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평

[서평] 홀로코스트 이후를 '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독교사상] 2014년 3월호에 실린 서평


-------------------------




홀로코스트 이후를 '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종교간 대화와 정치적 분쟁의 틈에서

미야타 미쓰오, 박은영 양현혜 옮김




홀로코스트 담론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거대한 윤리적 자본이 된 시기는 1960년대 이후다. 유대인임에도 반(反)시오니스트 정치학자인 노먼 핀켈슈타인(Norman G. Finkelstein)은 이렇게 담론화된 홀로코스트를 ‘더 홀로코스트’(The Holocost)라고 명명하고, 나치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을 가리키는 ‘나치 홀로코스트’(Nazi-Holocost)와 구별한다. 즉 ‘나치 홀로코스트’가 체험된 홀로코스트라면, ‘더 홀로코스트’는 1960년대 이후 시오니즘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해석된 홀로코스트다. 요컨대 ‘더 홀로코스트’는 나치 홀로코스트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기억의 정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담론적 정치의 배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럽 국가들이 연계된 국제정치적 동맹관계가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이러한 국제정치로 인해 조성된 보상금과 기부금, 출판, 영화, 드라마 등 이른바 홀로코스트 산업의 이권을 누가 전유할 것인가의 문제가 ‘더 홀로코스트’ 담론과 뗄 수 없이 뒤얽혀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 기억의 정치의 중심에는 루마니아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엘리 비젤(Elie Wiesel)이 있다.


핀켈슈타인에 의하면, 엘리 비젤 등이 주도한 홀로코스트 담론을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더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처럼 홀로코스트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모든 집단학살 사건, 나아가 모든 악을 해석하는 준거가 되며, (2)그 함의는 ‘(나치라는) 비이성에 의한 야만의 무분별한 광기’에 있다는 것이다. 하여 핀켈슈타인에 의하면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유대국가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에게 가하는 모든 반인륜행위와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재로 작동한다. 왜냐면 이스라엘의 건국과 지배는 ‘무분별한 야만에 대한 이성의 통제’라고 스스로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이 이데올로기가 윤리적 얼굴을 한 치졸한 산업에 지나지 않음을 비판한다.


그럼에도 비젤이 주도한 홀로코스트 담론은 세계화되었다. 비젤은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홀로코스트의 참혹상을 다루는 드라마와 영화, 다큐멘터리 등이 속속 제작되어 전 세계에서 방영되었으며, 수많은 출판물들이 전 세계에서 제작, 번역되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무수한 학문적 연구들이 수행되었다. 이 모든 담론화는, 핀켈슈타인이 요약한 대로, 그리고 비젤이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말 한 대로, “홀로코스트는 유일하다”는 정식에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홀로코스트 담론의 세계화에 가장 빠르고 적극적으로 반응한 곳은 독일이었고, 특히 가해자 의식에 대한 가장 통렬한 자기비판이 요청되었던 그리스도교 신학 분과였다. 독일 특유의 관념주의를 청산하고자 ‘정치신학’ 운동을 이끌었던 도로테 줼레(Dorothee Sölle)를 포함하여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헬무트 골비쳐(Helmut. Gollwiter),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 마르크바르트(Friedrich-Wilhelm Marquardt) 등은 자신들이 주창한 정치신학의 기조를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를 주목한 이들이 자신들의 신학운동의 전거를 비젤 등, 홀로코스트 담론을 이끈 유대인 사상가들에게서 찾았음은 물론이다. 하여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비젤처럼 홀로코스트를 절대악으로 보면서 나치를 야만의 광기를 대표하는 표상적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독일 정치신학이 당시 남미에서 벌어지고 있던 해방신학을 지지, 지원하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남미에서 자행된 독제체제를 야만의 광기로 규정하고, 해방신학과 정치신학을 이성의 합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의 민중신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 기조는 영미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존 로빈슨(J.A.T. Robinson)은 아우슈비츠를 ‘문명의 야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미국의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이끌었던 로버트 펑크(Robert Funk)나 최근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제2성서(신약성서) 연구자의 한 사람인 버튼 맥(Burton Mack) 등을 필두로 하는 많은 연구자들은 레이건-부시의 정부와 그이들을 지지했던 근본주의적 개신교를 비이성의 광기로 보면서 초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역사를 해석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이스라엘의 톰 세게브(Tom Segev)와 미국의 피터 노빅eter Novick)으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학에 대한 수정주의 연구가 대두하였는데, 이들에 의하면 엘리 비젤 식의 홀로코스트 담론은 미국과 유럽이 이스라엘과 공모하여 벌인 국제정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폴란드계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나치야말로 대표적인 ‘근대적 합리성’의 산물임을 논증함으로써 ‘야만의 광기’로 보았던 엘리 비젤 식의 홀로코스트 담론을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신학계에서도 홀로코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유대인 신학자인 마크 엘리스(Mark Ellis)와 기독교 제1성서(구약성서) 학자인 키스 휘틀럼(Keith W. Whitelam) 등으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 해방신학 연구자들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신학을 메타비평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원주민을 비역사화하고 비존재화 하였는지를 문제제기하였다.


일본의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미야타 미쓰오(宮田光雄)의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종교간 대화와 정치적 분쟁의 틈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이 두 대립적 논의를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격한 논쟁과는 달리 저자는 책의 거의 대부분을 홀로코스트 담론의 의의를 존중하면서 그 논의를 소개하는 데 할애하고 있고, 단지 책 말미에 홀로코스트 담론의 ‘보완적 요소’로서 미트리 라헵(Mitri Raheb)과 마크 엘리스의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홀로코스트 담론의 비판론을 다룬다.


이렇게 후자가 전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처럼 소개하는 것은, 홀로코스트 정치의 이해관계 밖에 있는 한국과 일본의 독자에게는 일견 균형 있는 재배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는 자국민이 관여된 집단학살 사건들에 대해서도 성찰적 논의가 많이 부족한 편이다. 그런 독자들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깊이 있은 성찰의 담론을 소개할 틈도 없이 홀로코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 것은 성찰을 결여한 비판의식만 발달시키는 셈이 될 수도 있다. 하여 저자는 대립이 아닌 보완의 관점에서 이 둘을 배치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재배치는 별로 성찰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면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된 2009년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2013년은 1960년대 서양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핀켈슈타인은 서양의 1960년대도 미국, 유럽, 이스라엘의 국제정치적 야합과 홀로코스트 담론의 활성화가 긴밀히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 시간성이 홀로코스트 담론의 진정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보지만,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청산과 유대인 학살의 진상규명이 전범재판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기에 나치의 반인류범죄와 집단학살에 대한 전 지구적 시민사회의 청산 운동이 필요했고, 그것이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완성된 1960년대에 일어난 것은 적절한 시간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09년은 이스라엘에서 극우보수정권이 집권한 해이고, 2013년은 극우정권이 더욱 강경하게 재집권한 다음해이다. 하여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제 양식이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강경보수 정권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 이용되고 있는 ‘더 홀로코스트’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소개하는 것이 여전히 정당한가의 문제에 고개를 갸우뚱 거릴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저자가 쓴 글들의 묶음집이고, 그 발표 연도가 1998~2004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글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을 때의 시점에서 내용에 대한 수정 보완이 불가피했을 것임에도, 이런 시간성의 부적절함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은 점은 이 책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책의 부제를 ‘종교간 대화와 정치적 분쟁의 틈에서’라고 지었다. 실제로 책의 내용도, 가령 4장에서 아브라함의 여정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제1성서의 「창세기」와 제2성서, 그리고 코란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해석을 소개한 것은 독자에게 ‘종교간 대화’의 지형에서 독서하도록 안내한다. 이것은 종교간 대화의 경험과 노력이 일천한 한국의 독자들에게 매우 적절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종교적 논의를 다룬 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꽤 훌륭한 저작인 이 책이 이런 식으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은 그 영향사의 차원에서 더욱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한 시간성의 부적절함이 여기서도 여전히 드러난다. 즉 부제의 논지를 담아내는 데 있어 책의 내용상의 한계가 뚜렷하다. 위에서 언급한 제4장을 빼고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팔레스타인 원주민은 종교간 대화나 분쟁의 내용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그것도 부수적 보완의 맥락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1960년대가 아닌, 2천 년대에는 더 중요한 정치적 분쟁이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의 문제인데 책의 내용은 부제가 언급하고 있는 종교간 대화와 정치적 분쟁의 시점을 독자의 동시대에 맞추어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본의 제목인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는 일본어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한데 나는 이 제목을 해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자가 책의 도처에서 중요하게 소개하고 있는 엘리 비젤이 홀로코스트를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하여 그 사건 이전과 이후의 모든 집단학살과 반인류범죄가 홀로코스트를 준거로 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마치 예수를 유일무이한, 신 바로 그 자체라고 설명한 그리스도론에 따르면 예수가 시간성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의 준거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그것에 ‘이후’라는 명사가 붙어 있다. 그렇다면 ‘홀로코스트 이후’는 홀로코스트라는 유일무이한 개념의 ‘이후’여야 하지 않는가? 마치 모더니즘의 개념을 해체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함의를 가지고 사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표현처럼 말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 속에 존재했던 단지 한 사건이 일어난 그 이후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사건은 유일무이한 사건, 모든 것의 준거가 되는 사건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고, 수많은 사건들과 비교하면서 그 의의를 평해야 하는 그 하나일 뿐이 아닌가? 여기서 다시 나는 이 책이 유일무이한 사건을 전제로 하는 엘리 비젤 식의 홀로코스트 담론의 소개에 치중하고 있는 것의 한계 지점에서 독서하기를 망설이고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生きる)』(Living beyond the Holocaust: Between inter religious discourse and political conflict)는 유익하다. 그동안 여간해서 보기 어려웠던 유대교 신학과 철학의 홀로코스트 해석의 깊이를 체감할 수 있는 책이어서 유익하고, 그런 맥락에서 종교간 대화의 논점에서 시종일관 홀로코스트 문제에 다가갈 수 있어 유익하다. 사실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기독교 서적 몇권을 보았지만, 그 책들에서 종교간 대화와 정치적 분쟁의 맥락은 전제되고 있기는 해도 내용에서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반면 이 책은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가 ‘살다(일본어 제목의 生きる)/살아가기(영어 제목의 living)’라는 제목의 문구처럼 과거의 정보를 습득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려는 취지를 갖고 있음에도 동시대성이라는 시간의 차원을 담아내지 못하는 책의 구성과 내용이 나의 독서를 방해한다. 그런 점에서 만약 저자가 동시대성을 강조한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홀로코스트 담론을 비판하는, 이른바 팔레스타인 해방신학적 시각의 홀로코스트의 비판담론을 더 많이 논의하고, 그것으로 엘리 비젤 등의 홀로코스트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왜곡의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필요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