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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 4.13 총선 이후 대중의 정치를 논하다

4.13 총선과 기독정당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물어와서 이번 총선에 대한 신학자로서의 저의 생각을 써서 [뉴스앤조이](2016. 05. 08)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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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4.13 총선 이후 대중의 정치를 논하다

 

 

 

주님께서는 당신들 때문에 ...... 내가 ......

그 아름다운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신명기4,21

 

 

 


 

  

메소포타미아에 도래한 철기혁명은 이 방대한 지역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철기제국들이 등장했고, 제국들의 형성 과정에서 전례 없는 큰 규모의 군대가 철제무기로 무장한 기마부대를 앞세워 마을들을 짓밟고 도시들을 불태우며,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노예로 끌고 갔다.[각주:1] 저 무자비한 군대의 발굽에 차이지 않은 곳이 없고 저들의 창끝에 난자당하지 않은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각주:2] 하여 이제 메소포타미아 전역은 가히 전쟁의 세계화라고 부를 만한 참혹한 경험을 공유하는 땅이 되었다.

그런데 변방국가 유다는 번영의 기회를 얻었다. 이것은 유다국에서 이러한 성공의 기억을 몸에 체화한 이들이 다수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각주:3] 그리고 그것은 전쟁을 단지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가 유다국에 널리 확산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성공주의가 만연한 시기에 유다국 백성 모두가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훨씬 많은 대중은 더 깊은 고통의 수렁으로 내던져졌고,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성공의 결실을 독과점 했다.

이때 전쟁의 세계화를 열호하며 구축된 엘리트 중심의 독과점 체제를 지양하고 몰락한 백성의 생존권과 몰락의 위기에 놓인 백성에게 안전을 지켜줌으로써 체제를 견고히 하려는 개혁정부가 등장하였다. 요시야 정권이 바로 그것이다.

요시야 정부의 개혁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문법의 제정이다. 그것은 왕과 귀족에게 온갖 특혜를 주는 불공정 관행을 폐하고 모두에게 공정하게 작용하는 원칙을 명시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몰락하였거나 몰락의 위기에 놓인 소농을 보호하고 복원하며, 대지주들의 횡포를 제한하려 하였다. 그것이 바로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편찬된 신명기 법전이다.[각주:4] 그런데 이 법전에는 이 법의 기원을 전설적인 민족의 구원자 모세에게로 소급하는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하여 건국의 조상 다윗보다 훨씬 먼저이고 더 위대한 존재인 모세 중심의 국가이데올로기가 구축된다.

애초에 유다국에는, 비록 조야하나마, 국조(國祖)인 다윗 중심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 이에 의하면 하느님은 다윗과 그 혈통에게 무한한 신뢰를 베풀어, 설사 잘못한 일이 있어 징벌을 내리더라도 아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데 요시야 개혁정권은 다윗보다 더 중요한 이는 모세며, 모세를 통해 전해준 법은 어느 것보다도 엄중한 원칙임을 천명한다. 설사 다윗의 혈통인 왕도 그 법을 어긴다면 하느님이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다윗 왕실 중심주의 대신 계약주의를 내세운 것이다.[각주:5]

글 서두에 인용한 모세의 죽음에 관한 성서 구절은 그러한 계약주의가 얼마나 엄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시야 정권이 가장 중요한 민족의 조상이자 구원자로 내세운 모세조차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것은, 그 이전 시대의 전승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각주:6] 바로 백성의 잘못때문이다. 이러한 엄정한 법의 원칙에 의해 요시야 정부는 법을 강력히 국가 운영의 원리로 밀어붙인다. 이렇게 개혁은 추진되었다. 농민의 몰락을 억제하고 몰락한 농민을 복권시키려는 정책이 담긴 개혁을 말이다.

한데 결론만 얘기하면 요시야 개혁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추진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지방 곳곳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것도 정권이 그토록 옹호했던 백성 자신이 방해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백성의 죄로 인한 모세의 죽음을 얘기해야 했던, 그토록 강력한 신의 의지를 담은 역사를 만들어내야 했던 것은 개혁에 대한 백성의 방해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왜 백성은 자신을 옹호하고 지원하려는 왕을 반대하고 오히려 자신을 착취했던 특권적 지주세력을 지지했던 것일까? 그것은 백성은 왕의 메시지를 곧바로 들은 것이 아니라 왕의 적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왕의 소리를 들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렇게 왕의 소리를 왜곡하여 전달한 매개체가 바로 산당이었다. 지방 산당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바로 특권적 지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즉 대중정치의 장소인 산당이 저들 수구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탓에 백성은 수구적 세력들에 의해 동원되어 정치에 관여했던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연일 4.13 총선에서 기독교 정당들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이번 선거에서 기독자유당이 2.64%의 정당지지를 받아 역대 기독교 정당 가운데 가장 높은 득표를 했고, 같은 성격의 정당인 기독당이 얻은 0.54%와 합산하면 3%를 넘는다. 하여 만약 두 당이 합당한 상태에서 이런 합산치를 득표했다면 비례대표 1석을 얻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정당시스템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축하지 못한 당이, 그것도 1석 짜리 정당이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이래 가장 극우적 대중정당에 속하는 박근혜의 새누리당보다 극우적인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은 아주 불길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타당성이 있다. 어쩌면 이 당을 중심으로 해서 극우가 결속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도, 현재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들 기독정당들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강성의 극우 반공적 정치세력의 하나로,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해서 반대하고 차별금지법도 반대하는 매우 반인권적 극우주의 정당이다. 또 종교차별적이고 반민주적이며 친기업적이라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그런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게 되면, 종교계와 비종교계 도처에 산개되어 있는 무수한 강성 극우세력들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으며, 나아가 강성 극우세력이 강력한 외연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대두하는 신호탄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말도 꺼낼 수 없었던 유럽의 극우세력들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유럽연합의 절반 이상의 나라들에서 극우정당들이 득세했고 나아가 유럽의회에서는 최초로 극우정치세력의 원내교섭단체가 탄생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같은 파시스트가 가장 유력한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었다. 그러니 극우세력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자원을 점유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괴력에 더 심각하게 휘둘리고 있는[각주:7]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보다도 강성의 극우주의 세력이 급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남의 얘기인 듯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기독정당 자체는, 이번 선거만 보면, 그리 걱정스런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자유당 후보가 얻은 표와 정당투표는 정의당 다음으로 많은, 5당의 위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 표가 확장성이 있는 표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당은 지금까지의 여러 기독정당들보다 더 많은 기독교 주류인사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세계 최대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이영훈,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의 목사 김홍도, 메가처치의 담임목사일 뿐 아니라 TV스타로 부상한 장경동, 최근 급성장한 연세중앙교회 목사 윤석전 등, 서울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개신교계 지도자들이 적극적 지지자로 참여하였다. 요컨대 기독자유당은 역대 기독정당들에 비해 훨씬 강력한 극우파 중심의 개신교 세력들의 결집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들의 신자들, 특히 서울의 신자들은 그 정당에 거의 투표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기독자유당이 얻는 정당투표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낮았다.

애초에 기독자유당이 기대한 의석수는 비례대표 5석이었다. 이들이 주도한 동성애 반대 서명자의 60%가 기독자유당에 투표할 것이라는 이상한 계산법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서울을 포함한 전국에서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저조한 득표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개신교 극우주의가 총출동하다시피 한 선거 결과치고는 너무 참담한 수준이다. 게다가 기독자유당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지역이 경상북도라는 사실은 이 당을 선택한 이들의 적지 않은 수가 새누리당 이탈표일 것임을 시사한다. 보통의 경우 기독정당에 투표할 수 있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새누리당에 흡수되었겠지만, 그 반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을 선거에서, 더욱이 기독교의 역량이 총동원된 선거에서 한 석의 비례대표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정당들의 이런 비참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매스미디어나 SNS 등을 통해 회자되는 얘기들은 기독정당들이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는 주장들이 대종을 이룬다. 이것은 기독정당들에 투표한 적극적 지지자들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적극적 반대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향후 기독교 우파세력들은 더 많은 이들에게 우려의 대상으로 지목되게 되었고, 지금까지보다도 더 심각하게 고립된 종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에서 기독정당의 성과는 별로 고려할 만한 점이 못된다. 그것은 새누리당이 일으킨 부정적 이팩트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전혀 얘기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더불어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든가, 국민의당이 선전하여 2당 체제에서 3당 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이 가시화되었든가 하는 중대사건들도 그 핵심에는 새누리당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일으킨 파생효과에 지나지 않다.[각주:8] 그런 점에서 나는 20대 총선 이후를 논하기 위해 새누리당에 대해 좀더 이야기할 것이다.

새누리당은 크게 네 범주의 지지세력을 갖고 있다. (1)TKPK라는 지역주의 세력, (2)서울 강남권의 보수층(특히 개신교 대형교회 교인들과 깊은 연관이 있음),[각주:9] (3)극우 개신교세력과 세속적 극우주의자들, (4)노년층. 이 네 부류의 대중이 박근혜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결속된, 이른바 콘크리트지지율이 이 정부가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는 강력한 요소였다. 요컨대 법조계, 학계, 군부, 제계, 언론계 등을 아우르는 보수 엘리트 세력을 총결집시킨 힘은 바로 콘크리트지지율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번 선거는 네 범주 모두에서 적지 않은 이탈자를 냄으로써 정부여당은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박근혜에게 충성경쟁을 벌여왔던 테크노크라트들의 레임덕이 시작될 때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 정권 이후 가장 극우적인 정부는 끝을 향한 추락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포스트박근혜 시대를 향한 보수와 개혁, 진보 세력의 권력게임이 시작되었다.

지난 새누리당의 공천 보도에서 보듯 종편이라는 견고했던 산당은 방향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각주:10]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극우주의 개신교 세력을 대표한 일부 교회들과 목회자들도 무력해진 산당이 되어 버렸다. 최근 연이어 터지고 있는 어버이연합 스캔들은 그 동안 벌어졌던 극우적 대중정치 현상들의 불법, 탈법적 음모들이 속속 폭로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극우적 대중정치의 주된 장소들은 속속 무력화되고 있다. 이것은 강력한 사회적 권력인 대형로펌들과 재벌들, 그밖의 여러 권력집단들로 하여금 각자의 생존을 위한 그림을 다시 그리게 할 것이겠다.

아마도 이런 추세가 반전될 가능성은 낮다. 경제 상황은 크게 좋아질 기미가 없고, 이번 선거에 큰 변수였을 것으로 해석되는 전세 대란도 뚜렷한 개선 여지가 없다. 또 그간 은폐되어 왔던 정부와 권력층의 불법, 탈법, 무능의 스캔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올 것이다. 하여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은 계속될 것이고 그 정도는 점점 심해질 것이다. 결국, 포스트민주주의 시대 혹은 ‘87년체제이후 시대를 주도했던 극우주의 모델은 실패로 귀결될 것이 예상된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말했듯이 많은 극우주의적 산당들은 스스로 무너져 버렸거나 무너지고 있다. 이제 대중은 이 난폭한 세계화 시대 자본주의, 그리고 그것에 누구보다도 더 열혈 하수인이 되고 있는 정부와 권력집단의 횡포를 직시하고 그 너머를 고민할 기회를 얻었다. 하여 더 민주적이고 더 인권적이며 더 상생적인 체제를 꿈꾸고 그릴 기회를 맞이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기회를 또 다시 놓친다면, 이스라엘이 모세를 잃은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폭도들이 난무한 우리사회는 또 다시 구원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올빼미)

 

  1.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철기제국인 북시리아-동터키 지역의 히타이트 제국은 철제무기를 사용했지만, 미미한 정련 기술 탓에 잘 발달된 철기제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시리아 제국이 ‘잘 발달한’ 최초의 철기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제국의 군사력의 핵은 철제무기와 기마부대였다. [본문으로]
  2. 〈창세기〉 4,17~24의 카인의 후예에 대한 간략한 서술에서 두발가인은 구리(청동)와 쇠(철)의 기술자라고 이야기한다. 한데 두발가인의 조부인 라멕은 가학성의 상징인 카인보다 훨씬 강도 높은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이집트로 표상되는 청동기 제국과 아시리아로 표상되는 철기제국의 폭력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3. 유다국은 아하스 왕 시대에 빠른 성장을 이룩하여 비로소 전제국가체제를 갖추었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 시대의 특정한 경로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유다국 역사상 대지주화된 귀족계층, 특히 예루살렘의 관료계층이 뚜렷하게 대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 청소년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성장한 관료귀족 집단들은, 칼 만하임이 말한 특정 체험을 공유한 세대(코호트, cohort)로서 부상했던 것 같고, 그것이 아하스 이후 시대의 분화된 두 귀족 세력의 갈등과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학자들은 이 법전이 현재의 〈신명기〉의 원형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본문으로]
  5. 요시야 개혁은 조부인 히스기야 왕의 정치를 계승한 것인 동시에 부친인 므낫세 왕의 정치를 반하는 것이었다. 한데 정권의 성격을 둘러싼 두 분파 간의 갈등은 대단히 치열했다. 해서 요시야의 개혁은 므낫세의 정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므낫세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의 역사 해석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유다국의 오래된 왕조 이데올로기와 대립한다. 해서 요시야 정부는 하느님이 다윗 왕실에 배타적인 축복을 선사한다는 전통적 왕조이데올로기를 계약주의적 축복-심판론으로 개정하였다. 이때 다윗보다 더 위대하고 더 선대의 지도자 모세가 법의 수여자라는 점은 다윗에서 유래한 왕조 이데올로기보다 신명기 법의 계약주의가 상위법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6. 〈민수기〉 20,1이하; 요시야 시대 이후에 〈민수기〉에 영향받아 첨가된 〈신명기〉 32,48~52 참조할 것. [본문으로]
  7.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주의의 부상에 대해서 많은 진보적 비평가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해석한다. [본문으로]
  8. 〈폴리뉴스〉의 4.13총선 분석에 따르면 19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에 투표한 이들 중 13% 정도는 더민주당으로, 9.8%는 국민의당으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9. 나는 다른 글에서 이 세력을 웰빙보수주의로 특성화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 바 있다. [본문으로]
  10. 일부 극우 성향의 정치비평가들은 새누리당 공천 파동에 대한 종편 채널들의 취재경쟁이 4.13 총선에서의 새누리당 몰락의 원인으로 해석하곤 했다. 즉 종편채널이 이제까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콘크리트지지율의 중요한 기반이었는데 이번 선거는 그 반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