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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무능력과 신용불량 담론, 그 시민적 욕망과 ‘악의 진부화’에 대하여

이 글은 〈카인 콤플렉스와 무능력자 담론〉이라는 제목으로  《당대비평》 23(2003 가을)에 실렸던 것을 수정 보완하여 아래 제목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59(2004. 7-8)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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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력과 신용불량 담론,

그 시민적 욕망과 악의 진부화에 대하여

 

 

 

 

 

1

 

근대 국가는 역사적으로 국경(boundary)을 탄생시킴으로써 실현되었다. 그것은 을 구별 짓게 하는, 즉 통합의 공간으로서의 과 배제의 공간으로서의 을 구성하는 제도적 장치들의 복합체다. 반면 전근대의 국가들은 행정적 통제가 불분명하고 끊임없이 요동하는 변경지대(frontier zone)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외부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소통이 실현되는, 그리하여 국가들의 통제의 망을 가로지르는 해방과 저항의 공간이었다.

(근대)은 이러한 근대 국가적 경계짓기의 맹아로 등장한다. 여기에는 인쇄술의 발전공교육을 통한 문자해독율의 확대라는 조건이 전제된다. 이 조건들로 인해 공론의 장이 크게 확장되었고, 왕권이나 귀족권 대신에 시민권이 확장된 공론의 장을 매개로 해서 국가의 주권 개념과 대쌍 관계를 이룬다. 국가의 주권이란 국경 내부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의 권한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국경의) 내외부에 의해 공증된 것이다.[각주:1] 이러한 공증의 ()내적 필요성에서 시민권은 국가의 주권과 상보적이다. 하지만 국가의 주권이란 미리 형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내외적 경쟁의 과정 속에서 구체화되기 마련이고, 그런 점에서 시민권의 형성 과정은 국가의 주권에 변형을 야기하며, 때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시민권과 국가 주권의 대쌍 관계 속에서 구체화된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미리 결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형성체이며, 시민권과 주권의 대쌍 관계는 그 역사적 다양성을 검토하는 준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부의 슬로건이기도 한 참여민주주의라는 복합어는 그 개념적 함의가 충분치 않지만, 그간의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형태로든 시민권의 제약을 수반해왔다는 문제의식을 담은 수사적 함의를 지닌다. 참여는 확대된 시민권이 사회를 구성하는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의 성공에 따른 위기가 낳은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며, 특히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민주화 과정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참여라는 용어가 은연중 무능력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 주권이 시민권을 과도하게 잠식해왔던 권위주의 국가 시대의 배제 메커니즘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내포한다. 바로 이 점이 이 글에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 시대는 참여가 배제된 무능력자의 공간을 해소시킨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방식의 비참여 영역을 발명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특히 상황적 요인에 의해 우연히 결합된 것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참여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는 데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최근의 신용불량의 문제는 현 정부의 참여민주주의가 과연 성찰적 민주화[각주:2]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조명하는 시금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인식을 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우선 무능력의 담론 속에 배제의 한 양식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살피고, 다음 절에서는 무능력의 지표로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부상하고 있는 신용불량의 문제를 통해 그러한 양상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부에서 무능력의 배제를 시민적 욕구와 연계시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에게서 폭력성이 어떻게 망각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

 

민법상의 행위무능력자 규정은 공적 영역에서 무능력을 규정한 거의 유일한 사례다. 나는 여기서 무능력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추론하는 하나의 알레고리를 발견한다.

행위무능력자의 독자적인 행위의 법적 효력을 제한한다는 민법 규정은, 행위무능력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그 외부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각주:3] 그들이 사회 내부에서 살아갈 때 그 행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에 관한 법이다. 흥미롭게도 민법은 사회 내부에 두면서도 사회적 행위의 유효성을 규정하는 법의 외부에 있는 존재를, 있으나 없는 것 같은 존재를 무능력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능력자라는 우리의 일상적 언표는 바로 이러한 모호한 존재에 관한 법적 규정과 유사하다. 여기에는 사라져야할 세상의 악이라는 함의보다는, 사회에서 부적절한구성자임엔 분명하지만, 일정한 조건의 통제 아래 있다면 내부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행위무능력자를 법 내부의 존재로 인정하게 하는 장치가 대리인제도. 그들은 법정대리인이든 특별대리인이든 누군가의 대리(행위)에 의해서만 법적 존재, 나아가 (행위의) 주체가 된다. 근대적 주체에 관한 신화의 하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곧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명제와 관련된다. 그런 관점에서 (근대)법의 행위무능력자 규정이 그들의 의사능력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은 그들의 주체가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가 없는 존재, 누군가의 대리에 의해서만 주체일 수 있는 존재, 곧 자신의 이해관계나 욕망을 표현할 수 없고 타인의 대리에 의해서 비로소 그것이 표상되는 존재가 무능력자라는 것이다. 이해관계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언어다. 가령 이주한 지역의 언어를 모르는 외부인은 자신의 이해나 욕망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주체의 부재는 주체의 실어증을 의미한다. 탈식민주의 여성주의 비평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그러한 존재를 하위주체(subaltern)고 부른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식민지 언어와 피식민지 엘리트의 지배 언어(민족주의)가 그들을 대리했다.’ 여기서 스피박은 하위주체에 대한 내부식민지를 발견한 것이다. 하위주체는 (내부)식민주의자의 언어를 내면화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한다. 마찬가지로 무능력자는 자신의 주체를 대리인과 동일시할 때만 비로소 주체처럼 된다.

권명아는 최초의 근대법에서 여성은 무능력자에 포함되었는데, 1930년대 일제가 근대화 과정에서 해체되고 있던 전통적 가족을 식민지 전시동원체제의 기초 단위로 재구성하려는 역사적 맥락에서, 자신의 욕망을 국가주의적으로 해석된 가족의 욕망 체계 속에 용해시키는 한에서 여성이 법적인 주체로서 인정받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제출하였다. 식민지 전시동원체제라는 특수한 지형 아래서 일제와 가부장적 조선사회 사이에서 벌어진 전략적 거래의 결과로, 여성이 무능력자가 아닌 법적 주체로서 부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각주:4] 여기에는, 비록 법실증주의적인 인식론이 그렇듯이 법이 통상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양 이해되고 있음에도, 무능력자 규정은 사회의 역사적 형성 과정 및 체제의 사회적 통합의 전략의 산물이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특정한 역사적 요인에 의해 행위무능력자가 행위능력자로 전환된다고 해도 여전히 주체의 오인 작용은 계속되고 있다는 자크 라캉적 관점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주체가 부정된 자가 주체가 인정된 자로 옮겨간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냐면 후자에선 대리자가 (자타에 의해)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은폐된 대리자인 담론제도를 가로지르는 실천의 주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성이 주체를 구성하지만 동시에 주체에 의해 스스로를 변혁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기든스의 제도적 성찰성논의는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아무튼 무능력자와 능력자는 그런 점에서 구별된다.

이러한 민법상 무능력자 규정의 용례는 무능력에 관한 일상담론의 한 용법과 맞물린다. 이를 보기 위해 민법의 규정처럼 행위능력의 개념에 주목하고자 한다. 행위능력은 기대되는 행위와 결과로서의 행위로 구분된다.[각주:5] 이를 각각 역할기대행위수행이라고 명명한다면, 민법상 행위무능력자 규정은 이 두 요소간의 조합을 두 가지 차원에 국한해서 다루고 있다. ‘긍정적 역할기대-긍정적 행위수행(P-P)부정적 역할기대-부정적 행위수행(N-N)이 그것이다. 이중 무능력자는 후자의 경우를 가리킨다. 가령, 심각한 정신장애가 있는 이를 지칭하는 금치산자와 한정치산자는 일반적으로 ‘N-N’적 특성을 나타낼 것이라는 일반적 이해의 지평 위에서 행위의 법적인 효력을 제한받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일상담론에서 무능력은 P-N형의 무능력도 있다. 이에 대하여는 이 글의 결론부에서 좀더 이야기할 것이다.

N-N형 무능력자에 관한 민법상의 규정이 보여주는 알레고리는 경제적 무능력자인 빈곤계층에 대한 복지담론과 유사성을 지닌다. 빈곤계층의 주거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어인 무허가주택노숙을 주목해 본다면, 양자는 공히 주거의 실체성이 부정되고 있다. 곧 그들의 존재는 인정되면서도 부정된다. 이러한 빈곤계층의 보호장치로 기초생활보호제도 같은 복지 메커니즘이 있는데, 이것은 이들 비존재인 존재를 구제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인류학 연구자 조문영의 난곡지역 현장조사 연구에서 우리는 기초생활보호제도나 기타 사회적인 복지의 메커니즘의 실행이 지역 주민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통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호 대상 빈민이 무능력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시선이 어떻게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때 그 시선은 항상 일방향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조문영은 보호대상자 판정을 위한 상담, 상담의 주체인 동사무소의 사회복지사의 자의식이나 태도와는 상관없이, ‘조사또는 심문과 유비시키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을 보기를 원하는 시선과 그 시선에 걸맞는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하고자 하는 모습이 바로 양자 간의 소통의 구체적인 양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렇게 일방향적인 시선은 곧 감시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보호받기를 원하는 자는 그 시선의 권력에 스스로를 규율한다. 곧 자신은 무능력한 존재이고, 자신을 대리해서 보호해줄 친족이 없거나 있더라도 그들도 무능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이 과정은 종종 사실의 조작을 동반하는데, 그것은 신청자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거짓말을 탐색하려는 감시자의 시선과 마주치면서 이러한 자기 비하의 언술은 행위수행성을 나타내어 행위자의 주체 형성에 개입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도우려는 방송매체, 사회부조형 시민단체, 개인 후원자 등과의 만남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다. 즉 그러한 반복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신청자는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 단순한 언술 전략의 차원을 넘어 자기 자신의 존재 이해로 전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문영은 복지제도의 수행 과정에서 가난은 내면화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유의미한 행위를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 곧 비존재, 그리고 보호자 혹은 대리인의 불쌍해하는 시선에 의해서만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허락된 하위주체, 바로 이것이 무능력자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상실했다. 그들에게 허용된 언어는 그들을 보호, 후견하려는 이의 자비심을 만족시키는 방식의 언어이다. 대리인제도는 그것만이 하위주체의 진술로 통용되게끔 하는 여과지의 역할을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이, 그 내적 국경에 주거지가 허용된 존재, 그 시민적 주체는 후원과 수혜의 덕담으로만 채워진 복지제도를 통해, 체제의 폭력성 및 그 체제에 협력하고 있는 자신의 배타적 욕망의 딜레마를 망각할 수 있고, 관용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기억할 수 있다. 복지제도가 성찰을 위한 내적 준거를 찾아내는 데 여전히 실패하고 있는 한 말이다.

 

 

3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개인) 신용불량자문제는 우리의 주목을 끈다. 신용불량자란 단지 전국은행연합회에 의한 개인의 부적절한 신용 상태에 관한 정보 등록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미치는 파급력은 그의 사회적 관계의 부적절성에 대한 기록이고, 나아가 존재의 위치의 부적절성에 관한 기록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일단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면, 그의 금융거래는 사실상 중단되며 나아가 사회적 관계에서 위험비용이 가산되어 타인과의 거래비용이 크게 상승한다. 대체로 신용불량자는 상승한 거래비용을 지불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 또한 크게 제약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용불량이 강절도, 유괴, 납치 등의 범죄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가족해체를 가져오고, 질병에 걸리거나 마약에 손을 대고, 심지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신용불량이 존재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신뢰(trust)에 관한 문명사적 관점에 주목하게 된다. 근대사회는 전근대사회와 비교해서 관계의 비대면성(nonfacibility)이 대단히 커지고, 이에 따라 신뢰도 지역적이고 인격적인 속성보다는 국가적이고 추상적(화폐의 그것처럼)인 요소가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이제 개인이든 집합체든 제도든 행위의 불확실성 내지는 위험을 최소화하고 나아가 이해관계 내지는 지위를 최대화하는 데 있어 신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신뢰가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라는 제임스 콜먼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문제는 신뢰라는 추상적 가치를 어떻게 객관화시키느냐에 있다. ‘사기행위가 실재의 가치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신뢰를 이끌어내는 기술과 관련된다면, 그것은 신뢰의 객관화가 실패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계급간, 세대간, 성간, 개인간의 의사소통의 실패는 공적 공간이나 사적 공간에서 신뢰의 공론장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신뢰라는 가치를 계량화하는 기술들이 개발되고,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각 행위자의 신뢰 상태를 그러한 기술에 의거해서 측정하는 일이 점차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양상이 행위자간 관계의 근대적 장벽들, (그 내외적) 국경들을 넘어 거시적으로는 전 지구적이고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일상까지를 아우르는 소통의 공간을 확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신뢰의 객관화/계량화 추세를 논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네그리적인 지구제국적 식민주의나 하버마스적인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는 거시미시적으로 확장된 공간의 사회적 통합이 신자유주의적인 합리성에 의거한 신뢰의 개량화 원리에 따라 수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금융상의 신용이 신뢰를 계량화하는 주요 지표가 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렇게 지구적인 신뢰의 거시미시적 메커니즘이 행위능력을 신용능력으로 환산하면, 신용불량이란 곧 지구화 사회의 무능력의 핵심적 지표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공세적 파괴성은 1997년 이른바 ‘IMF 관리체제를 경유한 한국 사회의 주된 기억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는 급속하게 신자유주의적 요건에 맞추어 재편되고 있다. 바로 이 시기 이후 극심한 경기 침체 상황에서 기업이 신용도를 높이려는 자구책의 하나로 고용구조를 유연화하는 과정에서 대규모로 퇴출된 자들의 불안정한 소득 상태와 급속하게 성장한 금융기업들의 도덕적 해이가 겹치면서 가계신용의 부실이 심화되었고 그 경계의 끝자락에서 신용불량자가 급증했다. 200310월 현재 그 수는 360만 명에 달하여, 경제활동 인구의 무려 15.5%가 개인 신뢰의 붕괴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각종 범죄, 질병, 자기 파괴 행위가 잇따랐고, 가족이나 기타 공식비공식적인 사회적 연결망이 신용불량자를 중심으로 속속 해체되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금융상의 신용불량이 사회적인 관계의 해체와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 해체의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무능력자의 급속한 확산의 문제는,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즉 시민적 권리의 향상을 통해 시민의 사회 구성력을 강화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이른바 참여정부의 기획을 위기에 빠뜨린다. 신용불량자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특별 프로그램의 필요성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개인 워크아웃제도와 개인파산제도로 요약될 수 있는 신용불량자 회생을 위한 정부의 대책은 아직 그 효과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일견 정책의 초점을 지나치게 기능의 회복에만 맞추고 있는 인상을 준다. 신용불량의 위기가 종종 주체의 파괴로 이어지는 무능력화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은 그 상흔의 치료 또한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단순히 채무 이행의 유예나 면책 정도로 해소될 수 없다. 적자생존의 방식은 행위능력자에게만 그 유효성이 한정되고 있다는 점을 정책은 감안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나는 이러한 정책적 인식의 배후에는 참여정부 사회의 시민적인 집단 무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민적 무의식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주요한 기억이 얽힌 결과라고 본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IMF 관리체제의 기억으로, 신뢰의 신자유주의적 표준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시대의 대세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편향을 낳았다. 이러한 기억은 합리성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사유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졌고, 그러한 합리성의 요소인 신뢰의 표준에 미달한 존재의 권리에 대한 집단적 망각을 수반했다.

다른 한편, 나는 ‘1987년의 기억에 주목한다. 그것은 특히 1980년대 운동 세대를 중심으로 일상화된 민주화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사회 각 영역에서 그러한 기억의 제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기억의 제도화의 중심에는 참여라는 사회의 도그마적인 합의가 놓여 있다. 여기에는 진보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낙관이 그 중심 기조를 이룬다. 이러한 기조는 과거를 청산하려는 욕망과 맞물리면서, 과거를 표상하는 것으로 인식된 역사적 흔적들과의 대립항으로 (독재가 아닌) 참여의 미래적 전망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전망은 왜소한 예속 국가 한국이 아니라 강력한 자주적 전망의 대한민국이라는 기표로서 표상된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1987년의 기억은 참여민주주의의 수행 주체인 시민의 행위 능력에 대한 도그마적 신뢰를 전제하고 있고, 그것은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주의적 사회 통합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처럼, 참여민주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1987년의 기억이 내포된 시민적 욕구는 그 민족주의적인 외부를 시민사회 내부에 끊임없이 가설하면서 전개될 가능성을 망각한다. 내적 국경의 외부에는 참여의 대립항인 비참여’, 능력의 대립항인 무능력이 놓인다는 사실을 너무 소흘히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러한 기억과 망각의 질서는 또 다른 기억인 ‘IMF의 기억과 마주치면서 성장과 참여의 가치를 너무 쉽게 화해시키려는 사회적인 욕구를 낳았고, 이것이 신뢰의 신자유주의적 표준과 진보에 대한 시민적 행위 능력을 결합시킨 섣부른 정책들을 생성시키는 주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다. 그런 관점에서 신용불량자 회생 프로그램의 적자생존적인 무능력의 배제주의적 요소는 참여정부 시대의 시민적 욕망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4

 

이제까지 나는 N-N형 무능력이 사회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되어 있는지, 그들에 관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양식을 살폈다. 그리고 최근의 무능력의 지표로 대두하고 있는 신용불량자의 문제를 대하는 참여정부의 대응에서 무능력에 대한 시민적 배제주의의 기조를 드러내고자 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무능력자는 내적 국경의 도 아니고 도 아닌, 그 중간적 위치에 배치되어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내적 국경의 외부로 내몰린 이질적 타자들, 외국인 이주노동자라든가 혼혈인이라든가, 범법자, 에이즈 같은 특정 질병에 걸린 사람들, 매매춘 여성 등은 시민사회가 보호의 대상으로 기억하기보다는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존재다. 반면 무능력자라는 기표는 낯선 타자, 공포스러운 타자가 아닌 불쌍한타자로서 재현된다. 즉 그들은 시민사회의 관용을 증명하기 위한 존재인 것이다.

한데 흥미롭게도 무능력에 관한 전혀 다른 용례가 존재한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가장 많이 통용되는 무능력 담론을 검색해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이 정치가의 무능력, 남성의 성적 무능력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포지티브한 역할기대(P)를 받던 존재가 네거티브(N)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에 매스미디어는 무능력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앞서 본 전형적인 무능력자인 N-N형과는 같은 기표로서 표상되고 있다는 점에서 연결되지만 구별해서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P-N형 무능력 담론은 일상의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확대된 양상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내가 이 글의 결론부에서 이것을 특별히 언급하려는 취지는 이 변형된 무능력 담론이 갖는 부정적 효과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시민사회의 음모가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P-N형 무능력 담론의 가장 전형적 양상은 가족담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남편 대 아내/자녀 간의 의사소통에서 이 무능력 담론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족담론에서 아버지/남편은 존귀한 타자로서 재현될 수 있다. 그것은 왕과 백성 간의 관계나, /성직자와 신도 간의 관계로 확대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절대적) 능력자요 (일방적) 보호자이며 공동체 욕망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입장에서 최고의 비극은 전자가 부재하는 경우다. 한데 이러한 전통적 가족담론은 근대 자본주의사회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고, 민주주의 담론은 그러한 존귀한 타자 대신 친근한 동료를 필요로 했다. 한데 민주주의 담론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공적 공간의 것이었고, 사적 공간인 가족이나 비주류로 밀려난 공적 공간인 종교적 공간은 여전히 가족주의적 담론이 우세했다.

그런데 최근 일상의 영역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소비자본주의의 급속한 확산과 영상 매체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사적 공간까지도 자본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든스가 말하고 있듯이, 이성과 감성을 분리하고, 그것들 각각을 남성성과 여성성,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특성으로 귀속시켜왔던 근대적인 젠더화된 권력의 메커니즘이 감성 영역을 부가가치 높은 시장의 요소로 개발해낸 후기자본주의 소비문화 맥락에서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영역화로 인해 과소한 이성과 과도한 감성의 소유자가 되어버린 여성과, 사적 영역에서 어머니와 보다 친밀한 소통 관계에 익숙한 미성년자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변동에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종의 젠더적 분업이 일어나는데, 감성에 대한 학대를 수행함으로써 공적영역의 이성적 주체로 부상할 수 있었던 성년남성이나 그런 존재로 동일화해야 한다는 강력한 젠더적 담론의 요구에 직면하는 과도기의 남성은 끊임없이 생산자이자 부양자로, 그리고 사적영역의 감성적 주체로 부상한 여성과 미성년자는 소비문화의 전문가로 각각 주체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분업화된 젠더적 주제들은 일상정치적 담론으로 재구성된 민주주의적 제도를 통해 소통적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조형준에 의하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영화, 광고, TV드라마 등, 이른바 대중문화의 트랜드를 대표하는 매체들은 가장 빠르게 변하는 것들가장 변하지 않는 것들이 기이한 방식으로 절충된 담론들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가족 로망스는 더 이상 권위적 가부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차이를 애틋하게 받아들이는 의사소통의 민주적 공간처럼 가족을 재현한다. 이때 아내와 자녀가 경제적 자본을 가진 남편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감성적 재화를 활용할줄 아는, 이른바 문화적 자본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무능력 담론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자본의 세계에서 행위무능력자가 된 자들을 벌하는 처벌 규정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처벌보다는 아버지/남편과의 좀더 수평적인 대화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트랜드를 주도하는 상징적 존재들인 이른바 대중스타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들은 능력의 계산 가능한 지표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소비자가 되는 것이 주체의 위치를 강화하는 요소임을 체감한 자들은 개걸스럽게 대중스타를 통해 전시된 능력의 표상들을 열정적으로 소비하려 한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끝없이 신을 모방하면서 자기 자신을 규율하지만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심연의 거리를 체감하게 되는 것처럼, 아버지, 남편, 남자친구 등, 근대성의 지표에서 역할기대가 높은 이들은 끝없이 실패자가 되고, 그래서 무능력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가족은 이러한 위기의 존재들이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왜냐하면, 권력의 위계적인 관계를 숨기는 사랑의 가부장주의의 담론인 가족 로망스가 그곳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 로망스는 유사가족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길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엔 정치담론의 공방 속에는 가족 로망스가 넘실거린다. 정치적 무능력에 관한 담론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튼 이렇게 P-N형 무능력 담론은 일상적 민주주의의 담론과 결합되어, 근대성의 기준에서 보다 행위능력이 높은 자들이 보다 행위능력이 낮은 자들과 더욱 평등한 관계를 구성하게 하는 담론적 효과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구조변동이 민주적 가치와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포스트모던적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각주:6]

그런데 P-N형 무능력자 담론의 이런 의의 이면에는 뜻하지 않게 그 반대의 부정적 효과를 수반하고 있다. 무능력 개념이 이렇게 P-N형으로 소통된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능력의 위협 아래 놓인다. 물론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의 무차별적 폭력성의 소산인 신용불량의 문제도 무능력의 예감된 폭력의 공포를 보다 폭넓은 계층에게 체감하게 하였지만, P-N형 무능력 담론은 그 범위를 무한도로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한데 동시에 그러한 폭력성은, 앞서 말했듯이, 처벌보다는 가족 내에서의 협상용에서만 효능이 있다. 만약 가족이 해체된다면 무능력이라는 수단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P-N형 무능력자는 무능력이 수치스럽기는 하되, 절망적 상황을 체감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러한 무능력은 지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얼마든지 역전시킬 수 있는 재치 있는 사랑의 기술을 활용할 기회가 열려 있다. 그 기술의 비법을 알려주는 매체는 널려 있으며, 상대방은 약간의 그럴듯한 사랑의 기술에도 협상의 의사가 언제든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P-N형 무능력 담론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무능력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현저히 이완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수성가형 사람이 무능력자의 고통에 대해 훨씬 더 냉혹한 것과 유사하다. 자신도 겪어본 것이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헤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여기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N-N형 무능력자가 사회 내부에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주체의 부정이었다는 점, 즉 하위주체로서만 생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회생할 수 없고 단지 대리인에 의해서만 존재의 가치가 허락된 자였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널리 유포되는 P-N형 무능력 담론이 한국 사회에서 무능력자를 낳는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의 냉혹한 불의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제의식을 고통과 분리해서 사고하도록 유인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범죄는 특별히 악하지도 특별히 폭력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협력을 통해 자행되었다고 하면서 개념화시킨 악의 진부화는 한국 사회의 무능력 담론 속에서도 작동되고 있다. 냉혹한 세계의 논리에 순응하면서 살고 있는 시민에게 관용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장치로서 무능력자가 필요했고, 나아가 세계의 불의를 그다지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 무능력담론이 필요했다. 물론 그것은 시민의 의도된 이기심의 소산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능력자에 관한 담론은 시민적 욕망을 가치 있게 포장해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능력을 통한 성찰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 함축된 사회 속에 은폐된 배제주의적 폭력성을 발굴하는 데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어두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탐색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1. 탈콧 파슨스의 ‘권력 수축’ 개념이 말하고 있듯이, 권력에 대한 신뢰도 저하는 폭력 수단에 대한 권력의 의존도를 높인다. 1980년 광주사태는 그러한 국가의 폭력성이 저신뢰 상황에서 국내외적 공증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본문으로]
  2. 이때의 ‘성찰’이란, 사회의 무의식적 관행 속에 제도화된 배제주의적인 은폐된 폭력성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양해 가는 태도로 보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관점에 의존한 것이다. [본문으로]
  3. 예수 시대 이스라엘 사회는 나병환자를 일종의 행위무능력자로 취급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가 특정 행위와는 관계없이 세상을 더럽힌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율법은 그들과 사람들과의 일체의 관계(심지어 접촉까지도)를 배제하고자 그들을 격리시킬 것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사람들과의 우연한 접촉까지도 예방하기 위해 그들은 큰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주위에 알려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뜻하지 않게 접촉이 발생했을 경우, 그 관계를 무효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부정을 씻는 일정한 행위를 필요로 했다. [본문으로]
  4. 앤써니 기든스에 의하면, 유럽에서 평민에게 법적 주체의 기본권리의 하나인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전쟁에서 국민 총동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유럽의 체제들이 경험한 이후인 제1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한다. 그런데 무능력자인 평민이 시민이 되기 위해선 병역의무를 비롯한 국가주의에 대한 순응이라는 비용 지불을 전제로 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5. 민법은 능력을 ‘의사’와 ‘행위’의 두 차원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어떤 이가 무능력자인지의 문제를 그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사실 무능력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즉 무능력자 규정 자체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의사능력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행위라는 현상을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행위수행에 대한 사회적 평가라는 두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보려는 것이다. [본문으로]
  6. 기든스나 울리히 벡이 말하는 것처럼 자본의 일상 영역으로의 침투는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차원, 곧 ‘제도적 성찰성’을 수반하게 된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