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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쁜 일은 되풀이된다, 우리가 망각한 틈에 (경향신문 칼럼)

너무 급하게 써야했던 원고여서 문장이 문제가 많네요. 아무튼 [경향신문] 토요일 판(2016. 07. 16)에 실린 칼럼(사유와 성찰 코너) 원고 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152148015&code=990399&s_code=ao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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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은 되풀이된다, 우리가 망각한 틈에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시그널에서 다루었던 한 에피소드다. 서울의 빈민지역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에 관한 것이다. 1997년 가을부터 2014년까지 십여 명이 살해되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자들이며, 주변과의 관계망이 단절된, 소통부재의 여성들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는 1990년대의 경찰 이재한(조진웅 분)2015년의 경찰 박해영(이제훈 분)이 낡은 무전기를 통해 시간을 관통하는 대화를 하면서 사건을 풀어간다. 무전기는 단절된 공간에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다. 한데 이 드라마의 무전기는 고장난 기계다. 즉 현재의 질서 속에서 다른 공간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이 멈춰버린 장치다. 반면 이 질서 밖의 영역에선 살아 있다. 즉 다른 두 시간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하여 그것을 매개로 시간의 소통이 벌어진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각 시간대의 공간에서 해소되지 못한 채 다른 시간대로 떠넘겨졌다. 하지만 실은 대개는 사라졌다. 왜냐면 경찰 기록부에서 사건으로서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고 정의 내려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미제사건이라 부른다. 마치 위의 연쇄살인의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주변으로부터 기억되지 않는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경찰 기록부도 그 사건들에 대해서 더 이상 기억하지 않기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한데 2015년의 경찰 박해영은 미제사건전담반의 프로파일러다. 망각된 것을 다시 기억의 장부속에 기록하려는 부서의 소속원이다. 하여 그는 기억하는 업무에 속한 자이다. 이 부서 책임자인 차수현 경관(김혜수 분)의 기억도 이 사건과 얽혀 있다. 순경이던 1997, 직속상관인 이제한 형사와 함께 이 사건을 수사하다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될 뻔 했다. 그후 2015년의 그녀는 그 때의 트라우마로 망각되었던 기억을 되찾으며 이 사건을 풀어낸다.

미제사건전담반이 풀어낸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엄마의 학대로 정신적 장애를 갖게 된 범인이 엄마를 보호한다는 망상 속에서 최초로 엄마를 살인한 이후 엄마로 투사된 여인들을 계속 살해하였다. 그녀들이 엄마로 투사된 것은 주변으로부터 단절된 가난하고 고립된 여성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남편과 이혼한 이후 심한 우울증상을 보이며 주변과 소통이 단절된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과거의 아픈 사건들이 우리에게서 망각되었음에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몸서리치도록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되살아나고 있는 아픔의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 버려진 존재들, 망각되기 쉬운 존재들 사이에서 끔찍하게 되풀이되고 있음을 생생히 증언한다.

연쇄살인이 시작된 1997년 가을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소용돌이에 우리가 휘말려 지구적 스텐다드라는 세계질서에 강도 높게 편입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간이다. 창세기11장의 바벨 이야기가 떠오른다. 유다국을 멸절시킨 제국 바벨로니아를 연상시키는 바벨이라는 이름은 끔찍한 제국과 권력을 상징한다. 세계의 권력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음으로써 세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그 제국적 욕망은 언어의 분열 상황에 도달함으로써 좌절되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권력의 욕구가 모두를 분절시키는 소통부재의 세계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소통 부재의 상황이 오늘 여기서 되풀이되고 있다. 정부는 끊임없이 국민을 속인다. 세계 최고의 정보 인프라를 자랑하는 일류국가를 떠벌렸지만, 그것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루며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끔찍할 만큼 순진한 이들 말고는 누가 이 정부를 믿을까. 사회는 더할 수 없을 만큼 음모론으로 뒤덮여 버렸다. 아니 실은 사람들 각자는 자신의 이웃도 믿지 않을 만큼 깊은 불신 속에 살아간다.

그 뿌리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나 적어도 1997년 가을이 하나의 계기였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사회는 심각하게 양극화되기 시작했고, 고통전가의 시스템이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권력이 있는 자들은 남의 작은 것까지 색출하고 빼앗으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하기 시작했고, 이웃은 점점 자신의 욕구를 위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도구적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의 많은 것들을 망각해 버렸다.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더 약한 자를 향한 폭력과 살해, 그리고 중심에 있는 이들이 그 사건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약탈과 살육을 은폐하는 일들을 말이다. 문제는 그 망각의 틈 위에서 그런 사건들이 지금 여기에서 더 치명적이고 더 파괴적으로 되풀이된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