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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한국 그리스도교의 인권담론과 신학적 성찰 - 안병무의 신학을 중심으로

이 글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6년도 하반기 정기 심포지움 <종교와 인권>(2006.12.16토/ 프란치스코교육회관 3층)에서 발표된 글로, [종교문화비평] 12(2007.9)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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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의 인권담론과 신학적 성찰

안병무의 신학을 중심으로

 

 

 

 

 

1973년 일본 동경에서 김용복 오재식 지명관 등,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3개국 언어(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작성발표된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각주:1](이하 선언)1972년 말에 유신헌법이 반포됨으로써 성립한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에 대한 한국 그리스도교 최초의 본격적인 반대 표명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선언이 유신체제가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체제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국가권력으로부터 특별히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이들(“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멸시받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교회의 방관적 태도를 회개하고 그들에 대한 돌봄의 책임을 신앙적으로 다짐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으로 주체화된 이들의 기본권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인식을 전제하고 있지만, 특별히 비국민화된 탈주체적 존재들의 박탈당한 기본권의 보장을 신앙 선언의 기조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인권이라는 명시적 표현이 담겨 있지는 않지만, 선언은 한국 그리스도교 인권 선언으로서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문서는 당시 국제적으로 널리 유통되어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문제인식을 전 세계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였지만,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는 국내에서는 거의 반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앙정보부의 왜곡된 번역을 통해 유통이 주도됨으로서 그것의 공적 사용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인식에 따라 반정부세력들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선언은 비공식적으로만 제한적으로 수용되었고, 직접적인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언[각주:2]이 있었던 그 해 말인 19731123~24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인권협의회를 거쳐 인권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각주:3]그 내용은 선언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고, 다만 인권의 관점에서 다듬어진 정도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그 이듬해인 1974111866명의 서명자 명의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이하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본격적이고 명시적이며 신학적인 최초의 한국 그리스도교 인권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4] 이 문서는 네 개의 소단락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성명을 내게 된 계기에 관한 설명(소제목: ‘동기’)으로 유신체제하의 국가권력의 과잉으로 인한 신앙적 위기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요청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이하에는 각각 절대화된 권력에 대한 신앙의 비판적 개입의 필요성을 신학적으로 역설하고(소제목: ‘국가와 종교’), 인간의 기본권을 위해 신학과 신앙이 복무해야 하며(소제목: ‘인권’), 그러한 선교의 자유를 침해받는 것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침해(소제목: ‘교회의 선교’)임을 강변한다.

한편 1987년 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는 1970년대 기독교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정리하는 책자를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는데, 이 책의 머리글의 역할은 필경 1970년대 기독교 인권운동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평가하며, 향후 전망을 이야기하는 데 있을 것이다. 안병무 선생의 글 인권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하 조명)이 머리글로서 부여받은 역할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글은 1970년대의 각종 문서들이나 실천들을 총괄적으로 논하는 대신 위의 성명을 상세히 소개하고 그 의의를 논평하는 것으로 맡은 바 과제를 수행한다. 이는 성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1970년대 기독교 인권운동의 지향과 관점 전체를 잘 요약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이상의 문서들이 공통으로 담고 있는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종일관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 국민의 기본권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가는 그러한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소임에 충실하지 않고, 국가가 스스로를 절대화하고자 할 때 국민의 기본권은 침해되고, 국가는 불의한 권력이 되고 만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국가 대 국민의 이원대립구도에서 인권의 주체인 국민은 집합적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당시 한국의 국가주의가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과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자원을 총동원하고자 했던 정부는 단일한 목적의식으로 통합된 국민을 구성하고자 했고, 이러한 국가적 의제는 기억의 단일성욕망의 단일성을 지향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제도화되었다. 단일민족 의식이 강화되고, 전쟁의 기억도 단일화하며, 심지어 국민의 시간 관리 방식조차 단일화하고자 했다. 일어나는 시간, 일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국민의례의 시간, 귀가하는 시간 등 전 국민이 공통된 하루하루의 시간표를 따라 삶을 조직하도록 준강제적으로 유인하였던 것이다. 각종 건조물의 방식도 단일했고, 특히 학교는 의복, 헤어스타일, 전체 건물에서부터 교실에 이르는 공간구성 양식 등에서 단일하게 학생의 일상을 조직하고자 했다. 한편 국민은 모두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동일한 욕망의 주체로 호명되었다. 여기서 가난의 기억은 굶주림으로 동일시됐고, 가난 탈출의 내용은 국민소득 1천 불, 마이카 등 획일적 욕구로 구상화되었으며, 특히 국민총생산과 같은 국가 차원의 욕망의 경제가 개인의 경제와 모순 없이 조화된다는 의식이 일상화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국가적 이상은 고도성장을 이룩해냈는데 이때 국민의 계층분화는 상당히 억제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농자(離農者)를 중심으로 국민의 하향분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저소득 계층의 존재는 국가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되었으므로, 전체주의적 발전국가는 하향분화한 대중의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은폐하는 것으로 위기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이때 분출한 전태일의 분신 사건은 그러한 은폐된 현실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인권의 문제는 국민이라는 집합적 공동체 의식이 국민의 사회적 분해 현상과 분열을 이루는 지점에서 발생하였다. 그런 점에서 선언에서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멸시받는 자들(성명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을 망각해왔던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뼈저린 회개를 고백한 것은, 국민을 도덕공동체[각주:5]의 확고한 단위로 인식하는 동시대의 감성체계를 신앙적으로 내재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교회는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에 대한 망각을 제도화한 국가에 저항하겠다는 신앙 선언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안병무 선생은 조명에서 성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1970년대의 그리스도교적 인권 의식을 요약한다. 다만 선생은 여기에서, 국가가 스스로를 절대화한 결과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특히 가난한 자들과 눌린 자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박탈당했다는 선언의 내용을 좀 더 신학적 개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적인 것)을 사유화하려는 욕망의 결과가 인권침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용어가 선생에게서 처음 사용된 것은, 이 글이 발표되기 1년 전 전두환 체제가 호헌을 선언하며 민주화의 요구를 거절하자 이에 전 국민적으로 호헌 철폐 캠페인이 한창 진행되던 1986년 늦은 봄 즈음이다. 선생은, 창세기2~3장의 선악과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재해석하여 인간의 원형적 죄를 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전두환 체제가 공을 독점하고 있는 체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해석이다.[각주:6] 그리고 조명이 저술되던 19871월 말 혹은 2월 초 즈음 선생은 이 용어를 인권 침해 현상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뜬금없이 선생은 인권에 관한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전화될 여지가 있는 논점을 공의 사유화논의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선 조명의 글 구성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1절에서 전태일 분신 사건에서 비롯된 한국사회의 인권 의식 고양의 계기와 과정을 언급하고, 2절에서 그것에 대한 신학적 대응을 선언의 분석을 통해 살펴본 뒤, 마지막 절에서 서구의 인권 선언들과 연관시킴으로써 선언의 인권에 대한 신학적 문제의식을 보다 성찰적으로 보완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공의 사유화논의가 위치한 곳은 제3절의 끝부분이다. 이는 공의 사유화가 선생 나름의 신학적 성찰의 최종 결과처럼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절의 전반부에서 선생은 서구의 고전적 자유주의 인권 사상의 일반적 함의를 이야기한 뒤에, 그러한 서구적인 인권 논의의 한계지점을 마틴 루터 킹의 옥중서신을 통해 문제제기하고 있다. 일반적인 천부인권론은, 선생의 표현대로 하면, ‘기득권의 보호와 인권보호를 혼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기득권과 인권은 정치적 법률적 개념에 의존한 표현은 아니다. 아마도 국민의 기본권과 비국민화된 존재의 기본권이 상호 갈등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각주:7] 선생이 인용하는 마틴 루터 킹의 주장과 연계시켜 보면, 미국에서의 인권 담론은 기본적으로 백인의 기본권에 관한 것이었고,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점차로 흑인의 인권 문제로까지 외연이 확대되었으나, 그러한 외연 확대의 역사적 과정은 두 상이한 주체의 기본권간의 인종 투쟁과 분리할 수 없으며, 현재까지도 비대칭성과 모순적 갈등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인과 흑인의 기본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인간의 기본권리라는 보편적 인권논의를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비대칭적 권력 관계아래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생의 에 관한 해석은 바로 그 다음에 나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생은 공의 사유화문제를 국가 대 국민이라는 틀로 이해했던 기존의 논의 지평을 스스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여기에는 국민 대 비국민이라는 새로운 인식틀이 첨부되고 있는 것이다. 선언에서 성명에 이르는 1970년대의 인권논의가 국민=단일 민족 공동체라는 동시대의 공통감각에 기반하여 경제발전 과정에서 비국민화된 경제적 실패자에 대한 배제를 일상화하려는 국가를 반인권적 실체로 비판하고 있다면, 선생은 조명에서 공을 사유화하려는 욕구의 주체는 국가만이 아니라 또한 국민이기도 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민족공동체의 분해를 유념하면서 담론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선생은 경제공동체의 분해만이 아니라 도덕공동체의 분해를 유념하면서 인권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선생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 견해가 제기된 시기와 결부시켜 생각할 때 더욱 의미심장하다. 조명이 머리글로 실린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19872월에 발간되었고, 그해 8월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각주:8] 그 전 해인 1986년에는 전두환 정부의 초강경 공안정국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고, 많은 반정부 민주화운동 조직이 붕괴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1987년은 연초부터 박종철 이한열 등 대학생들의 잇따른 치사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분노한 전국적인 대중의 저항이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독재정권은 그해 여름 한 발짝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이 이 글을 쓰던 때는 바로 그 1987년의 초엽, 아마도 박종철 씨 사망 사건이 축소은폐되어 발표된 직후이고, 살벌한 공안 상황 아래 도처에서 불만과 문제제기가 막 표출되고 있던 때인 1월 말 혹은 2월 초였다. 27일 추도식 때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를 우회적으로 표하던 바로 그 어간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79일 이한열 씨의 장례식을 보면서 선생은 흥분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죽은 자를 슬퍼하는 행렬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장엄한 민족 축제의 행렬이었다. ... 환호, 환호, 그것이었다. ... 나는 그 대행진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동시에 만났다.” 또 그 이듬해인 1988년 오공비리청문회와 광주청문회가 한창 진행되던 때, 선생은 김지하로부터 빌어온 ()이라는 용어를 철저한 역사청산의 신학적 화두처럼 재해석하여 새로운 시대를 향한 즐거운 상상의 유희를 벌였다.[각주:9]

이와 같은 부활사건의 흥분과 즐거움이 온몸을 뜨겁게 하기 직전, 십자가의 고통이 최고의 절정에 이르고 있던 때, 그렇기 때문에 임박한 부활에의 소망이 참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던 그 무렵,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곧 올 것이다라는 야성(野聲)이 울리던 바로 그 때에, 선생은 1970년대의 인권 선언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생은 1970년대를 보고 있지만, 필경 그 마음속에는 독재 시대의 막바지에서 임박한 그 시대 이후를 상상하면서 인권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했다. ‘국민이라는 단일한 도덕공동체 감각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변화되었다. 집단주의적인 것은 점차 조롱거리가 되어갔고, 주체의식을 둘러싸고 있던 철옹성 같던 민족적 자존감이 도처에서 붕괴되고 개체적 자존감이라는 새로운 질감의 벽돌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이제 대중은 집합적 주체로서의 국민의 일원으로서 국가와 대면하기보다는, 자신의 이해관계 혹은 욕망에 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국가와 마주쳤다. 점차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는 대상이 아니라 거래하는 주체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충성하는 대상에서 거래하는 주체로의 변화를 유념하면서, ‘국민의 대응 개념으로 시민이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하여 기대의 정치학욕망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독재에서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은 국민의 시민화를 수반했다. 그리고 급격한 이행을 조절하는 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기대/욕망의 인플레이션이 과잉 작동함으로써 한국의 민주화는 천민화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19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산업구조상의 소비재 산업의 비중이 현저히 강화되어 이른바 소비사회가 변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각주:10] 그리고 주지하듯이, 소비사회화의 속도 또한 대단히 맹렬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시민의 자존감을 더욱 예각화했고, 특히 과거엔 피동적 대상이던 여성이나 미성년 계층의 사회적 주체화를 현저히 강화시켰다. 기든스 식으로 말하면, 소비사회로의 변동이 사회적 성찰을 자극한 것이다. 하여 여성과 미성년은 성년 남성에 대한 교섭능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여성담론 및 세대담론의 사회구성적 배경으로 작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공동체로서의 국민의 독보적 위상은 심각하게 붕괴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다양한 하위집단들이 감성적 결속체로서의 도덕공동체의 단위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1990년대 초부터 제도화되기 시작하였고, 1997IMF 사태 이후 본격화된 지구화의 폭격은 거의 모든 관계의 장을 시장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경제적 과정은 또 다른 의미에서 민족공동체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도덕공동체의 경계(boundary)에 대한 감각은 매우 급격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이러한 동요의 배후에는 기대의 정치, 나아가 욕망의 정치가 예각화되면서 나타난 거래관계의 복잡성이 자리잡고 있다. 요컨대 소비사회화와 지구화는, 도식화하여 말하면, ‘시장화된 시민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병무 선생이 조명의 결론부에서 다소 모호하게 제기한 문제의식은 민주화 이후의 인권문제를 향한 일종의 예언자의 야성(野聲)과 같은 것이었다. 민주적 제도화 과정의 행위자의 두 축인 국가와 시민이 인권 침해의 가능성을 담지한 사회적 주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의 문제제기는 인권에 관한 신학적 인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사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상과 같은 시론적 논의를 보충하여, 기독교적인 인권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체화할만한 요소들을 찾아 좀더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선언에서 성명, 그리고 조명의 전반부까지를 아우르는, 인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통례적인 견해다. 모든 사람은 보편적 본성으로서 인권을 갖고 있다는 서양 근대의 고전주의적 언명은 그것이 신에 의해 부여된 권리라는 논리와 결합됨으로써 그 절대적 가치가 보증되었다.

그러나 로티는 이러한 인권론을 플라톤주의의 잔재라고 해석한다.[각주:11] 인권에 대한 이런 시각은 보편적 본성으로서 인권을 갖고 있지 못한 동물, 아니 동물 내지는 비인간으로 간주된 대상화된 존재를 향한 폭력을 제약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함으로써 파시즘의 논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보편적 천부인권 담론은, ‘국가 대 국민이라는 이항대립적 도식이 인권의 착취 대 보호라는 틀로 양분되어 사유되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유용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가령, 폭압적인 국가권력에 의해서 단일체로서의 국민이 기본권의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을 때 국민의 기본권을 착취하는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담론일 경우에만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1970,80년대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발전주의적 국가 총동원체제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였다고 해도, 그것을 단지 약탈의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동시에 포용의 전략도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각주:12] 그것을 위해 체제는, 보호하고 돌보아주어야 할 불쌍한 타자를 국민의 하위 범주로 포섭할 뿐 아니라, 동시에 공산주의자, 깡패,[각주:13] 대마초 흡연자 등을 배제될/되어야할 타자로서 생산해 냈던 것이다. 그밖에 다양한 소수자 범주들이 배제의 대상으로서 타자화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국가 대 국민이라는 이분화된 틀로 사회체제를 설명해왔던 군부독재체제의 경우에도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서의 천부인권 개념에 기초하여 비판적 인권 담론을 펴는 것의 유용성은 극히 제한적이다. 더욱이 국가에 의해 하위주체화된 국민이 아닌, 국가와 교섭하는 주체로서의 시민을 주목하게 되는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서 보편적 인권담론은 시민의 성찰성을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코복음7,24~30의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대한 안병무 선생의 독특한 해석은 인권 패러다임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모종의 위험이 닥친 상황에서 예수 일행이 북쪽 국경을 넘어 페니키아 영역으로 물러가 띠로 시 인근의 한 시골에 은둔하고 있을 때, 소문을 듣고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한 헬라 여인이 그를 찾아와 악령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헬라 여인이라는 부가어는 그녀의 신분을 시사한다. 곧 그곳 출신 귀부인이 예수를 찾아와 악령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하니,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줄 수는 없다.”(27) 게르트 타이쎈(G. Theissen)에 의하면, 이 말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다. 이 지역은 더 견딜 수 없어 팔레스티나를 탈출한 하층민들이 대규모로 정착해 있던 곳으로, 탈주 유대아인들은 그 지역 사회의 최저변층을 구성하며 개처럼 살아가고 있었다.[각주:14] 그러니 그 여인의 딸과 유대아인은 각각 주인집 자녀와 상 밑의 개와 같은 존재로 비유될 수 있다. 한편 예수가 나눠주는 하느님나라의 축복은 이러한 일상의 경제를 전도시킨다. 그에게서 자녀는 착취당하는 유대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었고, 그 귀부인과 딸은 그 축복의 상 밑에 있는 강아지에 불과했다.

여기서 선생의 관점으로 돌아가 보자. 선생은 마르코복음을 민중이 구술한 예수 텍스트로 이해한다. 그들이 예수를 기억해 낸 내용의 하나가 바로 이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여인이 귀부인이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정보도 없다. 가령, 그녀가 구체적으로 유대아인을 착취한 악덕 지주인지 여부는 이 사건의 구술자들에게는 관심이 아니다. 피착취자들인 그들이 예수의 그 복의 수혜자가 민중의 착취자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큰 관심거리일 텐데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평판 좋은 여인이거나 혹은 그냥 익명의 여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대중의 기억 속에 그녀는 단지 익명의 귀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녀를 대할 때 일상적인 사회적 대립구도를 통해 그녀를 범주화한다. 이때 예수의 시선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시선을 전도시킨 것일 뿐 그 패러다임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러한 편견의 틀이 모르는 익명의 여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귀부인이라는 코드만으로 예수는 그녀를 판단하고 있다.

이때 여인은 예수의 역설적 대립을 수용한다. 곧 그녀는 유대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자신과 같은 계급의 사람들의 밥상 밑의 개였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저들과 동일시하는, 자발적 타자화를 실행한다. 그리고 이것은, 안병무 선생에 의하면, 예수를 부끄럽게 했다. 하여 예수의 편견의 틀은 허물어진다. 동시에 이 이야기를 구술한 대중과, 그것의 문서화된 텍스트인 마르코복음을 듣는 청중[각주:15]의 민족주의적이고 계급적인 편견의 틀이 허물어진다. 예수 자신의 신성이 그 벽을 허물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유 없이 범주적 증오(categorial hatred)를 표했던 한 여인이 예수로 하여금 그 벽을 허물게 했다는 것이다.[각주:16]

지그문트 바우만(Zygmund Bauman)범주화된 집단적 기억이 가해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을 향한 인권 침해, 나아가 존재의 파괴를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악의 합리화(rationalization of evil)의 주된 기재임을 말한다. 하여 그는 홀로코스트는 그 가해자의 전근대성이 낳은 잔혹한 야만성이 아니라 그네들의 집단적인 범주적 기억이 낳은 악의 합리화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라고 본다.[각주:17] 또 로티는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 인이 자행한 비인간적 만행도 저들을 비인간적 존재로 범주화하는 인식의 편견이 자신들의 죄책감을 사면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본다.[각주:18] 이렇게 인권 침해와 폭력은 예수 자신의 인식 속에도 내재해 있었고, 그것은 민족주의적이고 계급적인 편견 속에서 성화된 기억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여인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는, 신의 분신인 그는, 아니 신 자신인 그는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이야기하는 대중 또한 그러한 예수의 성찰을 공유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안병무는 천부인권이라는 인권담론의 고전주의적 인식틀 대신 대화적이고 과정적인 성찰이라는 대안적 인식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문제의식은 신의 절대성보다는 역사문화적 컨텍스트 속에서의 신의 성찰을 강조하게 되고, 그런 점에서 보편적 규범의 관점에서 인권을 묻는 전통적 시각을 지양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권 논의에서 보편성의 기각은 안병무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가능성으로 담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권 패러다임의 요소이다.

이것은 죄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데,[각주:19] 그에게 있어서 죄란 지배체제의 신학적이고 규율적인 통제의 기재에 다름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란 체제의 형성 논리인 규범적 질서라는 외적 규정성이 존재의 내면을 통제하는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면성의 다양한 가능성은 제한되고, 죄는 내면성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각주:20]

이런 맥락에서 선생은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 의식(죄의 콤플렉스)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한다.[각주:21] 다시 말하면 이른바 죄인을 규범적 질서 속에 재포섭하는 것, 그리하여 존중할 만한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각주:22] 그러한 규범적 질서에 저항하는 주체로의 전향, 바로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권 담론에서 보편성을 기각하는 시각은 인권을 박탈당한 이와 체제 사이의 심미적 관계 양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길을 열어 준다. 가령, 국가나 시민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인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자신들의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인권 문제는 심미적 문제임이 드러난다. 오히려 저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사회는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한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죄의 규정은 그 사회에 속한 이들 일반의 내면성의 서사로 자리잡는다는 데 있다. 물론 이것은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의 자기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여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탈주체적 자의식을 내면성의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 부적절한 삶의 방식을 수행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죄인은 그들의 부적절한 행태 때문에 죄인이 되기도 하지만, 죄인이라는 자존적이지 못한 자의식 때문에 부적절한 행태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각주:23] 따라서 인권의 박탈은 단순히 기본권의 박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자존감의 박탈에까지 이르므로, 인권 담론은 그 사회의 죄의 메커니즘 자체를 지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탈주체화된 존재에 관한 관심이 인권 담론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논의에서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인권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느니 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화되고 자존성이 박탈되며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존재의 보호 및 자존성의 회복에 관한 문제에 그 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 번째 초점은 시민 중심적 인권 패러다임에서 비시민 중심적 인권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있다. 안병무 선생의 민중론인 오클로스론은 바로 이 지점을 강조하는 역사문화적 문제설정이다.

마르코복음의 독특한 어법에서 그 사회학적 함의가 추론된 오클로스는, 이 가설의 원조격인 다가와 겐조(田川建三)에 따르면 세관원, 병자, 죄인, 창녀, 거렁뱅이 등을 포함하는 천민화된 기층대중이다.[각주:24] 그리고 안병무는 이를 귀속공간의 박탈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타율적 무소속성의 대중집단으로 규정하였다.[각주:25]

유대아-팔레스티나 사회의 웬만한 촌락이면 거의 어디나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회당[각주:26]은 대중의 공적사적인 일상을 규율하는 사회적 통합의 장치로서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비록 예수 당시는 유대아주의의 명시적인 문어적 지표가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촌락 대중 사이에 촌락 회당이 연계고리의 역할을 함으로써, 촌락 회당에서의 대중의 체험은 하느님이 택한 백성으로서의 종족적 주체성을 형성하는 직접적인 매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르코복음에서 오클로스는 예외 없이 회당 에서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앞서 말한 타율적 무소속성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즉 저들은 유대아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존재가 부정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오랜 식민화의 굴욕적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대아 종족의 비극의 원흉이고, 그들을 구원해야할 신의 구원 사역은 바로 저들의 존재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유보되고 있다는 믿음이 율법의 체계가 강변하는 유대아 신학적 공리인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오클로스가 있는 곳에는 신체 장애, 언어 장애, 시각 장애 등이 늘 나온다는 점은 오클로스의 존재적 장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인권의 문제는 이러한 존재적 장애의 장치들과 관련된다는 얘기다. 경계(境界)의 외부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밀어내고, 밀려난 이들의 복권을 가로막는 체계를 문제시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경계 밖, 시민의 경계 밖, 가족의 경계 밖, 노동의 경계 밖, ()의 경계 밖 등등. 안병무 식으로 말하면, 그곳은 성문(城門) 이며, 그 외부에는 오클로스가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관한 한 연구논문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국민국가가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고안한 이주노동자 제도에서 이주노동자는 인간국민(또는 시민주민)이 아니라 관리통제처분의 대상인 노동력으로 존재한다.”[각주:27] 이렇게 경계 밖의 존재로 대상화되는 자는 사회적 필요를 위해 도구화되어야 하지만, 그들은 결코 국민시민노동자 등의 사회적 주체일 수 없다. 아니 사회적 주체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민시민노동자들이 받을 권리가 있는 자원을 잠식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유보하는 논리에는 항상 이러한 자원 잠식의 예감된 위기에 대한 국가 차원의 시민적 안전망의 고려가 전제되어 있다. 하여 국민시민노동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인권 침해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이주노동자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설명은 다를 수 있지만, 귀속공간을 박탈당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는 그들을 단순히 시민의 일상 공간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하고 도구화하여 포섭한다. 단 이러한 포섭은 그들의 탈주체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론은 인권의 문제를 시민적 공간에서 그 외부로, 성도의 공간에서 그 외부로 시선을 옮김으로써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함의를 갖고 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노파심에서 좀더 부연하면, 이러한 시선의 이동은 오클로스, 그러한 영역 외부의 존재를 단순히 보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들을 타자화하는 내면성의 서사 자체를 해체하고 자아의 대본 쓰기를 통해 내면성의 서사를 재구성하는 데로 이르는 일체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마르코복음을 오클로스의 자아의 대본 쓰기의 결과물로 이해하는 민중신학적 관점은 이 텍스트를 인권에 관한 민중신학적인 성서적 전거로 사용하는 셈이다.

이상에서 나는 안병무에 기초하여 기독교적인 인권 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적 문제설정을 세 가지로 이야기하였다. 인권의 문제는, 첫째로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대화적이고 과정적인 소통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고, 둘째로 보편성을 기각하고 체제와 박탈 대중의 관계, 심지어 심미화된 내면성의 서사까지 나아가는 반인권적 장치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시민 중심적 인식틀에서 비시민 중심적 인식틀에로의 전환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한국기독교의 인권에 관한 논의를, 그러한 문제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한 1970년대 문서들인 선언성명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나왔지만 성명을 해석하는 데 초점이 있었던 안병무의 조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조명에서 인권에 관한 문제의식의 내적 분열을 읽어내고, 그 어간에 저술된 선생의 다른 글을 통해 인권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적 문제설정을 발견하려 하였다. 한데 이러한 한국 기독교의 인권 패러다임을 둘러싼 나의 논의는 주로 담론 비평의 차원의 것이고, 특히 인권을 둘러싼 인식론적 지점을 강조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이러한 강조점은 기존의 기독교적 인권에 관한 논의가 대체로 정치적법적 수행성에 과도한 초점을 두어왔던 것을 고려한 것이다. 정치적법적 제도화에 개입함으로써 국가나 시장에서의 인권 유린을 방어하는 체제를 구축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대단히 중요하고 또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밀도는 그 활동력에 비해 상당히 부족하다. 해서 기독교적 인권이라고 할 만한 논의가 한국 신학계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이른바 신학이론의 결핍 현상이 심각한 지경이다.

서구의 역사에서 인권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 전통 내에서 발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교회에 반대하는 운동의 맥락과 더 깊이 연루된 채 발전해 왔던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인권의 문제를 신학 담론과 접맥해 보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은 개신교나 천주교 공히 1948년 이후에 와서다.[각주:28] 그러므로 인권에 관한 밀도 있는 신학적 논의는 그리 깊은 전통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나마 이런 논의를 한국의 교회나 신학계가 그다지 잘 수용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인권은 추상적인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연루된 것이므로, 서구의 논의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보다 깊은 현장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현장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타분야 학문들과의 긴밀한 공동 작업을 수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신학계는 어느 면에서도 그리 깊은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 더 언급하자면, 기독교 인권운동은 있되 인권에 관한 한국의 기독교 신학이 없는 현실은 교회 대중이 없는기독교 인권운동의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교회가 일상 속에서 반인권적인 행태를 취할 때 이를 문제제기할 인권 담론이 신학적으로 구비되어 있지 못한 현실도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글에서 기독교의 인권 담론을 이야기할 때 법적, 제도적 차원의 논의보다는 신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를 다룬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인식론에 관한 서구 신학계의 논의는 우리의 현실에선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한국사회에 관한 성찰적 인권 신학의 여지를 상상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는 나름대로 한국의 역사문화적 변화를 유념하면서 인권담론을 신학적으로 모색해 보려는 데 초점을 두었다. 특히 안병무의 논의 속에 산재한 인권에 관한 동시대적인 신학적 담론화의 가능성에 주목함으로써 한국 신학의 전통과 오늘의 인권 상황에 관한 문제의식을 연계시켜 보려 했다.

나는 인권이 시민 혹은 성도라는 민주화된 사회의 주체적 존재의 과잉 기대 혹은 욕망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을 문제시하면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신이 자아의 주체화를 부정하고 타자적 존재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것도 인간 사회의 주인공이 될 만한 존재가 아닌 가장 비천한 이의 얼굴로 세상에 왔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토대가 되는 요소라고 한다면, 시민/성도의 자아의 대본 쓰기를 인권에 관한 신학적 신앙적 기조로 활용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그다지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그러한 담론이 문제의식 없이 유통될 수 있는 배후에는 국가가 국민 일반을 일정하게 타자화했던 독재시대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우리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는 국민이 시민화되고, 더구나 시장화된 시민의 시대가 되면서 시민은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대상화된 존재라기보다는 인권의 유린을 방조 혹은 공모하는 존재로 전화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인권 문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며,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낼 만한 신학적 성찰의 흔적을 안병무의 신학 담론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

  1. 1987년 2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편찬한 전 3권으로 된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제1권에서 수록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선언〉은, 김흥수 교수에 의하면, 중앙정보부가 영문 텍스트를 번역 출판한 자료에서 인용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인권운동을 좌경 용공 집단으로 몰아가기 위한 고의적인 어휘 등이 선택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그 영문 대본은 “Korean Christian Manifesto”, Christianity and Crisis (July 9, 1973). p. 140이나 “Theological Declaration by Christian Ministers in the Republic of Korea, 1973”, Gerald H. Anderson, ed. Asian Voices in Christian Theology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76). pp. 241∼245로 보인다. 그런데 동년 7월에 인권위원회가 8권으로 확대개정본을 내면서 새 판본인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제1권에 수록했는데, 이는 이 문서가 편찬자들이 위의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선언〉의 진본이라고 판단한 결과로 보인다. 김흥수,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의 작성과 배포 과정〉(기독교연구사연구소 제155회 연구모임 자료발표〈1998.1.10〉). http://www.salrim.net/bbs/view.php?id=salrimbiblestudy&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그리스도&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 중앙정보부가 유포한 한글 번역본은 이 문서가 발포된 날짜를 1973년 5월 20일이라고 하고, ‘한국기독교유지교역자 일동’이 이 문건의 주체임을 명기하고 있다. [본문으로]
  3. 김창락, 〈민중의 해방투쟁과 민중신학: 1970년대 민중운동〉, 《신학연구》 28(1987), 90~91쪽 참조. 이 〈인권 선언〉의 전문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제1권(1987.2) 299쪽을 보라. [본문으로]
  4. 같은 책, 406~407쪽. 이것은 후에 《기독교사상》 1984년 11월호에 ‘자료’ 형태로 재게재되었다. [본문으로]
  5. ‘도덕공동체’ 개념은 동물해방철학(animal liberation philosophy)의 주창자인 톰 레건(Tom Regan)에게서 차용한 개념인데, 그는 도덕공동체 외부의 존재인 타자를 ‘그(녀/것)의 고통이 (공동체에 의해) 감정이입되지 않는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그(녀/것)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내지는 무감각의 폭력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명시적으로 도덕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세르비아 남성들이 보스니아 여성들에 대해 저지를 만행의 배후에는 그녀들을 비인간적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이 생기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음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레건의 도덕공동체와 동일한 함의의 공동체 개념을 얘기하고 있다. Tom Regan, The Three Generation: Reflections on the Coming Revolution (Temple University Press, 1991); Richard Rorty, “Human Rights, Rationality, and Sentimentality”, in Truth and Progres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참조. [본문으로]
  6.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신학사상》 53(1986 여름) 참조. [본문으로]
  7. 최근 이상훈은 같은 문제의식에서 인권 논의를 역사적으로 물을 필요성을 제기하며, 마르크스적 사회동학을 통해 근대의 고전적 자유주의 인권론이 주장하는 개인의 인권 개념은, 그 일반론적 언술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에 관한 것이고, 근대적 산업 체계의 발전을 거치면서 그러한 인권 담론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노동자의 기본권의 차원까지 포괄하는 인권 개념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논증한다. 이상훈, 〈인권 패러다임과 사회 동학〉, 《시대와 철학》 16(2005 가을) 참조. [본문으로]
  8. 2월에 발간된 책자에 실린 〈선언〉이 중앙정보부 번역본임이 밝혀지자, 편찬자들은 원본을 수소문하여 찾아내 개정증보판에 수록하였다. [본문으로]
  9. 안병무, 〈단(斷)!〉, 《살림》 2(1989.1) 참조. [본문으로]
  10. 유철규, 〈산업화 이후 경제구조의 변화와 산업정책의 함의〉, 《동향과 전망》 60(2004 4) 참조. [본문으로]
  11. Richard Rorty, “Human Rights, Rationality, and Sentimentality”, pp. 168~170 참조. [본문으로]
  12. 박정희 체제를 약탈적 국가폭력의 체제로 규정할 것인가 대중적 동의의 체제로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양자택일의 논쟁은 현실을 희화화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체제도 강제의 전략이나 동의의 전략만으로 사회적 통합을 실현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양자택일적 물음보다는 두 방식의 통치 양식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묻는 게 보다 유용하다. 서동진, 〈박정희 체제―어떤 민주주의를 위해 비판할 것인가〉, 《당대비평》 28(2004 겨울), 111~112 참조. [본문으로]
  13.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체제는 이승만 정권 시절의 정치깡패들을 배제될 타자로 처벌했으며, 전두환 체제도 정권 장악 직후 삼청교육대에 많은 사람들을 깡패 혐의로 격리 처벌했고, 6공 체제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또 한번 깡패를 배제될 타자로 생산해내는 정책을 폈다. [본문으로]
  14. 게르트 타이쎈,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나타난 지역적 사회적 특성〉, 《신학사상》 51(1985 겨울) 참조. [본문으로]
  15. 〈마르코복음〉은 독서자를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청중을 향해 낭송되던 구술적 텍스트이다. [본문으로]
  16.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1990), 177~78쪽 참조. [본문으로]
  17. 바우만・임지현(대담), 〈‘악의 평범성’에서 ‘악의 합리성’으로〉, 《당대비평》 21(2003 봄) 참조. [본문으로]
  18. Richard Rorty, “Human Rights, Rationality, and Sentimentality” 참조. [본문으로]
  19. 이에 대하여는, 안병무, 〈죄와 체제〉,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90) 참조. [본문으로]
  20. 물론 이것은 지배의 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의 비판적 접근이다. 선생은 저항의 정치라는 차원에서 윤리는 해체의 대상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는 안병무의 윤리에 대한 나의 연구인 〈‘엄마의 계보’에 놓은 역사의 천사들―안병무의 ‘민중의 윤리’에 대하여〉,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참조. [본문으로]
  21. 안병무, 〈죄와 체제〉, 208쪽. [본문으로]
  22. 서동진은 미국 보수주의적 성정치학의 논이를 이와 같이 정리한다. 흥미롭게도 이는 민중신학의 죄론과 지배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유사하다. 서동진, 〈인권, 시민권 그리고 섹슈얼리티―한국의 성적 소수자 운동의 정치학〉, 《경제와 사회》 67(2005 가을) 참조. [본문으로]
  23. 이은주는 IMF 사태 이후 실직한 이들에 대한 연구에서 자존감 여부가 실직자의 회생능력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이은주, 〈실직자들의 인지된 지지와 정서적 만족감〉, 《사회이론》 23(2004) 참조. [본문으로]
  24. 田川建三, 김명식 옮김, 《마가복음과 민중 해방―원시그리스도교 연구》 (사계절, 1983) 참조. [본문으로]
  25.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 이정희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참조. [본문으로]
  26. 어촌 읍내인 가파르나움 유적지에서 예수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가 발굴되었고, 바로 그 옆에 다소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회당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 회당 자리는 예수 당시의 회당 자리였던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추정한다. 한편 복음서는 시골 촌락치고는 작고 보잘 것 없었던 나자렛에도 회당이 있었다고 묘사한다. 가파르나움을 포함한 팔레스티나 촌락의 회당에 관한 고고학적 문헌적 연구로는, Eric M. Meyers & James F. Strange, Archeology, the Rabbis & Early Christianity: The Social and Historical of Palestinian Judaism and Christianity (Abingdon, 1981), pp. 58~61, 140~154 참조. [본문으로]
  27. 설동훈, 〈외국인노동자와 인권―‘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기본권’ 및 ‘인간의 기본권’의 상충요소 검토〉, 《민주주의와 인권》 5/2(2005 가을), 69쪽. [본문으로]
  28. 김창락, 〈인권운동과 그리스도교〉, 《새로운 성서해석과 해방의 실천》 (한국신학연구소, 1990)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