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민중신학자 안병무, 우리가 그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

한신대 강연원고(2021 02 04)

--------------------------------------

민중신학자 안병무,

우리가 그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

 

 

 

 

호 로고스 사릌스 에케네토 ...’.

안병무 선생님이 한신대학교 교수이던 시절, 수유리 캠퍼스의 도서관 현관 입구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호 로고스말씀이, ‘사릌스육신이, ‘에게네토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등접속사 카이로 이어진 구문이 딸려 있었지요. ‘카이 에스케노센 엔 휘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저 유명한 요한복음114절의 말씀입니다.

당시 캠퍼스에는 건물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캠퍼스 중앙에 그리 크지 않은 뜰이 있었고, 그 양편에 강의실과 행정실이 있는 건물과 도서관, 2층 짜리 자그마한 건물 두 채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지요. 그 외에 식당이기도 했다가 강당이기도 했다가 체육관이기도 했던 건물 하나, 그리고 거기서 조금 떨어져서 교수님들의 사택 몇 채와 작은 기숙사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도서관 현관에 새겨진 짧은 헬라어 문구는 모든 학생이 아무리 적어도 하루에 몇 번씩은 마주쳤던 가장 친숙한 학교 풍경의 하나였습니다. 당연히 당시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학생에게 한신의 정신을 담은 문구는 바로 이 성서 구절이었지요.

한데 1986년 일반대학을 졸업한 뒤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이 문구는 안병무 선생과 분리해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 4년간의 신학공부를 1년 동안 압축해서 공부하는 첫 두 학기를 끝내고 본격적인 대학원 수업에 들어간 학생들에게 가장 수강하고 싶은 과목은 단연 안병무 선생님의 수업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다루는 수업이었고, 그 후 1년에 한번씩 봄학기마다 같은 주제의 수업이 두 해 더 개설되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요한복음 신학이 개설되었고, 그것이 선생이 강의한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선생에게서 신학은 단연 민중신학이었고, 성서학자로서 민중신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말할 것도 없이 마가복음이었습니다. 한데, 말년에 선생이 가장 주목한 성서는 바로 요한복음이었지요. 첫 번째 주 강의, 3시간 연속으로 진행되는 수업 전반부에 이 복음서에 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하셨는데, 그게 이 수업에서 선생이 강의한 처음이자 마지막 내용이었습니다. 나머지는 학기 내내 학생들의 발제로 진행되었지요. 근데 한 시간 남짓 진행된 강의에서 선생은 이제까지 이 복음서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신학적 논점을 던졌습니다. 그 논점은 이 복음서가 1세기 제도화되어 가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향에 대해 저항하는 급진파들의 텍스트라는 것이었습니다. 교리화, 경전화, 직제화에 대한 저항의 텍스트라는 것이지요. 그런 시각에서 한 학기 내내 학생들이 맡은 주제에 대해 발제를 해야 했지요. 선생이 첫 시간에 주석책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경고했듯이, 이런 시각에서 요한복음을 다루는 책은 당시 한신대학교 도서관에는 전무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선생에게 이러한 생각의 힌트를 준 연구들이 일종의 신상품처럼 간간이 나오긴 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접하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아무튼 선생의 요한복음에 대한 이러한 참신학 해석의 중심에는 114절의 구문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이 구절이 이 복음서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본 것입니다.

특히 선생이 주목한 것은 사릌스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흔히 또는 육신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선생은 살덩이라고 옮겼습니다. 몸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성서 헬라어 단어는 소마입니다. 한데 사릌스소마와는 거의 반대말에 가까울 만큼 대조되는 어휘입니다. 진리의 가치에 따라 혹은 율법에 따라 충실히 단련하면 성화될 수 있는 소마라면, ‘사릌스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가능성도 둘 수 없는 더러운 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워킹데드(walking dead), 오로지 식욕이라는 욕망 하나로 똘똘 뭉쳐진 채 인간을 먹어 치우려고 휘청대며 걷는 존재, 지적 탐구니 성찰이니 도덕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몸이 바로 사릌스입니다. 한데 요한복음은 충격적이게도 로고스가, 곧 신이 그런 몸이 되었다는 것, 그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선생이 마가복음에서 군중’, 곧 오클로스(ὄχλος)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했던 주장과 연결되는 것인데, 실은 이제까지의 오클로스론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철저한 민중신학적 물음을 선생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러운 몸, 그이가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은유적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으로, 과거엔 이른바 빨갱이를 떠올렸습니다.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불타오르는 증오심을 품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빨갱이는 가장 적나라한 혐오스런 몸, 사릌스였던 것입니다. 한데 선생에 따르면 하느님이 바로 빨갱의 몸으로 와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합니다. 해서 한동안 교회는 민중신학을 용공신학이라고 주장했지요. 아마도 요즈음엔 그리스도교가 동성애자를 가장 혐오스러워하니, 선생의 사릌스론에 따르면 하느님이 동성애자로 이 땅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밖에 우리가 혐오스러워하는 숱한 몸들을 사릌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를 하면서 우리의 혐오감정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그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선생의 오클로스-사릌스론적 민중신학은 철저한 반혐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도 우리 민족인데 우리사회가 지배층의 탐욕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온건한 반혐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데 이 주장은 외국인에 대해서는 문제가 됩니다. 그들은 민족의 일원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여성을 민족의 정당한 일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해서 그의 부친이나 남편이 누구인가가 중요했습니다. 여성주의자들은 지금도 여성에 대한 이런 편견이 여전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저들, 즉 외부인 혹은 반쪽짜리 내부인을 내부인에 가깝게 포용하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그런 것은 동화주의(assimilationims)라고 하지요. 이것은 최근 개신교 일각의 동성애 전환치료주장에도 나타납니다. 전환치료를 통해서는 계몽을 통해서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전환시켜서 우리의 생각과 형태, 질서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병무 선생은 이러한 온건한 반혐오주의에 반대합니다. 민중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타자가 바로 민중입니다. 한데 그 바깥은 어떤 것이나면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 없는 이들을 배척하는 그런 바깥입니다. 권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장벽의 바깥에 있는 자들, 그들은 가난해서 더럽고 추할 뿐 아니라, 그런 편견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더러운 자라고, 떳떳하지 못한 자라고 생각하면서 자괴감을 갖고 사는 자입니다. 또 살아갈 자원이 없어서 남에게 매수되기 쉽고 속임수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그런 이들입니다. 마약중독자나 알콜중독자도 많고 가정폭력과 또래 폭력이 난무하고, 범죄와 비행으로 점철된 곳의 사람들. 그런데 그리스도가 그런 이의 하나로 와서 살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민중신학적 오클로스론-사릌스론인 것입니다.

해서 안병무 선생은 당대에 가장 급진적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생은 배제와 차별을 조장하는 정부들을 비판하는 가장 철저한 사상가였고, 그런 정권에 문제를 제기하기는커녕 정권의 하수인 혹은 앞잡이로 존립해온 교회를 향한 날선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 급진적 신학자였습니다.

해서 당국은, 그리고 교회권력은 선생을 공격했고 대중으로부터 분리하려고 갖은 수를 썼습니다.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고, 대학교수직에서 강제로 해직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교수의 해직은 사학재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것입니다. 17년간 교수로 재직했지만 그중 9년을 강제해직된 상태로 있었지요. 선생은 평생 1천 편 이상의 글을 쓴 다작의 작가였습니다. 교수로 재직한 시간이 실제로 8년뿐이었지만, 공적인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53년이었고, 돌아가시는 1996년까지 글을 썼으니, 선생의 글쟁이 경력은 40년이 넘습니다. 또 선생은 명설교가였는데, 20대 중반부터 설교를 시작했고 역시 돌아가실 때까지 설교와 강연을 했습니다. 한데 설교를 금지시키지는 못했지만 강연은 금지당했지요. 요즘의 유튜브처럼 1인운영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대중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치는 당시의 매체는 잡지였는데, 선생도 그런 유력한 잡지였던 현존을 있었습니다. 한데 사상계》 《씨ᄋᆞᆯ의 소리》 《3등과 함께 수많은 유력한 잡지가 강제폐간된 것처럼 현존도 강제 폐간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신학자들과 교회들은 안병무 선생을 이단으로 간주하곤 했고, 민중신학을 불온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선생의 사회적 지명도는 높아지기만 했습니다. 제가 선생님 언저리에서 함께 있을 때, 한국사회의 비판저널리즘이 가장 선호하는 지식인은 바로 안병무였습니다. 늘 선생님 주변에 기자들이 따라다녔고, 그들은 선생님에게 글을 청탁하거나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중요 사건들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려 했지요. 물론 선생님을 감시하는 경찰도 그 주변에 늘 있었지요. 1985년 이후에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거동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당국의 감시는 끊임없었지요. 또 국제적으로 안병무는 가장 중요한 비판적 신학운동을 이끄는 제3세계의 대표적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었지요.

한마디로 선생은 당대에 한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참여지식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대에 많은 비판적 지식들은 민중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었지요. ‘민중경제학, ‘민중역사학, ‘민중문학, ‘민중사회학 등등. 그리고 이런 민중론적 지식인들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을 당했고 심지어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과 서남동 목사, 두 분이 이끄는 민중신학은 당대 비판적 지식이던 각 민중론들을 선도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이 많은 민중론자들을 교수직에서 강제해직시키고 강연도 못하고 글도 못 쓰게 했을 당시, 선생이 운영하고 있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는 독일에서 기금을 받아서 민중론 세미나를 열었고, 그때 발표되었던 글들이 다듬어져서 출간된 책이 1984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간된 한국민중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민중신학자들이 쓴 책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간된 민중과 한국신학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민중론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되었지요.

이것은 선생이 창립한 작은 연구단체인 한국신학연구소가 1980년 전후 시기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비판적 연구단체이기도 했고, 국제적인 반혐오주의적 연구단체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기독교 국제네트워크인 WCC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전 지구적인 인권네트워크의 구심력이 되던 시절 한국신학연구소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선생이 재직하던 시절 한신대학과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작은 신학교이고 작은 교단이었지만, 더욱이 그 작은 신학교와 교단에서 민중신학을 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당시 한국사회나 국제사회가 한신대와 기장을 보는 시각은 민중신학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한신대학은 민중신학을 하는 대학이고, 기장 신학은 민중신학이라고 하는 말이 일반적으로 떠돌았지요. 안병무, 문익환, 서남동, 문동환 등 선이 굵은 민중신학적 사상가이자 신학자들이 그런 역할을 했던 덕입니다. 그 무렵 한신대학과 기장은 작지만 유력한 학교이자 교단으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지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은 안병무 선생은 시대를 향해 그리고 교회를 향해 혐오주의를 넘어서라는 비판적 문제제기를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적한 예언자였고, 그런 담론을 펴는 매체들인 잡지들을 창간하고 운영하였으며 그 잡지들을 중심으로 굉장히 많은 글을 쓴 작가였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한데 여기서 하나 더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선생은 평생 다섯 개의 교회를 창립한 교회론자입니다. 이들 다섯 개의 교회를 꿰뚫는 정신을 혹은 신학을 하나로 뭉뚱그릴 수는 없지만, 그 기조를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두 작음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규모도 작았을 뿐 아니라 권력도 특정인에게 쏠리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 권력의 작음을 추구하는 공동체였습니다. 혹자는 선생은 교회를 비판하기만 했지 정작 교회를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는데, 실은 선생은 누구보다도 더 교회를 사랑했고 교회와 함께 평생을 살았던 이입니다. 평생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교회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평등한 공동체이고 누구에게나 열린 공동체이자 경계밖 타자를 모시려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였습니다.

그 교회들에서 선생은 유명한 설교자였지만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목사가 있든 없든, 목사는 신자 대중의 중심에 있는 이가 아니라 신자들의 이야기나눔을 중계하는 자 혹은 촉매자여야 하는 이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로서 선생은 신자들을 향하여, 바깥의 존재를 향해서 열린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설교들이 얼마 후에 글로 만들어져서 더 많은 이들에게 발표되었지요. 즉 선생의 그 많은 글 중 굉장히 많은 것들이 설교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또 신학은 그런 위기에 대해 아무런 말도 못하는 벙어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회는 교회를, 신학을 신뢰하지 않고, 교회는, 그리고 신학은 사회의 아픔에 대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안병무 선생이 평생 주장했던 것의 반대편으로 교회와 신학이 미친 듯 질주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안병무를, 그의 민중신학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장이, 한신이 그런 변화의 전면에 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