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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구화된 세계의 고난의 두 번째 나팔을 예감하며 한-미 FTA를 본다

이 글은 '한-미 FTA' 협상이 한창 진행중인 때인 2006년 07월 14일, [에큐메니언]에 게재된 칼럼 원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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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된 세계의 고난의 두 번째 나팔을 예감하며 한-FTA를 본다







 

묵시자는 환상 중에 어린양이 일곱 개의 봉인을 개봉하는 것을 목도한다. 하나가 개봉될 때마다 무시무시한 재앙의 역사가 시작된다. 뼈를 깎는 고난의 시간이다. 그 하나하나가 마치 저주받은 영원처럼 길다. 천신만고, 그 고통을 다 겪어내자 또 하나, 전보다 더욱 포악한 재앙이 이어진다. 그렇게 여섯 개의 재앙이 계속되었다. 그 길고 고통스런 인고의 시간, 이제 끝이 나려나 했다.

일곱 번째 봉인이 뜯겨 나가고, 잠시의 고요가 이었다. 그것은 태풍이 눈이었다. 이윽고 일곱 나팔이 나타나고, 하나가 소리를 내지를 때마다 또 다시 재앙은 시작된다. 그렇게 고난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일곱 개의 나팔이 모두, 그 죽임의 소리를 다 내지를 때까지. 그러나 그것으로도 족하지 않다. 다시 재앙은 시작된다. 일곱 개의 대접이 더 엎지러져야 한다.

요한이라고 이름이 언급된 그 묵시자는 혹독한 죽임의 시간이 끝도 없이 지연되는 저주의 역사를 이렇게 묘사하고 나서야 구원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을 체감한다. 그토록 모진 이야기가 바로 요한묵시록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지구화의 횡포는 도대체 어디쯤인가. 한반도에서 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래 전쟁과 국가권력의 야만성이 활개치던,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구금했던, 그리고 모든 사람의 기본권을 유린했던 그 긴 폭압의 시간은 1987년을 계기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한데 그것은 단지 한 무리의 고난의 범주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1994년 김영삼 정부가 지구화의 위협에 공세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발전국가의 방어적 보호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시장을 개방하겠다고 표방한 시드니 선언은 새로운 범주의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첫 번째 재앙은 1997년의 외환위기로 나타났다. 그 결과 IMF 식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대규모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정규직보다 훨씬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터를 채워나갔다. 이러한 노동 안정성의 와해는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노동 강도가 한층 강화되는 혹독한 현실로 노동자를 몰아붙였고, 그럼에도 비정규직화됨으로써 실질임금이 삭감되는 처절한 노동의 양보를 수반했다. 게다가 주택과 교육 비용이 증대했고, 대출금리가 급격히 높아짐에 따라 채무 상환 비용이 급증했다. 고도성장하던 발전국가 시절 극히 양호했던 빈부격차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이제 OECD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 소비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됨에 따라, 소외의 체험이 보다 직접적으로 일상과 맞닿게 되었다. 이제 없었어도 행복했다는 식의 달관하는 가난은 지난 얘기가 됐다. 고통은 사회경제적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까지 삶을 압박하게 되었던 것이다. 빈곤층에서 (질병) 유병률이 급상승했고, 술이나 도박 등에 대한 의존성으로 자아가 파괴되는 이른바 실패한 가장들이 급증했으며, 많은 경우 이것은 가정폭력으로 이어졌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가족해체는 서구적인 개인주의화의 소산이라기보다는 빈곤층에 가중된 극심한 경제 위기와 관련이 있다.

또한 신용불량자()의 대대적인 등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사회적 신뢰는 가장 중요한 자산 항목에 속하게 되었고, 그러한 자산이 결핍된 존재는, 즉 이른바 신용 파탄자는 일체의 사회적 관계의 장로부터 퇴출되며 심지어는 확대가족 간의 가문적 결속 관계에서도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고통을 열거하자면 헤아릴 수 없다. 지구화로 인한 첫 번째 재앙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데 지금 그 두 번째 재앙이 예감되고 있다. -미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이 이러한 불길한 예감의 징조다.

흔히 얘기되듯 한-FTA외부쇼크를 통해 개혁을 강제함으로써 사회의 건전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요컨대 지구화에 대한 공세적 대응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위협을 견뎌낼 수 있는 체질개선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의 과정이라고 보는 게, 현재로선, 타당하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의 경향을 지배하는 지구화의 추세는 반생명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또한 의심의 여지없다. 그럼에도 현행의 지구화를 기회로 삼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최악의 계기로 맞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리는 비를 막을 길이 없다면,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능한 한 그로 인한 고통을 최소화하는 게 필요하다. 문제는 최선이 무엇이냐,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의 과정과 결과가 될 수 있느냐에 있다.

현 정부는 한-FTA가 바로 그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수많은 반론이 있지만, 정부도 막연한 가능성만 믿고 도박을 걸지는 않았을 테니, 그 주장은 주장대로 존중하자. 한데 그것이 좋을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해도, 과정만은 그렇게 평가할 수 없다. 참여정부가 집권한 이래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사회적 협약(social concertation)을 통한 개혁 전략은 적어도 한-FTA 과정을 보면 철회된 듯이 보인다. 시민사회의 의견을 묻는 과정이 생략된 채 급속하게 추진됐다. 강력한 의지를 보이면서 말이다.

독재체제가 민주화된 사회로 이행하게 되면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태도는 더 이상 복종과 충성을 기조로 할 수 없다. 대신 신뢰와 비판의 기조가 자리잡아야 한다. 한데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신뢰를 제도화하는 데 실패했다.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지대추구(rent-seeking)에 몰입하여 경쟁적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했고, 정부의 규제로부터 풀려난 자본과의 밀실동맹이 오히려 강화됐다. 이와 맞물려 시민 각자는 자기 나름의 사적 연고(private network)를 더욱 열광적으로 추구하게 되었고, 이것은 학연지연혈연 등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낳았다. 청년층 대비 대학생 비율이 세계 최고임에도, 유례없이 치열한 입시경쟁이 화염을 뿜는 현상도 결국은 더 나은 학연을 구비하는 것이 최선의 생존 전략이라는 시민사회의 집합적 기억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결국 민주화된 사회에서 공적 기관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철회되면 그 민주화는 천민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 공적 신뢰에 대한 갈증이 참여정부를 탄생시키는 대중의 열기를 낳았고, 참여정부는 처음부터 사회협약적 조합주의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갑자기 예측 못한 상황에서 탄생한 정부는 강력한 저항연합에 부딪혀야 한다.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의제설정 능력을 독점해온 구기득권세력이 결속하게 되면, 그 저항을 감당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하여 참여정부는 대중의 신뢰를 통한 시민적 지배연합을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어야 했다. 그것이 사회협약적 조합주의 정책의 근거였을 것이다. 한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참여정부와 집권당은 협약적이기보다는 계몽적이고자 했고, 저항연합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시민사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협약에 기초한 개혁 의지는 번번이 좌절됐고, 그러한 초초감이 집권 말기에 제기된 -FTA’라는 극약처방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앞서 말했듯이, -FTA가 우리에게 다가온 지구화의 두 번째 재앙의 조짐처럼 보인다. 관세 철폐, 지적 재산권의 적용범위 협정, 기타 학교, 병원, 법률회사 등을 포함한 각종 서비스업의 진출 등을 둘러싼 한-미간의 협정에서 우리 정부가 얼마만큼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매우 기술적인 부분이라 전문가들도 좀처럼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얼마나 우리 정부가 효과적으로 협정을 하든 간에, 미국계 자본이 과거에 비해 훨씬 폭넓게 일상에까지 침투하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국내 자본이 아무리 공공성을 띠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공공성의 압력 아래 놓여 있게 된 것이 민주화를 향한 그간의 노력의 결실이다. 하지만 지구화는 그러한 국경 내의 경쟁 규칙을 위축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구현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더욱이 FTA는 국경 내의 시민적 공공성에 대한 위협을 일상 공간 구석구석까지 전면화하면서 개입해 들어오는 신자유주의적인 전지구적 제도화 과정을 나타낸다.

이것을 전면적으로 막을 길은 현재로선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한-칠레 FTA나 한-FTA, -FTA, -FTA는 그 파급력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가령, 최근 많이 알려진 것처럼 의약품의 지적재산권을 현행 20년에서 무한정으로 늘린다면, 일부 약품의 비용이 수십 배까지 상승할 것이고, 이는 빈곤 계층의 의료서비스를 제한하는 꼴이 될 것임은 의문의 여지없다.

그런 점에서 한-FTA는 어떻게 되더라도 사회 중하층의 대중에게는 고통스러울 것임에 틀림없다. 정부가 의도하는 외적 충격의 파장에 가장 심각하게 맞부딛칠 대상이 바로 이들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완충시킬 사회적 준비가 필요하다. 과연 현재 우리 사회는 그러한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가. 정부가 의도한 충격 요법이 말 그대로 충격스러워야만 개혁이 되는 것이라면 완충을 위한 노력은 거의 없을 듯하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그러한 장치는 별로 없어 보인다. 요컨대 한-FTA는 치명적인 사회적 고통을 낳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오늘 오후 2시에 기독교사회책임등 기독교 보수단체들이 주도하는 -FTA 지지 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나는 그네들의 논리가 사뭇 궁금하다. 설사 대통령의 2003년 광복절 경축사처럼 2만 불 시대를 열 복안이 바로 그것이라고 해도, 성공’(?) 이면에 광범위한 대중의 고통이 수반된다면, 적어도 교회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앞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얼핏 이른바 좌파를 견제하기 위해 지지 입장을 표명하는 듯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승리하는 자, 건강한 자를 위해 기적을 베풀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약한 자, 잃어버린 자를 위해, 사회가 익명으로 내버린 이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닥친 것은, 지구화되는 세계 속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대중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품을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