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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태양의 제국’ - 교회의 권력 세습 욕망, 그리고 정복지상주의자 종교

한백교회 2000년 9월 10일에 했던 하늘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반신학의 미소]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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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제국

교회의 권력 세습 욕망, 그리고 정복지상주의자 종교

 

 

 

 

그가 박사학위를 논문만 남겨둔 채 시골로 내려간 지 이제 10년쯤 된다. 그곳에서 그는 목회를 하는 게 아니라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항상 농부목사라고 칭한다. 이 말 속에는 아마도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닌, 땅과 만나고 대화하고 돌보는 데서 목회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던 그의 성찰이 들어있을 게다.

 

이를 통해 나는 농사에 대한 또 한 가지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땅은 그것 자체만으로서는 생명이 싱싱하고 활기 있게 자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그리고 참으로 생명이 생명답게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과연 나는 교회 안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자라게 하는소임을 다하고 있을까? 아니 그렇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소명의식만이라도 간직하면서 목사직을 수행하고 있을까? 내가 부끄러워하는 만큼 그의 글은 감동스럽다.

한데 그를 아는 사람들의 소식에 따르면, 그의 이야기는 대개 성공담이라기보다는 실패담에 가깝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 속에서 전해지는 삶의 성찰들은 더욱 깊은 경외감을 준다. 과거 도회지에서 변두리를 배회하던 얼치기 지식인이었던 것처럼, 10년간의 농사꾼 살이로도 부족해서 아직도 얼치기 농부의 티를 벗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두 세계 사이의 가느다란 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어릿광대를 연상케 한다. 그만큼 그의 시간들은 치열함의 연속이다. 그만큼 그 치열함 속에서 얻은 성찰들은 전율스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자신의 목회터인 땅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노동한다. 그리고 그 땅에서 나무가 열매를 맺고 채소가 자라난다. 이 과수 열매와 채소를 보며 그는 기쁨에 넘친다. 그러면서 창세기1장의 창조 이야기를 상상한다. 하느님이 생명이 된 모든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는 이야기가 새삼 실감난다. 한데, 그는 의문이 생겼다. 하느님이 남녀 한 쌍의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한 뒤 그들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위탁명령을 내렸다고..., 도대체 그로선 이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것처럼, 그에게도 아들과 딸이 있다. 하나는 도회지에서 낳은 아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에 내려가자마자 낳은 아이다. 벌써 두 아이가 열 살이 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들이 자신과 아내를 닮아 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창조의 경이로움에 감동하고, 또 한 없는 기쁨에 사로잡힌다. 너무 소중한 아이들, 너무 사랑스런 아이들, 이들은 그의 분신이요 삶의 의미요 존재 자체다.

그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의 소중한 땀방울이 자라고 있는 밭에 나가길 좋아한다고 한다. 아이들도 생명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땅에서 배운 가장 소중한 그것을 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 땅을 소유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성서 본문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다.

그의 탐구 방식은 히브리성서가 표현하는 말이 우리가 읽는 것과 과연 일치하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사전을 뒤져보면서, 그는 문제가 된 히브리 어휘들이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 것을 발견한다. 우리말 성서의 번역처럼 정복하다, 지배하다는 뜻도 있지만, ‘봉사하다, 돌봐주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는 이렇게 답을 내린다. 문제는 성서 번역자들에게 있었다고.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문명사적 관심에 따라 이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 자연을 정복/지배하라는 하느님의 위탁명령을 우리는 성서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탐구는, 형식상으로만 보면,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시킨 결과다. 만약 도회지의 지식인이 단지 구약학 연구자이자 목사로서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해석했더라면, 그 도를 넘어선 아마추어적 단순성에 많은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이질화된 지식과 체험의 칼날 같은 접경 위를 달리는 치열한 삶의 여정에서 진리를 갈구해본 자라면, 그의 단순한 성서 읽기는 오히려 지식 체계라는 복잡한 외모의 유령에 휘둘려 있는 먹물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나는 마치 효능 있는 술사의 주문에 걸려든 사람처럼, 그의 글을 읽으면서 지식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을 곧추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 지식 언어의 모체인 도회지로 상징되는 근대적 문명, 그 자본제적 이성주의의 복잡성의 미학에 대한 근원적 문제의식에 사로잡힌다.

 

농사꾼인 그와는 달리, 주로 대도시에 위치한 대교회의 몇몇 목사들은 자신을 닮은 소중한 아들에게 교회를 정복하고 지배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목사직 세습이라는 군주제적 상상력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것을 문제 삼던 단체들이 주도한 포럼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군주-목사를 신봉하던 열혈 십자군들이 단상을 점거해 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이러한 군주제적 상상력이 일부 목사들만의 소망만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다. 백성 없는 군주가 없듯이, 군주-목사는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무수한 백성-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세습이라는 황당한 의제만 아니라면, 목사직이라는 성역에 기꺼이 경의를 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도는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교회는 그 반대의 소리가 나오는 게 이상한 형국이라고 하는 게 적절한 지적일 것이다.

사실 교회를 매개로 하는 이러한 공모는 신앙의 이상한 형태와 맞물려 있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신앙이란 이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과민한 자폐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하여 전도는 타인을 교회적 인간으로 복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성서 읽기는 이질적인 것을 배타시하고 심지어는 그 대상을 정복하거나 아니면 몰살시켜야 한다는 공격성을 내면화시키는 의례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패를 모르는, 실패를 참을 수 없어 하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구축했다. 이는 지지 않는 태양의 제국이라는 신화의 역사다. 끝없는 생성만을 추구하는 역사,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는 역사, 이른바 끝없는 진보만의 역사라는 신화 말이다.

한데, 이것은 교회만의 사정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특히 서양이 추동해 온 근대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정복의 역사요 지배의 역사였다. 실패를 모르는 전진만을 욕망하는 역사다. 그리고 이 역사는 이질적인 세계를 정복하여 자신을 닮은 땅으로 재현해내려는 욕망의 역사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것은 바로 복제라는 문명적 능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복제란 닮은 것에 대한 추구의 결과다. 그리고 복제로 말미암아 닮은 것을 향한 욕망이 한결 부추겨진다. 그리하여 대량복제의 시대를 맞이한 근대는 닮은 것, 획일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절정에 이른 역사를 보여주었다. 국가니 민족이니 인종이니 계층의식이니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닮음에 대한 욕망의 결과들이고, 이것은 이질적인 것들을 향한 대대적인 제거의 전쟁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역사는 승자에 의해 항상 짜였고, 그것은 승자를 정당화하는 역사를 낳았다. 그러니 실패를 모르는 역사가 기술될 수밖에 없으며, 진보를 향한 욕망만이 되새김질 되는 문명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자연의 역사는 어떤가? 인류가, 특히 서양적 근대의 인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역사가 아닌, 하느님의 창조세계 자체의 역사 말이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원리에 의해 전개되는 역사다. 그래서 어찌 보면, 수많은 동서양의 사상가들이 그려냈던 것처럼, ‘순환의 원환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목적지를 향한 끝없는 여정 같은 게 아니다. ‘순환/반복이라는 말은 자연의 역사가 진보를 향해 달음질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야만의 시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기술문명을 이루기까지 인류가 걸어온 진보의 역사, 특히 그러한 진보에 로켓 엔진을 달고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하며 질주하는 서양적 근대의 역사, 그것은 로마제국내의 팔레스틴이라는 자그마한 땅에서 일어난 보잘 것 없던 한 운동이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로 부상하기까지의 교회의 역사와 구조적 등가 형태를 지닌다. 그리고 이는 천막에서 시작해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이루기까지 팽창을 거듭해온 우리네 대교회의 역사와 마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헤게모니 세력이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종교권력, 그리고 대교회의 권력자인 군주-목사는 서로 닮은꼴이다.

그리하여 거대교회를 구축하기까지 그 발전의 역사를 추동해 온, 승리를 향해 매진을 거듭한 장본인인 군주-목사가 아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상속하고, 그것을 다스릴 권리를 전수시키고자 한 것은, 기실 세속 세계의 권력의 법칙에 순응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자신의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의 미덕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듯이, 창세기의 위탁명령이 바로 자신들을 위한 것인 양, 그 의미를 장악한다. 그것은 지지 않는 태양의 제국을 건설하라는 신의 부름이었다고...

한편, 자연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한 농부 목사는 경험 속에서 자녀들에게 말해야 하는 아비의 가르침이, 말할 수밖에 없는 아비의 진실이라는 게, 자연 세계를 돌보아주고 삶을 나누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의 위탁명령에 대한 상투적인 이해를 되짚어보아야 했다. 농부 목사가 실패를 거듭하면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그것은 소년기적 상상력으로의 퇴행적 욕망인 태양의 제국 신화와 같은 것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달의 여신이 선포하는 담론이다. 달은 초승달로 태어났다가 반달이 되고 기어이는 만월이 되는,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다시 반달로 쇠하고 그믐달이 되어 마침내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망은 환생을 부른다. 달은 사라짐이 없는 한, 새로 시작하지 않는다. 마치 예수의 죽음이 없이는 그분의 부활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지지 않는 태양과 같은 신화는 달에게선 나올 수 없다. 달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환생이라는 끝없는 순환의 담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이 대표하는 창조성, 그 생명성이란 지배와 정복의 담론과는 결코 만날 수 없다. 그것은 목적론적인 발전관, 그 진보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순환하는 것이며, 죽음과 탄생을 거듭하는,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담론인 것이다.

나는 이번 추석에도 언제나처럼 새벽하늘을 환하게 비추어줄 달을 기대한다. 짙게 낀 구름 탓에 그만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다른 하늘 아래선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성,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그 창조성의 비밀을 폭로해 주었을 것이다. 그 밤의 하늘을 수놓을 만월은 태어남과 성장의 절정이다. 동시에 만월은 죽음을 준비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이 만월을 기리는, 그 다산적 생명성을 기리는 절기인 추석에,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관한, 그에 대한 교회적 해석에 관한 근원적인 되물음을 성찰할 기회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볼 눈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