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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비평

이재원_ 안병무의 예수사건 이야기 - 열려있는 해석학적, 실천적 지평

이 글은 안병무 선생 추모 19주기 기념강연회(2015.10.18)에서 이재원 교수가 발표한 글입니다. 안병무에 대한 학문적 평가와 문제제기, 그리고 저의 안병무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 등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다 동의하기 어렵지만 재밌고 좋은 글입니다. 


이 강연회 자료집을 첨부합니다.

자료집_2015 심원 안병무 선생 추모강연회(2015 10 18).pdf



이날 행사 동영상도 링크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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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의 예수사건 이야기

열려있는 해석학적, 실천적 지평

 

 

 

 

 

 

 

 

 

오늘 심원 안병무 선생님의 19주기를 맞이하여 그분을 기리고 추모하는 이 뜻깊은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또한 제게는 과분하고도 벅찬 과제를 주신 심원기념사업회 여러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리며, 아울러 늘 안병무 선생님을 기억하는 향린공동체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강연을 부탁받았을 때 제가 겸허하게 받아들인 것은, 성서신학자인 저 개인에게 있어서 선생이 하신 민중신학적 작업은 평등적 정의에 근거한 다른 비판적 사회이론들과 함께 해방적 성서해석의 실천을 지향하고자 하는 저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준거틀(reference frame)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지구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민중의 고통의 현실, 한반도 민중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민중의 처참한 현실은 우리의 시대를 죽은 민중의 시대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신학하는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제이며 동시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도권 교회를 향한 예언자적 비판의 목소리로 그 실천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민중의 시대를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교회의 시대를 말해야 할 때입니다.

민중신학자이자 성서신학자로서 안병무 선생은 그분의 민중해석학적 통찰력과 방법론적 상상력, 민중해방의 실천지향성을 견지하는 가운데 여러 신학적, 성서해석학적, 실천적 주제들을 광범위하게 자유롭게 다루셨습니다. 그래서 안병무 (다시) 읽기라는 작업은 아직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가능성들과 한계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여전히 열려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면서 이 강연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글에서 나는 선생의 민중신학적 성서해석과 한국 민중신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분의 예수사건과 민중, 민중의 이야기로서의 마가복음, 오클로스 민중론을 중심으로 선생의 예수사건 이야기가 갖는 성서해석학적, 민중신학적, 해방실천적 함의를 여러분과 함께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사건

 

태초에 케리그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에 예수사건이 있었다.[각주:1]

 

안병무 선생의 글과 민중신학적 사유에 조금이라도 접했던 사람들은 예수사건이라는 말에 다소 익숙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민중, 오클로스와 나란히 선생의 글에 너무도 자주 등장하는 이 예수사건(Jesus Event)의 개념화는 이 개념의 사용빈도수와 부가된 의미에 비교해볼 때 그리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선생은 독일권의 성서신학자들 가운데 예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사건을 가리켜 예수사건과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개념들을 사용한 빌리 맑센(Willi Marxsen)의 영향을 받은듯한데, 그 후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은 사회학적 방법론을 성서해석에 도입하면서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는 개념을 확산시켰으며, 북미권에서는 리차드 호슬리(Richard A. Horsley)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의 활동과 실천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 예수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제는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수운동은 역사적 예수가 그의 (여성)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민중)과 함께 1세기의 갈릴리, 갈릴리 주변, 그리고 유대 등의 사회정치적-종교문화적 공간에서 벌였던 운동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지배권력층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이후에도 (역사 속에 남아 기억되었던지 그렇지 않았던지 간에) 예수가 벌인 운동을 계속 이어간 공동체들의 운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여 예수운동()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안병무 선생은 그의 신학적 작업 전반에 걸쳐 예수운동이라는 개념보다는 예수사건이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 그리고 선생은 예수사건이란 말로 무엇을 뜻하고 이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여기서 나는 선생이 예수사건개념에 부여하는 의미의 중요성을 그것이 갖는 역사적, 정치적 차원과 민중실존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잘 아는 바와 같이, 선생은 예수사건이라는 말로써 역사 속에서 예수가 행한 일과 그 역사적 예수에게 일어난 일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고자함이 분명하다. 특히 로마제국의 식민지지배통치의 가장 극악한 폭력형태인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서의 예수사건을 역설함으로써 예수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무엇보다도 부각시킨다. 이점은 오늘날 신약성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신학적, 신앙적 관점과 입장에 따라 여전히 여러 갈레로 나뉘어져 있다. 1970, 1980년대 한국의 민중의 상황에서 민중사건에 비추어 다시 본 역사적-정치적 사건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사건은 그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당시 서구의 종교사학적, 역사실증적 연구방법론적 접근과는 질적으로 구별시키게 하는데,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선생은 예수사건을 외친다.

그런데, 선생의 역사적-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예수사건해석은 예수사건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케리그마 선포와 대립시키는 일을 수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안병무 선생의 예수사건 대(vs.) 케리그마의 이분법적 도식은 불트만학파의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설정된 역사적 예수 대 케리그마의 예수라는 도식을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재설정한 변형된 이분법적 도식이라고 나는 본다. 이렇게 볼때, 선생은 저들 이분법적 도식에서 역사적 예수대신 예수사건으로 대체했지만 여전히 케리그마와 대조시키는 이분법적 구도자체를 결정적으로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나는 본다. 다른 한편, 선생의 이러한 예수사건 대 케리그마의 이분법적 해석은 당시 (지금도 별로 변한 바가 없지만) 한국 교회에 팽배해 있던 역사 속에서 살았던 예수가 삭제된 채 교리와 교권의 테두리 안에서 탈역사화, 탈정치화되어 있는 기독론적인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였다. 나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오늘의 교회와 신학을 향해서도 여전히 타당하고 절실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예수사건 대 케리그마의 이분법적 해석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는 선생이 제도적 그리스도교의 틀에서 후대에 발전된 소위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High Christology)을 처음 예수운동의 케리그마 선포에 시대착오적으로 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15,3~8이나 빌립보서2,6~11절에서 바울이 전하는 케리그마 전승에 대해 선생은 이렇게 가정했다:


이미 제도화된 교회 안에 예수사건 자체보다 자체 보존을 우선하는 세력과 이에 반하여 그것에 속하면서도 그 자체의 제도나 교조화된 교훈 따위에 대한 관심보다 예수사건에서 받은 충격으로 충일된 층이 있었을 수 있지 않을까.[각주:2]


처음의 케리그마를 (유대교와 구별되지 않고 또 아직 형성되지 않은) 제도화된 교회공동체의 산물로 (잘못) 전제하고, 케리그마를 (마가)복음에 깔려있는 예수사건과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건과 케리그마의 대립관계를 가정한 것이다. 서구 신약학자들은 오랫동안 복음서 배후에 있는 예수공동체를 유대교와 분리된 종교적 교회 공동체로 파악했고, 이렇게 상상된 종교적 공동체를 복음서들에 있는 예수 전승들이 유래된 삶의 자리로 간주했다. 유대사회 및 로마제국 등 고대 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주류 신약학자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근대적 사고틀을 예수의 삶과 신약성서를 해석하는 데 무비판적으로 적용했다. 예수사건 대 케리그마라는 이분법적 해석이 갖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예수사건 해석은 저들 서구 성서학자들의 역사해석의 틀을 비판적으로 뛰어넘었다. 그것은 흔히 언급되고 있는 주객도식의 극복이 아니라 예수이야기가 전승된 삶의 자리를 양식비평이 말하는 종교적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당시에 살았던 민중의 삶의 자리로 옮겨놓은 것에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선생의 예수사건이 갖는 사건의 현재화의 가능성을 주목하고자 한다. , 예수사건이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고 시공을 뛰어넘는 유사한 민중의 상황 속에서 다시 현재의 사건으로 만나고 경험될 수 있는 실존적 가능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의 예수사건이 민중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것처럼, 전태일 사건을 비롯한 오늘날 숱한 민중들의 고통과 저항을 통해 갈릴리 예수의 사건이 재현되고 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과 맘몬과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놀아나는 오늘날 제도권 교회의 케리그마가 아니라 민중의 현장과 사건 한가운데서 예수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언의 해석학을 사건의 현재화를 통해 끌어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예수사건 개념화는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예수사건과 당시 민중과의 실존적 해후로서의 사건성 사이에서 예수의 활동을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운동(movement)의 차원에서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 한계는 선생의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로서의 민중, 예수사건의 전승형태로서의 이야기, 그의 오클로스(oklos) 민중론, 그리고 민중의 이야기로서의 마가복음해석에도 내재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 이야기: 저항과 해방의 사회적 기억으로 전해진 민중의 이야기

 

예수사건 자체가 정치권력의 폭력에 의해서 발생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전승은 비공개적으로 동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문서로서가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구전형태로 전해졌을 것이다. 이 전승양태를 사회학적으로 규정한다면 바로 유언비어인 것이다.[각주:3]

 

어느 성서학자가 예수의 삶과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가난한 농민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자들 등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에 의해 구술의 이야기 형태로, 그것도 유언비어의 형태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귀에서 귀로 듣고 또다시 입으로 입으로 전해졌다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안병무 선생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의 오클로스 민중론과 함께 예수전승의 유언비어론은 선생의 성서해석에 있어 가장 독창적인 발상이다. 선생은 구전형태로서의 민중의 이야기 전승 양식뿐만 아니라 이들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분명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일종의 저항적인 불온한 형태라는 표현과 인식에서 선생은 기억이 갖는 저항의 의미를 놀랍게 해석하고 있었다.

선생은 유언비어가 가해자 혹은 피해자 두 계층에 의해 유도된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이로써 지배계층의 유언비어(public transcript)의 측면과 피지배계층의 유언비어(hidden transcript)를 정확하게 구분했다. 안병무의 탁월한 통찰력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5월 광주항쟁의 경험을 통해 미국과 전두환 군사정권의 물리적 힘에 의해 강압적으로 철저하게 봉쇄, 통제된 상황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들이 흘린 피의 진실이 공권력이 선전하는 공적인 유언비어(public transcript)를 뚫고 가려진유언비어(hidden transcript)의 형태로 전달되고 기억되어왔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지배권력의 공적인 유언비어(괴담)와 민중/시민들의 유언비어의 대립의 상황은 지금도 세월호 참사의 경우를 비롯하여 사회 곳곳에서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선생은 지배층의 억압적인 폭력에 대적할 현실적인 힘이 없는 민중의 저항형태로서의 유언비어의 기능과 역할을 예수사건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전한 민중의 예수사건 전승에 유비적으로 적용시켰다. 그런데 선생의 주장과는 달리, 나는 처음 제자들과 민중들의 예수부활 선포도 지배계층의 공적인 귀에는 들리지 않는 가려진 반제국주의적 메시지로 일종의 유언비어의 성격을 띠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예수사건 대 케리그마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무리하게 견지해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반면, 초기의 가려진 대본으로서의 케리그마의 반로마제국적 메시지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오히려 본래의 메시지를 은폐하고 왜곡시키면서 종교적, 정치적 공적인 대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복음서들에서 전해지고 있는 예수의 이야기가 민중들에 의해, 그것도 유언비어의 형태로 민중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었다고 하는 선생의 유언비어론이 최근 북미의 신약학자들에 의해 수용, 전개되고 있는 일종의 해석학적 합류(convergence) 현상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선생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물론 유언비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사용되지 않은 채 말이다. 오래전에 나는 북미 신약학자인 리차드 호슬리에게서 이미 안병무 선생의 작업과의 놀라운 (원거리) 해석학적 해후를 발견했고, 선생의 작업이 역사적, 방법론적, 이론적 차원에서 더욱 치밀해지고 정교해지는 것을 호슬리에게서 읽어내고 있었다. 호슬리는 마가복음에서 기억되고 구연되고 재현되었던 예수의 역사적 활동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가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와 속국인 유대 지배계층의 지배 하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종교문화사회적으로 소외된 피지배계층의 글 모르는 사람들(나는 우리말의 민중이 이들을 총괄하고 이들이 계급성과 소외성을 포함해서 일컫는 말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에 의해 구술되어 왔고, 이러한 구술전승에 의해 형성된 마가복음도 씌어진 언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나 씌어진 글의 중요성보다는 그 공동체에서 말과 몸짓의 이야기로 들려주기 위한 구연대본이었다고 주장했다.[각주:4] 호슬리를 비롯한 성서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사실상 오랜 전통을 지켜온 역사비평적 연구에 깔려있는 기본 전제와 비평방법에 대한 총체적인 재검토를 시사한다.

호슬리가 말하는 민중의 이야기전승의 중요성은 (1)구술적 형태의 이야기로 예수사건을 전승하는 전승담지자/주체와 (2)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의 내용과 (3)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집단, 공동체), 최소한 이 삼자 사이에 의미 있는 소통(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의 언어 매체적 유사성, 사회(계층)적 상황간의 유사성, 따라서 이야기 내용의 문화전통적 공감성에 주목하게 하는 점이다.[각주:5]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갈릴리에서부터 갈릴리, 유대, 사마리아 등의 가난한 촌락 중심으로 당시 민중들과 함께 일으킨 사건과 운동은 예수를 따랐던 (여성)제자들 및 이름 모를 민중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기에, 이들은 예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입으로 전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민중들에 의해서 또 이들 민중들이 모여 살던 조그만 마을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대안적 사회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며,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모여서 Q 이야기로 또 마가복음의 이야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1)(2)는 안병무와 호슬리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3)은 안병무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점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선생은 예수사건 전승모체로서의 민중을 역설하는 데 있어서 타이쎈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타이쎈은 순회하는 급진주의(itinerant radicalism)와 사랑의 가부장주의(love patriarchalism)이라는 두 개념으로 이에 상응하는 두 가지 사회적 형태가 병행하여 초기 예수운동에 공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전자와 관련하여 특히 Q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의 소위 실천하기 어려운 급진적 말씀들을 전승한 사람들은 그러한 말씀들을 행할 수 있었던 특정 그룹에 속한 사람들, 방랑하는 떠돌이 카리스마 예언자들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안병무는 예수전승의 독자적인 전승담지자로서 떠돌아다니는 예언자 집단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편, 이와 구별되는 민중을 예수이야기의 전승모체로 주장함으로써 타이쎈이 말하는 전승내용과 전승담지자 사이의 사회학적 행태유형의 유사성을 넘어서 사회적 계층(계급)의 유사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병무의 오클로스 민중론은 타이쎈의 방랑하는 떠돌이가설의 문제점과 한계를 끌어안아야 했다고 본다. 예수는 늘 길 위에서 움직이고 이동하면서 운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크로싼이나 타이쎈이 주장하는 견유철학자에 근접한 유랑하는 예언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를, 예수운동의 지향점이나 전략과는 상관없이 그때 그때 만나는 민중 개개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치유하고 함께 먹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인물로만 볼 수 없다. 그리고 유랑하는 떠돌이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는 접근은 이전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예수이야기의 전승을 개체적으로 조각난 파편적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를 수용하게 되며, 이 경우 예수운동의 민중적, 집단적 성격과 이에 상응하는 예수이야기 전승의 민중적, 집단적 성격의 관계를 간과하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호슬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호슬리는 고대 사회에서 비엘리트 피지배층의 대다수 민중들은 글을 읽을 수 없었기에 그들의 주된 소통양식이 구술양식이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민중들은 그들의 문화적 전통 안에 이스라엘의 민중해방의 전통, 정의와 평등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계약 공동체의 경험, 피지배계층 민중을 억압하는 지배권력층에 맞선 예언자들의 저항, 그리고 제국적 지배에 저항한 이스라엘 민중들의 경험이 사회적 기억(social memories)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기억들은 이스라엘 민중들의 이야기전통(little tradition: 작은/아래로부터의 전통)에 해당하며, 바로 이 대목은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의 두 이야기의 합류를 상기시킨다. 내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예수도, 예수운동도, 또한 당시 헤롯 대왕의 죽음 전후에 일어났던 여러 민중 예언자운동과 민중 메시아운동도 이러한 민중의 역사적, 사회적 기억과의 통시적 연계성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도 예수가 있기 이전에 이스라엘 민중들 삶과 경험과 기억 속에 흐르고 있던 이스라엘의 민중전승의 영향을 받았고 그 전통위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통시적 문화적 연속성에서 역사(history)가 이야기(story)를 만나고 이야기가 역사를 만난다.

그러면, 이러한 민중의 문화적 전통이 예수당시의 갈릴리 사람들에게 어떤 역사적 상황을 통해 합류되었을까 하는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해명 없이 단순히 민중의 문화적 전통의 흐름을 가정만 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적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민중의 이야기자체 안에서 그것을 밝혀낼 때 가능한 것이다.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보면, 잘 알다시피 예수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수세기에 걸쳐 여러 이방제국의 지배를 겪었다. 마카비 봉기를 기점으로 제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하스몬 왕가는 이스라엘의 남부 이두메와 북부 갈릴리를 유대에 통합시켰고 이로써 갈릴리는 800년 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스몬 왕가는 이두메와 갈릴리에 유대인(the Judeans)의 율법을 부과시켰다. 바로 이시기에 갈릴리는 로마가 팔레스틴을 정복하기(63 BCE) 전까지 거의 40년 동안 제국적 정치의 지정학적 게임에서 먹이감과 같은 신세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팔레스틴 정복이 갈릴리인들에게 특별히 참담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로마군대가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할 때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시작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에 있는 막달라 지역에서는 예수 탄생 약 50년 전에 로마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요세푸스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갈릴리 동부 해안 근처의 촌락민들에게는 끔찍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예수의 활동시기에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을 것이다. 갈릴리 민중들은, 유대의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과 그들의 꼭두각시 지배자들에 의한 지배에 맞서 거듭되는 저항을 펼쳤다. 로마제국이 BCE 40년에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지목하고 헤롯이 로마군대의 힘을 빌려 그의 왕권을 구축하려고 했을 때(우리 한국의 근대이후 지금까지 친일, 친미정권 세력들의 모습과 또 지금 오늘 벌이지고 있는 상황과도 너무도 유사하지 않는가?) 갈릴리 민중들은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고 갈릴리 지역을 헤롯이 결국 평정하기 전 3년 동안에만도 세 차례에 걸친 봉기가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헤롯이 죽자(BCE 4) 유대 땅과 갈릴리 땅의 농민들은 그들의 독립을 위해 각 지역에 자신들의 왕을 세우고자 했다. 갈릴리 농민들이 인근 도시 세포리스(Sepporis)에 있는 요새를 공격하자 로마군대는 다시 갈릴리지역을 통제했고 그 지역의 수많은 농민들을 노예롤 만들었다. 따라서, 나자렛과 세포리스 근처 촌락들의 농민들은 또 다시 정복당하고 노예가 되었던 트라우마를 겪었던 것이고 바로 이때 예수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요세푸스가 전하는 여러 민중적 예언자운동 및 대중적 메시아운동이 로마제국과 예루살렘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갈릴리와 유대에서의 이러한 저항은 젤롯당이 전면에 나서서 전개된(우리가 흔히 유대전쟁이라 잘못 부르는, 왜냐하면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와 로마제국간의 전쟁이 아니었기에) 66-70년의 민중항쟁을 거쳐 그리고 바코흐바(Bar Kokhba)가 이끈 민중항쟁(132-35)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유대와 갈릴리의 민중들이 보여준 끈질긴 저항은 로마제국과 그 수혜자인 예루살렘 성전지배층이 그들의 삶에 미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배에 대한 저항이었고, 이 저항을 가능하게 한 그 근저에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해당하는 출애굽사건과 계약사건의 해방 전통이 민중들의 구술전승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다고 하는 호슬리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각주:6] 갈릴리 주변의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제국의 양식과 관습들을 강압적으로 채택하려고 했던 아합 왕에 맞선 예언자 엘리야를 기억했을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 같은 예언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그들의 심장 속에 살아 있었을 게다. 그렇기에 마가복음의 전체 이야기 속에 모세와 엘리야를 상기시키는 작은 이야기들이 자주 나오고 또한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 같은 예언자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한 구술형태의 민중전통은 문화적 경험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집단적, 그리고 공동체적 상황과 공간(특히 촌락 공동체들)을 통해서 저항의 기억으로, 저항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기억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항의 기억의 이야기 한가운데는 바로 이스라엘 역사속의 여러 외세와 제국들, 그리고 예수 당시에는 로마제국과 그 하수 정권인 예루살렘 지배권력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지배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당시 갈릴리의 대다수 민중들의 고통은 제국의 지배에서 귀결된 것이지, 이스라엘 율법의 기원과 본질자체를 정-부정 체계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의 율법 체계의 배제/배타적 메커니즘을 갈릴리 민중의 주된 원인으로 보는 해석에 대해서 나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이다. 최근, 사회의 권력구조의 지배체계가 갖는 이러한 배제(박탈)/배타적 메커니즘을 오늘날 지구화된 자본주의 체제하의 민중의 고통뿐만 아니라 예수당시의 민중의 상황에 적용시켜 민중의 언어박탈/실어증 현상으로 연결시키는 시도를 김진호 목사의 민중신학적 작업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안병무의 유언비어론과의 담론적 합류와 재조명의 가능성을, 지배계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당하고 주눅 들린 힘없는 농민/민중들이 그들 자신만의 다양한 언어형태로, 숨겨진 언어(hidden transcript)를 통해 저항하고 있었음을 밝힌 제임스 스컷(James Scott)의 문화인류학적 숨겨진 언어이론[각주:7]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안병무 선생이 밝히고자 했던 예수에서 마가복음에로 이어지는 하나의 해석학적 계보[각주:8]는 예수도 공감했던 예수이전의 이스라엘의 민중이야기의 전통의 넓은 맥락에 비추어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클로스 민중론의 한계와 가능성

 

마가복음의 예수 이야기는 역사적 집단적 (함께 경험한) 기억의 소통이며, 구술체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를 공동체 안에서 거듭 구연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 몸의 실천이었다. 저항과 해방을 기억하고 예수가 벌인 운동을 다시 기억하고 실천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실천의 언어였다. 그런 점에서 예수이야기를 전한 민중과 그 이야기를 다시 마가공동체에서 몸으로 실천한 민중의 연계성을 살펴보기 위해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 민중론의 성격과 그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안병무 선생의 이른바 오클로스민중론은 마가복음에서 두드러지는 무리를 뜻하는 오클로스라는 희랍어 단어의 사회계층적 성격과 의미를 추구하고 이에 근거한 역사적 예수의 오클로스 민중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가히 독보적인 업적이다.[각주:9] 내가 아는 한, 서구 성서신학자 가운데 선생의 오클로스 민중론에 대해 최초의 의미 있는 성찰을 한 사람은 체드 마이어스(Ched Myers)이다.[각주:10] 그는 소위 급진적 좌파의 정치문학적 비판이론에 입각하여 마가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정치적 해석을 감행하였는데, 그의 책에서 그는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 민중해석을 진지하게 논하고 자신의 관점과의 친화성을 표명하고 있다. 미리 지적하자면, 마이어스가 안병무의 오클로스 해석과 안병무 사이의 친화적 공감대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1세기 로마제국의 지배층과 공조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지배층의 권력구조를 분석함에 있어서 마이어스가 율법의 정-부정 체계를 자신의 주요 분석틀의 하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마이어스가 자신이 표방하는 비폭력, 비동맹 급진적 제자직 실천의 입장을 예수와 마가공동체의 정치적 실천적 전략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도 안병무 선생이 예수와 민중을 해석하는 시선과 맞닿는 부분이다.[각주:11]

여기서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안병무 선생은 예수사건 전승의 전달자/주체로서 민중과 마가 이야기의 청중으로서 민중 사이에 행태적, 사회계층적 연계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런데 선생의 오클로스 민중론에서 그러한 연계성을 교란시키는 불연속점들이 포착된다. 선생은 그의 글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에서 예수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누차 강조했고 그러한 사건의 처음의 전달자로서 전승의 주체로서 갈릴리의 민중/오클로스로 파악했다. 그런데, 예수와 민중: ‘마가복음을 중심으로에서 오클로스 민중의 구성원의 성격화는 다시 타이쎈의 떠돌이 예언자개념과 연동하면서 오클로스는 떠돌이 무리,” “당시의 체제에서 정죄 받고 소외당한 계층,” “세리와 죄인,” “혈연적 관계에서 탈출한 자들등으로 서술된다.[각주:12] 나아가, 김진호에게서 이러한 귀속성 박탈의 관점안의 공간밖으로 밀려난 공간사이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민중의 상황을 규정하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은 자기가 삶을 영위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를 배제하는 곳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부재한 곳의 언어가 자기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존재하면서도 부재한 자, 타자의 언어로 자신의 존재를 해석해야 하는 자들이 바로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다라고 해석된다.[각주:13] 나는 안병무의 예수전승의 언어행위주체로서의 민중이 그의 귀속성의 박탈이라는 관점에서 본 오클로스론을 거쳐 다시 김진호의 언어를 상실한 자, 언어실어증에 걸린 자로서의 민중으로 이어지는 이 해석학적 계보에 대해 다소 의아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를 몇 가지만 정리해보자면, 첫째, 어원론적으로 오클로스는 그 자체로서 사회계층적 함의를 담지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1세기 로마제국하의 갈릴리 민중의 상황에 대한 사회사적 분석이 오클로스의 주요 구성실체를 식민지지배하의 가난하고 억압받던 농민들뿐만 아니라 여러 소외된 피지배계층을 포함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오클로스를 민중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타당하고 이 오클로스에 안병무 선생이 주목하는 죄인과 세리, 병자 등 소외된 계층이 포함되지만, 오클로스의 주요 구성실체로 과도하게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둘째, 오히려 예수의 활동과 운동의 주요 거점이 가버나움 회당(예를 들면 마가복음1,22 : 종교적 제도나 조직체의 의미가 아니다. 촌락공동체의 모임/집회의 성격을 갖는다) 등의 촌락공동체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식민지 지배하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던 촌락공동체와 농민들이 예수의 이스라엘의 회복/갱신운동(호슬리)으로서의 예수운동에 호응하고 참여했던 당시 민중/오클로스의 주된 구성원이지 않았을까. 당시 사회의 지배와 예속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러한 민중은 소수의 엘리트 지배층에게는 언제나 타자로 존재했고 집단적타자인 그들의 목소리와 언어는 공적인 사회적 공간에서 늘 배제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이야기를 결코 묻을 수는 없었다.

셋째, 마가복음이 들려주는 예수의 모습은 유랑하는 떠돌이 예수의 모습이 아니다. 마가복음의 예수가 가르치는 경제적, 정치적 평등의 가치는 촌락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하는 예수운동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전체적인 줄거리를 담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이야기(a whole story)로서 당시에 구연(oral performance)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호슬리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마가복음의 청중은 갈릴리 근처의 집단적 촌락공동체의 민중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리라는 개연성이 더 확대된다.

 

다시 갈릴리로! 고통의 현실을 너머 다시 저항으로!

 

이제 안병무 선생의 예수사건 이야기에 대한 이 강연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마무리라는 말이 가능한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막막하다. 마치 예수의 무덤을 찾은 마가복음의 여인들처럼...

오늘날 지구적 제국주의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계에 철저하게 통합되어 극소수의 지배층만 먹여 살리고 있는 분단된 민족의 민중의 고통스런 현실 한가운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고통은 곳곳에 만재하고 집권층의 온갖 유언비어는 난무하고 저항은 부재하고 민중의 저항의 공적인 기억마저 조작하고 삭제하려는 음모가 자행되는 이 시점에서 민중을 희생자로 볼 것인가? 역사의 주체로 보아야 할 것인가? 새롭게 상상해야 할, 어쩌면 이미 시작된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집단적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을 꿈꿀 수 있는 걸까? 지구적 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 지구적 저항과 해방을 지향하게 하는 실천적 사회비판이론이 있는가?

마가공동체는 다시 갈릴리로 가라는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이야기의 결론을 마가복음의 공동체와 우리를 위해 열어놓았다. 안병무 선생은 예수가 오클로스에게 새로운 희망과 변화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말하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전선에서 민중과 더불어 싸웠다고 말한다. 오늘 한국 땅에서 우리가 예수와 민중과 함께 가야 할 갈릴리가 어디인가?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가야 하겠다.

  1.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김진호, 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 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서울: 삼인, 2013), 61쪽(재수록) [본문으로]
  2.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58쪽 [본문으로]
  3.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70쪽. [본문으로]
  4. Richard A. Horsley, Hearing the Whole Story: The Politics of Plot in Mark's Gospe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1). [본문으로]
  5. Horsley, Hearing the Whole Story, pp. 53~78. [본문으로]
  6. Horsley, Hearing the Whole Story, pp. 27~51. [본문으로]
  7. James Scott, Domination and the Arts of Resistance: Hidden Transcript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0). [본문으로]
  8. 김진호, 〈안병무 해석학 시론: ‘내면서의 발견’과 ‘민중적 타자성’ 개념을 중심으로〉, 김진호, 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 세계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 34~53쪽. [본문으로]
  9. 안병무, 〈예수와 민중: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김진호, 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 91~115쪽(재수록). [본문으로]
  10. Ched Myers, Binding the Strong Man: A Political Reading of Mark's Story of Jesus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8), pp. 156~57 &b p. 440. [본문으로]
  11. “그리스도교회의 어떠한 운동도 폭력을 저항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폭력을 저항하는 운동에 폭력을 쓰는 것을 반대한다”: 안병무, 〈민족, 민중, 교회〉, 《21세기 민중신학》, 168쪽. [본문으로]
  12. 안병무, 〈예수와 민중: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95~106쪽.(“저들은 언제나 예수에게로 모이고, 그를 따라 다닌다. 예수가 ‘떠돌이 선교자’[Wanderprediger]라면 저들은 떠돌이 무리들[Wander-oklos]이다,” 98쪽; “마가의 오클로스는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며 민족의 실체로서의 민족이나 민주체제의 일원인 'People'과 직결시킬 수는 없다,” 114쪽). [본문으로]
  13. 김진호, 〈안병무 해석학 시론: ‘내면의 발견’과 ‘민중적 타자성’ 개념을 중심으로〉, 《21세기 민중신학》, 47쪽. 나아가 김진호는 이러한 민중의 “타자성”에 주목하는 오클로스 민중론을 오늘날 지구화 시대에 처참하게 버려져 방치되어 있는 지구적 난민, 유민, 노숙자 등의 민중의 비참한 고통의 현실에 대한 현상학으로 정교하게 끌어 올린다(김진호, 〈민중신학과 ‘비참’의 현상학〉, 《21세기 민중신학》331~66쪽). 김진호의 체계적인 민중신학적 작업은 더 자세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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