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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1 / 역사의 무대에 서다 - 다마스쿠스의 바울

[가톨릭평론] 2023년 봄호부터 연재할 예정인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의 첫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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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1

 

역사의 무대에 서다

다마스쿠스의 바울

 

 

 

근대 유럽의 시작을 예고하는 결정적인 신호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좀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중세 유럽의 정신을 이끌었던 스콜라철학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데 루터도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들의 신학은 바울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더 앞으로 거슬러 가보자. 서기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그리스도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던 문서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문서들이 선별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최종 27권의 문서들이 엮어서 오늘 우리가 제2성서라고 부르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27개 문서 중 바울이 썼다고 명시된 문서가 13개이고, 그 외에 다른 한 문서(히브리서)도 바울의 것이라고 간주되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성서 전체의 절반 정도가 바울과 관계된 문서들인 것이다. 그 무렵 저작된, 사도들의 행적에 관한 문서인 사도행전은 바울, 베드로, 빌립, 세 명의 사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에서 바울의 이야기가 절반을 차지한다. 이쯤 되면 그리스도교는 바울의 종교라고 해도 될 법하다.

한데 현대의 바울학계에서는 바울의 이름으로 저작된 13권 중 바울의 친서가 일부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이들이 대다수다. 히브리서도 바울의 문서가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가장 널리 합의되고 있는 바울 친서는 다음에 열거된 일곱 7권의 문서들이다.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데살로니가전서. 사도행전의 바울 이야기는 상당 부분이 후대에 심하게 각색된 영웅설화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바울 해석은 실재했던 바울의 신앙과 신학을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역사적 물음이 필요하다. 이 연재는 그리스도 운동의 사역자로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는 하나의 시도다. 특히 그가 활동했던 장소들을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장소들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바울과는 아주 다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바울에 관한 각색된 것들

 

증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사울(사울로스, Σαυλος)이라고 불리는 젊은이의 발 옆에 두었다. ...... 사울은 스테판 없애는 일을 한통속으로 좋게 여기고 있었다.

―〈사도행전7,58~8,1(1)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등장하는 첫 장면이다. 사울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도파로 전향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그가 등장한 무대는 스테판의 처형 현장이다. 여기서 그는 처형자의 편에 서 있다.

이것이 과연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친서들에서 바울은 수차례나 자신이 그리스도파를 박해한 자임을 실토하고 있지만 예루살렘에서 스테판 처형에 가담했다는 이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철저히 그리스도 운동을 박해했는지, 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나서고 있는지를, 그 극적인 전향을 강조하고 있는 문맥에서 저 유명한 스테판의 처형에 가담한 것을 굳이 숨길 이유가 있을까. 해서 아마도 이것은 극적인 전향 스토리를 가진 영웅적 인물로서 그를 기억하려 했던 후대적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라는 추정에 무게가 실린다.

한편 사울이라는 이름도 실제 그의 본명인지 의심스럽다. 어떤 이를 추앙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비슷한 이름의 영웅과 그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떠오르는 인물이 고대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의 마지막이자 군주제 시대의 첫 인물로 알려진 사울이다. 히브리성서의 헬라어역본인 칠십인역성서(셉투아긴타)에서는 그를 히브리어 발음대로 음역하여 사울(Σαουλ)로 표기하였다. 헬라사회에서 비헬라권 인물의 냄새가 풀풀 나는 이 생경한 이름을 헬라식으로 고쳐 쓰면 사울로스가 된다. 실제로 사도행전사울로스로 표기했다. 바울의 그리스식 발음이 파울로스(Παυλος)이니, 사람들이 베냐민 족보의 바울(로마서11,1; 빌립보서3,5)에게서 그 부족의 전설적 영웅 사울로스를 떠올리는 것은 있을 법하다. 즉 바울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원래 사울이었다고 기억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부족의 이스라엘계 사람임을 강변함에도 본명이 사울이었다는 걸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율법 전통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늘 받고 있음에도 이스라엘인 중의 이스라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와 이름이 같다는 걸 밝히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필시 바울 자신은 한번도 자신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등장하는 두 번째는 다마스쿠스 전향사건다. 이것을 다루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매우 길게 세 번에 걸쳐 나온다.(9,1~25; 22,3~16; 26,10~18) 이 세 텍스트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박해에 참여했던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압송해오라는 대제사장들(αρχιερει)(2)의 특명을 받아 파송되었다가 그곳에서 전향하여 그리스도파의 일원이 되었다는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다마스쿠스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의 박해활동에 비해 훨씬 더 길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진술의 사실적 개연성이 낮은 예루살렘에서의 박해 활동기와는 달리, 여기에서의 바울에 대한 기억은 좀더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기억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바울 자신도 다마스쿠스에서의 일화를 말하고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아레타스(Aρετας) 임금의 총독이 나를 붙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사람들의 도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큰 광주리에 담겨, 창문을 통해서 성벽 아래로 내려졌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손을 벗어나 달아났습니다.

―〈고린도후서11,32~33

 

내가 전에 유대교에 몸담고 있을 때에 어떻게 처신했는지를 여러분들은 들었습니다. 하느님(3)의 교회를 지나치게 박해하였으며 교회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 그러나 하느님............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내가 그 아들을 좋은 소식으로 전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때 나는 살과 피를 가진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앞서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갈라디아서1,13~17

 

바울도 다마스쿠스가 자신이 전향한 장소임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도행전처럼 그가 예루살렘의 특명을 받고 다마스쿠스로 파송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바울이 친서들에서 자신이 얼마나 유대교와 이스라엘 전통에 대해 열정이 깊은 사람이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신앙적 정체성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의 대사제들로부터 특명을 받은 전력, 누가 보아도 의심할 수 없는 공적 이력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시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바울 사후 한 세대 이상 지난 사도행전의 시대, 즉 그리스도파 사이에서 바울이 가장 주목할 만한 사도로 추앙되고 있던 때에는 바울에 얽힌 전설들이 널리 유포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박해자에서 박해당하는 자로의 극적인 전환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스토리인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비상한 빛을 보고 실명했다가 그 도시의 그리스도파 인사들의 도움으로 세례를 받고 눈이 회복되는 이야기도 바울 전설에 속했을 것이다. 미미한 존재감 때문에 자신의 진성성을 과시적으로 변증하고 있는 바울에게 이런 사건이 있었다면 전혀 침묵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필시 그는 이런 후대의 전설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후대의 전설적 이야기가 모두 상상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실재 사건의 흔적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중 분명한 한 가지는 그가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파로 전향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인 열혈 유대주의자였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없다. 그렇다면 그 전향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다마스쿠스 전향 사건, 재구성

 

사도행전은 그가 다마스쿠스로 간 것은 그 도시의 그리스도파를 압송해오라는 대제사장들의 특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했듯이 이것은 허구다. 왜냐면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관료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핵심도시에 들어가서 그 주민을 압송해오라는 명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도시는 나바태아국의 아레타스 4(기원전 9~서기 40)의 영토다. 이 아레타스는 나바태아국의 최절정기를 이룩한 통치자다. 그의 나라는 헤롯의 아들들이 다스리는 나라들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로, 트랜스요르단 지역과 시리아 지역 일부, 그리고 아라비아반도의 상당부분을 병합한 제국이었다. 약소국이 그런 강대국의 핵심도시에서 그 주민의 일부를 압송해오라는 명령, 그것도 그 명령권자가 약소국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귀족 세력이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상상이다.

한때 아레타스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다스리는 안티파스 왕(4)과 친선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로마와 중국 한나라 사이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들이 한창 개척되고 있을 때 그 중간 지역의 나라들은 앞다투어 그 길을 통과하는 대상들의 허브 역할을 하는 도시를 제공하는 경쟁을 벌였다. 필시 이 두 나라의 친선관계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 친선의 표시로 아레타스는 딸 파사엘리스(Φασαηλις)와 안티파스를 결혼하게 했다.

한데 얼마 후 안티파스와 그의 이종조카 헤로디아(Ἡρωδιας) 사이의 스캔들이 벌어졌다. 헤로디아는 아리스토블로스 4세의 딸이었다. 아리스토블로스 4세는 헤롯과 하스모니아 왕가의 여인 마리암네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초기에는 헤롯의 왕권을 물려받을 최적임자로 간주된 이였다.(5) 그러나 마리암네 1세가 헤롯에 의해 반역의 혐의로 처형되었고 아리스트블로스 4세도 그 얼마 후 처형되었다. 요컨대 헤로디아는 몰락한 헤롯 왕가의 여성이다.

한편 헤롯은 또 다른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인 마리암네 2세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지만, 후에 그녀도 왕실에서 쫓겨났다. 바로 이 마리암네 2세와 헤롯 사이에서 난 아들이 보에투스인데, 이 사람이 헤로디아의 남편이다.(6) 하지만 그 역시 왕실에서 쫓겨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헤로디아는 삼촌이자 남편인 보에투스를 버리고 다른 삼촌인 안티파스와 연애를 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안티파스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당시의 관행으로 그리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지중해 거의 전 지역에서 왕족 간의 혼인은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팔레스티나의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에 그것 때문에 안티파스에게 매우 불리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당대 최고의 비판적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그를 맹비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안티파스는 그를 처형했다. 한데 더 문제는 파사엘리스가 남편의 연애행각에 화가 난 모양이다. 그녀는 남편 몰래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사건은 나바태아국과 안티파스의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가 와해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실제로 그 얼마 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때가 서기 37년이다. 안티파스의 군대는 여지없이 패퇴했다. 이 패배 이후 2년이 지난 39년 안티파스는 실각하여 가울(Gaul. 라틴어로는 갈리아’)의 도시 리용으로 추방당해 거기에서 사망했다.

다마스쿠스는 이 전쟁이 벌어지기 3년 전에 아레타스의 영토에 복속되었다. 과거 팔레스티나의 최강국 아람국의 수도였던 이 오래된 도시는 아시리아에 의해 아람국이 멸망한 이후 과거의 명성을 되찾지 못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는데, 기원전 23년경 헤롯의 나라에 복속되었고, 그로부터 6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과 시리아 주민이 뒤섞여 살면서 깊은 유대를 나누는 곳이었다. 그리고 아레타스 4세의 나바태아국에 속하게 된 이후에도 그런 관계는 변함없었다. 한데 서기 37년의 전쟁은 이 도시에서 두 종족 간의 유대관계가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 무렵, 다마스쿠스에서 일단의 과격파 청년들이 이스라엘인들의 회당을 휘젓고 다니며 테러행위를 벌였다. 이스라엘계 주민들의 예배터이자 공회당이던 회당들 몇곳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필시 바울은 이 테러사건에 가담한 과격분자의 하나였다.

서기 37년은 꽤 공교로운 시간이다. 그 직전에 예루살렘에서 그 지역 최고행정관인 빌라도가 예수를 극형으로 처형했다. 한데 그 직후 예수가 부활했다는 설이 세간을 휘젓고 다녔고 그로 인해 예수추종자들이 도처에서 출현하여 메시아 활동을 재개했다. 새 체제의 도래를 꿈꾸는 혁명파들이 그런 메시지를 부르짖으며 대중을 선동하고 다닌 것이다. 예루살렘의 헬라계 회당(7)에서도 예수를 추종하는 혁명가들이 나타났다. 스테반이 그들의 지도자였다.

그런데 10년 동안 로마 황제가 파견한 유대아, 사마리아, 이두매아 지방(8)의 최고행정관으로 안정된 통치를 폈던 빌라도와 그의 러닝메이트인 대제사장 가야바가 동시에 실각했다. 이례적으로 긴 재임기를 구가한 두 인물이 동시에 실각하자 이 지역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유대아 중심적 원리주의자들의 준동이었다.

그 해가 바로 36~37년이다. 그때 예루살렘의 헬라계 회당에서 유대아 중심적 원리주의자들(9)이 혁신계인 그리스도파를 공격했고 지도자 스테반을 돌로 쳐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들에까지 확산되었다. 유대아 중심적 원리주의자들이 도처에서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마스쿠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이 도시에서 바울이 등장한다.

이 사태는 아레타스 4세에게 즉시 보고되었다. 안티파스와 전쟁을 벌인 직후였으니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은 이곳에선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과격파 청년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이 자행한 테러는 아레타스 4세에게 이 도시에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을 억압하는 명분이 되었다. 즉시 군대가 개입하여 테러분자 색출에 나섰다. 그리고 이것은 곳곳에서 꽤 심각한 갈등으로 번져갔다.

바울은 이 와중에서 부상을 입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를 은거시켜준 이는 공교롭게도 그리스도파에 속했던 하냐나(하나니아스, Ἁνανιας)라는 인물이었다.(사도행전22,12)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파로 전향했다. 그 얼마 후 그는 삼엄한 경계를 뚫고 성을 탈출하여 아라비아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아라비아란 나바태아국의 동남부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북서 지역의 다마스쿠스에서 대각선 방향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울이 다시 등장한 곳은 안디옥이다. 북시리아 지역의 대도시로, 다마스쿠스가 나바태아국와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도시라면 안디옥은 이스라엘과 로마를 연결하는 거점도시다.

 

안디옥의 바울

 

나보다 앞서 사도가 된 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아라비아(b)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서 3이 지나서야 게바와 안면을 트려고 예루살렘(c1)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15 동안 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나는 주님의 형제 아고보 말고는 사도들 가운데서 다른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습니다. ...... 그러고 나서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d) 지역으로 갔습니다. ......

14이 지나서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예루살렘(c2)으로 올라갔습니다. 디도도 같이 데리고 갔습니다.

―〈갈라디아1,17~2,1

본문에는 다마스쿠스 전향 이후 바울의 행보에 관한 정보들이 들어 있다. 특히 몇몇 장소와 시간에 관한 어구들이 주목된다. 지역들을 따라 바울의 행보를 표시하면 이렇다. 다마스쿠스(a)아라비아(b)예루살렘(c1)시리아와 길리기아(d)예루살렘(c2). 여기서 시간의 정보를 넣으면 (a) 또는 (b)에서 (c1) 사이에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c1)에서는 15일을 체류했다. 문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c2) 14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데 있다. 14년은 (d)에서 (c2) 사이의 시간인가 아니면 전향 이후(a)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까지의 세월을 말하는 것인가. (d)에서 (c2) 사이라고 하면, 그의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활동기가 14년 걸렸다는 얘기이고, (a)/(b)(c2) 사이라고 하면, 전향 이후 시리아와 길리기아까지의 할동기가 14년이라는 얘기다.

사도행전18,13에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활동할 당시 그곳 총독이 갈리오라고 한다면 그 시기는 서기 52년 무렵이다. 이것이 사실을 반영한다고 가정할 때, 여기서 이에 대해 길게 얘기하는 것은 좀 구구해서 결론만 말하면, ‘14(a)/(b)(c2) 사이의 기간이라고 보는 게 더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뒤 예루살렘에서 바르나바와 바울이 행보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바울의 활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는 뜻이다. 즉 다마스쿠스의 바울이 아니라 안디옥의 바울의 활동이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아무튼 ‘14년 후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다.

 

 

[후주]

(1) 이 글에서 인용한 성서 구절은 새한글성경(대한성서공회, 2022)에 따른 것이다. 단 몇 가지 용어만 임의로 수정하여 사용한다.

(2) 여기에선 단수형인 아르키에레우스(αρχιερευς)가 아니라 복수형인 아르키에레이(αρχιερει)로 쓰였다. 이 두 단어를 한글성서들은 대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이라고 옮겼고, 영어성서들도 ‘high priest(s)’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수와 복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연구자들은 대제사장()의 정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원로원인 산헨드린 의회의 수장이 단수형인 아르키에레우스라는 전제 아래서 복수형은 전직 대제사장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복수형인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복무하는 고위급 관료 제사장들(고위급 제사장들)을 지칭하고 그 단수형은 그들 중 최고직위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의 최고직위자는 당연히 산헤드린의 수장일 것이다. 그러니 두 주장의 차이는 복수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아르케에레이를, 이 두 주장 중 하나를 택하라면, 두 번째 주장의 입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관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적합할 것이다.

(3) 한글번역본 성서는 그리스 단어 떼오스(θεος)하나님이라고 번역했는데, 나는 하느님으로 교정하였다. ‘하나인 님보다는 하늘의 님이 보다 적절한 번억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라는 표기 속에 타종교의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4) 성서는 안티파스를 그의 부친의 이름인 헤롯이라고 쓰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와 그의 부친을 혼돈하기 쉽다. 그는 헤롯이 죽은 뒤, 그의 나라가 아들들에게 삼분되어 상속될 때,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역을 물려받은 이였다. 즉 그의 통치영역 내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메시아운동을 벌였다.

(5) 헤롯의 첫째 부인은 예루살렘계 귀족 출신인 도리스(Δωρις)인데,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인 마리암네보다는 위상이 낮았으니, 도리스의 아들보다는 마리암네의 아들이 더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6) 마가복음6,17마태복음14,3에는 헤로디아의 전 남편을 안티파스의 이복형제인 필립이라고 하는데, 필립이 이복형제인 것은 맞지만 헤로디아의 전남편이 아니라 그녀의 딸인 살로메의 남편이 된 사람이다. 헤로디아의 전남편은 안티파스의 또 다른 이복형제인 보에투스다.

(7) 성서는 이곳을 리베르티노스(Λιβερτινος)라고 불렀다.(사도행전6,9)

(8) 헤롯으로부터 이 세 지방을 상속받은 이는 아르켈라오스(Αρχελαος). 그는 헤롯의 열 명의 아내 중 갈릴래아 귀족 출신의 여성 말싸케(Μαλθακη)가 낳은 아들인데,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통치자인 안티파스도 그녀의 아들이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는 통치권을 상속받은 지 십년 만인 서기 6년에 축출되고 로마 황제가 파견한 최고행정관에게 귀속된다. 이 최고행정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빌라도다.

(9) 이스라엘계 이민자들 중 유대아 출신자들은 예루살렘을 좀더 중요한 신앙의 메카로 생각했다. 한데 그중 유대 중심적 원리주의자들은 예루살렘 외의 다른 장소들을 격하했고, 그런 신앙을 아예 절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테러적 행동을 벌인 이들도 있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 자주 사용되는 유대아 사람들(Ιουδαιοι)이라는 단어는 대개 이런 사상에 경도된 유대아 원리주의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역사의 무대에 서다

다마스쿠스의 바울

 

 

 

근대 유럽의 시작을 예고하는 결정적인 신호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좀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중세 유럽의 정신을 이끌었던 스콜라철학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데 루터도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들의 신학은 바울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더 앞으로 거슬러 가보자. 서기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그리스도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던 문서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문서들이 선별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최종 27권의 문서들이 엮어서 오늘 우리가 제2성서라고 부르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27개 문서 중 바울이 썼다고 명시된 문서가 13개이고, 그 외에 다른 한 문서(히브리서)도 바울의 것이라고 간주되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성서 전체의 절반 정도가 바울과 관계된 문서들인 것이다. 그 무렵 저작된, 사도들의 행적에 관한 문서인 사도행전은 바울, 베드로, 빌립, 세 명의 사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에서 바울의 이야기가 절반을 차지한다. 이쯤 되면 그리스도교는 바울의 종교라고 해도 될 법하다.

한데 현대의 바울학계에서는 바울의 이름으로 저작된 13권 중 바울의 친서가 일부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이들이 대다수다. 히브리서도 바울의 문서가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가장 널리 합의되고 있는 바울 친서는 다음에 열거된 일곱 7권의 문서들이다.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데살로니가전서. 사도행전의 바울 이야기는 상당 부분이 후대에 심하게 각색된 영웅설화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바울 해석은 실재했던 바울의 신앙과 신학을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역사적 물음이 필요하다. 이 연재는 그리스도 운동의 사역자로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는 하나의 시도다. 특히 그가 활동했던 장소들을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장소들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바울과는 아주 다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바울에 관한 각색된 것들

 

증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사울(사울로스, Σαυλος)이라고 불리는 젊은이의 발 옆에 두었다. ...... 사울은 스테판 없애는 일을 한통속으로 좋게 여기고 있었다.

―〈사도행전7,58~8,1(1)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등장하는 첫 장면이다. 사울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도파로 전향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그가 등장한 무대는 스테판의 처형 현장이다. 여기서 그는 처형자의 편에 서 있다.

이것이 과연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친서들에서 바울은 수차례나 자신이 그리스도파를 박해한 자임을 실토하고 있지만 예루살렘에서 스테판 처형에 가담했다는 이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철저히 그리스도 운동을 박해했는지, 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나서고 있는지를, 그 극적인 전향을 강조하고 있는 문맥에서 저 유명한 스테판의 처형에 가담한 것을 굳이 숨길 이유가 있을까. 해서 아마도 이것은 극적인 전향 스토리를 가진 영웅적 인물로서 그를 기억하려 했던 후대적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라는 추정에 무게가 실린다.

한편 사울이라는 이름도 실제 그의 본명인지 의심스럽다. 어떤 이를 추앙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비슷한 이름의 영웅과 그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떠오르는 인물이 고대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의 마지막이자 군주제 시대의 첫 인물로 알려진 사울이다. 히브리성서의 헬라어역본인 칠십인역성서(셉투아긴타)에서는 그를 히브리어 발음대로 음역하여 사울(Σαουλ)로 표기하였다. 헬라사회에서 비헬라권 인물의 냄새가 풀풀 나는 이 생경한 이름을 헬라식으로 고쳐 쓰면 사울로스가 된다. 실제로 사도행전사울로스로 표기했다. 바울의 그리스식 발음이 파울로스(Παυλος)이니, 사람들이 베냐민 족보의 바울(로마서11,1; 빌립보서3,5)에게서 그 부족의 전설적 영웅 사울로스를 떠올리는 것은 있을 법하다. 즉 바울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원래 사울이었다고 기억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부족의 이스라엘계 사람임을 강변함에도 본명이 사울이었다는 걸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율법 전통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늘 받고 있음에도 이스라엘인 중의 이스라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와 이름이 같다는 걸 밝히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필시 바울 자신은 한번도 자신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등장하는 두 번째는 다마스쿠스 전향사건다. 이것을 다루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매우 길게 세 번에 걸쳐 나온다.(9,1~25; 22,3~16; 26,10~18) 이 세 텍스트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박해에 참여했던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압송해오라는 대제사장들(αρχιερει)(2)의 특명을 받아 파송되었다가 그곳에서 전향하여 그리스도파의 일원이 되었다는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다마스쿠스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의 박해활동에 비해 훨씬 더 길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진술의 사실적 개연성이 낮은 예루살렘에서의 박해 활동기와는 달리, 여기에서의 바울에 대한 기억은 좀더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기억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바울 자신도 다마스쿠스에서의 일화를 말하고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아레타스(Aρετας) 임금의 총독이 나를 붙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사람들의 도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큰 광주리에 담겨, 창문을 통해서 성벽 아래로 내려졌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손을 벗어나 달아났습니다.

―〈고린도후서11,32~33

 

내가 전에 유대교에 몸담고 있을 때에 어떻게 처신했는지를 여러분들은 들었습니다. 하느님(3)의 교회를 지나치게 박해하였으며 교회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 그러나 하느님............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내가 그 아들을 좋은 소식으로 전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때 나는 살과 피를 가진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앞서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갈라디아서1,13~17

 

바울도 다마스쿠스가 자신이 전향한 장소임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도행전처럼 그가 예루살렘의 특명을 받고 다마스쿠스로 파송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바울이 친서들에서 자신이 얼마나 유대교와 이스라엘 전통에 대해 열정이 깊은 사람이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신앙적 정체성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의 대사제들로부터 특명을 받은 전력, 누가 보아도 의심할 수 없는 공적 이력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시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바울 사후 한 세대 이상 지난 사도행전의 시대, 즉 그리스도파 사이에서 바울이 가장 주목할 만한 사도로 추앙되고 있던 때에는 바울에 얽힌 전설들이 널리 유포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박해자에서 박해당하는 자로의 극적인 전환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스토리인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비상한 빛을 보고 실명했다가 그 도시의 그리스도파 인사들의 도움으로 세례를 받고 눈이 회복되는 이야기도 바울 전설에 속했을 것이다. 미미한 존재감 때문에 자신의 진성성을 과시적으로 변증하고 있는 바울에게 이런 사건이 있었다면 전혀 침묵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필시 그는 이런 후대의 전설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후대의 전설적 이야기가 모두 상상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실재 사건의 흔적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중 분명한 한 가지는 그가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파로 전향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인 열혈 유대주의자였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없다. 그렇다면 그 전향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다마스쿠스 전향 사건, 재구성

 

사도행전은 그가 다마스쿠스로 간 것은 그 도시의 그리스도파를 압송해오라는 대제사장들의 특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했듯이 이것은 허구다. 왜냐면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관료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핵심도시에 들어가서 그 주민을 압송해오라는 명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도시는 나바태아국의 아레타스 4(기원전 9~서기 40)의 영토다. 이 아레타스는 나바태아국의 최절정기를 이룩한 통치자다. 그의 나라는 헤롯의 아들들이 다스리는 나라들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로, 트랜스요르단 지역과 시리아 지역 일부, 그리고 아라비아반도의 상당부분을 병합한 제국이었다. 약소국이 그런 강대국의 핵심도시에서 그 주민의 일부를 압송해오라는 명령, 그것도 그 명령권자가 약소국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귀족 세력이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상상이다.

한때 아레타스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다스리는 안티파스 왕(4)과 친선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로마와 중국 한나라 사이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들이 한창 개척되고 있을 때 그 중간 지역의 나라들은 앞다투어 그 길을 통과하는 대상들의 허브 역할을 하는 도시를 제공하는 경쟁을 벌였다. 필시 이 두 나라의 친선관계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 친선의 표시로 아레타스는 딸 파사엘리스(Φασαηλις)와 안티파스를 결혼하게 했다.

한데 얼마 후 안티파스와 그의 이종조카 헤로디아(Ἡρωδιας) 사이의 스캔들이 벌어졌다. 헤로디아는 아리스토블로스 4세의 딸이었다. 아리스토블로스 4세는 헤롯과 하스모니아 왕가의 여인 마리암네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초기에는 헤롯의 왕권을 물려받을 최적임자로 간주된 이였다.(5) 그러나 마리암네 1세가 헤롯에 의해 반역의 혐의로 처형되었고 아리스트블로스 4세도 그 얼마 후 처형되었다. 요컨대 헤로디아는 몰락한 헤롯 왕가의 여성이다.

한편 헤롯은 또 다른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인 마리암네 2세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지만, 후에 그녀도 왕실에서 쫓겨났다. 바로 이 마리암네 2세와 헤롯 사이에서 난 아들이 보에투스인데, 이 사람이 헤로디아의

남편이다.(6) 하지만 그 역시 왕실에서 쫓겨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헤로디아는 삼촌이자 남편인 보에투스를 버리고 다른 삼촌인 안티파스와 연애를 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안티파스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당시의 관행으로 그리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지중해 거의 전 지역에서 왕족 간의 혼인은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팔레스티나의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에 그것 때문에 안티파스에게 매우 불리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당대 최고의 비판적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그를 맹비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안티파스는 그를 처형했다. 한데 더 문제는 파사엘리스가 남편의 연애행각에 화가 난 모양이다. 그녀는 남편 몰래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사건은 나바태아국과 안티파스의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가 와해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실제로 그 얼마 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때가 서기 37년이다. 안티파스의 군대는 여지없이 패퇴했다. 이 패배 이후 2년이 지난 39년 안티파스는 실각하여 가울(Gaul. 라틴어로는 갈리아’)의 도시 리용으로 추방당해 거기에서 사망했다.

다마스쿠스는 이 전쟁이 벌어지기 3년 전에 아레타스의 영토에 복속되었다. 과거 팔레스티나의 최강국 아람국의 수도였던 이 오래된 도시는 아시리아에 의해 아람국이 멸망한 이후 과거의 명성을 되찾지 못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는데, 기원전 23년경 헤롯의 나라에 복속되었고, 그로부터 6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과 시리아 주민이 뒤섞여 살면서 깊은 유대를 나누는 곳이었다. 그리고 아레타스 4세의 나바태아국에 속하게 된 이후에도 그런 관계는 변함없었다. 한데 서기 37년의 전쟁은 이 도시에서 두 종족 간의 유대관계가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 무렵, 다마스쿠스에서 일단의 과격파 청년들이 이스라엘인들의 회당을 휘젓고 다니며 테러행위를 벌였다. 이스라엘계 주민들의 예배터이자 공회당이던 회당들 몇곳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필시 바울은 이 테러사건에 가담한 과격분자의 하나였다.

서기 37년은 꽤 공교로운 시간이다. 그 직전에 예루살렘에서 그 지역 최고행정관인 빌라도가 예수를 극형으로 처형했다. 한데 그 직후 예수가 부활했다는 설이 세간을 휘젓고 다녔고 그로 인해 예수추종자들이 도처에서 출현하여 메시아 활동을 재개했다. 새 체제의 도래를 꿈꾸는 혁명파들이 그런 메시지를 부르짖으며 대중을 선동하고 다닌 것이다. 예루살렘의 헬라계 회당(7)에서도 예수를 추종하는 혁명가들이 나타났다. 스테반이 그들의 지도자였다.

그런데 10년 동안 로마 황제가 파견한 유대아, 사마리아, 이두매아 지방(8)의 최고행정관으로 안정된 통치를 폈던 빌라도와 그의 러닝메이트인 대제사장 가야바가 동시에 실각했다. 이례적으로 긴 재임기를 구가한 두 인물이 동시에 실각하자 이 지역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유대아 중심적 원리주의자들의 준동이었다.

그 해가 바로 36~37년이다. 그때 예루살렘의 헬라계 회당에서 유대아 중심적 원리주의자들(9)이 혁신계인 그리스도파를 공격했고 지도자 스테반을 돌로 쳐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들에까지 확산되었다. 유대아 중심적 원리주의자들이 도처에서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마스쿠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이 도시에서 바울이 등장한다.

이 사태는 아레타스 4세에게 즉시 보고되었다. 안티파스와 전쟁을 벌인 직후였으니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은 이곳에선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과격파 청년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이 자행한 테러는 아레타스 4세에게 이 도시에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을 억압하는 명분이 되었다. 즉시 군대가 개입하여 테러분자 색출에 나섰다. 그리고 이것은 곳곳에서 꽤 심각한 갈등으로 번져갔다.

바울은 이 와중에서 부상을 입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를 은거시켜준 이는 공교롭게도 그리스도파에 속했던 하냐나(하나니아스, Ἁνανιας)라는 인물이었다.(사도행전22,12)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파로 전향했다. 그 얼마 후 그는 삼엄한 경계를 뚫고 성을 탈출하여 아라비아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아라비아란 나바태아국의 동남부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북서 지역의 다마스쿠스에서 대각선 방향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울이 다시 등장한 곳은 안디옥이다. 북시리아 지역의 대도시로, 다마스쿠스가 나바태아국와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도시라면 안디옥은 이스라엘과 로마를 연결하는 거점도시다.

 

안디옥의 바울

 

나보다 앞서 사도가 된 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아라비아(b)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서 3이 지나서야 게바와 안면을 트려고 예루살렘(c1)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15 동안 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나는 주님의 형제 아고보 말고는 사도들 가운데서 다른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습니다. ...... 그러고 나서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d) 지역으로 갔습니다. ......

14이 지나서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예루살렘(c2)으로 올라갔습니다. 디도도 같이 데리고 갔습니다.

―〈갈라디아1,17~2,1

본문에는 다마스쿠스 전향 이후 바울의 행보에 관한 정보들이 들어 있다. 특히 몇몇 장소와 시간에 관한 어구들이 주목된다. 지역들을 따라 바울의 행보를 표시하면 이렇다. 다마스쿠스(a)아라비아(b)예루살렘(c1)시리아와 길리기아(d)예루살렘(c2). 여기서 시간의 정보를 넣으면 (a) 또는 (b)에서 (c1) 사이에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c1)에서는 15일을 체류했다. 문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c2) 14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데 있다. 14년은 (d)에서 (c2) 사이의 시간인가 아니면 전향 이후(a)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까지의 세월을 말하는 것인가. (d)에서 (c2) 사이라고 하면, 그의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활동기가 14년 걸렸다는 얘기이고, (a)/(b)(c2) 사이라고 하면, 전향 이후 시리아와 길리기아까지의 할동기가 14년이라는 얘기다.

사도행전18,13에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활동할 당시 그곳 총독이 갈리오라고 한다면 그 시기는 서기 52년 무렵이다. 이것이 사실을 반영한다고 가정할 때, 여기서 이에 대해 길게 얘기하는 것은 좀 구구해서 결론만 말하면, ‘14(a)/(b)(c2) 사이의 기간이라고 보는 게 더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뒤 예루살렘에서 바르나바와 바울이 행보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바울의 활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는 뜻이다. 즉 다마스쿠스의 바울이 아니라 안디옥의 바울의 활동이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아무튼 ‘14년 후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다.

_김진호(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이사)

 

 

[후주]

(1) 이 글에서 인용한 성서 구절은 새한글성경(대한성서공회, 2022)에 따른 것이다. 단 몇 가지 용어만 임의로 수정하여 사용한다.

(2) 여기에선 단수형인 아르키에레우스(αρχιερευς)가 아니라 복수형인 아르키에레이(αρχιερει)로 쓰였다. 이 두 단어를 한글성서들은 대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이라고 옮겼고, 영어성서들도 ‘high priest(s)’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수와 복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연구자들은 대제사장()의 정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원로원인 산헨드린 의회의 수장이 단수형인 아르키에레우스라는 전제 아래서 복수형은 전직 대제사장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복수형인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복무하는 고위급 관료 제사장들(고위급 제사장들)을 지칭하고 그 단수형은 그들 중 최고직위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의 최고직위자는 당연히 산헤드린의 수장일 것이다. 그러니 두 주장의 차이는 복수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아르케에레이를, 이 두 주장 중 하나를 택하라면, 두 번째 주장의 입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관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적합할 것이다.

(3) 한글번역본 성서는 그리스 단어 떼오스(θεος)하나님이라고 번역했는데, 나는 하느님으로 교정하였다. ‘하나인 님보다는 하늘의 님이 보다 적절한 번억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라는 표기 속에 타종교의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4) 성서는 안티파스를 그의 부친의 이름인 헤롯이라고 쓰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와 그의 부친을 혼돈하기 쉽다. 그는 헤롯이 죽은 뒤, 그의 나라가 아들들에게 삼분되어 상속될 때,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역을 물려받은 이였다. 즉 그의 통치영역 내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메시아운동을 벌였다.

(5) 헤롯의 첫째 부인은 예루살렘계 귀족 출신인 도리스(Δωρις)인데,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인 마리암네보다는 위상이 낮았으니, 도리스의 아들보다는 마리암네의 아들이 더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6) 마가복음6,17마태복음14,3에는 헤로디아의 전 남편을 안티파스의 이복형제인 필립이라고 하는데, 필립이 이복형제인 것은 맞지만 헤로디아의 전남편이 아니라 그녀의 딸인 살로메의 남편이 된 사람이다. 헤로디아의 전남편은 안티파스의 또 다른 이복형제인 보에투스다.

(7) 성서는 이곳을 리베르티노스(Λιβερτινος)라고 불렀다.(사도행전6,9)

(8) 헤롯으로부터 이 세 지방을 상속받은 이는 아르켈라오스(Αρχελαος). 그는 헤롯의 열 명의 아내 중 갈릴래아 귀족 출신의 여성 말싸케(Μαλθακη)가 낳은 아들인데,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통치자인 안티파스도 그녀의 아들이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는 통치권을 상속받은 지 십년 만인 서기 6년에 축출되고 로마 황제가 파견한 최고행정관에게 귀속된다. 이 최고행정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빌라도다.

(9) 이스라엘계 이민자들 중 유대아 출신자들은 예루살렘을 좀더 중요한 신앙의 메카로 생각했다. 한데 그중 유대 중심적 원리주의자들은 예루살렘 외의 다른 장소들을 격하했고, 그런 신앙을 아예 절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테러적 행동을 벌인 이들도 있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 자주 사용되는 유대아 사람들(Ιουδαιοι)이라는 단어는 대개 이런 사상에 경도된 유대아 원리주의자들을 지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