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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를 위하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01년 2월 포럼 때 처음 발표되었고, 

이듬해에 발간된 [시대와 민중신학] (2002 7)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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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근대성과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

 


1


민중신학은 한국사회를 위기의 관점에서 보면서, 이에 대한 신학적인 개입(실천, praxis)의 한 유형으로 형성 발전하여 왔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민중신학은 위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형성된 정치적 전선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민중신학적 시각들은 한결같이 그때마다의contemporary 사회적 배제와 박탈 현상에서 시대의 위기적 특성을 읽었으며, ‘그때마다의비판이론적 기획에 따라 그러한 위기의 극복에 실천의 중심축을 두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민중신학은 권력에 대한 당대적 비판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는 신학적신앙적 실천 유형이라 할 수 있다.[각주:1] 이 글은 이러한 개입에 관한 이론화[각주:2]를 통해 민중신학의 전개를 조명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특히 여기서는 민중신학의 전개에 관한 이론을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개입의 관점에서 다루려는 데 초점이 있다. 나는 이것을 기존의 민중신학의 통시적 분류틀로 널리 활용되어온 세대론을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전개할 것이다. 이제까지 민중신학의 전개에 관한 세대론적 논의들은 시대 구분론적인 분류학적 체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세대에 관한 논의의 혼선은 불가피했으며 거의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러므로 여기서는 세대론에 관한 분류학적 이론화를 모색하면서, 민중신학의 전개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세대논의는, 1980년대 중반경 마르크스주의적 변혁론/인식론과 신학과의 관련성에 주목했던 일련의 신학이론화 운동을 2세대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다. 자연히 이전 세대, 즉 민중신학의 마르크스주의적 탐색이 모색되기 이전[각주:3]의 신학 경향은 1세대라고 불리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시사를 받게 되는데, 하나는 세대론적 경로가 한국사회의 비판담론의 전개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세대 논의는 신학자들에 관한 분류가 아니라 신학적 경향에 대한 분류라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형묵은 민중신학의 전개에 명시적인 준거를 제시함으로써 시대 구분론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시대 상황의 차이에 따른 문제인식의 차이라는 준거에 의거해 1980년대까지 민중신학의 두 세대를 구분한다.[각주:4] 이것은 각 국면적 시대의 위기성에 대한 비판담론 형성의 맥락에서 민중신학의 전개를 조명함으로써, ‘실천(신학의 정치제도적 혹은 담론적 개입)을 민중신학 전개의 독립변수로서 취급하는 이론적 개가를 이룩했다.

이 흐름의 특징은, 한국사회의 비판담론들과의 대화를 신학하기에 전면화함으로써 시대의 위기성에 대응하는 담론적이데올로기적 실천을 전개해 왔다는 점에 있다.[각주:5] 요컨대 민중신학 세대론의 핵심은 (신학사상사적 연관성보다는) 당대적 위기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인식에 초점이 있다.

나는 이러한 최형묵의 세대론에다 최근의 한 세대를 덧붙여 세 단계의 전개 과정을 노정하였는데, 그 단계 각각이 한국 근대화의 세 단계 국면적 전환[각주:6]과 상응하고 있다는 점을 논함으로써, ‘저항의 계보학을 펼친 바 있다.[각주:7] 즉 한국 근대화의 전개를 시대의 위기성에 대한 비판문법을 중심으로 세 단계로 나누어 논할 수 있는데, 그 각각의 단계와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가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경로는 근대성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그것이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구현되는 방법,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한 이해 등에 결합되어 있다. 이때 이해의 내용은 그때마다의 위기성에 대한 비판담론을 통해 구성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근대화의 추상적이고 성찰적 범주인 근대성에 관한 일반적 논의를 점검해 본 뒤에,[각주:8] 한국 근대화 과정의 위기성(위기 이해)과 민중신학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단 여기서는 제3세대 논의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밝힌.

 

2

 

우선 주지할 것은, 역사적으로 근대성의 문제는 곧 서양 근대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근대라는 문제설정 자체가 서양 사상사적 문제의식에 의해 배태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문제가 되는 비서양 지역에서의 근대화 과정이라는 것도 서양 근대성의 확장침투의 맥락에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식민지의 문제가 근대성 논의와 결합하게 된다. 요컨대 비서양 지역에서의 근대성이 담고 있는 위기는 그러한 담론 속에 수반된 차이의 계서제적 체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근대성이 공간적 차이생산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래에서 논의되는 근대성에 대한 우리의 논의의 맥락이.

근대 이전 사회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대부분 대면적facible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이 위치한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비대면적인 세계는 체험 영역 외부에 있었다. 그것은 비합리성의 무대이고 신비의 영역이며 초월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발전에 의해 추동된 일련의 변화는 삶의 체험 공간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킨다.[각주:9] 그것은 비대면적인 세계가 사람들의 생활영역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베버Max Weber의 이른바 탈주술화 명제는 이러한 사실을 시사한다. 나아가 근대성은 비대면적 세계가 인간 상호관계의 지배적 국면으로 전환되는 일련의 기술사회적 변화와 관련된다. 그러한 징후는 과거에는 자명하게 타자적 공간으로 여겼던 확장된 영역을 어떻게 체험 가능한 영역으로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근대 사상사에서 다방면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각주:10] 근대와 근대 이전 사이의 인물로서 근대적 지평을 여는 계기적 사건의 한 주역인 마르틴 루터는 타자적 존재로 여겨지던 신, 즉 비대면적 실체(부재, absence)인 신을 인간 경험 속으로 내재화(현전, presence)함으로써, 신앙의 비대면성을 신과 인간간의 관계의 상호성의 범주로 전환시킨 계기적 인물에 속한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타자성, 즉 신의 비대면성을 인간 경험 내부로 포섭하여 사고할 수 없었던 계몽주의적 지식인들은 탈신학적 지식 구성을 통해 근대적 정체성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이러한 근대적 시대 인식의 기술사회학적 배경에는, 과거에는 타자적 공간이던 비유럽적인 확장된 세계로의 탐험을 가능하게 했던 망원경과 나침반의 발명이나, 미시물리학적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해 준 현미경의 발명 등, 과학기술상의 혁신이 있다. 또 금속인쇄술을 통해 타자적 세계였던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공식적 지식 내부로 포섭됨으로써 근대성이 인간 정체성 구성의 지배 원리로 작동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근대성은 이원적 특성을 갖는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이러한 이원적 특성을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으로 규정한 바,[각주:11] 이 두 길항적 요소의 공존은 효율성(기술주의)과 해방의 에토스간의 갈등으로 표상되는 근대성의 내적 위기구조를 보여 준다. 이러한 근대적 담론 공간 내에서는 신앙적 인식도 재구성되는 바, 가령 근대사회에서의 신은 한편으로는 기술적 효율성의 수호신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 에토스의 상징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러한 신 이해의 갈등은 근대의 신학적 신앙적 분화의 계기로 작용한다.

여기서 이 두 요소 가운데, 근대화의 주도적 국면을 선점한 것은 대체로 효율성 원리와 연관된 제도화의 영역이다.[각주:12] 이것은 반대로, 근대성에 대한 비판담론이 해방의 에토스를 지향하는 담론 형태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양상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근대적 효율성의 제도화 영역 내부에서 해방의 에토스를 통한 대안적 제도화를 추구하는 유형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적 제도화 자체를 효율성의 영역이라고 보면서, 그것에 의해 식민화된colonialized 외부의 영역, 즉 삶의 비제도적 영역인 일상성의 영역을 복권시킴으로써 해방을 인간 삶의 구성원리로 대체하려는 유형이다. 전자가 해방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라고 한다면, 후자는 해방의 탈계몽주의적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각주:13] 근대성 내부에서 발전한 비판담론의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은 권력의 지배 유형과 관련하여 어떤 경우엔 전자가 또 어떤 경우엔 후자가 비판담론 지형학을 주도해 왔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이제까지 근대사회의 전개에서 전자가 비판담론의 지배적 위상을 확보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근대성의 제도적 관철 과정이 국민국가의 형성과 깊이 연루되어 왔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국민국가nationstate란 사회적 자원[각주:14]의 배분을 둘러싼 다중적 행위자들의 국제적 투쟁 과정에서 그 타협의 지점으로 형성된 영토적 분계선(경계boundary)을 따라 내적인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외적인 배타성을 고도화함으로써 대두하게된 근대적 정치체로서, 다른 국가 형태들을 압도하여 유일한 근대 국가적 대안으로 자리잡은 정치적 제도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적 결속체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은 영토 내의 가용자원에 대한 총동원 메커니즘을 발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민족/국민nation이라는 허구적인 가상의 공동체가 국가와 결합된 정치제도적 형태를 발전시키게 되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두 가지를 주지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대외적으로, 국민국가간의 총동원 경쟁은 자원의 불균등한 국제적 배분 구조를 생산하고 또 역으로 국제적 구조에 의해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내적으로, 국민국가는 영토 내의 차이를 계서화하는 포섭과 배제의 장치를 정교화함으로써 불균등한 배분구조를 생산/재생산하는 모순구조를 은폐하였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요컨대 국민국가적 담론은 국경boundary(변경지대frontier-zone가 아니라)을 통해[각주:15] 관계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특권과 비특권을 가르며, 우리와 -우리를 경계짓게 하며, 그러한 차등화된 차이의 요소간의 불균등한 절합articulation을 통하여 배제와 포섭의 사회적 장치가 중층화된 체제를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의 작동이 경계화boundarization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경계화를 토대로 포섭과 배제의 구원론적 담론을 확산시키려 했던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근대적 주류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연합체적 교회의 경계를 국민국가적 경계선에 따라 재설정함(국가교회)으로써,[각주:16] 신앙담론 속에 근대적 경계화를 내포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근대의 주류 교회가 근대적 배제-포섭의 권력 작동 메커니즘을 실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근대사회는 체제를 재생산하는 공식적 지식이 무수한 경계화를 통한 이른바 분과적 담론으로 형성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이때 경계의 외부는 (권력 통합의 공간이 아니라) 배제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근대성의 관철 과정에 대한 비판의 담론, 즉 해방담론은 바로 이러한 경계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성의 경계짓기메커니즘이 한국에서 관철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위기에 대해 민중신학적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세대론적 시각에서 살펴보자.

 

3

 

우선 주지할 것은, 차이의 계서제적 체계화(차이의 차등화)의 어느 지점에서 경계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차이의 차등화를 하나의 권력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역동적 과정에 일정한 제동 장치가 경계화인 것이다. 요컨대 전자가 사선화된 피라미드 구조라면, 후자는 그것을 계단식 피라미드 구조로 재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경계선 내부는 일정한 약호를 공유하게 되며, 이 약호들의 흐름을,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코드화이다. 그리고 미소 경계의 코드화를 통합하는 거대 경계[각주:17]의 그것을 초코드화라고 한다. 여기서 사회의 대주체가 구성된다. 또한 경계 내의 사람들은 이 대주체의 호명에 응답함으로써, 소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진다. 한데, 코드화에 대한 저항의 선들이 존재하는데, 들뢰즈는 그것을 탈코드화라고 부른다.

이상의 약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차이의 계서제적 경계화의 관점에서 묻는다는 것이, 코드화, 초코드화, 탈코드화의 역동적 과정을 전제하는 물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달리 말하면, ‘경계화자체는 지배담론의 의미화 과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저항담론이 이것에 개입하는 과정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근대화에 대한 지배담론과 비판담론의 투쟁의 맥락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근대화 과정과 맞물려 등장한 신학적 비판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1) 1960~7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제1세대 민중신학

한국의 제3공화국 군부정권은 1960년대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제분업질서에 편승함으로써, 산업적 근대화의 도정에 들어선다. 요컨대,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로 본격 편입되는 과정으로 이 시기 한국의 근대화에 관해 논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인구의 전통적 분류틀이 심하게 교란재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대대적인 이농 현상이 일어났고, 이는 대량의 저임금 노동자와 과잉의 산업예비군인 대규모의 도시한계민urban marginals 계층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말,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비약적 증대로 인해 저임금노동력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게됨에 따라, 노동시장의 구조변화가 불가피해졌다.[각주:18] 이제 저임금 체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통제가 필요해졌던 것이다. 이후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화는 병영적인 노동통제형 사회체계의 구축과 맞물리며 전개된다. 여기에 한국전쟁의 부정적 유제인 반공주의가 병적으로 강화되어 사회 통제의 기재로 활용된다.

한편 이 시기는 사회적 가치의 아노미 상태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반혁명적 군사쿠데타인 이른바 ‘5.16’은 극도의 억압적 권위주의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민주적 의제 제기의 정상적 양식을 교란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또한 급속하게 전개된 광범위한 이농 현상은 전통적인 일상적 질서, 규범의 준거를 일시에 무너뜨리며, 이들 이농민을 흡수한 돌진적 산업화의 도시적 메커니즘은 극단적인 효율성주의’, 성공 지상주의로 대중의 공동화된 일상의 가치 속으로 침투하였다. 또한 개신교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상징되는 종교의 사회적 개입 방식은 대중의 성공 욕망을 한층 부추기는 신앙적 규준체계를 내면화시켰다. 여기에 한국 전쟁 이후 내재화된 반공적 분단의식이 군사정권에 의해 과잉사회화됨으로써[각주:19] 비판적 저항이론의 싹이 자라날 지반을 극도로 위축시켰다.

한데, 병영적인 노동통제 방식이 기승을 부리고, 가치의 아노미 상황을 퇴행적으로 재구성해나가는 사회적 장치가 1970년대 한국 근대화의 지배적인 흐름을 형성하였을지라도,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해방적 민중연합에 대한 기대가 싹트기도 전에, ‘전태일 사건으로 상징되는 민중적 저항의 단초가 주류 담론의 역사를 향해 철퇴를 날렸다는 점이다. 전태일 사건의 사회적 파급효과에서 두드러진 점의 하나는 지식사회 일각에서 대두한 이른바 민중론의 등장이다. 민중문학, 민중역사학, 민중사회학, 민중경제학 등과 더불어 민중신학의 등장은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적 민중신학(1세대 민중신학)은 한국적 근대화의 파행성, 반민중성에 대한 신학적 자기반성이며, (억압 현실에 대한) 폭로의 신앙 담론화(증언의 신학)를 부르짖으며 발생 전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비판 담론들이 그렇듯이 민중신학도 비판을 이론화하는 것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다.[각주:20] 그것은 비판이론이 부재하던 당시의 이념 지형에 대한 민중신학자/론자들의 소극적/부정적 태도와 관련된다. 따라서 인과적인 거대한 서사narrative 구조를 갖는 지배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서사적 대응전략을 구상하기보다는, 에피소드적 테러리즘[각주:21]으로 지배담론을 교란시키려는 비판 전략이 동시대 민중신학 담론의 특징을 이루었다. 특히 거대한 신학적/신앙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던 신에 관한 지배적 이미지가 현재의 권위적 사회체제와 구조적 등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문제제기되었고,[각주:22] 이러한 비판 담론은 지배 담론의 하느님 이미지에 내포되어 있는 경계화[각주:23]를 교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요컨대 1970년대적 시대성을 반영하는 민중신학은 일견 지배담론에 대한 탈계몽주의적인 해체성을 내포하는 듯이 보인다. [각주:24]하지만 이것은 비판담론의 이론적 대안을 찾지 못하던 한국의 1970년대지식 형성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사실 이 시대 민중신학의 보다 중요한 문제의식은 민주 대 독재라는 바리케이드에 따라 형성된 계몽주의적 경계화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촉구하는 데 초점이 있다.[각주:25] 그것은 근대성에 기초한 제도화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한국 근대화 과정이 억압적/반민중적으로 전개된 것에 대한 항의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요컨대 지배적 경계화를 지양한 해방적 재경계화re-boundarization에 대한 지향이 암묵적으로(왜냐하면 대안적 이론의 부재 탓에)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2) 198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제2세대 민중신학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적어도 1970년대에는, 사회통합의 기재로서 분명한 효과를 지녔다. 게다가 군부권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댄 반공주의는 사회적 총동원 체제를 가능케 했던 핵심적 요소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1980년대는 상황이 달랐다. 이미 1970년대 말에 이르면, 그러한 통치 기재는 효력을 크게 상실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독재자의 피살로 나타났다. 1980(군부강경파로 구성된) 신군부에 의해 주도된 불법적 권력 장악은, 그들이 비록 국가안보의 유일한 지킴이를 자임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자해적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민중연대를 억제하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비상계엄이라는 강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광주에서의 유혈진압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1980년 광주전태일 사건에 이어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중요한 계기적 사건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병영적 사회통제 체계가 정상적인 통치행위로는 더 이상 불가능할 만큼, 군부 강경 세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박탈했다. ‘안보-반공주의-발전국가라는 정권의 대중동원 기재는 더 이상의 담론적 효력은 상실한 것이다. 그것은 민중세력의 반정부적 대중동원의 입지가 결정적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80년 광주의 또 하나의 담론적 효과는 미국에 대한 환상적 우방 의식으로부터 민중세력을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저항의 이념적 전선은 반독재에서 반파시즘으로,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로 재구성될 수 있었다.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담론이 저항담론과 결합됨으로써, 민중세력에게 대안적 비판이론이 가능한 지평을 선사해주었다.

한편,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 시기에 산업화의 비중이 점차 경공업에서 대단지 중공업으로 전환되면서 노동구조상의 중대한 변화가 뒤따랐다는 점이다. 이는 노동자의 결속력의 확대를 가져왔고, 집단적 정체성의 재구성을 야기했다. 여기에 하방 지식인들에 의해 촉발된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의 학습 운동을 통해 노동자적 계급의식이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이것은 저항담론의 계급론적 재코드화를 열렬하게 부추기는 정치적 조건이 되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1980년대적비판이론과 대화하며 저항의 신학적 담론 지평으로의 재구축을 모색한다. 이로써 신학의 유물론적 재해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이른바 제2세대 민중신학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모색의 특징은, ‘바람의 이론화에 소극적이던 지난 세대의 문제틀과는 달리, 대안적 체제를 명시적으로 지향하는 사회적 실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며, 그러한 신앙적 실천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특수성의 해명이 그리스도인 정체성 논의의 핵을 이루게 된다.[각주:26] 요컨대 이 시대 민중신학은 해방 지향적인 재경계화를 신학의 주제로 전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배담론의 부르주아적 당파성에 대해서 해방적 제도화를 지향하는 민중적 당파성을 통한 경계의 재설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2세대 민중신학은, 언표상으로는 제1세대 민중신학의 논리틀을 신중하게 보완 계승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인식틀을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1980년대 위기성에 대한 비판담론 지형학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적 규정성에 대한 신중한 인식과, 제국주의적 개입에 대한 새삼스런 문제의식의 고조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반독재라는 1970년대적 비판담론의 순진성을 자기비판하게 했고, 반제국주의적이고 반파시스트적 논의를 비판담론의 맥락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경제학적 비판담론의 폭발을 통해 이론적으로 구현된다. 이런 맥락과 궤를 같이하면서 민중신학의 제2세대적 경향을 변혁의 신학’, ‘운동의 신학이라고 부르게 됐고, 신학과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과의 통합적 사고를 이론적으로 본격화했던 탐색이 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립됨으로서, 신학사적으로 독창적인 과도한 탈신학적 실험에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텍스트만을 평이하게 비교하면 그 차이의 중대성 때문에, 민중신학의 두 경향간의 과도한 불연속성에 주목할 수도 있다.[각주:27] 물론 이러한 해석은 텍스트 외부를 고려하지 못한 담론 연구 방법의 소산일 뿐이다. 담론과 담론 외부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계보학적 관점은 양자간의 표상적, 인식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역사적 연계성을 읽어내는 데 유용한 도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80년대 한국 비판담론의 변화된 지형학을 신중하게 고려하던 민중신학 내부에서 제2세대적 담론이 분출하였다는 점, 그리하여 (서구에서 전개된 신학 사상사와의 연관성에서보다는) 한국의 동시대적 비판담론들과의 대화를 통해 신학적 비판이론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 바로 이 사실이 두 세대 간의 계보학적 연계성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1970년대와 1980년대적 민중신학 담론은 모두 해방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를 실천전략으로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민중신학에 대한 또 다른 소수자적 신학의 도전, 예컨대 여성신학의 문제제기는 계몽주의적 프로젝트의 필연적인 한계지점이기도 했다. 다만 두 국면적 시대가, 뚜렷한 바리케이드(독재 대 민주; 예속적 파시즘 대 민중민족주의)에 의해 사회가 양분되고 있다는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지배적이어서 이러한 문제제기가 비판 진영 내에서 이렇다 할 파급력을 지니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경로는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관련하여 초래된 위기를 문제시하는 동시대의 비판담론들과 대화하면서 신학하기를 수행한다. 이것은 전통적 신학하기의 방법인, 신학사적 주류와의 대화를 통한 이론의 자기 전개와는 전혀 다른, 실천 지향적 문제설정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서구신학에 대한 민중신학의 지나친 단순화와 과도한 부정적 평가는 신학사적 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몰이해 탓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위기성을 전면화하기 위한 반신학적탈신학적 전략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1990년대 이후의 한국의 근대화와 제3세대 민중신학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위기의식은 급변하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 담론, 일면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외삽적 유입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비판담론에까지 깊게 드리워진 자폐적 자아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적 반성의 요구가 그 합리적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주:28]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담론은 사회의 배제-박탈의 메커니즘이 단순하게 양분화되기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구획되어 있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회적 고난의 과잉 담지자로서의 피지배 대중 또한 바리케이드 저편의 통일체적 집단이 아니라 탈중심화된 다양한 소수자들minorities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해방이라는 것은 더 이상 바리케이드 저편의 사람들로 지배자들을 대체하자는 단순하고 거대한 기획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게 된다. 이러한 기획은 저항담론도 다수자와 소수자의 경계짓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오늘날의 성찰적 반성reflexibility을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찰적 비판담론이 대안적인 새로운 해방 논의로서 요청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유력한 하나의 시도가 계급에서 권력으로 논점을 확장이전하는 것으로 모색되고 있다. 요컨대 권력 현상은 사회의 물적 정신적 자원을 독차지하려는 한 세력과 빼앗기고 있는 다른 세력 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안팎에서 촘촘한 그물망처럼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문제라고 본다면, 탈권력의 실천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나아가 신학적으로 이론화할 것인가,를 문제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이에 관한 신학적 논의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한편 이러한 변화된 위기의식은 위기구조의 변동 양상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의 위기성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우리는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공유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을 지구화globalization라고 부르고자 한다.[각주:29] 나는 지구화를 급진화된 근대성redicalized modernity의 맥락에서 보는 기든스의 시각에 동조한다.[각주:30] 이것은 근대적 제도화의 추동 요소였던 기술적 효율성이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하여 부재absence의 영역인 비대면적 공간을 극적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요컨대 사회적제도적 관계의 영역이 거시적으로뿐 아니라 미시세계로까지 확대됨으로써 나타난 일련의 사회적심리적인 권력 재구성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권력의 사회적 통합 능력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근대의 전통적 경계인 국경에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근대사회에서 특징적인 것은 권력관계의 핵심적 영역화가 국경을 통해 관철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각주:31] 근대사회가 시장정치긴장 속의 조합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면, 바로 이 조합의 지리적인 최적정선이 역사적으로 국경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이 효율적 합리성을 지향한다면, ‘정치는 동의와 합의에 의한 합리성을 지향하며, 그런 점에서 전자가 결과를 중시한다면, 후자는 과정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긴장적 요소가 어떻게 조합을 이루어 가느냐의 과정에서 근대사회의 초고속적 발전과 민주주의적 이상이 결합된 제도들이 탄생하게 된다. 가령, 서유럽 지역에서 19세기경의 가속화된 자본의 국제화와 방임주의적 자유의 이상에 기반하여 형성된 국가적 제도화가 19세기말에 이르면 국제적으로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와 국내적으로 민주적 통제를 동시적으로 지향하는 국가적 제도화가 모색되어, 20세기 중반 브레튼우즈 체제의 등장과 더불어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전자의 시대가 시장정치간의 조합이 보다 긴장적 결합을 하고 있다면, 자본주의의 황금기라는 후자의 시대는 보다 긴장이 완화된 결합의 양상을 띤다. 한편 1970년대에 이르면 또 다시 국제적 자본의 유동성을 통제하는 데 국가의 정치적 제도들이 비효과적인 행위자로 전락하게 되고, WTO 체제의 성립과 UR 협약으로 특징지어지는 1990년대에 오면 정치는 지구화된 시장의 하녀가 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 이른다.[각주:32]

이상과 같이 이제까지의 근대사회는 국경이라는 경계를 중심으로 권력의 영역화가 펼쳐졌으며, 그런 점에서 권력에 대한 비판담론 역시 국경을 중심으로 하여 영역화된 권력의 지형도를 폭로하는 양상으로 구성될 때 적절한 이론화를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화 시대에 적절한 비판담론은 공간적으로 재구성된 지형학을 담아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근대사회를 무대로 하여 펼쳐진 이제까지의 주류적 담론과 비판담론이 국경적 경계화에 과잉결정된 지형학에 몰두해온 결과 식민화되었던 영역, 그러한 범주들을 복권시키는 과정을 통해 모색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1980년대 비판담론의 특징을 이루었던 정치경제학에 대해서 문화정치학으로 재구성하려는 방식으로 시도한 바 있다.[각주:33] 문화정치학적 지형학이란 문화와 정치를 분화된 현상으로 취급해 왔던 기존의 논의 구조로는 더 이상 변화된 오늘날의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문제인식에서 시작한다. 권력이 거시적 미시적 영역으로 그 통합의 범위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대안적 제도의 문제 또한 국가적 차원의 민주주의 논의(가령, ‘민주냐 독재냐?’ 같은)에서 지구적 범주의 거시적 지형으로 차원을 확대해야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지형으로도 심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시정치학과 미시적치학(일상생활의 정치학; 정체성의 정치학)의 결합을 통해서 해방의 정치학을 구성하려는 이론적 작업을 문화정치학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정치학의 실천 무대는 물리적 제도의 영역(정치제도적 영역)뿐 아니라 담론적 영역을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여기서 특히 후자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권력 지형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지구화된 자본의 중요한 특징을 비실물적’/기호적 유동성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34]

한편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구화 현상이 근대(국가)적 공간 분할을 해체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구적 차원의 평준화를 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제까지의 변동 양상은 불평등이 훨씬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세계는 디지털 자본의 광폭성을 제어할 수단을 거의 상실한, 무장해제된 국가들의 단순 집합체로 여겨질 정도다. 이제 디지털 자본은 핵 못지않은 위험사회의 핵심 요소임을 드러내고 있지만, 인류는 그것을 제어할 수단을 아직 발명하지 못했다. 그 이데올로기적인 첨병으로 포교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세계 각국을 누비면서 민주주의적 제도를 박멸하고 있고, 이렇게 해서 자유를 향한 민중운동의 열매들은 하나둘씩 오물처리장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자원의 불균등 분배는 극도로 심화되고 있으며, 배제-박탈의 메커니즘은 초강력 태풍으로 무력한 고난의 담지자들을 휩쓸고 있다.[각주:35] 다만, 최근의 지구화 경로는 전통적으로 경계화된 영역들을, 특히 국경으로 실현되는 국가적/민족적 영역의 특권적 위상을 격하시키면서/해체하면서 또 다른 영역화를 야기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권력의 배제-박탈 메커니즘이 훨씬 광대하고 정교하게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재영역화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거시정치학과 미시정치학의 결합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제3세대는 이러한 변화된 1990년대 위기에 대한 담론지형을 맥락으로 하여 출발한다. 우선 그것은 어떻게 비판과 성찰을 결합할 수 있느냐의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판신학의 대안담론이 또 다른 배제-박탈의 영역화를 담고 있는 한, 권력의 모사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학 담론에서 권력 추구의 흔적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민중신학은 신학담론의 타자성논의에 대한 비판을 전면화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우선 신의 타자성이 있다. 이것은 실제로는 인식주체인 우리로부터 신을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신으로부터 우리를 타자화하는 언술 작용을 갖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인간의 주체적인 사유 가능성이 억제된다. 이러한 담론은 인간 중심주의의 왜곡된 발현태인 파시즘을 비판하는 데 용이한 담론적 수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성숙한 사유의 주체로서 대우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유형의 파시즘적 억압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자신의 운명을 위임하도록 함으로써, 신의 대리자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권력, 그리고 성직자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신의 타자성 담론은 그리스도교 전통, 그러한 제도화를 비판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비성찰적이다. 한편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타자성주장도 정통주의의 신학적 담론에 함축되어 있다. 가령 교회 안과 밖의 구분을 타자성 담론을 통해 실현함으로써 교회는 배제주의의 실천 무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교회가 현실적인 권력의 실체로 기능할 수 있는 부문에서 이러한 담론은 교회로 하여금 억압의 메커니즘을 수행하게 한다. 또한 교회가 세속적인 경계짓기와 절합되어 있는 경우에, 가령 국가의 경계선과 교회의 경계선이 절합한 형태인 국가교회 담론의 경우, 교회의 신학은 제국주의의 종교적 표현 이외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비인간적 실체에 대한 타자성주장이 있다. 이러한 신학적 담론이, 비인간적 존재로 여겼던 노예 혹은 인종 착취에서부터, 동식물을 포함한 생태환경 자체에 대한 정복주의적 담론과 절합되어 역사 속에 발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현시대성이 우리에게 주는 성찰적 요소는 이와 같은 무수한 경계짓기에 대한 해체성을 신학 속에 포괄하도록 요청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우리라는 그리스도인적 정체성의 해체를 수반한다. 우리는 타자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의 내재적 상관성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며, 그 관계의 형성 과정 속에서 내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우리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변형된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의 본질은 인간 존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령 신의 실천은 역사 속에 개입하는 모습에서, 즉 인간 세계의 구체성과 조우하는 데서 발현한다는 주장과 상응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중심주의를 해체함으로써 (타자적 존재가 아닌, 인간과의 상호성 속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실천과 연관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담론에서 경계짓기를 강화시키는 요소의 폭력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교회 담론 전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수행되는데, 이 과정은 동시에 탈경계화를 지향하는 교회론의 재구성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교회와 그 외부인 사회의 각 영역, 가령 직장가족국가민족개인지역사회 등과 연결된 담론들과 어떻게 절합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여기서 절합한다고 함은 상호간의 차이를 인정하되, 서로가 상대방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는 관계론적 사유를 전제한다. 이것은 교회의 제도나, 예전 형식, 담론의 내용, 그리고 사회적 활동 방식 등에 있어서 수많은 재점검을 요청한다. 특히 최근 IMF 관리체제를 경유하면서 WTO 체제의 글로벌 자본주의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한국의 현재와 예상되는 앞날은 신빈곤의 문제가 우리에게 사회적 현안이자 개인적이기도 한 문제로서 다가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가 교회 외부와의 담론 절합에 있어 두드러진 현안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국가복지라는 문제설정이 신학과 교회의 과제로서 우리에게 부여되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과연 이러한 문제를 담아내기에 적합한 신학적 담론구조를 갖고 있는가? 3세대 민중신학은 이 점에서 민중신학의 핵심 요소인 사건개념을 주목하였다.[각주:36] 이것은 존재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짓는 하이데거-불트만 류의 실존주의적 사유를 사회역사학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여기에는 신과 나/우리, 세계와 나/우리간의 시공간적인 연결망을 포착하려는 적극적인 신학적 사유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비대면성의 영역을 인간 경험의 영역으로 내재화하려는 근대적 문제설정을 이론화하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 준.

그런데 민중신학은 사건을 민중사건의 의미에서 재규정한다. 즉 사건에 민중이라는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는 규제적 조건이 개입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관계 속에서 존재의 실재성이 드러나지만, 그 모든 관계 가운데 그리스도교적 관계의 정당성은 (교리화된 신조의 내면화나 예전에의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중성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은 계급이나 신분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보다 포괄적이고 다의적이다. 더욱이 민중신학에서 이 개념은 존재 내면의 파시스트적 지향에 대한 것도 포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민중을 권력 해체성의 관점에서 본다. 즉 그물망처럼 구조화된 권력 네트워크의 시공간에서 민중사건은 그것을 해체하려는 실천 지향을 함의한다.[각주:37] 이러한 지향은 영원회귀적이면서 미래전망적 차원을 갖는 이상적 담론 지평인 하느님 나라를 현재성 속에 투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라는 신앙적 언표는 그때마다의 시공간에 권력 해체를 지향하는 기대의 최대치로서 구체화되는, 과정론적 진리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은 자아(자아 중심주의)에 대한 해체적 실천을 수반한다. 한 시인이 세기말적 시대의 위기성을 가슴아파하면서 자기로부터의 퇴행을 의미하는, 달팽이가 되고자 하노라고 노래한 것처럼,[각주:38] 신은 인간으로 퇴행함으로써 메시아적 구원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이것이 민중사건이다. 신조차도 자신을, 자신의 권력을 해체하면서 사건 속에 개입해 들어온 것이다(하방품성론). 여기에는 두 가지 함의가 들어 있다. 관계의 외부에서는 사건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아의 구축을 전제하는 한, 사건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자아의 권력 욕망에 대한 해체는 역사 속에 구조화된 악마성인 바벨탑주의, 즉 권력 욕망으로부터의 ()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의 역사적 물질적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해서 민중신학이 제시한 개념이 바로 ()이다. 비경합성과 탈배제주의적이어야 하는 사회의 공공성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민중신학적 실천 규범으로서의 문제설정인 것이다. 이것의 구체적 실현 형태는, 가령 1998년의 경우 복지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표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중신학적 담론은 복지에로 환원되는 것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서구 사회의 경우처럼 또 다른 유형의 배제주의를 낳는 권력 장치로 구현될 가능성에 대해 의 지향은 단호하게 부정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단과 공의 변증법적 상호성 속에서 민중신학적인 사건은 끊임없이 역사와 만나, 현전presence하였다가 부재absence하고, 부재하였다가 다시 현전함으로써 인카네이트하는incarnating 것이다.[각주:39] 이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은 급변하는 위기의 시대성에 대응하는 성찰적 신학 담론을 함축하고 있다. 바로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문제설정을 3세대적 민중신학이라고 규정한다.

 

4

 

이상에서 본 것처럼,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관점은 신학 담론 내에서 시대성을 문제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담론적 실천의 구상물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 담론 밖으로 나가 시대의 위기성을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위기에 대한 비판담론들과의 절합을 통해 신학하기를 실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담론의 실천성을 획득하려는 신학적 운동이 바로 민중신학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민중신학의 지향에서 신학적 정체성의 위기를 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신학의 위기가 아니라 민중신학을 보는 정통신학적 사고의 선입견이 내포한 위기일 뿐이다. 오히려 세대론적 민중신학은 신학하기의 최우선의 과제를 실천이론의 구성에 두고 있는 신학의 대안적 문제설정이다. 한편, 반대로 어떤 이는 민중신학의 신학적 담론에서 여전히 제도적 대안이 부재함에 대해 비평한다. 그러나 모든 민중신학이 제도적 실천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계보, 그것의 실천이론적 장점은 시대의 주류적 담론의 균열을 찾아내고, 그러한 지배적 담론으로부터의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그것에 의해 은폐된 시대의 위기를 폭로하는 데 있다. 물론 제도적 실천 단위들과의 담론절합을 통해 비판적 연결망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비판 세력 내부의 자아 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을 유보하면서, 타자를 향한 공세적인 담론 구성에만 몰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최근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대안적 담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탈식민주의론의 수용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동일자와 타자의 존재론적 구분을 전제로 비판담론을 구성할 우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 민족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에 의해 기나긴 세월을 착취당하며 살아왔지만, 동시에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서 가혹한 착취를 수행하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자의 얼굴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각주:40] 어떠한 이유로도 비판의 유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오히려 비판을 극한까지 수행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를 타자화하고 배제할 기회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적 전략을 진정 극복할 수 있으며, 자기 내면의 제국주의적 욕망으로부터도 구원받을 계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편, 탈구조주의적 해체주의를 단순히 수용하는 것도 충분한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저항의 계열화 자체를 봉쇄시킨다. 차이의 봉합으로서의 연대는 여전히 유효하다. 단 여기서 연대의 제도화는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왜냐면, 그것은 차이를 또 다시 차등화의 피라미드 속으로 환원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 그런 점에서 차이의 정치와 연대의 정치 간의 변증법적 절합이 요청된다.

민중신학의 제3세대는 성찰을 요청하는 시대 인식을 공유하며 자기비판을 수행함으로써 이러한 자아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 차이의 타자화를 비판하는 이러한 담론 전략은 비판을 분쇄시키는 해체론적 미시담론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비판 내부의 패권주의를 견제할 수 있으며, 비판담론간의 절합을 위한 인식론적 교두보를 제공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변화의 태풍을 몰고 온 강력한 민중연합적 실체들은 기획의 결과라기보다는 우연적 계기에 의해 출현하곤 했다. 한국 역사에서 1960년과 1987년의 민중연합도 그러했다. 당시 민중연합을 기획하려 했던 조직화된 저항세력이 부재했던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것은 강한 고리의 정체성 형성에만 몰두했던 비판담론 진영의 패권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강한 정체성은 사회적 존재들의 항구적인 지형학을 그리려 한다.[각주:41] 이러한 불변의 신화는 저항의 연결망을 형성하기 위해, 의사소통적 담론절합의 전략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는 패권주의적 연합을 추구한다. 결국 각기 자기 중심으로 그려냈던 거대이론적 세계관은 민중연합을 형성하기보다는 분쇄하는 데 더욱 기능적이었다. 또한 그러한 전략을 통해 민중연합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경우에도, 패권주의를 모방한 민중연합은 또 다른 패권적 지배연합으로 돌변하곤 했다. 그러므로 제3세대 민중신학의 비판담론이 패권주의적 정체성을 해체하려는 전략은 의사소통적 저항의 연결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담론적 실천에 신학적 언어로서 개입한다. 즉 민중신학은 권력 해체를 지향하는 문명비판의 언어로 주류적 담론의 균열을 폭로하는 담론적/이데올로기적 실천인 것이다.

 

  1. 민중신학을 이렇게 이론 형성적 시각에 한정하지 않고 이와 같이 폭넓은 정의를 내린 것은 ‘한국민중신학회’의 정관에 따른 것이다. 즉 한국민중신학회 정관을 보면, “‘신학’ 대학의 교수, 민중신학 연구자, 민중선교 지도자, 민중목회자”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본문으로]
  2. ‘실재’reality는 비가시적 영역, 즉 체험 외부의 영역이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실재를 가시화하는, 즉 체험화/내재화하는 다양한 기술technics들을 개발해 왔는데, 이론화는 그러한 체험 외부의 영역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기술의 한 차원이다. 이것은 특히 시대별로 (연속/불연속적으로) 발전해 온 학리적인 논리성과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론화는 어떤 역사적 현상을 재현하게 하는, 인류가 발견해낸 학리적(學理的) 재현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이론화 자체를 실재로 오인하는 것(이론 지상주의)과 아울러, 이론화의 실재에 대한 재현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는 것(반지성주의). 어떤 역사적 현상에 대한 이론화는 그것을 성찰 가능한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과정이며, 이 작업의 실천적 의의는 특정 이론화 작업이 그 현상에 대한 다른 이론화들과 재현의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본문으로]
  3. 여기서 ‘이전’이라 함은 시간적 선후의 개념이 아니라, 인식론적 선후의 개념이다. [본문으로]
  4. 최형묵,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 《신학사상》 69(1990 여름) 참조. [본문으로]
  5.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전개된 신학 사상사적 조류들을 한국에서 적용하는 것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일부 강단 학자들의 경향과는 그 입지점을 달리한다. [본문으로]
  6. 첫 번째 전환기였던 이른바 박정희 시대, 두 번째 전환기인 5・6공 시대, 그리고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과 WTO 체제의 도래로 상징되는 현재의 시대가 그것이다. 이렇게 분류하는 근거는, 한국 사회의 위기구조에 대한 권력의 통제 방식과 이에 대응하는 비판담론의 유형이 각 국면적 시대별로 상이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본문으로]
  7.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참조. [본문으로]
  8. 이렇게 일반론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근대화’라는 것 자체가 국지적 맥락성을 강화하는 조건인 동시에(통제 메커니즘의 진화에 의해), 세계적 맥락 속으로 진입하는 계기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근대화 과정이란 세계적 근대화 과정의 한 변별적(차이와 연속성을 함축하는) 발현 형태로서 세계와 연계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와 연계된 비판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은 ‘한국적’ 맥락을 갖는 한국적 신학인 동시에, 한국적 신학의 맥락을 한반도 남쪽에 한정된 폐쇄적 공간 신학으로 단정할 수 없다(토착화신학이나 종교신학은 한국적 특성을 ‘공간적 국지성’과 ‘시간적 과거’라는 애매한 전제에 기초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 아닌 규정’은 이론화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한국적 특성에 관한 성찰적 문제제기로 박성준, 〈민중신학에 있어 한국적이란?―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 《민중신학》 창간호(1995)를 참조하라. 이 글은 한국민중신학회 제2차 정기총회(1994)의 발제 원고를 보완한 것인데, 이 발제 이후 나는 이 글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제기의 탁월성에 관해 이러한 취지로 논평한 바 있다. 김진호, 〈박성준의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을 읽고〉, 《숨》 11(1994.12-1995.1 합본호) 참조. [본문으로]
  9. 기든스는 이러한 근대성의 특징을 ‘장소귀속성 탈피’disembedding라고 명명한다. 그에 의하면,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시간이 표준화되자, 장소place(사회적 활동의 물리적 장)의 표준화가 야기되며, 이것은 장소로부터 공간space의 분리를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시공간 분리로 인한 장소귀속성 탈피는 “사회관계들을 지역적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끄집어 내어’ 무한한 시간-공간 대에 걸쳐서 재구성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35). Giddens, 《포스트모더니티》 (서울: 민영사, 1991), 35~42쪽. [본문으로]
  10.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를, 사적소유의 본질을 노동의 시각에서 봄으로써, 인간을 대상화하고 인간의 외부에서만 존재하는 화폐 및 상업체계에 의해 사적소유를 해석해왔던 종래의 시각을 기각하고 인간 내재적 요인과 사적소유를 연계시킨 계기적 인물이라는 데 있다고 보았다. K. Marx, 《경제학 철학 수고》 (서울: 이론과 실천, 1987)의 세 번째 초고 참조. 또한 칸트는 근대과학에 의해 확대된 체험공간을 내재화하여 주관의 내부로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근대적 철학의 효시가 된다. 애덤 스미스나 칸트에 관한 이상의 견해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서울: 푸른 숲, 1997) 제2장 참조. [본문으로]
  11. 전성우, 〈베버 사회학의 이론적 기본구도. 합리화론을 중심으로〉, 《막스 베버의 역사사회학 연구》 (서울: 사회비평사, 1996). [본문으로]
  12. 기든스는 근대성의 제도적 차원을 자본주의(경쟁적인 노동과 상품시장 안에서의 자본축적), 감시체제(정보에 대한 통제와 사회적 관리), 산업주의(자연의 변형; ‘인위적 환경’의 발달), 군사력(전쟁의 산업화와 관련된 폭력수단의 통제) 등, 네 요소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한다. Giddens, 진덕규 옮김, 《민족국가와 폭력》 (서울: 삼지원, 1991) 참조. ‘제도’에 관하여는 주3) 참조하라. [본문으로]
  13. 한편 이러한 의제를 보다 급진적으로 추구하면 ‘탈근대’의 문제설정이 도출된다. [본문으로]
  14. 나는 여기서 기든스에 따라 사회적 자원을 ‘물질적 자원’과 ‘권위적 자원’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쓴다. [본문으로]
  15. 근대‘적’ 국경인 ‘경계’boundary가 우리 공동체와 타자 사이를 가르는 명료한 분계선으로 특권과 비특권을 구분짓는 한계선을 포괄적으로 은유하고 있다면, 전근대‘적’ 변경지대frontier zone는 타자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들이 서로 만나는 의사소통적 공간으로서의 장소를 포괄적으로 은유할 수 있다. [본문으로]
  16.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많은 교파들의 뿌리는 이러한 국가 차원의 경계화와 상응하고 있음을 주지하자. [본문으로]
  17. 이제까지 우리는 거대경계를 주로 ‘국민국가’의 맥락에서 보아왔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최근의 사회역사적 현상은 지구적 맥락에 주목하게 하였다. [본문으로]
  18. 임혁백, 〈한국 노동정치의 변화와 연속성. 모순의 지연, 심화, 표류〉, 《시장・국가・민주주의―한국 민주화와 정치경제 이론》 (나남, 1994), 378쪽. [본문으로]
  19. 조희연, 《한국의 국가・민주주의・정치변동―보수・자유・진보의 개방적 경쟁을 위하여》 (당대, 1998) 참조. [본문으로]
  20. 한국전쟁 이래 사회주의적 비판담론이 불가능한 이데올로기적 지반 위에서 형성된 한반도 남쪽의 위기성에 대한 인식은, 비판적 이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소극적 태도를 전제하면서, ‘반독재’라는 정치주의적 비판담론으로 수렴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 비판담론은 이론적 성찰보다는 이론 자체에 대한 불신・비판의 기조를 강하게 띠고 있다. 이와 같은 담론적 기조 위에서 1970년 이른바 ‘전태일 사건’은 이러한 비판담론을 기층대중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려는 일련의 운동을 촉발했는데, 그리하여 각 비판 진영들 사이에서 ‘민중○○학’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민중론들은 대체로 이론적 구축보다는 탈이론화를 전제한 예언자적 구호의 형태를 띠었다. [본문으로]
  21. 이 시대 민중신학의 언술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지배적 담론을 테러리즘적으로 전복시키는 단언적 수사로 가득하다. 가령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라는 민중신학적 언명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로고센트리즘의 비상황성에 대한 민중신학의 도발적인 비판이다. 또 “전태일이 예수다”라는 수사는 예수 부활의 유일회성 비판을 ‘예수 부활 사건의 재현/육화incarnation’로서 제시하는 언어의 테러리즘이다. [본문으로]
  22. 민중신학이 ‘반신반인(半神半人)적 그리스도론’에 대항하면서 예수의 인간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예수의 역사성’ 재건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과 연관된다. [본문으로]
  23. 고대의 신은 도시의 수호신이었다. 이러한 신의 이미지화는 근대에 와서 더욱 정교하게 관철되고 있다. 근대적 신에 관한 지배담론은 근대적 경계화를 수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본문으로]
  24. 1993년 10월 4~5일 충남 도고에서 열렸던 ‘한국신학연구소 창립20주년 기념 국제 신학 심포지엄’에서 테오 순더마이어는 민중신학적 담론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담론의 흔적을 발견해 내고 있다. 당시로선 이러한 해석은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대하여는 T. Sundermeide, 〈삶과 증언으로서의 민중신학〉, 《신학사상》 83(1993 겨울) 참조. [본문으로]
  25. 한국의 근대화는, 주지하듯이,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 의해 추진된 경제개발 정책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이 지향했던 과도한 산업주의는 이미 초기부터 파행적인 불균형 성장을 노정했고, 이로 인한 민의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제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사회적 통제 기제를 폭압적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제재에 기초한 지배 방식은 사회적 저항의 전선을 단순화시켰다. [본문으로]
  26. 가령, 사회변혁운동 대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관계를 ‘보편’ 대 ‘특수’로 범역화하는 논의 등이 그렇다. [본문으로]
  27. 민중신학 안팎의 많은 신학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차이에만 과도하게 주목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저항의 계보학적 연속성이 간과되고 있다. [본문으로]
  28. 최근 ‘일상적 파시즘’ 논제가 크게 유행한 것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이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음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29. 김진호, 〈지구화 시대의 정의: ‘말’이 통하는 세계를 향하여. 창세기 11장 1~9절〉,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21(1995 여름); 최형묵, 〈지구화 시대의 경제정의: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손이 없기 때문이다. 느헤미야 13장 15~22절〉,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22(1995 가을・겨울) 참조. [본문으로]
  30. A. Giddens, 《포스트모더니티》, 19. 한편 최형묵은 지구화를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전일적 세계지배의 실현”이라고 말한다(최형묵, 〈지구화 시대의 경제정의〉, 37). 이 주장은 나와는 다른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데, 즉 그는 1980년대적 한국의 정치경제학적 담론의 연장선상에서 지구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최형묵, 〈민중의 시대: 변화의 실체와 신학의 과제〉, 《시대와 민중신학》 2. 1995), 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1. 근대이전 사회에서 권력관계의 핵심은 도시와 시골간의 경계화와 관련된다면, 근대사회에서는 국가간의 경계가 그 위상을 대체하였다. Giddens, 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서울: 나남, 1991), 특히 제7장 참조. 반면 근대이전 사회의 국가에서 국경은 경계화에 의한 분절적 역할보다는 이편과 저편간의 만남과 교류 장소적 성격을 갖는다. J.R.V. Prescott, Boundaries and Frontiers (Londen: Croom Helm, 1978) 참조. [본문으로]
  32. 정진영, 〈국제경제질서의 재편: 국가주권과 국제질서 사이의 새로운 타협〉, 김경원 임현진 엮음, 《세계화의 도전과 한국의 대응》 (서울: 나남, 1995) 참조. [본문으로]
  33. 심광현, 〈지정학적 실험과 실험과 문화정치적 실천의 전망〉, 《탈근대 문화정치와 문화연구》 (서울: 문화과학사, 1997) 참조. [본문으로]
  34. ‘디지털 자본’의 등장은 실물경제와 분리된 경제의 등장을 계기화하였을 뿐 아니라, 자본 이동의 규모와 속도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화하였다. 이런 점에서 오브라이언은 흥미롭게도 지구화된 자본의 비영토성을 얘기한다. Richard O'Brien, Global Financial Integration: The End of Geography (London: Pinter Publisher, 1992) 참조하라. [본문으로]
  35. 최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들인 한스 피터 마르틴 & 하랄드 슈만, 《세계화의 덧―민주주의와 삶의 질에 대한 공격》 (서울: 열림 카디널, 1997)와 미셸 초스도프스키, 《빈곤의 세계화》는 바로 이런 심각한 역사적 고난의 현실을 저널리즘적인 필체로 증언하고 있다. [본문으로]
  36. 불트만적 사건 이해를 사회학적으로 확장한 안병무・서남동 등의 사건 이해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그것이 갖는 개념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글로, 김창락, 〈예수와 민중운동〉, 《새로운 성서해석과 해방의 실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김명수, 〈민중신학의 해석학(II)〉, 《기독교사상》 400(1992.3) 등 참조. 나는 이것을 시공간적인 사회적 연결망의 차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사건론을 민중신학적 해석학의 기본 단위로 격상시켰다. 김진호,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 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신학사상》 80(1993 봄); 같은 저자,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 민중 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형성론적 접근(방법론을 중심으로)〉, 《민중신학》 창간호(1995); 같은 저자,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 《예수 르네상스》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6) 등 참조. [본문으로]
  37. 민중을 ‘권력 해체성’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양분화하려 했던 계급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돌파하는 이론적 강점을 갖는다. 실제로 인간은 가능한 한 타인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관철시키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배제와 박탈의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가해자를 꿈꾸며 가능한 영역에서 그것을 관철시킨다. 그러므로 권력의 문제설정은 ‘성찰적’이다. [본문으로]
  38. 김철식, 〈달팽이〉, 《문학동네》 9(1996 겨울), 352~53쪽. [본문으로]
  39. 김진호, 〈단과 공의 변증법. IMF 관리체제하에서 민중신학의 실천담론 모색〉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3월 포럼 원고(1998.3.23) 참조. [본문으로]
  40. Kurt Petersen, The Maquiladora Revolution in Guatemala (Conter for Interational Human Rights at Yale Law School, 1992) 참조. 이 책은 1990년대 전후 과테말라에 진출한 한국자본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보고서다. 그 내용에 따르면 1970년대 한국의 평화시장의 참상을 무색하게 할 정도라고 한다. 송호근, 〈세계화와 한국의 사회발전. ‘성장’에서 ‘인적 자원의 개발’로〉, 《계간 사상》 (1995 봄)의 주 31) 참조. 이것은 한국 자본의 횡포이지만, 한국의 비판담론들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제3세계 착취에 대해 침묵한다. 오히려 서구의 비판담론들이 자신들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본문으로]
  41. 최근 번역 출간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 (서울: 민음사, 1998)은 바로 이러한 강한 정체성 주의를 희화화함으로써 그것을 해체하고자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