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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역사의 예수 다시보기_09 : “내 이름은 레기온”―거라사의 그 남자 이야기 (이례적 지역협력자 1)

작년 내가 예순 살이 되었을 때 한백교회가 내게 선물을 주었다. 내가 이해한 것은 평생 잘 안 팔리는 글을 쓰면서, 그런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으려 전전했으니, 한번 정도는 그런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책을 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두 권의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는 예수에 관한, 다른 하나는 바울에 관한... 이미 두 주제는 책을 여러 권 썼지만, 예순 살의 올빼미의 시선으로 리셋팅해보려는 것이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40주에 걸쳐 강의한 원고를 초고로 삼고, 한백에서 한 달에 한번씩 강의하는 것을 예수에 대한 수정 원고로, 그리고 [가톨릭평론]에 연재하는 것을 바울에 관한 수정 원고로 삼아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 글은 예수에 관한 책의 제9장 원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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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레기온"


거라사
의 그 남자 이야기(이례적 지역협력자 1)

 

 

 

 

호수 건너 편으로

 

갈릴래아 마을회당에서 호숫가로 물러난 예수 주위로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갑자기 사방팔방에서 예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아닐 것이다. 병들고 귀신 들린 이들을 치유한다는 예언자가 나타났다고, 심지어 그이가 죽임당한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분이라는 풍문이 날개 달린 듯 퍼져나갔다.

이렇게 풍문이 빠르게 확산되는 것은 마을 밖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을 안의 일이 밖으로 소문나기는 쉽지 않다. 대체로 마을 안의 사람들은 평생 밖으로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족외혼이 일반적 관습이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할 때 남편이 된 이의 고장으로 가는 경우가 흔했으니 그나마 여성은 평생에 한번쯤 다른 마을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한 이후에 그곳을 떠날 일은 남편보다 더더욱 없었다. 물론 마을 유지(有志)는 예외다. 그들은 매년 몇 차례씩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로 갔다. 유월절이나 초막절, 칠칠절 같은, 대절기에 마을 사람들이 챙겨둔 재물들을 모아 대성전으로 순례를 가곤했기 때문이다. 혹은 유지가 아니어도 예수처럼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따라 떠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마을 안에 머물러 살았다.

한데 마을 밖은 달랐다. 그곳은 정주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떠돌이들의 공간이다. 순례자, 상인, 군인들은 전형적 떠돌이 계층이다. 단 그들은 목적지가 분명한 이들이다. 한데 목적지 없이 떠도는 이들도 있다. 예수나 그의 제자들처럼 떠돌이 예언자들이 딱 그렇다. 또 가난해서, 사람들을 부정 타게 하는 질병에 걸려서, 악령에 들려서 마을에 머무를 수 없는 자들도 있다. 7장에서 보았듯이, 마가복음은 그런 이들을 오클로스라고 불렀다. 주목할 것은 이런 떠돌이들의 공간은 소문이 퍼지는 정도가 당대 최고속이라는 점이다. 공간적 유동성이 큰 이들의 장소이기에 그렇다. 또 떠돌이들은 정주자의 정체성이 약한 탓에 새로운 것에 더 열려 있다. 그들은 풍문을 더 빨리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속성을 갖고 있다. 해서 호숫가의 예수는 더 빠르게 알려졌고 많은 이들이 그 주위에 몰려들 수 있었다.

하여 호숫가의 예수는 더 유명한예언자가 되었다. 갈릴래아 사람들만이 아니라, 유대아, 이두매아, 요르단강 건너, 그리고 페니키아와 데카폴리스 지역에까지 알려졌다. 그중에는 그이를 추종하는 이들도 생겼다.

마가복음4장은 예수가 여러 가지 비유로 대중에게 전한 말씀들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4,35~41)에서 매우 유명하지만 왜 이런 얘기가 여기에 있는지 미스터리 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건너편으로 갑시다.” 제자들은 무리를 뒤로 하고, 예수님을 배에 타고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간다. 다른 배들도 따라붙었다.

이때 거센 바람이 크게 휘몰아친다. 파도가 배 안으로 넘쳐 들어왔다. 이미 배가 물에 잠길 정도였다. ...... 제자들이 ...... 소리친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걱정도 안 되세요?” 예수께서 ......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소리치셨다. ......그러자 바람이 잦아들어 매우 고요해졌다. (마가복음4,35~39)

 

호숫가에 모였던 대중을 뒤로하고 예수는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 말했듯이 호수 건너란 국경 넘어를 의미한다. ‘날이 저물고 있던 때였으니 대중에게서 벗어나고자 함이겠다. 그래야 예수도, 그 측근들도 쉴 수 있을 것이겠다. 또 대중과 함께 노숙한다면 안티파스의 군대에게 위치가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군대가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졌던 탓일 수도 있다. 아무튼 예수 일행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

좀더 상상력을 펴보자. 호수를 건너고 있을 때 거센 풍랑이 불어닥쳤고 제자들의 소들갑에 예수가 풍랑을 가라앉혔다는 이야기가 왜 여기 있을까. 어쩌면 호수 건너편으로 가야 했던 정황에 관한 암시는 아닐까. 군대가 몰려들 때의 두려움처럼 배 안에서도 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통치자 안티파스 군대의 서슬 퍼런 칼날이 세례자 요한의 무리를 향해 번뜩이던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가까스로 그 아비규환의 난장을 피해 달아난 이들은 언제나 그 순간의 두려움을 간직하며 다녀야 했다. 그나마 마을 안에서 활동할 땐 좀 안심이 되었다. 군대가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공물을 거둬갈 때뿐이었다. 근데 바리사이와 다툰 뒤 마을 밖 공터를 전전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다. 여긴 누가 당국의 밀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 순례자나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순찰 다니는 병사들과 맞닥뜨릴 수도 있었다. 해서 여차하면 국경을 넘기 위해 호숫가 언저리 공터에서 대중을 만났다.

어쩌면 위의 인용된 단락 배후에는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가 상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랴부랴 국경을 건너고 있는 장면인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제자들은 폐부까지 밀려드는 두려움에 정신이 아득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광풍이 덮쳤다. 안티파스보다도, 바리새파보다도 더욱 치명적인 세력이 덮쳤다. 광풍을 휘몰아치게 하는 영계(靈界)의 권력이다. 고립된 배 안에서 체험되는 광풍은 더는 숨을 곳이 없는 위험을 의미했다. 그런데 예수가 그 무시무시한 바람을 멈추게 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기억했다. 아니 그랬다는 얘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회자시키는 대중, 오클로스들은 시시각각 조여오는 위기 속에서 초자연적인 위험까지도 이겨내는 예수를 떠올리고 있다.

 

거라사의 그 남자

 

그렇게 건너간 곳이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이다. ‘거라사는 데카폴리스(Δεκαπολις), 곧 열 개의 헬라적 도시들의 연맹 중 하나다. ‘연맹이라고 하지만, 도시들 간의 결속력도 낮고 공동행동을 벌인 사례도 거의 없는, 아주 느슨한 동맹체라고 할 수 있다. 각 도시들은 연맹 소속의 이웃 도시들뿐 아니라 인근의 다른 정치체들로부터 거의 독립적이었다. 다만 로마제국의 황제에게는 어떤 예속국 못지 않은, 충성스런 도시들이었다. 아래 [그림05]에서 보듯 이 도시들은 모두 가나안 지역에 있다. 특히 거의 대부분이 트랜스요르단 지역에 몰려 있다. ‘폴리스라는 명칭에서 시사되듯 모두 헬라화된 도시들이었고, 그 지배층들은 대개 헬라화된 문화적 계층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그 토양은 가나안의 일상문화 자장 안에 있다. 해서 이 도시들은 혼융적 문화 상황이 주변의 다른 도시들보다 좀 더 심했다.

거라사는 호수에서 동남부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 해서 호수를 건너자마자 예수가 그 도시 영역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 지역 지리를 아는 이라면 상식 밖의 묘사다. 물론 예수가 도착한 곳은 도시 이 아니다.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으로(εις την χωραν των Γερασηνων. 에이스 텐 코란 톤 게라세논)라는 표현은 이 도시에 속한 인근의 시골을 가리킨다. ‘지역이라고 번역된 코로스(χωρος)는 도시에 복속된 시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배에서 내리자마자 예수가 밟은 땅이 거라사의 시골일 가능성은 없다. 해서 가나안 지리에 익숙한 마태복음거라사가다라(Γαδαρηνος, 가다레노스)로 교정했다. 지도에서 보듯 가다라는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거라사보다는 가다라가 더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거라사의 남자얘기로 알려진 설화가 예수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도착했다는, 그 장소적 맥락을 소개하는 부적절한 첫 구절과 연결됨으로써 오해를 낳은 것일 수도 있다.

예수일행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영에 붙들린 사람이 무덤들 사이에서 나와서예수에게 다가왔다. 즉 그곳은 무덤터(μνημειον. 므네메이온). 가나안 사회는 사람이 죽으면, 땅 속에 시신을 묻고 봉분을 만드는 한국과는 달리, 특정 장소에 시신들을 유기시키는 전통이 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시신이 몸에 닿으면 부정타게 된다는 오래된 강고한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레위기11,24) 해서 유족들은 시신을 유기시킨 뒤에 부정하게 된 몸을 정화하는 예식을 치러야 한다. 가난한 촌부들에게 정결례를 드리는 일은 부담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친족이 사망하는 경우를 제외한 다른 행보에선 여간해서 그런 곳을 지나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예수일행이 무덤터에 배를 정박시켰다는 것은 그들의 행보가 대단히 비상한 상황임을 시사한다. 그것은 너무나 긴박한 상황에 처한 도망자들이나 할 법한 행위다.

사람이 없는 곳이니 가나안사회에서 무덤터는 사람들의 문화가 만들어질 수 없는 곳이다. 일상문화가 뒤엉킨 공간을 인문지리학은 장소(places)라고 부른다. 장소 안의 모든 것들, , 나무, 바위, 언덕, 냇가, 가축, 심지어 바람, 냄새 등 하나하나에는 사람들의 기억이 뒤얽혀 있다. 심지어 그 기억들 중에는 사람들 각자가 경험한 것이 아닌 경우도 있다. 오랜 시간 그 장소와 엮인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들이 그 문화공동체 속에 체화되어 마치 모두가 경험한 것처럼 기억한다. 그런 것을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ies)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덤터는 그런 기억이 거의 없다. 사람들의 문화적 기억이 형성되지 않은 곳을 마르크 오제(Marc Auge)라는 인류학자는 비장소(non-places)라고 불렀다. 이런 곳은 일상문화에 거스르는 새로운 기억이 형성되기 좋다. 해서 그곳은 반전의 공간(space of twists)이며 쇄신의 장소다. 예수일행이 당도한 곳은 그런 곳이었다.

한데 거기에 뜻밖에도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곳에 사람이 있었다. 마가복음루가복음악령 들린 한 남자가 있었다고 하고, 마태복음에는 악령 들린 두 남자(δυο δαιμονιζομενοι. 두오 나이모니조메노이)가 예수 앞에 다가왔다고 한다. 한 사람이라는 것과 두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정보들을 검토한 뒤에 좀 더 생각해보자.

그 사람을 묘사하는 구절들은 흥미롭다. 사슬과 족쇄로 단단히 포박해 놓아도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 힘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장사였다는 얘기다. 또 그는 무덤 사이에서 괴성을 지르고 몸에 지해를 했다.(마가복음5,3~5) 마태복음은 그런 그가 얼마나 사나운지(λιαν χαλεποι, 리안 칼레포이)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8,28) 리안 칼레포이너무나 드세다는 뜻이다. 시신들의 날카로운 뼈다귀가 흩어진 그곳을 그는 거의 벗은 몸으로(ουκ ονεδυσατο ματιον. 우크 오내뒤사토 히마티온. 루가복음8,27)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무덤터에 사는 남자! 생각만 해도 그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런데 이런 그를 목격하고 그에 관한 소문을 퍼뜨린 이들은 도대체 누굴까. 혹여 시신을 내다 버리려고 온 자들이 멀리서 목격했을 수는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러다 돌로 제 몸을 짓찧는다. 피로 범벅 된 자가 거센 숨을 내쉬며 노려보는 장면, 사람들은 그를 바로 마주보기도 두려워 혼비백산하여 시신을 내동댕이치고 달아나버리곤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관한 소문은 거품이 한 가득일 것이다. 그런 사람의 소문이 일파만파로 인근 지역에 퍼져 있었다. 그러니 그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자들이 거기에서 들끓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한 사람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데 예수일행이 그곳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들 앞으로 그 남자가 다가왔다. 설화는 그가 얌전히 예수 앞에 달려와 엎드려 무릎을 꿇었다(προσεκυνησεν. 프로세퀴네센)고 한다. 예수일행과 그 사람 간의 경합은, 충분히 있었을 법하지만, 생략되어 있다. 필시 복음서가 기본적으로 예수 영웅설화인 탓일 텐데, 그가 예수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다는 최종적 사실만 묘사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상상해보자. 그는 왜 이런 곳에 살게 되었을까. 먹을 만한 것도 없고 입을 거라고는 죽은 짐승의 까칠까칠한 가죽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루가복음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고 지냈다.”(8,27)고 전한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옷이 그럴진대 신발은 제대로 있었을까. 근데 그곳은 시신들의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곳이다. 그것들은 날카롭게 발과 몸을 핥켜서 온 몸이 상처의 흔적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돌로 제 몸을 짓찧는 행동은 상처 난 자리가 가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겠다. 사람들이 없는, 죽은 자들의 장소에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닥친 치명적인 재앙들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적대 반응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그가 두려웠겠지만, 그 역시 사람들이 너무나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사람들과 그는 점점 더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다.

예수를 만난 그는 그 깊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것일까. 오래된 마음과 몸의 병이 한 번의 만남으로 치유된다는 게 가능할까. 아무튼 복음서들은 그가 예수 앞에 엎드렸다고 한다. 한데 이 대목에서 기이한 얘기가 그에 관한 대중설화의 후반부를 채우고 있다. 데카폴리스의 하나인 거라사 시골에서 사육되던 돼지떼에게로 그에게 덧씌워 있던 악령이 이전해갔다는 것이다.

 

‘내 이름은 레기온’

 

그 얘기는 이렇다. 예수 앞에 엎드려 있는 그가 예수에게 말한다. ‘내게 왜 이러시오. 하느님께 기대어서 간청합니다.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I adjure you by God, do not torment me) 예수가 말한다. ‘더러운 영, 이 사람에게서 떠나라,’ 이 대화를 보니, 아직 악령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지만 악령은 여전히 그를 지배하고 있다. 예수가 묻는다. ‘티 오노마 소이!’(Τι ονομά σοι)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라고. 여기서 그의 대답이 흥미롭다. ‘레기온 오노마 모이!’(Λεγιων ονομα μοι) 내 이름은 레기온이오.’

고대로마제국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편제로 구성되어 있다. 라틴어 명칭으로 쓰면 켄투리아(centuria), 코호트(cohort), 레기오(legio)가 그것이다. 켄투리아는 대략 80명 정도의 보병부대 단위로 켄투리온(centurion. 켄투리온)이 그 지휘관이다. 성서에 나오는 백부장혹은 백명대장이 그런 이들이다. 6개의 켄투리온이 묶여서 하나의 코호트가 되고, ‘천부장혹은 천명대장이라고 번역되는 트리부네(tribune)가 그 지휘관이다. 그리고 10개의 코호트 부대가 연결되어 하나의 레기오를 이룬다. 그러니까 한 레기오는 병사 5천 명 정도의 군대 단위다. 그 총지휘관이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이다. 로마제국은 고대의 어느 제국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 군사력의 제국이다. 대략 상비군이 30만 명에 달하는 제국 군대의 병사는 근속 기간이 대략 20년쯤 되는데, 엄청난 훈련과 무수한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하나하나가 절대최강인 살인병기들이다. 한데 그런 절대최강의 군사강국의 군대를 상징하는 것이 레기오, 헬라어로는 레기온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보자. 그 남자는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예수의 물음에 레기온이오라고 답했다. 이 말은 모호하다. 수천의 악령이 그에게 들어가 있다는 것인가? 실제로 본문에는 레기온이라는 답변 바로 뒤에 우리 수가 많기 때문이오!’라는 어구가 뒤따라 나온다. 하지만 악령이 수가 단지 많다는 말은 그 뒤에 이어지는 어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악령은 예수에게 간청한다. 자신들이 저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이다. 마침 그 근처에 대규모 돼지 사육터가 있었다. 악령이 들어가자 돼지들은 미친들이 달려서 물속으로 떨어져 몰살되었다. 그 수가 2천 마리쯤이다.

한 사람에게 있던 악령의 수가 5천쯤 되는데, 그들이 들어간 돼지는 2천 마리쯤이다. 1 5천 대 2, 수가 들쑥날쑥하다. 그러니 그 수는 본문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단서는 돼지. 알다시피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가나안 지역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한데 대규모 사육장이 있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헬라화된 거라사 시민들, 특히 중상류층의 먹거리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돼지는 헬라화된 도시의 시민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제국과 동일시된다. 로마제국은 로마군대와 동일시되고, 레기온은 로마군대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상력을 펼 수 있다. 그 남자에게 들린 악령은 로마제국, 특히 로마의 군대라고 말이다.

정리해보자. ‘내 이름은 레기온이라는 대답에서 순간 우리는 이제까지의 모든 상상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자였다. 또 무서워했다. 또 그도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해서 인적 없는 곳에서 살았고 누군가 나타나면 고함을 질러대고 자해까지 했다. 곧 그는 편견의 대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된 자다. 사람들도 그를 잊었고 그 자신에게도 잊혀진 자, 존재가 사라진 자였다. 하여 그는 어쩌면 사람들의 집단적인 린치에 존재가 파탄 나버린 자였다.

한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그가, 아니 그를 장악해버린 어떤 존재가 한 대답은 내 이름은 레기온이었다. 모든 폭력의 중심이요, 환원불가의 압도적 폭력의 주체다. 약자, 혐오스런 자, 해서 편견의 피해자 컨셉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대답이 그에게서 나왔다. 아니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답했다

고 기억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그는 그런 자로 기억되고 있다.

 

구동매와 악령들린 그 남자, 불온한 상상

 

여기서 나는 문득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구동매(유연석이 연기함)를 떠올렸다. 조선의 백정 출신의 천민이다. 해서 조선사회로부터 온갖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조선을 혐오하며 떠났다. 그때는 조선이 몰락하고 외세인 일제가 강점하는 격변기였다. 그리고 구동매는 일본 낭인(조폭집단)의 돌격대장이 되어 돌아왔다. 부하들을 이끌고 칼을 차고 다니는 자, 폭력이 일상이고 그 폭력 속엔 대상을 가리지 않는 증오, 조선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었다. 한 여자에 대한 로맨틱한 순박함의 모습만 제하면 드라마에서 그는 그런 난폭한 자로 비추어지고 있다. 한데 그의 배후엔 일본제국이 있다. 모든 폭력의 중심이고 환원불가의 압도적 폭력의 주체인 제국 일본이 그의 폭력을 비호하고 그의 폭력을 이용한다.

사람들은 그런 구동매를 어떻게 기억할까.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드라마를 보는 관객이 아니라, 그런 살기에 찬 무자비함에 접한 조선 대중의 눈에 그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폭력적이지만 로맨틱한 마초적 남자로 표현하는 드라마의 시선과는 다르지 않을까.

조선을 증오하고 일본인이 되어 버린 괴물적 존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은 어떨까. 되든 안 되든 그는 중요한 대목에선 일본말을 썼을 것이다. 그것은, 종종 사람들에겐, 일본 마초 특유의 고함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가장 무서워할 때는, 물론 폭력을 휘두를 때일 것이다. 한데 그때 그의 모습은 어땠을까. 일본 낭인의 옷을 입고 무자비하게 칼날을 휘두르는 자, 그자의 눈동자엔 살기가 뿜어나왔겠다. 그의 온몸은 그의 칼에 베인 이들의 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사람들의 콧구멍 속을 사정 없이 헤집었을 것이다.

레기온이오!’, 이 말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상상은 이렇지 않았을까. 그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분노의 찬 폭력의 화신으로 소문난 자였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혹 그는 주먹패를 이끌고 다니면서 권력 있는 자들과 돈 많은 자들에게 하청받아 폭력을 쓰는 자로서, 누군가의 명령으로 예수를 잡으러 온 자일지도 모른다. 무덤터에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자 말이다. 아니면 그런 자들의 은거지가 무덤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가 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얼마 후 그는 도리어 예수 앞에 무릎 꿇었다. 비장소란 그런 곳이다. 비장소의 사람들은 다른 삶으로 전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해서 어쩌면 예수와는 정반대 편의 권력자들에게 소모품처럼 소비되던 이 사람은, 훨씬 쉽게, 예수 앞에 무릎 꿇는 자가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가복음은 그 남자의 몸 안에 들러붙어 있던 레기온이라는 악령들이 돼지떼에게도 갔다고 한다. 그리고 돼지들은 모두 물에 빠져 익사했다. 흥미롭다. 예수를 만난 레기온이, 아니 레기온에 사로잡힌 사람이 그 악령 레기온을 자신의 몸에서 축출하는 일이 로마 혹은 친로마 세력의 돼지떼의 몰살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레기온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예수로 인해 변화된 사건과 그 일대의 돼지떼가 몰살당하는 사건을 연결시켜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그 둘이 연계된 것이라면 거라사의 이 남자는 로마제국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무뢰배였다가 로마를 공격하는 무장저항자,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이가 그 무렵 실재했을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데 사람들은 그 사람이 예수에 의해 변화된 결과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그런 기대를 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예수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지역협력자를 기억하다

 

이런 시선에서 거라사 광인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들을 읽어보자.

 

예수님이 배에 올라타시자, 귀신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께 사정사정했다. 함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집으로 가세요. ......” 그가 떠나가서,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에서 모두 선포하기 시작했다. (마가복음5,18~20)

 

그는 예수와 동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오클로스들은 그렇게 그 사건의 결말부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에게도 휘파게라고 말한다. 말했듯이, ‘휘파게가라라는 뜻의 명령형 어휘다. 실제로 이 남자는 데카폴리스 지역에서 예수를 전파하는 자로 살았다. 그는 또 한 명의 지역협력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파했다는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 케뤼쏘(κηρυσσω)의 현재분사형이다. 그 명사형은 케뤼그마(κηρυγμα). 말로 하는 가르침을 전하는 행위에 초점이 있는 표현인데, 위에서 상상했던 것처럼 그는 어쩌면 무력으로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예수의 지역협력자 중에 그와 같이 무력을 중심으로 활동한 다른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아니 예수 당대에 추종자들 누구도 그런 활동을 한 자로 확인되는 이는 없다. 한데 사람들은 이 사람이 예수의 지역협력자였다고 믿었다.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그는 이례적인 지역협력자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