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5~7일에 제1회 제주평화신학포럼이 제주 문하우스에서 열렸다. 최정의팔 목사님이 운영하는 팬션 제주문하우스에서 열렸다. 강정개신교대책위, 제주사랑선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 정의평화생명위원회, 세 기관이 주관해서 열렸다. 첫번째 포임이고 경혐이나 재정에서 모두 열악함에도 꽤 내실 있는 포럼이었다. 발제자의 한 사람으로 초청받은 것이 내겐 영광스런 기회였는데, 무엇보다도 제주에서 활동하는 분들 하나하나의 진정성과 내공을 접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의 발제글과 함께 이 포럼의 자료집을 첨부 한다. 포스터와 프로그램 내용을 담은 도표까지.
이 포럼 발제를 유튜브로도 중계했는데, (77) 제주평화신학포럼 - YouTube에서도 볼 수 있다.
나의 발제글은 완성된 글로 만들려면 좀더 다듬어야 하지만, 좀 거친 문장이지만 여기에 그대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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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 질주하는 한국, 저 너머엔 네오파시즘의 기획이 엿보인다
‘48년체제’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판
‘48년체제’의 초석적 사건
‘48년체제’(1948-year regime)라는 제도적이고 담론적인 극우반공주의적 규율체계가 강력한 권력연합을 구축하게 될 때 한국사회는 파시즘의 잔혹한 격랑에 휘말렸다. 한데 국가에 의한 폭압적 살상극인 제주4.3사건은 이 체제 형성의 초석이었다.
해방 이후의 정치과정 자체가 대중의 지지를 더 많이 받고 있거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자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던 세력(1)이 아닌, 미군정과 소군정의 지지를 받고 있던 소수분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던 세력은 배제되었다. 특히 남한의 경우 헤게모니 세력은 다수 대중의 이해보다는 권력자원을 과점하고 있는 집단들의 이해가 더 많이 관철되면서 헤게모니화가 진행됐다. 해서 남한사회의 체제 형성 과정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런 혼란 상황은 국가가 설립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국가의 탄생은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왜냐면 국가는 헌법, 정치구조, 국가와 시민의 관계 등, 정치사회적 제도를 만들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제 다수의 사람들은 서로 분쟁하게 될 때에도 그 사회의 게임룰 안에서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 사회 특유의 일상문화가 만들어진다. 집단적인 일상문화는 구성원들이 대화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그밖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얽히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과정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절멸 과정으로 묘사하는 성서의 설화는, 그것이 현실의 과정이라면, 거기에서 국가가 탄생하기는 매우 어렵다. 국가는 씨족과 부족사회보다 훨씬 폭넓은 집단들이 서로 공존하고 삶이 얽힐 때 출현할 수 있다. 그런 얽힘의 제도가 필요하고 그 제도를 통해 일상문화가 구축될 때 국가는 비로소 역사 속에 등장할 수 있다. 즉 정복된 지역의 모든 존재를 절멸시킨다는 성서의 설화는 신화적 묘사이거나 아니면 국가는 꿈도 꿀 수 없는 원시적인 집단의 기억을 반영한다.
이렇게 정치사회적 제도와 일상문화가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독특성을 갖게 될 때, 그것을 규정하기 위한 사회과학적 개념이 바로 체제(regime)다. 나는 한국의 국가가 탄생한 1948년을 기점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형성된 독특한 정치사회적 제도와 일상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48년체제’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물론 이 용어는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정치학자인 박찬표는 최근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저작을 남겼다.(2) 그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부터 ‘반공’을 키워드로 하는 지배연합이 구축되었고, 그들의 헤게모니화 과정을 통해서 국가는 안착했다. 그렇게 해서 파시즘적국가가 장기간 우리 사회를 통치했다. 한데 시민혁명에 의해 반공주의적 지배연합이 붕괴되고 헌법이 개정되는 일이 수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48년체제’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파시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도 여전히 국가와 국민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48년체제’의 흔적으로 인해 새로워야 할 정치적 사회적 선택이 왜곡되곤 했다. 즉 ‘48년체제’는 파시즘적 국가로 현현하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적 국가로의 전환을 도모할 때도 그것은 선택의 제약으로 작용한다. 물론 박찬표는 일상문화을 좀더 깊게 다루지 않았기에, 파시즘의 내면화 문제에 대해서는 깊게 사유하지 않았다. 나는 이 글에서 국가제도로 외화된 파시즘과 내면의 파시즘, 이 두 욕구가 ‘48년체제’ 속에 어떻게 잔존하고 그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 극도의 혼란 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었다. 같은 시기 북한도 정부 수립 수순을 밟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건국을 위한 총선거가 치러졌다. 북한에 할당된 100석을 제외한 200명의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전국 투표율은 무려 95.5%나 되었다. 군정당국과 군정경찰의 폭력과 학살, 그리고 백색테러들에도 불구하고, 국가 창건을 위한 선거에 다양한 유권자들의 열렬한 참여가 빛났다. 그렇게 선출된 제헌의회 의원들은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이 정하는 방식에 따라 대통령을 추대했다. 내정된 대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외형상으로만 보면 이렇게 진행된 대한민국 국가의 창건은 국민의 축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 국민에게 이 과정은 전혀 축제가 아니었다. 해방정국의 수많은 디스토피아적 사연들은 생략하고, 그 직후 정치과정에 대해서만 언급해보자.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직후 처음부터 공포정치를 구사한다. 취임 62일 만인 10월 17일 제주 전역에, 그리고 21일에는 전남과 경남의 일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제주와 여순 지역에서 국가에 의한 끔찍한 학살극이 펼쳐졌다.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밖의 피해는 헤아릴 수도 없다. 새 정부의 창건은 살육으로 점철되었다.
이는 이승만 정부가 ‘증오’를 국가 형성의 핵심 기재로 활용한 탓이다. 제헌헌법의 초안 작성자인 유진오는 다양성의 조화와 공존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3) 그러나 그 법에 의한 추대된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조화와 공존이 아니라 배타성과 적대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다. 극단적 반공주의 원리로 말이다. 그러니 그는 헌법을 준수할 의지가 없었다. 해서 그는 집권하자마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법적인 예외장치’다.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몇 명의 통치권자들은 예외 없이 이런 법적 예외장치를 활용해서 초법적 권력을 휘둘러댔고 심지어 그런 초법적 권력을 법률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개헌 작업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그런 초법적 법률에 부응하는 사회・문화적 제도화를 추진했다. 하여 ‘48년체제’는 파시즘적 국가로서 역사 속에 임재(presence)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민혁명을 통해 그 초법적 법을 정상화하는 민주주의적 개헌이 이루어진 뒤에도, 사회와 문화 속에 새겨진 ‘48년체제’의 흔적은 이른바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나타났다. 그 ‘48년체제’의 초석적 사건(foundational event)이 바로 제주4.3사건다.
파시즘적 체제
왜 이승만은 새로 창건된 국가를 도살장으로 만들어버렸을까. 제헌의회 198석 중 여당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얻은 의석은 55석에 불과했다. 여당 이중대라고 할 수 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의석은 29석이었다. 두 당을 합해도 84석, 40%를 약간 상회할 뿐이었다. 반면 무소속 당선자는 그보다 한 석 많은 85명이었다. 제헌헌법은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를 가미한 대통령중심제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여소야대 정국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법부도 김규식계라고 할 수 있는 김병로 대법관이 이끌고 있었으니 삼권분립 제도 아래서 대통령이 사법권을 장악할 수도 없었다.
한데 이승만은 한민당계 인사인 조병욱이 지휘했던 경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청에 의해 경무국장으로 임명된 조병욱은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 경찰의 40~50%를 차지했던 조선인 경찰들을 대거 복귀시켰다. 일제강점기, 특히 전시동원체제이던 1930년대 후반 이후 경찰병력은 초과잉 상태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조병욱 치하의 경찰 총수는 2만5천 명에 달했는데, 1948년 정부수립 직후엔 3만4천 명으로 136%나 증가했다. 국가의 재정능력이 세계 최하위권에 속해 있고 경제적 성장 잠재력이 거의 없던 나라에서, 오직 경찰력만이 과잉성장했다. 또 일본 식민당국이 관리하고 있던 3천여 개 조직의 250만 명에 달하는 청년단체 회원의 상당수가, 경무국의 직간접적 영향권 아래 있는 우익청년단원으로 탈바꿈했다. 해방정국 때부터 그들은 사살상 이승만을 지지하는 백색테러 조직으로 활동했고, 5.10총선거 직전에 그들은 양성화된 치안보조 단체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하여 그들의 폭력은 이제 테러가 아니라 공권력의 행사가 되었다. 건국 이후에도 일정기간 동안 이들의 ‘잔인한 공권력 행사’는 계속되었다.(4) 여기에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청년조직인 서북청년단이 가세했다. 아니 가세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의 활동은 압권적이었다. 이는 그들이 북한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탄압을 받으며 월남했기에 반공성향이 남달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그들은 다른 청년조직들과는 달리, 엘리트 반공주의 청년들이 많았기에, 남한사회의 헤게모니 집단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한편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혹은 만주국 소속 장교와 하사관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는데, 그들 중 다수가 대한민국 국군 창건에 깊게 관여했다. 한데 그들 대부분은 ‘친일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반공전사’(anti-communist warriors)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 세력이었다.
과대성장한 경찰과 우익청년조직, 그리고 반공전사가 된 군부 세력은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전위대였다. 바로 이들이 제주와 여순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 군사작전은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을 동반했다.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그랬듯이,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그랬듯이 말이다.
역사학자 조지 모스(George L. Moosse)가 말한 것처럼. 전쟁 체험은 ’적‘을 비인간화하여 궤멸의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과정에서 증오는 신앙이 되고, 폭력은 국가라는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정의의 실천이 된다. 그는 나치의 국가를 이렇게 정치종교적 체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5) 나치 체제만큼 광범위한 국민이 광신도화된 국가는 아니지만, 이승만의 국가도 이렇게 신이 된 국가를 수호하는 광신도들을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이력이 어떻든 간에, 아니 그런 죄인의 이력 때문에 더욱 광적인 ‘애국적 신도’로서 주체화된다.
이렇게 전쟁 체험의 신화’를 통해 주체화된, 과잉성장한 경찰과 군대, 그리고 우익청년조직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이승만의 국가는 입법부도 사법부도 무력화시키는 일종의 파시즘 체제로 자리잡는다. ‘48년체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제정치
하지만 이러한 ‘48년체제’의 등장은 ‘세계대전 이후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 국가들은 몰락했다. 승자는 그것을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로 해석했다. 당시 민주주의 체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두 유형으로 나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인민민주주의’가 그것이다. 결국 전후 세계는 승리한 두 이데올로기 간의 경합이 불가피했다.
한데 변수가 생겼다. 식민화되었된 많은 지역들에서 가열찬 해방운동이 벌어졌는데, 패전국들은 물론이고 승리한 제국들도 이 해방운동들을 제압할 여력이 없었다. 한데 이들 해방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대체로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들 해방된 많은 나라들에서는 공산화가 이미 되었거거나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이 미국 국회에서 행한 연설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서유럽 국가들의 재건을 위해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 터키 등 공산화의 위기에 있는 국가들에게 적극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국제정치상의 불간섭주의에서 적극적 개입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세계는 냉전 시대에 돌입했다. 미국은 그 전선 이편의 경찰국가이자 패권국가가 되었다. 이런 중대한 전환의 계기라는 점에서 이 연설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ctrine. 1947.03.12.)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공산화 위기에 놓인 국가들이게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대목이다. 문제는 누구를 지원한다는 것인가에 있다. 어떤 사회가 공산화 위기에 있다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곳의 공산주의자들이 해방운동의 주축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반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반공주의 그룹은 주로 자산가들로서 식민지 시절에 제국주의자들의 협력자였거나 제국 군대의 장교로 복무한 자들이 많았다. 남한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 독트린이 발표된 바로 다음 날 이승만은 ‘남한 과도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만이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로 말이다. 한데 이승만의 주요 지지세력은 다수가 친일경력을 가진 지주세력과 총독부 산하 공무원과 만주군 소속 공무원, 특히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 인사들이었다.
그 무렵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2월의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신탁통치안(6)에 반대하는 고집불통의 이승만보다는, 합리적인 온건우파 지도자 김규식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 정부는, 이 독트린의 문제의식을 잘 이해하고 있어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에 더 적합한 인물인, 강경 반공주의자 이승만에게로 선회한다.
이듬해인 1948년 5월 10일 (이승만의 계획대로)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해 4월 3일 제주에서 벌어진 파출소 습격 사건은 바로 이 총선거에 대한 민의 저항의 표시였다. 그 여파로 제주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승만은 대통령 수락을 서명하는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편 것이다.
물론 이런 학살극은 트루먼 독트린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그랬듯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치세력은 대중, 특히 행동주의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학살 과정에서 더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그랬고 제주도 그랬다.(7) 두 곳 모두 트루먼 독트린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고, 두 곳 모두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반공주의적 증오’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정권이 장기집권했다. 그리고 두 곳 모두 그 정권은 파시스트 체제를 구현했다. 이렇게 한국의 ‘48년체제’는 미국의 국제정치가 만들어 높은 냉전의 공간에서 벌어진, 자유민주주의적 파시즘 체제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전후 반공주의적 냉전의 국제정치는 이들 식민지에서 해방된 무수한 국가들에서 파시즘 체제의 등장을 초래했다.(8)
그러나 식민지에서 해방된 파시즘 국가들은 유럽에서 등장한 파시즘 체제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유럽의 파시즘 체제는 극우화된 광폭한 대중의 열렬한 지지에 기반을 둔 대중독재를 통해 구현되었다. 하지만 해방된 식민지 파시즘 체제들의 경우 일부 엘리트 그룹들이 그런 욕구를 갖고 있었으나 그들이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갖게 된 훨씬 후대에 가서야 파시즘 체제가 안착할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 자원의 축적과 매스미디어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한 1970년대에 와서야 대중독재로서의 파시즘 체제가 정착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심어 놓은 파시즘적 체제로서의 ‘48년체제’는 그것을 추구한 정치적 권력이 몰락한 이후에도 잔존하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대중독재를 반대하며 등장한 민주주의 지향의 정부들조차 반공주의와 증오의 장치는 내면의 기재로서 작동하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적 선택들을 왜곡시켰다. 한편 서기 2천년대 전후 한국사회 진보진영 내에서 벌어진 격렬한 담론 투쟁의 한 소재가 ‘우리 안의 파시즘’이었다. 그 주장에 의하면 파시즘은 사회정치적 제도인 동시에 내면의 제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게인 1948’
2006년 뉴라이트 이론가로 알려진 경제사학자 이영훈이 《동아일보》(2006.07.31.)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컬럼을 기고했다.(9) 이 컬럼을 기점으로 한국사회에는 학계는 학계대로, 시민운동단체들은 시민운동의 방식으로, 그리고 정치계는 정치를 통해서 치열한 건국절 논쟁이 벌어졌다.
이영훈의 건국론은 전형적인 ‘가족로망스’ 담론이다.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서사는 위조된 현실이며, 이는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착시안경’이 왜곡한 역사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민족’이라는 근대주의적 발명품이 식민주의적 주체인 ‘일제’의 대립물로 의미화되면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탄생했다.(10) 이를 가족로망스식의 서사로 다시 이야기하면 식민화로 인한 ‘고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재주체화하는 도구로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착시안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착시안경은 해방 이후에까지 계속되면서 식민지 시대를 객관적으로 보는 걸 방해했다. 더욱이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구호와 얽히면서 ‘항일’로 링크되지 않는 모든 기억은 삭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과도한 도덕적 역사주의로 인해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진정성이 망각되었다. 이때 기억에서 배제된 이들 중에는 무수한 현실의 아버지들도 있었다. 그 현실의 아버지들은 나름의 열정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이다. 그런 이들의 다수가 건국의 대열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은 바로 그런 이들을 포함시킨 국가를 만들어냈다. 일제강점기 때 구축된 근대의 흔적들을 활용하려면 그 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데 공산주의자들은 항일과 링크되지 않은 무수한 아버지들의 존재를 배제한 국가를 꿈꾸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투쟁은 바로 그런 착시안경을 쓴 원조 분리주의자들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영훈의 건국절 담론의 골자다. 그런 점에서 건국절의 이승만은 ‘귀환한 상징의 아버지’다. 그이를 통해 그 시대를 다시 읽고, 그 앞 시대, 곧 일제강점기를 다시 살펴보면 오늘의 시대를 다르게 읽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의 이런 주장을 둘러싼 수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또 많은 이들은 그를 지지했다. 아무튼 이영훈의 도발적 문제제기가 있던 때를 전후로 한국사회에는 무수한 뉴라이트 운운하는 단체와 담론이 활기를 띠었다. 접두사 ‘뉴’(new)가 붙음으로써 기존의 우파는 ‘올드라이트’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올드라이트가 민주화론자들과의 담론투쟁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가정한다. 하여 이 시대는 너도나도 ‘뉴라이트’를 자처했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는 ‘뉴라이트’ 인사로 자타에 의해 공인된 이들을 대거 발탁하여 정권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게 했다. 하지만 아직 생각을 국정에 담아본 경험이 일천했던 이른바 뉴라이트들은 전혀 새롭지 않은 우파의 정책과 담론을 남발했다.
이렇다 보니 뉴라이트와 올드라이트의 경계는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뉴라이트(이하 ‘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올드라이트(이하 ‘올드’)와 같거나 ‘더 날것’의 우파처럼 보기도 했다. 한데 2010년대에 여러 뉴라이트 그룹 중 ‘뉴’라는 말에 딱 맞아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매스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른바 온라인 담론공동체인 ‘일베’다. 그밖에 에스더기도운동본부나 인터콥 같은 극우성향의 개신교계의 선교전문기구들도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이들이 ‘올드’와 가장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것은 주된 활동의 공간이 ‘온라인’이라는 점이다. ‘올드’는 ‘아스팔트우파’라는 명칭에서 시사되듯 주로 오프라인 공간에서 활동해온 반면, ‘일베’ 등은 온라인 공간이 주무대다. 자연 ‘올드’는 연령적으로 중장년층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뉴’는 청년이 대다수다. 또 ‘올드’는 구호를 소리쳐 외칠 때 격한 흥분의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만, ‘뉴’는 비아냥거리는 조롱이 유난히 많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올드’는 ‘개신교’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반면 ‘뉴’는 탈교회성 혹은 메타종교성과 관련이 있다. 전자가 근대적 종교성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면, 후자는 포스트근대적 종교성의 한 풍경을 보여준다. 가령 아스팔트우파의 집회는 노천부흥집회 같다. 인기 있는 강연자는 마치 부흥사처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청중의 흥분을 자극한다. 음량을 최대치로 올린 스피커를 통해 그의 자극적인 발성은 그곳의 모든 잡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악기는 흥분한 대중의 감성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그리고 대중은 열렬히 리액션한다. 집회는 행위자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셋팅되어 있다. 그리고 메시지는 언제나 일방향적이다. 이에 비해 ‘뉴’의 공론장에선 누구도 고정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각기 자신의 말을 하고 누군가의 말에 반응한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구별되지 않는다. 비아냥과 야유와 토론이 뒤섞여 있다. 이것은 〈사도행전〉 2,4에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이들이 각기 자신의 말을 하는 난장(亂場), 곧 ‘카오스 스피킹’(chaos speaking)의 현장과 유사하다. 성서는 그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들의 카오스 스피킹의 내용을 이해했든 아니든 그 분위기에 공명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 것처럼 ‘뉴’의 난장 같은 공론장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 내용을 공유했다기보다는 그 정서를 공유한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현장은, 하나의 종교에 의해 모두가 합일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이들이 각기 성령이 일으키는 기조를 공유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공명하는 종교성을 보여준다. 이런 종교성을 ‘메타종교성’(meta-religiosity)이라고 하는데, 이는 들뢰즈가 말한 ‘카오스모스’(chaosmos)의 시간,(11) 곧 혼돈과 질서가 중첩되는 담론의 공간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종교성을 말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일베’ 등이 만들어낸 공론장은 그런 메타종교성의 장을 보여주었다. 이야기의 난장이라는 점에서 카오스적인데, 그 속에서 ‘적에 대한 증오’의 감정에 공명하는 질서가 구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fields)의 차이는 내용이나 활동 형식에서 더 많은 차이들을 두드러지게 한다. 당장은 ‘뉴’는 자신들이 ‘올드’와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하는 듯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차이보다는 유사성이 더 부각될 것이고 절충의 수사가 더 발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윤석렬 정권의 탄생 과정이 보여주듯, 민주연합이 보수연합과 대등한 경쟁력을 갖춘 상황에서 ‘올드’와 ‘뉴’는 서로 연결된 담론공동체로 결속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그 담론공동체가 어떤 것인가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올드’와 ‘뉴’가 공유하는 주체성의 서사에 주목하게 된다. 양자 모두 ‘민주화’를 ‘종북’의 유사어로 간주했고, 반공을 다시 강력한 규율장치로 재활성화하려는 데 집중했다. 건국절 담론이 바로 그렇다. 여기에는 이승만을 ‘다시 귀환한 상징의 아버지’로 규정하는 관점이 덧붙여 있다. 즉 건국절과 국부 이승만 담론은 한국의 ‘뉴’와 ‘올드’를 결속시키는 핵심 키워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오늘 한국의 우파는 한 목소리로 ‘어게인 48년체제’를 소리 높여 부르짖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앞에서 보았듯이, ‘48년체제’의 소환은 파시즘 체제를 재등장시킬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48년체제’의 씨앗을 뿌린 이승만 정권이 반공규율사회로서의 파시즘체제로 진행되는 경로의존성을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중은 비국민으로 낙인찍힌 ‘배제된 자들’에 대한 치명적인 국가폭력을 대리했고, 심지어 배제와 포섭의 경계에 있는 무수한 이들에게도 충분히 잔인해질 수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해서 이 글은 극우파가 등장하는 과정과 그들이 파시즘체제의 폭력의 수행자로 주체화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프플리즘 정치
시민혁명을 통해 파시즘 체제가 몰락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체제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자유’를 강조하든 ‘인민’을 강조하든 승자들은 자신들의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한국도 1990년대 이후, 비록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에 경도된 점이 없지 않음에도, 파시즘적 체제와는 다른 정치제제가 대두했음은 분명하다. 한국을 포함한 비공산권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만을 주목하면, 칼 포퍼의 표현대로 최선을 추구하는 인민민주의와는 달리 자유민주주의는 최악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된다. 이런 제도적 틀 내에서 정치세력은 경쟁을 하고 집권에 이르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하려면 시민사회를 설득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권세력이 세 번 이상 바뀌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되었다는 평판을 받게 된다.
한데 그렇게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고 자타에 의해 인정받고 있던 국가들에서, 최근 파시즘적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심지어 집권하는 일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파시즘 체제로 바로 이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쿠데타 같은 정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 사이에 포플리즘 정권이 들어선다. 즉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 종종 포플리즘 정권이 탄생하게 되고 더 퇴행적으로 이행하면 그것이 파시즘 체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2018년 현재 28개 유럽연합 회원국 중 22개 국가들에서 포플리즘 정권이 승리하거나 약진했다.(12) 미국과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공고화 단계에 있다던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속속 포플리즘 정권이 들어서거나 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그 약진으로 인해 집권당이 포플리즘 정당을 미러링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즉 포플리즘은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대두한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파시즘 체제가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지만 대중을 파멸로 몰아간 반면, 민주주의야말로 서민층의 대중에게도 행복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복지와 분배정책 등은 그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민주주의의 주요 성과에 속한다. 한데 20세기 말부터 대중 사이에서 그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심과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20세기적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는 현상을 ‘포스트트루스(post-truth)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현상은 믿음의 붕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믿음의 도래로도 이어진다. 그 믿음은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 공유에 가깝다.
20세기적 ‘트루스체제’가 엘리트 중심적이고, 그 담론은 그 시대의 가장 논리적 체계를 통해 보충되었다. 반면, 포스트투르스 현상을 주도한 이들은 지배적 질서에서 배제된 서민 대중이거나 그런 사회에서 미래를 도난당한 청년 대중이었다. 하여 포스트투르스 현상을 주도한 이들은 논리보다는 정서적 공감에 더 치우쳤다. 그리고 포스트투르스 시대의 대중은 감정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포플리즘에 경도되었다. 특히 21세기 포플리즘의 확산 현상을 주도한 것은 ‘우파 포플리즘’이다. 이 현상은 적에 대한 증오를 수반한다. 우리 내부에 유입되어 들어와 있는 적을 제거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하는 체제가 도래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그런 주장을 펴는 우파 그룹을 흔히 극우정치세력이라고 부르고, 많은 나라들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도 그들의 양상은 ‘올드’와 ‘뉴’로 나뉜다. 이들이 윤석렬 정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최근 이 정권의 국내외 정치 이데올로기를 주도한 이들 중 다수는 이명박 정권 시절 정치에 참여하여 정책 경험을 해본 뉴라이트 인사들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 포플리즘 정부의 성공이 우리 사회를 다시 파시즘 체제로 이행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파시즘의 전사들, 서청 특수부대와 아조프부대
이 대목에서 과거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건국절 논쟁이 한국적 파시즘 체제로서의 ‘48년체제’의 부활을 꿈꾸고 있으니, 그 체제 출현의 초석을 만든 이들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하지만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사회를 향해 어떤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을까.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정세와 결합되면서 그들을 어떻게 주체화했고 훗날 어떻게 기억의 정치, 그 전당에 흔적을 새겨 놓게 되었을까. 여기서는 ‘48년체제’ 출현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극우단체의 하나였던 서북청년단에 주목해보겠다.
그들은 주로 평안도 부르주아 계층의 젊은 개신교도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적잖았다. 월남 당시 그들은 북한 출신자들 중 가장 반공주의 성향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헤게모니 경쟁에서 패배한 뒤 집중적인 정치보복의 대상이 되는 경험이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체험된 반공주의’라는 용어로 규정한 바 있다.
월남 이후 남한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반공주의 성향은 극도로 강화된다. 남한의 헤게모니 경쟁 과정에서 구축된 반공주의 플랫폼이 그들에게 정착의 기회를 주었던 덕이다. 그들은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이 플랫폼의 일원이 되었다. 반공주의적 복수심과 생존욕구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던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의 하나는 백색테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증오와 폭력을 퍼부을 대상이 지목되면 그들은 아낌없이 분노를 쏟아부었다. 그러면 일정한 보상이 주어졌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것은 교회의 역할이다. 교회는 반공주의 플랫폼의 주요 구성원의 하나였다. 특히 월남자 교회는 복수행위로 인해 피로 물든 월남자 청년들의 심신을 아낌없이 위로해 주었다.
처음엔 백색테러를 수행하는 돌격대로서 표적을 향해 폭력을 퍼붓는 자였다. 하지만 점차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악의 진원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1947년 남한의 강경 공산주의자들이 제도권 내의 경쟁을 포기하고 전면적 반정부투쟁에 돌입했을 때 서북청년단은 민병대로 진압군에 동참했다. 민병대는 정규군이나 경찰이 할 수 없는 탈법행위를 자행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조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활동은 그들로 하여금 점점 무차별한 대상을 향한 가해의 짜릿한 욕구에 중독되게 했다. 그리고 1948년 말,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결찰과 정규군에 배속된 특수부대로 제주에 파송된다. 경찰로 배치된 서북청년단원들의 얘기는 이미 많이 다루어진 바 있으니 여기서는 군에 배속된 특수부대에 집중해보자. 조선경비단 제3사단 소속 보병18연대 산하의 특수부대(이하 ‘서청 특수부대’)가 창설되었다. 모두 서북청년단원으로 구성된 부대다. 처음엔 2백여 명 정도였으니 중대급 규모다. 한데 이들은 정규군에 배속되었지만 군번도 계급도 없는 이상한 부대의 일원이었다. 해서 군대의 공식 기록에도 남겨지지 않는 부대였다. 정규군이기에 무기와 식량을 비롯한 각종 용품을 공식적으로 배급받았지만, ‘기록 없는 부대’였으니 활동은 거의 민병대처럼 규제받지 않는 폭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기묘한 부대였다.
계엄령이 내려진 곳, 법의 규제가 중지된 곳, 해서 탈법적 살상이 훨씬 용이한 그곳으로 이 기묘한 부대는 진군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여순사건을 경험한다. 간도특설대 출신의 학살 기술자들의 무차별 살상을 보았고, 그 잔혹극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잔혹극의 학습은 제주에서 아낌없이 재현되었다.(13)
서북지역에서, 그들이 개신교계 부르주아 청년이었을 때, 반공주의에 점차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그들이 역사의 악마는 아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에서의 피해 의식은 그들을 ‘체험된 반공주의’적 적대감에 물들게 했다. 한데 남한에서 이주민으로 생존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적대감을 공격성으로 표출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점점 더 그들의 폭력성은 강화되었는데 그것이 극대화된 제주에서의 폭력성은 여순 지역에서의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들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러한 악마화 과정을 ‘수행적 반공주의’(performative anti-communism)라고 명명한 바 있다.(14)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아조프부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둘은 유사하면서도 좀더 과장된 활약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부 돈바스 지방에서 반러시아계 민병대 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용맹했던 신나치주의 민병대인 아조프부대는 2014년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가방위군 소속의 특수부대로 인정되어 준정부군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이제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 무기와 식량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대 병력도 크게 증가했다. 처음엔 대대였는데 연대로, 다시 여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 부대의 준정규군화는 러시아의 침공 명분을 제공했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학대와 살상이, 대러시아를 꿈꾸는 푸틴의 정복욕을 자극한 것이다. 그 얼마 후 마리오폴 전투에서 러시아의 막대한 공세에 이 부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서청 특수부대’는 보병18연대 산하의 이상하게 돌출된 이물질 같은 부대였지만 점차 전체 연대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강한 반공주의와 용맹함이 부대 전체의 특성이 되었고, 연대에서 여단, 사단으로 확대된다. 백골부대라는 이름의 이 부대는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동시에 잔혹한 학살과 만행의 이력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흥남철수 과정에서 부대가 괴멸된 후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애초의 서북출신자들이 많던 부대의 속성이 사라졌지만 전투력에 있어서는 여전히 강력한 부대로 남아 있다.
이렇게 아조프부대와 서청 특수부대는 유사점이 많다. 백색 테러집단에서 민병대로, 그리고 정규군에 소속된 특수부대로 발전해갔다. 강한 반공주의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용맹함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민간인 학살의 전력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대는 전쟁범죄자의 죄목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 참담한 기억은 반공주의적 영웅의 훈장으로 말끔히 세탁되었다. 아조프부대는 다시 부활할지 모르겠지만, 백골부대는 과거의 모든 흑역사를 지운 국가방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이 청산되지 못한 범죄의 기억은 언제곤 다른 이름으로, 다른 전사들의 조직으로 무장하면서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조프부대가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15) 1930~40년대 우크라이나 서부, 특히 갈리치아(Galicia, 우크라이나식 명칭은 ‘할리치나’) 지방은 동시대 독일이나 이탈리아보다도 더 극단적인 우파의 본거지였다. 식민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몰락한 뒤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분할통치하고 있던 폴란드와 소련에 항거하는 저항조직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이하 ‘OUN’)는 테러리즘과 게릴라전을 통해 독립운동을 폈는데, 독일에 점령당한 이후 나치에 협력한 준정부군으로 편입되었고, 이때 그들의 살상극은 너무나 처참했다. 갈리치아 지방의 유대인 98%가 OUN에 의해 학살당했다. 또한 OUN을 주축으로 하는 ‘우크라이나 반군’(Ukrainian Insurgent Army. 러시아어 Ukrayins'ka povstans'ka armiya. 이하 UPA)은 우크라이나 준정부군 자격으로 폴란드인을 향한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감행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상한 예상은 늘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바로 우크라이나의 교회는 이들의 만행을 독려했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한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에 편입되고, 앞에서 본 것처럼 미국이 반파시즘에서 반공으로 국제정치의 핵심 어젠더를 전환시킨 이후 OUN과 UPA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반공주이 항쟁을 벌이다 괴멸되었지만, 그들의 상당수는 유럽과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등,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국가들은 전쟁 당시 파시즘 진영의 일원으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반공의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특히 그들 중 미국과 유럽으로 망명한 엘리트들은 연구자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하여 미국의 유수 대학들의 교수가 된 이들이 적잖았고,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우크라이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말했듯이, 이런 과정은 우크라이나의 전쟁범죄자들을 반공의 영웅으로 변신하게 했다.
21세기에 부활한 그들의 후예들, 네오파시즘 체제를 꿈꾸다
그리고 21세기에 서방 중심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이 우크라이나 담론은 그 나라에서 일어난 두 번의 시민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2004년의 ‘오렌지혁명’, 그리고 2013년의 ‘유로마이단’은 우크라이나를 소련 연방국가였던 시절에 구축된 사회주의적 체제를 친미・친나토적인 사회로, 특히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로 탈바꿈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플리즘적인 반공정권이 등장했을 때 우크라이나의 반공주의는, 이번에는 동부 지역에서 극우주의 현상을 부추겼다. 무엇보다도 20세기 전반부에 우크라이나 서부의 OUN과 UPA의 극우주의 전통이 21세기에는 동부의 아조프부대로 환생했다.(16)
오렌지혁명과 유로마이단은 그 기억의 훌륭한 중계자인 셈이 되었다. ‘혁명’이라는 명칭은 이 두 사건이 체제의 경로를 전환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혁명’ 앞에 ‘시민’이라는 명칭이 덧붙여 있다. 그것은 이 전환점이 폭력과 파괴, 살상으로 점철된 사건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민의 저항의 산물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은 숭고한 역사의 기억으로 남겨질 일이다. 문제는 모든 역사적 계기가, 비록 전 세계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어지는 불온한 사건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바로 그것이 아조프부대로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OUN과 UPA의 전쟁범죄는 시민혁명에 의해 청산되거나 성찰되지 않았고, 그 결과 또 다른 전쟁범죄의 주역이 역사의 무대로 올라서게 되었다.
여기에는 성찰과 청산에 실패한 우크라이나인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보다는 서구 제국들, 특히 반공주의적 전선으로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미국 패권주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그들은 어떠한 사실도 어떠한 정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이론’이 있었고 적합하지 않은 모든 데이터는 부정하거나 무시했다.”고, 미국의 반공주의적 관료들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진실을 성찰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를 신랄하게 지적한 바 있다.(17) 이런 방식으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고, 그 이데올로기를 위해 동원된 모든 기록들은 그 맥락을 모조리 리셋팅시켜 버렸다. 그러니 전쟁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사과하지도 성찰하지도 않은 채 영웅적 전사로 탈바꿈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자기 속임의 산물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헤게모니적 패권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탈진실의 정치학이 개입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국제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얽혀 있다.
저 멀리 고개 내밀은 네오파시즘, 그러나 이번에도 성공하지는 못할 것. 그래도 여전히 남은 위험에 대하여 민중신학이 할 일이 많다
한국의 극우주의적 포플리즘 정부는 미국의 바이든 정부가 서둘러 던진 섣부른 신냉전의 어젠더를 서둘러 받아먹었다. 해서 그 서툰 정치 탓에 이 정부는 대중의 기대를 배신한 셈이 되고 있다. 결국 그 서툶 덕에 ‘48년체제’를 재현하고자 했던 네오파시즘적 기획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전문적 정책 기획자인 애치슨이 고안해낸 냉전의 기획은 20세기 중반, 미국에게 세계의 헤게모니국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성공도 이룩하게 했다. 그땐 소련을 봉쇄하는 것이 냉전 어젠더의 실제적인 목표였다.
202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바이든(Joe Biden)은 중국을 봉쇄하고자 신냉전의 어젠더를 세계에 던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이 중국 봉쇄의 직접적 계기였다. 미국 정부 자신도 그것이 억지스러웠는지 중국의 대만 침공설을 유포했다. 하지만 이 외교 달인의 기획이 이번엔 좀 어설펐다.
과거 중국을 시장경제에 포섭시킨 외교계의 구미호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의 기획은 중국이 소련과 경제공동체로 엮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한데 엄청난 인구의 중국 시장이 열리자 세계화는 급진전되었다. 무엇보다도 글로벌공급망(Global Value Chain)이 세계를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엮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중국은 그 지구적 경제체제의 핵심고리였다. 한데 이렇게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자 중국은 전대미문의 급성장을 이룩했고 미국이 거의 따라잡힐 만큼 양국 사이의 경제적 생산 총량이 근접해졌다. 섣부르게도 바이든 정부는 그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세계화를 과격하게 후퇴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마침 리쇼어링(reshoring) 현상(18)이 두드러지고 있어 세계화 퇴조의 조짐이 보이고 있던 차였으니 얼핏 괜찮은 기획처럼 보였다. 그것이 신냉전 프로젝트다.
하지만 세계화의 후퇴로 인해 미국이 받은 손실은, 가뜩이나 심각한 양극화 사회의 하위계층에게 가중체감되었다. 결국 재선의 위기에 놓인 바이든 정부는 신냉전 계획이 거의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정책적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고통의 비대칭적 체감 현상은 감소하지 않고 있다.
사실 세계화는 엄청난 경제적 초과이윤을 발생시켰지만, 그것이 잘 분배되지 않고 극소수에게 과하게 집중되었다. 양극화는 너무나 심각해져서 불평등 지수는 끝없이 악화되고 있다. 게다가 세계화 과정에서 정부의 복지와 분배 기능은 후퇴를 거듭했다. 그럼에도 세계화가 장밋빛 희망의 질서인 듯 포장하는 담론이, 마치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교회 종소리가 세계를 구원하게 하는 소식이라는 허황된 가짜뉴스처럼, 세계 구석구석을 향해 널리 울려 퍼졌다. 그것을 총칭하는 포괄적 용어가 ‘자기계발담론’이다.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는 열려 있고, 그 기회를 누리는 자기계발의 비법들에 관한 담론이다. 반대로 실패한 이들은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탓에 실패한 것이라는 얘기가 부록으로 딸려 있다.
교회도 이런 신자유주의 열차에 올라탔다. 성공을 향해 달리는 것을 신앙이라고 포장했고, 실패는 신실하지 못한 신앙 탓이라고 지적하는 담론과 제도가 교회를 둘러싸고 있다.
이런 담론은 성공과 실패를 모두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실패를 위한 사회적 안보에 게으른 국가들을 낳았다. 또 교회도 ‘작은 이들’을 위한 복음 활동에 게을러졌다.
세계화의 퇴조는 바로 이런 양극화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국가와 교회, 지식사회가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유토피즘적 메시지를 믿지 않는다. 물론 아직 누구도 대안적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해서 당장은 지배담론에 저항하는 대중의 언어 양식은 불신과 불만이었다. 일부 지식사회와 매스미디어는 이런 사회적 현상을 ‘포스트트루스 현상’이라고 불렀다. 한데 그런 불신과 불만의 틈에 끼어든 이들이 있다. 가령 개신교 계열의 몇몇 메시아주의적 신종교 분파가 그렇다. 그리고 포플리즘 정치가들도 그런 틈을 활용한 자들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적’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다는 데 있다. 그 적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의 골자다.
극우주의 정치세력 혹은 종말론적 신종교 분파는 이렇게 오늘의 시대에 위기의 수렁에 빠져버린 대중, 그들의 곪아 터진 상처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 하여 대중을 자신들의 동조자로 만듦으로써 정치적, 종교적 자원을 크게 확장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데 이런 극우주의 혹은 종말론적 신흥 분파의 전위대로 나선 전사들이 있다. 이 글이 주목한 행동주의적 극우파인 서북청년단이나 아조프부대가 그런 자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과잉폭력의 주범이었다.
한데 여기에 하나 더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과잉폭력을 자행하는 전위적 행동대들이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그런 행동을 스스로 영웅시하게 하는 담론이 그 사회의 기억의 전당 속에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언제든 기회만 닿으면 세상으로 뛰쳐나와, 극우의 전위대들에게, 나아가 더 많은 대중에게 경험해보지도 꿈꿔보지도 못한 파시즘적 세상을 향한 확신에 차서 날선 칼날을 잔인하게 휘두르도록 독려한다. 오늘의 네오파시스트들에게 원조파시스트들의 영웅서사가 그런 역할을 한다. 제국주의적 패권 갈등의 산물로 형성된 특정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저 원조들의 범죄 기록들이 영웅의 기록으로 변조된 영웅서사는 네오파시스트들이 성찰 없는 증오 정치의 전사로 나서게끔 하는 강렬한 유혹이다.
하여 민중신학은 오늘의 세계 속에서 위기의 대중이 겪어내고 있는 고통의 이야기를 청취하고 번안해내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 포플리즘적 파시스트들과 담론 투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시스트적 혹은 종말론적 신종교 분파에 포섭되는 대중을 국가나 교회, 그리고 시민사회가 타자화하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19) □
[후주]
(1) 북한의 경우 조만식을 지지하는 주요 세력은 도시의 중소상공인・중소지주・자작농 같은, 당시 새로 부상하고 있던 ‘자립적 중산층’(independent middle class)이 많았고, 종교적으로는 서북지역의 개신교도가 주축을 이루었다. 서북지방의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두텁게 형성되고 있던 자립적 중산층이 개신교를 적극 수용한 이들이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진구, 〈한국개신교 수용의 사회문화적 토대에 관한 연구―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2(1996) 참조.
(2) 박찬표, 《한국의 48년체제―정치적 대안이 봉쇄된 보수적 패권체제의 기원과 구조》(후마니타스, 2020) 참조.
(3) 안도경 외, 《1948년 헌법을 만들다. 제헌국회 20일의 현장》(포럼, 2023), 22쪽.
(4) 조병욱은 우익청년단체들을 준경찰화한 ‘향보단’을 조직하여 경찰력을 보충했고, 이후 이 우편향된 민간경찰조직은 ‘민보단’이라는 명칭으로 재조직되어 과잉경찰국가 사회의 한 부분을 담당했다. 이만재, 〈제1공화국 초기 향보단・민보단의 조직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3(2017) 참조.
(5) 조지 L. 모스, 오윤성 옮김, 《전사의 숭배》(문학동네, 2015) 참조.
(6)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소련은 남북한 지역에 정당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했고, 미국은 5~10년 정도 신탁통치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두 입장은 회의 결과에 절충해서 표현되었지만, 소련의 주장이 더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한데 《동아일보》는 소련 때문에 신탁통치안이 제출되었다는 가짜뉴스를 게재했다. 그것도 회의 결과가 발표되기 하루 전에 말이다. 이 오보의 배후를 추적한 한 논문은, 이승만과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가 이 오보의 배후로 관여되어 있다는 합리적 추론을 제기한다. 정용욱,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 과정에 대한 연구〉, 《청계사학》 18(2003.08) 참조.
(7) 양정심, 〈제주4,3과 그리스 내전 비교 연구―미국의 역할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37(2008) 참조.
(8) 한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식민지 해방 직후 제3의 길로 갈지 파시즘 의 길로 갈지를 두고 벌어진 길항적 과정에서, 파시즘적 지도자로서 이승만과 그의 제1공화국을 다룬 연구서인 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8년사》(역사비평사 2012) 참조.
(9)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60731/8335196/1
(10) 이영훈.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 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 엮음,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2006), 33쪽.
(11) 질 들뢰즈, 감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 146쪽.
(12) 김만권, 〈‘탈진실’ 시대의 정치와 논쟁적 민주주의 모델〉, 《철학》 147(2021.05), 147쪽.
(13) 제주에서 서청 특별부대의 활동에 대하여는 양봉철, 〈제주43과 서북대대〉, 《4.3과 역사》 8(2008.12) 참조.
(14) 김진호, 〈한국개신교의 친미성 그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하여〉, 《역사비평》 70(2005 봄).
(15) 이하의 내용은 구자정, 〈악마와의 계약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운동, 1929~1945〉, 《슬라브 연구》 31(4)(2015)에 의존한 것이다.
(16) 이상의 우크라이나의 극우주의 역사에 관해서는 구자정, 〈악마와의 계약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운동, 1929~1945〉, 《슬라브 연구》 31(4)(2015) 참조.
(17) 김만권, 〈‘탈진실’ 시대의 정치와 논쟁적 민주주의 모델〉, 《철학》 147(2021 05)에서 재인용. 이 인용문이 실린 한나 아렌트의 저서의 한글 번역본은 《공화국의 위기: 정치에서의 거짓말・시민불복종・폭력론》(김선욱 옮김; 한길사, 2011)이다.
(18) 생산원가를 최소화하기 위해 해외의 최적지로 떠나갔던 생산공장이 자국으로 회귀하는 현상으로, 2022년 5월에 열린 세계경제포럼(Davosforum)에서는 리쇼어링 현상이 현저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세계경제 양상이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세계화 시대의 종식에 관하여 논의한 바 있다.
(19) 이에 관하여는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의 과제에 관해 연작 논문 두 편 참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의 평화 담론〉(한반도평화와신학포럼 발제 원고. 2022.07.29. https://owal.tistory.com/663) ; 〈포스트세계화 시대 공안정치와 살림정치―민중신학적 비평〉(한국민중신학회 포럼 발제 원고. 2023 04 17. https://owal.tistory.com/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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