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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풍요의 신학, 어디까지 가능한가? - 초기 예수운동의 세 사례를 중심으로

이 글은 대화아카데미에서 개설한 <성서의 역설적 쟁점 - 신약편>의 마지막 발제글로 지난 2008년 12월 6일 바람과물연구소에서 있었던 모임 때에 발표된 것입니다.
이때 논평은 구미정 선생과 장윤재 선생이 했고, 여기에는 구미정 선생의 글을 첨부해 놓습니다.

이 글은 후에 차정식 교수의 제안으로 한일장신대학 논문집인 [신학과 사회] (2009년)에 게재되었습니다.
학술지에 게재되려면 논문 작성 양식에 따라야 하기에, 원래 발표된 글에서 국문초록, 영문초록, 참고문헌 등의 항목을 첨가하였습니다.

제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처음 올리는 글인데, 구미정 선생의 논평글과 함께 여기에 올립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탁월한 언어구사력과 사고력으로 제 글에 대해 훌륭한 논평을 해 주었습니다.

구미정_논평-김진호의 (풍요의 신학 어디까.pdf

풍요의 신학 어디까지 가능한가_신학과사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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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신학, 어디까지 가능한가?

초기 예수운동의 세 사례에서 빈곤의 문제를 중심으로

 

 

 

머리말

강준민 목사는 최근 저서 풍부의 법칙(2007)에서 신앙의 원리로 풍요의 법칙을 주장하였다. 타인을 풍요롭게 하면 자기 자신도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실화인지 가상의 얘기인지 모르는, 수많은 사례들이 그 논지를 보충하고 있는데, 이 일화들은 대체로 풍요의 법칙에 따르는 행위는 물질적으로도 보상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실현되지 못하지만, 그는 그것을 확신한다. 왜냐면 신이 보증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낙관주의적 신앙관의 배후에는 긍정의 힘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레이크우드 교회(Lakewood Church)의 목사 조엘 오스틴이 있다. 한때 열광적으로 수용되었던 낙관주의적 신앙의 콤비인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조용기의 조합과 조엘 오스틴-강준민-두란노의 조합이 논리상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순복음교회와 온누리교회로 표상되는 각각의 이미지를 상상하면, 한국 근대화 과정과의 접속 지점에서 일정한 차이를 읽어낼 수는 있다. 전자가 돌진적 근대화(rush-to modernization) 시대 한국교회의 성장 담론과 관련이 있다면, 후자는 민주적 근대화(democratic modernization) 시대의 교회성장 담론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미국발 근본주의적 낙관론이 한국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는 한국교회의 지배적인 신앙적 기조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초점이 있다. 먼저, 이것이 어떻게 한국교회의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보고, 다음 절에서 복음서 속에서 풍요와 빈곤에 관한 초기 예수 신앙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교회가 성서 전통과는 다른 신앙을 형성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자본 친화적인 성취지향성의 역사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공주의

 

근본주의적 성공주의가 한국교회의 지배적인 신앙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비롯되었다.[각주:1] 그해 1월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여 시내 전역으로, 나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4월까지 계속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계기적 사건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실은 이미 1904,5년경에 관서지역에서 예사스럽지 않은 교인수의 증가가 포착된다. 이는 러일 전쟁과 이 시기 교인수의 증가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평안도 지역을 통해 진군했던 일본 군대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에 대한 폭력은 당시 종군기자들에 의해 타전된 기사들에서 간간히 발견된다. 또한 10년 전에 그 지역에서 벌어진 청일 전쟁은 예감된 폭력에 대한 민간인의 과민반응을 야기했다.[각주:2]

이렇게 예감된 혹은 체험된 폭력의 상황에서 평안도 지역의 수많은 대중이 미국선교사들이 지키고 있던 교회로 피신해 들어갔다. 여기에 당시 교회는 쌀, 설탕 등 물량공세로 도탄에 빠진 대중을 흡수하려 했다. 이것이 이 시기 대중이 교회로 몰려들어온 이유겠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많은 연구자들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기도회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벌어진 영적 각성운동이었음을 강조한다. 선교사들이 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선례를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토록 열렬한 기도회가 선택되고 진행된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평양에서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찾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겠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가 선교사들의 비망록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 이 글들은 기도회의 효과로 열광적인 죄의 자복 현상이 일어나고 이것이 도덕재무장 운동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요컨대 그 배후에는 도덕적인 아노미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심각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왜 당시 평양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도덕적 아노미가 심화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두 차례의 전쟁이 사람들의 심성에 새겨놓은 깊은 상처를 떠올리게 된다.

요컨대 평양대부흥운동은 주로 전쟁의 여파로 갈등이 심화되던 교회의 병리적 현상이 종교적 체험을 통해 해소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일체의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코딩되어(coded) 담론화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교회가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단일대오로 뭉치면, 그리하여 기도에 열심을 기울이고 배타주의적인 도덕성을 실행에 옮기며 살아가노라면 하느님이 현세의 축복으로 보상해준다는 스토리라인을 따라 서사화된 것이다.

 

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기 교회의 성공의 제도화

 

식민지 말기 전시체제 하에서 움츠러들었던 교회는 미군정 치하에서 다시 활기를 찾는다. 당시 교회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엘리트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남한사회에서 미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집단이었다. 거꾸로 미군정 당국에게도 남한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사회적 집단은 다름 아닌 개신교회였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갖가지 특혜로 이어졌다. 특히 일본인이 철수한 뒤 남은 일본의 종교시설의 처리 과정에서 막대한 종교재산을 군정청으로부터 공정한 절차 없이 양도받았다. 또한 미국 선교부로부터 많은 기부금을 받음으로써 교회는 당시 피폐한 남한 사회에서 가장 안정된 사회세력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한편 1948년 성립한 제1공화국은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로 보일만큼 온갖 특혜를 기독교에 주었다. 또한 미국 선교부의 지원 또한 막대했다. 해서 어느 종교보다도 국가권력에 대한 접근성이 높았고, 국가의 통제로부터도 더 자유로웠으며,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강력했고, 그로 인해 복지혜택도 압도적으로 높았다.

종합적으로 이 시기 남한의 개신교는 교인수가 25%의 성장을 이룩했고, 정계 재계 학계 등 사회 엘리트 분포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세속적 성공이 정비례하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돌진적 성장기, 교회성장신학의 발견

 

1970,80년대 한국사회가 고도성장을 이룩할 무려, 한국교회도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한 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대형화에 성공한 몇몇 교회들이 등장하였는데, 이 또한 전 세계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각주:3]

그런데 이 시기 한국교회의 성공은 대대적인 이농민을 흡수한 도시교회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시기 한국사회의 이농정책은 대단히 폭력적인 산업화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특히 서울 같은 초대형도시는 갑작스레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기반시설이나 주택을 갖추지 못하였고 노동 환경도 매우 열악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사회적 안전망은 말할 것도 없다.

성장을 위한 총력전에 몰두하고 있던 국가로서는 이런 사회적 악조건을 개선할 여력이나 의지가 없었고, 단지 급속도로 성장하는 국가의 발전수치를 들이밀면서 미래의 비전만을 약속할 뿐이었다. 물론 계엄 상황에 준한 엄격한 통제 장치를 가동시켜야만 이러한 비인간적 발전주의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이런 폭압적 상황 아래서 국민은 각자 자신과 가족의 삶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특단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교회는 일정한 사적 안전장치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이는 주로 다음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절에 비교적 안정된 물량적 토대가 구축된 데다, 서구사회 특히 미국 선교부에서 유입되는 지원금으로 교회는 당시 사적 안전장치를 가동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민사회적 단위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 요인으로, 엄격한 강제력을 활용하지 않고도 대중을 포섭할 수 있는 미래의 비전 형성이 국가보다 훨씬 유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위에서 보았듯이 한국교회는 명백한 성공신화를 중심으로 신앙적 제도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성공담론을 미래 비전으로 구성하는 것이 당시 한국사회의 어느 단위보다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세계 최강대국이자 최고의 우방국이라는 미국과 깊게 연계된 사회적 세력인 덕분에 대중에게 교회의 성공담론이 갖는 사회적 설득력은 매우 강력했다.

이 두 번째 요인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시기 미국에서 발전하고 있던 이른바 교회성장학’, 특히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적극적 사고(the Positive Thinking)와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가능성 사고(the Possibility Thinking) 등의 표현이 담고 있는, 자본주의적 성장과 신앙의 성장을 심리적으로 동일시하는 미국발 신흥 신학 담론이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급속하게 대형화된 한국 교회들의 성공 신앙은 신학적 언어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다수의 서민계층뿐만 아니라 지식엘리트층에까지 설득 가능한 자기 언술체계가 바로 이 시기에 한국교회를 둘러싼 성공주의 담론의 내용과 형식을 구성하게 되었다.

한편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폭력적 근대화 과정에 취약한 계층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교회로서 물리적 성장에 대한 적극적 태도만을 강조하는 것은 신앙제도로서 그 가치를 충분히 평할 수 없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시기 자본 친화적인 적극적 사고와는 대립되는 요소가 한국교회의 주요 특징을 이루고 있다. 다름 아닌 기도원 현상이다. ‘적극적 사고가 자신의 열악한 사회적 삶의 여건을 능동적으로 개척하여 세속적 성공을 이룩하는 것에 관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삶의 장치라면, ‘기도원 신앙은 그러한 현실의 가혹함에서 일시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영적인 여백의 장치로서 기능하였다. 얼핏 이 둘은 모순적인 듯이 보인다. 실제로 부분적으로 양자 사이의 불협화음이 적지 아니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원 담론은 자본주의로부터의 영원한 도피성의 역할보다는 산업역군이나 선교역군으로 살아가는 적극적 사고의 주인공들을 향한 일시적인 영적 휴양지같은 담론 효과를 내포했다. 하여 돌진적 성장기 한국교회의 성장주의의 제도화는 신화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시기, 교회성장신학의 미학적 재구성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성장은 현저히 둔화된다. 이 시기 한국사회의 지배담론이 된 민주화 담론은 지난 돌진적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기의 근대화 양식의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상징처벌들이 청산의 담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부정적 태도가 활성화된 것은 바로 이러한 청산 담론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빠르게 확산된 시민사회의 비판적 시각과 맞닥뜨리면서 교회 신자들 다수는 신앙적 동요를 체험하게 된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체제로의 이행이라는 변화의 타당성에 수긍하는 이 시대의 공통감각이 체화된 사람들에게 교회는 너무 지체된 근대성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에서는 낡은 교회적 행태가 도처에서 퇴행적으로 표출되지만,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양식으로의 구조조정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선발대형교회에서 후발대형교회로의 성장모델의 재구조화가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때로는 다소 느리게, 때로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후발대형교회 모델의 특징은 지난 시기 신앙의 맹목적 성장주의를 비판하고 윤리와 성장주의를 결합한, 이른바 깨끗한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풍요(강준민)라는 말을 쓰든 청부(淸富)(김동호)라는 말을 쓰든 그 함의 속에는 돌진적 성장이라는 단순 물량주의적 성장보다는 질적 요소가 담보된 양적 성장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질적인 성장론은 계층 편향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중상위계층의 가치관이 저 깨끗함의 실재 내용을 과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난 시절의 대규모 이농 현상 시기이농자들의 대대적인 흡수를 기반으로 해서 발전했던 교회의 성장모델과는 다르다. 그것은 계층 안정성이 급속도로 강화된 시기에 중상위계층을 중심으로 성장담론을 구축하는 교회들이 주도하는 대안모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성공은 실현하고픈 욕망의 영역이었다. 반면 여기서의 성공은 이미 주어진 존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신앙은 그러한 존재의 조건을 미학화하는 종교적 장치인 셈이다. 그것은 다시 시민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구별짓기로서 기독교인의 주체화를 재강화한다. 이들 후발대형교회의 모델이 보다 수준 높은 픔격을 강조하는 신앙과 삶의 미학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종교적 구별짓기가 문화적 구별짓기 장치로서 작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신앙은 이렇게 풍요를 미학적으로 제도화한다.[각주:4] 그것은 욕망보다는 체험의 차원에서 실현되는 것이고, 열악한 자본주의적 생태학에서 엿보이는, 아등바등하는 생존전략으로서의 성장주의와는 차별화되는, 품격 유지비용을 감수하는 성장을 옹호하는 신학 담론이다. 한편 이런 후발대형교회 모델에는 더 이상 과거 기도원 담론 같은 상처받은 이들의 도피구가 자리잡을 곳이 없다.[각주:5] 대신 실존적 상처를 봉합하는, 이른바 목회상담의 공간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상처나 실패의 문제가 개체적 실존의 문제로 환원되어 심리적 돌봄의 영역으로 대체되고 있는 현대 심리학의 현상과 궤를 같이한다.[각주:6]

이상과 같이 한국교회는 1907년 이래 세속적 성공을 신앙적 풍요와 동일시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그때마다 논리와 형식은 다소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일관된 발전 도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주의는 미국발 근본주의적 경영담론인 교회성장학을 한국교회의 시대사적 맥락과 연계시켜 재해석하여 수용함으로써 신학적 체계로서 세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주의적인 신학적 주체화의 경향은 한국교회가 실패에 대한 담론이 지나치게 결핍되어 있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

 

 

초기 예수운동에서 풍요와 결핍

그렇다면 초기 예수운동에서 풍요와 결핍이 다루어지는 기조는 어떠했을까?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주도한 예수운동을 마가복음을 통해 조명해보고, 부와 빈곤에 관한 상반된 시각을 노정하고 있는 두 공관복음 텍스트인 누가복음마태복음을 낳은 후속 예수운동을 비교하여 살피고자 한다.

 

예수 자신의 예수운동

 

예수 자신의 예수운동을 조명하기 위해 이 글은 마가복음을 주목한다. 그것은 이 텍스트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구술성이 강한 텍스트라는 전제에 기초한다.[각주:7] 이는 문서 전승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의 예수에 관한 연구와는 인식론적인 접근 자체가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일찍이 타이쎈(G. Theissen)이 언급한 바 있듯이, 전달자가 문어(文語)가 아니라 구어(口語)로 전달하는 경우, ()의 말이 전승자의 행위와 부합하지 않으면 전승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각주:8]

그러나 타이쎈의 이러한 구술연구의 활용은 구술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설화텍스트가 아닌,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예언자(Wander Karismatiker)들이 전한 일부 어록 텍스트에 한정되었다.[각주:9] 반면 이러한 구술전승에 관한 논의를 안병무는 구술문학인 마가복음에 적용한다. 이를 위해 그는 민중언어로서의 유언비어(rumor)와 그것의 집단적 전달자(연행사건 performance-event)로서의 오클로스(οχλος)라는 견해를 제기한다.[각주:10] 이것은 예수사건을 목도한 최초 전승자 가운데 한 부류인 오클로스(‘예수사건의 담지자인 오클로스’)마가복음전승의 형성자인 해석의 주체로서의 오클로스(‘예수사건의 해석자인 오클로스’), 그리고 그 사이를 중개한 전달자로서의 오클로스라는 예수 전승의 한 계보를 통해 예수와 이 복음서 간의 연계성에 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요컨대 (계층적) 체험의 유사성이 기억의 유사성을 낳았다는 명제를 도출함으로써,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한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자신이 주도한 예수운동의 풍요와 빈곤에 관한 이해를 마가복음을 통한 비평적 논의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다가와 겐조(田川健三, 1935~ )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1965)에서 마가복음에서의 오클로스가 독특한 용법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는데, 이들은 존재의 영역에서 뿌리 뽑힌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안병무는 이것을 귀속성의 박탈(deprivation of attribution)이라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면서, 역사의 예수 연구에 적용하였다. 나는 이 귀속성 박탈의 관점을 촌락사회 회당의 안과 밖이라는 구조주의적 시각으로 재정의하여, 유대사회의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촌락회당의 기능과 역할을 중심으로 해석하였다.[각주:11]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는, 예수가 회당 안에서 바리사이와 정결례 문제로 충돌한 이후 더 이상 마을 안에서 공공연히 활동하는 게 제약되자(마가 3:6) 대안적 활동공간으로 선택된 호숫가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즉 그들은 마을 안보다는 밖에서 더 자주 등장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을 안의 설화에서 발견되는 경우에도 회당 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촌락 질서의 상징적 중심인 회당의 외부에 오클로스라는 존재의 담론적 자리가 있다는 얘기다. 요컨대 촌락회당의 이상적 가치 준거에서 볼 때 촌락사회는 회당 질서에 포섭된 사람과 배제된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촌락 안의 대중을 지칭하는 전용어가 마가복음 안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인용구에서 단지 두 번 등장하는 헬라어 라오스(λαος. ‘백성’; 7:6, 14:2)1성서(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암하아레(am-ha-arez)가 전형적인 촌락 내부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공동체 내부를 강조하는 용어라면, 후자는 땅에 귀속된 존재를 뜻한다.[각주:12] 아무튼 이들은 공히 공동체에 귀속된 존재다. 촌락회당은 거시 결속체인 이스라엘과 미시 결속체인 촌락민 개념을 연결하는 유대적 주체의 자리라는 함의를 갖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의 삶에서 촌락의 안과 밖은 그리 명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농경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듯이 경계선에서 가까운 대중은 외적 환경에 따라서 계속 상하이동 하며 살아가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당 안의 존재든 밖의 존재든, 그들은 공히 회당의 질서 속에서 안과 밖이 결정된다. 요컨대 회당 질서 밖으로 내몰려 배제된 사람들도 안의 가치에 동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촌락사회로부터 배제당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배제된 존재다. 보리슬라프 페키치(Borislav Pekic)가 패러디소설 기적의 시간에서 시사하듯, 인습의 시간대에 묶인 사람들은 회당의 준거가치 속에서 일부는 안으로 포섭되고 다른 일부는 밖으로 배제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기적은 바로 이러한 인습의 시간에 균열을 낸다. 기적의 시간은 바로 이 균열 지점에서 사람들의 경험을 재조직한다.

앞서 말했듯이 마가복음의 예수 이야기가 오클로스의 예수 기억이라고 한다면, 오클로스의 이러한 기억은 바로 기적의 시간처럼 인습의 질서를 가로지르는 예수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오클로스는 예수를 통해서 바로 그러한 체험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불행히도 그 체험의 이야기는 다시 언어의 세계, 그 감옥 안으로 회귀한다. 인습의 세계, 회당적 가치의 세계를 넘어서지만, 동시에 그 세계 속에 갇힌 이중성이 마가의 예수 설화속에 동시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하여, 그러한 언술의 맥락, 설화자의 체험 등을 생략하고 단지 언술의 내용만을 검토하면 필경 불완전한 이해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이 텍스트의 내용 구성에 참여한 오클로스에게 풍요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가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가난했고, 그래서 부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메시아에 대한 꿈은 바로 이러한 전도된 세상에 대한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하는 예수는, 가난한 이가 부자가 되어 자기들에게 주어진 재화를 아름답게 소비하는 것에 관한 지혜를 준 것도 아니고, 가난한 이가 그 가난을 향유하도록, 즉 타율적 가난을 자발적 가난으로 전치시키라는 가르침을 준 것도 아니었다. 예수를 통해 그들이 깨달은 것은 자기 자신까지도 옭아매고 있는 인습의 질서를 넘어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에 관한 지혜였다. 그것은 부자와 빈자라는 이분법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권력관계에 대한 인식이고, 그러한 권력관계를 통한 상호폭력이 아닌 권력관계의 해체를 통한 연대(solidarity)의 가능성에 관한 지혜다.

나는 마가복음 724~30절의 수로보니게(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서 그러한 하나의 실례를 발견할 수 있었다.[각주:13] 이야기는 예수일행에게 모종의 위험한 상황이 있었던지 갈릴래아 국경을 너머 멀리 페니키아의 도시 두로에 딸린 한 시골에 은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종종 그렇듯이 예수의 은거는 적어도 그를 간절히 찾는 몇몇 사람에게는 실현되지 못한다(1:44~45, 6:32~33, 7:24, 7:36). 여기서는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헬라 여인이 은거한 그이를 찾아낸다. 그것은 악령 들린 딸을 고치고자 하는 어미의 간절함 탓이겠다. 여기서 텍스트는 그녀에게 수로보니게 출신 헬라 사람(26)이라는 부가어를 단다. 곧 그녀는 두로의 외부인이 아니라 그 지역 출신 사람이다. 그런데 헬라 사람이다. 아마도 그녀가 헬라어를 사용했다는 혹은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겠다. 아울러 패션 등 헬라적 행위양식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기는 하되, 서방에서 이주한 이의 후손일 수도 있다. 이 경우도 그녀가 비천한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이 굳이 선조의 출신지로 그녀를 기억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 표현에서 시사되는 그녀의 신원은 그녀가 고귀한 계층 사람이라는 것이다.[각주:14] 곧 예수가 은거하고 있던, 두로 인근의 한 시골마을에서 그 지역 출신 귀부인이 예수를 찾아와 악령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 여기서 아이들은 물론 유대인의 아이들을 뜻한다. 갈릴리 등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국경너머로 이주한 사람들이 그녀 주위에 있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마치 한반도 이북의 국경너머인 간도처럼 갈릴리 이북의 국경너머의 공간인 두로 지방은 굶주린 유대인이 적지 않은 지역일 것이다. 혹은 부유한 도시 두로에 의해 착취당하는 갈릴리의 농부들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유대인들, 가난한 피착취 유대 대중을 예수는 아이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 중에는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대농장의 일용노동자이거나 집안일을 하는 하인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그러기에 그 여인의 딸과 유대인은 각각 주인집 자녀와 상 밑의 개와 같은 존재로 비유될 수 있었겠다. 한편 예수의 대답은 이러한 일상의 경제를 전도시킨다. 그에게서 자녀는 착취당하는 유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었고, 그 귀부인과 딸은 그 축복의 상 밑에 있는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텍스트는 그녀에 관한 다른 사적 정보를 주는 데 극히 인색하다. 단지 그 여인이 귀부인이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정보도 없다. 만약 이 이야기의 구술자가 오클로스였다면, 그 지역의 일용노동자이거나 집안 하인도 이 예수 이야기의 구술자 집단에서 배제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 텍스트는 어디에도 추가정보를 주고 있지 않다. 가령 그녀가 구체적으로 유대인을 착취한 악덕 지주인지 여부는 이 사건의 구술자들에게는 관심이 아니다. 피착취자들인 그들이 예수의 그 복의 수혜자가 민중의 착취자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큰 관심거리일 텐데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평판 좋은 여인이거나 혹은 그냥 익명의 여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녀를 대할 때 일상적인 사회적이고 인종적인 대립구도를 통해 그녀를 범주화한다. 이때 예수의 시선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시선을 전도시킨 것일 뿐 그 패러다임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러한 편견의 틀이 모르는 익명의 여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귀부인이라는 코드만으로 예수는 그녀를 판단하고 있다.

이때 여인은 예수의 역설적 대립을 수용한다. 곧 그녀는 유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자신과 같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밥상 밑의 개였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저들과 동일시하는, ‘자발적 타자화를 실행한다. 물론 이 설화의 구술자들에게 그녀는 자신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존재다. 다만 그녀의 일상적 가치를 전도시킨 예수의 도발적인 발언에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예수에게, 그의 도발에 동의를 표하고 있는 모습을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한데 이러한 그녀의 자발적 타자화는 예수를 부끄럽게 했다. 하여 예수의 편견의 틀은 허물어진다. 동시에 이 이야기를 구술한 대중과, 그것의 문서화된 텍스트인 마가복음을 듣는 청중의 민족주의적이고 계급적인 편견의 틀이 허물어진다. 예수 자신의 신성이 그 벽을 허물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유 없이 범주적 증오(categorial hatred)를 표했던 한 여인이 예수로 하여금 그 벽을 허물게 했다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의 이분법은 유일한 폭력의 원천이 아니다. 공평하지는 않지만 경제적 약자 또한 복수의 기회로부터 전적으로 차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약자들의 복수의 정치는 민족주의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고, 계급주의를 빌어 표현되기도 한다. 이것들이 강자들의 폭력에 대한 저항폭력 혹은 대응폭력의 관점으로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와 같이 범주적 성격이 더 강한 보복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분명 이 텍스트가 형성 유통되던 시기에 민족적 계급적 불평등과 배제가 존재했고, 이에 대해 약자들이 하위주체(subaltern)가 되어 정신까지 노예화된 채 살아가는 데서 벗어나 더 나은 관계를 위해서 집단적인 대응폭력이 요청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된 특정 여인 이야기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부와 빈은 갈등하고 보복하는 관계에서 상호간 범주적 편견(categorial prejudice)을 해체하고 연대하는 관계로의 전이가 요청된다. 적어도 이 텍스트는 범주적 편견과 증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오클로스의 자기 성찰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오클로스 같은 사회적 부류의 존재에게 가난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가난의 비루함, 그러한 기억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간직하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부에 대한 선망이 더욱 현실적이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그것이기에, 그 열망은 더욱 맹목적으로 추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에 대한 강렬한 선망의 태도는, 그 실현되지 못할 무망한 바람은 부자에 대한 범주적 증오와 종종 상호교환적이다. 여기에는 오클로스의 가난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풍요와 빈곤, 부자와 빈자의 인습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꿈을 꾸고 있음에도, 그 전복의 꿈조차도 현실을 옥죄는 인습의 틀 속에 구금되어, 전복의 상상을 실현코자 하는 실천조차 그 인습의 질서 속으로 회수되어 버리고 마는 것, 그러한 인습화된 저항의 패러다임에 대한 자기반성이 결핍된 것이다. 반면 마가복음 724~30절의 텍스트는 부자에 대한 증오이기도 하고 부에 대한 선망이기도 한 오클로스의 성찰적 자의식이, 예수를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를 통해 지양되는 자기 성찰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예수운동

 

마태복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의 하나는, 기원후 70년대 어느 때부터 시작된 유대사회의 재구조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추론될 수 있다. 고대 유대교 연구의 권위자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는 성전종교에서 랍비적 율법종교로 전화되어 잘 짜인 체계로 제도화되는 대략 7세기 초까지의 기간을 형성기의 유대교(formative Judaism)라고 불렀다. 유대교의 이러한 변화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에 의해 힐렐계 온건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얌니아(히브리 지명으로는 야브네’)에 율법학교가 세워지면서 시작된다. 로마제국에 대한 항쟁에 실패하고 온통 잿더미가 된 전후 유대사회의 복구를 담당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주체는 이곳에 세워진 율법학교였다. 이 학교의 창설자 요하난은 전쟁에 반대했던 온건파 바리새 지도자로 매우 융통성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폐허가 된 강토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온 유대인의 단결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율법에 대한 충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가 정치적 온건파였기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프로그램을 후원했고, 이로 인해 많은 유대공동체들은 그를 지지했다.

이 재건 프로젝트의 초대 지도자 요하난이 죽은 뒤, 치열한 경쟁을 거쳐 강경파 지도자인 가말리엘 2(Gamaliel II)[각주:15]가 직위를 승계하였는데, 전쟁에 가담했던 행동파 바리새 랍비 출신답게, 여러모로 전임자보다 과감하고 공격적이었다. 80년경, 그는 율법학교를 보다 강력하게 재구축하고자 했고, 이에 율법의 집(베트 미드라시)이라는 뜻의 종교적 교육기구를 재판의 집(베트 딘)이라는 뜻의 행정적 기구로 확대 개편한다. 여기서 그는 율법을 강력한 도덕적 규준으로 해석했던 요하난을 계승하였지만, 더 나아가 그것을 법률적 틀로 재설정하여 적용하고자 했던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가말리엘 2세의 체제는, 비록 제한적이라도, 행정력을 행사할 만한 조직화와 재원을 확보하였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빠른 속도로 랍비적 바리새 체제는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에 기초하여 그는 강력한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를 도모하는데, 이것은 안과 밖의 경계를 보다 극적으로 명료하게 하고, 내부에서 외부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이른바 내부의 적의 발명이 요청된다. 이것은 유대주의 신앙을 표준화하는 사업을 수반한다. 하여 이른바 ‘18개조의 기도문90년경 제작되는데, 이는 아마도 이전부터 수행되어 온 기도문들을 보완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한데 이중 적의 발명이라는 관점에서 제12이단에 대한 저주(비르캇 하-미님, birkat ha-minim) 구문이 주목의 대상이다. 여기서는 특히 나사렛파(Norzim)가 대표적 이단으로 지목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회당 내부에서 일고 있던 일련의 예수운동을 지칭한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유대교의 고강도 정체성의 정치 과정에서 유대교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어 독자적인 집단으로 구축된 이들의 경험과 비전을 반영하는 텍스트다.

비르캇 하-미님의 여파에 대해서 마태복음은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방과 기소(5:11~12), 회당에서의 채찍질, 넘겨줌, 박해, 추방(5:10~1244, 10:1723, 13:21, 23:34), 그리고 처형(22:6, 23:34)이 그것이다. 이는 지역은 다르지만 비슷한 형식의 배제를 체험한 요한복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회당에서의 축출, 추방(9:22, 12:42, 15:2), 박해(5:16, 15:20), 그리고 처형(16:2).[각주:16]

이러한 기도문이 제작되었다면, 필경 공문과 함께 이 기도문을 제국내 각 회당에 발송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회당들이 이에 동조했겠다. 하여 어떤 회당에선 적지 않은 소요가 일어났을 법하다.

아마도 이들 회당에서는 그 동안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공공연히 얘기했던 이들이 소환되었고 심문을 받았을 것이다. 심문의 주요 목적은 그 일파의 우두머리를 포함한 전체를 색출하려는 데 있었다. 매질은 그들이 동료를 밀고할 때까지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목숨을 다해 반성하겠다고 서약할 때까지 계속되었겠다.

상상력을 좀더 펼쳐 보자. 어떤 이는 체벌 뒤에 훈방 조치되고, 어떤 이는 끝까지 버티다 매질에 죽었다. 또 어떤 이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여 더 이상 유대공동체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팔레스티나의 유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팔레스티나 지역사회에서 어떤 유대인이 회당에서 축출당한다는 것은 야생의 공간 속에 홀로 내 던져진 양의 처지와 같다.

한편 체벌은 회당의 판관들 앞에서 동료를 밀고할 때까지 계속된다. 하여 자기를 밀고한 이와 자기가 밀고한 이들이 함께 추방당하여 공존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이기도 했을 것이다. 가족도 풍비박산되었다. 가족 가운데 누구는 추방당한 뒤 노예로 팔려갔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뭇매에 불구가 되거나 죽기도 했을 수 있다. 하여 밀고자에 대한 배신감은, 설령 한 마음으론 이해할 수 있어도, 다른 마음속엔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는 분노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존을 위해 서로를 의지해야 한다. 그들과 계속 이웃하며 살아야 하고, 다시 공동체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야 했던 것이다.

말했듯이 마태복음은 바로 이렇게 회당에서 폭행을 당했고 추방당한 이들의 비망록이다. 그 예수의 이야기 속에는 이 공동체의 체험이 투영되어 있다. 그네들의 경험에 대해 좀더 얘기해보자. 추방당한 이후에 관해서 말이다. 이들은 아마도 갈릴리 북쪽 경계 밖, 그 인근, 시리아 지역의 어느 도시에서 살아야했던 유대인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전란 전후에 화를 피해 이주했던 난민들이다.

진압 로마군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로마 최강의 정규군으로 무려 6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민간인에 대한 일반적인 군대폭력을 차치하고라도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해 현지에서의 강제징발과 징용, 그리고 예비병력을 위한 징병 등, 로마군의 이동경로를 따라, 특히 팔레스티나 이북의 시리아 지역 주민들에게 가해진 고통은 차라리 또 하나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팔레스티나에서의 로마의 진압 작전은 그야말로 잔혹한 것이었다. 로마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유대 전쟁의 역사를 썼던 요세푸스(기원후 38~100년경)조차도 그 상황을, 로마군이 닥치는 대로 불사르고 약탈하고 노예로 끌고 가고 강간하고 죽여 대는 만행을 더는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 의하면 이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가 110만 명에 이르고 거의 10만 명의 유대인이 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유대전쟁사6.9.420). 물론 이는 과장된 수치이기는 하지만, 피해가 막심했음을 강변하고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없다.

이들 징집되어 비정규부대에 편성된 인근 족속의 병사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정규군보다는 훨씬 좋지 않은 여건의 전장으로 보내졌거나 동일한 전투에서도 좀더 야만적인 배역을 담당했음직하다.[각주:17] 게다가 이들은 그 철저하다는 로마군의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도 아니고, 또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채로 끌려온 이들이었다. 해서 그들이 체험한 전쟁은 정규군보다도 더욱 참혹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후, 몸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를 가득 안고 돌아온 이들은 과연 별 문제 없이 일상으로 복귀하였을 것인가. 그렇게 귀환한 고향의 마을은, 가족은 어떠했을까. 전쟁의 상흔은 단지 팔레스티나 내부에서만의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상상이다. 전쟁터 못지않은 또 다른전쟁이 그곳에서 벌어졌고, 전후는 그러한 또 다른전쟁의 상흔으로 채워진 낡아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조각이었을 것이다. 전후의 병리성은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을 법하다는 얘기다.[각주:18]

책임져야할 당사자가 아닌데도 전쟁을 체험해야 했던 이들의 고통, 그것은 분노를 제어할 수 없어 터져버릴 것 같은 폭력에 굶주린 야수들로 주민들을 변모시키지는 않았을까. 거의 모든 전후의 대중이 보여주었던 정체 모를 분노와 가학성의 난무, 그런 현상이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을 법하다는 것이다.

한데 로마군을 증오할 수는 없다. 그러기엔 저들은 너무 강하다. 다른 대상이 필요하다. 보복을 당해 마땅한 잘못을 저지른 이들, 그러하다고 공론화된 이들이 그 표적이 될 법하다. 한데 그 표적이 강해서 반격할 만한 힘이 있는 이들이라면 분노의 대상으로 적절치 않다. 분풀이가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만만한, 보복할 수 없는 이들이 적격이다.

마태공동체는 그 안성맞춤의 대상이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속해 있기에 부적절하다. 유대인들은 전후 복구의 제1차적 대상일 수 있었다. 위험하지 않은 유대인인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지중해 도시들에 세워진 많은 회당들은 그러한 위험하지 않은유대인을 대표하는 제국 내의 공인된 기구이다. 또 여러 지역의 통치자나 원로원들도 결코 작지 않은 그들의 기부금 탓에 어느 정도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그런 회당들은 각 지역의 유력 인사를 꽤나 포함하고 있었다. 하여 회당에 속한 이들은 비교적 괜찮은 안전망을 갖춘 셈이다. 문제는 회당에서 쫓겨난 이들이다. 바로 마태공동체가 그러했다.[각주:19]

본문 도처에서 시사되고 있듯, 마태공동체는 유대회당으로부터 린치를 당하고, 지역사회 대중으로부터 공격을 당한다(10:17). 물이 아래로 흐르듯 분노와 공격성은, 복수와 폭력은, 비록 대개는 의식적 행위가 아니지만, 더 약한 이들을 향해 전가된다. 그런데 이들에겐 보복할 대상이 없다. 최하층 이민자들이란 사회적 피라미드의 제일 말단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그들의 분노를 희석시켜줄 대상은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대개 분노는 내부를 향한다. 우선 이웃 간에 분쟁이 잦아진다(5:24). 별일 아닌데도 서로 악다구니하며 다툰다. 속으로 쌓여 터져 나올 적절한 지점을 찾지 못한 공격성이 삐져나온 것이겠다. 또한 공동체 내의 장애인, 병자,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내부의 폭력성이 드러날 마지막 지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아내나 자식 등을 향해서 폭력이 전가된다. 가정은 억제된 폭력성이 전가되는 대표적인 최후의 장소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태복음522~25절은 사회 최말단에서 벌어지는 내부의 폭력 현상이 만연한 사회상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마태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추정한다면, 이들의 복음서가 다른 예수공동체들의 경험을 담은 문서들보다 더욱 많은 폭력적인 언사들로 들끓고 있다는 점[각주:20]이 그리 당혹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곧 이 텍스트 속에는 폭력의 야만성이 일상화된 공동체의 체험, 아니 병리현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복음서의 지도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다른 데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으로 기억해 낸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복음544

 

폭력의 대상이 된 이들을 향한 말이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가르침, 거의 신적인 품성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 피해자들의 덕목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이 복음서 전체는 증언한다. 예수도 그랬다고.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듯, 신의 신탁을 받은 거룩한 메시아적 존재라고. 그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새로 올 다윗이라고. 그이는 모세와 엘리야의 반열에 있는 신적 존재라고. 그이는 악령을 쫓아내고 풍랑을 잔잔케 하는 신적인 행적의 장본인이라고.

그런데 그이는 권력에 의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당하였다. 절대적 폭력이며 절대적 고통이다. 그러므로 폭력을 당하는 것은 신적인 권리와 맞닿아 있다. 즉 신처럼, 신의 분신인 예수가 그런 것처럼, 저들, 가해자를 용서하라, 그들보다 더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품성으로 그 폭력을 대하라. 원수사랑 가르침은 바로 이런 권고인 셈이다.

로마제국 군대의 폭력, 회당에서의 유대공동체의 폭력, 지역사회에서의 주민들의 폭력, 그리고 마태공동체 내의 작은이들끼리 서로에게 해대는 폭력, 이러한 약육강식의 폭력 연쇄의 최말단의 사람들, 가장 약한 사람들인 폭력의 희생자들은 이렇게 훼손된 주체를 회복하도록 부름 받는다. 폭력 당한 이들이 겪는 존재감의 파괴를, 복음서 지도자는 폭력성에 의한 희생의 체험을 재의미화함으로써 이렇게 치유하려 하는 것이다.[각주:21]

하여 그러한 신의 계율을, 저 근본주의적인 랍비적 바리새 체제의 주역들보다 더욱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지도자는 예수의 입을 빌어 말한다. 유대인보다 우월한 자의식으로 신앙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할 수 없어 참는 게 아니라, 저들보다 우월한 자기를 갖고자 하기에 참는다는 것이다. ‘우월감이다. 피해로 인한 자아의 파산이 아니라, 더욱 견고한 자아의 구축,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이 말하는 폭력을 넘어서는 (하나의) 이었다.

이러한 신적 윤리의 담지자는 프토코이(πτωχοι), 극빈자이다. 고대사학자 모지즈 핀리(Moses I. Finley)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작품 플뤼튀스(Πλυτυς)에서 그리스어의 가난한 자를 뜻하는 두 단어에 관한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프토코스의 생활은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생활이지만, 페네스(πενης)의 생활은 검소하게 지내면서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생활이요 남아도는 건 없지만 모자라지 않는 그런 거지요.”[각주:22] 페네스의 묘사가 다소 낭만화되어 있지만 이런 함의는 다른 용례에서도 대체로 유사하게 나타난다. 루이제 쇼트로프(Luise Schottroff)가 재현한 마태복음 속의 프토코이의 극한적 현실도 바로 이러한 용례와 맞닿아 있다.[각주:23] 요컨대 마태공동체의 주요구성원은 프토코이, 즉 극빈자들이다. 그들의 현실은 위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특히 회당에서 축출된 이후 겪어야 했던 사회적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가공동체에서 프토코이와 유사한 부류를 가리키는 오클로스들은 예수의 배타적 축복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마태공동체에서 프토코이는 그 자체로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축복을 받는다(5:3).

말했듯이 마태공동체의 프토코이는 그들에게 가해진 부당한 공격을 되갚아 줄 수 없다. 그들의 좌절된 분노는 종종 그렇듯이 이웃에게 가족에게 더 약한 대상에게 와전되어 표출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공동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한 자기규율의 성취를 통해서 자신을 박해했던 온갖 가해자들보다 우월한 자의식을 구현하려 한다. 그 다음에 이어질 공동체 비망록의 숨겨진 부분은 다음과 같은 자긍심의 고백일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굳건하게 세워져 저승의 성문들도 내리누르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늘의 열쇠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1618~19

 

마음이 가난한 자는 바로 이런 존재다. 거의 모두가 극빈상태에 있는 공동체의 성원들 모두는 자신에게 가해진 가난의 질곡, 그 타율적 고통을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마태복음 19:27)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자발적 가난의 선택으로 전이시키는 존재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공동체가 그런 것처럼 마태공동체도 가난을 성찰하고자 한다. 그런데 전자가 실천에 있어서 적에 대한 범주적 증오를 반복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가난을 성찰하고 있다면, 후자는 좌절된 실천의 상황에서 무너진 자아의 회복을 위해 가난을 성찰한다. 보다 심리적으로 다가온 실패와 결핍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공동체는 보다 내적인 차원에서의 성찰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예수운동

 

예수가 처형당하던 때로부터 아마도 10년 가까이 지난 어느 유월절기 때에, 헤롯 대왕의 손자 아그립바 1세는 예루살렘의 예수 추종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일제검거령을 내렸다. 혐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는 지도급 인사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도행전 122절에 의하면 이때 그는 칼로 죽임당하였다.’ 체포과정에서 살해당했는지 아니면 참수형을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태 와중에서 걸출한 지도자인 야고보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한편 체포된 이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고, 그 과정에서 숨어 있던 다른 이들도 속속 발각되었으며,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인 베드로마저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처형당하기 전날 그는 탈옥에 성공한다.

사도행전본문은 이런 탄압 정국이 아그립바 1세의 통치에 퍽 유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3유대 사람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그는 로마 황제 칼리굴라(재위 37~41)와 어린 시절 동문수학한 사이로, 이 절친한 친구의 후광에 힘입어, 그리고 황제가 암살당한 이후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재위 41~54)의 황위 승계에 영향을 미친 대가로 과거 조부의 광대한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정치력도 뛰어나 페니키아의 부유한 도시국가인 두로와 시돈에까지도 일정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가장 유력한 통치자이자 대부호로 부상하게 된다.

하여 유대를 일약 강대국의 대열에 부상하게 한 그에게 많은 시민과 대중은 환호하며 열광적으로 지지를 표하였던 같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가 연설을 할 때에 대중은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라고 열광했다고 묘사한다(12:21~22). 요세푸스 또한 다소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유대고대사19.8.343~345). 조부 못지않은 강력한 통치자로서, 하지만 조부보다 관대한 통치자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가진(유대고대사19.8.328~334) 그는 유대 사회를 확고히 통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예수 추종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의 묘사에서 시사되고 있듯이, 이러한 대중의 광적인 동의와 지지는 사회 내의 특정 집단에 대한 폭압성의 결과이자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사회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자 기쁨인 것이 특정 소수자 집단에게는 저주이자 고통이었다. 이들에게 날로 강대해가는 왕의 권세와 부는 절망의 계곡, 그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 그 자체였다.

한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갑자기 죽은 것이다. 사도행전 1223절에 의하면 그는 벌레에게 먹혀서 죽고 말았다.” 요세푸스는 그의 사망 직전의 상황을 5일간의 심한 하복부 통증으로 설명한다(유대고대사19.8.346~350). 사인은 알 수 없지만, 갑작스런 죽음임은 분명한 것 같다. 아무튼 이 죽음에 관한 사도행전의 묘사는 극적이다. 그가 자신의 업적에 기고만장하던 바로 그 순간 신의 저주가 내린 것이라고.

여간해선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권세와 부를 가진 이의 최후는 이렇게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끝났다. 그의 할머니는 조부 헤롯에게 내침당한, 구 하스몬 왕조의 공주였다. 하여 몰락한 왕족이 되어 로마로 망명하면서 절치부심 가문의 부활을 꿈꾸며 살았던 그는 훗날 제국의 황제가 된 칼리굴라와 친구가 되었고, 이로써 곧 그는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얼마 안가 황제가 암살당하고 그에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그렇지만 생명력 강한 그는 새 황제의 등극에 영향을 미친다. 이로써 그는 최고의 영예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한 순간도 안심하지 않고 가문의 부활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앞을 향해 달려가기만 했다. 한데 더 많은 권세와 부를 얻으려고 갖은 수를 다 쓰고 남의 목숨까지도 함부로 했던 그가 이렇게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수포로 남기고 사라져 갔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누가복음 9:26=마태복음 16:26). 마치 그의 죽음을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의 잔혹한 폭력에 절망하던 이들은 이 한 사람의 부고(訃告)에서 신의 구원 섭리를 체험한다.

그가 죽은 기원후 44년으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뒤, 로마 시에 있던 한 예수 공동체에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이 저술되었다. 66~70, 멀리 고국에서 벌어진 반로마 항쟁으로 인해 황도 로마에서도 반유대주의가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전쟁 기간과 그 직후 혹독했던 테러의 시간은 지났지만, 제국이 부여한 전쟁 배상금조의 2 드라크마 세금은 여전히 모든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고, 가혹하게 징수되었다.[각주:24] 특히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는 더욱 가혹하게 유대인을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저술가 수에토니우스(69~140년경)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는 군중이 가득한 법정에서 아흔이 된 노인이 할례를 받았는지를 검사당하는 모욕을 당했고, 할례를 받은 것이 확인되면 유대인에게 부과된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고 한다. 물론 로마시의 예수공동체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니, 그들에게도 황제의 학정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겠다.

물론 황제가 모반자들에게 내몰려 죽은 뒤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긴 수에토니우스나 타키투스 같은 저술가들의 글들은 편파적인 기억을 전달하고 있다. 그를 네로(재위 54~68)에 버금가는 최악의 폭군황제로 규정하겠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은 그가 생각보다 훨씬 유능했고, 유달리 더 잔혹했던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가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또 그리 과장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시도한 황제숭배 정책이 유대인의 감정을 좀 더 격앙시킨 것 또한 분명한 듯하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황제의 축출과 사망 소식에 남다른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의 예수공동체 또한 그랬다.

이 공동체의 텍스트인 사도행전은 흥미롭게도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에서 반세기 전 예루살렘의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을 떠올리고 있다. 그때 죽은 야고보 등을 기억하며, 황제 치하에서 잡히고 죽임당한 자신의 동지들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저 유명한 마리아 찬가의 한 구절을 보라.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152~53

 

이 구절에서 왕좌에서 끌어 내림당한 제왕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빈손으로 떠밀린 부한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아그립바 1세와 도미티아누스가 여기에 가장 잘 연결되는 인물이라는 가정은 그리 무리해보이지 않는다. 해서 이 두 책 속에는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와 로마의 공동체가 연결되고, 그들의 기억 속에 각각 아그립바 1세와 도미티아누스가, 그리고 그들에 의해 고통당하는 이들이 서로 오버랩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렇게 시공간적으로 이질적인 것이 한데 얽히면서 함축되어 있는 이 텍스트는 결국 권세와 부가 횡포를 부리는 현장의 고통을 각인하는 공동체의 느낌을 읽어내지 않으면 바로 읽혀지기 어렵다. 나아가 누가복음사도행전전체를 그렇게 보아야만 제대로 독서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책의 서문에 나온 수신자인 데오빌로라는 인물에 붙여진 호칭인 각하(크라티스테, κρατιστε)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로마 총독이었던 이들에게도 사용된 바 있는 칭호다(사도행전23:26, 24:2, 26:25). 정확하게 어떤 직위에 사용되는 것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권세와 부를 누리고 있는 이에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이 두 책들은 권세와 부를 누리고 있는 이들에게 권세와 부에 관한 소수자 공동체의 보고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권세와 부의 횡포로 인한 현장의 고통을 공감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겠다.

실제로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등장하는 부자들에 관한 묘사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때 부자들은 단지 재산을 많이 가진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 , 신분, 사회적 특권과 같은 경제-정치적, 사회-문화적 위상을 나타내는 개념이다.”[각주:25] 그렇다면 이 책들은 데오빌로로 상징되는 부유한 유력인사들에게 아그립바 1세와 도미티아누스처럼, 부와 권세를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이들과의 연대가 아닌, 예수의 모범을 따라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를 권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26]

 

 

맺음말


예수의 예수운동과 마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누가복음은 모두 가난은 복되다는 가치를 공유한다. 그것은 초기 예수운동들이 공유하는 가치였다. 반면 그리스-로마의 사고체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관념은 생소한 것이었다.[각주:27]

그런데 공관복음서들 사이에서 부자와 빈자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시선이 있다. 모두 가난의 축복을 말하면서도 마가복음마태복음은 빈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은 부자에게 말한다. 또한 마가복음누가복음은 부자와 빈자 간의 연대를 강조한다. 요컨대 전자가 빈자가 부자와 연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부자로 하여금 빈자와 연대하려면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빈자의 자기규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 세 개의 초기 예수운동들 간의 이러한 연관성 속의 차이들은 앞에서 보았듯이 현장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그렇듯이 현장의 조건은 신학적 발견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초기의 예수운동들에서 공히 발견되는 요소는, 오늘 우리사회의 대형교회들과는 달리, 풍요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

  1. 평양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를 표준화하는 신앙 양식을 구성하는 토대적 사건이었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나의 글 〈성령의 도구화―‘평양대부흥운동의 영’ 대 ‘성서의 영’〉, 최형묵・백찬홍・김진호 공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평사리, 2007), 235~258 참조. [본문으로]
  2.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인직의 《혈의누》에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성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의 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이것은 동시대 평안도 지역의 대중의 일본군에 대한 일상적인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게 해주다. [본문으로]
  3. 통계청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1960년 개신교의 성장률은 28%였는데, 1970년에는 41.%, 80년에는 57.3%, 그리고 1985년에는 무려 65.4%나 되었다. 홍영기, 〈한국사회의 근대성과 교회성장—리더십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연구》 2 (2004), 90쪽. [본문으로]
  4. 이 시기 한국사회의 포스트근대적 발전과 한국교회의 미학화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나의 글 〈민주화 시대의 ‘미학화된 기독교’와 한국 보수주의〉, 당대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 (웅진지식하우스, 2007) 참조. [본문으로]
  5. 요즈음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은 실패한 ‘영혼의 자활공간’이라기보다는 경쟁에 지친 이들이 일시적인 쉼을 얻기 위한 ‘피정공간’으로 역할이 전이되었다. [본문으로]
  6. 마리-프랑스 이리고앵(Mary-France Hirigoyen)은 이러한 현상을 ‘사회적인 것의 심리화’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7. 〈마가복음〉의 구술성에 관한 논의는, 1960년대 초 미디어생태주의자 월터 옹(Walter J. Ong)이 성서 텍스트의 구술성에 대해 주목할 만한 논지를 편 이후, 베르너 켈버(Werner J. Kelber), 요안나 듀이(Joanna Dewey) 등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최근 들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논의가 진척되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연구 성과를 제출한 연구자는 호슬리(Richard A. Horsley)다. 그의 책 Hearing the Whole Stor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참조. 한편 민중신학에서도 안병무 등이 구술성에 주목해왔는데, 선생의 구술성에 관한 논의에 대하여는 나의 글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 이정희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참조. [본문으로]
  8. 문헌적 기록은 그 내용이 기록자나 수용자의 삶과 반드시 맞물리지 않아도 되지만, 구술적 전승(oral traditions)은 양자 간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는 현대 구술 연구의 성과를 그는 활용하고 있다. G. 타이쎈,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 말씀 전승에 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 김명수 옮김,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05~6쪽. [본문으로]
  9. 타이쎈, 같은 글. 하지만 그는 다른 글에서 설화텍스트인 기적전승에서 이러한 물음을 시도하고 있다. G. Theissen, The Gospels in Contexts.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in the Synoptic Tradition, Eng. trans. by Linda M. Maloney (Minneapolis: Fortress, 1991), pp. 97~112.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양식비평적 전제인 짧은 전승단위의 텍스트만을 한정하여 예수의 역사성을 재건하는 데 설화 연구적 가능성을 시도할 뿐이다. 그런데 설화 텍스트로서의 구술문학이 매우 큰 단위로 형성된 것은 전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구술단위는 생각보다 훨씬 길며, 그것은 전승자와 전승대상 사이의 일정한 삶의 연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호슬리는 짧은 이야기 단편(pericope)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이야기’(whole story)를 강조한다. Richard A. Horsley, Hearing the Whole Story 참조. [본문으로]
  10. 이에 대하여는 〈두 개의 복음—민중이 은폐된 예수와 민중이 전한 예수〉,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참조. [본문으로]
  11. 나의 책 《예수의 독설》(삼인, 2008)의 보론1(319~370쪽) 참조. [본문으로]
  12. Ahron Oppenheimer, tr. from the Hebrew by I.H. Levine, The ʿAm Ha-Aretz: A Study in the Social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Hellenistic-Roman Period (E.J. Brill, 1977) 참조. [본문으로]
  13. 여기에서 다루는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관한 논의는 나의 글 〈한국 그리스도교의 인권 담론과 신학적 성찰―안병무의 신학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12 (2007.9)에서 다룬 해석을 참조하여 재기술한 것이다. [본문으로]
  14. 타이쎈은 ‘헬라 여인’이라는 표현이 귀부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다른 용례 몇을 찾아낸다. 게르트 타이쎈,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나타난 지역적 사회적 특성〉, 《신학사상》 51 (1985 겨울), 828~831쪽. [본문으로]
  15. 〈사도행전〉 5장 34~39절과 22장 3절에 나오는 가말리엘(1세)이 힐렐계의 온건파에 속했다면, 그의 아들 혹은 손자인 가말리엘 2세는 대단히 근본주의적 힐렐파 지도자로, 요하난 벤 자카이를 이어 라삐 유대교 체제의 제2대 지도자가 된다. 주목할 것은 그가 유대교에서 예수 추종자들을 가혹하게 추방한 장본인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주도한 유대교 개혁운동의 여파로 예수 추종자들은 기원전 80년 이후 몇몇 지역의 회당에서 축출당하며, 이로써 본격적인 대안적 제도로서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16. 에케하르트 슈테게만, 볼프강 슈테게만, 《초기그리스도교의 사회사》 (동연, 2009), 379~85쪽 참조. [본문으로]
  17. 티투스는 팔레스티나를 향해 진군할 때 동맹국에서 강제 차출한 군대를 앞장세웠다(《유대전쟁사》 5.2.47). 이러한 진군 방식은 전투 작전수행 과정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본문으로]
  18. 《유대전쟁사》 7.3.41~62에는 전쟁 기간 중에 안디옥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 사건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그 배후에는 안디옥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극심한 반유대 정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유대정서는 인근 도시에까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이 극한적 반유대주의가 화염을 뿜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내가 보기엔, 로마군에 의한 군대폭력이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이유일 성 싶다. 로마군의 폭력에 직면한 주민들은 전쟁 발생국 족속인 유대인에게 증오를 투사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편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전쟁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었다는 추정이 무리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이때에는 특히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흔이 이 지역 주민들의 증오의 정치에 일익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본문으로]
  19. 위의 주에서 언급한 안디옥 사건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 최고행정관의 아들 안티오쿠스가 자신의 아비를 포함한 일단의 유대인의 반역행위에 대한 고변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술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학살 사태라는 결과를 두고 시당국이 황제나 상급기관장에게 서둘러 보고서로 내놓은 자료를 요세푸스가 참조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묘사 속에 보고서의 의도와는 무관한 정보인, 유대인 공동체가 이 도시에서 매우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아무리 대중의 반유대정서가 강하다 하더라도 이 지역의 유대교 회당을 공공연히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학철이 마태복음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안디옥으로 보는 것은 그런 점에서 개연성이 있다. 김학철, 〈마태공동체 연구사에 관한 비판적 고찰과 연구 전망〉, 《신학논단》 47 (2007) 참조. 하지만 비단 안디옥이 아니라도 이러한 사정은 그 인근 지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20. 마리아 J. 셀비지, 〈마태공동체에 나타난 폭력, 여성 그리고 미래. 하나의 편집비평적 에세이〉, 《기독교사상》 (1985.3). [본문으로]
  21. 〈누가복음〉 19장 11~27절의 ‘므나’의 비유가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서는 거의 20배나 큰 단위인 달란트의 비유로 나온다든가, 〈누가복음〉 14장 15~24절에서 잔치 비유의 주관자가 ‘주인’인데 반해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2장 1~10절에서는 ‘왕’으로 나온다는 점 등을 들면서, 많은 연구자들은 〈마태복음〉이 부유층과 상류층이 적지 아니 있는 공동체의 산물로 해석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 단위나 직위가 터무니없이 크고 높다는 것은 그만큼 그 표현들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하는 게 더 개연성이 있다. 가령 〈마태복음〉 18장 21~35절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처럼 1만 달란트 빚진 종에 관한 얘기는, 당시 유대에서 가장 강력했던 통치자인 헤롯 대왕의 수입에 관한 로마의 평가액이 1천 달란트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얼마나 터무니없이 큰 액수인가를 보여준다. [본문으로]
  22. M.I. 핀리/지동식 옮김, 《서양고대경제》 (민음사, 1993), 56쪽. [본문으로]
  23. 루이제 쇼트로프, 〈착취당하는 민중과 노동〉, 김창락 엮음, 《새로운 성서해석 무엇이 새로운가》 (한국신학연구소, 1987), 248~313쪽 참조. [본문으로]
  24. 사라 만델(Sara Mandell)은 전쟁 전에 두 드라크마의 성전세로 지불되었던 액수가 유대 전쟁 이후 전쟁배상금조로 모든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는 견해를 제출하였다. 성전에 비축됐던 재화가 전쟁 기금으로 사용된 것이라는 로마의 해석에 따라 성전세로 지불됐던 두 드라크마를 전쟁배상금으로 징수했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이 로마 지배하에 있을 때 성전세는 징수되었는가?〉, 《시대와 민중신학》 2 (1995 봄), 165~177쪽. [본문으로]
  25. 박흥순, 〈누가복음에 나타난 부유한 사람들의 재현〉, 《신약논단》 14/1 (2007 봄), 44쪽. [본문으로]
  26. Walter E. Pilgrim, Good News to the Poor. Wealth and Poverty in Luke-Acts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1) 참조. [본문으로]
  27. M.I. Finley, 《서양고대경제》, 50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