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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낯설음에 대한 은폐된 폭력,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이 글은 [우리 안의 이분법. 당비생각01] (생각의 나무 2004)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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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에 대한 은폐된 폭력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센서, , 인식의 코드

 

남자가 화장실에서 변기 앞에 다가서자 센서가 깜박거린다. 이내 물이 내려온다. 바지를 추스르고 한 걸음 물러서자 센서는 다시 깜박거리면서 물을 내려 보낸다. 문뜩 저것이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눈이 소변을 보는 자신을 바라본다는 생각은 수치스럽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은 그를 보지 못한다. 단지 누군가가 왔다혹은 갔다는 것만을 감지할 뿐이다. 다가온 이가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느낄 수 없다. 키가 큰지, 뚱뚱한지, 피부색은 하얀지, 청결하게 자신을 대하는지 아니면 거칠고 더럽게 하는지, ..., 이 모든 것을 그 눈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심지어 다가온 그가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무엇이 다가왔다 멀어졌다는 것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올 뿐이다.

그래서 저 눈은 아무 경험도 할 수 없다. 유일한 시감각 기능인, 무언가 다가왔다/멀어졌다 등의 감지는 결코 경험일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조건반사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눈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다. 과거의 경험이 누군가의 다가섬/물러섬을 감지하는 현재의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한 꿈이 누군가의 다가섬/물러섬을 감지하는 현재의 자신에게 어떠한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단지 끊임없이 현재로 미분된 상황에서 물을 내려 보낼지를 반복적으로 판단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화장실 센서는, 그 눈은, 그 눈의 시감각은 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몸은 세상살이의 흔적을 품고 있는 창고다. 몸이 있음으로 그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이 타인에게 공인되고, 타인과 더불어 일으키는 삶의 실천의 흔적은 바로 몸속에 새겨진다. 몸이 없는, 그래서 경험을 저장할 수 없는 센서는 단지 선험적으로 주어진 코드에 맞추어서 기계적으로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여기서 화장실 센서는 현대인에 관한 하나의 은유. 인간에게 근대적 경험의 가장 특징적인 것의 하나는 생면부지의 존재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운전사가 운행하는 차량을 타야하고, 누가 어떤 상태에서 건설했는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건물을 드나들어야 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생산한 물건을 사용하고, 생면부지의 사람과 화폐라는 종이를 매개로 하여, 때로는 자신의 생명으로 환원되기까지 하는 거대한 액수의 거래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신용카드 같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디지털 신호로만 체감할 수 있는 가상의 화폐를 통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과 엄청난 재화를 교환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근대는, 근대의 경험은 낯설음으로 가득하다.

낯설기에, 그 낯섦에도 끊임없이 타인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기에, 그 낯선 타인들과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일어날 사태들을 미리 충분히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사람들은 존재가 불안하다. 바로 이 존재론적 불안때문에 근대 특유의 신뢰의 제도들이 발전한다. 아마도 민족(국가)라는, ‘국경을 통해 안과 밖을 나눔으로써 실현되는 상상의 공동체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경이 단지 경계 표식 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경계 내부에 대해서는 동질성, 그리고 외부에 대해서는 이질성을 강박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사유의 길에 관한 안내 표식이기도 하다. 마치 화장실 센서처럼, 다가선 이가 볼 일보려 그 자리에 다가선 것인지 아닌지 등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변화무쌍한 수많은 상황을 모두 무시하고 단지 한 가지 조건, 다가섬/물러섬에만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국경은 안과 밖을 최대한 단순화시키고, ‘-포용-배타라는 일정한 방식의 인식만을 우리의 사유의 시선에 들어오도록 형상화한다.

이분법이 자라나는 안성마춤의 토양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녀석은 이러한 낯설음의 두려움을 해소하는 제도화 메커니즘 속에서 서식하는 사유의 바이러스. 비록 행위자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유래했으며,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것에 감염된 사유의 증상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이 녀석은, 우리의 사유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이동에 따라 가변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하며, 그 나뉜 범주에 따라 가장 단순하게 평가되고 가장 단순하게 행위하게 한다. 세상은 우리저들로 나뉘며, 그것은 ’, ‘옳음그름’, ‘아름다움추함’, 그리고 진리거짓이라는 이항 대립적 기조에 따라 분할, 가치 평가되어 있으며, 그 좌측 항은 친숙함’, 그리고 반대편 항은 낯설음이 각각 일대일로 대응한다. 이것은 민족국가의 경계가 완강하게 구축되면 될수록, 외부에 대한 경계심이 강력하면 할수록 국가라는 의 전신에 구석구석 미치는 사유의 토대이며 실천의 양식처럼 자리 잡는다.

몸은 끊임없이 외부 환경과 대면하면서 스스로를 변모시켜 간다. 그런데 이분법 바이러스에 감염된 몸은 외부 환경을 그 모습 그대로 읽는 데 심각한 장애를 일으킨다. 다양한 양상을 단순화된 범주로 일괄화시켜 단순한 정보로 환원시키고, 그것만을 본다/인식한다. 경험이 인지 과정에서 왜곡된다. 그러니 이분법 바이러스에 감염된 몸은 점점 경색된 부위로 가득하게 되고, 결국 몸이 없는 기계 덩어리처럼 되어 간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기계 덩어리에 입력된 왜곡된 정보에 따른 반응이 대단히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정보의 단순화왜곡의 계기가 불안감이었으니, 이러한 공격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국가 권력은 바로 이러한 낯설음에 대한 방어적인 공격성을 대표한다. ‘낯선 외부자들에 대한 공포심은 국가 권력에 의해 종종 이유 없이 증폭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 권력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내부를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안보적 명분 아래 침략적인 자기 방어라는 보다 적극적인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곤 한다는 데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을 다루는 성서 연구자들이 종종 쓰는 이 침략적인 자기 방어개념은 실은 현대의 패권국가들의 강한 국경 개념의 시간적 거울상이다. 한데, 강상중이 말하듯, ‘국경은 외적으로 확장될 뿐 아니라, ‘내적으로 치밀화된다. 이른바 내적 국경을 통해 국가는 국민을 안보 논리로 규율한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공격성이 더 이상 (국제)정치의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장에서까지 실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국가주의적 이분법은 안보라는 명분으로 일상에까지 침투한다.

한편, 칼 세이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 낯설음(외계인)에 대한 이러한 국가주의적 방어본능을 비판하고, 외계인과의 접촉은 두려운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런 시각을 대변하는 주인공 앨리 애러웨이가 접촉한 외계인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자기 존재 깊은 곳에서 친숙함의 흔적으로 남아 있던 그리운 대상, 외계인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밖에 존재하는 생명체 또한 우리, 우리의 분신이라는 뜻이겠다. 요컨대 이 영화가 제시하는 낯선 세계와 조우하는 법은, 그것은 언젠가 본 듯한 세계라는 사고인 셈이다.

그런데 국가 안보 논리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듯한 이러한 시각에는, 실은 좀더 깊은 데서 낯설음에 대한 존재론적 불안이 넘실거리고 있다. 낯설음은 언젠가 본 듯한 느낌으로 환치됨으로써, 친숙함의 착시에 불과한 것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콘택트>에서 외계인은 그들과 접촉한 인간이 갈망해 마지않던 분신 바로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마치 오늘날 자본의 광고 저널리즘이 이처럼 언젠가 본 듯한 허구적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실 친숙함이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시각은 국가에 의해 규율되지 않는 존재, 개인의 탄생과 맞물린다. ‘민주화를 지향하는 근대의 제도들은 불가피하게 개인의 등장을 촉진하며, 또한 지구화라는 최근 현상은 (외적)국경이든 내적 국경이든 그 장벽들을 넘나드는 관계의 네트워크를 자본 축적의 핵심적 장치로 변환시켜 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경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단지 전통적인 경계가 그 단단함을 잃었을 뿐이고, 수많은 새로운 경계들이 구축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필경 시민/국민이나 소비자(소비능력을 갖춘 자)의 공간이 전통적 경계를 월장하며, 새로운 경계들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여전히 낯선 것은 공포의 대상이라는 인식/사유의 질서는 여전하다. 단지 하나의 정전(Canon)에 의해 이분법의 구체적 내용이 규정되는 메커니즘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다양한 여러 정전(canons)에 의해 여러 개의 이분법이 등장했을 뿐이다. 이분법적 인식의 일상화는 급속도로 첨예화된다. 이분법적 가치와 인식이 보다 우리의 생활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상화된 미시적 이분법은 보다 거시적인 이분법적 체계의 단순 하위체계로서 기계적으로 흡수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보다 큰 맥락에 연계되는 경향을 띤다. 단지 하나의 정전 아래 정전들이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는 이런 것에 연계되고, 다른 때는 다른 것에 엮임으로써, 변화무쌍하지만 미시적 경험과 거시적 체계가 연관되는 네러티브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난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적 총동원 체제가 전자와 같다면, 2002년 월드컵의 국민 총동원은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의 일상화는 여전히 낯선 것을 두려워하며, 그것에 대한 배타적인 습성을 지속시킨다. 그런 점에서 국가주의적 인식이나 개인을 경유한 인식의 체계는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친숙함과 낯설음의 이분법이 한결 일상화되었다는 점이며, 이것은 낯설음에 대한 우리의 폭력 또한 일상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폭력성이 더 이상 국가주의적 야만만은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특정한 양식으로 경험을 이해하게 강요하는 인식 배후에 도사린 폭력의 일상화이며, 그럴수록 낯설음에 대한 폭력성의 야만은 우리 자신에게서 은폐된다. 일상화된 폭력성은 야만을 은폐하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이 글에서 나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이 서양 근대의 특징적 요소의 하나지만, 그 사회들은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틀을 성찰적으로 제도화하고 있는 데 반해, 근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인식적 특성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은 물론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나의 걱정과 맞물린다. 그런데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분법적 인식의 양태가 변형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분법적 인식의 일상화가 급속도로 진척되고 있고, 그만큼 폭력이 일상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폭력의 야만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감수성의 퇴화를 동반한다.

 

1987년 체제, 일상의 대두, 그리고 이분법

 

한국의 돌진적 근대화(rush-to modernization)와 전체주의적인 국가 총동원 체제는 서로를 규정하면서 전개되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는 경험의 억압 과정이 동반된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 보거나 만지거나 알려고 해도 안 되는 것들로 가득했다. ‘?’라는 질문 자체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미 자명한 대답이 주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 답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 것은 공동체의 신성한규약을 위반하는 것이니 구체적인 위해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사회 곳곳에 있는 시선이란 시선은 모두 한 가지 진리를 향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것으로 사회의 모든 현상, 사람들의 모든 경험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고,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전망이 일관되게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볼 수 있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시공간을 넘나드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확신, 앎의 의지로 넘쳐나는 사회였다. 그것은 나아가 국민 개개인의 눈길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을 낳았다. 그리하여 국민 각자는 자기의 시선이 아니라 규율된 국가주의적 시선으로 서로를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감시함으로써 자신의 국민적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결국 국가주의에 규율된 눈을 가진 국민은 감시당하는 자인 동시에 감시자이기도 했다. 국가 권력과 국민 모두의 광적인 앎의 의지는 병적인 감시의 사회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한국 사회의 돌진적 근대화 경로가 새롭게 재설정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주로 두 가지 요인에 따른 변동으로 파악된다. 1987년 이후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고 있는 민주화과정과 1990년대 이후의 지구화과정이 그것이다. 양자는 그 개념적 함의나 그것을 추동하는 주체 등에 있어 거의 무관하지만 동시에 결정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보적이다. 나는 그것을 일상의 대두개인의 탄생이라고 요약한다.

송호근은 “‘혁명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 억압의 진원지로서의 부패한 공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사적인 것의 도전이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송호근처럼 하버마스에 기대어 말하자면, 국가주의에 의해 식민화된 일상의 대두를 뜻한다. 일상을, 더 이상 국가주의에 규율되지 않고 다양한 욕망과 경험들이 넘쳐나는 생생한 삶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공간의 주체는 물론 국가주의에 의해 호명된 국민이 아닌 개체적 자아로 호명된 개인이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지구화한 자본의 유통 공간에서 비주얼한 소비자본주의적 요소가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를 덮친 이후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 또한 욕망의 주체로 부상한 개인, ‘그 현장인 일상의 대두인 것이다. 최근 󰡔당대비평󰡕은 이 두 변화를 통한 삶의 제도화 과정이 그 이전과 연관되면서도 사뭇 다른 특징을 가진 체제를 구성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1987년 체제라는 용어의 정식화를 모색하였다. 민주화와 지구화 과정이 중첩적으로 작동하여 우리 삶이 변형되는 최근의 양상에 특별히 주목하기 위함이다.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2002월드컵 당시 일시적인 국민 총동원은, 과거의 국가주의적 코드에 의한 동원 메커니즘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때 거리의 모습은 경찰과 시위대가 각기 일사불란하게 대치하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전경은 일종의 군대식 조직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바리케이드 저편의 대중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붉은 색셔츠와 ~한민국구호로 단순하게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코 하나라고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시선의 주인공들이 일시적으로 결집된 양상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 2002월드컵은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탄생과 사회 통합이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민주화와 지구화로 대표되는 1987년 체제의 형성은 과거 일방향적 국가주의의 이분법적 인식의 틀, 외적이든 내적이든 국가주의적인 경계들로 양분되어 우리의 사유를 획일적으로 강제해왔던 인식의 틀에 대한 수많은 모반들의 결과로 성립하였다. 지난 시대의 국가주의적 이분법은 사적인 영역까지 구석구석 감시의 눈, 그 기계적 센서들을 확산시킴으로써 사적인 공간을 들춰내고 공적 가치에 의해 규율된 통제사회를 구축해 왔다. 1970년대의 이른바 잡곡밥과 분식 장려 운동이 그 한 실례를 보여준다. 권지예의 단편소설 풋고추에서 풋고추라는 요리의 재료가 등장인물에 따라 결코 동일하지 않은 사유의 소재가 되고 있는 것처럼, 쌀에 대한 기억 또한 사람들마다 다양하게 재현되었을 법 한데, 그 모든 일상공간에서의 사유의 가능성은 억제되고 대신 애국이라는 단 하나의 공적 기준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되도록 하는 규율 장치가 작동되었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송호근의 표현처럼 그것은 이제 부패한 공적인 것에 불과했다. 지난 시대의 획일주의적 강제가 그토록 광적으로 발현되었던 만큼, 이제 대두한 1987년 체제의 형성은 공적인 것에 대한 과도한 불신으로 가득찼고, 반면 새로이 탄생한 사적인 것, 일상의 대두는 무조건적으로 지지받았다. 특히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자본의 천민화는 개인을 소비적 욕구로 불타오르는 탐식가로 탈바꿈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일상에 침투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조절할만한 공공성의 제도가 부재한 탓에 개인의 일상이 그토록 쉽게 변질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현재의 개인들은 모두 일상의 영역에서 사적인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욕구에 굶주린 존재가 되어 버렸다. 너무나 급속한 변모다. 존재의 안식처였던 과 그 터인 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을 향한 욕망 자체이며, 이 물신화된 대상은 욕구의 시장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재규정하였다. 우리 각자는 더 이상 땅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외모, 대학, 언어 습관, 친분 관계, 거주지역, 주요 행동반경 등, 일상적 삶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물신화는 가치 있는 삶과 무가치한 삶을 양분하는 지혜의 체계를 몸의 기억으로 저장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또 다시 일상은 이분법적 가치로 넘쳐나게 되었다. 결국 또 다시, 아니 더욱 심각하게, 일상은 이분법적 가치에 의해 배제된 존재를 향한 무차별적 폭력성이 난무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단지 과거의 것이 한 가지 시선으로 규율되어 하나의 진리를 지향하고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음질하는 총동원체제라는 점에서 이분법적 인식/가치의 사회였다면, 현재의 양상은 결코 공적인 가치에 의해 단순히 통합되지 않는 미시적 세계에서 수많은 진리들로 채워진 이분법적 인식/가치로 넘쳐흐르는 사회, 국가주의적 행위자만이 아닌 다중적 행위자들에 의해 일상 속에 보다 깊이 스며든 폭력성의 사회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또한 단지 사람들의 경험을 통제하고 폭력성을 조장하는 시선의 권력이 국가주의적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욕구에 정향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실 한국의 돌진적 근대화가 맹위를 떨치던 1970,80년대에 사람들은 궁핍으로 인한 생존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근대화의 강물 속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돌진적이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 그 강물의 흐름은 거칠고 급속했다. 요컨대 돌진적 근대화의 경험은 결코 행복한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유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돌진적 근대화 자체가, 그 성공적인 전환이 안전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불안함은 실패 혹은 미완성의 불안이라기보다는 성공이 내포하고 있는 위기의 소산인 것이다.

그럼에도 강물의 흐름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그토록 그려오던 편안한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꿈이 현재의 불안전한 삶을 감내하게 했다. 과거의 불안함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않으려고 미래의 꿈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기로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의 돌진적 근대화에 대한 전 국민적 합의는 이루어졌다. 그때의 총동원체제는 공적인 것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통한 제도화과정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87년 체제의 경험은, 그 바다가 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나운 파도로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과 맞물린다. 그것은 지난 시절 아름다운 미래의 꿈을 추구하는 구원론적 담론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래의 꿈의 붕괴는 주로 다음의 세 가지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특권층은 줄곧 자신의 욕구를 거리낌 없이 추구해왔다는, 즉 지배계층에 대한 불신이며, 둘째로 지구화의 파괴력이 미래의 꿈을 잠식해버렸다는, 지구적 구조변동에 대한 불신이고, 셋째로 앞의 두 가지에 대해 실망한다 해도 여전히 남아있어야 하는 대안적 미래의 꿈이라는 이른바 진보적 이념이 과연 여전히 가능한가 혹은 유의미한가에 대한 불신, 곧 진보 이념에 대한 불신이 그것이다.

이러한 불신1987년 체제의 인식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사회 전반적인 피해자 의식을 낳는다. 국가에 대한 피해자 의식, 자본에 대한 피해자 의식, 지배층에 대한 피해자 의식, 전문가 집단에 대한 피해자 의식, 기성세대에 대한 피해자 의식, 남성에 대한 피해자 의식, ... 등등, 이러한 현상은 자신이 약자라는, 주류 담론에 의해 농락되어 왔다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위기는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는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피해자 의식이 약자인 대중의 판타지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의 의제를 구성하는 주요 동학(dynamics)임에 틀림없다. 요컨대 지금 한국 사회는 이러한 과도한 불신의 심성을 기조로 하여 제도화되고 있다. 지난 시절의 전체주의적 사회의 과도한 신뢰의 제도화는 오늘날 이렇게 극적으로 전도된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 신문지상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조금도 절제되지 않은 채 유포되는 각종 음모론은 현재 한국 사회의 공공담론 제도의 양상을 보여준다. 한데 음모론의 양상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자신보다 월등한 성과를 올리면,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의 부적절한 뒷배경에 관한 시나리오를 연상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과 관련해서 유행어가 만들어지고 언어 습관이 변형되곤 한다. 음모론이 사적 담론 영역에도 개입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적 관계는 이렇게 황폐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론의 일상화는 여러 경로로 담론제도만이 아닌, 기구적 제도화 과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피해자 의식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공적 제도에 대한 대중의 과도한 불신은 상당부분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피해자 의식은 종종 책임 전가의 심리를 낳게 하며, 무성찰적인 천민화 경향에 편승케 한다. 그것은 지난 시절의 부조리함의 흔적이 자신의 몸에도 새겨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탈권력 상황에 있다는 점에만 유념할 뿐, 자신이 권력의 행사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버린다.

앞서도 보았듯이 이분법적 인식은 끊임없이 우리타자를 구별짓게 하고, 이 경계를 통해 특권과 탈특권의 사회적 관계체계를 구조화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 점에서 경계 내부로 진입하려는 노력, 그리고 내부 영역의 중심부로 진입하려는 노력은 사회 전체의 욕망 구조를 형성한다. 물론 이 과정은 진입에 실패한 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제도화이기도 하다.

개인이라는 1987년 체제의 주체화 양상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불신의 제도화(이것은 스톰카<Piore Sztomka>불신의 제도화개념과는 무관한 나의 용어로, 앞서 표현한 불신의 심성을 기조로 한 제도화를 말한다)의 내부로 진입한 이들, 특히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입한 이들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근의 일상성에 관한 담론의 주역 또한 이들 3의 계급과 친화적이다. 이른바 민중문화는 아직 우리 사회의 담론의 소통 공간에서 적절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개인은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다. 권력에 의해 은폐된 특권층의 책임을 들춰내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성공이 타자의 배제를 동반한 것에 대한 책임에서 면책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기반성의 언어를 성찰이라고 한다.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피해자 의식이라기보다 성찰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분법적 인식이 일상화된 최근의 상황에서, 우리의 성찰적 문제의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동병이치(同病異治), 이병동치(異病同治)의 교훈

 

드라마 <대장금>의 어느 에피소드들은 성찰에 관한 하나의 지혜를 보여준다.

궁에서 의녀 수련을 받게 된 장금은 환자 진료 실습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통해 중요한 지혜를 터득한다. 교육담당교수인 신익필의 지시에 따라 세 명의 환자 상태를 살펴본 후 그녀는 어렵지 않게 질환의 성격과 처방을 내린다. 신 교수의 냉대, 진단에 쩔쩔매는 동료 수련생인 신비의 태도, 왜 그 질문이 필요한지도 판단하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환자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대는 모습에서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서투름이 의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의 장벽을 가로지르는 가능성임을 깨달은 것이다.

환자 세 명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같은 질환을 앓고 있지만 병의 원인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처방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同病異治), 세 번째 환자는 앞의 둘과는 다른 질병을 앓고 있었지만 원인은 첫 번째 환자와 같았기에 첫 번째와 동일한 방식의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異病同治).

결국 장금은 다른 수련생을 압도하는 자신의 지식 때문에 환자와 대화하지 못했다. 관형찰색(觀形察色)만으로도 환자의 상태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에 더 많은 것을 묻는 것은 불필요했다. 장금에게 관형찰색에 의해 한자의 상태를 판단케 하는 지식은 환자를 읽는 장금의 인식 코드였다. 이때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에서 환자 자신의 경험은 의사인 장금의 인식 코드에 의해서만 재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은 결국 잘못되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동병이치와 이병동치의 발견은 장금의 의료 지식을 통한 재현의 오류를 입증시켰고, 이는 장금의 지식이 환자와의 대화를 방해했던 데 기인한다.

드라마 <대장금>의 에피소드를 하나 더 보자. 신익필 교수는 약재(藥材)와 독재(毒材)를 쓰라는 시험에서 마치 교과서 같이 명쾌하게 분류 정리한 장금의 답안지에 낙제 점수를 준다. 장금이 나중에 재시험에서 깨달은 사실은 약재와 독재는 미리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효능이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알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독재가 될 수 있는 반면, 독재 또한 적절하게만 사용한다면 약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는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맥락과의 배치 관계에 따른 일시적인 효과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단순하게 구별짓고 있는 이분법적 지식을 문제삼는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이분법적 지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등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분법적 지식은 경험을 가로막는다.

이것을 삶의 관계를 구성하는 일상적 지식에 관한 하나의 은유로 이해한다면, 이분법적으로 체계화된 지식은 경험을 속단하게 하고 가치판단하게 하는 편견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분법적 지식은 구체적인 관계를 맺기 전에 그 대상을 미리 판단하게 하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도 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식은 양자간의 대화를 발생시키지만, 동시에 그 지식의 규칙은 대화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요청한 것을 자기가 방해하는 기이한 현상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관계는 불평등하게 조직되어 있다. 평등한 관계라는 것은 아름답고 이상적이지만 현존하지 않는, 그래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미리 전제하는 것은 불평등이 야기하는 현재의 질곡에 대한 문제의식의 반사적 투영이라고 보는 게 낫다. 아무튼 이러한 이상적 상황에서 현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추론하는 것은, 그래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이것은 정체성을 가져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연관된다너무 무리한 욕심처럼 보인다. 차라리 잘 모르지만 더듬거리며 사유의 모험에 뛰어드는 신비의 태도가 더 진지해 보인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관계는 그 관계를 조직하는 지식의 틀 속에서 벌어진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조직하는 지식은 의료 지식이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조직하는 것은 가족 질서에 관한 지식이다. 물론 행위자들이 이 지식을 서로 공유해야만 관계는 발생한다. 이러한 공유로 인해 사람들은 관계가 불평등함에도 그것을 불쾌감이나 착취로만 체험하는 게 아니라 만족감, 즐거움, (상위 서열자에 대한) 존경심 등을 체험하기도 한다. 관계는 이렇게 유지되며, 불평등은 이렇게 재생산된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특히 이러한 지식이 구체적인 일상적 관계의 양식이지만, 동시에 상대방(타자)를 범주화하고 편견을 고착화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이를 앞에서 얘기한 것과 관련해서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면부지의 존재와의 만남이 심화되는, 즉 관계의 비대면성(nonfacibility)이 급속도로 높아지는 근대사회로 오면서 (외적) 국경이라는 범주를 통해 존재를 유형화하고 자신과 동일하게 분류된 범주 내의 낯설음을 친숙함으로 대체하는 것, 그리고 범주 외부의 낯설음궁극적인 낯설음으로 대체하는 것, 이것은 근대가 낳은 존재론적 불안을 범주화를 통해 해소해보려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경험 세계의 지구화로 인해 더욱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극단화란 범주화된 영역의 거대화인 동시에 미시화이기도 한다. 즉 편견과 착시를 일으키는 범주화는 지구화되는 세계에서 거시공간과 미시공간으로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범주화는 편견을 낳으며, 그것을 원래부터 그런 것인 양 고착화한다. 이분법은 바로 이러한 지식의 범주화, 편견의 고착화를 가장 편리하게 해주는 인식의 장치다.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효능 좋은 안정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부작용이 대단히 높은 약재, 아니 독재라는 데 있다.

일상적 관계에 관한 범주화를 선호하는 지식은 이분법과 대단히 친화적이다. 이에 대해 위에서 설펴본 <대장금>의 에피소드들는 두 가지의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는, 현실의 관계에서 이분법과 지식의 공조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타당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관계하는 상대와의 대화를 가로막으며, 결국 상대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 의사의 잘못된 전제로 인한 처방처럼 전제된 불평등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실행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지식을 가로지르는 사유의 방식에 관한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대화이다. 범주화하는, 편견을 낳는 모든 단단한 것들, 그러한 인식의 규준인 정전()을 모독하는 사유의 실험이다. 약재가 독재가 되고 독재가 약재가 된다는 교란적 사유, 증상과 처방의 자명한 연계성에 흠집내기처럼, 정전()은 대화를 통해 그 절대성이 모독된다. 단단한 것들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 대화는 본격화된다. 지식은 앎의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계의 불평등에 대한 암묵적인 공유는 차츰 폭로된다. 성찰은 이렇게 출발한다. 그 속에서 불평등-이분법적 인식-편견-폭력성이라는 인식의 무의식적 경향은 성찰적 사유와 실천의 무대 위로 올라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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