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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예수운동과 젤롯데 운동

이 글은 호슬리의 젤롯 가설을 정리한 자료로, [시대와 민중신학] 창간호(1994)에 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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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운동과 젤롯데 운동

 

 

 

 

1. “예수님은 젤롯데 운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라는 물음은 근현대 서구의 급진주의적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이 전개되던 18세기 이래 신앙과 사회적 실천간의 관계에 관한 핵심적인 주제였다.

2. 이 물음은 예수님과 젤롯데의 비교를 통해서 수행되었다.

2.1. 1세기 팔레스틴의 사회정치적 운동으로서 파악된 젤롯데(ζηλωτηs) 운동은 요세푸스(Josephus)의 저작인 󰡔유다고대사󰡕, 󰡔유다전쟁사󰡕, 󰡔자서전󰡕에서만 발견된다. 즉 젤롯데에 관한 가설은 요세푸스 저작의 해석에 근거한다.

2.2. 젤롯데 가설의 공통된 결론은 젤롯데는 1세기 팔레스틴의 혁명적 운동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적이라는 말은 언제나(예외 없이) 폭력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취급되었다.

2.3. 따라서 예수님과 젤롯데의 비교는 예수운동이 폭력적이냐 비폭력적이냐의 문제였다.

3. 예수님과 젤롯데 비교연구의 가장 커다란 연구성과는 1960년대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학자는 영국의 종교사회학자 브랜든(S.G.F. Brandon)과 독일의 신약학자 헹엘(M. Hengel)이다.

헹엘은 1959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젤롯데󰡕 Die Zeloten (Leiden: Brill)를 저술했다(1961년 출간). 이 책은 젤로데에 관한 최고의 연구서로 평가된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이 젤롯데와는 달리 비폭력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와 대다수 서구적 신학자들에 의해서 예수운동이 본질적으로 비폭력적(=평화주의적) 운동이었다는 것으로 비약된다.

브랜든은 1967년 자신의 기념비적인 책 󰡔예수와 젤롯데: 원시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속성에 관한 연구󰡕 Jesus and the Zealots: A Study of the Political Factor in Primitive Christianity (Manchester:Manchester Univ. Press)에서 예수님의 실천과 젤롯데 운동을 반립시키려는 헹엘에 반대하여 예수님을 젤롯데에 우호적인, 요컨대 1세기 팔레스틴의 혁명가의 하나로서 조명하였다.

당세 세계는 쿠바 혁명, 중국의 문화혁명, 베트남 민중.민족항쟁 등을 비롯한 제3세계의 민중.민족운동이 불일듯이 일어나고 서구에서도 전후 최대의 진보적 급진주의 운동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인 서구의 성직자들과 그리스도교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브랜든과 같은 혁명가 예수상()에 관한 주장은 그들의 실천의 근거로서 활용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집필된 카우츠키의 책(K.Kautsky, 󰡔그리스도교의 기초󰡕 Foundation of Christianity. 190>)은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들은 마하트마 간디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보다는 체 게바라, 모택동 등이 더욱 예수님의 실천에 부합한다는 믿음을 가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반면 이 논쟁에 참여한 여러 신학연구자들은 대체로 헹엘의 입장에 동조했다. 그 배후에는 무분별한(테러리즘적인) 혁명주의적 폭력성, 특히 스탈린 체제 하의 국가사회주의의 폭력성이 문제시되고 있었다.

60년대 말의 절정기를 지나면서 급작스럽게 혁명적 열기가 식어가고, 1970년대 들면서 보수주의 물결이 급속히 만연해졌다. 이제 브랜든 식의 예수해석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헹엘은 이 모든 논쟁의 마침표를 찍는 책을 집필한다. 󰡔폭력에 대한 승리󰡕 Victory over Violence (Philadelphia: Fortress 1975), 이 책 이후로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혁명성에 관한 서구신학의 결론은 예수님은 혁명가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4. 그런데 이상의 논쟁의 공통점은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의 공유점이자 헹엘이 완벽하게’(?) 집대성한 이른바 젤롯데 가설에 의존한다.

4.1. 헹엘의 젤롯데 가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젤롯데는 하나의 잘 조직된 정파로서, 주후 6년부터 72/3년까지 유다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일관되게 지속된 반로마적인 혁명적 집단이다.

이런 가설에 기초해서 그는 허무맹랑한 하나의 신화를 창조하는데, 1세기(6-72년까지) 팔레스틴에서 혁명적(=폭력적) 운동은 모두 젤롯데이며, 비폭력적 운동은 젤롯데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4.2. 그런데 헹엘의 이 가설은 요세푸스의 저작들에 대한 자의적인 독해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요세푸스에 대한 전문적 연구자들에 의해 헹엘의 젤롯데 가설이 비판을 받게 된다. 특히 학문간 협조적 연구 및 유다교와의 대화가 활성화된 70년대 이래 난립한 요세푸스 연구들은󰠏󰠏󰠏비록 정설 없이 다양한 가설의 난무라는 특징을 갖기는 하지만󰠏󰠏󰠏헹엘 가설의 정당성을 훼손시키기에 충분했다.

4.2.1. 최초의 비판은 자이틀린(S. Zeitlin)젤롯데와 시카리(“Zealots and Scarii”, JBL 81. 1962)이다. 그는 요세푸스의 책에서 사용된 젤롯데라는 용어는 명사적 용법과 형용사 또는 동사적 용법으로 구별되어 사용되었음을 분석하고, 헹엘이 이 양자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두 명사적으로 해석하였다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의 정파로서의 젤롯데는 의 경우이며, 이는 주후 66년 고위사제 엘르아잘 벤 아나니아스(Eleazar ben Ananias) 중심의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형성된 엘르아잘 벤 시몬(Eleazar ben Simon)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결집체를 지칭할 때 처음 사용되며,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정복될 때 이에 저항하여 끝까지 싸운 집단을 지칭하는 것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젤롯데와 구별된 집단으로서 시카리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다.

4.2.2. 그 이후 헹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독일의 바움바하(G. Baumbach)젤롯데와 시카리(“Zeloten und Sicarier”, TLZ 90. 1965)/“젤롯데: 그 역사적, 종교정치적 의미(“Die Zeloten: ihre geschichtliche und religionspolitische Bedeutung”, BLit 41. 1968)와 스미스(M. Smith)젤롯데와 시카리: 그들의 기원 및 그들 상호간의 관계문제(“Zealots and Sicarii, Their Origins and Relation”, HTR 64. 1971)를 필두로 하여 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활발히 전개된다.

4.2.3. 미국의 종교사회학자이자 급진적 해방신학자인 홀슬리(R.A. Horsley), 스미스 이래 제기되어 온 요세푸스 저작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에 기초하여 그리고 고대농경사회에 관한 인류학적, 사회학적 연구들에 기초하여 1세기 팔레스틴의 민중운동에 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그의 가설은 지금까지 출간된 1세기 팔레스틴의 민중운동에 관한 어떤 연구들보다도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분야에 관한 홀슬리의 연구논문/단행본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시카리: 고대 유다의 테러리스트’”(“Sicarii: Ancient Jewish ‘Terrorists’” JR 59. 1979).(󰡔예수시대 민중운동󰡕에 수록).

요세푸스와 사회적 도적떼(“Josephus and the Bandits”, JJS 10. 1979).

고대 유다의 사회적 도적 현상 및 대로마 항쟁, 주후 66-70년을 중심으로(“Ancient Jewish Banditary and the Revolt against Rome, AD.66-70”, CBQ 43 <1981>).(󰡔예수시대 민중운동󰡕에 수록).

예수시대 전후의 대중적 메시아 운동(“Popular Messianic Movements around the Time of Jesus”, CBQ 46 1984).(󰡔예수시대 민중운동󰡕에 수록).

“‘옛 예언자들의 하나처럼’: 예수시대의 대중적 예언자의 두 유형(“‘Like One of the Prophets of Old’: Two Types of Popular Prophets at the Time of Jesus”, CBQ 47. 1985).(󰡔예수시대 민중운동󰡕에 수록).

예루살렘의 므나헴: 젤롯데의 메시아 사상이 아니라 시카리에 관한 간략한 메시아적 일화(“Menahem in Jeruslaem: A Brief Messianic Episode among the Sicarii󰠏󰠏not ‘Zealotic Messianism’”, NovT 27. 1985).(󰡔예수시대 민중운동󰡕에 수록).

젤롯데: 그 기원, 관계 및 유다항쟁에서의 의의(“The Zealots: Their Origin, Relationships and Importance in the Jewish Revolt”, NovT 28. 1986).(󰡔예수시대 민중운동󰡕에 수록).

고위사제들과 로마치하의 팔레스틴 정치체제(“High Priests and the Politics of Roman Palestine”, JSJ 17 1986).

예수시대의 대중적 예언자운동: 그 주된 특징 및 사회적 기원(“Popular Prophetic Movements at the Time of Jesus: Their Principal Features and Social Origins”, JSNT 26. 1986).(󰡔예수시대 민중운동󰡕에 수록).

▶󰡔예수와 폭력의 연쇄󰡕 Jesus and the Spiral Violence (San Francisco: 1987).

홀슬리 & J.S.핸슨(공저), 󰡔사회적 도적떼, 예언자, 메시아: 예수시대 대중운동들󰡕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NY: 1985).

5. 홀슬리의 1세기 팔레스틴의 민중운동에 관한 가설의 요약:

5.1. 홀슬리는 영국의 맑시스트 사회학자인 홉스바움(E.J. Hobsbaum)의 전()산업사회의 민중운동에 관한 유형적 연구의 결과를 빌어 1세기 팔레스틴의 민중운동 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대중예언자 유형, 사회적 도적떼 유형, 테러리스트 유형, 대중적 메시아 운동 유형.

5.1.1. 대중적 예언자 유형은 다시 둘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징적인 신탁예언자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예언자 유형이다. 전자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며(일단의 제자들이 그를 따르기는 하지만) 주로 심판 신탁의 선포행위를 상징적으로 벌인다. 후자는 상당한 규모를 갖는 운동의 지도자로서 구원을 위한 집단적인 결정적 행위를 이끈다(세례자 요한; 튜다; ‘그 이집트인’).

-튜다는 대중을 이끌고 광야로 감(주후 44-45년 사이).

-‘그 이집트인은 대중을 올리브산으로 이끌고 감(주후 52-60년 사이).

5.1.2. 요세푸스는 주후 6년 예루살렘에서 납세거부 시위를 주도한 갈릴래아의 유다와 바리사이 시몬이 창시한 급진적인 민족주의적 바리사이즘을 4의 철학이라고 명명한다. 시카리는 갈릴래아의 유다와 바리사이 시몬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온 지식인 저항세력에서 유래한 집단으로, 주후 50년대 예루살렘에서 축제 때를 이용하여 로마에 협조하는 유다 귀족들을 살해, 납치하는 등의 테러 전술을 폄으로써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이들은 필시 지식인 출신의 급진적이고 과격주의적 민중운동 집단으로 66년 유다 민중봉기의 촉진제로서 역할하였음이 분명하다.

66년 마사다 요새를 점령하고 유다 민중봉기 직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임시정부의 초기 지도자가 된 (유다의 아들/손자인) 므나헴(Menahen), 그가 살해당한 직후 시카리들을 이끌고 마사다로 돌아와 그곳에서 72-3년 로마와 최후의 사투를 벌였던 유다의 또 다른 아들/손자인 엘르아잘 벤 야이르(Eleazar ben Jair) 등은 갈릴래아의 유다 가문 출신 시카리 지도자였다.

5.1.3. 사회적 도적떼 유형은 대중적 메시아운동 유형과 상호관련된다.

사회적 도적떼는 고대농경사회 특유의 사회현상으로, 고대농경사회의 생산력 수준에서 사회적 요인 혹은 자연적 요인에 의해 사회적 박탈현상이 심하게 일어날 때 몰락한 농민들이 소규모 때로는 몇백 정도의 규모로 결집하여 부유층이나 권력층을 공격하고 그 약탈물을 서로에게 그리고 인근지역의 농민들에게도 분배해 주곤하는 도적들을 말한다. 이들은 사회적 분배관계의 모순에서 피해자들이라는 점에서 민중적이며, 특히 반외세적(반제국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목적이나 확고한 이데올로기적 지향은 없다(전정치적).

팔레스틴에서 이들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는데, 특히 하스몬 왕조의 몰락기인 주전 70년대-40년대와 유다전쟁 직전기(원초적 반란기)인 주후 40년대 말부터 급증하였다. 이렇게 사회적 도적 현상이 심화되는 시기에는 중소 규모의 도적떼가 결집하여 대규모 저항집단을 형성하는데, 이 과정은 전정치적 도적떼들이, 농민들을 사회적 저항집단으로 동원한 메시아적 대중운동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집하라여 명백한 정치적 목표와 이데올기적 지향을 갖게 된다.

바로 이렇게 사회적 도적 현상이 심화된 시기에 대중적 메시아운동의 지도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역사에는 무명의 대중적 메시아운동 지도자들이 무수히 많았음이 분명하다. 유명한 대중적 메시아운동 지도자로는 주전 47년경 헤로데에게 죽임당한 전설적인 인물 히즈키야, 주전 4년경의 히즈키야의 아들 유다, 베레아지방의 시몬, 유다지방의 아트롱개우스, 그리고 66-70년의 유다항쟁기의 영웅 시몬 바르 기오라와 기살라의 요한 등이다.

주후 66년 여름 여러 도적때가 도시에 들어가 일종의 연합체를 형성한다. 요세푸는 이들을 젤롯데라고 명명한다. 66년에 들자 이미 전국은 통제불능의 혼란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인지 못한 총독 플로루스(Florus)가 예루살렘 성전금고로부터 17 달란트를 요구하자 이에 항거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이때 수많은 도적떼들이 예루살렘으로 운집한다. 그러던 중 5월 성전 수배대장이던 고위사제 엘르아잘이 황제를 위해 드리던 제의의 금지를 요구하는 것을 기화로 본격적인 항쟁기에 접어든다. 바로 이런 상황 전개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연합체로 형성된 도적떼 집단이 바로 젤롯데인 것이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여러 도적집단이 고위사제 엘르아잘이 이끄는 예루살렘의 급진주의 분파인 사제-시민군과 협조하여 로마군과 로마에 협조하는 귀족들을 무찌르고 예루살렘 저지대를 점령한다. 이 직후의 시기는 무정부상태의 정치적 공백기를 이룬다.

그런데 므나헴이 시카리들을 이끌고 마사다를 점령한 뒤 곧바로 예루살렘에 진입한다. 그는 메시아를 자처하며, (여전히 도시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대사제 아나니야의 집, 아그리빠 2세의 왕궁, 공공문서국, 안토니아 요새 등 도시의 고지대를 공격, 점령하는 전투를 주도한다. 이것은 이 전쟁이 반외세투쟁을 넘어서 계급투쟁으로 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저항 집단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던 민중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에루살렘 사제-시민군의 반발을 샀고, 이들에 의해 성전에서 암살당한다. 시카리는 엘르아잘 벤 야이르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여 마사다로 간 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남에 있게 된다. 한편 젤롯데의 주력부대는 이 와중에서 성전 안뜰로 몰려 그곳에서 갇힌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제 유다 임시정부는 엘르아잘 중심의 사제-시민집단이 주도하게 되는데, 이들은 도적떼들의 무장해제와 로마와의 타협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기도한다. 이들의 지도력은 1년 이상 계속된다.

한편 로마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군부세력의 지휘관인 베스파시안(Vespasian), 66년 로마의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봉기 진압에 실패한 뒤, 67년초 6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이 반란의 진압을 위해 팔레스틴에 진군한다. 그는 우선 갈릴래아를 공격하는데, 그의 공격전술은 이른바 초토화정책이었다. 점령지역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노예로 끌고 갔다. 이것은 전쟁유민의 급증을 초래했고, 이들 유민집단들 가운데 상당수가 도적떼로 돌변하게 되고, 이들이 크고 작은 규모의 세력을 형성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든다. 이런 상황변화는 예루살렘의 주도권이 다시 젤롯데로 이전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67년 말에서 6년 초(겨울) 젤롯데는 다시 한 번 사제귀족들이 동원한 세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성전 안뜰로 몰렸지만, 이두메인들의 협조를 받아 역공에 성공, 사제-시민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아나누스와 예수를 살해하고 예루살렘을 장학하는데 성공을 거둔다. 이 과정에서 젤롯데의 주도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기살라의 요한(John of Gischala)이다. 그는 베스파시안의 갈릴래아 정벌에서 용감하게 저항한 전쟁영웅으로, 예루살렘에 진입한 뒤 젤롯에의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실권을 잡은 그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지만 그의 과격성이나 독재적인 성격은 그의 뛰어난 용병술이나 지략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지지를 지속적으로 이끌어내기에 부적합했음이 분명하다.

한편 사제-시민집단은 대안적 지도자로 유다의 농촌에서 활약하고 있는 시몬 바르 기오라(Simon bar Giora)를 불러들인다. 그는 농민부대의 지휘관으로 66년 항쟁 때 이미 영웅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지만 지휘권을 임시정부에 넘겨주고 시골로 되돌아 왔었다. 그렇지만 그는 대중에게 메시아적 존재로 점점 부각되어 갔고, 기살라의 요한에게 내밀린 사제-시민집단은 과격한 요한 대신에 보다 원만한 그를 대안으로 택한 것이었다. 그는 넓은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농민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자 젤롯데의 다수가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대다수의 이탈로 지도자로서의 기반을 상실한 기살라의 요한은 또 다시 성전 안으로 밀려들어갔고, 성전 밖의 예루살렘 전역의 통제력은 시몬 바르 기오라에게 있었다. 한편 성전안의 젤롯데는 다시 분열하여 요한의 추종자들은 성전 바깥뜰을, 그리고 다른 젤롯데는 성전 안뜰을 장악한다. 이렇게 3분된 예루살렘의 지도력은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할 때까지 계속된다. 로마군은 주후 70년 드디어 세 세력의 점령지를 장악함으로써 예루살렘을 다시 식민화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어 72/3년에 마사다 정렴에 성공함으로써 유다 민족 민중항쟁은 종식되고 만다.

 

그밖의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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