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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대, 그리고 탈학교의 상상력
1985년 11월 나는 대학 생활 내내 간직했던 교사의 꿈을 접었고, 신학교 입학 원서를 샀다.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거기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돌파하고픈 의지의 표현이었다.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하던 어설픈 지식 후보생이 도달한 결론이 얼마나 섣부른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당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살핀 뒤에 결정한, 나름대로 신중하게 선택한 것이었다. 교회는, 당장은 아니지만, 잘만 하면 학교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의 공간이 될 성싶었다.
그로부터 꼭 2년 후인 1987년 11월 나는 신학교를 중퇴할 요량으로, 입사 원서 몇 부를 샀다. 교회 교육에 대한 더 이상의 꿈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역시 어설픈 경험과 섣부른 판단이 당시의 나를 규정했을 법하다. 돌아보기 부끄러운 실수투성이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교회 교육에서 생활의 아름다움을 나눌 성찰의 계기가 마련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두 번에 걸쳐 꿈의 궁전이 세워졌던 내 영혼의 유적에는 교육에 대한 잔해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2002년 7월, 나는 중등학교 교사도, 교회학교 교육 담당자도 아니다. 탈/반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이고 교회의 해체를 부르짖는 목사이며, 문화비평적 문화 저널의 편집위원, 이것이 나의 직업이자 직함이다.
그러기에 지난 시절의 꿈의 궁전의 역사를 되새기는 일은 고통스럽다. 뿐만 아니라, 잔해를 면밀히 조사해서 재현하려는 고고학적 탐색에 돌입하는 자전적 이야기의 복원 작업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고고학적 복원의 자리는 현재이지만, 꿈의 궁전이라고 이름 붙은 과거 역사의 사실 그대로의 복원이라는 것, 즉 진본 텍스트(원본)는 언제나 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과거’라는 것은 현재의 외부에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에겐 절대타자이기에, 영원히 알 수 없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재현(representation)이란 언제나 플라톤적 미메시스/‘모방’에 불과하다. 여기서 재현체/복사본의 가치는 원본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있다. 한데 원본을 알 수 없는데 복사본의 가치를 뉘 알랴?
고고학적인 자전적 복원 작업이 할 수 있는 과제는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읽는 데 있다. 이때 ‘과거’는 ‘지금 여기의 나’를 구성하는 시간 차원의 일부분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즉 과거 이야기란 지금 나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 성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기억’이라고 한다. 요컨대 기억이란 과거의 사실이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의 일부로서 포섭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말했듯이 나는 지금 두 개의 제도 교육의 장을 신뢰할 수 없다. 이 두 개의 장은 각기 다른 작동 메커니즘을 가진 ‘제도’로서 실재하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두 장은 교육과 관련해서 결정적인 문제점을 공유한다. 둘 다 ‘성취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취주의란 인식론적으로 ‘목적 지향적’인 자세와 맞물린다. 그것은 하나로 소급되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모든 이해와 실천은 그 절대진리에 귀속되는 부차적 과정일 때만 가치를 갖는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그러한 목적 지향적 차원이 결여된 일체의 과정은 혼돈이요 무질서며 거짓일 뿐이라는 배타주의적 관점을 지향한다. 한편 이러한 성취주의적 교육 속에서 우등생과 열등생이 탄생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차등적인 보상체계가 작동된다.
위대한 사회학자의 한 사람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이러한 성취주의적 태도를 근대의 주된 특징이라고 보면서, 이를 ‘입법자’(legislator) 관점이라고 규정한다. 입법자는 하나의 진리에 준거해서 모든 규칙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진리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무질서/혼돈의 영역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내고자 하는 계몽적 역할을 필생의 사명으로 안고 사는 존재인 것이다.
야만으로부터의 해방. 근대 특유의 이 인류학적 구호 속에는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행된 근대의 실천이 구석구석 스며있다. 지식의 발전을 향한 모든 연구자들의 실천이 그랬고, 경제 발전을 지향하는 모든 사업가들의 실천이 그랬으며, 국가 발전을 추구하는 모든 정치가들의 실천이 그랬다. 심지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려는 선교사들의 실천도 그랬고, 전쟁을 치루는 군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지식제도, 경제제도, 국가제도, 종교제도, 군사제도 등, 각종 근대적 제도화를 낳았으며, 그것을 매개로 해서 더욱 계몽적 실천을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었다.
학교는 이러한 성취주의적 근대 특유의 제도를 보여준다. 시간 배치와 공간 배치는 다수의 학생들이 동시에 동일한 교과목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교사(校舍)・운동장에서 교실 배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학기별, 월별, 주별, 시간별 배치에 이르기까지......
이때 학교 교육은 개인을 근대적 주체로서 성장하게 한다. 마치 교회가 신앙인을 교회적 주체로서 탄생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개인은 집단이 공유하는 동일한 가치를 내면화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은 집단의 일원이다. 물론 이것은 전근대적 집단주의와는 구별된다. 전근대는 개인을 탈주체화하여 집단(교회 또는 신국) 속에 개체를 귀속시켰다는 점에서, 근대와는 양상이 다르다. 예컨대, 전근대의 개체는 자신은 가짜 실체이며, 유일한 몸은 신국 내지는 교회였지만, 근대적 주체는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진리를 위해 공통된 지향을 갖는 특화된 자신이라는, 이른바 국가라는 유기체적 몸의 지체로서의 개체적 신체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학교제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체주의적’이다. 이것은 바우만이 근대성 자체가 전체주의적이었다고 단언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관행인 집단 체조, 교복, 교과서에 주목한다. 이것들은 다양한 신체를 하나의 몸으로 표준화하는 역할을 한다. ‘붉은 악마’가 단 하나의 기호로 다양한 욕구를 표출했다는 것은 교육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습득한 전체주의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교과서는 우리의 관심거리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과서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내가 학생이던 시절과 크게 다른 양상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학생들에게서 ‘교과서’라는 언표는 규범성과 연관되어 있다. 즉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경우에는 교과서에 별로 구애받지 않지만, 동시에 공적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경우에는 ‘교과서적’ 관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서 성서의 지위와 유사하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심지어는 이른바 성직자조차도 성서를 그리 중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서 무지한 형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적인 태도를 취할 경우 성서는 가장 중요한 신앙 요소로 자리잡는다. 예컨대 신자들은 개신교 교회의 설교를 별로 귀담아 듣거나 살아가는데 참조하지 않으면서도, 예배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받아들인다. 또한 성직자는 설교 준비시 별로 성서의 주석에 유념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성서에 준거해서 신탁을 선포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런 점에서 교과서는 성서와 같은 정전성(canonicity)을 지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정전으로서의 교과서는 ‘공적 표현의 패턴화 장치’인 셈이다. ‘붉은 악마’가 구성원 각자의 실제 생활과는 무관하게, 공적인 태도에서 규범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바로 그들이 교과서적 인간형을 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와 교회는 공히 위기 담론에 휘말려 있다. 피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학교 교육이 학생들에게 그다지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교회가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데 여기에는 의문이 생긴다. 학교나 교회가 학생․신자들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던 시절 세상은 더 행복했는가? 성취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요즘이 더욱 고속도의 발전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거의 논리대로라면 행복은 더 많이 성취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교회는 그토록 더 커지고 싶어 했고, 국가는 그토록 국가 경쟁력 강화에 전 국민을 총동원하고자 하지 않았는가, 또한 학생들이 더 높은 성취도를 이룩하게 하려고 그 살벌한 교육 전쟁을 벌이지 않았는가? 오늘날 전례 없는 성장을 이룩한 교회와 그토록 염원하던 부국강병에 성공한 국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질적 성장’, ‘삶의 질’ 운운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오늘의 위기 담론의 요체를 두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하나는 전체가 개인을 희생시켜 왔던 것에 대한 반성이며, 다른 하나는 성취주의가 이룩한 성과가 동시에 간과할 수 없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전자는 주로 이른바 ‘포스트××’라는 탈근대 담론들에서 제기되었고, 후자는 체계의 생활세계에 대한 식민화론, 위험사회론 등과 같은 미완의 계몽 프로젝트 등에서 문제시하였다.
한데 이 두 유형의 위기론은 공히 변화된 시대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포스트근대라고 하든 포스트자본주의 시대라고 하든, 혹은 제2 근대로서의 위험사회라고 하든, 시대의 변화는 계몽적 담론 속으로 사람을 휘몰아 가는 진지함이 쇠퇴한 시대를 함축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른 위기를 예리하게 포착한 바 있다. 노동이든 전쟁이든 성이든, 부가가치 극대화를 위한 자본의 노력은 특별한 전문가 집단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단순히 소비자로서만 호명한다. 이때 소비자로서의 사람들은 시각적 매체에 의해 순간순간 제기되는 쾌락의 향유자일 뿐이며, 사건의 내면화로서의 기억의 부재, 즉 경험이 붕괴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부재한 기억을 갖고자 욕망하는 인조인간은 더욱 인간적이 되고, 망각의 상태를 향유하는 인간은 더욱 비인간적이 되는 어두운 미래상을 표현한다.
매체연구자이자 교육학자인 닐 포스트먼(Niel Postmann)은 오늘의 시대를 기술 중심의 전체주의화된 세계인 테크노폴리 사회(기술독재사회)라고 규정하면서, 비인간화된 인간의 위기를 문제제기한다. 그는 이런 사회에서는 텔레비전과 같은 시각 매체가 더욱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제는 진지함보다는 쾌락이 더욱 삶의 방식을 좌우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된 논지의 하나인 ‘교육의 종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제안된다. 성취주의에 몰두해왔던 교육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세속적 성공에만 치중했던 학교는, 이제 더욱 강력한 성취주의적 기재인 시각 매체 앞에서 그 존재 가치가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말과 행동을 패턴화하며, 학교적 훈육의 장치에 의해 규율되기보다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즐기는 가운데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얘기다. ‘붉은 악마’의 즐김의 정치학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엄숙한 훈육 없이도 국가주의를 구현했다. 한데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국가주의인가를 유념해야 한다. 즐김의 정치학은 감수성을 특정 영역 속으로 과대하게 쏟아 붓게 함으로서 다른 부문에 대한 감수성을 무력화시키곤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국가주의가 어떤 영역과 과민하게 코드화되었으며, 어떤 영역으로부터 탈코드화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월드컵의 국가주의는 동시에 자본주의와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진단에 동의한다면 포스트먼의 대안적 제안은 황당한 듯 하면서도 여전히 경청할만하다. 그는 학교가 성취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하나로 수렴하는 추상적인 절대진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파괴성을 인식하고 지구에 대한 겸허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동일한 목표로 나아가고 자신의 성공이 곧 전체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는 영웅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일매일 마주치는 것 하나하나에 섬세한 감수성을 개발하는 데 교육의 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테크노폴리 사회가 지향하는 원리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성찰하는 것을 학교교육이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며, 사회 구석구석 침투해 있는 전체주의와 전방위적 투쟁을 벌이는 성찰적 인간을 추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제도적 시각에서 보면 불가능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것을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공허한 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것은 포스트먼 버전의 탈학교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종의 교육 윤리로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관한 쓸 만한 지침이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교사의 책임에 관한 얘기로 지루한 나의 얘기를 마치려 한다. 나는 근자에 탈신학의 맥락에서 목사를 교회의 성취주의를 해체하는 자로 설정한 바 있다. 그것은 성취주의와 교회를 분리하는 구체적인 실천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 실천 범주는 신앙과 관련된 전방위 영역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실천에서 성직자의 중요성은 교회도 직능에 있어서 전문화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즉 성직자는 교회와 관련되어 유통되는 정보를 더 많이 접할 수 있고, 여전히 한정적일지라도 일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정보의 관행적 흐름에 약간의 변형을 가할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성직자 자신이 그러한 정보의 성취주의적 코드화를 당연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을 자명하게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성찰적 자세를 취할 수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자리를 전복시키는 상상력을 경유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성찰적일 수 없다. 즉 탈교회, 탈신학의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교사는 학교를 통해 흐르는 정보를 조절하는 전문가의 직책을 수행하는 존재다. 그것은 단지 교과목에 한정되지 않는다. 학생과 개인적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사는 학생에게 하나의 모델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수학교사이거나 영어교사 또는 과학교사로서의 모범형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학생은 어느 형태로든 인간으로서 교사를 모방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교사는 학교를 매개로 해서 일어나는 일체의 정보를 읽어내려 노력해야 하며, 그것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관행처럼 여기는 자세에서는 결코 파악되지 않는다. 탈학교의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안에 있지만 밖에 있는 자처럼 보고 읽고 분석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살기 위해 자기를 투신하도록 부름받은 자임을 인지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존재, 진리에 섣부르게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랑하며, 규격화되지 않는 변화무쌍한 삶의 아름다움의 이야기꾼인 해석자(interpreter)여 복이 있으라! 그대가 열망하던 참교육의 땅이 네 앞에 있도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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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기, 〈멋진 신세계의 즐거운 악몽―인공낙원의 그늘에서〉, 《세계의 문학》 97(2000 가을).
―, 〈왜 ‘물렁물렁하고 가벼운’ 현대인가―지그문트 바우먼의 ‘유동성 현대’를 중심으로〉, 《세계의 문학》 99(2001 봄).
닐 포스트먼, 《교육의 종말》(문예출판사, 1999).
―, 《죽도록 즐기기》(참미디어, 1997).
―, 《테크노폴리》(민음사, 2001).
류 신, 〈아르고스의 눈〉, 《작가들》 2(2000, 여름).
서동욱 장유경, 〈고기옷―패션은 우상숭배인가?〉, 《문학인》 창간호(2002 여름).
스캇 래쉬, 조나단 프리드만 (엮음), 《현대성과 정체성》(현대미학사, 1997).
안토니 기든스, 울리히 벡, 스캇 래쉬, 《성찰적 근대화》(한울, 1998).
지그문트 바우만 외, 임지현 엮음, 《노동의 세기―실패한 프로젝트?》(삼인, 2000).
지그문트 바우만, 《자유―지성의 근본주의》(이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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