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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성공주의에 잠식된 영혼 - 삼성을 '다시' 생각한다

[기독교사상] 201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가 일으킨 사회적 반향에 즈음해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내면의 삼성에 관한 물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입니다.

한겨레 신문에 소개글이 있어 기사 링크를 해 놓았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15017.html


성공주의에 잠식된 영혼_기상2010 03 특집-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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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주의에 잠식된 영혼

삼성을 다시생각한다

 

 

 

 

이건희 제국은 우리 에도 있다

 

20058, ‘안기부 X파일이 공개된 바로 그 무렵, 한 계간 잡지는 삼성을 특집 주제로 다루면서 삼성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각주:1] 3공화국이니 제5공화국이니 하는 용어가 일종의 군대공화국이라면 지금은 삼성공화국의 시대일 수 있다는 뜻이겠다. 여기에 수록된 한 글에서는 삼성공화국의 실체는 (공화제사회가 아니라) 삼성이 권력을 장악한 경제적 참주정사회라고 말한다.[각주:2] 삼성이 국가의 지배력을 행사한 방식이 현실의 법체계 속에서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겠고, 삼성에 대한 시민적 지지가 그네들의 권력이 정당화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겠다.

20071029,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고위임원을 지낸, 내부고발자 김용철씨 관련 천주교정의 구현전국사제단의 제1차 기자회견이 열린 직후, 또 다른 잡지는 특집 제목 속에 이건희 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각주:3] 올해 초 출간된 김용철 씨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에 따르면 과연 이건희 제국이라는 표현이 걸맞아 보인다. 거대한 기업군을 거느린 삼성의 운영체계는 군주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되어 있고, 가신집단의 절대적인 충성심이 그의 권력을 비호하고 있다.

나아가 그이의 권력이 삼성그룹의 범위를 넘어 한국사회 전반에까지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고, 심지어 불법과 탈법조차도 공적 법률기관과 언론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매체는 삼성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특별히 자제하는 편이고, 김용철 씨의 책을 펴내려는 출판사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사정에 있었다고 한다. 삼성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소소한 에피소드로, 최근 이 책에 대한 김상봉 교수의 서평이 비판적 신문에서조차 게재되지 못했다는 사연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적 신부들이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했다고 하니 종교계 역시 삼성의 영향망에서 멀지 않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여 이건희의 삼성제국은 한국 사회 전반에까지 그 권력을 미치고 있으며, 점점 그 권역이 광대해지고 세밀해지는 추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전부터 궁금했던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삼성공화국’, ‘이건희 제국운운하는 말들에 대해 보통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다. 신문기사, 논문, 책 등을 통해 알고 있는 이런 정보가 주위 사람들과 이런 식의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상식에 속하지만 다른 대화권의 사람들, 우리사회의 보통사람들에게도 상식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삼성을 어떻게 이해할까?

비록 사사로운 것이지만, 그 궁금증을 안고서 다섯 명의 사람들을 각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모두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 사이의 남자이고 부장이나 차장, 과장급 직장인이다. 그중 한명은 삼성계열사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을 제외하고는 학생시절에 반정부 데모에 참여한 적이 전혀 없었고, 대체로 이념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시사정보에 대해서도 별 다른 관심이 없고 정보도 많지 않은 이들이다. 대체로 나와는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내가 생소해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데 이 대화들은 유익할 것 같았다.

한데 놀랍게도 그들은 삼성, 이건희, 이재용 등에 관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일하면서 혹은 술자리에서 들은 것이 직장인의 경험에 유추한 상상력과 결합하여 구성된 에피소드들로 보인다.

아무튼 이 만남들을 통해 나름 추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다. 사람들은 삼성의 부조리한 행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사적 기회를 많이 갖고 있었다. 반복된 언어적 수행은 의혹 수준의 생각을 확신하게 하고, 단편적 정보들을 연결하는 스토리라인을 형성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삼성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다지 순진하지 않았고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부정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삼성과 이건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삼성이 국제시장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가장 결정적으로 고양시키는 기업집단이라는 이해와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한 외국계 기업에서 일할 때 유럽의 몇 개 나라를 전전했던 경험을 가진 이는 백인사회에서 위축되어 있던 자신에게 삼성 브랜드가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했다. 다른 이는 보다 논리적 해석을 부여했는데, 이 기업집단이 이룩한 시장에서의 성공은 그들의 잘못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공헌을 우리 사회에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자기가 외국 바이어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할 때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삼성이 국제시장에서 거둔 성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이 그네들의 잘못을 다소 불공정하더라도 용인해줘야 하는 이유다.

이런 해석도 있었다. 삼성이 좌초하면 우리 사회는 몰락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전 세계의 경쟁사들은 삼성을 좌초시키고 싶어 안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히 세계시장에서 일하는 기업을 시장 외적 잣대로 위축시킨다면 결과적으로 외국 기업들의 농간에 놀아날 뿐이며 우리 경제는 종속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시장의 경쟁력을 위해서 민주주의를 유보하자는 것이냐고 되물었을 때, 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가난한 민주주의보다는 풍요로운 자본주의가 낫다고.

다들 명료한 주장을 펴고 있었다. 물론 어느 것도 내게 생소한 얘기는 아니다. 보수주의적 논객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논변들이다. 다만 학자들의 추상적 얘기들보다는 현장을 뛰는 이들의 설명이, 적어도 내게는 더 큰 호소력이 있는 소리로 들렸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아무튼, 내 생각에는, 딱히 이념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아닌 우리사회의 중산층 직장인들에게 이념적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 더 친화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섯 사람 모두는 일터에서 퇴출의 위기에 노출된 사람들이다. ‘잘해야 부장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특히 삼성의 고용조정이 매우 야비하다는 직간접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노조가 없는 회사의 횡포를 폭력적으로 추체험하고 있었다. 하여 그들은 예외 없이 진지하게 퇴출 이후 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장 중심의 경제가 제공해주는 위기 해법에 그들은 여전히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부동산이 주는 높은 부가가치에 대한 기대다. 설사 직장에서 퇴출되더라도 부동산 경기만 괜찮다면 살만하다는 것이겠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기대인지 그들은 모르지 않았지만, 시장 자체가 무모할 만큼 위험성 높은 투기가 벌어지는 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리스크는 당연히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듯이 보였다. 그런 점에서 국가가 할 일은 그 투자의 리스크 요인을 축소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삼성과 이건희를 휘둘리게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다.

이 대목에 이르자 문뜩 그들이 논리보다는 욕망에 의존해서 생각을 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그 무한경쟁체제가 얼마나 사람들의 삶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서생(書生) 짓하며 사는 나보다 훨씬 더 폭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기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망은 더욱 절절한 위기의 식과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여 생존 욕망이 낙관적 시나리오를 가상으로 그리게 하고, 그것을 위해 자기들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해석의 프레임을 동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의 프레임은 시장주의, 그것도 성장일변도의 시장주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사회의 이념적 보수주의자들의 설명과 맞물린다. 여기에서 보주주의 정부-재벌기업-자기 자신을 잇는 생각의 계열이 형성되는 것이겠다. 이때 민주주의는 장애물이다. 아니면 시장 친화적 민주주의가 되거나. 내 생각에는 최근의 법치(法治)라는 어법은 이러한 시장 친화적 민주주의를 위한 미사여구에 다름 아니다. 왜냐면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법적 정의가 규범적, 도덕적, 혹은 대화적 정의와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법이 다른 것을 압도하는 상황은 담론적 지배력을 더 많이 확보한 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담론적 지배력이란 언론의 지배력과 관계되며, 법률적 언어의 구성 능력과도 관계된다. 이것이, 김용철 씨가 폭로한 것처럼, 삼성 구조조정본부가 법조계와 언론계에 대대적인 로비를 했던 이유겠다.

내 생각에는, 이들처럼 성장주의적 해석의 프레임에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한 담론의 질서에 포박되어, 다른 대항적 담론에게 공여할 영혼의 여분이 별로 없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에 비판적인 주장을 펴는 나 자신도 이러한 성공주의적 담론의 질서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운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이건희 제국은 바로 그러한 정신의 편향 속에서 서식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성공주의 신앙과 내재된 삼성주의, 그 둘은 동거중이다

 

그런데 다섯 남자 중 한 사람의 말이 내 귀에 특히 솔깃했다. 그는 내게 왜 신학자가 그런 일에 관심을 갖느냐고 물었다. 직접적으로 삼성과 연계시킨 말은 아니지만, 분명 삼성을 비판하고 싶어 하는 나를 반박하기 위한 신앙적 화법임이 분명했다. 삼성을 두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하느님에게 영광이 될 만한 것에 힘쓰라는 말이다.

그는 박지성보다 박주영을 좋아한다. 왜냐면 박주영의 골 세레머니가 기도이기 때문이다. 단지 성공에 대한 감사기도가 그가 선호하는 것의 제일 중요한 잣대인 것이다. 삼성을 얘기할 때도, 그의 생각의 편향은 비슷하게 펼쳐졌다. 신학이 할 일은 세속적성공 과정을 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결과 혹은 태도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정에 대한 것은 시민운동가들나 국가가 할 일이니, 신학자는 성공한 그이들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전향하도록 하는 일, 그의 표현으로는 영적인것에 힘쓰라는 권고다.

물론, 내가 알기로는, 그는 세속적 일상에서 매우 엄격한 도덕성을 발휘한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신앙적 명제를 그는 이렇게 실천하고 있다. 그러니 그가 과정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정을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개개인의 덕목으로 환원시켜 이해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주장은 일관성이 있다. 그는 나름대로 정교분리 주장을 펴고 있다.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나누고 그 역할분담에 최선을 다함으로서 세상에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다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이분법이 위기를 맞는 지점은 생각보다 현실과 맞닿아 있다. 추상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란 존재 전체가 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생존 못지않게 세속적 생존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절실함을 외면할 수 없기에 세속적인 생존에 관한 신앙윤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자기 개인의 도덕성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물론 세속적 일이지만, 엄격한 도덕성을 통해 영적인 방식으로 세속을 사는 것, 세상에 속해 있지만 속하지 않는 자처럼 사는 것이라는 믿음과 연결된다. 그는 이것을 창세기1826절을 예로 들면서 설명했는데, 아브라함이 소돔에 대한 징벌 유보를 간구할 때 하느님이 말한 심판의 원리, 곧 한 사람이라도 의인이 있다면 심판을 중지하겠다는 것은 곧 개인의 도덕성이 세상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된다는 해석과 연결시켰다. 이런 식으로 그들 식의 정교분리의 이분법이 그 회색지대까지 나름 일관되게 설명하였다.

한데 그의 논지에서,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처럼 살아간다는 영적인 삶의 태도는 그 세속적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러한 삶의 태도는 세속적 성공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즉 영적인 삶은 세속적 성공을 보증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러한 해피앤딩의 논리는 거꾸로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이 영적 삶의 태도를 자극한다. 즉 양자는 상호 보완적이다.

한데 이러한 생각은 세속적 실패를 고려하지 않을 때에만 그 일관성의 위기를 맞지 않는다. 이는 논리를 단순화해야만 가능한 신앙적 이해의 프레임임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로서, 성공 지상주의적 신앙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논리는 성공한 자, 성공한 집단, 성공한 나라에 대한 신앙적 친화성을 무의식적으로 내재화한다.

 

코헬렛, 성공지상주의를 야유하다

 

실패에 직면해 있는 이가 자신의 좌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 무의식적으로 활용하는 매우 효능 높은 방식은 만만한 가상의 적을 발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 효능만큼이나 부작용이 큰 요법이다. 나는 한 논문에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유태인과 가해자인 유럽인이 체험한 좌절감이 그 상실의 체험과는 전혀 무관한 제3의 존재인 팔레스티나 사람에 대한 인종적 적대를 내재화하는 각종의 서구적 인식의 체계와 연루되어 있음을 밝힌 바 있다.[각주:4] 또 식민지 조선의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이 신사참배의 압박을 거부하지 못한 좌절감을 해방 이후 광폭한 반공주의 신앙으로 대체하여, 내부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대적 공격을 일상화하는 신앙적 논리를 발전시켰음을 논증하기도 했다.[각주:5]

올해 나는 연구 주제를 1성서(구약성서) 시대 후기, 특히 식민지 시대의 악마들로 잡았는데, 그것은 식민지 시대 유대 사회는 어떻게 악마를 발명해냈는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신앙과 사회를 제도화하는 데 효력을 발휘하였는지를 살피려는 데 초점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웃을 악마화함으로써 유다(예후다) 지역을 명실상부 총독령 자치구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우리 시대 읽기에 활용한 글이다.[각주:6] 여기서 나의 논점은 이웃의 악마화라는증오의 정치가 유다와 사마리아의 종족 분단의 뿌리가 되었다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을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극우기독교단체들의 인권운동 배후에 도사린 분리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해석의 실마리로 다루었다.

한데 반대로 성공에 직면한 이, 혹은 성공에 대한 갈망에 심취한 이 또한 퇴행적인 신앙을 발전시키곤 한다. 성서 시대 가운데서도 성공주의가 지배적 인식이던 때를 배경으로 하는 전도서는 그런 인식의 질서에 소극적이나마 이의를 제기하던 한 냉소적 지식인의 고뇌를 반영한다.

때는 프톨레마이오스(Ptololemaios)가 창건한 제국이 지배하던 시대다(기원전 301~198). 식민지 시대임에도 유다는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를 만끽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코헬렛(Qohelet, 전도자)이라고 자칭하는 한 노학자는 '헛되다는 말을 무려 30여회나 내뱉으며 독한 냉소주의문학을 저술한다. 그의 글은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로 시작하고, 이 글이 저작된 후에 첨가된 129~14절을 제외하면,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8)로 끝을 맺고 있다. 왜 그는 이 평화의 시대에 그토록 독한 냉소주의에 빠져야 했던 것일까.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무적의 군대가 팔레스티나로 진군하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저항 없이 곧바로 항복을 선언한다. 한데 323년 이 새로운 제국의 군주가 요절한 뒤, 그의 휘하 장군들(Diadochoi)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301년 이집트에 터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무려 20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팔레스티나 전역은 혹독한 참화를 겪어야 했다. 그 이후 백년 남짓의 기간 동안(기원전 301~198) 이곳에는 거의 전쟁이 없었다. 식민지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장군들이 세운 나라들에 비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했다. 전례 없이 안정된 중앙집권적 체제 아래 제국은 각 지방의 농민들에게 개량된 농법, 농기구, 새로 개발된 태양력에 기초한 과학화된 농경주기에 관한 지식 등을 보급했고, 국제무역에서 유리한 작물 경작을 유도했으며, 화폐제도를 확산시켜 무역의 효율성을 크게 진작시켰다. 헬레니즘 제국들 여기저기 건설된 폴리스 간 국제무역의 시대는 활짝 열린 것이다.

한편 제국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건립되고 있었다. 70만 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서로 유명한 이 도서관 건립을 위해 제국은 막대한 기금을 쏟아부었다. 특히 책을 필사하여 복사본을 만드는 서기관의 수효가 급증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서기관 교육시스템이 제도화된다. 이 과정에서 문자 능력이 출중한 중산층엘리트가 대량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경제적 활황으로 부를 축적한 서민 계층에서 배출되었다. 제국 수도에서 벌어진 현상은 제국 전역, 그리고 그 외부에까지 영향을 미쳐, 지중해 연안 지역 도시들을 중심으로 문헌들과 지식인의 수가 급증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유다에서는 이른바 지혜라는 장르의 문학이 태동한다. 과거 왕실 사제나 서기관들이 저술한 문헌인 율법서나 역사서는 왕과 귀족의 나라, 그 뿌리와 비전을 다루었는데, 이들 신흥지식인인 민간서기관들의 지혜 문서들은 대중의 일상적 삶의 질서를 언어적으로 체계화하는 것, 곧 일상적 경험을 성찰하는 가르침을 다룬다.

그런데 지혜문헌들이 태동하고 활발하게 유포되던 바로 그 시기에, 코헬렛이라는 한 노학자는 주류담론이 된 지혜들에 짙은 냉소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주류담론으로서의 지혜들은 자기들이 사는 세계의 평화를 만끽하면서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법을 말하고, 그것이 풍요와 안정, 건강이라는 세속적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각주:7] 코헬렛은 그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말한다.

제국이 제공해준 안정과 번영의 토대 위에서 많은 현자들이 악이 소멸해가는 세상의 가능성에 탐닉하고 있는데, 모두들 더 나아질 세계를 낙관하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코헬렛은 악한 자가 죽어도 그 악행이 자행되던 바로 그 곳에서조차 칭송받는 세상을 절망스럽게 냉소한다. 악마가 사라지고 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악마는 사람들의 공모 속에 칭송받으며 일상과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전도서810

 

사실 바로 이 시기에 새로 부자가 된 평민들이 많았지만, 막대한 세금을 강탈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특유의 조세체제 아래서 더욱 많은 이들이 몰락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제국은 선납형식의 조세대리인제도를 도입했는데, 이 조세대리인의 특권을 얻고자 하는 이는 경쟁자보다 더 큰 액수의 선납금을 바쳐야 했다. 그것은 타인보다 큰 액수의 선납금을 바칠 능력과, 그것보다 더 큰 액수의 수탈능력을 갖춘 이를 필요로 하는 제도다. 하여 이 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한 대중 수탈은 전례 없이 강화되며, 이는 사회적 계층분화를 야기할 우려가 농후했다. 그나마 이 시대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기에, 더 많은 소득을 빼앗기고도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초과이윤을 획득한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그 위기는 어느 정도 완충될 수 있었지만, 하향분해된 몰락농민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얼마든지 추정 가능하다.

그럼에도 당시가 그러한 안정과 발전의 체계로 인한 수혜자들, 특히 상향분화한 적지 않은 대중이 문자계층으로 부상하였고, 이들에 의해 그 시대를 낙관적으로 언술화하는 지혜문헌들이 양산되고 소통되던 시대였기에 그 시대 대중의 고통의 결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실은 대중적 지식인, 대중적 현자들은 대중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 왕실 서기관과 사관들의 글이 미칠 수 없는 효력을 그것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 이후 대중적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대중운동(하시딤, 마카베오 가문, ‘마즈키림mazkirim, 바리사이, 에세네 등)이 활발해졌다는 것은 그것을 방증(傍證)한다.

그런 점에서 주류적 지혜는 현자들의 세계관일 뿐 아니라 대중의 생각을 지배하는 보편적 생각의 틀이기도 했다. 많은 대중은 언제나처럼 이 시대에도 그 시대 특유의 체계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타자의 언어가 자기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그런 상황은 그 고통을 표현할 때도 타자의 언어를 빌어 말하게 된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그 타자의 언어, 곧 현자들의 지배적 지혜는 인과응보의 세계 질서를 말한다. 고통은 대중 자신 혹은 자신이 귀속된 운명공동체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여 악마가 사라진 시대, 주류담론 속에서 모든 것이 낙관적 기억을 통해 구현되던 시대에 고통은 존재할 자리를 빼앗긴다. 대중은 주체의 조건을 빼앗긴 것이다. 식민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정치 속에서만 실재하는 원리가 아니라, 주류적 지혜의 담론의 정치 속에서도 작동하는 원리였다. 요컨대 우리 시대의 감각으로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되지만, 대중을 통제하는 지배적 담론이 이 시기에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런 시기에 아마도 보수적인 노지식인이었던 코헬렛은 그러한 지배적 지혜의 단순함에 대해 반대하는 문학을 저술해낸 것이다. 비록 그는 언어를 빼앗긴 대중의 식민지성을 발견해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해석의 원류에 자리잡고 있던 성공지상주의, 그것의 허망함에 대하여 냉소라는 해체의 지혜를 말하였던 점에도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예수, 성공지상주의에 잠식된 영혼의 해방

 

코헬렛으로부터 2백년도 더 지나서, 농촌출신의 급진적 민중예언자 예수는 구걸하는 한 소경을 두고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다(요한복음9). ‘저이는 무엇 때문에 하느님의 징벌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가 지은 죄 탓일까요 아니면 그의 조상 탓일까요?’ 제자들이 물었다.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을 증언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말이다.

소경인 것은 더 이상 징벌이 아니다. 그는 그것으로 하느님의 일을 증언하게 된다는 얘기겠다. 요한복음의 설명은 이 점에서 매우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경이 예수로 인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토대로 하여 보지 못함에 관한 해체적 문제제기가 예수운동의 핵심임이 강조되고 있다는 데 있다.

여기서 보는 자는 바리사이다. 곧 대중적 지혜의 대표자들이다. 대중은, 실명(失明)하였든 아니든 간에, 바리사이가 보는 방식으로 보아야만 진정 보는 자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말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주류지혜의 인과응보적 세계관 바로 그것이다.

한데 예수로 인해 눈을 뜨게 된 이는 그러한 /못봄의 질서에 대항한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항변한다. 이때 눈뜸이란 자기 경험이 자신의 말을 하게 되는 사건의 발생을 의미한다.

요컨대 예수운동은 식민화된 대중의 영혼에서 주류적 지혜의 영을 추방하고자 한다. 이웃을 악마로 만들고,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 일부를 그런 악마의 공모자로 몰아 외부로 추방하는 느헤미야-에스라의 증오의 정치나, 공동체 내의 영혼을 차지함으로써 악마가 사라진 시대의 성공주의 미학이 도모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는 내면에 침투해 있는 악마를 문제시했고 그들과 싸웠다. 말했듯이 그 악마는 악마를 추방했다고 떠벌린 이들의 성공주의적 신앙관이며, 대중의 주체의 조건을 박탈했던 신학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삼성 문제와 연루된 성공주의적 세계관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가치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내면의 욕구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때로 신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온갖 거룩한 것의 이름으로 우리 내면을 장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면까지도 잠식하고 있는 삼성은 오늘 우리에게 악마와 대면하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요구한다.

  1. 《문화과학》 43호(2005 가을)의 특집주제는 ‘삼성공화국을 해부한다’이다. [본문으로]
  2. 이득재, 〈블루 오션 위에서 좌초할 삼성〉, 《문화과학》 43(2005 가을), 257쪽. [본문으로]
  3. 《시민과 사회》 12호(2007 겨울)의 특집주제는 ‘삼성 이건희 제국을 넘어 민주공화국으로’이다. [본문으로]
  4. 나의 글 〈‘홀로코스트의 신학’과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 《시대와 민중신학》 11(2009) 참조. [본문으로]
  5. 나의 글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하여〉, 《역사비평》(2005 봄) 참조. [본문으로]
  6. 나의 글 〈참을 수 없는 순수한 열정, 그 위험함에 대하여―로버트 박의 방북사건에 주목한다〉, 《공동선》(2010.3) 참조. [본문으로]
  7. 정전에 수록된 지혜문서의 대표작의 하나인 〈욥기〉는 난데없는 재앙을 당한 욥이라는 사람과 그의 세 친구들, 그리고 또 뒤늦게 논쟁에 끼어든 한 사람이 논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욥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지배적인 지혜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고, 거기에 저항하는 욥마저도 그러한 지혜가 이끄는 서사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애처로운 반대의 항변을 하고 있다. 지배적 지혜는 이처럼 모든 사람, 심지어 그것에 대항하고자 하는 이의 생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