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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예수를 만나려면 예수를 죽여라 - 바울로라고 하는 사울과 바르예수의 이야기

이 글은 신앙인아카데미가 발행하는 [맘울림] 24호(2009.3)에 게재된 글로,
곧 출간될 나의 책('인물로 보는 성서', 가제)에 수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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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나려면 예수를 죽여라


바울로라고 하는 사울과 바르예수의 이야기

 


1

 

텍스트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저자(잠재적 저자)만이 실재한다. 그(녀)가 글을 씀으로서 비로소 텍스트는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다. 즉 저자는 텍스트의 내용과 형식을 창조한 존재다. 그런 점에서 저자와 텍스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인간 사이의 관계와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비평이론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저자의 죽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저자만이 텍스트 의미의 유일한 능동적 주체라는 관점에 대한 항의라 할 수 있다. 즉 저자가 의도한 것이 텍스트가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의미(소위 ‘진리’라는 것)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등장인물 및 기타 존재들이 저자의 의도 속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채 텍스트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텍스트의 다성성). 나아가 독자 또한 거기에 개입한다. 하여 텍스트의 의미는 끝없이 열린 의미의 공간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특정한 좌표지점에 정박함으로써 형성될 뿐이다.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공통저자는 이 연속물을 쓰면서 나름의 서사를 구성하였다. 거기에는 베드로와 바울로라는 주요 등장인물이 있고, 그밖에 여러 보조 인물도 있다. 물론 이들 대다수는 실존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창조적 손길에 의해서 텍스트 속에 재현된 그들은 저자가 구성하려는 서사를 위해서 봉사하는 존재로서 실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저자의 기획에 순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텍스트 속에서 단지 수동적으로 대상화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 즉 그들은 저자의 의도 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동시에 각기 자기 나름의 소리를 어떤 형태로든 발설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 형성에 개입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의 말하기가 일관된 동일자로서 수행되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도 분열된 존재로서 말하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한 텍스트 속에서 저자의 소리에 환원되지 않는 소리(들)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저자와 등장인물간의 대화의 구조를 찾아내고, 이 대화에 의한 텍스트의 의미를 물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미에 대한 해석은 (무한히) 다양한 의미의 가능성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다.


2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의 선교여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다마스커스 사건 이후 예수에로 전향한 그가 그곳을 중심으로 ‘유대교 회당’을 돌면서 예수가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주장을 설파하던 단계다(9,19~31). 여기서 그의 활동은 실패하여 예루살렘으로 피신하였으나, 다시 쫓겨 고향 타르소스로 도망쳐야 했다. 두 번째 단계는,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방인 선교’의 단계다.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인 바르나바가 다소에 있던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고(11,25), 바르나바와 함께 이방지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사도행전」은 두 번째 단계 선교의 성공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바울로 사역의 의의를 기술하고 있으며, 그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제국 전역으로 어떻게 성공적으로 확산되어 갔는지를 논증하는 맥락 위에 있다(이러한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는 바울로와 베드로의 활동사로 이루어졌다). 바울로의 이방선교 도정은 다시 세 단계로 나뉘는데, 그 활동 범위는 아래 표와 같다.


제1차 전도활동

예루살렘 회의

제2차 전도활동

제3차 전도활동

13,1

15,1

15,36

18,23

주로 소아시아 남동부

 

주로 마케도니아와 헬라

주로 소아시아 서부


「사도행전」 13장 1~12절은 바울로의 두 번째 선교활동의 출발점이자, ‘바울로다운’ 선교의 실질적인 시점에 위치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파송할 때 바울로의 이름은 유대계 이름인 ‘사울’이고 거명 순서가 바르나바 다음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이 유대인의 전통적 이름의 하나였다는 것은 이방인 선교사로서 걸맞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바울로 자신은 사울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가 타르소스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원래 이름이 사울이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아마도 그가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사실
(「필립」 3,5)에서 같은 지파 출신의 전설상의 불명예스런 왕의 이름이 그의 본명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이 명예롭지 못한 이름은 박해자 혹은 전향 후의 다마스커스에서 선교에 실패한 이력에 걸맞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행전」 저자의 가필일 것이다. 한편, 바르나바 다음에 거명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방선교 초기에 바르나바의 보조자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르나바-사울 일행이 처음 당도한 곳은 키프로스 섬이었다(13,4). 이 섬에서 첫 선교지는 ‘살라미스’이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회당을 돌아다니며 활동했기 때문에 아직 진정한 의미의 이방 선교는 시작되지 않은 셈이다. 본격적인 선교는 바포스(Paphos)에서 시작된다(13,6). 이곳에는 ‘세르기오 바울로’(Sergius Paulus)라는 총독이 있었다(13,7). 본문은 그가 “총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13,7). 이는 총독이 바르나바 일행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려 했다는 묘사와 상응한다. 이와 같이 고위층의 인사를 품격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은 ‘루가’(저자를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특유의 어투에 속한다.

그런데 총독 휘하에는 ‘바르예수’라는 묘한 이름의 예언자가 있었다(13,6). 8절에는 그가 ‘엘루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쩌면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예수라는 이름을 저자로선 쓰기가 불편해서 다른 이름을 또 거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점술사로서, 총독의 참모역할을 하던 유대인 예언자였다. 그는 분명 바르나바-사울 일행의 적대자로, 총독의 개종을 방해하는 자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바울로와 그가 유대사상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 관점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바르예수는, ‘예수님야말로 메시아다’라는 바울로의 선포에 문제를 느꼈던 유대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에 분개한 사울은 그가 ‘눈이 멀’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그것이 실현되었다고 한다(13,11). 그리고 이 일로 총독 세르기오 바울로는 개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느님은 예수를 반대한 바르예수 대신, 예수를 선포한 바울로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줄거리는 실제 있었던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그와 같은 높은 직책의 인물이 개종했다면 훨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을 것임에도, 바울로 자신이나 동시대의 다른 문헌들에서 이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세르기오 같은 상류층 인사가 개종했다는 것은 ‘루가’적 필법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루가’의 가필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그는 이방인선교가 처음부터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매우 인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이방인 선교가 본격화되었다는 사실 외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다. 하나는 사울이 ‘바울로’로 거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9절에서 “바울로라고‘도’ 하는 사울은”이라는 표현이 느닷없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울로’가 이미 그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아직까지 그를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는데 여기서 슬쩍 언급하더니, 이 텍스트의 다음 단락부터는 아무런 언급 없이 아예 당연하다는 듯 ‘바울로’라고 호명하고 있다. 그것은 파포스에서의 이 사건이 개명의 계기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다른 하나의 변화는 바르나바의 이름보다 바울로가 먼저 나오거나, 혹은 바르나바를 뺀 채 ‘바울로 일행’이라고 부른다는 것(13,13)이다. 이는 바울로가 이방선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역시 파포스에서의 사건이 그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울이 바울로가 되는 계기적 사건이 총독의 개종인데, 그의 이름이 또한 바울로(세르기오 바울로)였다는 점이다. 더욱 심상치 않은 것은 총독 개종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바울로 일행의 강력한 반대자의 이름이 ‘바르예수’였다는 사실이다. 바울로가 전하는 예수의 적대자의 이름이 ‘예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묘한 일이다. ‘루가’라면 예수의 적대자가 ‘바르예수’였다고 말했을 것 같지 않은 데 말이다.

만약 바르예수가 반 그리스도교적 유대인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친 예수적 유대인을 상징한다면 이는 바르예수와 매우 어울리는 이름이다. 즉 예수의 적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울로의 방해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루가’의 필법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루가’는 바울로 자신의 묘사보다 훨씬 예수 집단들 사이의 협조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저자의 필법과는 별개로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 또 하나를 이야기할 수 있다. 바울로와 더불어 「사도행전」의 주인공인 베드로도 이방인 선교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출발지점이 사마리아 선교다. 물론 이곳은 필립이 먼저 선교한 곳이지만, 진정한 선교는 베드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8,4~25). 그런데 이때 베드로가 행한 선교의 주된 방해자가 ‘시몬’이라는 점술사다(8,9). 독자라면 시몬이 베드로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일 텐데, 베드로의 이방 선교의 중요한 적대자가 시몬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도 시몬은 베드로의 아람식 이름이라는 점을 유의하라.

바울로는, 아니 아람식 이름의 선교사 사울은 바르예수와 싸우고 있다. ‘예수의 아들’이라고 하는 묘한 이름의 사나이는 예언자요 점술사다. 물론 사울이 선포하던 예수도 유대인이요 예언자였다. 그리고 이 적대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바울로라는 이름(세르기오 바울로)의 총독의 개종시켰는데, 그로 인해 사울은 바울로가 되었다. 요컨대 유대인 예언자 예수를 이김으로써 사울이 바울로로 개명, 아니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모종의 내적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실패한 유대인 왕 사울이 아니라 현명한 헬라인 바울로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으로써 그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진정한 선교사다운 존재가 된 것이 아닌가? 베드로가 유대인인 자기 자신을 이김으로써 진정한 이방인 선교가 된 것처럼, 바울로도 바르예수, 아니 유대인 예수를 이김으로써 이방인을 향한 진정한 예수의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바르예수는 예수의 적자임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바울로 아니 사울 자신의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던 신앙의 양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바르예수는 바울로에게 이방인에 대한 유대주의적 선교를 추구하게 했던 사울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진정한 이방인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시몬을 넘어서야 했던 것처럼, 사울도 자기 자신을 넘어섬으로써 바울로가 되었고, 바르나바의 조력자가 아닌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3

 

‘루가’의 텍스트는 이방선교의 한 성공적 스토리를 구성하려 했다. 그것은 타자에게 그리스도 이야기가 복음이 되었던 바울로와 베드로의 성공담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루가’의 필법과는 별개로, 바울로와 베드로의 선교 역사 속에는 종족 중심주의를 벗어던지려 안간힘 썼던 그들 자신의 자기와의 투쟁이야기가 내재되어 있다. 타자에게 예수가 진정한 구원자임을 전파하려면, 자기중심으로 구성된 자신 내면의 예수를 버려야 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자기 초월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자기 초월을 통해서 복음은 타자의 얼굴을 할 때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루가’의 텍스트에서 저자와는 별개로 발설된 소리에 기초하여 재구성한 이러한 의미는 ‘루가’적 선교의 역사를 단순한 종교 담론의 팽창의 이야기가 아닌, 복음의 전파 과정으로 다시 읽을 수 있는 지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불가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전유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전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신이 자신을 죽임으로써 구원자가 되었던 것과 같다. □(올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