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문

개신교와 극우파시즘, ‘위험의 피드백루프(feedback loop)’

1130일에 발행되는 역사문제연구58(2025 겨울)에 게재된 글. 논문이 아닌 걸로 게재하겠다고 요구했는데, 여기서는 논문 카테고리에 포함시켰다. 나 스스로 모순적 행동을 했다.

--------------------------------------------

개신교와 극우파시즘, ‘위험의 피드백루프(feedback loop)*

 

 

조선의 첫 번째 파시스트들

 

몇 명의 극우파시스트들이 이승만 진영에 가담했다. 그들은 1900년 어간에 출생했고 1920년대에 유럽,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 유학을 한 이들이다. 그 무렵은 세계 곳곳에서 파시즘이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무섭게 부상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군주나 귀족들이 주도해온 낡은 체제의 구태를 혁파하려는 열정으로 가득찬 정치적 대중(political mass)의 혁명의 언어였다.

또 하나의 혁명의 언어였던 코뮤니즘19세기적 담론지형에서 급성장했다면, 파시즘은 정치적 대중20세기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여 세계를 재편하던 시대였기에,(Hobson-Lenin Thesis) 국경을 초월한 연대의 메시지가 정치적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그런 점에서 코뮤니즘은 호혜의 열광주의(reciprocal enthusiasm) 기조의 담론이었다. 반면 20세기는 민족주의와 결합된 자본주의가 무한경쟁에 돌입하던 시대다.(Immanuel Wallerstein) 해서 정치적 대중의 가슴을 뜨겁게 한 것은 민족주의적 배타성과 연관되어 있었다. 즉 파시즘은 민족주의적 타자에 대한 배타성에 기반을 둔 혐오의 열광주의(enthusiasm of hatred)였다.(01)

대중의 이런 파시즘적 열광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은 조선의 유학생들은 1930년대 이후 한반도나 만주, 중국 등지에서 더러는 항일투사로, 더러는 개신교 목회자로, 더러는 문필가로 활동했다. 그들 중에는 위로부터의 파시즘(top-down fascism) 체제로서 본격적으로 구축되고 있던 일본제국의 천황제 파시즘을 조선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확신하면서 일제의 통치에 협력한 이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들이 해방 이후 이승만 진영에 가담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1948815,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겨우 얻은 해방의 역사적 지형을 아사리판으로 만든 주요 책임자의 하나인 이승만이 중심이 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는 극우파 엘리트주의자였고 독재 성향이 농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체주의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은 제한적이었다. 입법부나 사법부, 심지어 행정부조차 그의 정치적 독주에 고분고분하게 순응하지 않았다. 경찰만이 가장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다. 그러나 제도 바깥에는 훨씬 더 강력한 사적 지지기반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른바 반공 성향의 청년단체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항일 전력의 청년들과 서북지역 출신의 탈북 개신교계 청년들, 그리고 용역깡패 청년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반공의 기치로 엮여서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1920년대 유학파 출신의 파시스트들은 이들 반공청년단체들의 실제적 혹은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유겐트(Hitler-jugend)나 다이세이 요쿠산카이(大政翼賛会), 란이서(정제스의 남의사藍衣社), KKK(Ku Klux Klan, 특히 제2KKK)(02) 등과 같은 파시스트적 대중 결사체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두 달이 조금 지난 1021일에 여순지역에, 그리고 1117일에 제주에 계엄 포고령을 선포하였다. 국가가 비상권을 발동시킬 만한 중대한 변란이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그는 법을 중지시키는 예외적 상태(Ausnahmezustand, state of exception)로 정국을 몰아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국전쟁이 끝나갈 때까지 수십만 명의 자국민 학살 사태가 본격화되었다. 주목할 것은 그럴수록 이승만의 정부 장악력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독점적 지배력을 갖게 되자 청년단 정치의 필요성이 감소했다. 하여 반공청년단들이 속속 해체되었고, 그 조직들을 이끌던 파시스트적 지도자들은 실각했다. 그리고 이 청년단 조직은 이승만의 자유당에 흡수되었다. 자유당은 제도권 내에서 정책이나 이념을 통해 국민을 대리하는 일반적 정당이라기보다는 이승만만을 위한 친위정당(presidential guard party)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이승만이 대중을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자로 동원하기보다는 수동적 백성으로 순응하는 것을 추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컨대 그는 파시스트 지도자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독재자였다.

 

‘어게인 이승만’, 근본주의적 환원론 혹은 파시즘

 

파시즘적 체제의 구축은 1970년대 박정희 체제를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03) 그것은 이 체제가 몰락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대중의 욕구와 결합되어, 1997년 이후 박정희 메시아 담론이 널리 확산되었다. 하여 그는 적대와 증오에 기반을 둔 혐오주의적 메시아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04) 하지만 박정희 메시아론은 그 현현체(epiphany. living manifestation)로서 부상했던 박근혜의 몰락과 함께 소멸의 길로 가게 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느닷없이 이승만이 소환된다.

어게인 이승만담론은 대중의 파시즘적 열망과 결합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실재했던 이승만은 파시스트라기보다는 그냥 독재자에 가까운 이였다. 그는 대중의 열망보다는 공포를 통해 통치를 수행했다. 그를 파시스트적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이들의 정치는 이승만 자신에 의해 소거되었다. 하여 대중은 공포정치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시대의 엑스트라였다. 그리고 대중의 열망을 통치에 담아내지 못했던 이승만은, 수많은 우상화 프로젝트들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저항을 통해 역사에서 퇴출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 속에서도 삭제되었다. 집단적 기억 속의 이승만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어게인 이승만담론이 활발하게 소통되던 때에도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부정적으로 각인되었다.(05)

그럼에도 그를 오늘의 시공간 속으로 다시 불러낸 이들은 왜 그를 필요로 했을까. 단지 소멸된 메시아 박정희의 대체물이 필요했던 것일까. 한데 사회적 기억 속의 박정희와 이승만은, 보수를 표상한다는 점이나 강력한 권위주의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겹치지만, 다분히 대조적인 존재로도 인식되고 있다. 박정희는 발전’, ‘성장의 키워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 그는 쇄신의 표상이었다. 반면 이승만은 국부(國父)라는 전근대적 권위주의의 정서를 내포한 표현으로 더 익숙하며, ‘대한민국 정통성의 표상처럼 기억된다. 이때 정통성이란 반공이 국시(國是)라는 헌법에도 없는 이데올로기로 대한민국을 규정할 때의 정통성을 말한다. 사실 세계적인 냉전 질서의 구축과 더불어 급작스럽게 기획된 국가가 이승만의 대한민국이었다. 물론 헌법 11항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보려는 지향성을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그 나라의 국시는 반공국가’, 즉 반공에 기반을 둔 전제국가였다. 그러니까 박정희에게는 현실의 지형을 넘어서는 미래에 대한 보수주의적 기억의 정치가 담겨 있다면, 이승만은 현실의 지형을 원점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근본적 환원론(fundamental reductionism)으로서의 보수주의적 기억의 정치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메시아론의 소멸을 박근혜의 실패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견해는 충분치 않다. 여기에는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 박정희-박근혜 담론이 갖는 한계가 대중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박정희의 성장주의에는 파시즘적 대중동원의 요소가 들어 있다. 나는 이것을 생산적 혐오라는 용어로 표현하면서, ‘파괴적 혐오의 체제로서의 이승만 체제와 비교한 바 있다.(06) 여기서는 혐오가 상수이고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변수가 생산이었다. 이를 박정희 체제의 시좌에서 보면, ‘파괴+혐오가 과거라면 생산+혐오는 미래다. 여기서 생산’, 곧 풍요에 대한 열망은 대중의 욕구와 잘 결합된다. 하여 대중은 박정희 체제의 총동원 메시지에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그런 점에서 성장 지향의 대중독재체제, 곧 파시즘 체제가 1970년대 박정희 체제였다.

한데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의 미래 기획은 변화되었다. 이제는 자본주의+민족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세계화의 조합이 시대의 변화를 추동하는 질서가 되었다. 이것은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혐오주의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 횡단하는 자들과 나누는 호혜주의가 자본축적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것은 세계화가 파시즘보다는 민주주의와 친화적이라는 것을 뜻한다.(07) 요컨대 세계화 시대에 차이는 배제와 혐오의 요소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담론이 널리 회자된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에 미래 기획은 혐오가 아니라 호혜를 중심으로 설계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 즉 혐오의 정치와 더 잘 결합된 박정희-박근혜 담론은 더 이상 미래적 가치를 대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쇄신의 아이콘으로서의 박정희론은 그다지 효능감 없는 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세계화가 덧입혀진 자유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특정 집단에 의해 이승만이 소환되었다. 말했듯이 그의 이미지는 근본적 환원론의 요소를 내포한다. ‘시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현재를 원점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고, 그것이 이승만을 불러들이게 했다는 것이다. 해서 국부라는 부가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여서 사용되었고, ‘건국절’, ‘건국전쟁같은 용어들이 널리 회자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게인 이승만을 외친 것일까. 당연히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세계화 시대 변화의 대열에서 도태된 이들의 상실감이다.

이런 상실감은 대중의 파시즘적 욕구와 결합되곤 한다. 말했듯이 실재했던 이승만은 파시스트라기보다는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하지만 어게인 이승만을 열호하는 오늘의 대중의 기억 속 이승만은 파시스트적 지도자다. 중요한 것은 그가 빨갱이와의 전쟁에 누구보다도 철저한 지도자라는 점에 있다. 저들은 적그리스도이고 악마다. 민족을 파괴하는 자일 뿐 아니라 세계를 위협하는 자이기도 하다. 해서 을 괴멸시키는 전쟁이 필요하다. 박정희도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는 적을 궤멸시키는 전사라기보다는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적보다 강력하고 우월한 우리를 건설하려는 존재였다.

21세기는, 말했듯이, 세계화의 시대다. 이 시기는 호혜의 담론혐오의 담론을 압도했다. 차이를 혐오하기보다는 그것이 일으키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대세인 시대다. 물론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차이는 쓰레기(wasted lives. 지그문트 바우만)로 간주되어 폐기처분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광속으로 질주하는 세계화 시스템 속에서 거의 모든 존재는 쓰레기로 전락할 위기감 속에서 허우적대는 시대라는 사실에 있다. 이런 심각한 위기감 속에서 이미 폭력을 체감(presentiments of violence, 도미야마 이치로)하는 이들 중 적잖은 이들이 존재론적 불안(Ontological Insecurity. 앤써니 기든스)(08)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이들의 공포혐오로 전환시키게 하는 자가 바로 파시즘적 포퓰리스트다. 이승만이야말로 그런 포퓰리스트적 소명을 부여받은 메시아. 그는 이 세계의 땅끝 어느 곳까지도 적을 추적하고 색출해내어 파괴하는 존재다. 생전에 그가 자행한 무수한 학살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소임에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좌다. 해서 어게인 이승만을 부르짖는 것은 세계화 시대의 상실감 속에서 두려워하며, 분노하고 혐오에 사로잡히게 된 대중의 파시즘적 욕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와 후발대형교회

 

어게인 이승만담론은 세계화가 절정을 항해 치닫고 있던 때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1세기가 막 시작되던 때다. 원재료에서 최종상품의 생산 및 판매에 이르는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이 지구촌 구석구석을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또 그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에 전 세계 사람들이 포획되고 있었다. 그것에 의하면 모든 낡은 분류체계는 쇄신의 대상이다. 그 분류체계에 갇혀 있는 경직된 주체(rigid subjects)로는 더 이상 성공의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언제, 어디서든, 그때마다의 조건에 따라 이윤 창출을 위해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유연한 주체(flexible subjects)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쇄신하는 무한경쟁의 인간학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론이다.

한국사회가 그런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계기가 된 시점은 ‘1997이다. 사실상의 국가 모라토리엄 상태에 놓였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강압에 의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안정지향성(social stability orientation)은 크게 약화되었고 변화지향성(change orientation)이 극도로 활성화되었다. 게다가 세계화의 가장 강력한 허브였던 중국과 인접해 있기에 한국은 세계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가 되었다.(09)

하여 한국은 그야말로 가열 차게 펼쳐지는 무한경쟁의 사회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더 격렬한 경쟁은 파워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벌어졌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서 테크노크라트의 자율성이 크게 신장했는데, 그중 사회적 감사(social audit)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검찰이나 금융감독원 등은 특권적 권력기관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이른바 관피아현상이 나타났고, 그곳을 매개로 재계, 언론계, 법조계, 군부, 학계, 종교계 등이 연결된 초엘리트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이들 초엘리트 카르텔은 국가정책과 운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들 초엘리트 카르텔은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파워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천년대 어간 이런 파워엘리트 체계에 대한 네트워크 분석(social network analysis)이 학계에서 활발하게 시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무렵부터, 시민단체들이 주도하던 참여민주주의적 정치가 퇴조하고 파워엘리트 네트워크가 사회 형성의 전면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파워엘리트 간의 치열한 무한경쟁이 펼쳐진 것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교육 시스템 속에 편입되어 서로 경쟁해야 했다. 그들 중 경쟁의 승자는 최고 학벌이라는 스펙을 갖추게 된다. 이 스펙은 이후 그들의 특권적 행보에 필요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파워엘리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세습체계를 갖추게 된다. 동시에 다른 계층이 파워엘리트의 대열에 진입하는 통로는 바늘구멍처럼 좁아졌다.

한데 파워엘리트 계층이 그 세습체계 안에 안착하기 위해선 학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인맥이 스펙으로 작동되어야 했다. 우월한 인맥은 경쟁에서 승리하게 위해 유리한 자원을 동원할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연, 혈연, 지연 등의 연줄망(personal connection/closed networks)이 인맥 형성의 대표적인 공급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시기 파워엘리트들을 폐쇄적으로 연결하는 실천의 장(fields)이 곳곳에서(오프라인 공간을 막라하는) 만들어졌다. 이 대목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것이 바로 후발대형교회(이하 후발’).

후발2천년대 전후에 출현 러시를 이룬 대형교회를 지칭하는 용어다. 개신교의 양적 성장이 멈추었는데,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하는 교회들이 속출한 것이다. 결론만 말하면 후발은 중상위계층의 개신교 신자들의 대대적인 재집결 현상의 산물이다. 그 지역은 강남권(강남강동분당)에 집중되어 있다. 즉 중상위계층 신자들의 연줄망 형성을 위한 종교적 장으로 발명된 것이 후발이라는 것이다.(10) 실제로 사미자고소영이니 하는, 파워엘리트 계층의 정치적 카르텔을 가리키는 풍자적 표현 속에는 후발에 속하는 특정 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3만여 명의 파워엘리트들의 연줄망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한 한 연구에 의하면 파워엘리트에 속하는 개신교 신자는 40%가 조금 넘는다.(11) 개신교 신자는 전 인구의 20%를 넘지 않는다. 즉 개신교로 파워엘리트의 쏠림 현상(concentration effect)이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개신교가 파워엘리트에게 유리한 장소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후발은 파워엘리트들의 쏠림의 장소(cluster)로서 적합하다. 강남권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귀족적 풍요(aristocratic prosperity)로서의 신앙적 품성을 추구하는 종교공동체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종교성의 공동체에 속한 다수의 파워엘리트들은 주 1회 이상, 수십 년, 아니 대를 이어서까지 친밀감의 공동체(community of intimacy)로 엮여 있다. 특히 그곳에는 다양한 분야의 파워엘리트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파워엘리트의 인맥 스펙에서 가장 효능감 좋은 조건이 다양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후발은 바로 그런 곳이다.

 

‘위기의 교회’, 극우에서 극우파시즘으로

 

세계화와 후발얘기가 길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세계화 시대 파워엘리트의 인맥 집합소가 후발이라는 사실이 극우파시즘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 시기는, 말했듯이, 개신교의 양적 팽창이 멈춘 시기다. 그때, 내가 후발이라고 부른, 특정 지역의 일부 교회로 중상위계층 신자들이 대대적으로 이동했다. 이는 나머지 교회들에겐 심각한 위기로 나타났다.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이동 현상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무수히 많은 언더클래스 청년층이 교회를 떠나갔다. 그들 중 상당수가 재집결한 곳은, 놀랍게도 개신교계 소종파인 신천지였다. 신천지의 신자 급증 현상이 2000년부터 나타났고, 대략 2015년 이후 증가세가 둔화된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기독교방송(CBS)8부작 다큐 관찰보고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이 방영된 시기가 2015년이었고, 개신교 교회들의 신천지에 대한 총력적인 공세도 그 무렵 본격화되었다. 이후 이 소종파는 집중 포교 대상을 가톨릭과 중국 등으로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소종파 현상에 대해 관용적 태도록 보여왔던 가톨릭은 이례적으로 2017년 주교회의 결의로 신천지에 대응하기 위한 기구인 한국천주교유사종교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한편 코로나19의 발화지역이 중국 우한이고, 우한발 감염사태가 대구 신천지교회를 통해 국내로 유입된 것은 신천지의 이런 포교 다변화 맥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신천지가 대대적인 성장세를 구가하던 때 유입된 이들의 상당수가 개신교계 언더클래스 청년층이었다.

언더클래스 (남성)노년층도 상당수 이탈했는데, 그들은 이른바 아스팔트 우파현상의 주요 대중이 되었다. 문제는 이들 아스팔트 우파 대중의 출현 과정이 언더클래스 노년층의 교회 이탈 과정과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이탈 (남성)노년층의 상당수는 샤먼적 개신교 현상인 심령대부흥회와 산기도원 신앙의 중독 신자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970~80년대 국가가 한창 압축적 성장을 구가하던 때에 혹독한 노동 현장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여 산업역군의 대열에서 내쫓긴 폐기처분된 잉여존재들이었다. 이런 파산난 존재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포용시스템은 거의 부재했다. 반면 산기도원은 이들 잉여인간들의 사회적 은신처였다. 동시에 산기도원은 종교적 감성으로 과잉자극된 부흥회 중독자들(revival junkies)을 필요로 했다. 심령부흥회를 소비하고자 산기도원에 내왕한 이들은 먼저 흥분되어 과장된 반응을 하는 이들을 통해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후발현상이 개신교 전반의 기조를 뒤흔들 무렵, 대부분의 교회들은 샤먼적 종교성을 퇴출시키고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신앙을 프로그램화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가 신자들의 교육프로그램 항목에서 산기도원 방문이 삭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무렵 수많은 산기도원들이 문을 닫았다.(12) 그리고 산기도원에 기식하던 부흥회 중독신자들은 대거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가족으로 돌아온 노년의 신자들을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감당하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또 산기도원의 언어로 무장한 그들을 대부분의 교회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감당하는 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 해서 그들은 과거 노동현장에서 떠밀려 나왔던 것처럼, 집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떠밀려 나왔다. 바로 그 시기에 거리의 전도자들이 출현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거의 서사성이 결여된 구호들로 가득한 흥분한 노령의 전도자들의 소리를 사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불쾌한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물과 기름처럼 일상의 사회와 뒤섞일 수 없는 이들이 아스팔트 우파애국자대중이 되었다.(13)

여기에는 부흥사 출신의 아웃사이더 종교인 전광훈의 존재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부흥사였기에, 거리의 언더클래스 노년 신자들과 잘 어울리는 종교적 감성의 소유자다. 박근혜 탄핵 이후 이른바 태극기집회라고 불리는 광장의 여러 극우 집회 중 전광훈이 주도하는 곳에는 그에게 열광하는 고정참석자들이 생겼다. 이것이 그가 얼마 후 극우의 상징으로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한편 또 다른 범주의 신자 이탈 현상도 간과할 수 없다. 내가 떠돌이 신자 현상이라고 부르는 이들에 관한 것이다. 특정 교회에 귀속되는 대신 교회를 떠도는 이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들 중 적잖은 이들은 처음엔 (교회나 목회자들에 대한) 실망신자로서 방황하는 종교유랑자(wandering believers)였다. 한데 점차 영적인 떠돌이(spiritual nomads)로 주체화되어갔다. 그런 이들은 대체로 다양한 진리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열린 이들이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런 신념을 종교다원주의(pluralism) 혹은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부르며 극도의 신경증적 반응을 보였다. 한데 많은 떠돌이 신자들의 수행적 깨달음의 하나는 그런 포용주의(inclusivism)야말로 그리스도적 신앙의 본질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멀티신자(multi-believers)가 부른 바 있다.(14)

이렇게 여러 층위의 신자들의 이탈 현상이 동시적으로 발생하게 되자, 나머지 교회들 다수는 위기의 교회(churches in crisis)가 되었다. 즉 수많은 교회들이 위기를 체감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날 성찰적 기획을 하지 못한 채 병리적이고 퇴행적인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퇴행적 정치에 몰두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에서는 퇴행적 교단정치가 횡행하게 되었다.(15) 교단정치에 뛰어든 위기의 교회들과 그 담임목사들이 교단의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곳곳에서 이단 파동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이단 파동을 개신교 전반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을 발명해내고, 그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데 몰두하는 혐오주의적 정치 현상을 가리킨다.

한국기독교총연합(이하 한기총’)은 바로 이 시기에 가장 주목받은 개신교 교단 네트워크(교회연합기관)였다. ‘한기총1989년 극우 성향의 원로 목사들이 만든 임의단체였다. 하지만 이후 십여 년간, ‘왕년에 한몫했던 창립자들의 명성 외에는 조직적 위상도 영향력도 미미했다. 한데 2003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3.1구국기도회이후 한기총은 개신교를 대표하는 막강한 교회연합기관으로 부상했다. 뿐만 아니라, 연이은 대선의 실패로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던 한국의 우파 정치를 재활성화시키는 구심체 역할을 했다. 주지할 것은 한기총이 추구한 우파의 재구축1948년 건국 당시의 극우정치의 복원을 의미했다. 그것은 반민주적인 극우독재적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한기총의 정치는 극우주의적인 퇴행적 정치였다.

많은 위기의 교회들’, 그 교회의 목회자들이 한기총을 지지했다. 그들은 신자 유출로 인한 좌절감을 성공한 교회들, 특히 후발을 모방함으로써 반전시키려 했다. 하지만 열정을 다했던 모방 행동은 또 한번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실은 그들이 모방하고자 했던 후발의 성공적 프로그램들은 그들의 물적, 인적 자원과 결합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여 좌절감에 또 다른 좌절감이 포개졌다.

위기의 교회들은 과거 성공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실제로 성공했든 아니든, 대성장기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 대다수는 이런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데 민주화와 세계화 시대를 겪으면서, 교회의 이러한 집합적 기억이 내포하는 낙관적 기대는 실패와 좌절의 체험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의 가설이다.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깊게 상처받은 감정에 대한 방어와 보상의 심리에서 미국의 극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16) 그녀는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과 남부 지역의 백인남성 노동계층의 사람들이 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묻고자 그들의 내면의 이야기(deep story)를 해독해낸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가족과 종교와 국가를 지켜냈다는 집합적 기억이, 그들의 주체의식에 관여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자부심의 근거였다. 한데 그 자부심이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특히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깊은 내상을 입었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이주해 들어왔는데, 그것이 미국을 세계의 제국으로 부상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17) 또한 이런 이민자 지식인에 의해 제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담론이 국제화되었고 미국적 지배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8) 혹실드는 이런 지배담론이 통용됨으로써 백인남성 노동계층이 받은 상처를 도둑맞은 자부심(stolen pride)이라고 표현한다. 한데 그런 감정적 현상의 배후에는 앞날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빈곤 상황에 대한 절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종의 미국을 만든 주역이라는 자부심과 그들이 처해 있는 절망적 현실 사이의 부조화, 그러니까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상황에서 그들은 상처받은 자부심을 복원시키기 위해 혐오주의적인 감정적 치환을 선택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극우화의 내막이라고 혹실드는 해석한다. 여기서 트럼프는 그런 감정적 치환을 정치적 언어와 행위로 변환시키는 감정의 중개자(emotional broker)라고 본다.

한국개신교의 위기의 교회와 그 목회자들의 극우주의화 현상도 이와 비슷하다. 그들의 집합적 기억은 한국의 대부흥을 이룩한 주역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었다. 또한 대성장기 개신교는 종교를 넘어서 문화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 시기 한국사회의 청()년들이 체험하는 모던공간은 교회였다. 발터 벤야민의 파리의 아케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1970~80년대 교회는 개종하든 그 주변을 맴돌든, 그 시대의 많은 청()년들에게 교회가 만들어낸 근대적 문화의 흔적 주변을 서성이는 플라뇌르(flâneur), 그러니까 근대적 댄디(dandy)가 되게 했다. 그런데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개신교의 팽창하는 교세는 완전히 꺾였고, 심지어 근대화의 적폐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더욱이 신자들이 썰물처럼 교회를 떠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대공간을 사용하는, 전체 교회의 거의 80%에 달하는 소형교회들에게는 존폐의 위기이기도 했다. 또 그 무렵 교회당을 백화점처럼 건축하는 붐이 일고 있었다. 그러니까 (변형된) 고딕양식의 예배당이 교회의 거의 전부이던 과거의 건축양식과는 달리, 신자 대중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에 맞춘 무수한 부대시설들을 포함한 종교와 문화 복합센터로 교회를 재건축하는 현상이 대유행이었다. 이것은 독자적 교회당을 지을 수 있는 교회들에겐 건축비 예산을 급상승시키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부채금액의 급상승을 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신자 유출을 충분히 막아낼 수 없었기에 중대형교회 가운데 교회건축으로 인해 파산하게 된 교회들도 여럿 등장했다. 물론 그런 교회의 수는 극소수였다. 하지만 심리적 파산의식은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감당해야할 위기의식이었다.

하여 내상이 깊게 새겨진, 너덜너덜해진 자부심은 민주화와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에 의한 도둑맞은 자부심으로 번안되었고, 그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때 한기총이 주도한 시청광장의 3.1구국기도회가 열렸다. 많은 위기의 교회들과 그 목회자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때까지는 목사들이 신자들을 동원하는 일이 용이했을 때였기에 많은 신자 대중도 참여했다. 주최 추산 20~30만 명의 정체는 이랬다.

한기총은 그 집회로 몰려든 목회자들과 신자대중에게 부르짖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자들은 모두 용공이라고 말이다. 대중은 환호했고, 이런 열기를 통해 정치적 지분을 얻은 한기총에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좌와 우는 허구였다. 그들에게 용공에 다름 아니며, 박멸의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극우의 관점으로 정치를 구축하려는 세력에 다름 아니었고, 그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독재체제에 대한 열망에 가득한 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기총의 정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극우독재를 추구했다.

한데 개신교 극우의 구심체였던 한기총이 자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박근혜 정권 중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한기총을 둘러싼 개신교 우파 내의 갈등이 생겼다. 표면상의 이유는 선거 부정불법 때문이었다. 해서 2015년 무렵에는 거의 모든 교단과 교회가 한기총에서 탈퇴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연합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은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이었다. ‘한기총의 몰락과 한교총패권 시대 사이에 몇 년의 시차가 있는데 그 사이에도 몇 개의 교회연합기관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아무튼 한기총을 제외한 이들 보수파적 교회연합기관들은 한기총류의 극우 행보와는 달리, 조금 더 중도로 다가간 보수행보를 취했다. 이들 보수주의적 교회연합기관들 간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극우를 둘러싼 이념 논쟁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치적 행보에서는 명백하게 한기총보다는 조금 중간으로 다가간 행보를 보였다. 이것은 극우분파들에게는 위기로 인지되었을 것이다.

한기총의 시대가 지나고, ‘극우정치가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주류개신교의 극우적 기조는 시들해졌는데, 새로운 인물이 주도하는 새로운 극우현상이 부상했다. 이른바 전광훈 현상이 그것이다. 그는 이미 2003년 시청광장의 구국기도회 당시 보수대연합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맹활약을 했고,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운동에서도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개신교 내에선 듣보잡의 천박한 행동주의자에 다름 아니었다. 한데 그런 그가 박근혜 탄핵 이후 태극기집회 과정에서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했고 급기야, 개신교와 시민사회를 넘나드는 극우보수 진영의 주요 인사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2019한기총의 대표회장이 되기도 했다. 통상은 한기총의 대표회장이라는 사실은 그이가 개신교의 주류 중의 주류의 위상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전광훈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한기총을 이끌게 되었다는 것은 이 단체가 더 이상 주류보수의 개신교를 대표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그때부터 한기총은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극우의 상징적 지도자로 여러 극우 편향의 시국집회를 주도하는 등 초교회적인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는 전광훈의 영향력이 개신교라는 기구의 조직적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열광으로 인한 것임을 뜻한다. 그 대중이 타자에 대한 혐오와 공격성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대중이라는 점에서, 이 열광주의는 파시즘적 정치 현상임을 시사한다.

 

극우파시즘, 투 플러스 원

 

전광훈이 극우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던 때에, 개신교 각 교단에서 그의 이단성을 조사하고 비판적 결의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단성이 논점이 되었다. 그것은 가장 보수적이고 극우적인 이들이 그에 대한 비판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아무튼 교회의 비판이 거셀수록 그가 주도하는 극우집회는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말했듯이 언더클래스 남성노년층 신자들은 그 집회의 고정참여자였다.

한편 극우편향이 강한 교회의 중상위계층 신자들 다수도 그를 지지했다. 그들은 언제나 교회에서 강성우파 편향을 가진 이들이었다. 한데 최근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이 극우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몸을 사리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한 이들이다. 이 현상은 설명이 필요하다.

1980년대 이후 대학생 수가 급증했다. 수많은 교회에서 대학부가 속속 조직된 것도 이때였다. 한데 대학생 수의 증가는 권위주의 사회가 민주사회로 이행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19) 대중의 주권시민의 자의식이 크게 신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신자대중의 주권신자 의식이 크게 강화되었다. 한편 1990년대는 온라인 공간이 비약적으로 확장된 시기였다. 신자들은 이제 다른 교회들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른바 그리스도교 선진국 교회들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종교적 재화를 선택하고 소비하는 자라는 자의식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여 신자들은 주권시민인 동시에 소비자-신자(believers as a consumers)의 자의식을 갖게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신자들은 교회개혁의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진보적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매우 활발하게 교회 내에서 진보적 개혁의 목소리를 펼쳤다. 이에 많은 목사들은 점점 교회에서 보수 일변도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절묘한 중립은 이제 성공적인 목회 기술이 되고 있었다.

한데 이런 변화에 불만을 품은 다른 이들이 있었다. 우편향의 반공주의적 신자들은, 소극적으로 돌변한 교회에 적잖히 실망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신념에 맞는 교회를 찾아 떠나갔다. 하지만 남은 신자들도 교회에 대한 애정이 식어갔다.

미국에서 교회개혁 담론의 하나로 메타교회론(metachurch theology)이 있다. 자본 친화적인 교회가 아닌,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새로운 교회운동을 개념화하면서 제기된 명칭이다. 그 주장에 의하면 메타교회론은 탈교회, 탈성직, 탈교리적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 운동을 가리킨다.

한데 전광훈 현상은 메타교회적 양상이 극우파시즘적 신앙과도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개신교 각 교파와 기관들로부터 줄곧 이단성 시비가 붙는 주된 이유는 성직자 중심적이고 교리 중심적인 신앙을 그가 발본적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아웃사이더로 주류집단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되었던 그에게 정통주의적 신앙담론과 규범체계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언더클래스 출신의 부흥사였다. 가난했기에 그는 스스로 생존의 길을 터득해야 했다. 또 부흥사였기에 가난한 대중이 그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절망적 몸부림에 밀착된 언어로 생존의 메시지를 쏟아낼 수 있었다.

한데 그의 집회가 벌어지는 장소는 교회당 밖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주도하는 집회의 대중을 아스팔트우파라고 불렀다. ‘교회당 밖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더 이상 포획할 수 없는 장소성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곳을 광장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광장, 교회처럼, 응집된 역사적 기억을 품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아스팔트는 교회로도 광장으로도 포획되지 않는 장소, ‘장소 아닌 장소(place as non-place). 해서 메타교회적이다.

그런 인물이 전광훈이다. 그 주위로 몰려든 대중은 개신교의 틀로도, 이념의 틀로도 묶여지지 않는다. 개신교나 이념은 각기 그것을 지탱하는 장소와 결합되어 있고 그것을 주도했던 엘리트와 연결된다. 한데 전광훈의 대중은 그런 귀속성의 바깥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집회는 메타적이다. 한데 그와 대중이 공유하는 것은 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악마적 세력의 아바타가 되어 버린 자들에 의해 강탈당한 자부심에 대한 분노다. 전광훈에게 악마적 세력의 역사적 현현체는 삘갱이. 해서 그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도,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자도 모두 종북좌파라고 일갈했다. 물론 이 말은 다른 극우인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극우인사들은 자신을 정형화시키는 장소적 체계에 더 잘 밀착되어 있지만, 전광훈과 그의 대중은 더 멀리 분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전광훈의 극우적 메타성은 흥미롭다. 그리고 그런 대중의 반지성주의적이고 탈중심적인 열광은 21세기적 파시즘의 양상을 보인다.(20)

한편 최근 또 다른 개신교계 극우파시즘 현상이 주목을 받고 있다. 손현보 목사를 상징적 중심으로 하는 대중현상이다. 손현보는 여러모로 전광훈과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전광훈이 극단적인 아웃사이더 계층 출신이라면, 그는 개신교의 인싸 중의 인싸. 또 전광훈의 언행은 교회주의와 비교회주의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고 있는 반면, 손현보는 너무나 교회 중심적이다. 전광훈의 발화는 서사성(narrativity)이 적고 그의 집회는 소리의 효과(sound effect)에 방점이 있다. 반면 손현보의 말은 훨씬 더 서사적이며, 집회는 언어적 의미 효과(verbal effect)를 더 강하게 담고 있다. 그렇기에 손현보가 극우의 대열에 나서자, 개신교계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모호한 지점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코로나19에 대해 정부와 시민사회, 심지어 다수의 신자들도 대면예배 중단을 강하게 요구하자, 그가 최전선에 나서서 정부와 격렬히 맞섰다. 이것은 개신교 목회자들 사이에서 그의 지명도가 급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까진 정치적 성격이 강하지 않았다. 2023빌드업 코리아(Build Up Korea) 컨퍼런스 때부터 그의 극우파시즘적 정치행보가 본격 시작되었다. 이 컨퍼런스는 미국의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계열의 극우파시시스트들이 손현보와 연결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21) 이 컨퍼런스의 연장선에서 파시즘적 대중집회를 지향하는 세이브코리아(Save-Korea) 운동이 20253월부터 가동되기 시작했다. 미디어에 그가 주도하는 운동이 포착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언론은 그를 전광훈이 주도하는 대중집회와 구별하여 각각 (전광훈 계보의) 광화문파(손현보 계보의) 여의도파로 불렀다.

신사도운동은 세계화 시대에 그 부작용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질병이 만연하게 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으로, 이 담론의 주창자인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에 의하면 성령 현상의 3의 파도(the third wave)를 가리킨다. 한데 신사도운동 담론을 편 이들 중에는 랜스 월나우(Lance Wallnau), 찰리 커크(Charlie Kirk) 같은, 트럼프를 지지했던 극우파시스트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들이 한국에 이 미국발 파시즘을 전염시키려 했다. 그렇게 선별된 대표적 인사가 손현보였다. 전광훈도 연결고리가 있긴 하지만, 아마도 한국적 성령 현상인 샤먼적 요소가 강한 전광훈의 감성과 신사도운동적 감성은 잘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아무튼 신사도운동적 미국발 파시즘은 전광훈보다는 손현보와 더 깊게 연결되었다.

신사도운동에 대해서 한국의 개신교 보수파 지도자들은 격렬한 반감을 갖고 있다. 전광훈이 이단시되었던 주된 이유의 하나는 신사도운동과의 연관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손현보는 어떨까. 일단 전광훈과는 달리 비판이 거의 없다. 그가 이 연루가 들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에 대한 개신교 주류의 신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사도운동과의 연결점을 주목한 누군가의 맹렬한 비판의 표적이 될 수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대대적인 비난의 화살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날아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손현보로 하여금 모호한 양다리 전술을 취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는 극우적 개신교 주류와 더 깊이 연결될 수도 있고, 미국발 신사도운동의 극우와 더 강하게 접속할 수도 있다. 전자라면, 극우적이지만 파시즘적 성격은 적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반면 후자라면, 미국의 극우파시즘 성향의 신사도운동처럼 파시즘 양상을 더 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이들 신사도운동계 극우세력은 개신교계 대안우파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온라인 기반의 엘리트청년 파시스트들과 테크노우파(techno-right)라고 불리는 극우편향의 첨단기술엘리트 일부 등과 긴밀히 연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그 저변은 협소한 편이다. 아무튼, 말했듯이, 현재까지 손현보의 태도는 모호하다. 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이들 가운데는 미국의 극우파시즘 따라하기에 더 적극적인 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했듯이 그것은 파시즘적 행보인데, 아직은 혐오주의적 대중의 원초적 테러리즘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전광훈의 추종자들이 매우 조직적으로 서부지방법원을 공격했던 것 같은 일이 손현보 지지자들에게는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파시즘 현상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파시즘 현상이다. 일단 이들은 개신교와 조직적 연계가 적다. 다만 그들 중 상당수는 후발에 속한 파워엘리트 계층의 일원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나머지 교회들 출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후발과의 연계성을 주장할 근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파워엘리트 혹은 그 대열에 진입하고자 전력을 다하는 중상위계층에 속하는 청()년층의 극우파시즘화 양상이 뚜렷하다. 그럼에도, 앞에서 논한 것처럼, ‘후발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메리토크라시 현상의 진원지라는 점에서 논리상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무튼 초고강도의 메리토크라시 시스템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그럴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사회적 린치를 당해야 한다는 폭력의 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훼손된 정신적, 신체적 자긍심을 보상받기 위한 행동이 극우파시즘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상처받은 자긍심과 폭력의 예감이 극우파시즘으로 표현되는 경로는 압도적으로 온라인 액티비티를 통해서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게임 커뮤니티, 연예인 가십 커뮤니티, 그리고 극우커뮤니티가 온라인공간에서 군집 현상(slective clustering phenomenon)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청()년 네티즌의 극우파시즘적 주체화가 가장 강하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초 이른바 일베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일부 청()년 네티즌의 극우파시즘화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2020년대 이후 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오프라인공간과 접속하는 일이 잦아졌다. 최근 국민의힘의 극우화는 이들의 온라인액티비티의 효과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이 오프라인 공간과 접속하는 지점이 그리 넓지는 않다. 그것은 오프라인에서 파시즘의 공간이 전광훈과 손현보 집회 외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둘과 하나, 오프라인 공간의 극우파시스트들의 접속은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향후 위험한 조합이 될 수도 있다. 하여 당장 그 파괴력이 미미하다는 것으로 간과할 일은 결코 아니다. 미국의 온라인 기반의 극우파시즘 현상을 가리키는 대안우파(alternative right)도 대다수 전문가들에 의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미국사회를 전복할 만큼 폭발적인 확산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직은 다행인 것

 

전 세계적으로 위험스럽게 확산되고 있는 극우파시즘 현상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언더클래스 ()년이 파시즘의 주체로 부상하는 현상이다. 한데 최근 한국은 그들의 정치적 주체화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점에선 보수도 진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하다. 어쩌면 너무 가혹하게 전 사회적으로 전개되는 메리토크라시 광풍으로 한국의 언더클래스 청()년층은 집단적인 정서적 내상(emotional wound)을 입은 상태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언어를 일탈적으로밖에 표출할 수 없었다. 하여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정치적 주체화가 아니라 사회적 은신처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신천지는 꽤 효능감 있는 은신처다. 이 소종파 내에 가출공동체가 유난히 많이 형성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수 있다. 이 소종파에는 개신교신자였던 언더클래스 청년층이 유난히 많다. 그들 중에는 신천지에 유입되기 전에 가정으로부터, 학교로부터, 그리고 일터로부터 온갖 집단적 린치를 겪은 이들이 적잖다. 물론 이 소종파는 내상 입은 이들을 성숙한 시민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해서 이 종파가 향후 그들의 주체화에 어떻게 개입할지 모른다. 최근 드러난 이 소종파 지도부의 퇴행적 정치성을 주목하면, 이런 우려가 기우만은 아닐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언더클래스 청()년층이 극우파시즘적 주체로 부상하지 않은 것은 한국에게는 행운이다. 나의 추정이 개연성이 있다면, ‘사회적 루저를 향한 가혹한 사회적 폭력성이 오히려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적 회복탄력성을 유지할 기회를 준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안심할 일은 아니다. 그 뇌관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강력한 폭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시즘 현상에 가담한 여러 대중도 그들이 집단적으로 체감해온 사회적 상처들이 퇴행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상처들도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야 주요 항목에 속할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 우리는 조금의 시간을 벌었다. 아직은 민주주의가 위험요소를 방어할 자구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시간은 항상 민주주의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전 세계에서 광풍을 일으키는 파시즘 현상에서 목도하고 있다. 하여 ‘12.3사건은 그 이후가 우리에게 어떤 시간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비상경보인 셈이다.

 

[후주]

* 이 글은 1130일에 발행되는 역사문제연구58(2025 겨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01) 20세기 초에 출현한 소련은 국제주의적 요소와 일국주의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고, 스탈린의 집권은 후자가 지배적인 코뮤니즘의 등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이프스, 이종인 옮김, 공산주의의 역사(을유문화사, 2014) 참조.

(02) 2KKK1915년에 시작되었는데, 1920년대에는 4백여만 명의 회원, 4천여 개의 지부, 40여 개의 주간신문을 가진 전무후무한 대규모 파시스트 운동이었다. 황혜성, 1920년대 KKK하얀 두건, 검은 속셈, 서양사론122(2014.09), 83.

(03)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은 1970년대 박정희 체제를 파시즘 체제로 해석하는 실마리를 제시하였다. 또 김항의 최근 저작 내전과 위생: 인간의 출현과 자본-식민주의 비판(연두, 2024)은 내전(internal war)과 위생(hygiene) 개념을 키워드로 일제강점기부터 계속되어온 혐오의 정치유신체제에 어떻게 승계되었는지, 그 파시즘적 통치성의 작동 양식의 계보학을 들추어냈다. 한편 새마을운동은 풍요에 대한 열망이 대중독재 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통치의 주요 장치로 작동하게 했다. 고원, 박정희 정권 시기 농촌 새마을운동과 근대적 국민 만들기, 경제와사회69(2006.03) 참조. 같은 시기 개신교의 초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조용기의 욕망의 종교성을 표현하는 슬로건은 새마음운동이었다. 국가와 종교가 공조했던 욕망의 체계는 대중의 자발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하게 했다.

(04) 김진호, 메시아주의, 한국 정치의 어떤 열망, 김상봉 외, 당신들의 대통령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문주, 2012) 참조.

(05) 2021년 한국정책과학원의 의뢰로 리얼미터가 조사한 역대대통령 호감도조사에서 이승만에게 호감을 표한 이들은 1.8%에 불과했다. https://www.yna.co.kr/view/GYH20211111001200044.

(06)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한국 개신교의 성공과 실패, 그 욕망의 사회학(현암사, 2012)의 제3생산적 증오심치유와 기복, 성장주의의 발명참조.

(07) 여기서 혐오 대 호혜’, ‘파시즘 대 민주주의라는 이항대립적 요소가 각기 부정과 긍정이 이미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지만,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승자에 의해 만들어진 표상 양식이다. 사실 이 두 범주는 표면적으로는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뒤얽혀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가령 호혜의 체계처럼 과잉포장된 민주주의도 실제로는 무수한 혐오와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고 있고, 그런 위기적 요소를 다른 사회나 범주에 떠넘기게 되면, 그런 곳에서 서 과잉악마화된 혐오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된다.

(08) 불안의 원인이 잘 감지되지 않는 중에, 자신이 누구인지, 세계는 자신에게 안전한지 등에 대해 근원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09) 인접성에서 한국과 유사하지만 안정지향적인 사회적 장치가 과하게 발달해 있던 일본은 상대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민감성이 한국보다는 현저히 적었다.

(10) 김진호,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새로운 우파의 탄생(오월의봄, 2020).

(11) 김기훈장덕진중앙일보 탐사기획부문 이규연 외, 대한민국 파워엘리트한국을 움직이는 엘리트, 그들은 누구인가 (황금나침반, 2006).

(12) 위기의 기도원부흥, 어떻게?, 국민일보(2014.11.23.)[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52930] 참조.

(13) 김진호, 태극기집회와 개신교 우파또 다시 꿈틀대는 극우주의적 기획, 황해문화95(2017.6) 참조.

(14) 김진호, 탈종교 시대 새로운 종교성교회 국경을 넘는 신자들, 종교 국경도 넘다, 전법학연구11(2017 ).

(15) 그런 증상을 선행적으로 보여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90년에 감리교에서 발생한 변선환 사태였다. 당대 한국 최고의 신학자의 하나였고 감신대학교 학장(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총장의 직위)으로 재직하던 변선환을 학장과 교수직에서 면직시키고 목사직도 회수했으며 감리교 신자 교적도 박탈하는, 한국개신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중징계가 가해진 것이다.

(16) 앨리 러셀 혹실드, 유강은 옮김, 자기 땅의 이방인들미국 우파는 무엇에 분노하고 어째서 혐오하는가(이매진, 2017) 참조.

(17) 폴 케네디, 이왈수 옮김, 강대국의 흥망(한국경제신문, 1997) 참조.

(18) Michael Lind, “Immigrant Intellectuals and American Grand StrategyIs 19th-century European thinking shaping 21st-century U.S. foreign policy?”, The Globalist (April 04.2003) 참조.

(19) 임현진, 전환기 한국의 정치와 사회: 지식, 권력, 운동(집문당, 2005) 참조

(20) 미치코 가쿠타니, 김영선 옮김, 거대한 물결근본적 붕괴의 시대와 아웃사이더의 부상(돌베개, 2024) 참조.

(21) 서명삼, 극우주의와 한국교회, 기사연 도시에3(2025)[https://drive.google.com/file/d/1V4SxZOXljPKuqD0scnKt9rHONw9nOuuH/view?pli=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