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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하늘뜻나누기] 사과하지 못하는 사람들

"세월호 사건은 우리사회의 총체적 부실의 산물입니다그것은 몇몇 무책임한 선원들의 문제만도 아니고이상한 기업 혹은 종파의 잘못된 경영 방식의 문제만도 아니며몇몇 정부 기관과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민간 기관들의 부실과 비리의 문제만도 아닙니다사건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양파껍질 벗겨지듯 더 높은 곳더 강한 곳과 이 문제들이 얽혀 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근저에는..."(본문 중)


*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2014년 5월 11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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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지 못하는 사람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창세기」22,8




배가 기울고 있다는 딸의 문자를 받은 아빠는 구명조끼를 입고 침착하게 승무원들의 통제에 따르라고, 그리하여 구조 받으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딸을 포함한 배 안 선실에 있던 누구도 구조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며칠 후 시신이 되어 돌아온 딸에게 아빠는 오열하며 미안하다고 수없이 되뇌며 울부짖습니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청천벽력 같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도대체 이 명령에 어떤 아비가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는 필경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겠지요. 이제까지 그 험한 여정 속에서도 자신과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늘그막에 아들까지 준 하느님, 그 아이를 통해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주시겠다고 약속한 그 하느님이 이젠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합니다. 그 지엄함을 거스를 수 없으나, 약속을 스스로 어긴 그 분의 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지 수없이 되뇌었고 저 냉혹한 명을 내린 분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명을 돌이켜 달라고 절규하듯 간구도 해 보았지만, 신은 밤새 침묵하기만 했습니다.


아침 일찍 그는 아들과 종 둘과 나귀를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모리아 산, 훗날 아브라함의 숭고한 순종이 간직된 그 땅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는 전승이 만들어졌지만(역대기하3,1),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브라함에게 그 길은 너무나 참담함을 안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사흘이 걸렸다고 합니다. 3, 아니 30년도 넘는 혹독한 시련의 여정을 견뎌야 하는 시간 같은 사흘이었겠지요.


어느덧 산이 보입니다. 그는 이삭만을 데리고 신께서 지시한 그 산으로 오릅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번제물은 어디 있나요?” “신께서 준비해 놓으셨다.” 짐짓 무뚝뚝한 척 답합니다.


아직도 그는 아들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온통 자신에게 닥친 그 고통과 혼란에 사로잡혀, 아비가 섬기는 신 때문에 죽어야 하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차마 할 수 없는 그 말을 어떻게 전할지 망설이다 이제까지 말 못한 것일까요? 아무튼 아들도 이 심상치 않은 느낌을 수없이 참다가 겨우 물었는데, 아브라함은 또 다시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돌로 제단을 만들었고 가져온 장작을 제단에 펼쳐 놓았습니다. 창세기본문은 그 순간까지도 아무런 감정을 실어 나르지 않습니다. 돌 하나 장작 하나 놓을 때 아비의 찢어지는 심정, 그리고 아들의 심상치 않아하는 느낌은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장작 위에 올려놓고 꼼짝달싹 못하게 묶는 장면도 너무나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장작을 매고 아비를 따른 것을 보니 아들이 너무 어린 나이는 아닙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기회도 없이 이 당혹스런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 아들은 그 순간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요? 혹시 아들의 저항은 없었을까요? 아비는 아들을 설득 했을까요 아니면 완력으로 했을까요? 혼절시킨 뒤 제단에 결박한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아들은 제단 위에 묶였고 두 손으로 칼을 쥐고 높이 쳐든 아비를 바라봅니다. 아비는 언제나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고 배웠고, 그러니 아비에게 순종하라고 배웠는데, 지금 이 순간의 아비를 아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왜 아비는 신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지 않았을까, 길을 떠나기 전에 아니 사흘간의 여정 중에라도, 그것도 아니면 제단 앞에서라도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순간 아들은 신의 명령 앞에서 뼈가 타들어가는 아비 고통을 헤아릴 틈도 없습니다. 아니 배신감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창세기는 그 순간 신이 개입하여 살해를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제사는 신이 제공한 번제물로 드렸고요. 그리고 제사를 마치고 아비는 종들과 브엘세바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 그런데 웬일인지 아들 얘기가 빠졌네요. 신께선 아브라함의 믿음을 치하했다고 하고 더 큰 축복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리아 산으로 갈 때 여러 번 언급되었던 아들인데, 집으로 돌아갈 땐 종들과 나귀를 챙기는 아비의 일행에 아들 얘기가 없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후대의 많은 해석자들에게는 이 점이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해서 어떤 해석자는 신은 그 순간 개입하지 않았다고 단언합니다. 심지어 아비는 신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몽상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비였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있을 수 없었고, 훗날 그 비정한 아비를 조상으로 섬기는 후손들이 신이 아들을 극적으로 살렸고 그 믿음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였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해석이 너무나 과격해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나 유대교 랍비들로서는 동의하기 쉽지 않았지만, 아비를 시험하겠다고 아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린 신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은 모든 해석자들이 동감하는 바였지요.


그래서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아비가 칼을 높이 치켜든 순간을 아들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해서 아들은, 신의 극적인 개입으로 살아났음에도, 아비를 받아들일 수 없어 방황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입니다.


폴란드의 한 맑시스트 철학자는 아브라함은 이 일 이후 가족과 함께 브엘세바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아들은 그 충격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아비만 보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는 있을 법한 상상적 후일담을 만들어냈지요.


또 유대교의 미드라쉬에는, 모리아 산 제사 이야기에 이어지는 창세기23장 첫 부분에 아내 사라의 죽음이 언급된 것을, 남편이 아들을 죽이려 한 것에 충격을 받은 결과라는 해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창세기에서 비정한 아비의 행동은 신으로부터 칭찬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요? 위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해석자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그 충격으로 죽었고, 아들도 그 충격으로 다리를 절었거나 분을 참지 못하는 이가 되었다는 그럴듯한 상상적 해석이 덧붙여졌습니다. 심지어 아비가 받은 명령은 신의 것이 아니라 악마의 것 혹은 망상적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해석은 완전히 반전됩니다. 아비가 받은 신의 축복은 부당한 믿음에 대한 자기 망상이요 착각이라고 말입니다.


난감한 일입니다. 해석은 이제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아비의 관점에서 볼지 아들의 관점에서 볼지. 하지만 양자를 아우르는 출구가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사과입니다. 아비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신에 대한 아비의 복종은, 적어도 아비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했던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승무원의 통제를 따르라고 말한 아비는 딸에게 피를 토하듯 사과를 합니다. 그가 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을 그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데 사과해야 할 이들은 아직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고가 일어날만한 부실함과 부패의 최종 책임자이자 사고 관리의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의 사과가 절실합니다.


대통령의 영혼 없는 빈 말들, 책임 떠넘기기, 뻔한 연출 등은, 그것들이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설레발 떠는 방송과 신문들의 허황된 치하의 말들은, 사과 없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는 신의 말들처럼, 더 근원적인 의혹과 비판에 직면하게 할 뿐입니다. 이 정부를 여전히 정당한 정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 받아들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사회의 총체적 부실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몇몇 무책임한 선원들의 문제만도 아니고, 이상한 기업 혹은 종파의 잘못된 경영 방식의 문제만도 아니며, 몇몇 정부 기관과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민간 기관들의 부실과 비리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양파껍질 벗겨지듯 더 높은 곳, 더 강한 곳과 이 문제들이 얽혀 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반인간주의 혹은 반생명주의적 가치, 그리고 성공지상주의적 가치가 깊게 파고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여 사과는 이러한 문제들을 청산할 의지를 시민사회에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희생자들의 죽음이 숭고한 것이 될 수 있고, 그 가족들과 생존자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 가치 있게 남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치 5.18 희생자들을 매년 기리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듯,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모든 의례들이 빈 말들로 가득한 의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빈 말들로 가득한 의전에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작된 언론들과 이데올로그들의 위선적 말들로 자화자찬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대중을 극단으로 몰아가고 체제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저항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하여 사회가 지속하기를 바란다면 진정한 사과, 잘못된 것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과 청산의 과업이 진정성 있게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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