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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종교인구 문제의 ‘황당함’과 ‘곤혹스러움’ -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 글은 2017년 01월 25일, 신대승네트워크가 주관하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와 우리신학연구소, 신대승네트워크가 주최한 <3대종교 2015인구센서스 종교인구조사결과 특별토론회>의 개신교측 발표자인 나의 글입니다. 

시간의 제약 탓에 위의 토론회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같은 원고를 2017년 2월 6일에 열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제 199차 월례포럼에서 다시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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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구 문제의 황당함곤혹스러움

개신교를 중심으로

 

 

 

‘2015 인구센서스의 종교인구조사 결과를 접하면서 신학자로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황당함곤혹스러움이다. 황당함은 예상을 빗나간 개신교 신자의 수에 관한 것이고, 곤혹스러움은 종교 인구 추이를 보면서 종교 개념에 관한 난처함으로 인한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첫 생각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고민을 담고 있다.

 

황당한개신교 신자 수

 

천지일보 2016.12.23.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95321


‘2015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개신교는 교세에 있어서 한국의 제1종교다. 총인구 대비 19.7%가 개신교 신자라는 것이다. 그 수는 967만여 명쯤 된다고 한다. 이것은 지난 2000년대 초에 개신교계의 언론들과 목사들이 입에 달고 다녔던 ‘1200만 성도에 비해선 한참 못 미치는 수이지만, 이번 조사에서 2위인 불교를 이백만 명 이상 앞선 것이다. ‘1200만 성도라는 말이 터무니없는 수치임을 각인시켜준 것은 ‘2005 인구센서스였는데, 거기서 개신교 신자라고 답한 이들은 18.2%, 840여만 명에 불과했다. 이는 22.8%인 불교보다 이백만 명 이상 적은 수였다. 아무튼 그때의 개신교의 굴욕은 단 10년 만에 비슷한 차이로 역전되었다는 고무적 결과가 바로 이번 인구센서스에서 게시되었다. 불교 인구의 파국적인 감소(?)(7.3%, 300만 명) 탓이기도 하지만, 개신교 신자도 120만 명 가량 늘었다고 하니 그 상승 정도가 적잖다. 게다가 개신교 교세가 정점을 찍었을 것으로 보이는 ‘1995 인구센서스19.4%보다도 근소하나마 비율이 더 높아졌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신교로서는 대단히 행복한 상황이다. 대외적으로 최악의 신뢰의 위기에 봉착해 있음에도 교세가 증가했다니 적잖은 위안이 되기도 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역성장의 위기가 일거에 해소되었다면 작금에 개신교가 겪고 있는 무수한 위기들이 한꺼번에 해소될 수 있다는 혹은 해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면 역성장의 상황은, 단순한 숫자의 감소 문제가 아니라, 여러 문제적 현상들이 뒤얽히면서 서로를 강화시키는 구조적인 위기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2011년도 신학대학 취업률

총신대학

36.1%

장신대학

7.4%

감신대학

8.4%

서울신학대학

41.4%


가령 이렇다
. 개신교의 각 교단마다 초고속 성장에 맞추어 교회사역자 충원체계를 구축하였는데, 1990년대 이후 저성장과 역성장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신학대학 학생들은 혹독한 취업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것은 신학대학의 학문 경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대다수 학생들이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적 소양을 갖추기보다는 성장을 위한 기능학으로서의 신학을 추구하게 했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대학 졸업 이후 교회사역자로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교회사역자들의 재교육의 수요는 성장학적 신학에 일방적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개신교는 한국의 종교들 가운데 신자들의 학력이 가장 높은 가톨릭과 거의 맞먹을 만큼 고학력의 종교다. 이것은 교양독서계층이 많은 종교라는 뜻을 포함한다. 그런데 예비 교회사역자들과 현직 교회사역자들은 오직 성공에 관한 도구적 기술에 집착한 탓에 교양독서층이라고 할 법한 신자들과 대화하고 그이들을 설득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인지 능력의 결핍은 급변하고 있는 1990년대 이후의 세계를 해석하는 데 교회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된 이유가 된다. 여기에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사람들의 삶에서 여행 등 여가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자, 교인들의 출석율과 기부금이 급락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재정 위기로 이어진다.

교회의 빈자리가 늘어가고 만성화된 재정 위기에 봉착하면서 목사들을 점점 더 예민해졌다. 여기에 사회의 민주화가 빠르게 진척되면서 낡은 권위주의의 잔재들을 청산하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었고, 개신교회는 바로 그런 청산의 주요 대상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사회의 시선은 날로 따가워지는데, 교인의 감소와 재정 위기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개신교 지도자들은 위기를 반전시키려고 무리수를 두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은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공격적 포교의 강화, 특히 세계를 향한 공격적 선교 현상, 증오 마케팅 같은 것들이 대표적 사례다. 한데 이것들은 개신교회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더 문제적 종교라는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개신교가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는 어디서 시작하든 비슷한 방식으로 서로 꼬리를 물면서 상황을 악화시켜 갔다. 그런데 이런 악순환 고리의 한 부분,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교인의 증가가 확실한 사실이라면 구조화된 위기로부터 탈출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2015 인구센서스의 결과는 개신교 목사들이 즐겨 쓰는 말로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데 의아하게도 ‘2015 인구센서스를 접한 개신교계의 반응은 냉랭하다. 여러 개신교계 언론매체들이 그 결과를 간략히 소개한 정도였다. 개신교계 주류단체에 속하는 어느 기관도 이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위해 공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별로 믿겨지는 결과가 아니었던 탓이겠다. 또한 가장 호교론적 태도를 취해온 개신교계 세력들은 최근의 대통령 탄핵 정국 아래서 파국적 위기를 체감하고 있는 터여서 인구센서스 타위에 고무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한 매체에서 조사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이 이유일 수 있다는 분위기가 교계에서 퍼지기도 했다. 즉 개신교계에서 이른바 이단종파들이라고 지목해왔던 여호와의증인,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영생교, 천부교, 그리고 구원파신천지집단 등이 모두 개신교로 분류된 것과 이번 인구센서스 결과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이다.

한데 이런 문제제기와 거기에서 유추된 추정은 타당성이 약하고 종교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타당성이 약하다는 것은 위에서 열거된 소종파들을 개신교로 분류한 것이 ‘2015 인구센서스에서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종파들이 이번 조사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인구변동이 없는 한 유의미한 변인이 될 수 없다. 이들 소종파들의 신자수 변동에 관한 믿을만한 정보가 거의 없어 좀 더 확실한 추정은 어렵지만 정황상 거의 모든 소종파들의 교인수 증가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감소의 요인이 더 강했을 것 같다. 다만 신천지파의 경우는, 이 종파의 교세보고 자료에 의하면, 매년 20%를 넘나드는 초고속의 증가 추세에 있다. 하지만 총 교인수가 15만 명 내외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신천지 파의 성공이 120여만 명이 증가했다는 이번 인구센서스 결과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편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이단 시비의 문제가 한국개신교에서 특별히 심각하게 드러나는 퇴행적 배타주의 양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퇴행적 요소를 인구 변동의 요인 분석에 활용함으로써 배타주의를 재확인하는 방식은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그러니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2015 인구센서스결과에 대한 개신교계의 냉랭한 반응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최근 개신교 각 교단들의 교세 통계 추세에 관한 것이다. ‘2005 인구센서스결과가 나올 무렵에는 각 교단의 교세 통계는 대체로 신자수 증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거의 5백만 명에 달했다.

교단의 교세 통계는 각 교회들의 자료를 교단 총회가 취합한 결과다. 즉 이것은 교회에 신자로 등재된 이들의 총수를 말한다. 반면 인구센서스는 피조사자들이 자신이 어느 종교에 속한지를 표기한 결과다. 그렇다면 최대 5백만 명이라는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분석 중 가장 개연성이 있는 것은 중복교적자로 인한 것이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전체 교인들 가운데 40% 이상이 중복교적자라는 얘기다. 도대체 중복교적자가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개신교에서 교회를 사역하는 목사들의 능력 평가의 첫째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교인수를 얼마나 증가시켰는가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교회사역자는 새 신자가 교회를 방문하면 사력을 다해 교적에 등재시키려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은 세례의 양산과 맞물린다. 이렇게 교인수 증가는 교회사역자의 이후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는 더 여건이 좋은 교회의 사역자로 옮겨갈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은 끊임없이 교회를 옮겨 다닌다. 교회 이동의 가장 큰 요소는 이사와 결혼이다. 한데 1990년대 이후 점차 이사율도 결혼율도 감소 추세에 있다. 또 지하철이 빠르게 지배적인 교통수단으로 부상하고 자가용 자동차가 일반화되면서 거리라는 변수는 교회를 옮기는 요인으로 점점 덜 중요해지게 되었다. 반면 교회를 떠나는 이들에 대한 조사들에 따르면 이 무렵 이후 신자들의 교회 이동에서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 것은 목사나 교회에 대한 실망의 문제다. 이와 연관해서, 이 무렵 이후 교회 간 수평이동 신자들은 교회의 열성 신자, 특히 주요 직책을 경험하여 교회와 목사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이들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사나 결혼 외에 중요한 수평이동 요소는 목사나 은사자들을 따라 이동하는, 즉 자존성이 약한 신자들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는 교회에서 더 자존성 강한 신자들이 더 많이 수평이동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은 민주화와 소비사회로의 빠른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하여 한국사회에서 시민들 개개인의 자존성과 권리의식이 빠르게 신장하던 때였다. 개신교는 한국사회 평균보다 학력이나 자산상태, 상징권력 등이 더 높은 이들이 많은 종교라는 사실은, 개신교 신자들의 자존성과 권리의식도 매우 높은 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교인들 가운데 자존성 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이 종교적 자존성을 가졌을 것이고 그들의 다수가 수평이동을 택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그 무렵 한국사회는 빠르게 정보사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무수한 정보가 온오프라인을 떠돌았고, 수평이동 신자들은 뛰어난 검색능력을 발휘하면서 교회들과 목사들을 평가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런 이들이 한동안 일원이었던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특정 교회들로 몰려들어 재정착하게 됨으로써 이 시기에 새롭게 급증했던 대형교회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탄생한 대형교회들은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수평이동 신자들의 유입에 성공한 결과다. 이 교회들은, 과거와 같이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라는 획일적 요소보다는, 목사들의 지적 능력, 교회의 수준 높은 프로그램, 교회의 특별한 시설과 건조물 양식 등 다양한 요소들이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함께 어우러진 양상을 띤다. 나는 이 두 유형의 교회들을 각각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류한 바 있다.

아무튼 1990년대 이후 교회들은 재적신자들의 수평이동이 극심했고, 새신자의 유입은 급락했다. 이 시기 수평이동 신자들의 비율은, 조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대체로 전체 신자들의 45~7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2005 인구센서스조사가 한창일 때는 참여정부가 등장하고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대단히 고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낡은 권위주의에 대한 청산 의지가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교회는 낡은 권위주의의 온상처럼 비추어졌다. 또한 그 무렵은 낡은 권위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미국이 지목됨으로써 반미 기조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시기였다. 그리고 개신교는 대표적 종미(從美) 부역자로 낙인찍히고 있었다. 즉 개신교에 대한 호감도는 급락했고 혐오감정이 치솟던 무렵이었다.

바로 이것이 ‘2005 인구센서스가 자신이 개신교 신자임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고, 교단통계는 이러한 분위기를 담지 못했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에서 말한 개신교의 재정 위기에 대한 얘기를 좀 더 살펴보자. 1990년대에 대형화에 성공한 몇몇 교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새신자의 유입이 거의 멈추고 교회에 충성스러웠던 신자들의 사실상의 감소로 인해 교회들이 맞닥뜨린 가장 직접적인 위기는 재정의 압박이었다. 수많은 교회들이 적자예산에 시달렸다.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이 무렵부터 추진되었던 기독정당들의 슬로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교회 대출이자율을 1%대로 낮추겠다는, 터무니없는 슬로건으로 많은 교회사역자들과 신자들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의 재정 악화는 부채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교회의 금융신용도도 추락했다. 이에 시중은행은 교회에 대한 대출을 억제했다. 한데 그 무렵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면서 무분별하게 추진된 기타 금융권의 확대와 이들 간의 무한경쟁 상황에서 수협 등의 몇몇 기타 금융권의 교회대출상품은 높은 이자율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재정건전성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런데 개신교 각 교단들의 교세통계는 그러한 부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았기에 교단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적절한 정책을 개발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학생들의 취업률 저하를 예비 교회사역자들의 태도의 해이함으로 해석했고, 하여 각 교단들은 오히려 예비 교회사역자들의 교회개척이나 단독사역 경력을 목사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첨가하곤 했다. 이것은 교세가 위축됨에도 불구하고 교회당의 수가 오히려 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경력 많고 유능한 교회사역자들이 소형 교회들을 옮겨 다니며 사역하던 얘기는 옛 말이 되었고, 열악한 조건의 교회들은 경험이 일천한 신출내기 사역자들의 불안한 일터가 되었다.

뉴스앤조이2015.04.26.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8961). 


이것은 또한 교회 파산율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2000년대 초, 매년 1300개 정도의 교회가 파산했다. 해서 이 무렵 파산한 교회당과 부속물들을 처분하는 블랙마켓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교회 매매 과정에서 일종의 권리금 형식의 비용이 추가되었는데, 교인들의 숫자가 이 금액의 크기를 좌우했던 것이다.

그런데 ‘2015 인구센서스에선 ‘2005 인구센서스와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인구센서스에서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이들은 크게 늘었는데, 각 교단들의 교세 통계는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감소했다는 교단 통계들이 등장한 것은 대략 2010년대 이후다.

지난 1990년대 이후 교회들의 구조화된 악순환의 고리들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더 악화되었다. 이와 맞물려서 사회적 신뢰도는 심각할 정도로 추락했다. 불교사회연구소의 2015년도 종교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가톨릭과 불교의 종교신뢰도는 각각 39.8%, 32.8%인데 반해 개신교는 10.2%이고, 신부와 승려의 신뢰도가 각각 51.3%, 38.7%인데 목사는 17.0%이다. 이러한 결과는 개신교나 비종교권의 조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개신교 신자는 감소해야 마땅하고, 1위인 불교와의 격차는 더 벌어졌어야 하며, 3위인 가톨릭과의 격차도 좁아졌어야 했다. 여기에 2020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세가 역전될 것이라는 파국론이 개신교 목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각 교회들이 체감하는 현실도 심각한 위기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015 인구센서스의 개신교 교세인 19.7%와 비슷한 결과들이 다른 조사들에서도 나온다는 사실이다. 2014년 한국갤럽의 종교인구 조사에서는 개신교 신자가 21%로 추산되었고, 개신교 복음주의 기관인 한국목회자협의회(한목협)2012년 조사에서는 22.5%로 나왔다. 단 한국갤럽의 조사는 불교도가 근소하게 더 많게(22%) 나온 반면 한목협 조사에서는 좀 더 작은 차이지만 불교도가 적게(22.1%) 나왔다는 것이 다르다.

이 조사들의 공통점은 그 수치가 교회의 재적교인 통계가 아니라 신자들의 종교 귀속의식 통계라는 점이다. 요컨대 2010년대의 각종 조사에서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이들은 총인구의 20% 안팎에 이르는 매우 높은 수치를 보인다. 이것은 ‘2015 인구센서스조사결과를 잘못된 것, 혹은 황당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아니 그것이 황당함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관점이라면 신자들의 귀속의식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개신교의 이미지는 점점 추락하고 있고, 교회 자체의 재적 교인은 감소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이들이 줄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추정하는 대답은 이렇다. ‘2005 인구센서스에서 개신교 신자임이 낮게 표기된 것과 ‘2015 인구센서스에서 높게 표기된 사이에는 두 조사 응답자들의 종교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인식 기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2005년도의 대중은 민주주의나 반미 같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진보주의적이라는 이성의 기획이 중요했었다면, 2015년의 대중은 그런 계산 가능한 미래에 대한 기획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오히려 자신의 상처받은 감정을 위로받고 싶어 하고, 산산이 부서진 사적 공동체들을 대체하는 대안적 공동체에 귀속되고 싶다는 갈망이 더 큰 이들이라는 것이다. 하여 개신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평가나 도덕적 평판보다는, 더 다양한 위로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고 더 긴밀하게 친구들과 엮일 수 있는 장(fields)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 프로그램에 잘 참여하지 않는 이들 중에는 교회의 배타주의적 주장, 공격적 태도 등에 불평하는 이들이 많다. 즉 그들은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포지션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교회를 매개로 해서 벌어지는 친밀성의 공동체에 속하려 하고, 그런 공적, 사적 모임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한다. 요컨대 교회라는 친밀성 커뮤니티의 일원이고 싶어 하지만, 교회의 이념 마케팅이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예배나 대사회적 행보에는 좀처럼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2005년과 2015년에 신자 대중의 인식의 기준이 바뀌게 된 데에는 두 시기의 시대성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2005년과는 달리 2010년대의 대중은 강자들의 탐욕에 유린된 추악한 보수주의적 정권들 아래서 신자유주의를 살아내기 위한 각자도생의 고단함에 찌들어 있게 되었다. 그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자기계발에 몰두해야 했고, 끝없이 좌절하고 마는 실패 혹은 예감된 실패 속에서 힐링과 코칭에 목말라 하게 되었다. 바로 그런 프로그램들과 공감의 연결망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되는 장이 바로 개신교회였던 것이다.

결국 개신교 신자수를 둘러싼 교회사역자와 교단당국, 그리고 개신교 신학자인 나 자신의 황담함의 감정은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신자대중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읽어내지 못한 결과이고, 친밀성의 신앙 네트워크로서의 교회의 가능성을 읽어내지 못하는 교리 중심주의적 교회주의의 위험함의 산물이다. 아픔을 공감하고 거기에서 성찰의 자리들을 발견해내는 신앙, 그러한 비전을 꿈꾸지 못하는 불임의 종교성, 그것이 개신교인이고 싶어 하는 이들을 교인으로 포함시키지 못하는 개신교의 구조적 위기의 요체인 것이다.

 

종교인구 추이 속에 담긴 종교학의 곤혹스러움

 

‘2015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2005 인구센서스에서 점점 늘고 있던 종교인구가 감소했다. 종교인구의 감소에 대하여 기존의 여러 연구들은 사회의 발전과 종교인구의 확대는 서로 반비례 관계라는 세속화론적 논지로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앞 절에서 개신교 당국자들의 황당함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해석들은 사람들의 실제 체험을 잘 반영 못한다는 것이 나의 논지다.

사실 전 세계는 점점 종교적 기조가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발전 사회에서 종교가 대중 사이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속화론이 종교가 쇠퇴일로에 있다고 말하는 서구사회에서도 포스트모던 신종교 현상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교들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른바 명상과 자기계발, 그리고 힐링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종교성이 발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회들에서 개신교의 성령운동의 세 번째 웨이브가 활발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한편 종교제도나 종교적 담론 형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수행적 차원에서 종교적 기획과 유사한 자기계발-힐링의 프로그램들(코칭 프로그램과 리더십 프로그램)도 성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기업화됨에 따라 종교효과는 전통적 종교기관을 넘어서 산업적 기관이 주도하는 추세를 보인다.

심지어는 마케팅학계의 구루라고 불리는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산업사회의 마켓 1.0’소비사회의 마켓 2.0’을 지나 영성사회의 마켓 3.0’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예언한 것처럼, 기업들이 종교적 상품 시장에 끼어드는 것을 넘어서 비종교적인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번안하여 새롭게 시장을 창출하려는 실험들을 활발하게 모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정치인에 대한 팬덤 현상도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을 종교학의 교조라고 할 수 있는 조너던 스미스(Jonathan Z. Smith)의 표현을 빌려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이라고 한다면, 최근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시위문화로 부상한 촛불집회에서도 종교적인 것이 엿보인다. 과거 시위를 특징짓는 상징물은 깃발이었다. 깃발은 그 안에 추구하는 이념과 전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깃발은 그 시위에 참여한 단체 소속원들의 공간적 위치 표식에 지나지 않다. 반면 시위에 참여한 대중 전체를 결속시키는 기호는 촛불이다. 거기에는 이념도 전략도 없다. 대신 염원이 그들 모두를 하나로 만든다. 촛불은 그 염원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전통적으로 종교적 설치물인 촛불이 그것을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을 든 대중은, 낡은 질서에 대한 파괴와 해체의 정념에 불타오르던 과거의 시위하는 대중과는 달리, 체제가 주장하는 질서를 한층 더 승화시키는 존재임을 과장되게 연기한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뒤, 마치 예배 참여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일상에 돌아가듯이, 그 어지러운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하며 귀가한다.

이렇게 오늘의 세계는 곳곳에서 더 종교적이다. 전통적 종교체제들이 대표했던 종교의 영토를 넘어서 모든 존재의 장소가 종교 혹은 종교적인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 자본론에 몰입했던 대중은, 그리고 성서의 유일무이성에 함몰되었던 대중은, 자본론과 성서와 논어, 맹자, 도덕경, 각종 불경들을 읽는다. 그리고 많은 종교들에 존경심을 표하고 무속에서 삶의 의미를 읽어낸다. 과거에 한 종교에 몰입했던 혹은 무신론자임을 힘주어 말했던 이들이 자신을 가두었던 경계를 넘어 바깥을 넘나든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러한 경계 넘기를 통해 종교적 체험을 한다, 혹은 종교적 이펙트를 경험한다.

한데 문제는 기성의 종교들은 그러한 종교 너머의 종교성에 대해 닫혀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과거에 구축된 경직된 언술들을 반복해 주장한다. 하여 종교의 경계를 더 높이 쌓고자 하는 운동을 벌인다. 한편 그렇게 구축된 질서 속에서 무수한 주류 매체들은 낡은 종교적 체계의 분류 방식에 따라 종교를 규정한다. 가령 인구센서스의 설문 같은 것이 그렇다. 개신교회를 다니고, 가톨릭 피정도 다녀오고, 템플스테이에도 참여하며, 유교 경전들과 불교 경전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으며 굿판이 벌어지면 애써 찾아가 함께 한다. 또 새해가 되면 사주를 보고, 매일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다. 그런데 인구센서스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선택하게 한다. 하여 설문에 참여한 이는 어느 것이 자신의 종교인지를 단지 하나만 선택해서 표기할 수밖에 없다. 즉 기성의 종교제도와 담론, 그리고 이와 맞물린 사회의 제도는 변화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도 다르지 않다. 아니 기성의 종교가 더욱 경직되어 있고, 그러한 경직된 종교성을 주도하는 개신교의 폐쇄성 탓에 더욱 닫힌 종교들의 사회가 되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적 횡포가 사람들의 삶 전체를 옥죄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계산 가능한 미래가 무망한 현실에 갇혀 버린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몸과 마음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그러한 질병에서 벗어나려는 종교적 갈망에 매달리고 있다. 한데 문제는 기존의 주류 종교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고통과 질병에 무감각한 탓에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하고 있다점에 있다. 심지어 개신교는 또 다른 질병을 추가하고 있다. 그것은 증오라는 질병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와 코딩된 출구를 기획했던 2000년대 대중과는 달리 2010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미래의 출구를 상상하지 못한 채 절망의 늪을 헤매면서 앞서 열거한 혹은 거기서도 미처 말하지 못한 종교성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기성 종교들이 그것을 종교성이라고 호명하지 않은 탓에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성이 비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인구의 감소를 말하는 ‘2015 인구센서스는 곤혹스럽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 곤혹스러움을 해명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소속 없는 신자’,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멀티신자등이 그런 예들이다. 조금씩 다른 강조점을 갖고 있는 이 모든 문제제기들이 공히 함의하는 것은, 종교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연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점을 신앙 속에 담아내지 못한 종교의 위기가 바로 종교성이 만연한 시대에 종교인구의 감소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 3대 종단별 인구 변동(1985199520052015)



[2] 연령대별 종교 여부 (20052015)



 [3] 사회활동 참여율

 


[4] 지역별 종교인구 변동(2005: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