사회운동과 대비시킨 것은 최근 북미의 많은 논자들보다, 비록 훨씬 오래된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일면 통찰력 있는 인식 수준을 내포하고 있다.[각주:1] 비교의 방법에 있어서 그는 이 두 비교의 대상이 시공간적으로 겹쳐 있다는(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두 사회운동이 시공간적으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사회적 맥락에서 기원했으며, 전개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상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의 청중 뿐 아니라 제자들 중에도 젤롯 당원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고, 예수는 폭력이라는 대항 수단의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했으며, 그럼에도 예수는 젤롯적인 폭력론의 불가피성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제자나 대중에게 비폭력을 선포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헹엘의 비교 논법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 두 사회운동들이 실천지향에서는 서로 분명하게 대비된다는 데 있다. 이렇게 동일한 혹은 유사한 발생 맥락에서 상이한 성격의 사회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그 상이성 논의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즉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념체계의 상이성이 차이의 결정적인 독립변수였다는 것이다.[각주:2] 결국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선택의 유의미성이 다른 변인들보다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교 연구는여전히 많은 예수 연구자들이 그를 선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적실성을 상실하고 있다. 우선 예수운동젤롯운동이라는 비교대상의 선정부터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요세푸스 저작들에 대한 최근의 텍스트 비평학적 연구에 따르면, 젤롯운동과 예수운동은, 헹엘이 가정했던 것보다 시공간적 근접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예수운동이 30년 어간의 시기와 관련된 반면 젤롯은, 헹엘의 주장과는 달리, 주후 60년대 후반의 시기에 등장했고, 이 두 시기의 성격은 동등비교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헹엘의 젤롯 가설[각주:3]이 나온 이듬해인 1962년 이미 유다교 학자인 솔로몬 자이틀린(Solomon Zeitlin)에 의해 그의 요세푸스 저작에 대한 독해가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각주:4] 모튼 스미스(Morton Smith)의 꼼꼼한 비평은 젤롯 가설을 새로 쓰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각주:5] 스미스에 의하면 젤롯운동은 주후 6년부터 비롯된 잘 조직된 하나의 정파가 아니라 유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특히 로마군의 팔레스티나 재진군과 관련하여 67년 말에서 68년 초 즈음에 역사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 무장한 대중 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기에 폭력을 선택한 운동과, 체제의 사회적 통제 능력이 매우 견고하던 주후 30년 어간의 시기에 비폭력을 선택한 운동이 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 비교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둘째로, 비교방법에 있어서도 문제가 노정된다. 헹엘은 두 사회운동이 헬레니즘과 유다주의 간의 관계에 의해 특성화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압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며, 이러한 대중적 고난과 관련하여 특성화된 사회적 맥락은, 유다의 헬레니즘 시대 전체에 걸친 장기지속적차원에서 노정되는데,[각주:6] 반면 그가 취한 비교방법은 협역-공시적 방법이었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의 전반적인 헬레니즘화는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들(또는 그런 류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을 헹엘은 부인하지 않는다.[각주:7] 반면 대다수 대중의 고난의 현장은 시골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의 비교방법은 공간적으로 적실성을 잃고 있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두 가지로 지적한 바, 비교대상 선정이나 비교방법 적용의 오류를 다 무시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즉 대중의 사회정치적 동원이 두 방향으로 상이하게 추동된 결정적 변수를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가치지향으로 단순화한 것은 사회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대단히 미흡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치와 행위간의 연결이 직접적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단순 도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는 단순히 어떤 가치지향에 따라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혁명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의한 보상이나 손해가 극한적으로 갈리는 행위는 가치지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여러 변수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가치의 사회적 형성과정이나 행위의 집합화, 즉 동원의 과정에 대한 보완적 논의가 매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평 뒤에 감추어진 나의 논지는, 예수운동과 동시대 다른 민중운동들이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서로 통시적인 연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헹엘 류의 연구는아직까지도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바예수시대 사회운동들이 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다는 전제 아래 이 운동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면서 예수운동이 다른 운동들에 비해 얼마나 특이성을 갖는가를 말하려는, 다분히 호교론적 지향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예수운동과 다른 사회운동들은 동시대적 현상이지만, 서로 간에는 연계성이 없다는 전제를 갖는다. 따라서 나의 논지는 위의, 헹엘의 주장에 대한 세 가지 비판을 논의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30년 어간에 역사의 예수가 주도했던 사회운동적 전망이 초기 그리스도라는 분파적 조직을 통해 어떻게 승계되었느냐라는 주체화 과정에 주목하는 헹엘 류의 호교론적 길과는 인식론으로 다른 전제를 갖는다. 후자는 예수분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에서 구성된 차별적 담론화에 몰두하고 있는 최근의 예수연구의 엘리트주의적 시각[각주:8]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나는 30년대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에 동원된 대중과 60년대 말에 절정에 이르는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에 동원된 대중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고 본다. 예수운동의 참여자가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신앙적이고 사상적인 전향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담론을 대중전승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다소의 이론적 보완을 거쳐받아들인다면,[각주:9] 마가복음의 예수담론은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성서 내적인 증거를 제공해 준다. 마가복음에 반영된 예수전승은 혁명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담론적 결속의 흔적을 보여준다. 만약 성서의 내증이 수반된다면, 논리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자명한데, 그것은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사회적 동원 과정은, 미시동원적 민중운동간의 결속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는 통시적 과정을 수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은 이러한 상식적역사 과정에 예수운동을 위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논지의 대극에 있는 헹엘 류의 견해에 대한 비평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여기서는 호슬리(Richard A. Horsley)에 대한 평가로 이러한 과제를 대체하고자 하는데,[각주:10] 그것은 그의 연구가 위에서 기술한 헹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점을 극복한 탁월한 성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논점에서 호슬리 또한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호슬리의 글들이 이미 여러 편 번역되었고[각주:11] 그의 연구사적 전제라 할 수 있는 젤롯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에 대한 사전적인 소개[각주:12]가 이미 수행된 바에, 그의 주장을 여기서 다시 소개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위의 비판점들과 관련한 그의 주장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코자 한다.

 

2

 

호슬리의 연구는 앞서 언급한 스미스의 요세푸스 저작들에 관한 문헌비평적 성과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각주:13] 스미스는 헹엘이 젤롯(ζηλωται)과 시카리(σικαριοι) 및 비적(λησται)을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는 혼란에 빠져 있다고 비평하면서, 이들 운동들을 다음과 같이 재규정한다: 주후 6년 라삐인 갈릴래아의 유다로 말미암아 시작된요세푸스가 명명한 바4의 철학은 젤롯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이 운동의 창시자인 유다가 주후 66년 시카리의 지도자로 나타난 므나헴의 조부/부친이라는 점에서, 시카리와의 연계성을 추정할 수 있으며, 시카리는 주후 66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 예루살렘의 지도적 사제들에 의해 므나헴이 암살당하자 마사다로 물러나게 되며,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예루살렘에서 사라져버린 반면, 젤롯은 전쟁의 중반에야 비로소 등장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헹엘은 요세푸스가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한 비적이라는 경멸조의 말을 모두 하나의 잘 조직된 정파로서의 젤롯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각주:14]

호슬리는 젤롯, 시카리, 비적 외에 대중적 예언자 운동과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을 포함해서 1세기 팔레스티나 사회운동 유형의 지형도를 그린다. 그런데 그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런 유형론의 사회사에 전자본주의적 농경사회의 대중운동적 함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엘리트주의적 해석은 농경사회의 거의 모든 대중이 비문자 계층이라는 점을 텍스트 해석에 별로 감안하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로마에 투항한 유다인으로서 황실 역사가였을 뿐 아니라, 동시대 최고의 지식 엘리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유다의 대중적 사회운동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해석을 통한 헹엘의 가설이나, 스미스의 헹엘 비판, 그리고 그 이후의 논의들이 모두 범하는 공통된 한계는 비문자 계층의 시좌에서 요세푸스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각주:15] 호슬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새로운 해석학적 원칙을 제시한다. 수미일관된 구성을 갖는 현존하는 텍스트의 거대전승(great tradition)에서 미소전승(little tradition)을 추론해 내는 것이나,[각주:16] 외삽법(extrapolation)을 사용하는 것[각주:17]이 그것이다. 전자가 텍스트 내부에서 대중의 담론을 추론해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텍스트가 주는 정보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비교방법을 통해 외부로부터 정보를 보충하여 대중적 담론을 유추해 내는 방법이다. 그런데 전자의 방법은, 요세푸스의 저작의 경우엔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저작 자체가 대중 담론에 기초한 글쓰기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호슬리는 이 방법을 구술적 대중 담론으로부터 유래한 성서 해석에 주로 활용한다. 반면 요세푸스의 저작을 해석하는 데 유용한 외삽적 정보로서 그는 홉스봄(Eric J. Hobsbawm)의 전자본주의 사회의 민중운동 유형에 관한 연구[각주:18]를 유용하게 활용한다. 특히 사회적 비적 현상(social banditary)에 관한 논의는 홉스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여기서 사회적 비적 현상이란 농촌사회에서 위기적 변동이 진행된 결과 공동체적 연결망이 훼손되어 비자발적 이탈자 집단이 속출하고, 이들의 기득권층에 대한 즉자적 저항이 그들에 대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pre-political)[각주:19] 약탈로 이어지는 사회운동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회적 비적이 촌락민과 갈등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촌락민과 비적 간의 상호 이동 가능성을 수반한다. 대중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종종 그들에게 앙갚음을 부탁하곤 했고, 때론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특히 혁명기에 접어들면 농민으로부터 대대적인 충원이 이루어지게 되며, 여기에서 단순한 사회적 비적이 보다 정치화되어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으로 전화되는 맥락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유다 혁명기에 등장한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을 설명하는 데 기반을 이룬다.

호슬리가 그리고 있는 주전 4년에서 주후 74년까지 팔레스티나의 민중운동 지형도는 다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통시적 범주로 보면, 1세기 팔레스티나의 역사는, 주전 4년 잠깐 동안 폭발적으로 분출한 에피소드적 혁명기, 그 이후 주후 40년대 말까지의 정치적 안정기, 그때부터 66년까지의 원초적 반란기, 그리고 66년 이후 몇 년간의 혁명기로 시기 구분할 수 있다. 비적 현상은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농경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원초적인 형태의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첫 번째 시기는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이고, 둘째 시기는 대중적 예언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활기를 띤 반면, 다른 운동들은 지극히 억제된 시대다. 셋째 시기는 시카리의 테러리즘이 등장했고, 비적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시기는 비적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들간의 연결망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거대 규모의 민중 연대체들이 형성되는데, 그 중 예루살렘과 연관지어 보면, 진보적 사제귀족인 엘르아잘이 이끄는 시민연합’, 유다 지방 북서부 지역 출신 비적들이 주축을 이룬 급진적 대중연합인 젤롯, 가장 급진파에 속하는 기살라의 요한이 이끈 민중연합,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던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끈 메시아 운동적 민중연합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의 시대적 추이와 민중운동을 대응시킴으로써 호슬리는, 헹엘이 가치지향과 행위를 직결시킴으로써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순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는 사회구조와 집합행위가 상호성을 갖는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이에 관한 사회학적 이론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시킨다. ,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시대적 전개와 사회운동을 관련시키기기 위해, 찰머스 존슨(Chalmers A. Johnson)의 사회체계론적 혁명이론을 활용한다.[각주:20] 요컨대 호슬리는 혁명의 구조적 요인을 헤롯 치하에서 심화된 정치경제적 착취구조와, 기존의 가치지향 안팎에서 면면히 전승된 저항의 전통 등으로 요약한다. 이것은 존슨이 주장한 환경과 가치의 변동과정의 비동시성이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도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특히 혁명의 보다 근거리적 계기로 그는 40년대 말의 대기근과 비적 현상의 만연을 이야기하는 데, 이 논의는 환경과 가치간의 불일치로 인한 체제의 구조적 위기가 절정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슨은 지배 엘리트들이 비타협적인 강제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통치 상황이 혁명으로 치닫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호슬리는 이를 쿠마누스 이후 총독들의 대응방식에서 찾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혁명적 대중 동원이 이루어지려면, 존슨에 의하면, 촉진제적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호슬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시카리 가설을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시카리는, 비적과는 달리, 농촌이 아니라 도시의 현상이다. 또한 하나의 잘 조직된이데올로기적 사회운동 집단으로, 테러리즘을 투쟁 전략으로 선택한 급진주의자들이다. 그는 테러리즘에 대한 최근의 실증적 연구들에 기초해서, 시카리가 유다 민중봉기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혁명 상황에서 대대적인 대중적 저항 연합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형성되는데, 이 맥락에서 홉스봄이 이론화한 비적과는 비견할 수 없는, 규모에서도 훨씬 거대하며 활동에서도 매우 공격적인, 그리고 매우 정치화된 사회운동체들이 형성된다.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설명틀 속에 위치한다.

이상과 같이 1세기 팔레스티나의 통시적 동학 속에서 동시대 민중운동의 전개를 상응시켜 보는 것은, 헹엘이 역사적 추이를 무시하면서 사회운동들간을 비교한 것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중요한 사실을 보게 해 준다. 특히 역사의 예수가 주도한 운동의 비폭력적 지향을 폭력적 전략의 젤롯운동과 비교하면서 해석하기보다는, 주후 30년 어간의 시대적 특성을 고려하여 해석하는 편이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러한 통시적 지형도는 비교대상을 선정하거나 비교방법을 적용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오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유용한 도구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호슬리의 민중운동 지형도를 대중적 민중운동 대 지식인적 민중운동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비적, 젤롯, 대중적 예언자 운동과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바리사이나 에쎄네, 4의 철학, 그리고 시카리 운동은 후자에 속하며, 그밖에 (비록 호슬리 자신은 여기에 포함시키는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66년 봉기의 초기 국면을 주도하였으며, 므나쎄를 암살하고 시카리를 도성에서 몰아낸, 성전 수비대장 출신의 고위 사제 엘르아잘이 이끄는 사제 중심적 시민당파(유대전쟁사2,422~24; 2,443~45)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호슬리에 의하면, 이러한 범주의 사회운동들은 동시대에 대중 동원에 거의 무관심하거나 혹은 실패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므나쎄 휘하의 당파는 시카리 집단에서 예외적으로 대중적 메시아니즘의 요소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호슬리에 의하면, 동시대의 무수한 민중운동 가운데 이 두 영역을 매개하고 있는 유일한 예가 바로 므나쎄의 경우라는 것이다.[각주:21] 그러나, 내가 보기엔, 엘르아잘의 예루살렘 시민연합도 대중동원에 성공한 엘리트주의적 사회운동의 또 다른 경우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므나쎄가 대중적 메시아니즘에 호소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엘르아잘은 주로 시각(제의적 건조물 등)청각(찬양 등 제의에서 발성되는 소리)후각(, 또는 동물의 피나 기름에서 나오는 냄새 등) 등 감각적 매체를 통해 의미 전달의 대중적 효과를 극대화했던 제의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서 우리는 예수운동과 동질적인 계급적 기반을 가진 대상과 이질적인 대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비교대상을 선정하고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 보다 분명한 준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호슬리는 지식인적 민중운동이 대중동원에 실패함으로써, 1세기 팔레스티나의 사회운동들은 운동 구성원의 계급적 위치에 있어서 간명하게 구획되어진다고 본다. 요컨대 운동의 구성원으로 볼 때, 비적, 대중적 예언자 운동, 대중적 메시아 운동, 젤롯 등은 가족적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운동의 주변적 참여자들 간에는 상호이동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훨씬 용이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심지어 중심부 집단의 공식적 조직들 간에는 서로 명백한 구분이 지어져 있었겠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하였으리라고 보는 것도 그리 무리한 추정은 아니리라. 가령, 68년 예루살렘에서 젤롯 연합이 형성되어 일시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이 당파와 기살라의 요한이 이끄는 민중연합, 그리고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끄는 메시아 운동적 민중연합이 예루살렘을 분할 점거하고 있는 혁명의 마지막 기간 동안 갈등 관계가 계속되는 중에서도 구성원들의 수평적인 상호이동이 계속되고 있었고, 중심부 집단 간에도 선택적으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유대전쟁사4,224~365). 아마도 귀족이나 왕족들을 숙청하는 등의 활동에서 중간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당파의 명령계통에 준하기보다는 그들 간의 지연 혈연 및 기타 친분관계 등 다양한 비공식적 연결망에 의해서 처신하곤 했던 것 같다.[각주:22] 이와 같이 어느 정도 자발적인 다양한 상호이동 및 비공식적 연결망은 운동 집단간의 공시적일 뿐 아니라, 통시적 현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슬리처럼 당파들 간의 유형적 차이를 밝혀내는 작업은 이들 운동집단들 간의 시공간적인 연계 및 상호이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예수의 추종자들의 통시적 승계 행위가 공식적 승계집단을 통해서만 수행되었다고 가정하는 그리스도교 신학계의 신화는, 예수로부터 배운 야훼신앙 정신을 승계하기 위해 조직된 공식적인 분파적 경계를 넘나드는 대중적 상호이동의 정당성을 간과한 결과며, 엘리트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몰역사적 역사의식의 흔적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호슬리 자신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제기한 비교연구의 논제는 그리스도교 운동사를 새롭게 보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데 왜 지식인 중심의 운동은 대중적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까? 이에 대한 호슬리의 대답은 불명료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계급위치에 따른 인식론적이고 담론적인 한계탓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므나쎄에게서 예외가 가능했던 것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이례적으로 대중 담론의 형식인 대중적 메시아니즘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각주:23] 이 주장 이면에는 고대농경사회에서 대중과 지식인간에는 적어도 일상담론 속에서는 상호소통 가능성이 극히 제약되어 있다는 전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을 너무 강한 준거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매체가 급속도로 발전한 오늘날에 비할 수는 없지만, 계급간 소통의 가능성은 비록 제한적이나마 존재했고, 또 사회마다 혹은 시대마다 그 정도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노정되리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호슬리는 고대사회에서 지식 엘리트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문자언어에 한정하여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구술사회에서 문자 생산물은 낭독을 통해서 대중 담론 형성에 개입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런데, 호슬리가 인용하는 바, 고대사회에서 문자언어의 해독률이 전체 구성원의 10% 미만일 거라는 일반론적 추정[각주:24]을 대입해보면, 지식인과 대중간의 계급적 차이는 상호소통의 가능성을 극도로 제약하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호슬리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지식인 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대별되는) (사회운동) 형태들의 복합이나 결합체는 없었다(괄호 안은 인용자)고 단언하는 것이다.[각주:25] 그러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감각적 기호를 매개로 한 상징체계가 문자계층과 비문자계층 간에 더욱 유용한 교신수단일 수 있음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각주:26] 결국 그는, 의도한 것은 아님에도, 고대의 사회적 투쟁을 계급위치에 귀속시키는 환원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엘리트층과 대중을 망라하는 일상적인 소통적 기재인 문화적 상징적 매체의 존재를 보다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다. 또한 지식 엘리트 계층이 대중동원에 성공한 사회운동의 주역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된 역사적 과정 그리고 대중 자신이 지식 엘리트를 매개하지 않은 채 변혁에 대한 주체적 의식을 갖추게 된 역사적 과정을 유념했어야 했다. 실재로,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그리고 로마 시대로 이어지면서 대중 동원에 성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전략집단의 계급적 위상은 왕족/귀족소자산가 계열의 지식인대중으로 전반적으로 이동해 가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각주:27]

셋째로, 도시와 시골이라는 사회생태학적 맥락에서 민중운동들을 범주화할 수 있는데, 젤롯과 시카리가 도시에서 발생전개된 사회운동이었고,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도시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면, 비적은 주로 농촌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대중적 예언자 운동은 도시와 농촌에서 모두 발견된다. 비적이 대중의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한저항 유형인 반면,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보다 정치화된 저항유형이라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그리고 시카리가 여타 대중운동에 비해 매우 이데올로기화한 정체성을 가진 운동 유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시에서 전개된 운동은 보다 정치적인 반면, 농촌의 운동은 덜 정치적일 수 있다는 호슬리의 추론은 자명한 논리적 귀결처럼 보인다.

요컨대 호슬리는 농경사회의 계급투쟁을 두 가지 양상으로 논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착취구조로 인한 계급투쟁의 양상인데, 농경사회에서 착취가 도시 대 농촌의 문제라는 점에서 혁명적 동력은 기본적으로 농촌에서 발원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동원 상태의 농민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혁명적 상황으로 전화되는 과도기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하향의) 동원상태를 설정하는 데, 그것이 바로 비적이다. 아무튼 호슬리는 도시 대 농촌으로 나뉘는 착취구조 때문에, 기본적으로 농촌은 혁명적이고 도시는 반혁명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부분은 젤롯을 공격했던 사제귀족 출신의 아나누스와 예수가 이끄는 예루살렘 시민연합의 반혁명 시도에 관한 논의다.[각주:28] 그것은 예루살렘의 시민들(도시 거주 대중들, city-people)이 성전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각주:29]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카리 같은 도시적 혁명집단이나, 농촌에서 유래했지만 도시에서 그 폭발성을 발현했던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에 관한 문제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농경사회의 계급투쟁의 두 번째 양상에 주목한다. 즉 계급의식의 문제다. 호슬리는 도시의 현상이었던 시카리를 이례적으로 매우 이데올로기화된 사회운동의 전형으로 설명한다. 또한 비적 같은 농촌의 사회운동은 덜 정치화되었던 반면, 비적에서 유래한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은 현저히 정치화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그것은 도시의 사회운동이 더욱 현저한 계급의식을 갖추었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중의 계급투쟁 관점의 지적 소유권자인 홉스봄에게서 그런 것처럼[각주:30] 착취관계는 통시적으로 비교적 지속성을 지니지만, 계급의식은 통시적 과정에서 (급격한 혹은 완만한) 전화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호슬리는 착취관계에 의한 즉자적 계급투쟁이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게 되는 통시적 진화(進化) 과정에서 혁명기 사회운동들의 보다 정치화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생태학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중의 계급투쟁 논의는 도시와 농촌의 갈등과 예수의 성전 저주 예언의 사회학을 직결시키려 했던 타이쎈의 주장[각주:31]보다 한결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타이쎈에게서 사회적 착취 구조(구조의 행위자에 대한 규정성의 차원/도시와 농촌간의 착취구조)와 담론적 갈등(행위자의 자발적 대응의 차원/성전에 대한 저주 예언)일 대 일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호슬리에게선 그러한 일차원적 사회학을 넘어서 행위자의 혁명적 저항이 통시적으로 점점 정치화되는 과정을 사회생태학적 공간을 따라 추적하고 있다. 즉 농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운동들이 도시를 점거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과 사회운동의 역할이 점차 혁명적으로 전화되는 과정이 맞물리는 통시적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를 단순 대응시키기보다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보다 정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생태학적 지형도는 농촌의 예수운동이 혁명기 도시의 사회운동들과 비교할 때 비폭력적인 지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반면 정치적 전망에 있어서는 매우 절제되어 있는 이유를 암시해 준다.

그런데 호슬리가 이와 같이 도시 주민들을 반혁명적 지향과 관련시키고 있는 어법은, 젤롯이나 기살라 요한의 집단, 시몬 바르 기오라의 집단 같은, 농경민이 주축을 이룬 도시의 혁명적 대중운동 집단에 대해 독설적 어투로 비난하고 있는 요세푸스의 어법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마치 요세푸스를 반박하려는 집착에 몰두한 나머지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이다. 반면 그의 이론적 후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홉스봄은 도시빈민의 폭동을 농촌의 비적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원초적 반란의 한 유형으로 묘사하고 있다.[각주:32] 그러나 호슬리에게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의 도시민은 권력의 이해관계에 포섭된 존재이거나 변덕스럽게 지지세력을 바꾸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은 그의 저술들 전체에 걸쳐 대체로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요세푸스로부터, 주후 66년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 전 지역에서 반로마적 혁명 집단들이 로마군을 축출한 직후, 갈릴래아의 수도격인 티베리아에서 도시의 빈민들과 (아마도 이 도시에 편입된 인근 지역의) 어부들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철저한 사회적 혁명을 추구하였다는, 역사적 개연성이 높은 정보에 접하게 된다(자서전65~67).[각주:33] 이러한 대중적 민중세력은 티베리아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다른 민중운동과 제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자서전33~38 참조). 그리고 이들은 당시 이 지역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갖춘 민중운동 지도자로, 훗날 예루살렘으로 옮겨간 뒤 가장 걸출한 혁명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된 기살라의 요한과 연합한다(자서전88 참조).

호슬리의 이러한 편견은 아마도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의 사회생태학 속에 드리워진 권력 메커니즘을 편협하게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권력은 자원에 대한 불균등한 착취 관계를 통해 규정될 수 있다. 호슬리는 착취관계의 핵심으로 부채의 동학(dynamics of indeptedness)을 상정하며, 이 부채관계는 주로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이라고 본다.[각주:34] 이때 그는 자원을, 실물 가치를 우선시하여 이해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도농의 관계에는 상징적 자원에 대한 권력관계가 사실상 괄호쳐 있다.

그런데 권력은 정당성 주장과 강제력을 통해 착취 관계를 재생산한다. 후자가 불균등한 착취관계를 더욱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면, 전자는 은폐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양자는, 그 상대적 강도의 크기가 시기별로 변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나 공존함으로써 착취적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정당성 주장과 강제력은 각기 실물적 차원뿐 아니라 상징적 차원을 함께 갖는다. 권력적 체제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차원은 때로 서로 조응하지만, 또 때로는 부조응하기도 한다. 전자는 이 두 차원의 갈등적 공존이 체제의 통합을 위해 순기능하는 경우고, 후자는 역기능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순기능하는 경우를 권력의 구심성’, 역기능하는 경우는 원심성이라고 규정한다면, 권력의 이 두 속성의 공존 및 상호관계의 구체적 양상에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 사회를 특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구심성이든 원심성이든 권력은 엘리트 집단과 더불어 생각해야 한다. 전자에는 왕족과 예루살렘 성전 귀족, 평신도 귀족 등, 도시에 거주하는 대자산가 권력층이 있고, 후자에는 촌락적 엘리트 층으로, 영향력 있는 지방 사제나 바리사이와 서기관, 그밖의 씨족장, 촌장 같은 부류가 속한다. 이 두 범주의 엘리트간에는 분명 수직적인 계서체계(hierarchic system)가 있다. 가령, /귀족과 씨족장/촌장 간에는 공납이나 부역, 군역 등 조세군사적 행정제도를 통해 위계적으로 계서화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고위사제와 지방의 평사제 혹은 바리사이/서기관 간에는 성전을 매개로 하는 종교적상징적 계서체계가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각주:35] 하지만 지방의 엘리트들은 행정상으로나 종교전통으로나 일정하게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도시와 지방의 권력 엘리트가 잘 짜인 수직적인 계서체계를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평적인 공조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어야 체제의 안정된 재생산이 가능해지게 된다. 이때 수직적인 계서체계와 수평적인 공조체계는 실물 차원에서 뿐 아니라 상징의 차원에서 서로 얽히면서 하나의 체제적 통합 메커니즘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체계적 통합 메커니즘의 작동 과정에서 사회의 모든 대상물들을그것이 실물적이든 상징적이든가로지르는 경계(boundary)가 만들어진다. 즉 포섭과 배제의 경계가 형성되는 것이다.[각주:36]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도농간의 갈등을 단순하게 이해했던 호슬리의 견해와는 다소 다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우선 사회의 포섭과 배제의 경계짓기는 피지배층 일반을 크게 두 부류로 구획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슬리가 많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학자인 게하르트 렌스키(Gerhard Lenski)에 의하면,[각주:37] 정상적인 농경사회에서 75% 가량의 농민계급과 3~7% 가량의 도시의 장인상인 계급이 피지배층이면서도 권력의 주된 포섭의 대상인 반면, 5% 가량의 부정하고 천한 계급(unclean and degraded classes), 그리고 역시 5% 가량의 소모집단(expendables)은 권력의 주된 배제의 대상이다. 요컨대 농민이나 도시 주민이 포섭의 대상이라면, 농촌의 유랑민 계층이나 도시의 빈민층은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체계의 준거로 볼 때 일탈자로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배제된 도시의 주변계층은 종종 귀족에게 고용된 탈가치화된 폭력집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게쎄마네로 몰려온 대사제의 종들이나, 빌라도의 법정 밖에서 고위사제들에게 매수되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 사람들을 마가복음저자가 오클로스(οχλος)[각주:38]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상은 안정적인 농경사회의 경우인데, 원초적 반란기는 이러한 사회를 지탱해 주던 포섭과 배제의 가치체계가 급격히 교란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 상황을 내포한다. 이 경우 권력연합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으면서도 권력에 포섭되어 있던 계급들의 광범위한 이탈이 일어난다충분히 정치화된 형태로든 아니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다 혁명기에 착취관계에 의한 계급투쟁의 문제는 도시와 농촌에 두루 퍼져있는 피지배 대중의 광범위한 일탈 및 그들의 정치적 동원의 문제와 연관된다. 이러한 일탈과 동원의 문제는 도농 간의 관계에서 첨예하게 부각되는 부채의 동학만으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기성의 지배적 가치체계가 더 이상 대중을 효과적으로 포섭하지 못하게 된 가치의 아노미적 상황과, 대안적 비전이 일탈된 대중을 혁명적인 사회운동에 동원되게끔 하는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이해 또한 필요한 것이다. 결국 호슬리는 부채의 동학으로 표상되는 정치경제적 해석에만 몰두하여 도시와 시골의 갈등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혁명기의 대중적 저항의 탈지역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권력 엘리트 계층의 결속을 너무 과장되게 이해한 나머지, 그들의 분화 가능성을 간과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도시의 권력 엘리트와 농촌의 엘리트는 단선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공식 비공식적으로 엮인 수평적인 공조관계와 교차하여 얽히면서 권력연합을 구성하였다. 이것은 중심부 엘리트의 체제적 통합 능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 혁명기에 이두메 종족 집단의 역할에서 볼 수 있듯이(유대전쟁사4,224~388 참조), 지방적 엘리트 세력은 종종 혁명적이었다. 나아가 중앙의 엘리트 계급조차도 혁명적 민중연합의 우파적 세력에 가담하곤 했다. 앞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수도인 티베리아의 유스투스 바르 피스투스(자서전3640 참조), 시몬 바르 기오라의 예루살렘 입성에 협조한 고위사제 마띠아스(유대전쟁사5,527)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배 엘리트의 이러한 분열은 정치경제적 착취구조에만 주목할 경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돌출적 상황이다. 그래서 호슬리는 이들의, 역할을 애써 폄하하고 있다. 여기에는 혁명기에 대두한 묵시적이고 대중적인 대안적 비전이 이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그런데 앞서 본 권력의 구심성 문제는 도시와 시골간의 의사소통 기재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문자 매체는 부분적으로 팔레스티나 내의, 나아가서는 디아스포라를 포괄하는 유다 사회 전체를 묶어주는 종교공동체적 형성 기재였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고향 회당에서 대중 앞에서 이사야서를 읽어주었다는 루가복음서의 기사(누가복음4,16~19), 문서가 구술용으로 활용됨으로써 구술사회의 공론 형성의 기재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다. 신약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구약성서에 대한 기억들은 바로 이러한 구술용 문서들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밖에 성전이나 회당 같은 건조물, 제의 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제 등은 유다 사회를 종교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제도화된 야훼신앙의 기구들과 담론들은 (도시와 시골을 포괄하는) 종교공동체로서의 유다사회의 핵심적인 의사소통 기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나라 신앙이, 그 세부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더라도, 유다사회의 다층적 구성체들을 연계시켜 주는 체제적 통합의 상징적 의미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적 비전이 교란되어 신념의 공허 상태가 급속도로 확산되어갈 무렵, 대중사회에서 유래한 대안적인 혁명적 비전이 하느님나라 신앙과 결속되었다면, 지배 엘리트층이 이러한 대안적 비전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아리마태아 요셉은, 비혁명기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메시지에 동화된 엘리트의 실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도시와 시골의 정치경제학으로 포착되는 권력연합에 대한 이해는 실제의 역사를 분석하는 데는 지극히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치경제적 현실 못지않게, 상징적 의미틀의 결속과 관련된 문화적 현실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설정을 문화정치학으로 명명한 바 있는데,[각주:39] 이상에서 본 것처럼 정치경제학과 문화연구를 연결시키려는 이러한 시각은 호슬리의 한계지점을 돌파하는 대안적 설명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시대 민중운동에 대한 호슬리의 논의에 대해,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비평적 논평을 시도해 보았다. 예수운동을 동시대 팔레스티나의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비교를 통해 조명할 때, 그의 연구는 특히 빛을 발한다. 무엇을 비교해야 하고 무엇을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또 비교 가능한 대상을 성공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할지 등등. 그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

호슬리에 의하면, 1세기 팔레스티나의 민중운동 전개는 적어도 세 단계의 변별적 과정을 통해 조명되며, 예수운동은 민중운동이 매우 억제되어 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 속에 나타나는 정치적 투쟁의 흔적이 요세푸스 저작에 나오는 젤롯 등에 비해 희소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역사적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이 전승은 일체의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라는 추상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폭력적 저항이 억제된 시대의 담론적 산물임을 반영한다. 예수 이후 민중운동이 극적으로 고양하는 질적 계기들이 있었다. 예수운동과 대비하여 종종 잘못된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젤롯 운동은 민중운동 고양기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그는 민중운동을 정치주의적인 발전론적 관점에서 보는 딜레마를 빗겨가고 있다. 그가 다른 대다수 연구자들에 비해, 이념보다는 실행을 강조하다보니, 그 정치적 효과에 의해 운동의 발전 정도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예수운동을 사회운동으로 보려했던 것이 예수운동을 평가절하하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그의 선임자들은 예수가 위대하냐 스팔타카스가 위대하냐는 식의 단순 이분법에 빠져 늪지를 헤매야 했다. 반면, 그는 사회운동을 평가하는 준거로 정치적 혁명(political revolution)과 사회적 혁명(social revolution)의 이중개념을 제시함으로써 효과와 가치를 동시에 비교하는 안목을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예수운동은 정치적 운동으로서는 소극적 측면을 갖지만 사회적 운동의 관점에서는 다른 운동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급진주의적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치적 변혁에의 전망이 극도로 억제된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예수운동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다 근본적인 변혁적 전망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젤롯 같은 혁명기의 민중운동들이 권력에 대한 저항의 실천을 정치제도의 혁신에 치우쳐 실행한 것과는 달리, 삶을, 존재 자체를 억압하는 보다 근본적인 권력을 문제시하는 해방적 전망이 예수 담론과 실행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각주:40] 이러한 변혁 전망은, 일상 자체가 혁명적 비일상에 압도되어 정치제도에 온통 시선이 집중된 시기보다는, 삶의 일상성이 보다 현저하게 드러나는 시기에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예수운동은 활동 여건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발전하였기에 도리어 이러한 비혁명기가 제공하는 기회를 얻기에 용이했고,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극도로 고양시킴으로써 사회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운 신앙 전통을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개진하는 데 있어 그의 논거는 설명적이라기보다는 단언적 어투로 일관한다. 즉 정치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면서도, 여기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일상성과 관련된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거의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대중의 저항을 논의할 때 문화적 요소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문화라는 개념에는 대중이 국지적 영역 내에서 체험하는 일상성이 포함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국지성이 다른 국지성들과 추상화된 시공간 속에서 접속되어 상징적 동질성을 형성하는 문화공동체적 통합 과정도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갈릴래아의 어부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예수운동이 동시대의 다른 민중운동들과수많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서로 연계되었을 가능성, 특히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통시적 과정에서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3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사회적 혁명의 실천으로서의 예수운동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예수전승의 적지 않은 담지자들이 예수 당시나 그 이후 시대의 많은 민중운동의 주역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자 한다.

예수운동은 지역적으로 두 단계의 전개를 보여준다. 하나는 갈릴래아 활동기이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활동기다. 전자에선 예수운동을 권력 해체적 미시동원(micro-mobilization)의 맥락에서 볼 때 유용하다. 하나의 잘 조직된 운동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주로 떠돌이 예언자 형태의 실천을 펼쳤던 제자단이 있었고, 각 지역에서 은밀히 이들의 운동에 협조했던 이들이 있었다(‘지역협조자유형). 또 제자단 내에서도 특화된 내적 집단(inner circle)이 존재했다.[각주:41] 한편 하느님나라의 임박한 도래가 예수집단의 주요 선포내용이었는데,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선포이기도 했다. 사실 동시대 많은 묵시적 문헌들이나, 구약 성서의 후기 문서들에서 그 나라의 임박한 도래는 현존하는 권력의 불의를 고발하고 대안적 체제를 염원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신앙적 비평의 어법이었다. 요컨대 하느님나라의 임박한 도래 사상은 반체제적인 상징적 의미틀(frame)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예수운동의 제자단 가운데는 세례자 요한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세례자 요한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집단과 지속적인 공식적 비공식적 연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5장의 게라사의 광인 이야기를 데카폴리스의 하나인 헬레니즘화된 도시의 시골 지역에 실존했던 한 비적 집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이 텍스트는 그가 예수운동의 지역협조자로 가담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미시동원조직들간의 협동적 연계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위동원자(meso-mobilization actor)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예수집단은 분명 혁명적 대동원(macro-)을 성공적으로 실현하는데 기여하지는 못했다. 우선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은 늘 국지적이고 소규모적인 활동에 그쳤다. 예수 자신이 세례자 요한이 주도한 운동에 참여했다가 그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갈릴래아로 도주했고, 이 곳에서 그의 활동이 요한과 연속성을 지닌 것으로 (대중과 헤롯데 안티파스 당국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운동이 처음부터 공개적 환경에서 전개될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촌락의 회당 안에서 활동하다가 바리사이와 충돌한 이후, 촌락사회의 외부에서만 가능한 활동공간을 구축할 수 있을 뿐이었다.[각주:42] 그러므로 갈릴래아에서의 예수 주변의 무리복음서들의 과장된 표현에도 불구하고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그의 예루살렘행은 메시아 도래 사건에 대한 민족적 기대와 관련되어 있다. 로마 당국은 명절 때는 팔레스티나 주둔 주력부대를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킨다. 그만큼 치안 유지에 비상 상황이 우려되는 시기인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의도적인 상징행위를 벌인다. 그리고 예수일행의 모종의 만찬직후, 대사제가 산헤드린의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사병을 긴급 출동시켜 예수를 체포한다(대중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 체포하지 말자는 전날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통해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혁명적 대동원을 기도했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은 그가 체포되고 처형당한 직후에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부활에 관한 오래된 전승은, 그의 되살아난 몸이 어땠다는 측근들의 목격담/체험담이 아니라, 그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보고뿐이다. 그나마 이 최초의 목격자들도 몇몇 측근 여인들로 묘사될 뿐이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여인의 증언은 증거 능력을 갖지 못한다. 요컨대 부활에 관한 오래된 전승 속에는, 그분의 몸의 부활을 해명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반면 부활설의 유포는 갈릴래아 현현설, 예루살렘 현현설 등과 결합되어 예수운동의 재건 명분으로 활용된다. 사도행전 텍스트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재건되고 점차 결집되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예수운동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예수전승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지도적 인물들에 관하여 듣게 된다. 이것은 처형-부활 사건을 거치면서 예수운동이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속되어 확대 재편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시사되는 것처럼, 부활 이후 예루살렘과는 전혀 별개의 예수운동이 갈릴래아 촌락에서 형성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주로 촌락사회의 대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촌락 사회의 외부로 밀려난 기층대중(오클로스)이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예수운동은 원제자단에 의해 승계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운동들과 다양한 모습으로 접속되면서 승계되었다. 또한 교회 형태로 발전한 예루살렘의 예수집단이 예수운동 승계의 유일한 예가 아니다. 실제로는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예수운동이 승계되었을 것이며, 그 과정은 현존하는 텍스트를 남긴 교회 유형 운동의 신조로 다 포괄될 수 없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교회 운동에 대한 비판적 입지를 함축하고 있고,[각주:43] 이러한 지양 논법에는 기층대중의 반엘리트주의적인 사회적 비전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각주:44]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더 나아가 마가복음에는 반교회, 반교리적인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 전개의 계보가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각주:45] 그러므로 신조로만 예수운동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승리자의 전통을 간직하여 온 교회사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예수운동이 동시대의 다른 사회운동들과 어떻게 연계되었으며 특히 혁명기에 예수운동이 어떤 형태로 관여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상에서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나는 호슬리의 결론적 주장처럼 예수 자신의 실천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성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 자신이 혁명적 대동원에 실패하였고, 이 운동과 통시적으로 연계된 혁명기 사회운동들이 혁명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운동이 대중 사이에서 희망의 원리로서 간직되었으며, 이 전통이 사상된 담론적 구성물들만을 전수받은 우리에게까지 그 의의가 재현될 폭발적 잠재력을 가지고 다가오게 된 것이다. 즉 오늘날 예수가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은 교회로 현존하는 명시적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승리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된 예수 실천의 의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해석을 위해서, 호슬리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관점인 해방의 거시정치와 미시정치의 결합으로서의 문화정치학적 관점을 요청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예수 행태를 특징짓는 요소로 기적 행위와 비유의 언술을 드는 데 합의에 이르고 있다. 나는 이 두 요소에서 예수운동의 사회적 혁명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예수의 기적 행위는 병리학적 질병(desease)의 원인 제거 행위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질병(illness)의 관리 메커니즘인 건강관리체계[각주:46]를 전복시킴으로써 질병 걸린 자를 해방시키는(healing/liberating) 행위이며, 그리하여 배제주의적인 사회문화적 코드를 교란시키는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 한편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 선포를 일상언어의 형태로 구상화한 독특한 언술 방식이다. 즉 초월적 대상을 지혜적 언술로 은유하는 것이다. 예컨대 (초월적 대상언어) A(지혜적 대상언어) B이다는 형식을 갖는다. 여기서 종말론적 언술이란 삶의 일상적 가치를 전복하는, 초월 세계를 향해 청중을 부르는 언술 효과를 갖는다. 요컨대 그것은 경험 속에서 부재하는 공간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그런데 청중의 세계는 지혜의 세계다. 지혜는 기성 사회의 문화적 규범/관습체계의 가치를 내재화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언술에 직면한 청중은 결단을 위해선 현실 공간에서 이탈해야 하고, 지혜적 언술에 접한 청중은 현실의 연장선 위에서 현실의 극복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 둘을 결합한다. 그리하여 이 두 언술구조의 상호 끌어담김의 긴장 속으로 청중을 몰입시킨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비유의 언어는 결코 이 긴장을 해소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유 속의 그 초월적 나라는 청중에 의해 끊임없이 내재화되어야 하지만, 끊임없이 이 세계의 언어, 이 세계의 이데올로기, 이 세계의 대안적 체제로 구상화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비유의 청중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 어떤 언어로, 어떤 이념으로, 어떤 체제로 고착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의 귀착점인 단순 진리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체감하게 된다. 즉 비유에 접한 청중은 예수가 완결시키지 아니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실천의 공동주체로 참여하게 되지만, 그들의 실천 지향은 목적론적이라기보다는 유목민적이다.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예수의 사회문화적 혁명의 요소가 생생하게 보전되어 있으며, 그것은 엘리트주의적인 교리의 생산자이자 승계자의 자취가 아닌, 민중의 염원을 자양분으로 하여 간직된 또 다른 승계의 흔적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대중의 이 집단적 언행이 자신들의 삶과 분리된 자기기만의 한 양식이라는 가정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추구의 한 양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제도화된 교회와 신학의 대변자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1. M. Hengel, Eng. tr. by David E. Green, Victory over Violence. Jesus and the Revolutionist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3; Deut. orig. 1971) 참조. [본문으로]
  2.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제안한 비교의 고전적 방법의 하나인 '일치의 방법'(the method of agreement)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John Stuart Mill, 〈비교의 두 방법〉, 한국비교사회연구회 엮음, 《비교사회학: 방법과 실제 I》(서울: 열음사, 1990), 217~221 참조. [본문으로]
  3. M. Hengel, Die Zeloten(1961). [본문으로]
  4. S. Zeitlin, "Zealots and Sicarii", JBL 81(1962). [본문으로]
  5. M. Smith, "Zealots and Sicarii, their Origins and Relations", HTR 64(1971), 1~19. [본문으로]
  6.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Studies in their Encounter in Palestine during the Early Hellenistic Period(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Deut. orig. 1973) 참조. [본문으로]
  7. 같은 책, 56. [본문으로]
  8. 어록 텍스트와 〈마가복음〉에 대한 문학사회학적인 전승사 연구를 통해 최근 가장 주목받는 예수운동 연구자의 하나로 부상한 버튼 맥은 예수담론의 각 유형을 전승한 다양한 예수운동을 명료하게 구분해 냈는데, 그가 가정한 전승 유형에는―대부분의 선행 연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대중담론적 전승 형식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가설에서 전승의 계기는 대중적 욕망이나 바람보다는 예수운동 엘리트의 담론적 필요와 거의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Burton L. Mack, A Myth of Innocence. Markand Christian Origins(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91) 참조. [본문으로]
  9.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는 한국신학연구소 엮음, 《예수시대 민중운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에 수록된 그의 논문들과, 이러한 동시대 민중운동들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예수운동에 관한 연구서인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ence in Roman Palestine(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을 주로 참고할 것이다. [본문으로]
  11. 《예수시대의 민중운동》에 실린 6편의 논문들(이정희・최형묵 옮김); 이준모 옮김, 《예수운동―사회학적 접근》(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그리고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6)에 수록된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의 제6장 〈정치적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물음〉(이준모 옮김) 등. [본문으로]
  12. David Rhoads, 김진호 옮김, 〈젤롯운동의 기원과 역사〉, 《신학사상》 81(1993 여름). 이것은 원래 Anchor Bible Dictionary (Doubleday, 1992)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13. Horsley, 〈시카리: 고대 유다의 ‘테러리스트들’〉,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132의 주1). [본문으로]
  14. Smith, “Zealots and Sicarii” 참조. [본문으로]
  15. Horsley, R.A., & J.S. Hanson,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Minneapolis․Chicago․New York: Winston Press, 1985), xviii 이하. [본문으로]
  16. 같은 책, 3~4. [본문으로]
  17. 같은 책, 98. [본문으로]
  18. E.J. Hobsbawm, 진철승 옮김, 《원초적 반란》(서울: 온누리, 1984); 같은 저자, 황의방 옮김, 《의적의 사회사》(서울: 한길사, 1978) 참조. [본문으로]
  19.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았다’는 말은, 농민들의 저항 목표가 계급의 재구조화를 지향하거나 그런 효과를 내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홉스봄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민중운동을 근대 산업사회의 민중운동과 구별짓기 위해 사용한 사회학적 어법이다. 그에 의하면, 계급은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데, 하나는 착취 관계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계급의식에 의해서다. 그런데 전자는 어느 시대나 착취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계급은 착취적 체제인 한 항상 실재하며, 따라서 계급투쟁은 언제나 실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계급투쟁이 계급 해방적 비전에 기초한 계급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계급의식은 근대 산업화의 소산이다. 요컨대 농민들의 비적화 등에서 볼 수 있는 계급투쟁은 저급한, 곧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한 계급투쟁인 것이다. E.J. Hobsbawn, “Class Consciousness in History”, I. Meszaros, ed., Aspests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nes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1), 5~21; 같은 저자, 《원초적 반란》, 13~26 참조. 반면 호슬리는 전자본주의 시대의 농민항쟁의 두 시기를 구분하면서, 이 용어를 적용한다. 즉, 혁명기와 혁명 전기(홉스봄의 용어로는, 원초적 반란기, primitive rebel)의 민중운동들에 각각 ‘정치적’, ‘전정치적’인 저항을 대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0. 찰머스 존슨의 혁명이론에 관하여는, Anthony D. Smith, 〈기능주의적 혁명이론 비판〉, 김진균 정근식 엮음, 《혁명의 사회이론》(서울: 한길, 1984), 특히 148~67; 박종성, 《혁명의 이론사》(서울: 인간사랑, 1991), 156~65 참조. [본문으로]
  21. Horsley, 〈예루살렘의 므나헴―‘젤롯 메시아니즘’이 아닌, 시카리 안에서 있었던 간단한 메시아적 일화〉,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247~64 참조. [본문으로]
  22. 《유대전쟁사》 4,145~46에는 젤롯에 의해 구금된 왕족과 귀족들이 일단의 무리에 의해 피살되는 일화를 보도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이 젤롯의 기획된 행동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세습제 대사제직을 해산시키고, 신정제적 평등주의 전통의 소산인 제비뽑기를 통해 대사제를 선출한 것이나(《유대전쟁사》 4,155), 숙청 대상자 선정의 용의주도함(《유대전쟁사》 4,138~42) 및 영향력 있는 고위인사들에 대한 회유와 선무 활동(《유대전쟁사》 4,150)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젤롯은 매우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예루살렘의 대체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젤롯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유대전쟁사》 4,151) 결국 사제귀족 중심의 시민군에 의해 이러한 기획이 무산되게끔 한(《유대전쟁사》 4,196~207) 구금자들에 대한 살해는 공식적 명령계통과는 별개로 움직인 사람들의 개별적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비록 요세푸스가 지나치게 단순도식으로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묘사 속에서 우리는 젤롯을 포함한 여러 정파들의 형성이 가족이나 친분 있는 사람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유대전쟁사》 4,132). 그렇다면 조직의 명령계통을 무시한 일단의 살해자들의 행동에는 이런 비공식적인 연결망에 의한 담합이 개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개연성이 있다. [본문으로]
  23. Horsley, 〈예루살렘의 므나헴〉, 특히 258~260 참조. [본문으로]
  24. Horsley,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xii. [본문으로]
  25. 〈예루살렘의 므나헴〉, 258. [본문으로]
  26. 여기에는 과거라는 시간성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즉,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재해석하는 상징적 체계를 해석자/수용자와 동시대적 맥락 속에 재현함을 통해서 계급간의 차이를 꿰뚫는 집합적 기억이 구성되는 것이다. B. Schwartz, “The Social Context of Commemoration: A Study in Collective Memory”, Social Forces 61/2(1982). [본문으로]
  27. 김진호,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민중 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 형성론적 접근〉, 《민중신학》 창간호(1995), 79~116 참조. [본문으로]
  28. 〈젤롯당: 그 기원과 유다 항쟁과의 관련성 및 그 중요성〉, 202~208. [본문으로]
  29. 같은 논문, 204. [본문으로]
  30. 홉스봄에 의하면, 착취관계는 근대 이전과 근대 양 시기를 관류하지만 계급의식은 근대 산업사회의 발전과 관련되어 계기적 진전이 있었다고 본다. [본문으로]
  31. Theißen, 〈예수의 성전 예언―도시와 시골간의 긴장의 장 가운데서의 예언〉, 김명수 옮김,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72~94. [본문으로]
  32. Hobsbawm, 《원초적 반란》, 132~49. [본문으로]
  33. 이것은 요세푸스가 사제귀족 중심의 임시 혁명정부로부터 갈릴래아 지방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자마자 겪은 이야기로, 그 자신이 이 일화의 주요 등장인물로서, 그 진술 내용이 그의 통치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낼 뿐이라는 점에서 신뢰할만한 역사적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본문으로]
  34. Horsley, 《예수운동》, 135~138.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보려면 Douglas E. Oakmann, Jesus and the Economic Questions of His Day (Lewiston/Queenston: The Edwin Mellen Press, 1987), 37~91 참조. [본문으로]
  35. 호슬리는 바리사이를 ‘가신계급’(retainers class)으로 보는데(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17), 이는 게하르트 렌스키의 가신계급에 대한 논의를 바리사이 연구에 적용한 살다리니의 연구를 수용한 것이다. Anthony J. Saldarni, Pharisees, Scribes and Sadducees in Palestine Society (Edinburgh: T&T Clark, 1985), 277~97; G. Lenski, Power and Privilege. A Theory of Social Stratification (New York: McGraw-Hill, 1966), 243~48 참조. 그러나 이 견해는 권력의 수직적 계서체계 상에서의 바리사이의 역할에만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촌락에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간과하고 있다. [본문으로]
  36. 상징의 차원에서 포섭과 경계는 정-부정의 체계를 통해 구체화된다. 말리나는 매리 더글라스(Mary Douglas)의 ‘집단-결속 모델’을 성서시대 사회 해석에 적용하여, 그 사회의 상징적 문화적 경계화를 읽어내려 한다. Bruce J.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Insights from Cultural Anthropology (Atlanta: John Knox Press, 1981) 참조. 이러한 논의는 특히 질병이나 성(性)과 연관된 배제의 메커니즘과, 그러한 가치의 전복으로서의 기적이라는 관점의 연구와 결합되는데, 이에 관하여는 Jerome Neyrey, “The Idea of Purity on Mark's Gospel”, Semeia 35(1986), 91~128; J.J. Pilch, “Death with Honor: The Mediterranean Style Death of Jesus in Mark”, BTB 25/2(1995), 65~70 참조. [본문으로]
  37. Lenski, 같은 책, 266~85 참조. [본문으로]
  38. 〈마가복음〉의 용법에서 오클로스는 ‘사회의 일체 자원으로부터 비자발적 배제’로 특징지어지는 집단을 과대대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참조. [본문으로]
  39.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시대와 민중신학》 4(1997) 참조. [본문으로]
  40.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318~26. 이 점에서 마커스 보그는―비록 방법론적으로 역사사회학적 시각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일상적 진리체계에 대한 도전자로서의 예수 이미지를 호슬리보다 한층 명료하게 펼친다. Marcus Borg, 김기석 옮김, 《예수 새로보기―영 문화 제자됨》(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참조. [본문으로]
  41. 〈마가복음〉은 예수의 제자단에는 특화된 내부집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에 관련된 비밀을 더욱 많이 점유하고 있는 존재로서 기억되고 있다. 한편 마가는 제자단을 ‘열둘’(δωδεκα)이라는 고 부른다. 비록 마가는 이것을 ‘숫자’의 개념으로 혼돈하고 있지만, 전승 자체에서 이들이 숫자의 개념으로서 이해되는 것은 ‘후대’적 층위로 보인다. 사실 유다 전통에서 ‘열둘’은 숫자의 의미를 넘어서 전 민족/민중의 구원/해방을 상징하곤 한다. 또한 아마도 제자들의 숫자는 열 두 명이 넘었던 것 같고, 거기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이 적지 아니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열둘’은 제자단 전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제자 중의 제자’인 내부집단을 뜻하는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2. 〈마가복음〉 3,6은 예수운동의 대중적/공개적 활동의 공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시사하고 있다. 대중활동 공간은 크게 셋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중 3,6 이전에는 촌락의 회당이 주요한 무대였다면, 그 이후는 단 한 차례(나사렛 회당)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회당이 나오지 않는 대신 갈릴래아의 호숫가가 주된 공간으로 나온다. 그 외에 ‘집’도 공개적 활동의 장소였지만, 이곳은 이 구절 전후로 나뉘는 활동방식의 변화와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활용된 공간으로 나온다. 한편, 3,6 이후의 대중을 묘사하는 주요 어휘가 오클로스인데, 이들은 〈마가복음〉에서 회당 안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반면, 호숫가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며, 이들이 등장하는 곳에는 유난히 창녀, 세리, 거렁뱅이 등이 많이 등장하고, 종/노예/사병 등을 지칭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정보들에 입각해서 나는 오클로스를 ‘비자발적 이탈’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집단을 과대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참조. [본문으로]
  43. Werner H. Kelber, 서중석 옮김, 《마가의 예수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참조. [본문으로]
  44. Richard L. Rohrbaugh, 〈마가복음서 청중의 사회계층적 위치〉, 《세계의 신학》 96․97(1996 겨울+1997 봄) 참조. [본문으로]
  45.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198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전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본문으로]
  46. 건강관리체계는 신체에 관한 억눌림의 재현체계의 하나로서, 사회적 요인과 분리할 수 없는 억눌림을 개체화하여 재현하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억눌림의 과잉분출이나 과잉억제로 나타나는 ‘부정(不淨)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과 정상적 분출/억제를 실현하는 ‘정결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로 나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