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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바디야의 과실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2000.3.12) 원고로 쓰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여 [반신학의 미소]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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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디야의 과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짧은 텍스트를 꼽으라면 단연 오바디야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서 속에는 이스라엘 족속 사이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어 온 하나의 적개심의 정치가 뚜렷한 궤적을 그으며 자리잡고 있다. 오직 에돔 족속과 그 조상 에사오에 대한 증오를 담기 위해 이 책이 쓰였다는 것이다. 마치 ~,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한 편의 노래 속에서 3년간의, 아니 50년간의 증오가 우리의 귀청을 끊임없이 분노의 떨림으로 진동시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짧은 문서 속에는 그 이전의 오백 년과 이후의 오백 년으로 이어지는, 천년의 증오를 중계하고 있고, 이 문서를 경유하면서 이스라엘의 증오는 한층 증폭되어 후세대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평화의 메시아 예수를 고백하고 있는 바울조차도 에사오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심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로마서9,13)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스라엘 족속의 증오의 언술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주의함은 히브리서에서도 거의 비슷한 논조로 반복되어 있다.

 

... 음식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먹은 에사오 같은 불경스러운 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아시다시피 에사오는 그 후에 자기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애원했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을 돌이킬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6~17

 

여기서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뜬금없는 적개심을 표현하고 있다. 반에돔 정서는 이미 당시엔 유대인들의 폐부에 깊이 틀어박힌 편견의 체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바디야서는 그렇지 않았다. 적개심을 품을 만한 분명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에돔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유대 왕국 멸망기, 바빌론 제국에 의해 강토가 유린당하고 군대가 무장해제된 틈을 타고, 이웃의 에돔 족속이 유대를 습격하여 노략질하던, 분통터지는 역사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분명 에돔은 잘못을 저질렀다. 분명 에돔은 비난받아 마땅한 짓을 했던 것이다. 분명 에돔은 역사의 보복을 받아야만 하는 업보를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야곱 가문은 불이 되고

요셉 가문은 불씨가 되어

검불 같은 에사오 가문에 옮겨 붙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살라 버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오바디야서 18

 

이 인용구절에서 보듯 오바디야서는 하느님의 진노의 날이 올 것은 선언한다. 인근 족속들의 습격으로 처절하게 난도질당할 에돔 족속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 어느 한 곳 숨을 데 없이 철저하게 파괴될 그 날을, 그 분노의 날을 기대하고 있다. 모두가 도살당하고, 다른 자들이 그 땅을 나누어 갖게 될 설욕의 날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지, 하고 생각할 만하다. 적어도 온 이스라엘 족속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성서를 읽는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벌받을 짓을 한 에돔을 저주하는 말은 과연 정당할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오래 전 에돔은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병합당했고,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온갖 모욕과 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엔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 지파들과 철천지원수는 아니었다. 에돔 출신의 도엑이란 인물은 사울 추장의 핵심 참모이기도 했다. 지파동맹의 먼 동맹족속이거나 혹은 최소한 비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더구나 양 족속의 시조는 형제관계였다는 기원신화를 그들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파동맹이 형태를 갖추어가고 그 연대망이 고착화되던 판관시대 후기에 이르면, 웬일인지 에돔은 지파동맹 외부 족속으로 규정되어 간다. 그리고 급기야 군주국 시대가 도래한 다윗-솔로몬 시대에 이르면 식민지로 전락하여, 막대한 공납물을 바쳐야 했고 가혹한 부역과 징병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에돔에게 그 시기는 너무 혹독했다.

솔로몬 왕국 말기, 에돔의 토호 하닷의 반란은 그러므로 이유가 있었다. 솔로몬과 유대 왕국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적개심 또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 양국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적성국가로서, 분단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형제국이라는 기원신화에도 불구하고 두 족속 간에는 회복할 수 없는 골이 생겨버린 것이다.

돌아보면 둘 사이엔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고, 또 그럴 만한 역사적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니 미워하고 저주할 만하다. 오바디야서는 바로 이러한 적개심을 신학화한다. 그 신학은 가히 증오의 정치학이라 부를 만도 하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유대인들은 해묵은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상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증오를 마음속에 새겨 넣게 되었다. ‘지금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어떤가의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다. 오래 전의 위대한 예언자, 하느님이 보증한 분이 내린 이러한 신탁으로 인해 그들에게 내릴 재앙의 근거는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오바디야서와 같은 신학적 작업 덕분에, 그런 저작들을 계기삼아 새삼스레 품어온 증오의 기억술 덕분에 에돔/이두메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무의식으로 고착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 이웃 족속에 대해 별다른 악연이 없던 바울이나 히브리서 자자 같은 사람들도, 전혀 맥락이 다른 상황에서, 에돔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에돔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996월에는 전국을 들끓게 한, 이른바 서해교전사태가 벌어졌었다. 정부나 언론이 두고두고 자랑스레 여기는 통쾌한 승리로 귀결된 사건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북측 병사가 20~30명 사망했던 그 사건이다. 동포가 죽어갔고, 그것도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손에 의해 그렇게 됐음에도 그것이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리영희 선생의 해석에 의하면, 우리 정부와 언론이 그토록 떠벌렸던 서해에서의 북방한계선은 국제법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실체라고 한다.[각주:1] 그것의 뿌리는 쌍방이 합의한 결과가 아니라, 휴전 협정 당시 북진을 강력히 고집했던 이승만 정권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북방한계를 고집하려 했던 연합군 측의 전략적 경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북방한계선이란 쌍방합의에 기초한 협의사항이 아니고, 따라서 국제법적 준수사항이 아니며, 단지 유엔군이 남한 정부의 북진 도발을 억제하려고 일방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실 확인보다도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북조선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었다. 그래서 남북한의 해군이 교전하게 되는 불상사를 통해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분단된 현실로 인해 희생된 병사들을 위해 애도하기보다는 응징에 대한 통쾌감에 너무 쉽게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해(1999) 11, ‘최장집 용공시비로 지탄을 받았던 한 조선일보 기자가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의 뿌리 깊은 편집증적인 이데올로기적 집착의 문화에 개탄했던 것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런데 사실은 서해교전 사태를 보며 작으나마 승리감에 도취됐던 우리의 유아적 자기 중심주의를 되돌아보면서, 바로 우리가 그런 적개심의 정치에 무의식중에 놀아나고 말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분노의 정치는 우리의 존재와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200036, 한국의 유력한 한 정치지도자가 이른바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그것도 55년 전에 있었던 찬탁에 얽힌 시비다.[각주:2] 유권자의 훨씬 다수가 아직 태어나지조차 않던 때의 일이다. 찬탁-반탁의 문제가 진지한 토론의 여지를 남겨둔 사건임에도, 더구나 이것이 이데올로기적 증오감과 연결되어 논의가 봉쇄되어온 주된 역사적 논점의 하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무책임한 정치인의 선거용 술수 탓에, 그것은 다시 선악 이분법적 단순논리의 늪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저주의 정치, 분노의 기억술, 이것은 종종 인간의 무의식으로 견고히 자리잡아 왔다. 그래서 바울 같은 위대한 예수운동가도 그 올무에 걸려 실족하고 말았고, 히브리서 저자 같은 대사상가도 편견의 정치에 놀아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의 오점 중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이 가해자였던 것을 기억하지 않으려 하면서, 피해자였던 역사적 사실만을 증폭시켜 해석했던 오바디야서같은 텍스트의 성찰적이지 못한 태도의 결과다.

‘3.9베를린 선언(2000)[각주:3], 반세기를 끌어왔던 남북 간의 냉전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남한 정부가 먼저 발 벗고 나서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오바디야의 과오를 벗기 위한, 분노의 정치를 넘어 화해와 평화의 정치를 위한 실제적인 징검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이 선언의 진정한 취지가 어느 누구에게서도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가 노력해야겠다.

  1. 리영희,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리영희 비평집. 반세기의 신화》(삼인, 1999). [본문으로]
  2.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이날 홍천・횡성지구당(위원장 조일현) 후원회에 참석해 ‘과거 찬탁운동을 했던 사람이 지금도 어떤 자리에 있고, 6・25 남침 때 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말한 장관도 있었다’며 색깔론 시비를 부추겼다.”(《한겨레신문》 2000.3.6) [본문으로]
  3.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9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일 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문제’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남북한 간에 정경분리 원칙에 의한 민간 경협이 이뤄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정부 당국 간의 협력이 필요한 때”라고 하면서 ‘정부당국간 협력, 화해와 협력제안 적극 호응, 이산가족문제 해결, 특사교환 제의 수락’ 등 4개항을 촉구하는 이른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남북 간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