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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87년 체제’를 넘어서 ‘사회적 신앙/영성’을 향하여

이 글은 NCCK 정의평화위원회 기회토론회 '한국사회의 변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차 모임(2013.2.28(목) 오후 2:00~5:00)에서 발표자인 김동춘 교수(성공회대)의 글  <‘87년 체제를 넘어서 사회국가를 향하여>의 논평글입니다.

이날 나와 함께 토론자로 참여한 이봉석 박사의 글은 올리지 못했습니다.


논평_김동춘의 (87년 체제를 넘어서 사회국가를 향하여)에 대하여.pdf 

김동춘_87년체제를 넘어서 사회국가를 향하여_NCC긴급토론회(2013 02 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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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를 넘어서 사회적 신앙/영성을 향하여

김동춘의 ‘87년 체제를 넘어서 사회국가를 향하여에 대한 논평

 

 

 

 

 

 

 

 

2003년 초, 봄의 길목에 들어선 즈음 당대비평편집회의에서 박형준이 ‘1987년 체제라는 말을 불쑥 던졌다. 당시로선 민주화를 논하는 낯선 어법이었고, “55년 체제라는 일본식 어법을 빼닮은 표현이어서 선뜻 그것에 마음이 보태지진 않았다.

더욱이 막 출범한 참여정부가 아직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때, 정부가 추구해야 할 과제를 던진다는 취지로 비참여(2003년 봄호), ‘무능력(2003년 여름호 & 가을호) 등을 연이어 문제제기하던 맥락에서 ‘87년 체제라는 용어가 제출된 것이지만, 그 최초 발의자가 박형준이었다는 점이 우리를 주저하게 했다. 왜냐면 그 자신이 한나라당에 입당할 것임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행보로 인해 당대비평의 중요한 문제제기가 다르게 회자될 수 있음을 걱정했다. 또한 편집위원들은 이것이 우파 담론에 이용되는 셈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깊었었다.

장고 끝에 2003년 겨울호에 ‘87년 체제를 주제로 특집을 구성했다. 오해를 받더라도 그 용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유용성을 버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때 내가 쓴 편집자 서문에서 보듯 ‘87년 체제라는 용어 속에서 우리는 1987년이라는 시간성이 한국의 민주적 제도화의 독특한 문법이 내장되는 계기였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경로성의 조건을 성찰하는 것이 참여정부의 절실한 과제임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후 ‘87년 체제라는 표현은 특히 비판적 지식인 집단 사이에서 비교적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 모든 논의들을 포함할 수 없지만 나의 방식으로 개관하면 대체로 논점을 민주기획과 권위주의적 기획 간의 대립과 교섭의 관점에서 시대의 동학을 읽어내려는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논하겠지만 우리의 문제제기는 이런 논조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동학을 읽어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위기와 고통의 배후를 문제제기하는 데 방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획이 촘촘하지 않은 탓에, 우리가 제기했던 논점이 그다지 부각되지 못한 채 이 용어의 개념화가 논의된 것은 지식기획자의 한 사람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우리의 논점은 김동춘 선생의 87년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 방식과 유사하다. 우리 역시 87년 체제를 문제제기했던 논점의 이면에 비시민에 대한 배제를 제도화하는 체제가 형성되고 있는 최근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의 이면에 87년 체제의 실패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생각이 게재되어 있었다.

한데 김동춘 선생의 87년 체제에 대한 더 세밀한 논지는 이 글이나 다른 글들에서 별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논점을 당대비평이 애초에 생각했던 방식으로 보충하면 이렇다. 우리는 87년이라는 시간성의 이해에서 민주기획 대 권위주의적 기획의 길항성보다는 민주화와 소비사회화의 문제에 주목했다. 1987년이라는 시간성은 한국의 민주화가 소비사회화와 불가분 얽혀서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가 정치적 주권의식과 연관된다면 소비사회화는 취향의 주권의식(감각적 민주화)과 관련된다. 한데 이 양자의 연관성을 (광의의) 민주화 담론이 성찰해내지 못함으로써 소비사회의 게걸스런 욕구의 탐닉자로 주체화되는 존재를 민주적 주체인 양 오인했고 그 결과 시민은 빠른 속도로 시장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는 시장화된 시민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즉 시장적 경쟁논리의 자율성을 동력화하는 욕구의 탐식성을 무방비로 허용하는 제도와 시민의식이 1987년 체제의 내적 특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적 제도화 과정에서 이웃의 몰락이 함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김동춘 선생이 얘기한 민중을 배제한 시민의 프로젝트로서의 87년 체제라는 논점의 디테일을 나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스토리라인을 갖는다. 하여 이러한 시민의 시장화라는 1987년형 민주주의 제도의 경로의존성을 성찰하지 못한다면 참여정부의 민주주의 기획은 재앙이 될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김동춘 선생의 글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87년 체제가 교육받은 중산층 출신 급진 지식인중심의 민주주의였고, 그들의 엘리트 민주주의는 사실상 서민을 변화의 주체로 부상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탈계급화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자원을 독과점하고 있는 구기득권세력과의 힘겨운 경쟁이 불가피했다는 사정이 게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시아를 휩쓴 1990년대 말의 지구적 금융자본의 난폭한 활거로 인한 외환위기 상황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6공 정부나 문민정부는 고사하고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도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하층분화된 이들의 법률적 주권과 사회적 인권을 박탈하는 방식의 민주화의 부정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해보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미미한 반면, 그 반대로의 행보는 좀더 두드러졌다.

김동춘 선생은 그것이 천박한 시장주의자들의 정부인 ‘MB정부’ 5년을 지나고도 또 다시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본다. 실재로 이번 선거 직전에 시행된 각종 지지후보 조사에서 저학력 육체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주변화된 계층에서 박근혜에 대한 지지도는 문제인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87년 체제가 초래한 서민의 탈주체화가 양극화 등 민주화의 부정적 경로의존성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이것이 선거 실패와 이어진다는 비평은, 내가 아는 한, 이번 대선 실패에 대한 다양한 분석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에 속한다. 이는 대선의 실패는 민주당과 진보세력의 선거 전략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포한다. 그보다는 1987년 민주화의 독특성을 성찰하지 못한 민주정부들과 시민사회의 인식의 부재가 실패의 더 근원적인 이유라는 문제제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단언한다. “87년 운동의 시효는 말료됐다.” 곧 이제는 새로운 성찰과 새로운 운동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대안적 과제를 두 가지 국가론적 논지로 설명한다. 자유법치국가와 사회국가의 실현을 위한 성찰과 운동이 그것이다. 전자는 “1987년 이후 ....... 처음 들어섰으며”, 후자는 “IMF 위기와 김대중 정부의 각종 복지정책으로 ...... 초입에 들어섰지만 MB 정부 5년을 거치면서 거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향후 5년도 새누리당 출범시 보여주었던 좌클릭한 일부 공약들과는 달리 MB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예측되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발표된 새 정부의 인적 조직 구성 현황을 보면 비타협적인 강성 극우정부가 될 우려가 높기까지 하다.

아직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그러한 징후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전교조를 법외노조화하려는 움직임, 강정 해군기지 반대활동가들과 여러 기업들이 자행한 부당해고 반대 투쟁가들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등이 속출하고 있는 것, 그리고 노회찬 의원직 상실 사태 등은 새 정부의 등장이 어떤 신호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시사한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들이 사회적 대타협에 부정적 요소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럼에도 새 정부는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어떠한 암시도 던지지 않은 채 비타협적 강성파들을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시켰다.

그런 점에서 김동춘 선생이 제기한 자유법치국가를 추구하는 운동은 여전히 중요하다. 법이 사회적 계층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헌법정신에 따르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법의 형평성을 기계적 형평성 문제로 보는 형식적 법치주의를 넘어서, 사회적 약자의 존엄성과 권리를 좀더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비대칭적인 사회적 권력 양상에서 진정한 법의 형평성이라고 해석하는 적극적 법치주의가 더욱 헌법적인 것이기도 하다. 물론 김동춘 선생의 자유법치국가 주장은 후자를 지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 더 언급할 것은 한FTA 규약에 포함된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 Investor-State Disment)는 자유법치국가의 이상을 훼손하는 심각한 위협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의 출현으로 이런 독소조항이 포함된 한FTA 규약이 원안대로 발효될 것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에 자유법치국가는 실현 가능한가를 둘러싼 논의가 필요해졌다. 그 구체적 실현 방안에 대한 토론이 더 적극적으로 모색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국가(Sozial staat)라는, 법률적 차원보다 더 포괄적인 사회정의에 관한 국가론적 의제는 야경국가를 넘어서는 것을 지향하는 정치적 사회정의 문제에서 사회복지를 포함하는 경제적 사회정의의 문제로까지 논점이 확장되면서 발전했다. 하지만 복지국가를 추구했던 유럽의 경험은 정치적, 경제적 배제를 극복하는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의 문제가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성찰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정의를 위한 제도적 시도들이 도리어 사회적 배제를 제도화하는 측면에 대한 논점까지 제기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소외된 특정한 사회적 부류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특별히 보호하는 장치들이 동시에 그들의 사회적 주체화를 제약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다. 가령 자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결핍을 인정해야만 복지의 수혜자가 되는 사회적 호혜의 시스템은 그이들의 존재를 비존재화함으로써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게끔 하는 미필적 고의(willful[gross] negligence)로 인한 배제의 시스템이기도 하다. 한데 이런 비존재적 존재는 자존성이 붕괴되고 의존성이 강화됨으로써, 그들 사이에서 알콜중독, 마약중독, 폭력중독 등의 현상이 더 높은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들 부류에서 범죄의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것은 이들 부류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편견을 일반화시키는 경향을 낳았다. 이것은 바우만이 말한 범주적 살해의 포스트아우슈비츠 버전이 되었다.

한편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국민에 대한 사회적 보호망에서 배제된, 하여 사회의 최하층 범주로 편입된 이민자들을 크게 확산시켰다. 이들은 사회국가가 추구하는 사회정의의 제도적 보호망 외부의 존재들이다. 하여 이런 부류 사이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정의 외부의 존재들이 양산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쓰레기가 된 삶들이라는 표현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이민자들이 쓰레기마켓을 만들고 쓰레기 같은 노숙생활을 하는 이들의 풍경에서 유래했다. 이런 혐오스런 풍경은 포스트아우슈비츠 버전의 또 다른 범주적 살해의 동기가 된다.

김동춘 선생이 형벌국가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지칭한다. 범주적 편견은 범주적 증오로 이어지고 이것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정당화시키는 범주적 살해와 연결된다. 영화 <마이너리티리포트>가 시사하는 예방적 치안 시스템을 최첨단화한 미래사회의 모습은 오늘날 실재하고 있는 형벌국가를 패러디하고 있다.

권인숙 선생은 아동성폭력 범죄에 대한 매스미디어의 담론을 분석한 연구에서 우리사회의 형벌국가적 양상을 읽어냈다. 이미 우리사회는 일부 사건 사고를 과장하여 사회적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특정 부류를 일반적 범죄자화하는 범주적인 형벌 살해의 양상이 폭넓게 나타나고 있고, 그런 여론을 기반으로 하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즉 형벌국가는 더 이상 유럽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공주의적 형벌국가 담론을 넘어서 사회적 배제를 기조로 하는 형벌국가 담론을 문제제기하는 김동춘 선생의 논점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87년 체제에 대한 자성적 성찰이 수반된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무수한 과제를 논할 수 있지만, 김동춘 선생이 지적한 자유법치국가사회국가의 의제는 향후 우리가 추구해야할 과제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는 생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특히 사회국가의 문제제기에서 보듯, 정치적 정의만이 아니라 사회복지를 핵으로 하는 경제적 정의, 그리고 형벌국가화를 경계하고 사회적 배제를 지양하는 사회적 정의의 과제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물론 이것은 한국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글에서 현재 한국교회는 지난 시대 국가의 성장주의와 보조를 함께 했던 성장지상주의를 폐기하고 사회적 공공성의 과제를 우선시하는 교회로의 급격한 전환이 필요함을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서로 연결된 두 가지 과제로 이어지는데, 하나는 복지동맹에 어떻게 교회가 참여할 것인가를 묻는 과제, 즉 경제적 공공성(정의)의 문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신앙적 주체를 구성하는 데 몰두해온 지난 성장주의 시대의 신앙문법에서 벗어나서 이웃을 발견하고 공존하는 것을 추구하는 새로운 신앙문법을 발견하는 과제다. 곧 타자성의 신앙을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특히 특정한 부류를 혐오하는 담론에 앞장섰던 교회가 사회적 배제의 공범자임을 자인하고 사회적 공공성을 위해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묻는 문제다. 곧 이웃의 눈으로 보는 신앙을 발견하는 문제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