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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하늘뜻나누기] 시나이는 '없다'

그런데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은 여전히 말을 함부로 하는 습성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또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막말과 김삼환 목사의 막말은 그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일합방과 한국전쟁이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했고, 세월호 침몰이 하느님의 경륜이었다고 말했지요.(본문 중)


*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2014년 6월 15일) 원고입니다. 



시나이는 ‘없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예레미야서」 8,8


 

최근 몇몇 대형교회들이 교회 정관을 개정했거나 개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특히 올해 초 사랑의교회의 정관 개정 문제가 세간의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이들 교회가 개정했거나 하려는 정관의 내용이 예외 없이 우리 사회의 공공성의 관점에서 상식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골자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목사와 당회의 권한을 더 강화하고 교인들의 권리를 더 제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재정의 비공개성을 더 높이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당회 의결정족수를 2/3에서 과반수로 낮추고, 교회의 모든 기구와 기관 및 소모임은 당회의 승인인 있어야 하며, 당회가 교인과 기관을 치리할 수 있도록 하였지요. 또 제직회의 예·결산 심의 및 의결권을 없애고, 공동의회의 의결정족수를 과반수에서 2/3로 강화했고, 재정장부 열람요건도 강화했습니다. 또 교인의 자격에 관해서도 십일조 등 재정봉사의 의무를 필수요건으로 적시하고, 당회의 결의에 의해 교인의 권리가 제약될 수 있도록 했으며, 당회가 불허하는 집회에 참여할 경우 불법행위로 간주되어 교회의 치리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도 신설되었지요.


이에 대한 거센 비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들은 이미 이런 식의 정관을 통과시켰고, 사랑의교회는 약간을 수정하여 6월 말까지는 정관의 개정을 완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상태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이 어느 땐 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의 당회원들 가운데는 국회의원, 법대교수, 법조인 등이 다수 포함되었지요. 곧 그들은 결코 법의 무지한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법의 기술자들, 법을 가진 자들입니다. 


한데 이런 일은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권당인 새누리당은 자기들이 주도하여 만든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하려는 작업을 이미 착수하였고, 또한 자신들이 주도하여 만든 교육감 직선제 법안도 폐기하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무수한 법률들이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정부는 특히 법전문가들이 즐비하게 포진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법을 몰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의 정부여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오정현 목사가 세월호 관련 막말을 보도한 PD수첩에 교회가 손해배상청구를 했고,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측은 한일합방과 한국전쟁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강연한 내용을 보도한 KBS에 손해배상청구를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또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 정치인들, 심지어 청와대 등도 손해배상 청구의 주체가 되곤 합니다. 또 많은 기업들이 노동쟁의를 벌인 노동자들에게 전 세계적으로도 악명 높은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손해배상청구는 어느덧 권력자들의 무기가 되었고, 거기에는 영락없이 법률 전문가들의 놀라운 활약이 수반됩니다. 그러기에 A급 법조인의 전관예우 금액이 1년에 최소 100억 원 이상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멸망을 앞둔 유다국의 악취 나는 풍경 하나를 고발하고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에도 바로 법의 전문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율법을 ‘아는 자들’이 자행한 법 해석의 장난질이 국가를 멸망의 길로 치닫게 했다는 비판입니다.


유다국은 오랜 동안 법치국가를 이루지 못한 저발전의 국가였습니다. 이런 저발전 군주국의 왕은 국가의 시조로 추앙되는 다윗 왕을 모범으로 삼으며 국가를 다스렸습니다. 설화 속의 다윗은 전무후무한 정복군주였고, 신과 인간에 대한 신실함에서도 더 없이 위대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단점을 넘어서는 인간적 위대함이 돋보이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여 신은 그런 그를 무조건 신뢰하고 무한한 축복을 선사합니다. 이런 비교될 수 없는 축복의 수혜자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의 주체를 일컫는 용어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상징이었고, 이후의 모든 왕은 그를 모범 삼아 왕이 되고 통치를 합니다. 이론상 모든 왕들도 카리스마적 지도자입니다.


한데 그런 유다국이 발전을 하고 영토도 꽤 확장되었으며 제법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왕과 국가의 공신들이 중심에 서고 귀족들이 나라를 대표하며, 무지렁이 대중이 그들에게 종속되는 나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 속도는 매우 빨랐고 그 만큼 제도의 정비는 부실했습니다.


한데 요시야 왕이 등극하고, 그에 의해 유다국은 법치 국가로 발전합니다. 귀족과 공신들은 물론이고 왕도 신의 뜻에 어긋나면 징책의 대상이 되는, 즉 무한축복 신학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건부축복 신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법정신은, 세세하게는 문제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권력 관계의 비대칭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의식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이집트의 파라오에 의해 비운의 최후를 맞이한 이후 유다국은 급전직하 몰락의 길로 떨어져 갑니다. 근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시야 이후의 군주들은 누구든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아닌 법치의 중심으로 통치를 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유다국은 법치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주장하는 모호한 통치가 더 이상은 불가능했습니다. 문제는 포스트 요시야 시대의 법치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독설을 퍼붓는 것처럼, 법을 아는 자들의 농간에 의해 법이 권력을 옹호하고 심지어 힘의 남용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대형교회가 그렇듯이, 그리고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정부의 하나인 오늘 우리의 정부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대형교회는 오랜 동안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모든 자원이 독점되어 왔지요. 한데 오늘 이들 교회들은 세대교체의 시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교회는 과거처럼 목사 1인에게 모든 것을 위탁할 만큼 고분고분한 신자들로 채워진 장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존성 강한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여 많은 교인들은 목사들과 대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단지 교회의 질서를 위해 목사에게 정중히 예우를 하고 있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지도력으로 똘똘 뭉친 대통령 1인에게 자신의 생명과 꿈을 위탁하는 국민이 아니라 그를 평가하고 자기의 요구를 당당히 말하는 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단지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대통령에게 정중한 예우를 하고 있을 뿐, 그이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은 여전히 말을 함부로 하는 습성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또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막말과 김삼환 목사의 막말은 그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일합방과 한국전쟁이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했고, 세월호 침몰이 하느님의 경륜이었다고 말했지요.


이런 식의 주장은 기독교 특유의 언술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으니, 모든 일어난 일도 하느님의 계획 아래 있다는 교리적 주장과 말입니다. 한데 이런 주장은 하나의 논리적 문법을 갖고 있는데, 일어난 일은 일어날 다른 일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라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가치를 갖는 것이고 후자는 더 위대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하여 전자는 후자를 위한 희생물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런 교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도대체 세월호 사고로 죽은 이들과 그이들의 부모에게 이 죽음보다 더 큰 가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요. 도대체 한일합방이나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에게 그 희생보다 더 큰 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요컨대 이 교리가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것은 희생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바로 그런 태도를 여러 대형교회 목사들, 대통령과 고위관료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진정성 없는 사과와 형식으로 그치는 애도 말입니다.


문창극 씨나 오정현 목사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처럼, 대중은 무지하고 게으르며 미개하므로 그들을 지도할 엘리트가 필요하고, 이들 엘리트는 더 큰 가지를 위해 미개한 대중의 희생을 감수할 수도 있다는 것, 바로 이런 가치관을 그들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데 요시야 왕정의 법치는 중요한 논점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것은 법의 근원적 장소인 시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시나이는 국경 밖에 있고, 어떠한 권력도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미지의 산’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산을 알지 못하고, 누구도 그 산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법의 제정자인 모세조차 국가의 창건자가 되지 못하고 사라져야 했습니다. 곧 법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고, 독점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동하듯이, 누구도 대중의 가치를 함부로 도구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