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7년 6월9일 열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창립기념 심포지엄의 발제원고로(명동 향린교회 향우회실에서), 논평은 김명수 교수(부산신학대학)가 맡았다. 그리고 [시대와 민중신학] 4(1997.12)에 게재되었다.
이 글은 민중신학의 제3세대의 출범을 선언하는 출사표적 성격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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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Ⅰ
민중신학의 전개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흔히 활용되는 방법은 세대별 구분법’이다. ‘세대’라는 말은 분류되는 세대들 간에 연속성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연속성과 차이’를 근거 짓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이론적 분류체계로서 명시적으로 제안한 것은 최형묵의 경우가 유일하다. 2 그에 의하면 “시대 상황의 차이에 따른 문제인식의 차이”가 그 분류 기준이다. 요컨대 세대별 구분법은 ‘동시대성’(contemporaneousness)의 차이에 따른 상이한 문제인식에서 민중신학 담론들 간의 차이가 노정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특정 담론은 (고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와의 ‘분절적 접합’(articulation; 이하 ‘절합’)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관계론적 사유’를 밑바탕에 두고 있는 분류법이다. 3 이때 ‘외부’는 그 특정 담론 외부의 다른 담론들(담론절합) 4 및 담론 외부의 것, 즉 ‘사건’의 집합적 표상인 상황 5을 포함한다.
이 도표는 주6)에 포함된 것임.
이러한 세대론은 민중신학 연구자의 단지 일부만을 포괄하는 한계가 있으나, 민중신학 전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그 두드러진 특징이란 위에서 말한바 ‘차이와 연속성’의 문제다. 6 여기서는 민중신학이 표방하는 ‘한국적 신학’ 논의에서 (형식 논리상 세대 간에 인식론적 차이가 깊이 깔려 있는 듯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초월하여 지속되는 계보학적인 연속성(‘한국적 신학’ 주장하는 민중신학 안팎의 다른 연구자군과는 변별적인)에 주목하고자 한다. 박성준은 그러한 ‘한국적’이라는 것의 규준(規準)을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우리의 현실의 삶”이라고 말한다. 7 이것은 ‘오늘’이라는 시간성과 ‘한국’이라는 공간성, 그리고 ‘우리’라는 주체의 문제를 함축하는 개념어다. 여기서 앞의 두 요소는 ‘삶’을 구성하는 시공간적인 사회구성적 요소를 가리키고,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삶’의 변혁을 추구하는 행위자의 요소를 가리킨다. 이러한 ‘한국적’의 규준은 민중신학을 실천이론으로 전개할 이론 내적 가능성을 부여한다.
첫째로, ‘오늘’이라는 시간성의 차원을 보자. 흔히 ‘한국적’이라는 문제설정은 ‘전통적’이라는 것과 친화적 관계로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해는 ‘시간적 과거성=한국적 특성’이라는 도식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런 도식의 신봉자들에게서 시간적 과거의 시점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도대체 어느 시점까지가 ‘한국적’ 특성을 경계 짓는 구분선인가? 여기서 ‘한국적=전통적’이라는 이해는 근본적으로 이론 적용의 한계 부분임이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이해는 ‘전통’(과거성)이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론적 본향이라는 검증 불가능한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과거’는 영향사적 차원에서 우리와 관련될 뿐(H.G. Gadamer), 그것 자체가 현재 우리의 존재의 특성은 아니다. ‘오늘’이라는 우리의 이해 시점은 과거와 미래의 끊임없는 개입(하이데거에 의하면 ‘기획투사’)에 의해 간섭받으면서, 동시에 미래와 과거를 창조적으로 ‘재현’하는 시간성인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차원이 함축된 시간성의 규준은 시간성의 재현을 둘러싼 투쟁의 문제를 이론 내부로 포섭한다. 요컨대 ‘한국적’을 논하는 규준을, 과거와 미래의 끊임없는 영향사적 개입(시간의 재현)과, 그것의 창조적 재현(재현의 시간)이 이루어지는(이 재현을 놓고 경합하는) ‘오늘’이라는 시간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통의 차원을 이론 내부에서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실천의 문제를 이론의 대상으로 끌어올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둘째, ‘한국’이라는 공간성의 차원을 보자. 한국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한국적’이라는 공간성은 (고정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무수한 영토적 경계(boundary)의 변동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까지의 영토적 경계가 한국적 공간성을 규정하는 분계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분단이라는 역사의 질곡은 ‘지금 여기’에서의 공간성 논의에 결정적인 교란적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그 경계 내부의 무수한 공간들(지방적 공간)은 ‘한국’이라는 공간성의 단순한 미분적 구성요소가 아니다. 미시적 지방적 공간은 끊임없이 ‘국가적 혹은 민족적 공간’으로서의 ‘한국적 공간’ 구성에 개입한다(예: 지방색; 지방자치체의 활동 등). 즉 ‘한국’이라는 공간성은 영토적 공간 내부를 통합하고, 외부(지역 국가 도시 등)를 내부로부터 분리하는 주도적 역할자인 동시에, 지방의 개입에 의해 그리고 외부의 개입(많은 경우 제국주의적으로 드러나는)에 의해 부단한 공간 재현의 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한국’은 미시공간과 거시공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공간이며, 때로는 전체주의적으로 때로는 지방분권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국수주의적으로 때로는 세계주의적으로 등등, 다양한 공간 재현 담론들의 과잉결정적 절합에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 8 바로 이러한 공간 이해는 ‘한국적’이라는 공간성을 고착적이고 고립적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실체로서 보게 하며, 나아가 공간 재현을 둘러싼 실천이론의 대상으로서 ‘한국’이라는 공간성을 바라보게 해 준다.
셋째, 주체의 문제로 박성준은 ‘우리’라는 용어를 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우리’란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가 ‘한국적 시공간’이라는 사회구성적 요소에 ‘우리’라는 실체를 환원시켜버리지 않고 있음을 주목하자. 즉 실천 주체로서의 ‘우리’는 ‘한국적’ 시공간에 의해 반영/투사된 실체가 아니다. 물론 ‘우리’라는 주체는 시공간적 구성에 의해 존재 가능성이 제약된 실체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나는 이런 차원의 ‘우리’를 ‘민중 모집단’이라고 부른 바 있다. 9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한국적’이라는 시공간성을 재현하기 위한 투쟁의 장에 서 있는 ‘우리’이며, 이 투쟁 전선에서 형성되어 가는 ‘우리’다. 요컨대 ‘한국적 시공간성’을 위한 투쟁의 유동적 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형성적 실체가 바로 ‘우리’, 즉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인 것이다. 10 그러므로 ‘민중’의 문제는 (구조의 반영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주체가 형성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 실천이론적 문제설정인 것이다. 11
이상에서 살펴본 바, ‘한국적’이라는 규준에 대한 민중신학의 논의는 그 실천이론의 위상을 시공간의 재현을 둘러싼 투쟁의 장에서 ‘민중’이라는 실천 주체의 형성 문제에 어떻게 신학적으로 개입할 것인가라는 과제로 이어지게 된다. 12
Ⅱ
주지한 대로 계보학적 시각에서 세대론적으로 포착된 민중신학은 각기 동시대의 비판담론들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그 담론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 비판담론들은 체제의 배제/박탈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워지는 위기구조에 대한 동시대적 위기의식을 담론 형성의 내적 구성원리로 하여 펼쳐졌다. 즉 민중신학의 신학적 특성은, ‘오늘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착종되지 않은 채 서구의 신학 사상사적 언어 논리의 회로(언어의 감옥) 안에서만 떠도는, 그 안에서만 ‘한국’을 논하고 ‘정치적 실천’을 논하며 ‘토착화’를 논하는 신학적 오리엔탈리즘, 신학적 식민주의 13와는 근본적으로 위상을 달리한다. 민중신학이 ‘신학’인 것은, 이른바 ‘서구신학’ 14이라는 폐쇄적 제의공동체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한국’적 위기구조에 대한 신학적 반성/비판이라는 점에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신학이기 위한 조건은 서구 ‘중심적’ 신학과의 공모 지점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을 비판하는 ‘탈중심적인’(=권력 해체적인) 신학적 논거를 제시하는 데 있다. 그리고 민중신학은 바로 이 논거를 ‘배제/박탈의 메카니즘’에 대한 신학의 비평 상실에서 발견했다. 15
체제는 인간의 권력 욕망의 제도적 구현체다. 여기서 ‘권력 욕망’은 ‘타자’(the other)를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능력의 추구다. 즉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을 만들고, 그 외부의 것을 자신의 내면과 외면 세계에서 찾아내어 그것의 존재 가치를 박탈하고 배제함으로써, 즉 타자화하고, 타자화된 대상을 응징함으로써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지향을 말한다. 그러므로 체제는, 체제가 추구하는 제도는 체제에 포섭된 사람들/대상들의 ‘생활양식’(Lebensweise: 마르크스; Lebensform: 비트겐슈타인)을 체제의 욕망대로 규제하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 훈육하고자 한다.
한편 주류적 신학은 신의 절대타자성을 전제한다. 이것은 인간적 가치 지향의 긍극의 지점에 신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원죄적 존재인 인간은 이 궁극의 지점에 접근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으로 인간을 신으로부터 타자화한다. 양자 사이에는 어떤 중립지대도 없다. 그러므로 타자적 존재인 인간은 예외없이 심판의 대상이며, 신의 응징을 받아 마땅한 존재다. 여기서 ‘신의 (절대) 은총’이라는, 인간의 요구(소망)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류의 통로가 일방적으로 제시된다(이 은총은 신의 절대적인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16 이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 승복(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으로부터 타자화된 존재에서 신의 의사가족(quasi-family)이 된 (신의) 동일자적 존재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신학적 언술은 위에서 본 체제의 권력 욕망의 변증과 얼마나 유사한가? 바로 그런 선택적 친화성 때문에 정통신학의 언술은 그리스도교 사회인 서구의 가부장적-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맞물리게 된다. 즉 서구사회의 자민족(백인-남성) 중심주의적인 ‘문명 대 야만’ 도식은 그리스도교의 ‘신자 대 비신자’라는 배타주의적 도식과 상보적 관계로서 공존의 지배논리를 구성해 왔던 것이다.
체제는 자신의 권력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전형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전략을 펼친다. 17 하나는 ‘외면적으로 질서의 한계/가능 공간을 구획 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으로 질서의 한계/가능 공간을 구획 짓는 것’이다. ‘외면적 구획’은 ‘억압의 전략’이며, ‘내면적 구획’은 ‘양생(養生)의 전략’이다. 18
전자의 경우에 체제는 안보의 총체를 건조(예: 바벨탑; 반공주의 등)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설정한 경계를 가시화하고 계량화하며, 그것으로 다른 경계들을 압도하는 과잉결정의 요소로 제시한다. 이런 안보의 상징물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응징의 체계’가 있다. ‘감금과 억압의 장치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감옥과 학교, 병영, 직장, 심지어는 가정과 교회에서 이런 총체적인 상징을 통해 각 구성원들의 특권을 위계화하고, 거기에 맞는 행위 가능 수칙들이 제시되며, 권위주의적 관계 구조(그것이 계급적 지배의 형태든 가부장적 지배의 형태든 간에)가 형성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경계 외부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응징한다(파문・종교재판・마녀사냥・이단시비 등은 이런 전형적 예에 속한다). 이때 응징은 경계 내부에 포섭된 이들에게 공공연히 드러나도록 가해지며, 19 그럼으로써 ‘외부’로 배제된 이들을 내부의 사람들의 적개심(희생양)과 측은지심(보호)의 대상 20으로 규정짓게 한다.
한편 체제는 양생을 전략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억압의 ‘내면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이 수행되는 공간은 습관 같은 일상의 영역이다. 그것은 인간을 (정신에 비해 가시적 대상인) ‘신체’로 환원하고, 나아가 신체를 계량 가능한 해부학적 대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수행된다. 21 그리하여 인간의 규범적 가치는 가시적인 계량적 척도로 환원되어 해석된다. 여기서 시각화된 인간의 규범적 가치의 실행자는 자아이지만, 그 가치의 주체는 ‘타자의 시선’이 된다. 22 즉 권력은 근대 의학적 해부학적 지식으로 말미암아 신체를 통해 인간을 규정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규정된 인간은 그 규정에 따라 스스로를 권력의 요구에 맞춰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23 그럼으로써 인간은, 스스로의 내면에도 ‘외부’를 설정하고, 자신을 이원적 세력의 갈등의 장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선-악이라는 사회적 이분법은 내면적 이분법이 되며, 체제의 배제/박탈의 메커니즘은 선-악 이분법 체계에 용해되어 인간 내면으로부터 정당화되며, 체제의 공모자로 인간 개개인을 만든다. 그리스도교에서 죄책고백을 계량화된 신체의 행위로, 즉 제의 양식으로 발전시킨 것은 바로 이런 양생 전략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두 전략은 체제의 두 얼굴이다. 분리할 수 없는 양면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체제의 전략의 주요 작용 지점이 양면에 동등하게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전통의 가치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전통의 권력 체제가 담지하고 있는 ‘양생의 전략’ 또한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24 여기서 박정권은 ‘억압의 전략’에 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제1세대 민중신학의 비판 담론이 주로 ‘외면적 억압’에 치중하고 있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 즉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25의 과제가 주로 (인간 외부의) 체제 문제에 집중하게 된 것은 바로 민중신학이 권력의 이러한 성격과의 갈등적 상호관계 속에서 비판담론으로 형성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박정권을 승계한 ‘5공・6공’ 정권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억압의 전략에 의존하면서도, ‘반공’과 같은 총체적 안보의 상징물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황에 대한 대안을 필요로 했다. 그 새로운 안보의 상징물이 소비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모색되었고, 이로써 소비자본주의가 본격 추동된다. 26 제2세대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새로운 비판 유형에 속한다. 공격적 반공주의의 후퇴라는 틈새를 타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대항 이데올로기가 물밀듯이 형성되었고, 여기에는 ‘세계 반공주의의 보루인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한갓 제국주의의 포악한 얼굴 위에 덧씌워진 가면에 불과했다는 (광주 민중항쟁 이후의) 인식이 한몫 하고 있다. 게다가 소비자본주의의 맹렬한 돌진으로 자본주의적 체험이 보다 전면화되면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고조되었다. 나아가 1987년의 대항쟁, 노동자 대투쟁 등의 거대한 민중저항의 사건 및 ‘6.29’로 표상되는 권력의 후퇴는 비판담론 속에 낙관주의적 사유를 충힐시켰다. 이 시기 민중신학의 대담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모색(특히 ‘물의 신학’)은 바로 이런 상황과 관련된다. 27 이것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개개인의 삶을, 가치를 양생하는 체제의 전략에 골몰하던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등의 비판담론보다는, 억압적 체제를 대체하고 대안적 체제를 재구성하는 과정의 문제의식이 깊이 반영된 동구 마르크스주의나 북한의 주체사상 등이 주요하게 참조되는 당시의 비판담론의 일반적 경향에 어느 정도 동참하는 모습을 띤다.
이상에서 보듯 제1, 2 세대 민중신학은 체제의 ‘억압의 전략’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신학하기를 수행한다. 전통적 신학의 신의 타자성보다는 역사성이 중요시됐고, 이것은 신학이나 종교의 특권적 영역인 가치의 긍극적 성찰구조를 역사학적 사회학적 성찰구조로 환원/양도하는 셈이 되고 만다는, 그리하여 결국은 신학/종교의 위상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나아가 신학/종교가 보장해 주는 성찰의 철저화를 상실하고 사실상 무성찰 상태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해명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28 이것은 지배담론의 진리관을 해체하는 데 주력했던 제1세대 민중신학에 비해, 29 대안적 진리체계의 구성에 적극적이었던 제2세대 민중신학에 더욱 예각화된 한계 지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감수하면서도 과격한 신학적 전환을 모색해야 했던 것은, 체제의 가혹하고 노골적인 배제/박탈의 메커니즘에 정면으로 맞부딪쳐야 했던 정세의 효과에 상응하는 것이었고, 또 그럴 만큼 지배와 도전의 뚜렷한 바리케이드가 형성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체제의 권력 욕망 실현을 위한 기제 활용의 차원에서 지난 20년의 경험과는 다른, 질적인 전환이 이 시기에 계기지워진 것이다. 바로, (앞서 언급한 대로) 5공・6공에 의해 도입된 소비자본주의화의 물결이 현실적 활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자본운동과는 일정하게 독자적으로 운용되는 이념적 지형의 급속한 변환도 이 시대의 새로움의 또 다른 계기였다. 즉 자본주의적 세계의 견제 세력이라 믿었던 사회주의권의 몰락,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다소 과장스레 평가된 사회주의적 실험의 무모함 내지는 부정성이 지난 시대와의 단절적 계기를 이 시기로 낙점케 하였던 것이다. 이제 지난 시대의 비판담론은 무용지물이 되어 갔고,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에의 요구가 빗발쳤다.
Ⅲ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소비자본주의 30가 급속하게 전개된 것은 다음 몇 가지 현상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멀티미디어의 급속한 확산; 31둘째, 통신기술과 설비의 급속한 발전과 보급; 32그리고 자동차의 급속한 보급과 항공교통의 활성화 33 등. 이러한 현상은 시공간의 압착(time-space compression; D. 하비≒장소귀속탈피성; A. 기든스)을 가속화시켰고, 이에 따라 한국의 일상 지리를 현저하게 변화시켰다. 34 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독점적 지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방적, 지구적 과제와 더불어 분산되었고, 이러한 분산은 자본이 인간 개개인의 욕망의 영역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된 기술적 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이제 자본은 인간의 다양한 기호에 따라 유연하게 생산 체계를 조직할 수 있고 다양한 시장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인간의 기호를, 그 원천인 욕망을, 그 욕망의 분출구 자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소비의 공간→공간의 소비; A. 르페브르).
이러한 상황은 권력이 취할 수 있는 억압의 효과를 축소시켰다. 무엇보다도 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안보의 총체가 발휘할 수 있는 효력이 종전에 비해 심각하게 제약되는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반면 권력은 ‘양생의 전략’을 취하기가 훨씬 용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멀티미디어는 일체의 정보를 안방에까지 신속하게 배달해 주었고, 이로 인해 인간이 정보를 접하게 되는 것은 미분된 개체로서며, 이 개체로서의 인간이 접하는 정보는 (비대면적인, nonfacible) 화상적 이미지에 의해 과잉결정된 세계였다. 즉 멀티미디어를 통해 개인은 시각적 준거에 의해 규정된 세계와 직접 조우하게 된다. 그리하여 멀티미디어를 통해 전파된 세계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가치는, 그것이 사회에 강제될 때 초래할 수 있는 무수한 위험들로부터 ‘위생처리’된 채 개인에게 배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멀티미디어를 통해 이 정보의 세계와 소통하게 된 개인은, 개인적 성찰의 개입을 거치기는 하지만, 사회적 성찰을 거쳐야 할 필연성으로부터 격리된 시공간적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다. 35 이와 같이 자본의 침투력은 이제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게 되었고, 권력의 양생술은 상품화된 욕망 속에서 본격 가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담론 과잉의 시대인 1970, 80년대를 지나, 급작스레 소비자본주의적 담론의 태풍을 맞이한 1990년대의 한국은 마치 “정치주의에 대한 문화주의의 보복” 36이기라도 한 양, 탈정치적이고 탈가치적인 문화주의의 격랑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탈이데올로기 시대 운운’하는 서구 사상의 조류나, 동양적 선(禪) 사상에 대한 서구 중심적인 왜곡의 소산인 오리엔탈리즘의 유입 등이 결합되면서(물론 신학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속류 문화주의는 그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기라도 한듯 소란스럽게 유포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권력이 미치는 영향력은 이제 고전적 의미의 정치 영역(단일국가적 민족적 영토성에 결부된 정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람들의 일상의 영역을 무대로 하여 작동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운동은 범지구적인 자본 운동과 절합관계를 이루며 전개된다. 이것을 추동하는 기본적 동력이 자본의 ‘욕망의 정치’라면, 그리하여 욕망을 상품화한 결과인 ‘문화’라는 소비의 범주는 (단순한 비정치적 공간 아니라) 바로 권력의 양생 전략의 무대, 다시 말하면 권력 지배의 무대인 것이다. 여기서 문화와 정치, 경제 등의 분과학문적인 고전적 범주들은 그 해석적 실효성을 상실하고 만다. 37 한편 자본의 ‘욕망의 정치’는, 그 양생술은, ‘편집증적인’ 억압의 정치와는 달리, ‘분열증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욕망의 정치는 다면적인 욕망의 분출 가능성을 극단으로 확장함으로써 ‘억압의 정치’로부터 봉쇄된 욕망의 ‘해방구’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38 결국 욕망의 정치를 통한 권력의 양생 전략은 (그 분열증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동시에 해방적 저항담론의 무대가 된 것이다. 39
이 도표는 주39)에 포함된 것임.
요컨대 욕망의 정치의 결과인 문화의 영역은 정치적 실천의 무대가 된 것이다. 여기서 문화정치학은 1990년대적 비판담론의 위상학이 된다.
1990년대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시공간적 맥락과 이에 대한 문화정치학적 비평담론과의 관계를 ‘신학하기’의 기반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 신학운동이 지난 제1, 2세대와의 계보학적 관련성을 확보하려 한다면, 그것은 ‘억압의 전략’보다는 ‘양생의 전략’으로 권력 지배의 중심축이 전이된 상황에서 신학적 비평의 ‘연속성과 차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권력의 배제/박탈 메커니즘에 대한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유보한 채, 서구의 신학 담론과의 절합 모색의 길에 뛰어든다면, 그것과의 공조에 최우선의 과제를 둔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세대구분론과 별개의 분류방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 40
아무튼 1990년대 민중신학은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여 욕망을 상품화하고 있는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담론을 형성하고, 대항담론의 주체 곧 (역사 주체로서로의) 민중을 형성하기 위해 문화정치학적 비평의 영역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선 비평담론의 시공간을 다면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이나 교회의 담론에 스스로를 가두어서도 안 될 것이고, 영토적 공간성 차원의 담론 구성에만 매달려도 안 될 것이다. 가능한 삶의 전 공간에 걸쳐 형성된 분절적 시공간의 맥락에서 추구될 수 있는 해방적 가치의 최적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수한 이질적인 피박탈대중인 타자들과의 해방적 연대를 요청한다. 정체성 재강화를 목표로 하는 공동체론은 탈이데올로기화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파시즘화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천만한 대안일 수 있다. 41
문화정치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실천이론으로서의 적실성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담론 절합이 가능한 신학적 언술 구조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신학에서 자아 중심적이고 권력주의적 언술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결부된다. 가령 신의 (절대)타자성은 기각되어야 한다. 42 이것은 실체론적 사유에 기초한 문제설정으로, 진리의 문제를 진리담론 외부의 사건적 맥락과 분리시킨 채 로고스 중심주의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환원주의에 빠져 버리게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담론 바로 그 자체다. 43 반면 민중신학의 진리관은 화용론적이고 관계론적인 가능성을 민중신학 전통 내에 담지하고 있다. 비록 제1, 2세대 민중신학이 이 문제를 통찰력 있게 전개하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신 이해를 ‘사건 속의 하느님’이라는 논제로 제시한 바 있다. 44 나는 이러한 시각에서 ‘하느님나라’라는 민중신학의 지향을 “영원회귀적이면서(과거적 시공간의 지평) 미래전망적 차원(미래적 시공간의 지평)을” 가지고 “그때마다의 (현재성의) 시공간에 권력해체를 지향하는 기대의 최대치로서 구체화되는 과정론적 진리체계”라고 규정함으로써 관계론적 사유체계로 ‘사건론’을 해석한 바 있다. 45 이러한 규정은 종래 민중신학이 비판받았던 ‘사회학적 환원주의’라는 문제제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러한 사건론적 문제제기는 제1, 2세대 민중신학이나 이들의 비판자들이 모두 벗어날 수 없었던 ‘실체론적/개체론적 사유’를 ‘관계론적 사유’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재확인할 것은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은 신학담론의 일상담론화가 아니다. 이론의 탈이론화가 아니다. 오히려 (비판)이론은, 순수한 의미의 과학일 수는 없으나, 46 권력의 양생의 전략을 파헤치는, 그 교묘한 은폐를 드러내는 통찰력을 수반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현전(presence)과 부재(absence)의 겹침과 꼬임관계를 읽을 줄 알아야 하며, 실천주체 들간의 담론 절합을 위한 담론적 구성의 소통 가능성을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민중신학은 권력해체를 위한 시대 읽기를 부단히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
- 나는 ‘계보학’(genealogy)이라는 용어를 M. Foucault적 함의로 이해한다. 그에게서 계보학이란, 특정 담론을 하나의 중심적 진실에 기초한 일관된 언술체계가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전술적인 실천적 구성물로서 보게 하며(‘고고학’적 함의), 나아가 전술적 구성물로서의 담론을 그 (담론) 외부, 특히 제도적 권력 장치들의 효과로서 파악하게 하는 문제설정을 함축한다. 이에 대하여는 계보학적 전개에 대한 Foucault 자신의 요약적 진술인 《권력과 지식》 (서울: 나남, 1991), 특히 제5장 〈권력, 왕의 머리베기와 훈육〉과 푸코애 대한 탁월한 해설서인 Gilles Deleuze, 권영숙 조형근 옮김, 《들뢰즈의 푸코》 (서울: 새길, 1996) 참조. 나는 이러한 시각이 민중신학 전개의 연속성과 차이를 실천적 시각에서 조명하는 유용한 준거틀를 제공해 준다고 본다. 이것은 문헌비교에 의해서만 민중신학의 전개를 조명하려는 통념적 해석들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 민중신학을 ‘권력의 그때마다의 표출 양식인 정치적 테크놀러지에 대한 전술적인 담론 구성물’로서 볼 때 비로소 실천이론적 관점에서 민중신학의 전개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 최형묵,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 《신학사상》 69 (1990 여름), 주9) 참조. [본문으로]
- 보편적인 불변의 진리관을 강조하는 이른바 ‘실체론적 사유’는 대상과 인식 간의 일치검증 불능(그리고 환원 불가능)이라는 근대적 사유의 한계 지점에서 무너져 버리고, 20세기 이후 관계론적 패러다임이 각 분야에서 대안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한편 민중신학의 ‘사건론’은 행위와 언술의 통합을 사고하는 문제인식을 신학적 사유에 도입한 탁월한 성과물로, 관계론적 사유의 맥락 위에 있다. 특히 이것은 예수담론 분석에서 담론 외부와의 필연적인 연계성을 조명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을 재건하려 했던 시도에서 그 방법론적 꽃을 피우게 된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김진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한국신학연구소, 1996) 참조. [본문으로]
-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논객들인 Laclau와 Mouffe는 ‘외부’의 문제를 ‘특정 담론 외부’의 담론이라는 차원에서만 배타적으로 보면서 담론들간의 절합에 주목한다. Ernesto Laclau & Chantal Mouffe, 김성기 외 옮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터, 1990), 특히 제3장. [본문으로]
- Foucault나 Deleuze는 ‘담론 외부’의 문제를 ‘사건’의 차원에서 묻는다. Michel Foucault, 이정우 옮김,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1992); Gilles Deleuze, 《들뢰즈의 푸코》 제1장 참조. [본문으로]
- 제1세대와 제2세대 민중신학은 담론 자체로 보면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제1세대 민중신학 담론에는 반독제를 향한 ‘강한 해체적 지향’이 드러나고 있다면, 제2세대 민중신학 담론은 계급적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해체적 지향을 계급적 민족적 해방사회를 향한 전망과 결합시킨다. 언술 구성만으로 보면, 그리고 양자의 언술이 각기 불변의 진리관에 기초한 상이한 진리체계라고만 보면 양자간에는 화해할 수 없는 분절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실 양자간에는 이 계보 밖의 다른 민중신학자군과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실천적 유사성이 있다. 즉 다른 민중신학자들이 서구의 주류신학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었던 반면, 이들간에는 (주류신학과의 대화에 천착하기보다는) 각기 동시대의 비판문법과의 대화 과정에 참여하면서 비판적 신학이론 형성에 매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민중신학의 전개에 관한 이러한 계보학적 주장에 대하여는 나의 논문, 〈‘신학’이라는 배제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이정규 선생의 “민중신학에 대한 초보적 비판”에 대한 ‘초보적’ 비평〉, 《시대와 민중신학》 (1996), 4-8쪽 참조. 아래 도표는 민중신학의 제1세대(‘1970년대적’ 민중신학)와 제2세대(‘1980년대적’ 민중신학), 및 우리 자신의 과제로 주장하는 제3세대 민중신학(‘1990년대적’ 민중신학) 간의 차이와 연속성을 나타낸 것이다. [본문으로]
- 박성준,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 《민중신학》 창간호 (1995), 171. 이 글은 한국민중신학회 제2회 정기총회의 발제 원고를 보완한 것인데, 이 발제 원고에 대한 나의 논평인 〈박성준의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를 읽고〉, 《숨》 11 (1994.12‧1995.1 합본호) 참조. [본문으로]
- David Harvey가 자본주의의 전개와 맥을 갖이 하면서 세계 각 국가/민족의 공간이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의해 탈영토화되고(deterritorialized), 나아가 제국주의적 공간편성 과정에서 재영토화되었다(reterrialized)고 주장한 것은 거시공간이 단위국가적/영토적 공간 구성에 개입하는 차원을 가리킨다. Harvey, 구동회 박영민 옮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한울, 1994), 322쪽. [본문으로]
- 김진호,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신학사상》 80 (1993 봄), 28쪽. [본문으로]
- 이것은 ‘역사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차원을 ‘민중’으로 재개념화한 것이다. 반면 ‘민중모집단’ 개념은 ‘고난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이라는 차원을 가리킨다. 이제까지 민중신학을 포함한 비판적 이론 진영의 대다수는 이 두 차원, 즉 고난의 담지자라는 차원과 역사 주체라는 차원의 이질성/차이를 개념화하지 못했고, 종종 구조환원론적으로 단순 처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비판담론들은 실천이론의 부재를 감수해야 했고, 종종 민중 낙관주의에 빠져서 이론 내부에서 자기 성찰구조를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민중 재개념화는 바로 이런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한편 최근 알튀세리안의 대표적 이론가의 한 사람인 E. Balibar가 ‘노동의 정치’라는 국한적 계급 개념을 지양하면서 복합적 모순관계의 절합과 토픽적 전선을 따라 형성되는 우발적인 저항연합이라는 문제설정을 함축하는 ‘인권의 정치’를 제시하면서, ‘시민’ 개념의 재정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문제설정과 친화적이다. 이것은 ‘시민’을 ‘민중’과 대립적인 범주로 생각하는 서경석 류의 정체모를 시민사회론과는 격을 달리한다. E. Balibar,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 윤소영 엮음,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1; orig. 1989); 윤소영,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의 제3장 〈‘인권의 정치’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전화의 쟁점들〉; 서관모, 〈시민성 개념의 새로운 구축을 위하여―에티엔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의 문제설정〉, 《경제와 사회》 31 (1996 가을) 참조. [본문으로]
- 이상과 같은 시공간적 관점과 행위자의 관점은, 구조와 행위의 이원론적 전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A. Giddens의 ‘구조화 이론’의 문제설정과 맞물리며, 따라서 그의 이론으로부터 사회역사학적으로 보충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행위자의 차원은 구조 외부의 요소가 아니라 구조의 또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다(구조의 이중성). 이런 개념화는 한편으로 고착적이고 고립적인 사회 실재관을 극복하고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사회/구조 이론을 가능케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고 형성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통시적 조명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범주인 ‘시공간 일상화’(time-space routinization)와, 체계 통합(system integration)의 범주인 ‘시공간 거리화’(time-space distinction)의 분절과 결합(겹침)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조명된다. 그에 의하면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시공간적 체제와 제도들의 ‘뻗침’이 보다 광역의 시공간에 대한 체제적 통합을 이룩하였음에도 개개인들간의 대면적 상호작용에 기초한 사회적 통합은 협역의 시공간에 한정된 이른바 ‘장소귀속성’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교통과 통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맥을 갖이 하여 체제통합의 범주인 ‘시공간 거리화’는 사회통합의 범주인 ‘시공간 일상화’와 겹침 현상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시공간 일상화의 영역은 대면적 시공간(현전, presence)을 초월하여, 무한한 부재의 시공간 속으로의 유영(游泳) 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장소 귀속성 탈피’(disembedding)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기든스는 최근의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사회적 역사적 현상은 모더니티(근대성)의 분절적/이질적 현상이 아니라, 바로 모더니티의 급진화로 본다. Giddens, 이윤희 이현희 옮김, 《포스트모더니티》 (민영사, 1990); 같은 저자, 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나남, 1991); 같은 저자, “Time, space and regionalization”, in D. Gregory & J. Urry, eds., Social Relations and Spatial Structure (Macmillan, 1985); D. Gregory, “Presences and absences: Time-space relations and structuration theory”, in D. Held & J.B. Thompson, eds, Social Theory of Modern Societies: Anthony Giddens and his Critics (Cambridge Univ. Press, 1989); J. Hauer, 〈구조화이론 등장 이후의 지역지리〉, 손명철 엮음, 《지역지리와 현대사회이론: 새로운 지역지리 논의를 위하여》 (명보, 1990) 참조. 그렇다면 민중신학의 ‘한국적’ 논의가 단지 한국의 특정 시대에 국한되는 신학을 넘어 비판적 신학 담론의 보편적인 대안 패러다임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도 그리 무리한 주장은 아니리라. 민중신학의 대안 신학적 패러다임에 관한 나의 견해와 유사한 입장을 박성준의 박사학위논문인 《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假題; 시대와 민중사, 1997)에서도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이러한 신학적 과제를, 지난해 열린 한국기독교학회 제25차 학술대회는 ‘탈식민주의 신학’(postcolonial theology)으로 설정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한국기독교학회 엮음,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시대의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6) 참조. 하지만 Linda Hutcheon의 고민처럼(〈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상황: 산적한 난제들〉, 《외국문학》 43, 1995년 여름호) ‘탈식민주의’라는 문제설정은 모든 배제주의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피식민 민족의 토착성이라는 시각으로 과잉통합하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 대 탈식민주의’라는 담론적 경계가 탈식민주의 진영의 권력 관계를 왜소화하는 ‘이론 내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학회 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인 E.S. Fiorenza의 〈해석의 에토스: 탈근대적‧탈식민적 상황〉, 《신학사상》 95 (1996 겨울)은 ‘권력’을 문제시하는 ‘포스트모던’과 ‘식민성’을 문제시하는 ‘포스트콜로니얼’ 간의 적절한 접맥에 실패하고 있다. 반면 ‘민중신학’에 가능성으로 내장된 ‘권력해체적 문제설정’은―비록 그 가능성이 발전적으로 이론화되지 못한 채 모호한 ‘선문답’만을 되풀이하여 왔거나 혹은 너무 쉽게 탈권력을 경제결정론적 계급 착취와 동일화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음에도―박성준의 문제제기에 따라 시공간적 거리를 극복하는 간주간적 주체 형성 문제를 전면화한다면, 비판의 자아 중심주의(ego-centrism)를 극복하는 성찰적 비판(reflexible critic)으로서의 ‘신학 하기’를 향해 열린 이론 내적 구성을 갖는다. [본문으로]
- 이런 점에서 Edward W. Said에 의지해서 탈식민주의적 신학을 역설하는 강남순의 논문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탈식민주의 시대의 신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시대의 신학》은 주목할 만한 문제제기다. Said,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6) 참조. [본문으로]
- 서구의 신학 일반이 아니라,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신봉자들의 뇌리에 각인된 ‘서구신학’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 사변으로 끝나는 신학이 아니라, 실천이론으로서의 ‘신학하기’를 추구하는 신학이라면, 사회-역사적 문제인식에 개입할 줄 아는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것을 신학적 사고로 재기술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연구자가 사회역사학적 이론에 무지하다는 것은 민중신학자다운 변명이 못된다. 오히려 그것은 민중신학자이기를 포기하고, 신학 ‘내적’(?) 담론 안에서만 세계를 이해하는, 단순한 사변적 신학자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본문으로]
- 한국의 토착화신학 제2세대의 탁월한 논객의 한 사람인 박종천은 민중신학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로 민중신학의 ‘신학적 보편성의 결여’를 제기한 바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과 인간/세계 간의 상호성’ 문제를 (토착화신학의 고전적 모델이 전자, 즉 신에로 과잉 귀속시키는 한계가 있었다면) 민중신학은 양자를 평면화(합류)시키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종교개혁적 전통과의 무리한 단절”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보면서, 이것을 그는 ‘기초주의’의 소산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양자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안하는 대안은 ‘해석학적 대화 모델’(즉 관계론적 사유)을 도입하여 한국적인 신학적 비판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보편성’이라는 것은 “‘선행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확인이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결정적인 한계에 봉착한다. 즉 그의 관계론적 대화 모델은 이 지점에서 작동을 멈춰 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초주의’라는 말은 본래 환원주의, 즉 대상들간의 관계에서 우선성을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논리틀을 비판하는 말인데, 그는 ‘전통’을 빙자해서 스스로 기초주의로 회귀하고 있음에도, 도리어 ‘합류’라는 민중신학의 대화모델적 개념을 기초주의라고 비판한다. 박종천, 〈신학하는 일에서의 보편성과 당파성 문제〉, 《신학사상》 65 (1989 여름) 참조. 신학의 전통이라는, 고립된 사상사적 궤도를 비판할 줄 모르는 논객들의 이와 같은 논리는, 설사 대화모델이라는 ‘간학문적 패러다임’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이처럼 뒤죽박죽의 혼란스런 논변들을 난사할 뿐이다. [본문으로]
- 이하의 논의는 M. Foucault의 견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본문으로]
- 여기서 A. Giddens의 권력의 작동 방식에 관한 견해를 간략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의 견해가 Foucault의 관점을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상당부분 보완하는 효과를 가지며, 동시에 민중신학의 이론적 발전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의 주 11>과 연이어서 참조하면 Giddens의 견해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 의하면, 행위자들의 상호행위가 일어나는 시공간적 맥락(setting)을 상호행위의 시각에서 보면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고, 물리적 장소의 시각에서 보면 ‘현장’(locale)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호행위 속에서 권력 관계를 포착하기 위해 현장의 내적인 분할(지역화, regionalization)에 주목한다. 전방지역(front region)과 후방지역(back region)으로의 분화가 그것인데, 전자는 사회적 규범과 권력관계에 따라 개인의 일상이 규제되는 지역을 말하며, 후자는 개인이 자율적으로 의미화할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가령 노동하는 시공간이 전형적인 전방지역이라면, 여가를 누리는 시공간은 전형적인 후방지역이다. 하지만 전방지역 속에서도 후방지역이 존재할 수 있으며, 반대로 후방지역에까지도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통치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권력의 이러한 통치의 기술은 ‘감시’(surveilance)의 장치를 통해서 수행되는데, 감시 장치는 행위자를 권력 앞에 노출(disclosure)시키려 하고, 반대로 행위자는 감시 장치에 은폐/차단(enclosure)되고자 한다. 요컨대 권력은 감지의 장치를 통해 후방지역을 노출시키려 하고, 행위자는 감시장치에서 은페된 후방지역을 창조하려 한다. 바로 이러한 권력과 권력에 예속된 대중이 갈등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즉 투쟁하는 시공간적 장이 바로 현장인 것이다. Giddens, “Time, space and regionalization”; 같은 저자,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특히 제7장 참조. 이것은 권력의 작동에만 초점을 두는 Foucault의 견해를 시공간 패러다임을 통해 권력과 탈권력의 상호투쟁이라는 차원으로 보완하고 있으며, 민중신학이 말하는 반권력적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현장이라는 관점을 사회이론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본문으로]
- 고대에 이런 공공연함이 십자가형 같은 잔혹극으로 실행되었다면(Michel Foucault, 박홍규 옮김, 《감시와 처벌―감옥의 탄생》 <강원대출판부 1993> 특히 제2부 참조), 오늘날에는 전자파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공개된다. 전자는 일상에서 분리된 축체의 형식을 빌리게 되지만, 전자파 시대에는 축제 자체가 일상화된다. 한편 교회의 예배는 자신에 대한 ‘자발적인 처형’과 ‘외부로부터 선사되는 부활’에 대한 상징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잔혹극을 극복하는 축제의 일상화에 성공한 탁월한 통합의 테크닉이다. 교회의 장기지속적 생존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 보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체적 의사 표현을 억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가령 공민권을 제한받는 범죄자들, 미성년자들이 그런 경우며, 여성에게 비명시적인 제약이 가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본문으로]
- ‘정신-신체’라는 이원도식적 사유의 전제하에서, 정신이 상대적으로 비가시적 차원을 함축한다면 신체는 가시적 차원, 즉 계량 가능한 차원을 나타낸다. 여기서 신체의 계량 가능성은 신체의 해부학적 미분 과정을 통해 보장된다. 이러한 신체로 환원된 인간에 대한 이해는, 특히 근대에 이르면, ‘과학’에 의해 근대적 사유 가능 영역으로 표상되며, 나아가 과학만이 배타적으로 인간을 진정하게 규정할 수 있다는 과학 만능주의적 사고 경향과 맞물린다. [본문으로]
- 1791년 공리주의자 J. Bentham이 설계했다는 ‘판옵티콘’(panopticon, 전체투시감옥)에 대한 Foucault의 해설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자아를 스스로 규제하게 하는 권력의 양생 메카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책,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제3부 제3장 참조. [본문으로]
- Foucault는 이것을 ‘생체권력’(bio-power)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그의 책,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앎의 의지》 (서울: 나남, 1992), 150쪽에서 처음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본문으로]
- 특히 도시화 과정은 가치의 아노미를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본문으로]
- 권력을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은 정치신학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 정부에 의해 내수시장의 활성화가 공공연히 조장되었고, 이런 소비의 활성화는 올림픽이나 스포츠의 프로화, 부동산 투기 등을 매개로 과소비 급증현상을 야기하여 거품경제를 낳는다. 한국의 소비자본주의화에 관한 주목할만한 연구로 최홍준, 〈1980년대 후반 이후 문화과정의 정치경제적 조건과 도시적 경험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석사학위 논문(1993.8), 제5장 1절 참조. [본문으로]
- 민중신학의 마르크스주의적 모색은 당시의 청년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사회운동세력 일반의 마르크스주의적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점은 1970년대 중후반 이후, 특히 1980년 이후 보다 활발하게 전개된 비공개 운동조직 내에서의 문제의식의 성장을 들 수 있다. 또한 1983년 정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조치’ 등으로 특징되는 이른바 유화국면과 발맞추어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운동적 문제인식의 비약적 발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조희연, 〈80년대 사회운동과 사회구성체논쟁〉, 《한국사회구성체 논쟁(1)》 (서울: 죽산, 1989) 참조. 이러한 운동권 내부의 성숙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변혁론적’ 이론 및 논쟁을 야기하는데, 제2세대 민중신학은 EYC, KSCF 등 그리스도교 청년운동단체의 이러한 변혁론적 문제제기에 대한 민중신학 연구자들의 응답으로 시작된다. 그 결과 제2세대 민중신학의 첫 포문을 연 글인 박성준의 유명한 논문 〈한국기독교변혁과 기독교운동의 과제〉, 《전환―6월 투쟁과 민주화의 진로》는 1987년 출간되고(이 글은 1986년 KSCF 강좌에서 초고가 발표된다), 제2세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인 강원돈이 ‘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문헌적으로 처음 사용한 것도 비슷한 시기인 1988년이었다. 그의 글 〈물의 신학. 물질적 세계관과 신학의 한 종합(1)〉, 《신학사상》 62 (가을호) 참조. [본문으로]
- 지금까지의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의 대다수는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본문으로]
- 바로 이러한 해체성의 징후는 동시대 서유럽에서 전개된 포스티즘적 사유들과 일면 유사성을 띤다. 이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의 ‘해체성’을 언급한 Sundermeier의 평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T. Sundermeier, 〈삶과 증언으로서의 민중신학〉, 《신학사상》 83 (1993 겨울) 참조. 단 양자는 발생-전개 맥락에 있어서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한국의 (1970년대보다는) 1990년대의 사회 역사학적 맥락이 서구의 1960년대말-70년대의 맥락과 상대적으로 높은 유사성을 갖는다. [본문으로]
- 나는 소비자본주의라는 애매한 용어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에서 함축하고 있는 바는 Lefebvre가 ‘공간의 소비’(consumption of space)라고 부르는 근대적 소비공간의 극단화된 형태가 본격적으로 발현되는 자본운동의 사회다. 이러한 소비공간의 지배원리는 ‘욕망’이며, 이때 자본은 바로 이 욕망 자체를 상품화하려 한다. A. Lefebvre, 박정자 옮김, 《현대세계의 일상성》 (세계일보사, 1990); 이상헌, 〈자본주의 소비공간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세계화시대 일상공간과 생활정치》 (대윤, 1995) 참조. 한편 최홍준에 의하면, 산업구조조정이 시작된 한국의 1980년대 이후 내구소비재 중심의 중화학 공업의 국내적 생산 기반이 현저히 확대되었고, 특히 1985년 말부터 1988년 중반까지 약 3년간의 이른바 ‘3저호황’을 타고 내구소비재 생산능력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또한 1987년부터 전개된 대대적인 노동자 대투쟁은 일부 노동계층의 생활능력을 상당히 향상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3저호황 이후 급속히 찾아온 수출둔화 위기를 전기‧전자제품과 자동차 등 내구소비재의 확대를 통해 극복해보려는 정부와 자본측의 전략과 연결되면서 국내의 소비시장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최홍준, 〈1980년대 후반 이후 ⋯〉 참조.. 이렇게 하여 전개된 공간 지형의 축소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욕망의 상품화로 특징지워지는 ‘공간의 소비’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 이것은 문자기호의 주도권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화상기호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이제 정보는 저장/축적되기보다는 소비/유통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고, 사람들의 경험도 분석과 해석을 통하기보다는 순간성, 이미지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컴퓨터 통신은 정보 유통의 중요성이 정보 축적의 중요성을 앞도하는 가장 두드러진 예라 할 수 있다. 또 광고산업의 급속한 확산이나 王家衛류 영화의 흥행 대성공, IQ보다 EQ의 중요성 강조 현상 등은 순간성. 즉흥성, 이미지성이 부각되는 징후를 보여준다. [본문으로]
- 전화는 이제 가족단위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 휴대품이 되었고, 전화를 통한 소통의 영역은 광통신이나 위성통신을 통해 지방적(local)이거나 지구적(global) 차원에서 훨씬 용이해졌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를 통한 정보의 유통은 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전통적 소통 단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국가 차원의 안보라는 차단막을 월장할 수 있는 수단은 전에 비해 대폭 확대된 것이다. [본문으로]
-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예상 밖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나, TV 프로에서 지방 사투리의 사용이 활발해진 것 등은 지방성이 한국적 시공간 형성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TV에서 앞다투어 해외여행 프로를 기획 방영하는 것이나, CNN, BBC, NHK의 외국방송을 안방에서 동시통역가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게 된 것 등은 지구성이 한국적 시공간 형성에 더욱 중요한 위상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지방적(local), 지구적(global) 개입의 통로가 국가를 매개로 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으로 바로 개입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 한국적 시공간 구성은 국가적, 민족적 시공간의 위상 격하와 더불어 훨씬 복합적이고 다원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구지방화(glocalization)에 대한 민중신학계의 반응에 대하여는 최형묵, 〈지구화 시대의 경제정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22 (1995 가을); 김진호, 〈지구화 시대의 정의: ‘말’이 통하는 세계를 향하여〉,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21 (1995 여름) 참조. [본문으로]
- 강내희, 〈대중문화, 주체형성, 대중정치〉, 《문화과학》 6 (1994 여름), 특히 114쪽 참조. [본문으로]
- 이때 개인은 사회로부터 분리된/분리될 수 있는 실체로서 인식된다. [본문으로]
- 심광현, 〈지정학적 실험과 문화정치적 실천의 전망〉, 《문화과학》 6 (1994 여름), 75쪽. [본문으로]
- 그러므로 Wallerstein은 분과학문을 넘어서는 일종의 통합과학으로서의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장한다. I. Wallerstein, 성백용 옮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 (창작과비평사, 1994), 341-42쪽. [본문으로]
- 소비자본주의의 문화 상품화의 주된 타겥이 기성의 지배담론에서 소외계층인 여성이나 미성년자라는 사실은 자본으로 하여금 지배코드로부터의 ‘일탈’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전통적 욕망 분출 방법인 계급적 민족적 저항의 코드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에는 억제되었던 욕망 분출을 조장하여 지배적 코드 또한 교란시키는 효과를 조래했던 것이다. 소비자본주의화가 갖는 적극적인 가능성에 대하여는 강내희, 〈대중문화, 주체형성, 대중정치〉 참조.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 Félix Gattari,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대우학술총서‧번역 66 (민음사, 1994), 특히 제9장 참조.; 또한 신현준, 〈들뢰즈/가타리: 존재의 균열과 생성의 탈주〉, 《철학의 탈주》 (새길, 1995) 참조. 다음은 Deleuse와 Gattari의 권력의 진화에 대한 견해를 도표화한 것이다. [본문으로]
- 여기서 나는 정상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첨부할 필요를 느낀다: “다원주의는 다양성을 전제로 삼지만 이 전제가 권력과 현실적인 사회관계를 소흘히 하는 다원주의 경향과 결합될 때 이 다원주의는 매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게 된다.” 정상준, 〈문화적 다양성과 다문화주의〉, 《외국문학》 43 (1995 여름), 91쪽. [본문으로]
- Iris Marion Young, “The Ideal of Community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in Linda J. Nicholson, Feminism/Postmodernism (Routledge, 1990); David Harvey, 〈공간에서 장소로, 다시 반대로―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한 성찰〉, 《공간과 사회》 5 (1995 봄); 김진호, 〈‘공동체론’적 경향의 대안에 대한 대안. 민중신학 사랑방의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 ‘예수살기 모임’을 중심으로”을 참관한 뒤의 하나의 단상〉, 《숨》 27 (한국민중신학회; 1995.6) 참조. [본문으로]
- 성서에서 야훼는 절대타자적 존재로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신상을 끊임없이 해체한다. 신은 지속적으로 인간과의 관계망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려 하며, 언제나 말건냄의 ‘관계적 실체’로 등장한다. 신이 독백하는 장면 조차도 말건냄의 한 양식으로 나타나며, 외형상 신의 타자성이 부각되는 장면도 소통의 단절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재건을 추구하는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신학의 절정이 예수 메시아론이다. 예수 메시아론은―외형상 가장 타자성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는 요한복음서의 예수로고스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인간(및 세계)와의 소통의 맥락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형식은 창조주나 전능자의 맥락이 아니고 그것의 부정, 즉 해체를 통해서 수행된다. 따라서 신 존재 문제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개체론적 분석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오히려 신은 관계론적 사유를 통해, 즉 인간과의 관계의 맥락을 통해서 규명되고 고백될 수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진리란 특정한 생활형태와의 끝없는 상호관련 속에서 형성되는 언어게임 내부의 진리효과인 것이다. Wittgenstein, 이영철 옮김, 《확실성에 관하여》 (서울: 서광사, 1991) 참조. [본문으로]
- 안병무,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한국신학연구소, 1989) 참조. [본문으로]
- 김진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예수 르네상스.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1996), 263쪽. [본문으로]
- 그런 과학이나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이론, 이데올로기적 과학만이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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