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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작은교회'가 그리스도교의 미래다 - 한국 개신교의 경험에서 찾은 가능성

이 글은 오강남 성소은 엮음, [종교 너머, 아하!](판미동 2013.8)에 실린 글로, 그해 4.11에 청어람 소강당에서 열린 심포지엄 <탈성장주의 시대, 교회를 말하다>에서 발표한 나의 글 <탈성장주의 시대 '작은교회'에 대해 말하다>를 수정 보완하여 쓴 글입니다. 


작은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다 - 한국 개신교의 경험으로 본 그리스도교의 가능성_종교 너머, 아하 기획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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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다

한국 개신교의 경험으로 본 그리스도교의 가능성

 

 

 

 


 

 

 

글머리

 


한국 개신교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초고속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던 바로 그 때다. 그리고 그 양상도 닮았다. 한편 한국사회가 저성장사회로 급격히 반전하게 되는 시기와 거의 맞물리며 한국 개신교도 저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여기서도 그 양상이 서로 닮았다. 즉 한국 개신교의 성장과 쇠퇴가 한국사회의 변화와 긴밀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의 발전과 쇠퇴도 이와 비슷하다. 큰 틀에서 개신교는 서양 근대의 종교로 태동했고, 후기근대에 와서 퇴조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국의 개신교는 좀 더 밀도 있는 발전과 쇠퇴를 체험했다는 점이 다소 다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개신교는 일종의 전 세계 개신교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단면 투시도다. 하여 이 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데 초점이 있다. 하나는 한국 개신교가 한국사회와 어떻게 서로 얽히며 전개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의 미래를 내다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대성장 시대

 


1960~1990년은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에서 대성장의 시대였다. 1960년에 한국 개신교 신자의 수는 전 인구의 2% 내외인 62만 명 정도였으나, 1995년에는 19.7%876만 명으로, 무려 14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1990년 이전까지 급격하게 증가하던 개신교 신자 수가 1990년대 이후에는 성장세가 크게 둔화되었고, 1996~2005년 사이에는 1.4% 감소했다. 그리고 그 이후 각종 통계에 따르면 성장률은 0% 안팎으로 추산된다.

한데 한국 개신교의 대성장은 어느 사회보다도 뚜렷하게 대형교회(mega-church)에 의해 주도되었다. 물론 미국을 포함해서 20세기 중반 이후 개신교 교세가 급격하게 성장한 나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대형교회가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미국과 비교해보면, 한국 개신교의 성장에서 대형교회의 역할은 더 두드러진다.

미국은 전 인구의 무려 55%(17천만 명)가 개신교 신자로 추정되는데, 그중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성인교인 2천 명 이상의 교회를 가리키는 대형교회 수는 1200~1500개 정도다. 반면 여의도순복음교회 부설연구소인 교회성장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이 조사 결과는 교회성장연구소 교회경쟁력연구센터 엮음, 󰡔한국교회, 경쟁력보고서󰡕에 수록됨) 한국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인구대비 18.3%(2005년 통계. 8,616,438)인데, 그중 대형교회의 수는 거의 1천 개에 육박한다.

한편 1만 명 이상의 교회를 초대형교회(giga-church)라고 부르는데, 지난해 미국 초대형교회는 70개 정도이고, 이중 2만 명 이상의 교회는 7개다. 그런데 교회성장연구소 홍영기 소장이 저술한 󰡔한국 초대형교회와 카리스마 리더십󰡕13개 교회를 초대형교회로 분류하고 있고, 이 책에 준해서 잡지 󰡔복음과 상황󰡕 기자 이승규는 한국의 초대형교회를 14개로 보았다. 이 중 성인 출석교인 2만 명 이상의 교회는 7~8개나 된다. 요컨대 한국에서 교회 대형화 현상은 미국보다도 더 뚜렷하다.

반면 위의 2008년도 교회성장연구소의 조사에서 100명 미만의 교회는 52.3%, 연간 재정규모 5천만 원 이하의 교회가 31.0%. 한데 이 조사결과는 과소 추산치로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설문대상인 11개 교단들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안정된 교단들인 반면, 조사에서 배제된 군소교단들은 상대적으로 미자립교회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설문에 응답한 864개 교회의 평균치가 설립연수가 27, 남성 전임교역자 2, 여성 전임교역자 2, 남성 집사 34, 여성 집사 60, 남성 장로 5, 여성 권사 17, 성인남성 출석자 74, 성인여성 출석자 103명의 평균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문에 응답한 교회들은 응답하지 않은 교회들보다 비교적 안정된 교회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 3대 교단의 하나로 비교적 안정된 교회들이 많은 감리교단의 경우, ‘미자립교회대책 및 교회실태조사위원회 규정에서 연말 경상비 결산액이 2,500만 원 미만의 교회를 미자립교회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감리교회 5,591개 중 약 40%에 달하는 2,225개가 미자립교회다. 이 결산액 속에는 교회당 임대료, 목회자 임금, 기타 지출이 모두 포함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교회들은 목회자의 임금을 국가가 정한 최저생계비 수준보다 훨씬 낮게 책정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상대적으로 부유한 감리교단의 사정이 이렇다면 전체 개신교 교회 중 재정규모가 2,500만 원 미만의 미자립교회 비율은 이보다 더 높을 것임이 분명하며, 아마도 (많은 추정치들이 얘기하고 있는 수치인) 50% 안팎일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대형교회가 추동한 현상이며, 그 과정은 매우 심한 양극화현상을 동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성장 시대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교회사학자 박종현 박사는 이에 대해 중요한 지적을 했는데, 목회자 파송제도가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던 감리교와 성결교에서조차 대형교회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장기간 한 교회의 목회를 전담하는 관행이 정착되었고, 이것은 3선 개헌과 유신체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한국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성장만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도록 강요하는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그토록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구기득권세력을 상당부분 대체하였고 일부 보완한 신기득권체제가 이 시기에 정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서북지역(평안도, 황해도) 장로교, 혹은 월남한 서북 출신 장로교 중심체제의 응집력이 이완되고, 교파와 출신 지역을 망라한 대형교회 중심의 체제로 재구축되었다.

이와 같이 대성장 시대 교회와 사회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성공지상주의적 총동원 체계라는 유사성을 지니며, 이 유사성이 그 시대를 운용하는 주된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교회의 빠른 변모는, 그 시대의 사회가 갖는 문제점 못지않게 심각한 많은 문제점들을 내장하고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 사회와 불화하기보다는 잘 통합되어 있었고, 또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보다는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 가령 농경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절에 아무런 보호망 없이 야만적인 도시공간으로 내던져진 이농자들의 대대적인 신자화는 그들이 사회적 불만세력 내지 전복세력이 되지 않고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권위주의적 체제 속에 잘 흡수되게 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이 과정은 그이들이 사회의 일탈자가 되기보다는 성공한 이들을 선망하고 모방하면서 열렬히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 매진하게 했다. 조용기의 3박자 구원론(풍요, 건강, 신앙의 동시적 실현으로서의 구원 담론)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통합요소로서의 신앙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부유함은 증오나 질시의 대상이 아니라 도달하려는 목표다. 3박자 구원론은 그 목표를 신앙의 목표와 동심원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사회통합적 담론의 특성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교회가 보여준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호망 없이 진행된 산업화로의 맹렬한 질주 속에 내던져진 도시 주변계층이 절망에 삐지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사회는 서로 연동되어 있었고, 기독교 편에서 그런 흐름을 주도한 것은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선망한 대다수 짝퉁 대형교회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동성은 사회통합에는 기여했지만, 교회들은 그 통합이 내포한 무수한 야만성과 폭력성을 방조했다.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와 짝퉁 대형교회는 그 야만적인 권위주의적 체제의 공범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데 이 시기 교회가 사회적 공공성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형교회가 주도한 성공지상주의와는 다른 흐름이 이 시기 개신교의 공공적 실천을 대표하였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기독교 사회운동기구들, 대중매체, 연구기관,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중소형교회들은 그 수에 있어서는 개신교의 소수그룹에 속했지만, 그 파급력은 한국 개신교, 아니 더 나아가 시민사회 전체를 대표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공공성의 측면에서 뚜렷한 궤적을 남겼다. 이들은 성공지상주의에 편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낳은 사회적 부조리, 인권침해 등을 고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탈성장주의 시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저성장 시대로 돌입하였고, 2008년 어간부터 마이너스 성장 시대가 도래했다는 불길한 추정이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신성장동력(New Growth Engine)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 견해지만, 성장지상주의를 지양하고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독일과 일본 등지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탈성장주의담론은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구축해온 성장주의 체제가 지나친 자원낭비와 생태계 파괴적인 위기의 세계를 만들고 말았다는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 우위의 시스템이 세계를 압도하게 되면서, 자연생태계의 파괴가 더욱 극심해져 기후재앙 위기설 등이 나돌고 있고, 민주주의적 질서를 뒤흔들어 중상층을 파괴하고 노동계층의 빈곤화를 심화시키며, 생존권을 위협받는 유민, 난민, 이민 현상을 극심하게 했다. 이에 탈성장주의는 자연생태계 친화적이고 인간 친화적인 의료, 복지, 교육, 신에너지 등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철학적, 제도적 문제제기와 대안적 상상력을 담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도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고, 1995년 이후에는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했다. 말했듯이 과거 대성장 시대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특히 청년계층에서는 선호도가 가장 높은 종교로 개신교가 꼽혔었다. 그때에도 개신교는 일방주의와 배타주의적 성향이 강한 무례한 종교였지만, 나쁘지 않은 이미지 덕에 사회적 저항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대성장 시대 개신교의 성장주의 담론이 이농자 등 사회 주변계층을 대대적으로 포용하였고 능동적인 사회적 생산자층으로 재무장화함으로써 사회의 긍정적 시선이 많았었다.

한데 민주화 이후 사회는 권위주의의 청산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부상했지만, 교회는 여전히 권위주의가 흔들리지 않는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심한 종미(從美)적 태도, 특히 미국이 이라크, 아프간 등에서 일으킨 전쟁까지도 지지하는 친미 호전적 태도는 개신교가 미국 패권주의의 앞잡이라는 인상을 뚜렷하게 새겨놓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대중문화에 대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로 인해 교회는 문화적으로 지체된 낡은 공간으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사회의 공공성 확대를 위해 기여할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 즉 교회와 사회 간의 연동성의 와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에 처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거 대성장 시대에 조율된 신학교육체계와 교회운영체계는 거의 개혁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산 성장주의 신기법들이 신학교와 교회를 휘젓고 있다. 신학교는 변화된 사회와 사람들을 묻는 학제적 기획이 전무한 가운데 신학생 양성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교단본부는 교회의 사회지리학적 변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목회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성장의 기획들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즉 성장주의적 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성장은 멈추거나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성장주의 담론은 탈성장 시대를 맞고 있는 오늘의 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 담론일 뿐 아니라, 신학적이고 교회론적 담론이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개신교의 미래를 말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신학적 문제제기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처럼 한국교회의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탈성장주의 신학의 가능성, 그러한 기독교의 미래를 상상하고자 한다.

우리가 말하는 탈성장주의는 두 가지 층위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다. 첫째는 외적(사회적) 변화의 층위이고, 둘째는 내적 요청의 층위다. 전자는, 성장지상주의의 청산을 도모하는 탈성장주의 기획은 교회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시대의 요청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후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지상주의가 너무 지나친 탓에 어떠한 대안적 기획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형교회 중심적인 내적 제도의 청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한데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앙의 기조는 무엇인가? 성장지상주의는 교회의 팽창을 핵심으로 하는 신학적 신앙적 기획이다. 한데 팽창은 언제나 양적 비교를 통해 가치가 평가된다. 하여 더 큰 성장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많은 사회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은 대형교회와 대형교회적 가치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대형교회가 교회들 사이에서 성공한 교회라는 의미에 한정될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말했듯이 대형교회는 2천 명 이상의 성인이 최소한 한 주에 한번 이상을 모이는 사회적 결속체다. 그만한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갖춘 결속체를 시민사회 속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교회는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는 시민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적 결속체에 속한다.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자신의 집단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대형교회는 강력한 사회적 권력집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여 대형교회의 성공주의는 신앙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세속적인 성공주의적 함의를 포함한다.

이렇게 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주의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결합될 때 그 성장지상주의는 주변으로부터 종종 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더욱이 대형교회가 계층적 성향을 가질 때 그 성장지상주의적 신앙행위는 계급적 배타주의를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오늘 한국의 교회는 이런 점을 점점 더 노골화하고 있다고 시민사회로부터 읽혀지고 있다. 하여 사람들은 오늘의 성공지상주의적 교회를 공공성을 훼손하는 사회적 결속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성공지상주의를 청산한다는 것,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앙을 추구한다는 것은 교회가 사회적 공공성에 더 많은 기여를 하도록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을 뜻한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했다. 요컨대 신앙은 (교회의 팽창이 아닌) 이웃의 공공성을 확대하려는 실천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학이 추구하는 이웃의 공공성 확대 실천이란 무엇일까?

 


탈성장주의적 기독교의 미래, ‘작은교회적 신앙

 


1990년대, 특히 외환위기의 시대인 ‘1997년 이후우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중산층의 몰락과 사회적 양극화를 포함하는 심화된 격차사회(格差社會)적 문제다. 물론 이것은 전 세계적 추세이며, 세계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내포한 구조화된 위기 양상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다른 국가들보다 좀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고, 정부는 그러한 격차화 현상을 억제하려는 시도보다는 조장하는 경향을 더 많이 나타냈다. 그것은 정부 기관이나 관료들의 도덕적 해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수출주도형 성장지상주의를 강도 높게 드라이브해야 한다는, 정부의 경제엘리트들의 불변하는 생각이 격차화를 더 조장한 셈이 된 탓이다.

전 세계적인 구조화된 위기와 그것을 더욱 심화시켜온 국가, 이것은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거대한 사회적 반작용을 낳았고, 그것이 최근 복지담론의 고조로 드러났다. 시민사회는 복지체제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각 정치세력들은 앞 다투어 복지 의제를 내세우면서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복지는 오늘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공공성의 의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권의 복지사회적 의제 경쟁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의 제도화를 실행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 정치권의 절대다수가 우파적 편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복지 의제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지, 어느 수준의 복지를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진보적 시민사회 진영의 의심이 깊다.

바로 이 점에서 복지동맹(Welfare Coalition)의 요구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북유럽을 모델로 하여 발전한 복지동맹론은 강령한 좌파정당과 노동조합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이 모델은 현실적이지 않다. 복지동맹을 구축할만한 좌파정당도 노동조합도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여 그 대신에, 무상급식을 의제로 시민사회가 뭉친 것처럼, 의제연합 형식의 사회적 동맹론이 제기되었고, 이를 위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동맹은 선거연합 때에 거대한 실체적 연대로 작동함으로써 복지의제를 정치화하는 힘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일상적인 때에 복지동맹은 실체적 성격보다는 복지 공론장에서 형성되는 담론적 연대의 형식을 띠며, 간혹 미시적 혹은 중범위적 의제연합 형식으로 실체화되곤 한다.

이 점에서 작은교회가 주목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짝퉁 대형교회는 대형교회적 가치에 신앙적 영성이 회수된 중소형 교회로 보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작은교회는 대형교회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이념형으로서의 소형교회를 가리킨다. 달리 이야기하면 성공지상주의적 프로그램을 청산하려는 소형교회라고 할 수 있다.

작은교회는 규모가 작고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갖지 못한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결론만 먼저 얘기하면 작은교회는 더 소통적이며 덜 배타적이다.

왜냐면 작은교회는 자기 소유의 공간을 가질 수 여유도 없고 그런 필요성도 덜 느끼기 때문이다. 해서 전형적인 교회 공간을 꾸밀 여유도 필요도 없다. 전형적인 교회의 공간 구조는 과거 강력하고 배타적인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갖고 있던 교회들이 모델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이런 공간 구조는 그 권력 지향적 속성을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의 생각 속에 심어 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상하의 위계질서에 더 순응적이고,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한 배타적 태도를 갖는 경향이 있는 것은 이런 공간구조의 영향력과 관련이 있다.

한데 작은교회는 대개 지속적인 사용이 불투명한 임대공간을 오직 예배만을 위한 공간으로 리모델링할 자산이 부족하다. 그보다는 좀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가꾸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작은교회들은, 의도했든 아니든, 교회당의 전형적 공간의 개혁에 참여하게 된다. 가령, 임대공간의 높이가 낮기도 하고 크기도 작아서 교회 앞쪽에 단을 설치하지 않게 되자 목사의 공간과 평신도의 공간의 이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교회 공간의 배타성과 계층성이 약화된다. 심지어 다양한 공간 활용을 위해 교회 특유의 장의자대신 1인용의자를 놓게 되곤 하는데, 이때 의자의 방향만 돌려버리면 교회당의 앞과 뒤가 바뀌고, 혹은 둥그렇게 둘러 않게 되면 앞뒤 자체가 해체되는 혁신적 공간의 효과를 드러내게 된다. 게다가 크기가 작다보니 값비싼 오디오 설치에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게 되자, 목사의 소리는 육성으로 신자들에게 전달되고, 그러면 마이크와 스피커가 일으키는 소리의 타자화 효과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목사의 초월적 권위를 강화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작은교회에서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보다는 수평적 친밀성이 더 효과적인 목회자적 자질로 작용한다. 이는 작은교회가 성장대신에 작음자체를 의미 있는 신앙으로 받아들이자, 목회자와 신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점점 더 소통적이고 더 민주적인 신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게 됨을 의미한다. 하여 실제로 많은 작은교회들은 성장을 포기하고 작음 자체를 향유하기로 한 이후, 소속 교단이 신학적으로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와 무관하게 점점 탈권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신앙공동체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한편 작은교회는 자원이 빈약한 탓에 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하여 이웃과의 연대에 더 절실하다. 게다가 교회의 헌금 규모가 작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수익성 있는 다른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많은 작은교회들은 국가 복지의 민간위탁기관이 되곤 했다. 그러면 활동가의 생계비와 공간 운영비의 일부를 국가로부터 보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교회가 복지기관의 역할을 하면서, 목회자와 교인들의 생각이 이웃과 공존하고 섬김의 신앙을 강화하는 쪽으로 변화해갔다.

또한 최근에는 공공성을 강조하는 또 다른 사회적 결속체의 양식인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교회의 주요활동으로 선택하는 작은교회들도 늘어났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협동조합 모델은 공공성을 중요한 존립의 속성으로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지역사회 혹은 이웃과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협동조합과 긴밀히 결합되게 되면 점점 교회의 신앙에서 사회적 공공성의 요소가 확장되고 이웃과의 수평적 소통성이 강화되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작은교회들 다수가 소속교단의 신학적 편향과는 무관하게 더 사회적 참여에 적극적이게 되었고 공공성 의식과 정의관이 높아지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타종교, 무종교적 기관과 개인들과도 격의 없이 대화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소통적이며 개방적인 종교성을 형성하는 데 친화적인 작은교회는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대형교회나 짝퉁 대형교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성장을 위한 신앙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작은교회와 그 신자들은 복지 공론장의 일원이 되기에 훨씬 유리하며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의제연합으로서의 복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에 더 유리하다.

실제로 수많은 작은교회들은 종교기관인 동시에 공적부조나 사회복지서비스를 위한 국가복지의 민간위탁기관이거나 혹은 민간 사회사업기관을 겸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한국사회에서 교회만큼 사회복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종교나 사회단체는 거의 없다. 또 교회 만큼 사회적 정의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종교나 사회단체는 별로 없다. 그런데 교회들 가운데 특히 작은교회는 성장주의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더 적극적으로 이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 앞서 말했듯이, ‘작은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덜 배타적이고 더 소통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복지기관일 뿐 아니라, 복지제도를 더 확대하기 위한 사회적 동맹의 일원으로서 더 안성맞춤이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은교회는 재정의 어려움과 기관 운영의 낙후성 때문에 금전으로 인한 교인간 혹은 이웃간 분쟁에 시달릴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작은교회들이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신학적 담론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장지상주의적 신학이 아닌) 사회적 공공성을 위한 신학적 재무장을 결여하고 있다. 즉 활동은 과잉인데 의식은 결핍인 양상이 작은교회의 공공신학적 현실이다. 게다가 교단들은 제도적으로 대형교회 중심적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교단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작은교회의 목회자들과 일부 교인들의 주체화는 더욱 방해를 받게 된다.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교단들을 가로지르는 작은교회간 연합이 요청된다. 이때 권위주의적 모델을 지양하는 조합형식의 조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학적, 신앙적으로 작은교회적 공공신학의 형성을 위한 활동이 요청된다. 이것은 신학연구자, 목회자들, 교인들이 함께 하는 다각도의 소통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작은교회는 오늘 우리사회의 공공성에 기여하는 개신교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 신앙의 위기에 대한 탈성장주의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맺음글

 


나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전통적인 교리나 신학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만으로 가능성을 얘기하기에는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의 현실은 너무나 부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학자인 나조차도 개신교의 자기 수사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마당에 다른 이들에게 말로 미래의 가능성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나는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실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한국 개신교를 이야기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말하고자 했다. 얘기했듯이, 한국 개신교는 세계 그리스도교의 전개, 특히 부정적 과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를 갖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근대성의 전개와 밀접하게 관계하면서 전개되었다. 한데 그 관계가 근대를 성찰하게 하는 전개가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는 퇴행적인 양상을 띠었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사회와 교회가 코딩(coding)된 근대는 미숙한 근대 심지어는 추한 근대에 가깝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는 그러한 근대의 전개를 더 적나라하고 더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하여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것으로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의 지나온 과정을 비판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한국 개신교의 대성장과 그 위기에 관한 논의가 대형교회 중심으로 역사를 조망한 결과라고 본다. 대형교회와 짝퉁 대형교회가 구현했던 대형교회적 가치는 오늘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위기의 근원적 배후다. 그런데 그런 성장주의적 신앙질서의 외부가 한국 개신교에서도 실재했고 점점 두드러지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작은교회가 그러한 질서 외부의 대표적 주역의 하나라고 본다. 작은교회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 가능성을 점점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을 요약하면 덜 배타적이고 더 소통적인 신앙과 실천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세계정치경제 질서가 세계를 양극화하고 고통을 심화시키는 상황에서 작은교회의 반성장주의적이고 탈성장주의적 가치와 실천은 의미 있다. 무엇보다도 복지동맹이 절실한 오늘의 세계에서 작은교회는 복지동맹의 주요한 일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단언한다. 작은교회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전 세계적인 여러 활동들과 함께 할 개신교적 주체이며, 그런 점에서 작은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