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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서바이벌 잔혹터널을 견디는 ‘묵시록’의 지혜

이 글은 [공동선] 140(2018. 05+06)에 <누가 괴물을 만들고 있나?>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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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잔혹터널을 견디는 묵시록의 지혜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마가복음13,7

 

 

 

 

 

부지런하고 순박한 시골머슴 재룡이가 서커스 구경 갔다가 헌병에게 잡혀 얼떨결에 군대로 끌려간다. 그는 이념과 이념이 맞붙은 치열한 전쟁의 한복판에 아무런 주의(-ism)로도 무장하지 않은 채 군인이 되어 살상무기를 들고 무자비한 야수성을 발휘하며 싸워야 했다. 무수한 아군과 적군이 쓰러져갔지만 그는 용케 살아남아 제대군인이 되어 동두천으로 귀향한다. 한데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재룡이가 아니다. 난폭해졌고 게을러졌으며 폭력적인 사람이 되었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재룡이(1968)가 그리고 있는 한국전쟁 직후의 한 남자의 모습이다. 이 소설은 김승옥이 동두천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장편연재를 2회로 마감하고 단편으로 펴낸 것이다. 전쟁이라는 완력지상주의적 남성성의 서바이벌 게임은 순박한 청년을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전쟁의 서바이벌 게임을 통과한 그 시대 청년들은 전후, 급작스럽게 변화된 새로운 게임룰에 적응하지 못했다. 재룡이의 시골마을은 기지촌 도시가 되었고, 머슴살이 대신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 되었다. 약삭빠른 이들이라야 겨우 얻을까 말까 하는 바늘구멍 같은 취업시장에서 야수적 완력만 과잉성장한 청년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결국 그에게 허용된 얼굴은 광폭한 괴물 그것뿐이었다.

1950년대 청년들은 전쟁이라는 저 혹독한 터널을 지난 뒤, ‘전후라는 새로운 터널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거기에는 전쟁과는 다른, 어떤 점에서는 전쟁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또 다른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시간에 그들을 생존자로 만들었고 조국의 전사가 되게 했던 그 원리가 여기선 그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전후에 괴물이 되어 버린 그들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대상은 전쟁으로 몸과 정신이 잘려나간 상이군인[각주:1]과 순결한 육체성이 도륙된 아프레 걸[각주:2]이었다.

공지영은 1993년에 발표한 후일담류의 단편소설인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버렸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체제의 악마성과 벌인 격렬한 싸움의 시간이 지나가고, 문민정부(1993~1998)와 함께 시작된 평범한 생활인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자신의 비루함이 잠시 잊었던, 잊으려 했던 시간의 터널 속으로 그들을 되돌려 놓은 것이다.

수많은 의로운 죽음들에 관한 기억들을 역사의 타임스케줄에 기입해두며 기념식을 열어왔던 1980년대, 해서 그 장례식의 사회는 기어이 악마적 체제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장례식의 사회[각주:3]는 불가피하게 살아남은 자를 죄인으로 소환하게 된다.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자인하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식 고백은 그를 내면의 전쟁으로 몰아간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죄책고백일까. 말할 것도 죽은 자()에 대한 미안함이다. 여기에는 생물학적인 죽임을 당한 자뿐 아니라, 더 이상 사회적 생명력을 상실한 존재, 불의한 체제에 의해 심신이 망가져 폐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 포함된다.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동지들을 애써 잊으려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고자 했지만 결국 잊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남은 자들의 죄의식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그 고백 속에는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한 죄의식이 오버랩되어 있다. 독재의 터널이 지나자 거칠게 밀고 들어온 소비자본주의의 터널, 그 달콤함에 취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지난 날 죽은, 죽임당한 동지들의 상징 앞에서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소비자본주의적 사회의 하수인으로 앞 세대의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그 질서에서 서바이벌하려 사력을 다했던 자신을 본다. 문뜩 자기의 얼굴이, 지난 시절 그토록 타도하려 했던 적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기가 바로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그는 죄책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이제 괴물은 내면으로 들어온다. 마치 1980년 어간에 1(1979. 감독: 리들리 스콧)2(1986. 감독: 제임스 케메론)이 개봉되었던 헐리웃 영화 에얼리언을 연상시킨다. 여기에선 미친 공격력으로 인간의 뇌를 빨아먹고 몸을 숙주 삼아 번식하는 잔혹한 외계 생명체와 사투를 벌이는 인간 전사 앨런 리플리(시고니 위버)의 영웅담이 그려지고 있다. 한데 1990년대 초에 개봉된 3(1992. 감독: 데이빗 핀처)에 가서는 리플리 자신이 에얼리언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함께 해서는 안 되는, 함께 할 수 없는 저 잔혹한 괴물과 동거하는 존재, 그래서 영화에서 리플리는 자살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영화 에얼리언 시리즈 12편이 3편으로 전개되어야 했던 것처럼, 후일담 소설들은 괴물에 분연히 맞섰던 전사였던 자가 소비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사실에 직면하면서, 지난 시간에 죽었던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상상적 자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상상적 자살의 속죄의식을 감행한 이들이 만든 세계는 어떨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면의 괴물이 속삭이는 유혹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상상적 자살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들이 만든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되었을까? 여기엔 나도 포함되었을 테니 우리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1997년과 2008, 두 번에 걸쳐 잔인하게 고지된 신자유주의의 지옥의 묵시록한국전쟁전후라는 서바이벌 잔혹터널, 독재체제와 소비자본주의체제라는 새로운 서바이벌의 잔혹터널에 비해 더한지 덜한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잔혹한 서바이벌의 터널임에 분명하다.

어느 때건 시대에 대한 감수성이 누구보다도 빠르고 시대가 일으키는 고통의 레짐에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청년이다. 그러므로 청년의 자기 진술을 보면 시대의 양상을 더 잘 살필 수 있기에, 오늘의 시대도 청년의 반응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오늘의 청년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 ‘오포세대(삼포+취업+주택), ‘칠포세대(오포+인간관계+희망), 심지어 무한 포기를 시사하는 ‘N포세대라고 부른다. 그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스펙을 보유한 세대다. 그렇게 전례 없는 능력을 점점 배가시킨 세대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방법이 획득이 아니라 포기. 이러한 절망의 이력서가 그들을 집단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한데 그 연장선상에서 그들이 자기를 좀비라고 부른다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좀비(zombie)라는 말의 어원은 부두교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각주:4] 오늘날 이 용어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괴물표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각주:5] 그 의미는 걸어 다니는 흉측한 시체(grotesque walking dead)를 가리키는데, 특히 인간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존재, 이성이나 지성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식욕만을 위해 허우적대며 움직이는 욕구의 존재다. 청년은 바로 이런 좀비처럼 서바이벌의 매뉴얼에 따라 허우적대며 가기만 하면 되는 존재다. 그 길 위엔 경쟁에서 밀린 무수한 동료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길이다. 마치 요즘 TV에서 수없이 방영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가령 가수가 되고자 하는 이는, 노래 속에 삶의 깊이를 녹일 필요도 없고 동작 속에 영혼을 담을 필요도 없다. 단지 뛰어난 대중음악의 기술을 습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서바이벌의 과정에서 무수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이다.

1950년대의 청년들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 버렸지만 그런 자신을 성찰할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또 괴물로 지목된 누군가를 저주했다. 빨갱이에 대한 증오, 이단에 대한 증오의 광기처럼 말이다.. 1980~90년대 청년들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면의 괴물성을 성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성찰은 실패한 듯하다. 그들은 내면의 괴물과 사투를 벌였지만 괴물이 된 세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2천 년대의 청년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아직 첫 번째 잔혹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괴물이 내면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괴물 자체임을 토로한다. 하여 많은 이들은 내면의 싸움조차 불필요한 존재로 자신을 규정짓는다. 그것은 실제로 자신을 죽이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혹은 정신을 저주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몸의 병증과 정신의 병증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가복음공동체도, 위에서 한국사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살펴본 것처럼, 헤어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서바이벌의 잔혹터널 속에 있었던 듯하다. 학계에서 묵시록 소품으로 평가하는 13장은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절절하게 고백하고 있다. 한데 이 장의 모든 구절 가운데 가장 고통스런 구문은 7절이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절망적 재앙이 대를 이어 끝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묵시록의 끝은 아직 아니(우포, oupo)라고 말하고 있다.

우포라는 그리스어는 요한묵시록에도 두 번 등장한다(17,1012). 종말의 때, 7개의 봉인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처절한 재앙이 밀어닥친다. 마지막 봉인이 떼어지고 이제 끝인가 했더니 일곱 나팔이 차례로 울리며 더 혹독한 재앙이 몰려온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린 뒤 다시 일곱 대접이 엎어지면서 차례로 더더욱 강렬한 재앙이 밀려온다. 그렇게 기나긴 종말의 터널을 지난 뒤인데도 아직 끝이 아니다. ‘거대한 음녀로 묘사된 ()바빌로니아(mystērion BABYLŌN)가 멸망해야 하고, 거기에서 나온 7개의 나라와 10개의 나라가 아직다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끝도 없는 재앙, 마지막이 올 듯 하면서도 끝없이 유예되는 절망의 시간들. 그리스어 우포는 그렇게 참혹한 묵시록 중 가장 참혹한 표현이다.

그 기나긴 과정의 서바이벌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 아니 이겨내는 것, 이것이 바로 마가공동체의 자기 고백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괴물로 변하기도 하고, 그 괴물로 변한 자기를 저주하기도 하며 나아가 실은 자기 자신이 괴물 자체였다는 것에 견딜 수 없이 힘들지라도, 그것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것, 그것이 묵시록의 지혜인 것이다.

 

_김진호(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1. 전후 대중에게 남자의 괴물성을 표상하는 존재는 단연 상이군인이었다. [본문으로]
  2. ‘아프레걸’은 프랑스어로 ‘전후’(戰後)라는 뜻의 ‘아프레-게르’(après-guerre)와 영어 girl이 조합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후에 수많은 젊은 여성이 생존을 위해 남자의 성적 파트너가 되어야 했던 현상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전후 대중에게 아프레걸이라는 단어는 전후 여성의 괴물성을 표상하고 있다. [본문으로]
  3. 김은수는 공지영론을 펴면서 1980년대를 ‘장례식의 사회’라고 명명했다. 김은하, 〈살아남은 자의 죄책과 애도의 글쓰기―공지영의 80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35권(2015.12), 135쪽. [본문으로]
  4. 장누리, 〈좀비는 부두교의 노예였다〉, 《서울시립대신문》(2012.05.29.) [본문으로]
  5. 이동신, 〈좀비 자유주의―좀비를 통해 자유주의 되살리기〉, 《미국학논집》 46(1)(2014.05), 119~124쪽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