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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대형교회가 추구하는 인간적 삶, 그 삶의 미학은 불온하다

[우리신학](2009)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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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교회가 추구하는 인간적 삶, 그 삶의 미학은 불온하다

 

   

제작 년 말쯤 한 술자리에서 소설가이자 번역가이고 대학강사인 모씨는 요즘 대학생들이 ‘너무 착하다’고 말했다. 선생의 말을 지나치게 잘 듣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티가 역력하단다. 자기를 사적으로 방문할 때면 반드시 뭔가를 사 들고 오고, 예의바른 말을 아낌없이 내놓는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를 가장 당혹하게 한 것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고 선뜻 대답하는 것이었다. 해방세대, 전후세대, 민주화세대 등, 아비는 친일파였다거나 공산주의자였다거나 독재의 공모자였다는 등의 오명을 저주했던, 끊임없이 이어지는 근대한국의 위기 이후 세대는 이른바 ‘고아의식’의 세대였다. 즉 아비를 부정함으로써 자아를 구축하려고 했던 세대인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아비와의 투쟁으로 점철된 20,30대를 보냈다. 하여 ‘아버지를 존경하는 세대’라는 생경한 느낌이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던 모양이다.

그때 다른 이가 끼어든다. ‘그건 선생이 명문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방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의 친구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른바 비명문대학에서는 정 반대의 현상을 겪게 된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 있던,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이 이 두 사람의 생각에 공감을 표했다.

그날의 얘기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계층분화가 사회 각 영역에서 점점 견고하게 제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착함’은 점점 중상위계층의 덕목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최근 사회복지학 연구자들이 북미의 연구 성과를 우리사회에 적용하면서 우려스럽게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추세에 있는 이른바 빈곤층의 하위계급화 추세에 관한 논의와 쌍을 이룬다. 즉 빈곤층의 사회적 자기 파괴가 심화되어 더 폭력적이고 더 범죄적이며, 알콜릭도 더 많고 약물 의존성도 높은 하위계급(under-class)의 존재가 우리 사회에서도, 비록 자료가 충분치 않지만, 발견되는 증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적 착함’과 ‘사회적 악함’이 우리 사회의 병리성으로서 드러나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지난 해 나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연구 과제의 하나로 대형교회에 대한 연구를 기획하여 시행한 바 있다. 그것은 크게 보면 포스트민주화 시대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대형교회의 변동과정을 통해 읽어보려는 데 있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작업가설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근대 한국사회의 전통적 보수주의는 발전지상주의를 내재화하면서 형성되었는데, 민주화를 거치면서 분화되기 시작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현저히 퇴조하고 대안 사회에 대한 바람으로 전화되는 포스트민주화 시대에 이르면서 새로운 기조의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발전을 위해 모든 걸 도구화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해, 발전과 동시에 품격을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보수주의가 도처에서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웰빙 담론과 결합되면서 문화적 심성으로 번안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분화된 보수주의는 교회의 제도화 속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이다. 민주화와 지구화 이후 한국교회는 나름 변화된 시대를 반영하는 제도적 리모델링을 시작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교회적 변화의 기조상의 차이를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라는 이념형적 모델을 통해 도식화하였다. 여기서 선발대형교회는 발전지상주의를 추구했던 권위주의 시대 교회의 팽창일변도의 존재형식을, 그리고 후발대형교회는 양적인 성장과 신앙적 품성을 결합시킨 탈권위주의 시대 교회의 미학적 존재형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분 도식은 이미 강남형대형교회와 강북형대형교회 등, 유사한 문제틀로서 제기되어 온 것이므로, 전혀 낯선 이념형적 틀은 아니다. 우리는 이 두 이념형적 모델을 전자는 전통적 보수주의와, 후자는 새로운 보수주의와 대응시키기 위해 입론화하였다.

최근 한국의 대형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변화된 시대에 맞추어 리모델링을 시도하고 있는데, 후발대형교회적 요소를 반영하는 자기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더 선발대형교회적 요소가 강한 교회가 있는 반면, 더 후발대형교회적인 요소가 강한 교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자, 즉 미학적 성장을 추구하는 대형교회 셋을 임의로 선정하여 조사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새로운 보수주의의 지형이 교회를 통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그리고 교회의 이러한 자기 변혁이 한국사회의 포스트민주화 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세 교회란 소망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인데, 우리는 이들 교회의 목회자나 장로 등 교회의 이념주도층이 아니라, 특별한 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비교적 충성도가 높은 평신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신앙이해와 사회적 태도의 특징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주로 거대서사적이고 공적인 언술보다는 사적이고 일상적인 언술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은 무자기로 접촉한 교인들과의 인터뷰, 교회가 발행하는 문집들, 주보, 결혼예식 순서지, 각종 교회 프로그램, 그리고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각종 글들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부족하나마 조사와 분석을 지난해 말에 끝냈지만, 연구소 사정으로 아직 완성된 보고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우리 나름의 판단으로는 애초에 가졌던 생각에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야심찬 기획이었지만, 애당초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면 선행연구가 전무한데다, 우리가 잘 훈련된 조사자가 아닐뿐더러 ‘의심받는 외부자’인 탓에 접근 자체에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SBS TV 다큐인 <신의 길 인간의 길>에 인터뷰로 참여한 주요 학자와 목회자 네 명 중 세 명이 우리 연구소 회원인 탓에, 교회와 신자들이 공히 ‘위험스런 이’들에 대한 경각심을 고추 세우고 있어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필 기회를 여간해서 얻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말한 대로, 우리는 이들 세 교회에서 새로운 보수주의적 요소가 신앙 속에 제도화되고 있는 뚜렷한 추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편집증적 성장주의에 대해 불편해하는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데 이 불편함의 이유가 사뭇 흥미롭다. 그것은 교회의 ‘천박함에 대한 반발감’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기총 등 대형교회적 이해집단이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보인 노골적인 정치적 편향성은 교회의 팽창주의적 선교가 시민사회로부터 대단히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기총 등은, 시민사회가 교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를 민주화의 부정적 소산이라고 보면서 권위주의적인 정권 재창출을 통해 성장주의를 재활성화하는 정치적 지형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전통적 보수주의의 신앙적 태도가 이미 교회 내부에서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보수주의적 신앙이 교회 내부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들 새로운 보수주의자들은 민주화를 거부하기보다는 보수주의의 미덕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민주적 제도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주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연구프로젝트는 이러한 새로운 보수주의적 주체화를, 그리고 그 함의를 주로 일상적 언술 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요소가 신앙의 미학화의 주된 골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근대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부침을 수차례나 겪으면서, 실패한 부권에 대한 자식들의 거부를 제도화하였다. 그것을 인식의 차원에서 보면 ‘고아의식’이며, 제도의 차원에서 보면 ‘개혁’내지는 ‘혁신’이다. 우리말에서 ‘개혁/혁신’이라는 말이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 말의 정서가 대체로 과도한 감성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부모거부의 담론이 일상 속에 제도화된 탓이겠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존경의 부재’라는 정서로서 나타나며, 그런 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도구적 성격이 강한 것은 이러한 불신의 제도화 탓이겠다.

그런데 최근의 보수주의적 신앙이 가족주의를 재강화하면서 가부장의 존경을 복권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존경은, 권위주의적 부권이 아닌, ‘친밀한 부모권’을 향하고 있다. 이때 부모-자식의 관계가 완력에 의존하지 않고 대화적이기에 가족주의적 존경이 가능하게 된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친밀성과 존경이 살아 있는 가족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과 담론을 적극 개발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친밀함과 존경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비용이 요청된다는 데 있다. 자식과 대화하면서 그네들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보다 나은 교육,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부모라야 친밀한 대화가 가능하며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하다. 소비사회의 세례를 가장 충실히 몸에 체화한 존재인 자식들은 대체로 부모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욕망을 구성하기 마련인데, 그런 자식 앞에서 감정 조절에 실패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품성이 부모스러움의 기본인 것이다. 요컨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자본 능력’이다.

자식 세대도 ‘좋은 가족’의 조건이 자본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조사한 교회들의 청년모임은 ‘양질의 결혼시장’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거기에서는 자본능력과 신앙적 신실함이 함께 검증된 이를 만날 수 있고, 그러한 신앙적 태도 혹은 삶의 태도가 공동체에 의해 감시되고, 양질의 가족 카운셀링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 요컨대 이 교회들에서는 ‘좋은 가족’ 이데올로기가 자본 친화적으로 신학화되고 있다. 하여 청년들은 청년 모임에 속한 이성의 동료를 잠재적인 배우자로 여길 뿐 아니라, 그 잠재적 배우자의 부모들 모임인 권사회나 신도회 등을 의식하며 무의식적으로 ‘착한 사람’ 연기를 신앙생활로 일상화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사회적 착함’은, 부족함 없이 자라 딱히 남의 것에 대해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있는 여유로운 성장의 산물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그러한 품성이 유지 재생산되게 하는, 이른바 ‘착한 사람’ 연기를 제도화한 교회, 즉 양질의 결혼시장을 보유한 교회들의 시스템의 산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교회의 신앙담론이나 제도가 풍요를 신학화/신앙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핍을 담론화하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는 점이다. 대개 여기서 결핍은 타자의 영역이고, 동정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보수주의, 착한 사람 이데올로기/신학은 실패를 대상화된 것으로만 다루며, 주체의 형식으로는 다루지 않는다. 반면 맑스주의나 민중신학은 그 반대로, 풍요를 대상화하는 반면, 결핍이나 실패를 주체화의 핵심 요소로서 언술화한다. 후자는 풍요의 메커니즘, 그것의 주체화의 효능을 간과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보수주의적 재생산을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 한데 반대로 새로운 보수주의는 실패를 탈주체화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실제로 소망교회는 이른바 명문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이는 교회 대학부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 또한 다른 두 교회도 세속적 성취율이 높은 이들에 상대적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부모세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실패자는 그 교회의 일원이 되지 못하거나, 일원이더라도 주변부에 있다. 실패는, 불쌍히 여기는 대상의 조건이긴 하지만, 주체화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최근 대형교회의 신앙의 미학화, 성찰적 성장주의는 또 다른 방식의 배제주의를 낳는 신앙적 장치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 보수주의가 ‘성장주의를 야만화’했다면, 새로운 보수주의는 ‘야만을 일상화’했으며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형해화시킬 우려가 농후하다. 그런데 후발대형교회는 그러한 일상화된 야만성, 그 망각되는 야만성을 신앙적으로 유지 재생산하게 하는 사회적 담론의 장치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후발대형교회가 야기하는 사회적 착함, 그 수상한 품성을 문제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형교회가 추구하는 인간적 삶, 그 삶의 미학은 지극히 불온한 모델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