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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역사의 예수 담론의 영토성 - 서구 근대주의와 그 제국적 담론의 정치

이 글은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트랜스내셔널인문학 국내 심포지엄: 재현과 담론>(2009.10.23)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메타비평 연구로 제출된 것입니다.

역사의 예수 담론의 영토성_트랜스내셔널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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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 담론의 영토성

서구 근대주의와 그 제국적 담론의 정치

 

 

 

 

 

머리글: 담론의 영토성과 역사의 예수라는 모던 예수

 

역사의 예수1778년 이후 등장한 신약학계의 연구 분과의 하나로, 바른스 테이텀(W. Barnes Tatum)이 저술한 예수 연구에 관한 개설서인 예수 탐구[각주:1]에 따르면, 1980년까지 세 단계로 그 전개를 나눌 수 있다: 고전적 탐구 시대(the old quest, 1778~1906), 무탐구 시대(the no quest, 1906~1953), 새로운 탐구 시대(the new quest, 1953 이후). 한편 영국의 예수 연구자들인 스테판 니일(Stephen Charles Neil)과 톰 라이트(Nicholas Tom Wright)는 최근 영어권 국가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새로운 예수 연구의 붐을 일컬어, ‘3의 탐구(the third quest)라고 명명한다.[각주:2] 같은 현상을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주로 북미의 현상에 주 목하면서 예수주로 북미의 현상에 주 목하면서 예수르네상스(Jesus renaissance)라고 불렀다.[각주:3]

고전적 탐구

the old quest

무탐구

the no quest

새로운 탐구

the new quest

3의 탐구

the third quest

1778~1906

1906~1953

1953~1960년대

1980년대 중반~

H.S. 라이마루스

D.F. 슈트라우쓰

E. 르낭

R. 불트만

E. 케제만

G. 보른캄

J.M. 로빈슨

예수세미나

B.

J.D. 크로싼


이렇게 네 단계로 정리한 연구사에서 무탐구 시대는 역사적 탐구의 폐기 담론이 지배적이던 시기였 고, ‘새로운 탐구 시대결과물의 양도 빈약했고 그나마 신뢰할 만하지도 못한 연구 성과,[각주:4] 게다가 새롭다는 수사어조차 역사적 관점보다는 신학적관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에서[각주:5] 비명시적인 무탐구 시대로 보아도 진배없다. 요컨대 연구사를 역사성에 주목하면서 정리한다면, ‘고전적 탐구 시대3 탐구 시대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역사의 예수 문제를 이 두 연구 시대로 한정하 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전적 탐구18,19세기 주로 독일에서 일어났던 연구사적 현상이고, ‘3의 탐 구는 주로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영어권, 특히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연구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가리킨다.

이 글에서 나는 각기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거나 진행 중인 이 두 연구 운동이, 연구사적 특징을 주도하는 저작들을 중심으로 볼 때, 대체로 실증주의적(positivismic) 역사관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 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이 두 연구 운동이 과거 사실의 실증적 재현에 대한 자기 확신의 산물임 을 의미한다. 반면 무탐구새로운 탐구현상은 사실 그대로 재현하는 것의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한 쌍을 이룬다. 다만 전자는 역사의 후퇴를 실존주의(existentialism)를 통해서 해소하려고 한 반면, 후자는 신학적 문제설정을 통해서 역사의 실종을 만회하려고 하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각주:6]

한데 과거의 학으로서의 이 두 예수 역사학(‘고전적 탐구3의 탐구’)은 동시에 다분히 계몽주의적인 도덕적 역사관을 갖고 있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예수는 현재에 개입하며, 나아가 이렇게 하여 이상적인 미래를 지향한다. 한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미 1960년대에 에드워드 카(Edward Halett Carr)가 주장했듯이, 역사학의 담론적 효과가 발현되는 경로가 과거현재미래로 진행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각주:7]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일종의 시간의 대화인 셈이다. 역사학 담론은 이 대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메타적으로 비평한다고 할 때, ‘현재는 이 시간의 대화가 벌어지는 장(fields)이며, 이 대화의 효과가 작동하는 장이기도 하다. 하여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현재라는 담론의 장(fields of discourse)에 초점을 두어 역사의 예수, 위의 두 연구 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표현인 모던 예수(modern Jesus)라고 부를 것이다. 즉 모던 공간과 얽힌 역사의 예수 담론의 특성이 이 글이 주목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나는 현재라는 시간적 담론의 장을 공간적으로 독해하고자 시도한다. 모던 예수라는, 역사 의 예수를 둘러싼 시공간 대화로서의 담론의 장에서 내가 읽고자 하는 것은 영토성(territoriality)의 문제인 것이다. 영토성이란 포용과 배제의 공간정치학적 개념으로, 경계짓기가 수행되는 모든 영역에서 발생한다. 영국의 공간사회학 연구자인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모든 공간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연루되어 어지럽게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 힘의 기하학(power-geometry)으로서의 특징을 갖는다고 말한다.[각주:8]

하여 특정한 형식의 모던 예수가 발화되는 현재의 장에서 그 담론의 효과는, 의도하든 아니든, 무엇 인가를 포용하지만 동시에 다른 무엇을 배제한다. 이때 공론장에서 포용이라는 용어는 특정 주장을 둘러싼 논쟁적 지평을 아우른다. 물론 이 논쟁은 진실게임 형식으로 진행된다. 누구의 예수상이 더 역사적 개연성을 갖는가의 문제다. 물음은 과거를 향하고 있고, 그 물음을 위해 동원되는 지식과 정보 역시 과 거의 것에서 추출된 것이다. 하지만 정보를 배열하고 해석하고 스토리라인을 형성하는 것에는 해석자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경험과 기대가 개입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무의식의 경험과 기대가 교환되는 장은 담론의 포용 범위가 은연중 경계지어 있다. 요컨대 여기서 특정 담론은 다른 어떤 것을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귀담아 듣지 않는다거나,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지만 부재한 것, 배제의 경험적 지평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고전적 탐구유럽적 모던 예수, ‘3의 탐구아메리카적 모던 예수로 단순화하고자 했다. 그것은 담론의 주요 시장이 펼쳐진 곳이 각각 유럽과 아메리카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글에서 담론의 영토성, 즉 모던 예수가 내포하는 공간적 정치에는 비유럽 혹은 비아메리카를 배제하는 경향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논증하려는 것은 그러한 배제의 양식을 들춰내려는 것이다.

먼저 모던 예수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검토하고, 그것이 내포하는 담론의 영토성이 내적 위기를 초래했음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3의 탐구의 주요 무대인 북미의 예수 연구를 소개하면서 여기서 아메리카적 모던 예수를 발견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두 예수 역사학적 연구가 공유하는 비평학적 공리인 역사비평학언술에서 영토성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모던 예수의 탄생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공동 저술한, 서양 근대에 대한 기념비적 비평서 계몽의 변증법[각주:9]은 서양의 근대가 어떻게 신화를 발견해냈고, 그것이 어떻게 서양 근대의 자의식을 구축하기 위한 담론적 산물인 계몽과 대립물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신화 대 계몽의 이분법은 자연 대 역사의 이분법과 등가적임을 주장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 역사(저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서구 백인 남성의 역사)가 자연을 남용, 지배, 착취하는 과정에 대한 은폐의 기제가 계몽이요 역사였음을 분석해냈다. 이때 과거에 관한 근대의 학으로써의 역사는 바로 근대주의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년경)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3~339년경)의 역사서 같은 고대의 역사와는 다르다. 그보다는 그런 고대의 역사서들을 사료로 삼아, 근대적 지식의 도구들을 활용한 역사적 작업들을 둘러싼 담론 제도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저술의 생산, 유통 메커니즘을 포함하며, 생산자와 소비자 각자의 욕망체계와 관련한 상호연계 양식 등이 얽혀있다. 또한 그러한 학문 제도의 매트릭스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구조도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근대주의 담론으로서의 역사는 과거를 재현하는 과학적 권위를 담지하고 있다는 믿음위에 서 성립했다.[각주:10] 그럼으로써 근대인의 당대적 자기 확신을 시간적인 장벽을 초월한 보편적인 진리로서 구 축해낸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진리의 부단한 역사라는 확신이다. 근대 역사학의 주춧돌 같은 존재인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가 그토록 구별 짓고자 했던 두 개의 요소, 즉 진보에 대한 이상과 시간의 학으로서의 역사는 여기서 하나로 만난다. 이러한 진리를 향한 진보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은 청산되어야 하며, 역사학은 바로 이런 지향과 청산의 담론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진리라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랑케 자신조차도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서 유럽의 게르만 족과 라틴 민족들의 역사로 한정되어 있었다.[각주:11] 다른 존재는 역사적, 해석적 주체가 아니라, 수용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eck)은 최근 저서 지나간 미래[각주:12]에서 진보주의와 역사학의 대두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메타비평적 해답을 제시한다. 16세기 이후 본격화된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과 그 직접적 효과인 식민지 확장은 근대적 유럽인의 공간적 인식의 질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 즈음, 이러한 공간적 확장이 거의 정체된다. 공간 확장에 대한 인식의 관성은 지속되는데 공간의 확장은 더 이상 경험적 현실이 아닌 것이다. 코젤렉에 의하면, 이렇게 기대지평과 경험공간의 괴리를 유럽인들은 시간의 확장을 통해서 돌파하였다고 본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유토피아적 시간에 대한 열망으로 드러난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곧 진보된 미래 지평인 상상의 공간유토피아는 현실의 규범이자 실천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몽으로서의 시간 인식은 바로 이렇게 유럽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공간의 식민화에서 시간의 식민화로의 전이 과정에서 근대적 지식의 상징적 자본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독자적인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지식인 계층은 점차 담론 권력의 주요한 한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시간적 인식 체계를 새로운 시간적 질서로 전환시키려는 사회정치적 게임을 이끌어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전환의 지식 담론인 계몽주의는 저 유토피아적 상상공간의 포용과 배제의 대상을 식민화하는 또 하나의 지배체제가 되었다.

이렇게 근대주의적 역사인식이 대두하던 시기와 동시대에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도 시작되었다. 작가이자 출판인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이 익명의 한 학자가 쓴 7편의 단편들을 1774년부터 1778년 사이에 출간했는데, 이 글들은 교회로부터 격렬한 반론을 불러 일으켰다. 이 단편들 가운데서 특히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목적에 관하여(Von dem Zwecke Jesu und seiner Jünger)[각주:13]는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예수는 로마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유대인의 해방을 외쳤던 정치적인 메시아였지, 교회가 말하듯이 추상적이고 교리적인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활동은 유대인 자신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는데,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그이의 시신을 탈취하여 부활설을 유포하였고, 이러한 착오의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데 이 주장만큼이나 놀라웠던 것은 이 익명의 저자가 다름 아닌 존경받던 학자인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 1694~1768)였다는 점이다. 그가 자신의 지인들에게만 공개했던 글들이, 그가 죽은 뒤 레싱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해석의 배후에는 영국의 이신론(理神論) 운동이 있다.[각주:14] 라이마루스는 이신론 운동의 영향으로 초자연주의적인 것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았다. 복음서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나머지를 이성 중심적 관점에서 읽어낸 결과 바로 위와 같은 해석을 낳은 것이다. 예수 연구사에 관 한 가장 위대한, 그리고 가장 최초의 메타비평적 연구서를 저술한 알베르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그의 해석을 평하기를 세상은 이렇게 아무것으로도 라이마루스의 획기적인 작품을 위해 준비하지 않았다라고 한다.[각주:15] 요컨대 그는 최초의 예수 역사학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의 예수 연구의 선구자인 라이마루스의 과격한 예수 해석이 17,18세기의 이신론적 반()초자연주의적 태도와 연동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신론적 기조는 당시 유럽의 합리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지식인들과 그들의 주요 독서층인 시민계층 사이에서 폭넓게 회자되고 있던 생각 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개혁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을 휩쓸었던 천년왕국운동적인 종말론적 서사와 광범위한 대중의 동원, 그리고 야만적 폭력의 현실[각주:16]에 대한 식자층의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하여 초자연주의적 기조의 서사들을 불신하고, 이성적 사유에 의해 예측 가능한 법칙과 조화를 통해 신을 해석하고 성서를 보는 신학운동, 그러한 신학적 추세 위에 라이마루스의 저작 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는 다음 두 가지를 배제하는 담론 전략 혹은 효과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교회체제와 세속체제를 묶는 신앙적 동맹이 의존하고 있던 반이성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신성동맹에 반대하는 민중주의자들의 반이성주의다. 양자는 이 시기 극한적 대립상황에 있었는데, 라이마루스의 저작은 이 양자가 기초하고 있던 초자연주의적 신앙관에 철퇴를 휘두른 셈이다. 한데 이 존경받던 저명한 학자의 비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교회였다. 그 자신은 사후에 글이 공개되었으니 교회의 보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의 사정은 달랐다.

익명으로 발표된 라이마루스의 원고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뒤에, 그를 따른 많은 연구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그리고 이 연구서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회의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 시기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손꼽히는 것은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쓰(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가 저술한 두 권짜리 저서 예수의 생애에 관한 비판적 연구[각주:17]와 에른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예수의 생애[각주:18]인데, 물론 이 책의 저자들도 교회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두 저작은 각기 독일과 프랑스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778년의 라이마 루스에서 1901년의 브레데(Wiliam Wrede, 1859~1906)에 이르기까지 대략 130년의 기간 동안의 예수 연구서 6백 여 권을 다루는 대 저작 예수의 생애 연구사(1906)을 펴냈는데,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진 크라운판(167×236mm) 한글번역본 603쪽 중에서 무려 54쪽이 슈트라우쓰에게 할애되어 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이만한 분량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그의 저작에 대해 학문적인 세계문학 중 가장 완전한 작품[각주:19]이라고 평하고 있을 만큼 그의 책은 이 시기 역사의 예수 연구(1)를 대표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르낭의 책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대중서로 꼽힌다. “간행된 지 4개월 만에 6만부가 팔렸고, 18개월도 안 되는 동안에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각주:20] 하여 슈바이처는 평하기를 지금까지는 단지 신학자들만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를 전 교양인의 세계에 제시하였다고 평한다.[각주:21]

그것은 이 두 사람의 글쓰기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슈트라우쓰의 글이 차갑고 논리적이며 엄밀한 방법론적 개연성을 따라 논지가 펼쳐지고 있다면, 르낭은 언어적이고 지리적인 생생한 지식의 기초 위에서 화려한 수사와 상상력이 빛나는 예수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그린다. 아마도 이것은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지식양상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독일은 프랑스보다 더욱 체계적인 기록의 문화가 발달되었고, 이에 관련하여 보다 분과학문적 발전이 앞선 반면, 프랑스는 대중의 교양과 전문 지식 사이의 연관성이 현저히 강한 문화적 배경을 가졌다.[각주:22] 하여 슈트라우쓰의 책은 역사의 예수 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반면, 르낭의 책은 그 비전문성 때문에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가 학계의 관행처럼 문자 텍스트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읽어내려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반면, 르낭은 문자 텍스트에만 매달리지 않고 현지를 자신의 발로 누비면서 개연성을 상상해내 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행을 넘어서고 있다.

아무튼 이 책들로 인해 슈트라우쓰는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르낭은 그의 예수전이 출간되기 한해 전에 꼴래쥬 드 프랑스의 교수 취임식 때의 강연으로 취임이 보류된 상태였다. 역시 교회의 신앙에 대 한 문제제기 탓이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은 교회만이 아니라, 동시대 계몽주의적 지식인들로부터 도 맹공을 받았다. 그것은 이들이 교회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이신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양자는 절충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르낭은 초자연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복음서를 읽는 대신, 그것들을 동시대의 언어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해석할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또 슈트라우쓰 는 헤겔의 변증법을 끌어들여, 초자연주의적 의 기조와 이신론적 의 기조를 종합한 대안적 해석 학, 이른바 신화론적 해석을 제시했다.

요컨대 두 사람은 독일과 프랑스의 권력과 지식의 지형에서 보수주의자로 해석될 수도, 진보주의자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하여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교회 비판의 기조 속에서 이들의 절충주의는 위기에 놓인 신앙이 근대주의와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교회는, 이들이 비록 절충주의적이라 할지라도, 그 유명세 탓에 그들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그 논점이 예수에 관한 것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교회는 예수를 재현함으로써 존속할 수 있는 종교제도이다. 가톨릭은 오랫동안 전례에 기초해서 교 회의 예수상을 형성하여 왔다. 정통주의적 신교는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독해를 통해 교회의 예 수상을 형성했다. 신교의 등장은 활판인쇄기술과 종이 제작능력의 향상이 낳은 문자 문화의 도래와 맞물려 있지만, 정작 신교의 문자주의적 성서관은, 문자에 대한 근대주의적 해석이 아닌, 전근대사회적 문자의 속성과 친화적이다.[각주:23] 전근대의 문자는 극소수 문자계층의 전유물로서, 해석의 매체라기보다는 주 로 정보 저장의 매체(media of information storage)였다.[각주:24] 실제로 전근대사회의 문자는 군주제 사회의 체계화 와 맞물려 형성 발전하였다. 서기관 같은 잘 훈련된문자계층은 문서를 통해서(-인 관계든, 군주-백 성 관계든, 인간간의 관계든) 그 계약이 해석의 여지없는 명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전문가였다. 하여 문자는 해석의 다양성보다는 진리 혹은 사실을 확정하는 효과적인 도구였다.

근대의 정통주의적 신교 교회들은 이러한 전근대적 문자 감각을 유지하려 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적 명제중 하나인 ‘sola scriptura’(오직 성서)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듯이 신교는 책의 종교로 탄생하였고, 이것은 동시대의 근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책이라는 매체, 곧 근대적 문자 매체의 해석 가 능성을 정통주의적 신교는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교의 신학엘리트들은 전근대적 문자관에 포박되어 있던 종교성까지 개혁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전근대의 문자감각에서 성서는 해석 불가능성의 책 이고, 이것은 교회권력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을 기조로 하는 신앙제도의 일부였던 것이다. 하여 근대적 종교로 탄생한 신교의 문자주의적 성서관은 전근대적 종교의 그것에 스스로를 제한시킨 결과.

그러므로 교회의 예수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고, 나아가 신화그 자체일 뿐이라는 주장들, 역사의 예수논의는, 신교든 가톨릭이든, 교회에 매우 통렬한 문제제기로 다가왔다. 근대주의적 역사가 들은 가톨릭적 예수관의 기조를 이루는 전례나 신교의 인식틀인 문자주의에 대해 신화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 대 신화의 이분법을 낳은 반신화적인 근대주의적 자의식에 관한 논의로부터 우리는 이 시기 교회가 예수 이해를 둘러싼 논쟁적인 담론으로 인해 얼마나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놓여야 했는지를 시사받게 된다. 요컨대 역사의 예수 연구라는 과거 사실에 대한 이해는 연구자 동시대의 예민한 정치적 문화적 갈등의 맥락 속에 배치되어 담론화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낭만주의 비평가인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과거의 사실을 재현하려는 역사가를 뒤로 몸을 돌리고 있는 예언자라고 묘사하였다고 한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과거이며,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 즉 과거 사실에 대한 탐구인 역사학조차도 미래의 유토피아를 상상하기 위한 예언자적 시간 순례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이러한 과거-미래를 잇는 진보의 시선에서 조율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유럽인의 인식론적 사투의 한 가운데서, 역사의 예수담론은 유토피아로서의 상상적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유럽적인 열망을 담고 있었고, 또한 지체된 근대혹은 전근대적 표상으로서 실재하는 교회의 회고주의(과거 지향성)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연구라는 역사학적 운동은 교회 제도와 직간접으로 연루된 신학적 공간 내부에 서 벌어진다. 그것은 초기의 예수 역사학이 슐레겔이 말한바 미래 지향적 역사이라는 변수 외에, ‘과거 지향적인 신앙이라는 변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예수연구의 궤적 은 처음부터 역사와 신앙이라는 두 주요 변수에 의해 규정된 이차원 공간상의 좌표 위에서 움직여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라는 변수는 유럽적인 근대성의 범주이고, ‘신앙유럽적인 전통의 범주. 전자가 미래 지향적 진보의 관점과 맞물려 있다면, 후자는 과거 회고적인 전통의 관점을 반영한다. 그리고 양자는 어떻게 해서든 절충되었다.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감안하면서 초기의 연구사를 보면, 두 변수 가운데 역사를 좀 더 중요하게 보면서 교회 전통과의 차이를 강조하려는 계열(차이의 전략, 라이마루스 그리고 슈트라우쓰 등 튀빙엔 학파’), ‘신앙에 초점을 두면서 교회 전통과의 화해를 모색하려는 계열(동일성의 전략, 알비레히트 릿츨 등 종교사학파라고도 불리는 괴팅엔 학파)로 양분할 수 있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18,19세기 예수 연구를 선도했던 6백여 권에 관한 방대한 리뷰를 마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것(이 시기 역사의 예수 연구가 재현한 나자렛 예수인용자)은 결코 실존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합리주의에 의해 잉태했고, 자유주의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리고 근대신학에 의해 역사의 도포자락으로 치장한 존재였다.”(인용자 의역)[각주:25] 즉 이 시기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전반적으로 근대주의적 이상과 예수를 어떤 형태로든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근대 속의 전근대는 역사의 예수에 의해 배제되었다.

가령 르낭은, 혈통적 인종주의자이고 후대에 나치에 의해 적극적으로 의미 부여된 인물인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우등한 인종인 아리안족과 열등한 인종인 아프리카의 흑인, 호주의 원주민, 아메리카의 인디언,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셈족과 황인종(아세안과 북아프리카의 유색인)으로 3분화된 인종도식을 문화적 능력, 특히 언어적 능력을 중심으로 나눈다. 여기에는 과학적 세계관이나 고등종교 같은 문명화(civilization)의 요소들이 언어능력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구획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재현할 유일한 언어 주체가 아리안족 유럽인이고, 그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며, 이렇게 재현된 역사의 예수는 정전적(canonic) 위상을 갖는다. 비록 혈통적 인종주의라는 노골적인 서구중심주의는 아니지만, 오늘날 유럽의 인종주의의 기조인 이른바 신인종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역사의 예수 담론의 선구자의 한 사람인 르낭에게서 이미 이렇게 정초되고 있다.[각주:26] 이런 사정은 슈트라우쓰를 포함한 동시대 예수 연구자 거의 모두에게서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이는 보다 노골적인 반면, 다른 이들은 우회적인 정도의 차이만 노정되어 있을 뿐이다.

하여 결론적으로 우리는 유럽의 모던 예수 담론이 영토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영토 외부에 대해 폄하하는 배타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역사의 예수는 근대 유럽인의 욕망 속에서 발견되었다. 곧 역사의 예수는 모던 예수였다.

 

유럽적 모던 예수 담론의 위기와 그 영토성

 

비평학적으로 슈트라우쓰는 요한복음보다는 공관복음서들(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역사적 연구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보았지만, 아직 마가복음의 중요성에 주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동료이자 후계자인 바이쎄(Christian Hermann Weisse)는 예수 어록 자료(Q)마가복음이 다른 두 정전 복음서의 기본자료라는, 이른바 두 자료 가설(Zwei-Quelen Theorie)의 골격을 최초로 구성함으로써,[각주:27] 마가복음을 역사의 예수 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서로 다루는 학문 전통의 토대를 마련하였고(1838),[각주:28] 홀츠만(Heinrich Julius Holtzmann)의 기념비적 저작 공관복음의 기원과 역사적 특성[각주:29]은 두 자료 가설이 학문적 정설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각주:30] 마가복음가설은 의심할 수 없는 지위를 얻게 된다.[각주:31] 하여 이 시기 예수 연구의 주된 특징의 하나는 이 복음서가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책보다 십여 년 앞선 마틴 쾔러(Martin Kähler, 1835~1912)1892년의 저작 소위 역사의 예수라는 것과 역사적인 성서의 그리스도[각주:32]마가복음확대된 서론이 첨가 된 수난설화라고 결론짓는다. 수난 설화를 기억하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역사적 시선을 확장해서 편집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책은 해석된 케뤼그마이지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 학술적인 예수 연구서는 쾔러의 공식 위에서 담론을 펼쳐야 했다.

1901년 출간된 브레데(William Wrede, 1859~1906)의 저 유명한 복음서들 속의 메시아 비밀[각주:33]을 저술하였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마가복음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메시아비밀 모티브가 저자의 편집적 기획의 산물이며 이는 그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가 역사적 기억의 산물이 아니라 제자들의 창작이라는 것이다.[각주:34]

이후,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슈바이처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의 결론으로 제시한바, ‘이제까지의 역 사의 예수 연구가 발견한 것은 1세기 팔레스티나의 나자렛 예수가 아니라 유럽적 모던 예수였다는 주 장은 예수 역사학의 파산을 의미했다.[각주:35] 한데 이 시기는 유럽의 시민계층 중심의 인식틀과 연관된 하나의 지적체계인 역사주의가 새로운 시대의 위기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는 시대적 위기의식의 시대이기도 했다.[각주:36] 하여 성서학의 학문 내적 문제제기는 이러한 시대적 위기의식과 상응하면서 예수에게서 근대적 이상을 투사하고자 했던 역사적 연구의 담론적 위기로 나타났다. 이제 교회의 예수를 비판하며 근대의 지평과 접맥되었던 역사의 예수연구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마가복음의 예수 역사학적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좌절과 18,19세기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학문적 파산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역사가들이 예수에 관한 원초적인 사건을 추출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매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신뢰가 붕괴된 것이다.

한데 책은 인쇄된 책필사된 책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다 대중적이고 저렴한, 그 리고 한 권 속에 훨씬 많은 분량을 담아낼 수 있는 대량복제본과, 가죽이나 파피루스에 한 글자씩 일일 이 새겨 넣어야 했던, 단 한 권뿐인 필사본, 그것도 담아낼 수 있는 분량이 제한적인 책은 매우 다른 속성을 갖는다. 성서가 한 권의 일관된 책이 아니라 중단편의 글들 수십 편의 묶음본인 것은 바로 그 글들 이 두루마리나 파피루스라는 매체로 담아내기에 유용한 분량의 각개 문서들로 다양하게 생산 유통되었던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 문서들 중 어떤 것들이 하나의 범주로 묶이게 된다. 이것은 정전화(canonization) 과정과 맞물린다. 하지만, 가죽 두루마리 시대에 이미 정전화가 시작되었지만, 그때는 개별 두루마리들의 모음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파피루스를 한 장 한 장 모아 마치 오늘날의 책처럼 제본한 코덱스(codex) 방식이 활용되면서는 훨씬 더 많은 분량을 묶은 책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이때도 그것은 묶음집이라는 의미가 보다 강했다. 더구나 그것은 사람들이 각개로 읽는 문서가 아니라, 어느 공동체가 소중하게 보관하는 책이며, 회합이 있을 때 회중에게 지도자가 읽어주는 청각적 문서이다.

반면 활판인쇄본의 시대에 오면 책은 개인소장본이 되고, 각자 소리 내지 않고도 읽을 수 있는 문서, 즉 시각적 문서가 된다. 그리고 성서는 한 권이라는 감각이 바로 이 시기에 와서야 형성된다. 그러므로 성서에 수록된 문서들은 개별적인 문서이지만 동시에 서로 연관성을 지니는 문서로서 해석될 필요가 생 긴 것이다. 이것은 성서에 대한 교회의 해석과 학문적 해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여 예수 연구에서도 네 편의 정전복음서들의 영향관계를 다루는 분석이 중요해졌고, 이른바 두 문 서 가설이 모든 예수 연구의 토대가 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것이고, 다른 문서들의 대본이었다는 문서가 마가복음이라는 주장은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낳았고, 그것이 18,19세기에 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는 예수전 현상[각주:37]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예수 서사가 그이의 시대를 반영하기보다는 저자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문제제기가 설득력을 갖게 되자 예수 역사학은 붕괴되고 만 것이다. 대량 복제된 문서에 관한 저작권적 감각이 등장하던 시대에 문헌비평학은 고대의 문서들에 대해서도 저작권 문제를 들이대고 그것에서 역사학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구술사회와 문자사회를 구분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해석학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가톨릭 신부로서 매체학자인 월터 옹(Walter J. Ong)은 역사비평학이 이러한 매체적 차이를 간과했고, 인쇄된 책을 읽듯이 필사된 책을 읽어왔다는 점을 문제제기한 바 있다.[각주:38] 즉 구술사회의 텍스트를 문자 사회의 그것으로 혼동한 채 역사비평학적 연구가 수행되어왔다는 얘기다. 이것은 인쇄된 책에 대한 근대 유럽인들의 공통감각이 사료로서의 정전적 책들에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세계의 독서불가능성[각주:39]에서 유럽의 근대에서 세계가 책이고 책이 세계인 인식의 질서를 언급하였다. 이때 세계의 진리는 책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그 형식까지도 책의 형식을 띤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18,19세기 역사라는 진리의 한 양식은 집합단수(Kelektivsingular)였다. 마치 한 권의 책으로 된 인쇄본 성서가 수십 개의 두루마리 모음이 아니라 단 하나의 책으로 취급된 것처럼 말이다.

복음서를 꿰뚫는 거대한 하나의 의미에 대한 집착은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논평한 6백여 편의 책들에 서 예외 없이 나타난다. 쾔러나 브레데의 마가복음의 역사성에 대한 부정적 해석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이 복음서 텍스트가 하나로 수렴되는 진리틀을 기축으로 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그것이 예수 자신이 아닌 제자들의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예수의 역사성은 마가복음에서 가려져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사정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역사비평적 디테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 자신의 진리인식이라고 보든 제자들의 진리인식이라고 보든, 그러한 일관된 거대 틀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솎아짐으로써 진정한 것을 찾아내는 역사적 작업이 수행되었던 것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바로 이러한 연구 경향이 근대적 산물임을 발견한 첫 번째 성서연구자였다. 그 가 명시적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비평한 예수 연구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 시대의 이상, 곧 미래에 대한 기대지평으로 현재를 해석하면서, 그것으로 과거를 식민화하는 것, 그것이 18,19세기 예수 역사학이었다는 얘기다.

독일의 기억 연구자인 얀 아스만(Jan Assmann)은 기억이 기억주체의 동시대적 문화의 침투를 받아 재현되는 것을 일컬어 문화적 기억(das kulturelle Gedächtnis)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각주:40] 이것은 지난 18,19세기 의 역사의 예수 연구들이 위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읽어내는 분명한 지점을 지시해준다.

결론적으로 태동기의 역사의 예수 담론은 근대와 전근대를, 나아가 근대 안의 전근대를 나누고, 그러 한 경계들이 틀잡고 있는 권력의 기하학에 전이적 요소로서 개입하려는 근대주의적인 특정한 욕구를 통해 영토화됨으로서 근대 유럽적인 모던 예수로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그는 갈릴래아의 예수로서 탄생과 성장, 활동의 서사로 이루어진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여기에는 유럽적 기억, 그 문화적 기억 양식에 의해 태어났고 성장하였으며 활동했던, 유럽적 기억의 발명품이다. 한데 이러한 유럽적 모던 예수는 시간의 공간화를 담론화하는 데 있어 반교회적인 전략적 언술을 통한 크로키(croquis)된 형상을 지니지만, 유럽이라는 영토성이 타자들을 배제하는 보편주의적 담론으로서 채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럽적 영토성과 불가분리 엮인 역사의 예수 담론은 2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에 사유의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한 더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위기에 봉착했다.

 

모던 예수의 부활아메리칸 스타일

 

20세기 이후 오랫동안 역사의 예수라는 연구주제는 신약학계의 추억으로만 남아있었다. 슈바이처의 발언,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에게서 연구자 자신의 동시대적 염원을 담은 로망을 찾아냈을 뿐이라는 주 장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역사의 예수 연구의 폐기 선언이 되었다. 현대성서학을 대표 하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이러한 예수 연구의 잔해 위해서 신학을 해야 했고, 그가 찾은 성서 학 재건의 실마리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였다. 즉 역사를 묻는 대신 탈시간적 사건인 실존적 만남에 주 목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역사의 예수 없는 현대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신약학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저작들을 꼽을 때 후보로 늘 지목되는 그의 여러 권의 저서 가운데 하나인 신약성서신학(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예수의 선포는 신약성서 신학의 전제이지 신약성서 신학 자 체의 일부분이 아니다.”(인용자 사역)[각주:41]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신약학자들이 공격적인 반론을 통해 역사의 복원을 주장한 것은 19531023, 불트만 학회에서 행한 에른스트 퀘제만(Ernst Käsemann)의 강연 역사의 예수 문제를 기점으로 한다.[각주:42] 다른 제자인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은 이를 새로운 탐구(the New Quest)라고 명명하였는데,[각주:43] 앞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탐구의 연구 성과는 미미했고, 다만 여전히 역사의 예수가 예수 연구 의 핵심적 주제임을 환기시키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북미에서 연구의 폭발 현상이 감지된 것은 1980년대 중반 경이었다. 유럽에서는 잠잠했고, 단지 영국 에서만 활기를 띠었을 뿐이다. 하지만 축소되고 있거나 정체되어 있는 유럽에 비해 미국이라는 광대한 신학 시장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북미에서의 이런 추세는 곧 전 세계적으로 회자되었고, 오직 유럽에서만 냉랭했을 뿐이었다. 바야흐로 역사의 예수 연구를 포함한 신학의 주요 무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학계의 현상에 대해 대중적 반향이 예사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 학계가 유럽의 신학을 주도한 이후 학문적 성과물은 거의 전적으로 학자들의 골방 안에서 이루어졌다. 학자들은 연구 성과물을 생산하기 위해 아키브로 달려갔고, 아키비스트인 서지학자들이 골격을 만들어 놓은 해석의 틀 언저리에서 텍스트에 관한 역사학적 주석(Commentary)을 시도함으로써 성서학적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주석 속에는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들이 활용되었는데, 그것은 아키브와 아키비스트에 절대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초 지식이 필요한데, 특히 사어(死語)가 된 각종 고대어들에 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최소한의 기초지식이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정보들이 아키비스트들의 판독작업의 결과물 속에 누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여 아키브의 활용을 위해서 성서학 연구자는 특별한 기초지식의 폭넓은 수용을 전제해야 했다. 아무튼 아키브를 활용하지 않고는 어떤 연구도 학문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웠고, 고대어들에 관한 기초지식으로 무장한 전문적 성서 연구자가 아니라면 성서학적인 학문적 글을 쓴다는 거의 불가능했다. 심지어 성서학자가 아닌 신학자들에게도 그것은 폐쇄된 영역이었다. 이런 풍토 속에서 독일의 성서학은 전문가들만의 잔치였다. 당연히 성서학의 학문적 서사는 계몽적 포즈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한데 북미는 이 점에서 어느 정도는 달랐다. 유럽과는 달리 여기서는 학문 영역도 자본주의와 훨씬 더 친화적이다. 그 결과 많은 연구자들은 대중과 보다 긴밀한 접촉을 필요로 한다. 대중적 미디어는 보다 적극적으로 양자를 중계하는데, 그 과정에서 미디어적 편집이 가해진다. 유럽에 비해 아키브의 학문 구성적 역할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고, 자본주의적 미디어의 개입을 경유한 대중적 요소의 규정력은 보다 증대했다. 아키비스트들 또한 대중과의 교호라는 점에서 비슷한 사정인데, 그것은 연구자가 아닌 대중을 독자로 하는 아키비스트적 작업의 등장을 의미했다.[각주:44] 해서 북미에서 연구자들은 더 많은 저작을 생산 하고[각주:45] 덜 복잡한 논리를 구사하며 더 직접적으로 대중의 현장에 개입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최근 북미의 대개의 연구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구사적 특징을 주도하는 연구들의 경우 그러한 경향이 농후하다. 적어도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는 그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1985년 로버트 펑크(Robert Funk)가 주도하여 설립한 프로젝트 모임인 예수 세미나는 첫 번째 공동과제로 다섯 개의 복음서[각주:46] 속에서 예수가 한 말과 후대에 첨삭된 것을 가려내는 연구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30,40명에서 최대 이백 명에 이르는 연구자들이 연 2회씩 모여 네 가지 색의 구술로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정성 여부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였다.[각주:47] 한데 이 연구집단의 성과물은 외형상 접근방법에 있어서 연 구 시대의 전환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예수가 한 말에 집중하여 역사성을 가려내려 사력을 다 했던, 그러나 슬며시 연구사에서 족적을 감추었던, 이른바 새로운 탐구의 그것을 다시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각주:48] 하지만 예수세미나에 대해 체계적인 비평을 가했던 톰 라이트도 인정하고 있듯이, 작업의 외형은 새로운 탐구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결론에 이르기까지 참여한 연구자들이 각자 수행한 작업은 분명 북미에서 시도하고 있는, 다양한 학제적인 연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었던 새로운 탐구들에 비해 예수 세미나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며, 그런 점에서 대단히 비판적인 그리스도교 개혁적 의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한데, 예수 세미나의 설립자이자 기획자인 로버트 펑크는 우리의 시대를 탈그리스 도교의 시대(Post-Christian Era)라고 명명하였다.[각주:49] 이것은 산업화 이후 급속하게 세속화되어 가는 세계의 변화에 역행하여 보다 더 종파화되어 폐쇄적인 정체성으로 주체화되어 가는 미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통렬한 문제제기다. 이런 견해가, 좀처럼 선례가 없는 학자들의 집단적인 연구성과와 결합되어 제기되자 미국의 대중미디어는 광적으로 이 연구집단을 주목했다. 게다가 그 합의 과정 자체가 뉴스거리로 손색이 없었기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각주:50]

이러한 대중미디어의 주목은 예수 연구에 관한 시민사회적 관심을 증폭시켰고, 펑크가 세웠고 예수세미나를 주관했던 웨스타연구소(The Wester Institute)라는 사설 연구단체를 세계적인 위상으로 격상시켰을 뿐 아니라,[각주:51] 예수세미나에 대항하여 제임스 로빈슨이 주도하여 클레아몬트 대학 내에 조직된 또 다른 프로젝트 연구집단인 인터내셔널 Q 프로젝트(International Q Project, IQP, 1989~)Q 문서 복원 사업 또한 폭넓은 주목을 받게 했다.[각주:52] 나아가 많은 예수 연구자들의 저작에 대한 독자층이 갑자기 넓어졌다.

예수 세미나를 계기로 하여 스타 학자들이 속속 탄생한 것은 이런 학회들의 대중적 성공과 무관하지 않다. 이 세미나의 창설자인 로버트 펑크뿐만 아니라, 예수 세미나의 전도사라고 할 만한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이 프로젝트 최고의 스타이자, 학문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역사의 예수. 한 지중해 유대 농민의 생애[각주:53]의 저자 존 도미니크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 그리고 보그와 더불어 목회적 관심을 가지고 예수 세미나에 참여했으나 보그와는 달리 교회 밖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목회를 강조했던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등이 예수 세미나가 낳은 스타지식인으로 꼽힌다. 한편 버튼 맥(Burton Mack)은 예수 세미나의 초기 멤버였는데, 이 프로젝트 모임을 떠난 이후, Q에 기초한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에 관한 과격한 가설을 제시한 2부작 저술인 성결의 신화: 마가복음과 그리스도교 기원[각주:54]잃어버린 복음서Q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기원[각주:55]은 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대중미디어의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각주:56]

또한 예수 세미나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었는데, 그 논쟁 역시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 세미나의 파산을 선언한 아프릴 드코닉(April DeConick)의 블로그(http://forbiddengospels.blogspot.com/2009/01/jesus-seminar-jesus-is-bankrupt-post-1.html)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진 것처럼 전문가가 아닌 많은 이들이 이 학문적 공방에 전례 없이 깊이 관여하였다. 이 논쟁 과정에서 대중적 지명도가 크게 높아진 이가 영국 성공회 주교이자 신약연구자인 톰 라이트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자에 가까운 편이어서, 그의 논적(論敵)인 펑크나 보그, 크로싼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주의적이지만, 역사학적 방법에서는 성서학의 전통에 대해 보다 과감한 재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이념적으로 손쉽게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함을 갖고 있는 연구자이다. 다양한 책의 기획자로서 이름을 날린 마커스 보그[각주:57]는 그와 의 논쟁을 조직하여 예수의 의미를 펴냈는데,[각주:58] 이것 역시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예수 세미나로 제3의 탐구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3의 탐구에 속한 연구물들은 연구 방법이나 내용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다양하다. 특히 학제간 연구가 돋보이는데, 사회학, 인류학, 고고학, 문학사회학, 비교문헌학, 수사학 등 타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접근이 돋보인다. 독일의 연구자들이 주로 문헌적 아키브에 기초했다면, 최근 북미의 연구자들은 고고학(시리아-팔레스티나 고고학)이나 문헌비교학(유대 문헌들과의 비교연구) 등 새로운 아키브들을 다양하게 만들고 활용했던 것이다. 3의 탐구라고 평할 수 있는 연구자들의 이러한 폭넓은 저변과 비교할 때 예수 세미나는 그 수에 있어서 너무 소규모다. 규모도 작은 데다 참여자들 개개인의 학문제도 내에서의 위상이 그리 주목할 만하지 못하다는 잘 알려진 혹평은 이 연구 집단의 비상한 대중적 성공에 대한 반작용이다.[각주:59] 게다가 이들이 교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자기들의 학문적 성과물과 연계시켜 주장함으로써, 교회와 신학자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각주:60]

하지만 현재 북미에서의 예수 역사학의 지형도를 보면 예수 세미나가 제기한 학문적 의제가 최근 예수 연구 동향의 중심적 요소임을 보여준다. 또한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최근의 예수 역사학은 시민사회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동되어 전개되고 있다. 모던 예수의 아메리칸 스타일은 이렇게 모던 예수의 유럽 버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다음 장에서는 아메리칸 버전의 모던 예수 문제를 주된 논점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아메리카의 모던 예수의 논점들 그리고 그 영토성 문제

 

마커스 보그에 의하면,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는, 유럽에서 유래한 종말론 컨센서스가 붕괴되고, ‘예 수가 지혜교사였다는 견해가 확산되는 추세다.[각주:61]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렇다. 여기서 보그는 종말론묵시론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최근 예수 세미나의 문헌들이 공유하는 시각이고, 많은 북미 연구자들도 대체로 그러한 용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각주:62]묵시종말을 동일시하는 미국적 이 해는 건국시기 이래 미국사회에서 줄곧 지배적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우파의 근본주의적이고 천년왕국적인 신앙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연구자들의 생각을 은연중 강박한 결과로 보인다.[각주:63]

북미에서 이러한 반종말론적 관점을 펴는 연구자들은 예수 어록인 Q 자료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알란드 제이콥슨(Arland D. Jacobson)에 의해 층위학(stratigraphy)이라고 명명된 방법, Q 텍스트들의 전승 층위들(strata)을 분류하여 그 전승사를 추론하는 방법에 의해 역사의 예수에 관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는 주장이다. 존 클로펜보그(John S. Kloppenborg)의 기념비적 저서 Q의 형성고대의 지혜 수집록들의 전승궤도[각주:64]는 그러한 연구의 기점이자 가장 중요한 정전의 하나다. 그는 복음서 속의 Q 텍스트에서 단선적 전승사(a single-linear Tradition History)를 세 단계로 추론하였는데, 그 최초의 층위는 지혜적이고 다음 단계가 묵시적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예수는 묵시적 예언자가 아니라 지혜교사였다는 주장과 접맥되면서 예수 연구의 판도를 바꾸어 버렸다.

한편, 앞서 말했듯이, 로빈슨이 이끄는 인터내셔널 Q 프로젝트1989년부터 Q 텍스트 복원 사업을 수행했다. 로빈슨의 학문권력에 힘입어 이 복원 프로젝트는 향후 Q 연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Q 텍스트는 이로써 하나의 문서로서 확정된 셈이다. 현존하지 않고 단지 마태복음누가복음의 공통부분에서 추론되었던 미지의 자료는 오랫동안 문서인양 다루어져 왔지만 명백하게 문서로서 규정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구술적 전승 단위로서 주목한 것은 양식비평가인 마르틴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와 불트만 정도이고(하지만 이들도 Q를 구술 전승의 맥락에서 주목하면서 문서처럼 읽는다.[각주:65]), 대개는 단언하지는 않으면서도 문서를 다루듯 애매모호하게 해석해왔다.[각주:66] 하지만 Q 복원 프로젝트는 이제 더 이상 불분명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인 셈이다. 그것이 문서라는 합의가 명시적으로 있었던 것은 아님에도 대다수 연구자들은 거리낌 없이 문서처럼 다루게 된 것이다. 적어도 북미의 많은 연구자들에게는 그랬다. 비록 실제로 적절하게 구술성이 방법론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구술이라는 매체적 강박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것조차 고려하지 않는 연구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한데 문서로서의 Q 연구의 활성화 이면에는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폭넓게 발견된 견유철학자들에 관한 문헌자료들이 있다. 주목할 것은 견유철학자들의 기록이 어록 형식이라는 점이다. 하여 Q와 견유 철학자들의 어록은 비교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예수가 견유철학자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것이 증명되려면 팔레스티나에서 견유학파가 존재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적 증거는 없었다. 하여 연구자들은 팔레스티나가 헬레니즘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대체하였다.


 

Q의 층위학

예수상

갈릴래아 문화

종말론=묵시

후기 층위

묵시적 예언자

유대적

지혜

초기 층위

지혜교사

헬라적


팔레스티나의 헬레니즘화에 관한 가장 극단적 견해를 대표하는 영국의 제럴드 다우닝(F. Gerald Downing)의 저서 그리스도와 견유철학자1세기 전승에서 예수와 급진적 설교자들[각주:67]은 주로 문헌 자료들을 통해 팔레스티나에서 농민들조차도 헬레니즘적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한편 호슬리에 의하면, 1980년대 중반 이후 고고학 탐사는 팔레스티나의 도시화, 즉 헬레니즘화를 증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이것은 견유철학자로서의 예수상을 그리는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각주:68]

위의 표에서 보듯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자들, 특히 어록을 중요시하는 연구자들은 이원도식적인 틀을 통해 예수를 읽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원도식으로 미국사회의 보수적이고 천년왕국운동적인 그리스도교를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한 대표적인 저작은 버튼 맥의 성결의 신화: 마가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잃어버린 복음서: Q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다. 그는 복음서 속에서 예수 이후 팔레스티나에서 전개된 다양한 예수운동의 현상을 적어도 다섯 가지 찾아낸다. [각주:69]그중의 하나가 잃어버린 복음서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Q 공동체인데, 부활신학도 성찬식 신학도 없고, 제의적인 요소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세속적 요소가 매우 강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이들이 기억하는 예수는 묵시적 예언자가 아니라 지혜교사로서 카리스마적 개혁자였으며,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문화비평가 다운 면모를 보였다.[각주:70]

그런데, 성결의 신화에서 논하는 바에 따르면, 그 얼마 후 팔레스티나의 여러 예수운동들과 비팔레 스티나의 예수운동(‘그리스도 제의)을 절충하는 시도로 마가복음이 창작되었다고 그는 해석한다. 이 창작의 원리를 맥은 성결의 신화라고 보는데, 곧 무죄한 신적 존재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서사화함으로써 복음서 저자는 이제 그 압도적인 삶과 죽음 앞에 그를 따르던 이들이 펼쳤던 예수운동들의 동시대적 체험들, 그네들의 역사성을 용해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마르틴 퀠러가 거의 한 세 기 전(1892)에 말했던 마가복음확대된 수난설화에 다름 아니라는 평가를 맥은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그것을 퀠러와는 다르게 활용한다. 영웅의 죽음의 서사는 대중의 다성성(polyphony)을 전체화하는 가장 유용한 서사방식의 하나다. 그이의 죽음 앞에 각자는 자기의 소리를 멈추고 자기의 욕망을 유보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대중은 일체가 된다. 이 복음서가 그리는 예수의 삶의 이야기는 그이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의 확장에 다름 아니라는 퀠러의 공식, 맥은 그 확장을 일종의 죽음의 미학화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마가복음의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서사, 그리고 그것의 확장으로서의 삶의 서사는, 그이를 기억하고 승계했던 여러 운동들의 자기 경험을 탈맥락화한다. 하여 맥은 마가복음의 예수 서사는 후속 예수운동들에게 일종의 탈역사화를 조장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겠다.

맥의 여기서 미국사회와 교회가 갖고 있는 성결의 신화를 풍자한다. 미국의 건국신화에서 건국 초기의 숭고한 아버지들마가복음의 예수의 삶과 죽음 이야기와 오버랩된다. 즉 예수의 성결신화는 미국사회와 교회의 성결의 신화로서 번안된 것이다. 그것은 미국교회가 꿈꾸고 미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구상하는 이데올로기 속에 모든 육체들을 복속시킨다. 다인종 이민사회인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마치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로서 통합되는 것이다. 다양한 차이의 정치를 무력화하면서 말이다. 나아가 이는 국제정치 속에서도 반영되는데, 미국사회의 통합의 논리를 전 지구화하려는 레이거니즘의 이상은 교회가 꿈꾸는 세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세계의 다성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미국의 레이거니즘적 그리스도교 신앙은 동시대 미국의 비판적 지식사회가 혐의를 두고 있는 미국의 광기이고 미국 민주주의로부터의 일탈 양상에 다름 아니었다. 맥의 마가복음성결의 신 화에 대한 혹독한 비평은 바로 동시대 미국사회에 대한 풍자적 독설인 셈이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하는 사회개혁적인 지혜교사 예수상은 미국적 시민종교의 천년왕국운동적인 비전과 대립된다. 예수는 더 이 상 신의 광기, 신의 일탈의 표상일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사회를 개혁하고 패권주의를 해체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편 에드워드 샌더스(E.P. Sanders)예수와 유대교[각주:71]는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보는 유럽적 전통을 재확인함으로써 맥과 예수 세미나, 그리고 로빈슨, 클로펜버그 등과 대립하는 관점의 중심에 있는 저작이다. 그는 이 책이 저술되기 몇 년 전(1977)에 쓴 바울과 팔레스티나 유대교를 통해서, 유대주의 가 하나의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인식체계로서, ‘계약적 율법주의(covernantal nomism)를 중심으로 이미 예수 당시 유대사회를 광범위하게 통합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편다.[각주:72] 그리고 예수와 유대교에서 그는 이러한 주장을 예수의 실천과 연계시켜 정교하게 분석해낸다. 여기서 역사의 예수는 유대주의 내부의 개혁이라는 의미에서만 적절하게 해석될 수 있다.[각주:73] 요컨대 그에게서 묵시적 예언자라는 것은, 일상의 전복에 관한 담론을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헬레니즘적 개혁가가 아닌 유대주의적 사상을 가진 개혁가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예수에게서 반유대주의의 흔적을 읽어냈던 그리스도교 신학의 오래된 전통에 대해 예수는 유대교 의 개혁자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전통을 보다 야만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근본주의적인 미국교회가 역사의 예수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각주:74] 오히려 예수는 유대교의 비정상성, 그 이상으로부터 벗어난 일탈과 광기를 교정하여 정상화하려는 개혁가로서 해석하려는 것이다.

맥과 샌더스, 그리고 양자의 대립된 노선으로 양분될 수 있는 최근 영어권 예수 연구자들의 부류는 이와 같이 정반대의 견해를 편다. 하지만 동시에 양자는 두 가지 점에서 서로 인식틀을 공유한다. 하나는, 지혜가 우선적이든 묵시가 우선적이든, Q 텍스트의 형성에 대해 양자는 단선적 전개라는 도식을 공유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지혜교사로 보든 묵시적 예언자로 보든, 양자는 각자의 예수상을 통해 예수 시대의 사회통합의 합리적 가치, 그 정상성으로부터의 일탈과 광기를 교정하는 개혁가적 실천을 발견하고 있으며, 나아가 저자들의 동시대 미국교회와 사회의 일탈성과 광기를 교정하여 사회의 이상적 가치, 그 정상성을 복원하려는 성서적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 북미의 예수, 아메리카적 모던 예수 담론의 영토성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예수 담론은 근본주의적인 미국교회와, 그러한 교회의 외화된 형태인 보수주의적 미국사회를 타자로 하고 있다. 미국교회와 보수주의적 미국사회는 백인 남성주의의 외부에 대해 배타적인 광기의 사회로 변질시켰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로부터 일탈하게 했다. 개혁가로서의 예수는 그러한 광기와 일탈을 교정함으로써 정상성을 회복하게 하는 존재인 셈이다.

한데 여기에는 사회의 정상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은폐되어 있다. 이미 1960년대 말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불 같이 일어난 저항들은 2차 세계대전의 청산 담론을 지배했던 광기 혹은 일탈의 위험성의 범주를 넘어선 사회의 은폐된 배타성의 불온함에 대한 비판이었다. 오히려 일상을 통제하는 권력, 과도하게 정당화된 체계, 그 정상성의 질서에 대한 이의제기인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일단의 미국 성서학자들의 역사의 예수담론은 다시 광기와 일탈을 문제시한다. 그것은 1980년대 초부터 가시화된 미국교회의 정치세력화,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미국 보수주의의 패권주의적 행패에 대한 비판적 지식사회의 반작용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즉 앞서 말했듯이 이들 예수 연구자들의 비판담론의 타자는 1980년대적 미국교회와 미국보수주의였다. 그것은 2천년대 초 더욱 기승을 부린 미국 그리스도교와 미국적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한데 문제는 이들의 역사의 예수는 이른바 정상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핍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혜 대 묵시의 이항대립을 전제하고, 묵시 아닌 지혜에서 예수의 상을 재건하는 것을 주장하는 시각은 이러한 혐의를 더욱 짙게 한다. ‘지혜가 일상을 지속시키는 현명함에 관한 감각적 공리와 관련된다면, ‘묵시는 일상을 단절시키는 탈현재적 상상력이다. 하여 지혜적 언술의 공간이 일상의 내부라면, 묵시적 언술은 비/탈일상의 장을 상상함으로써 수행된다. 즉 지혜는 현실을 비판할 때조차 일상의 질서, 그 속에 내재된 지혜에서 근거를 찾는다면, 묵시는 현실 질서의 외부에서 오는 해체적 에너지에서 비판의 동력을 발견하려 한다. 이런 방식으로 지혜와 묵시는 현실에 개입한다.[각주:75] 그런 점에서 묵시 없는지혜는 체제 전복의 상상력을 결여한 변화, 경험의 연속성 속에서만 구상할 수 있는 비전에 그치며, ‘지혜 없는묵시는 경험을 배제한 상상으로 초대할 따름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맥이 보는 마가복음의 묵시주의에 대한 비판은 지혜 없는 묵시의 위험을 문제시하는 것이고, 그 배후에는 바로 지혜 없는 묵시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신앙이 놓여 있다. 해서 그는 Q의 전승사를 그릴 때도 묵시적 층위 이전의 지혜적 층위에서 원래의 것을 발견하고자 하며, 거기에서 예수의 역사적 소묘를 그리고자 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분석이 반대로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즉 그()묵시 없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체제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이 결여된 체제 비판이 갖는 위험성, 체제의 미학화에 대해 그 비판은 무력하며, 나아가 체제의 미학화를 위해 헌신하는 신학으로 전락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학화된 체제 속에 실행되고 있는 다양한 배제가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러한 배제의 공범자인 체제의 시민들(시민사회의) 혹은 성도들(교회의)에게 그 행위가 스스로에게 망각되게 하는 장치가 묵시 없는지혜론에서는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필경 그() 자신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지혜교사 예수 담론을 펴는, 버튼 맥을 필두로 하는 최근의 예수 연구자들에게 정상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데 많은 경우 이러한 정상성이라는 경계의 의도되지 않은외부에는 각종의 소수자들이 있다. 소수자 정치가 활발해져서 사회적 의제로 안착하게 된 경우는 예외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소수자들은 자신들을 탈주체화하는 은폐된 배제의 시스템 속에 함몰되어 있고, 하여 그들은 배제의 장치를 문제제기할 언어를 상실한 존재다. 그런데 배제의 반복적 체험과 언어 상실의 상황은 고통을 낳고 고통은 엉뚱한 곳으로 표출된다. 대개 보다 약한 이들에 대한 폭력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실어증은 이렇게 폭력 현상과 친화적이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이러한 폭력의 위악성을 응징하는 존재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 삶과 제도의 궤적은, 야만성이 적나라한 사회보다는, 야만성이 은폐된 사회, 미학화된 체제 아래서 더욱 현저하다.[각주:76]

그런데 최근 북미의 역사의 예수 연구의 많은 논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결핍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방법론적으로도 결여를 조장한다. 가령, 앞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 예수 연구자들은 Q를 중요시 하면서 그것을 문서로 취급하는 경향이 보다 노골화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를 통해 예수를 상상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문서라는 것이다. 더욱이 Q 텍스트들은 예수 어록 형식의 짧은 글묶음들인데, 각각의 텍스트에서 연구자들은 보다 오래된 층위를 발견하기 위해 묵시적 요소를 제거했다. 뿐만 아니라 대개의 어록들은 말만 나와 있고, 약간의 어록 텍스트만이 에피소드 형식의 내러티브가 포함되어 있는 데, 층위학 연구자들은 그 에피소드조차도 제거하고 말만을 남겨놓았다. 로빈슨이 주도한 Q 복원 프로젝트가 재건한 이른바 ‘Q복음이라는 문서는 바로 이런 것이다.

최소한의 의사소통의 요소조차도 제거된 짧은 말들의 모음, 이것이 Q의 원본이라는 주장이다.[각주:77] 그리고 이 지혜적 Q복음이라는 문서는 주후 5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각주:78]2성서(신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인 바울의 서신들의 연대가 50년대이니, 이 주장대로라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의 하나가 복원된 셈이다.

그런데 이런 문서를 만든 이는 누구였을까? 최소한의 의사소통의 요소마저도 없는 글모음을 보존하였다면 그들은 서기관적 지도자일 것이다. 이 시기 문자계층이 전 인구의 5% 미만이라고 한다면,[각주:79] 상위 5% 안에 드는 이가 텍스트의 저자이며, 그것도 서기관이라는 특정한 훈련을 받은 지식계층이 저자라는 셈이다. 물론 Q가설 주창자들은 대개 Q공동체를 팔레스티나, 특히 갈릴래아의 농촌공동체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갈릴래아의 촌읍에서 서기관적 말수집록을 펴낼 수 있는 엘리트가 있었다는 이례적 현상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아무튼 Q 가설의 주창자들은 대개 그것이 문헌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한편 하버드대학의 제2성서학 연구자이자 종교학자인 헬무트 퀘스터(Helmut Koester)가 구술의 예수 전승과 정전 복음서들 사이에는 정전복음서들의 토대가 된 짧은 문헌 자료들이 있었다는 주장[각주:80]을 편 이후, 이 중간 문헌가설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버튼 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결의 신화에서 마가복음의 토대가 된 몇 개의 문헌들과 그것을 생산해낸 운동들을 발견해냈다. 요컨대 최근 예수 연구자들은, 지금 까지 예수 연구들이 전제해왔던 중간 자료층을 문서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현존하는 예수 기록인 복음서 사이의 중간단계의 전승형태에서 역사의 예수를 묻는 방법을 양식비평학(form-criticism)이라고 한다. 이 연구방법은 복음서 해석 방법 중 유일하게 구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것인데, 오늘날 그것에 대한 주된 문제점의 하나는 양식비평이 구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지만, 구술 텍스트를 읽는 방법을 구술 연구자와 대화하면서 찾은 것이 아니라, 문헌 연구를 응용해서 찾았다는 데 있다. 즉 구술 연구를 문헌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북미의 연구자들은 양식비평과 비슷한 단계를 다루지만 거기에서 구술을 묻는 게 아니라 문헌을 묻고 있다. 책을 발견해야만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다는 책에 대한 강박증[각주:81]이 이유겠다.

현존하는 책을 통해 역사의 예수를 연구하다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또 다른 책을 찾아내려 한 것인데, 끊임없이 책에서 책으로, 다시 책으로 가는, 현존하는 책에서 현존하지 않는 책으로, 현존하지 않는 책을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려는 방향으로의 연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베르너 켈버(Werner Kelber)가 주장하듯이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문서이긴 하되 구술적 문서라는 특징을 갖는다.[각주:82] 구술을 채록한 문서라는 얘기다. 해서 다른 문서들에서 볼 수 없는 서사가 중심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어록 형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 역시 구술문학의 전형적 성격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 연구자들은 대개 마가복음의 구술성 여부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낳은 또 다른 책들을 묻는 것이다. 더욱이 버튼 맥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그 가상의 책이라는 것들이 모두 서사가 없거나 제한적으로만 있는 책들이다.[각주:83] 기적 모음집, 논쟁 모음집, 비유모음집 등. 구술문학의 핵심은 서사성에 있다. 즉 구술은 단위가 짧은 것이 아니라 매우 길다. 서사가 있기에, 서사를 통해서 전달자와 전수자가 소통관계에 있기에 그것이 기억되는 것이고, 그런 기억이 어느 시기부터 구술사회를 떠돌아다니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회자된다.[각주:84] 한데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에게 다가갈 보다 이른 시기의 들을 찾는 데 혈안이고, 그것도 서사성을 제거함으로써 존재하는 문서텍스트를 발견하느라 분주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글모음을 만들어낼 만한 존재는 공동체 지도자이고 특히 아무리 많아야 전 인구의 5% 미안인 서기관적 존재다. 그리고 가상의 것이라도 읽어낼 거리를 찾아내야만 예수를 알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예수의 말과 행동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이들이 채록자라면 모르되, 기적모음, 비유모음, 논쟁모음 등의 묶음집을 만들었다면 그들의 기록은 저자성을 갖는 기록이다. 구술성을 갖는 기록은 저자가 채록자의 특징을 갖는다. 즉 그이들의 저자성은 대단히 깊게 제약되고, 대중의 검열을 거쳐야만 살아남는 문헌으로 실현된다. 반면 저자성이 강한 기록은 소통보다는 특정 한 목적을 둔 지도자의 심성을 반영한다. 그들은 자기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에 따라서 의지적으로 정보를 선별하고 배열하고 각색한다.

바로 이런 선별 분류 각색을 가정한다면, 많이 잡아야 전체의 5% 미만의 지식계층에 의한 기억 속에 사회의 최저변층의 흔적은 얼마나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렇다면 연구 방법론 자체가 대중의 기억 중 상담부분을 삭제하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즉 이러한 성서학 연구 방법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 대중의 기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셈이 되며, 그나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조차도 탈 문자계층의 사회적 실어증을 은폐하는 해석 방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근 예수 연구 방법론이 담고 있는 담론의 영토성은 다분히 엘리트주의적이며, 시민사회의 바닥 혹은 바깥으로 추락한 존재를 영토 밖의 존재로 타자화한다는 얘기다.

 

맺음말: 역사비평학, 서구중심주의에 회수된 성서학

 

이상에서 나는 예수 연구사에서 역사학적 연구의 가능성이 가장 고양되던 두 시기의 연구사를 영토성의 관점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주제의 선행연구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험적 문제제기를 넘어설 수 없고, 또한 신학계 내부든 외부든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연구사적 합의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공유되어 있는 데다 연구사적 전환기의 성격이 강한 현재의 사정에서 특정 텍스트를 선정 하고 거기에서 담론의 영토성을 읽어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확장해서 연구사에 대한 포괄적인 비평으로 나아가는 익숙한방법은 적어도 이 주제에 관해서 나에게는 용이하게 포착되지 않았다. 결국 짧은 논문 하나에서 연구사 전체에 시비를 거는 무모한 시도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나는 여기서 두 시기의 역사의 예수 연구가 각각 유럽적 모던 예수와 아메리카적 모던 예수를 발견해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특히 양자가 각자의 모던 예수를 발견하는 시선의 자리를 묻기 위해 이 글은 역사의 예수 담론이 과녁으로 삼고 있는 타자를 주목하였는데, 공히 지배체제로서의 교회, 그리고 교회와 주된 소통관계에 있는 보수주의적 지배체제가 역사의 예수의 담론적 대립물이었음을 주장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연구 주체가 의도한 시선의 차원일 뿐이다. 그것으로 시선의 자리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역사의 예수 담론의 의도되지 않은 타자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학문적 메커니즘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의도되지 않은 배타주의가 배양되고 자라나는 것은 학문제도 속에서 연구 성과물이 언술화되는 방식에 주목하게 한다. 나는 두 시기의 역사의 예수 연구가 자기 시대의 특정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예수상을 발명해냈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던 예수였음을 주장하고자 했지만, 예수 역사가들은 결코 그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특정한 자기 관심의 대응물이 아닌, 시공간적인 보편적 예수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보는 역사학은, 적어도 그들의 이상 속에서는, ‘과거 사실의 재현바로 그것이었고, 그것은 유일무이한 실체였다. 그러한 존재를, 일부라도 읽어냄으로써 예수를 왜곡하는 지배적인 신앙제도에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 때로 이러한 반론은 그들에게 적지 않은 위해가 되기도 했다. 한데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교회의 예수 대 역사의 예수라는 논점은 예수 연구자들의 언술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소통하는 장을 만들어냈고, 특히 대중매체의 개입을 통해 그 파장은 적지 않다. 물론 그런 담론화가 가능할 만한 일정한 공신력을 연구자들은 가지고 있었다. 학문제도가 공인한 지위체계에서 그들은 결코 변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연구자들의 언술은 대중적인 소비 메커니즘에 의해 일정한 검열과정을 거친다. 교회의 검열을 부정한 대가는 동시에 시민사회의 검열이라는 다른 형식의 개입을 초래한 것이다. 그것을 매개한 것이 주로 대중매체였기 때문에, 미디어의 편집은 연구자들이 예수를 언술화하는 데 중요한 변수였다. 특히 최근 북미의 현상은 더욱 그렇다.

한데 예수 연구자들의 예수상이 담론화되는 데는 그들의 성과물이 학문제도 속에서 일정한 공신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학문제도 내에서 공신력 있는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그러한 지위는 그들의 주장이 담론권력을 갖는 형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학자들의 예수는 학문제도의 학문성 공증 시스템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적 공증 시스템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펴는 것은 이 글의 범위와 나의 능력을 넘어서지만, 그럼에도 이에 관한 간략한 검토가 글을 마무리하는 대목에서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본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여기서는 역사학적 성서학의 학문성을 위한 언술 형식인 역사비평학에 관해 간략한 비평적 언급을 보충하는 것으로 대신할 것이다.

우선 성서학자들의 관습에서 역사비평학의 꽃은 주석(commentary)이라는 점을 주지하자.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주석과 비평(critic)을 대조시키면서 해석을 유형화하는데,[각주:85] 이것은 역사비평학을 이해하는 데서도 유용하다. 일반적으로 역사비평학에서 비평은 주석을 위한 예비과정이거나 보조영역으로 취급되어 왔다. 간혹 비평이 주석을 해체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에도 비평은 새로운 주석을 지향하는 문제제기적 단계로 취급되곤 한다.

여기서 주석이란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밝혀내는 학문적 과정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통상 다음의 네 단계를 거쳐 수행된다. 첫째로, ‘본문비평 단계이다. 즉 텍스트를 선정하고 그 텍스트의 이본(異本)들을 검토하여 본문을 번역함으로써 선정된 텍스트를 문헌적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둘째로, 문학비평 단계이다. 이것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텍스트가 포함된 문헌의 문맥관계 속에서 텍스트의 위치를 읽어내는 것이 하나이고, 그 텍스트와 특정한 관점의 문화적 문맥을 공유하는 비교문헌들과의 문맥관계를 읽어내는 것이 다른 하나다. 셋째로, 사회역사적 비평단계인데, 텍스트의 시간적 공간적 맥락성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조명해보는 단계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검토된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자의 동시대의 문제의식과 맥락화하는 작업이다. 이것을 흔히 신학적 비평 단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역사비평학이란 이 네 단계의 작업을 포괄하여 지칭하거나, 혹은 앞의 세 단계를 가리킨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비평은 주석의 하위 개념이며, 역사비평은 그러한 여러 비평의 종합으로 주석을 수행하는 방법적 포맷을 지칭하는 용어인 셈이다.

그런데 주석 과정에서 모든 연구자들은 아키브에 의존하게 된다. 앞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주로 19세기 후반 이후 전 유럽에서, 특히 독일에서 대대적인 아키브 운동이 일어났고,[각주:86] 전문적 아키비스트(archivist)들에 의해 문서의 등록, 분류 등의 문서관리의 역할과 나아가 텍스트의 판독에 관한 서지학적 역할을 수행하는 분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아키브 현상은 성서학 연구자의 학문적 접근이 역사학과 분리될 수 없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역사비평학의 탄생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역사비평학을 통한 텍스트의 의미화라고 할 수 있는 주석은 아키브에서 분류 정리된 틀 내에서 텍스트를 재현하기 마련이다. 저명한 제1성서(구약성서) 연구자로 성서해석방법에 관한 많은 저술과 기획자로서 활약해온 진 턱커(Gene M. Tucker)는 자신이 기획한 역사적 비평 방법[각주:87]의 기획자 서문에서 잘 알려진 성서 역사비평학의 기본 공리를 이렇게 정리한다. “성서 주석의 기본 원칙은 해석자가 본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해석자는 본문이 그 해석을 결정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벤야민은 주석과 비평을 대조하면서 비평가가 연금술사라면 주석가는 화학자라고 비유하는데, 김길웅이 화학자로서의 주석가의 일을 작품 속의 단어와 그 해석에 매달려 작품의 내용을 확정짓는[각주:88]이라고 해석 한 것은 텍커의 역사비평학적 주석의 공리 설명과 서로 부합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석이 발견한 텍스트의 소리는 그 근본원리가 지향했던 대로 텍스트 자체의 본질적 의미가 아니라 텍스트가 속한 언어망 내에서의 의미에 다름 아니라는 데 있다. 미셸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각주:89]에서 이러한 주장을 펴면서, 그것을 아키브와 연계시킨다. 물론 이때 아키브는 위에서 말한 독일을 포함한 19세기 유럽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아키브 운동의 제도적 산물과 직접 대응한다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은유로 하는 담론의 제도적 합의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하지만 학문적 담론으로 한정할 때, 푸코의 담론으로서의 아키브와 물질성을 갖는 제도로서의 아키브는 보다 밀접히 연관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무리하게 단언하자면 아키브 외부의 주석은 없다.’ 반면 비평은 이와 다르다. 한편에서는 위에서 약술한 역사비평학의 각 단계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키브로 표상되는 세계의 질서를 그 질서 밖에서 보고, 그 지배적 지식의 표상체계를 경험적 현실과 분리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때 지배적 질서의 외부에서 보는 가능성에 비중을 두는 편은 변혁의 해석작업으로서의 비평을 말하고, 불가능성에 비중을 두는 편은 벤야민처럼 일종의 알레고리적해석으로서의 비평을 말한다. 이 둘 중 어느 편에서 보든 비평은 주석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성서학에서 이러한 반주석적 비평으로서의 성서해석이 부분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각주:90] 그것은 성서학 내에서 극히 소수의 주변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주석으로서의 역사비평학으로 돌아가 보자. 독일의 아키브 운동이 역사의 예수에 관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다. 예수 연구자들은 아키브의 분류틀 내에서,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각종 사전들을 통해서 1세기 팔레스티나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예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주장처럼, 19세기 유럽적 의미망의 범주 내에서 묘사되고 있고, 나는 이를 유럽적 모던 예수라고 명명했다. 바로 이 19세기 유럽적 의미망이 내포하는 담론의 영토성이, 위에서 말한 연구자들에 의해 의도되지 않은 타자의 문제가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론의 영토성과 그것을 통한 타자화의 문제제기는 역사비평학이 서구 중심주의에 회수된 성서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북미는 독일식 아키브 담론의 구성력이 훨씬 덜한 편인 데다, 학제간 연구가 활성화된 탓에 독일 성서학과 동일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 타당하지는 않다. 독일의 경우 아키브의 형성은 거의 전적으로 국가에 의존하였다. 그런 점에서 담론적 질서는 유럽의 국가간 관계의 망과 보다 깊이 연루되었다. 반면 북미의 학문시장은 보다 다양한 요인들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탈중심적 특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아키브에 의존하는 연구자들의 학문성의 규율 시스템도 다중적이며, 연구 경향도 다중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중성이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네트워킹되어 있다. 유럽의 국립중앙문서고 형식처럼 일사불란한 분류체계를 갖는 지식의 네트워킹은 아니지만,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처럼 다중적이고 혼란스럽지만 언표 간에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네트워킹되는 의미망은 다중적이지만 또한 서로 얽히면서 형성되어 가는 영토성을 지닌다.[각주:91]

하여, 국가에 의존하였든 그밖의 다른 연구기금과 메커니즘에 의존하였든 학문시장은 예수 연구자의 역사적 상상력을 제약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그러한 학문성에 내장된 제약에서 우리는 학문의 서구 중심주의를 본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예수 연구는 서구 중심주의적인 영토성의 경계 내에서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중심 논지다.

  1. W. Barnes Tatum, In Quest of Jesus: A Guidebook (SCM Press, 1982). [본문으로]
  2. The Interpretation of the New Testament 1891~1961 (Oxford: OUP, 1986); N.T. 라이트, 〈역사의 예수 연구사— ‘고전적 질문’, ‘새로운 질문’, 제3의 질문‘을 중심으로〉,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1996) 참조. [본문으로]
  3. M. 보그,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참조. [본문으로]
  4. 같은 글, 89쪽. [본문으로]
  5. 같은 글, 89쪽. [본문으로]
  6. 같은 글, 86~89쪽 참조. [본문으로]
  7. 김기봉, 〈역사란 무엇인가—E.H. 카의 역사관을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시론〉,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푸른 역사, 2000) 참조. [본문으로]
  8. 그녀의 논문 〈정치와 공간⋅시간〉, 《공간과 사회》 7(1996.4).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Space, Place and Gende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4) 참조. [본문으로]
  9. 문학과지성사 2001, orig. 1947. [본문으로]
  10. 조지 이거스, 임상우 김기봉 옮김, 《20세기 사학사》 (푸른역사, 1998), 52쪽. [본문으로]
  11. 같은 책, 54쪽. [본문으로]
  12. 문학동네 1998. [본문으로]
  13. 이 글의 영역본인 “Consisting of Brief Critical Remarks on the Object of Jesus and His Disciples as Seen in the New Testament” (Charles Voysey 옮김, 1879)을 참조(http://www.archive.org/details/fragmentsfromrei00reim). [본문으로]
  14. N.T. 라이트, 박문재 옮김,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4), 49쪽. [본문으로]
  15. A. 쉬바이처, 《예수의 생애 연구사》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orig. 1906. 원제는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 37쪽. [본문으로]
  16. 종교개혁기 유럽에서 일어난 천년왕국운동의 폭력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연구로 노만 콘, 김승환 옮김, 《천년왕국 운동사》 (한국신학연구소, 1993) 참조. [본문으로]
  17. David Friedrich Strauss, Das Leben Jesu kritische bearbeitet (1835/1936). [본문으로]
  18. Ernest Renan, Vie de Jesus (1863). 이 책의 한글 번역본은 최명관 옮김, 《예수의 생애》(훈복문화사, 2003). [본문으로]
  19. A. 쉬바이처, 《예수의 생애 연구사》, 96쪽. [본문으로]
  20. 르낭, 《예수의 생애》에 수록된 옮긴이의 머리말(8쪽). [본문으로]
  21. 같은 책, 188쪽. [본문으로]
  22. 조지 이거스, 《20세기 사학사》, 50쪽. 이 두 저자와 동시대에 독일 기록학의 발전에 관하여는 노명환, 〈19세기 독일 의 역사주의 실증사학과 기록관리 제도의 정립—랑케, 지벨, 그리고 레만과 출처주의-원질서 원칙〉, 《기록학연구》 14(2006 10) 참조. [본문으로]
  23. 전근대사회의 문자의 특성에 관하여는 윌리엄 슈니더윈드,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에코리브르, 2006), 49~86쪽 참조. [본문으로]
  24. 전근대사회에서 기록으로서의 ‘정보의 저장 능력이 권력의 형성과 밀접한 영향을 가진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안토니 기덴스, 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나남, 1991), 125~127쪽 참조. [본문으로]
  25. 쉬바이처, 《예수의 생애 연구사》, 583쪽. [본문으로]
  26. 신행선, 〈에르네스트 르낭의 인종과 인종주의〉, 《서양사론》 73(2002) 참조. [본문으로]
  27. 김재현, 《Q의 예수 이야기》 (한국학술정보, 2009), 26쪽. [본문으로]
  28. 쉬바이처, 위의 책, 136~150쪽 참조. [본문으로]
  29. Heinrich Julius Holtzmann, Die Synoptischen Evangelien: Ihr Ursprung und ihr geschichtlicher Charakter (1863) [본문으로]
  30. 김재현, 앞의 책, 27쪽. [본문으로]
  31. 게르트 타이센 & 아네테 메르츠, 손성현 옮김, 《역사적 예수—예수의 역사적 삶에 대한 총체적 연구》 (다산글방, 2001), 35쪽. [본문으로]
  32. Martin Kähler, The so-called historical Jesus and the historic, Biblical Christ, tr. by Carl E. Braate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6), p. 80의 주)11. [본문으로]
  33. William Wrede, Das Messiasgeheimnis in den Evangelien (1911) [본문으로]
  34. 황성규, 〈서평: W. Wrede, Das Messiasgeheimnis in den Evangelien〉, 《신학연구》 14(1973.6) 참조. [본문으로]
  35. 김창락, 〈예수와 민중운동〉, 그의 책 《새로운 성서해석과 해방의 실천》 (한국신학연구소, 1990), 134쪽. [본문으로]
  36. 조지 이거스, 《20세기 사학사》, 55쪽. [본문으로]
  37.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를 대표하는 두 권의 저작, 슈트라우쓰와 르낭의 저작은 공히 제목이 ‘예수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를 ‘예수전 시대’라고 부르곤 한다. [본문으로]
  38.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 1995) 참조. [본문으로]
  39. Hans Blumenberg, The legibility of the world (1979). 임우영 외, 〈한스 블루멘베르크 : 책의 세계와 세계의 책〉, 《미학 연습—미학적 생산 질서 수용》 (동문선, 2004); 최문규, 〈다양성과 심미성: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학의 이해〉, 《문학이론과 현실인식—낭만주의에서 해체론까지》 (문학동네, 2000) 참조. [본문으로]
  40. 김학이,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 《서양사연구》 33(2005) 참조. [본문으로]
  41. R. 불트만, 허혁 옮김, 《신약성서신학》 (성광문화사, 1976; orig. 1948~53), 1쪽. [본문으로]
  42. Ernst Käsemann, “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 in Essays on New Testament Themes (London: SCM, 1964). [본문으로]
  43. 제임스 M. 로빈슨, 소기천 옮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살림, 2008; orig. 1959). [본문으로]
  44. 저명한 성서 서지학자인 Carsten Peter Thiede와 서지학 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인 Matthew d'Ancona가 공동저술 한 《신의 파피루스》 (청림출판, 1996)[원제는 Eyewitness to Jesus]; 그리고 성서 서지학을 공부한 대중작가 Earl Doherty의 《예수 퍼즐 1 & 2》 (씽크뱅크, 2007)[원제는 The Jesus Puzzle: Did Christianity Begin with a Mythical Christ?] 등. [본문으로]
  45. 독일의 성서학자인 볼프강 슈테게만(Wolfgang Stegemann)은 1978년 이래 지금까지 단행본 개인저작 3권, 공저 2권, 엮음집 2권을 펴냈고, 아티클은 총 11편에 불과하다. 그는 독일에서 특별히 다작의 연구자도 아니고, 저작이 평균에 못 미치는 연구자도 아니다. 한편 카나다의 존 클로펜보그(John Kloppenborg)는 1978년 이래 단행본 개인저작이 8권이고 공저가 4권이며, 아티클은 거의 백 편에 달한다. 그 역시 북미에서 특별히 글이 많거나 부족한 저자가 아니다. [본문으로]
  46. 정전복음서 네 권과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된 문서 중 하나인 〈토마복음〉을 역사의 예수 연구 의 핵심 문서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특히 북미 학자들에게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47. 이 연구 결과는 1993년 Robert W. Funk, Roy W. Hoover, and the Jesus Seminar, 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Nve York: hecmillian Publishing Company)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74명의 연구자가 이 작업의 공동연구자로 이름을 등록했다. 한편 이 프로젝트의 두 번째 과제는 ‘예수의 행적’에 관한 것으로 1991~ic W년까지 수행되었고, 그 결과가 Robert W. Funk and the Jesus Seminar, The Acts of Jesus—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 of Jesus (HarperSanFrapeiselntic 8)로 출간되었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1996~1998년까지 앞의 두 프로젝트에 기초하여 14명의 학자들이 ‘예수의 프로필 만들기’를 시도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다. Roy W Hoover, ed., Profiles of Jesus (Polebridge Press, 2002). [본문으로]
  48. 톰 라이트는 연구사에 관한 정리를 하면서 예수 세미나의 접근 방법을 실증주의로 규정하면서 그것은 ‘새로운 탐구’ 시대의 죽어버린 방법론에 지나지 않았음을 비평한다. 해서 그는 예수 세미나를, 거기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분류와 분리하여, ‘새로운 탐구’ 시대의 유물로 분류한다. N.T. 라이트, 《역사의 예수 연구사》 , 29쪽. 한편 실증주의적 방법의 시대착오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의 책, 박문재 옮김,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3), 제2부에서 상세하게 비평하고 있다. [본문으로]
  49. 로버트 펑크, 김준우 옮김,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451쪽. [본문으로]
  50. 조태연, 〈“학자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신약학 논의의 최신 동향〉, 《신학사상》 95(1996 겨울), 170쪽 참조. [본문으로]
  51. 웨스타 연구소에 대하여는 http://www.westarinstitute.org/ 참조. [본문으로]
  52. IQP는 클레아몬트 대학의 고대기독교연구소가 주관한 연구 프로젝트이다. 이 연구 성과는 소기천에 의해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소기천, 〈예수말씀 복음서 Q—서론, 본문번역, 해설〉, 《성경원문연구》 5(1999.8) [본문으로]
  53. The Historican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1991). [본문으로]
  54. Myth of Innocence: Mark and Christian Origins (Fortress Press, 1988). [본문으로]
  55. The Lost Gospel: The Book Q and Christian Origins (Macmillan Co., 1993). [본문으로]
  56. 1994년 미국성서문학협회(SBL)의 ‘Q 연구분과’는 버튼 맥의 《잃어버린 복음서》를 다루었는데, 무려 1400명 정도 되는 연구자가 운집하였다고 한다. 조태연, 〈“학자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신약학 논의의 최근 동향〉, 《신학사상》 95(1996 겨울), 168쪽 주11). [본문으로]
  57. 그가 기획한 주목할 만한 다른 기획으로 Jesus at 2000 (Westview Press, 1998)이 있다. 이 책은 남정우에 의해 《예수, 2000년》(대한기독교서회, 2003)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58. Marcus J. Borg & N.T. Whright, The Meaning of Jesus: Two Versions (HarperSanFrancisco, 1999). 이 책은 김준우에 의해 《예수의 의미. 역사적 예수에 대한 두 신학자의 논쟁》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59.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명문대학에 재직하거나 학문적 성과가 뛰어난 저명한 학자들이 아니라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논평의 글인 Richard B. Hays, “The Corrected Jesus”, First Things: A Monthly Journal of Religion and Public Life 43(May1994) 참조. [본문으로]
  60. 예수 세미나에 대한 짜임새 있는 소개와 논쟁에 대하여는 마크 앨런 포웰, 〈예수 세미나〉, 《신학사상》 110(2000 가 을) 참조. [본문으로]
  61. 마커스 보그, 〈오늘날 북아메리카 학계의 예수 그리기〉, 《예수 르네상스》, 113쪽. 종말론 합의가 붕괴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새로운 합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견해는 다소 과장된다. 그럼에도 제3의 탐구를 이 끄는 특징적인 연구들이 그렇다고 보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물론 이 말은 제3의 탐구를 특징짓는 연구가 더 학문적이고 더 크리틱하다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62. 반면 유럽권에서 종말론 논의는 좀더 복잡하다. 요하네스 바이쓰(Johanes Weiss, 1863~1914)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지속적 종말론’ (Consistant Eschatology), 찰스 닷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의 ‘실현된 종말 론’(Realized Eschatology),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Existential Eschatology), 큄멜(Werner Georg Kümmel, 1905~1995)의 이중적 종말론(Dual-Eschatology) 등, 유럽의 연구자들은 저마다 종말론의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다. [본문으로]
  63. Michael Lienesch, “The The Role of Political Millennialism in Early American Nationalism”, Political Research Quarterly 36/3(1983); 톰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82쪽. [본문으로]
  64. John S. Kloppenborg, The Formation of Q—Trajectories in Ancient Wisdom Collectio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본문으로]
  65. 가령 디벨리우스는 Q의 문학적 장르를 묻는데, 이때 그 장르는 문자로 된 텍스트의 그것처럼 다루어질 뿐이고, 구술이라는 매체적 차이는 그의 설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본문으로]
  66. 양식비평은 구술 전승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반면 최근 북미 연구자들 가운데는 민속학과 인류학, 매체학 등의 연구 성과를 활용하여 구술 연구에 관한 진일보를 이룩하였는데, 특히 예수 어록 연구에서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R.A. Horsley, Oral Performance Tradition, and Hidden Transcript in Q (Leiden/Boston: Brill, 2006). 그러나 중요 한 성과임에도 그의 연구는 대다수의 신약 연구자들에 의해 외면당했다. [본문으로]
  67. F. Gerald Downing, Christ and the Cynics—Jesus and other Radical Preachers in First-Century Tradition (Sheffield: JSOT Press, 1988). [본문으로]
  68. 리처드 A. 호슬리, 《갈릴리: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 82~83쪽. [본문으로]
  69. 맥이 말하는 다섯 가지 팔레스티나의 예수운동들은 회당개혁운동, 새 이스라엘 운동, 예루살렘의 세 기둥, 예수의 형제들, 그리고 Q 공동체이다. 그리고 비팔레스티나, 특히 헬레니즘 문화권의 예수운동으로 ‘그리스도 제의’가 있었다. [본문으로]
  70. ‘무정부주의적 문화비평가다운’이라는 표현은 김덕기의 표현이다. 김덕기, 〈마가복음의 비유들(4,1~34)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비평—예수 예수운동 마가의 구조론적 연관성에 관한 탐구(II)〉, 《신약논단》 3(1997), 25~26쪽. [본문으로]
  71. E.P. Sanders, Jesus and Judaism (SCM Press, 1985).[이정희 옮김, 《예수운동과 하느님나라》 (한국신학연구소, 1997)] [본문으로]
  72. E.P. Sanders, Paul and Palestine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1977). 이에 대해 또 따른 유대주의 연구의 대가인 제이콥 노이스너(Jacob Neusner)는 예수 당시는 아직 유대교가 포괄적인 의미의 사회통합의 장치로 작동하기보다는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했다는, 이른바 ‘형성과정의 유대교’(formative Judaism)라는 주장을 편다. 그의 책 Messiah in Context. Israel's History and Destiny in Formative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1984) 참조. [본문으로]
  73. 버튼 맥의 예수는 보다 세속적인 사회적 개혁가라면, 샌더스의 예수는 종교정치적 개혁의 의미가 더 강하다. [본문으로]
  74. 로즈메리 류터, 장춘식 옮김, 《신앙과 형제 살인—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 (대한기독교서회, 2001) 참조. 타이쎈의 메타적 연구는 이러한 반유대주의가 제2성서의 해석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 포괄적인 구상을 잘 보여준다. 타이 쎈, 〈유대교와 기독교—바울에게서 시작된 두 종교의 분열에 대한 사회사적 고찰〉, 《신약논단》 13/4(2006 겨울) 참조. [본문으로]
  75. 나의 책 《예수 역사학—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 (다산글방, 2000), 63~66쪽. [본문으로]
  76. 나의 글 〈고통의 치환, 그 가학성의 근거에 대하여〉 in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생각의 나무, 2005) 참조. [본문으로]
  77. R.A. 호슬리, 《예수와 제국.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100쪽. [본문으로]
  78. The Five Gospels, p. 18 [본문으로]
  79. 볼프강 슈테게만과 에케하르트 슈테게만은 게하르트 렌스키를 따라 고대지중해 사회의 귀족집단과 가신집단을 포함 한 상위계층 인구의 비가 전체의 1~5%이라고 가정하고 있는데, 이 비율은 문자 사용층의 비와 거의 유사할 것이다. W. & E. 슈테게만, 손성현 옮김, 《초기 이스라엘의 사회사—고대 지중해 세계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동연, 2008), 131~138쪽 참조. [본문으로]
  80. Helmut Koester, "Gnomai Diaphoroi: The Origin and Nature of Diversification in the History of Early Christianity", Harvard Theological Review 58 (1965) [본문으로]
  81. 앞에서 인용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이것은 ‘책이라는 은유’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82. Werner H. Kelber, The Oral and the Written Gospel. The Hermeneutics of Speaking and Writing in the Synoptic Tradition, Mark, Paul, and Q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3장 참조. [본문으로]
  83. 그의 이러한 주장은 Q 연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인데, 김재현이 잘 정리하고 있듯이 최근의 Q 연구사는 Q 텍스트 에서 내러티브를 삭제해 가는 과정이었다. 김재현, 《Q의 예수 이야기—최초의 내러티브 신학을 찾아서》 (한국학술정보 2009) 참조. [본문으로]
  84. G. 타이센,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 말씀 전승에 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 김명수 옮김,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05~106쪽 참조. [본문으로]
  85. 김길웅, 〈미적 현상과 시대의 매개체로서의 알레고리—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비평과 이론》 14(1997, 가을-겨울), 198~200쪽. [본문으로]
  86. 김영애, 〈독일의 아키비스트 양성제도-마르부르크 기록학교를 중심으로〉, 《기록학연구》 2(2000.10); 김현진, 〈독일 기록관리 담론에서의 평가론〉, 《기록학연구》 14(2006.10); 노명환,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 실증사학과 기록관리 제도의 정립. 랑케, 지벨 그리고 레만과 출처주의/원질서 원칙〉, 《기록학연구》 14(2006.10) 등 참조. [본문으로]
  87. Edgar Krentz, The Historical-Critical Method (Fortress, 1975). 이 책은 김상기 옮김, 《역사적 비평 방법》 (한국신 학연구소, 1988)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88. 위의 글, 199쪽. [본문으로]
  89.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2000), 3장 참조. [본문으로]
  90. 성서 속의 인물을 다루는 곧 출간될 나의 책 《성서 속의 인물들—역사와 반역사》(가제; 삼인)은 이러한 ‘반주석으로서의 비평’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성서 설화의 중심성과 주변성을, 텍스트 내적인 정보를 재황용함으로써,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반주석적 비평을 시도하였다. [본문으로]
  91. Mark Poster, "Contingency, Reflexivity, Postmodernity: The Mode of Information and Postmodernity." in David Crowley and David Mitchell, eds., Communication Theory Today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