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교회의 공공성, 지역과 삶 속으로>라는 주제의 도시공동체연구소 심포지엄 때(2011 03 29)에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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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의 공공성, 그 가능성을 찾아
교회는 ‘공공적’인가
유럽의 ‘국가교회’(state-church)에서 교회의 공공성은 국가 차원에서 형성되었다. 반면 미국적 ‘교파교회’(denomination-church)에서는 국가 차원의 공공성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훨씬 지체되었다. 중앙정부(연방정부)가 지방정부를 효과적으로 통합할 사회적 정치적 수단이 매우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자율성이 매우 강했고, 지방정부도 각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한 정치적, 사회적 장치를 결여하고 있었던 탓에 마을 단위의 자치가 중요했다. 하여 순회재판관이나 연방경찰보다는 마을의 보안관이 치안의 핵심이었으며 교회의 목사가 담당하던 공적 역할이 종교 차원을 넘어 법적, 정치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교회당은 곧 마을의 공회당이었고, 심지어는 재판정이기도 했다. 즉 미국의 교회는 원칙적으로 지방교회(lacal-church)였고, 공공성도 지방성(locality)을 더 강하게 지녔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회는 어떤가? 한국의 교회는 신앙양식, 신앙제도, 재정상황 등에서 미국교회에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국가교회적 성격보다는 미국적인 교파교회적 성격이 강한 종교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매우 오래되고 안정된 국경 개념이 있었고, 중앙과 지방간의 소통의 미디어가 원시적인 상황에서도 매우 잘 짜인 체제적 통합(systemic integration)을 이룬 사회였다. 특히 개신교 선교가 활발하던 식민지 시대에는 열차와 우편체제가 과거와는 달리 매우 신속한 시공간적 소통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정도가 비교적 높은 사회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교파교회적 성격을 띠면서도 동시에 교파 간 차이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또한 지방교회(lacal-church)의 성격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민족교회’(imaginary blood-nation-church)로서의 성격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있다. 1906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 전반에서 미국계 선교사들의 영향이 강해진데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군이나 청군의 군대로부터 안전한 공간이 되기 위해 십자가와 함께 성조기를 걸어 놓는, 미국적 공간으로서의 교회라는 전통이 강고하게 형성되었다. 여기에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한국인 지도자들이, 선교사들이 부재하던 1930년대 후반 이후 교회를 주도했고, 1920년대 후반 이후 좌익계 민족주의적 지도자들이 교회로부터 대거 이탈하게 됨으로서 교회에서 숭미주의가 신앙의 커다란 기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교회는 한편에서는 민족교회적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미국적 제국주의의 첨병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colonial church). 이것은 한국의 교회가 민족교회이면서도 민족적 공공성과 식민지적 공공성이 중층적으로 결합되는 양상을 띠게 되는 이유가 된다.
또 북한에서 토지개혁 이후 월남한 기독교도들이 남한 교회의 주류를 형성함으로써, 이념적 편향성과 아울러 계급적 편향성 또한 강한 신앙전통을 가졌다. 여기에 최근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중상위 계층적 가치 친화성을 점점 더 강하게 띠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교회의 담론이 계층적 차원에서든 계급적 차원에서든 혹은 이념적 차원에서든 공공성을 띤 언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건국 이후 오랫동안 남한교회는 거의 언제나 국가와 친화적이었는데, 이때 국가의 성격이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한 정부인 탓에 교회는 권위주의적 정치, 사회, 문화에 친화적인 신앙담론을 제도화했다. 이는 국가교회적 성격 또한 한국교회가 내재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정교분리의 신앙전통은 이러한 정교담합의 과정을 밀실에서 수행하게 함으로서 국가교회적 공공성이 결여되게 되었다.
위에서 간략히 본 것처럼 한국의 교회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지니며, 또한 어떤 점에서도 공공적 가치를 신앙화하는 데 실패한 제도와 담론을 가지고 있다.
공공성과 로컬리티, 그리고 교회
이 글은 한국의 교회가 공공성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일종의 교회의 신앙제도에 대한 공공성 관점의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역과 삶 속으로’라는 심포지엄 주제에 맞추어 나는 공공성의 문제를 지방성(locality)과 연관시켜 논의하고자 한다.
우선 교회와 관련해서 지방성의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와 중형, 그리고 소형교회는, 교회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든, 장소 분산성(dispersion of place)이 크다는 점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지방성’의 개념을 장소에 국한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개념적 개연성이 적다. 계층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에는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는데, 그것 역시 크기에 따른 차등성이 적다. 또한 성별 비율도 별로 다르지 않으며, 직업도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중대형교회와 소형교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중대형교회는 소통을 위해서 반드시 ‘매개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하며, 소통을 위한 전략을 실행에 옮길 때도 복잡한 의사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연령별, 거주지별, 성별, 직능별 대표자를 안배한 매개조직을 통해 다양한 의제들이 제안되지 않으면 교회의 사회적 통합은 쉽지 않다. 그런데 교회는 통합의 사회적, 정치적 기재의 발달이 정치사회나 시민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체되어 있는 반면, 권위적 통합의 기재는 더 발달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좀더 권위주의적 공간이며, 최근 청년층이나 지식인층의 선교가 어려운 것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소형교회는 ‘무매개성’(immediacy)이 가능한 공동체 특성을 지닌다. 매개장치가 없어도 서로 충분히 알고 있으며, 감성의 교류를 통해 상호간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작은 교회는 일종의 ‘감성 공론장’(emotional public sphere)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여 의사결정에서 연령별, 거주지별, 성별, 직능별 대의적 성격을 지니지 않아도 된다.
다만 작은 교회들 대다수가 이러한 무매개성을 제도화하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매개장치로 가득한 중대형교회의 신앙제도를 기계적으로 추종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작은 교회들 사이에서 권위주의를 제도화하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두드러지게 많아졌다는 점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에 관하여는 뒤에 더 얘기하고, 여기서는 작은 교회들은 특성상 매개적 성격을 덜 가지는 교회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대형교회와는 구별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글에서 교회와 관련해서 지방성의 함의를 무매개성의 관점에서 정의하고자 한다.
말했듯이 무매개성은 탈권위주의적 신앙제도와 신앙담론을 발전시킬 가능성에 더욱 많이 열려 있다. 하여 이것은 교회 내적으로 ‘수평적 연결망’이 강한, 보다 소통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신앙적 제도와 담론은 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외부’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작기 때문에 다른 교회, 다른 종교단체, 다른 시민단체 등과 보다 탈권위적으로 네트워크되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주변에 대해 보다 탈권위적인 관계인식을 가질 수 있으며, 보다 대화적인 태도로 이웃을 대면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작은 교회는 교회가 공공적 기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러한 개혁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작은 실험들
(1) 설교 나눔의 경우
공공성은 공동체 성원들 간의 소통을 토대로 한다. 그런 점에서 예배의 일방향성은 신앙제도의 위기의 핵심이다. 교회의 신앙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예배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신교 예배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설교는 신앙제도의 많은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위기의 핵심이다.
교회의 설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설교자의 권위와 관련이 있다. 종교 개혁기부터 유래한 설교 신학의 강령은 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 곧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명제에 집약되어 있다. 설교자의 설교가 곧 하느님의 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그이를 신의 대리자로, 혹은 신의 모상(image)으로 가정해야 한다.
이것은 제도적으로 설교자적 ‘소명의 주관성’을 ‘소명의 객관성’으로 보충함으로써 실행된다. 즉 설교에서 하느님의 말을 대언하는 자는 그러한 신의 소명을 받음으로서 가능한 것인데, 이 (주관적) 소명의 상황은 그이와 신 사이의 내밀한 것이므로 공증이 필요하다. 곧 외적 준거가 필요하게 된다. 그 외적 준거가 바로 소명의 객관성인데, 교회법상 목사 안수를 받은 이만이 설교를 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즉 신학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급의 목회 사역자 경력을 일정 기간을 수행하고, 그이를 목사로 청빙하는 교회가 있을 때에만 설교권을 갖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지에 동의할 수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은 설교를 하느님의 말로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라는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물론 굉장히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고 있다. 설교자의 말에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 버리는 신자는 굉장히 많다. 더욱이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최근 설교비평이라는 비평 장르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바로 그러한 의심이 얼마나 만연한 상황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회밖, 일상어에서 ‘설교한다’는 표현은 애정도 없고 깊은 의미도 없으며, 입에 발린 훈계의 말 따위를 지칭할 때 쓰이는 용어다.
그런데 설교 이후 교인들이 둘러 않아 토론을 하는 과정을 예배 순서의 일부로 포함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설교자의 말을 놓고 사람들이 질문을 하고, 논쟁을 하며, 거기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삼아 각자 자신의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파라처치’(para-church)에서 흔히 사용되는 성서연구 방법의 하나이며, 이를 예배에 도입한 교회도 일부 존재한다.
이때 설교자의 말 자체가 하느님의 말이 아니지만, 그 말을 화두 삼아 교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말을 서로 발견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하느님의 말을 듣는 과정이라고 하는 신학적 논제가 제기된다. 즉 하느님의 말은 타인의 말을 듣는 과정이고, 그것에 대해 자기를 나누는 과정이며, 거기에서 생각 나눔에 동참한 이들이 각자 느끼는 의미가 바로 하느님과 그이들이 나눈 대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갈등이 포함된다. 공공성은 소통을 필수요건으로 하며, 그 소통은 서로 화합하는 대화만이 아니라 갈등을 수반하는 대화라는 아이리스 영(Iris M. Young)의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를 감안하면, 이러한 대화 나눔의 설교는 공공성을 발견하고 형성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언급하면, 설교를 이렇게 이해할 때 설교자를 특화된 자격을 갖춘 이로 한정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누구든 설교자가 될 수 있다. 물론 남들보다 보다 체계적으로 말을 건네는 자질을 갖춘 이가 설교자의 자격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작은 교회는 그러한 자격을 위한 외적 공증보다는 친밀한 관계를 통해 형성된 신뢰를 통해 그이의 자격을 공증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 나눔의 설교가 가능한 공동체는 무매개성이라는 지방성에 걸맞은 규모의 공동체여야 한다.
한데 위에서 말했듯이, 설교는 교회의 신앙제도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동시에 신앙제도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설교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의 변화는 보다 대화적인 방식으로 교회 내외의 타자들과 관계할 수 있는 심성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말을 듣는 과정, 그 말에 대해 반응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관계적 자아, 곧 상대와 엮인 관계적 주체(상호주관성)로 생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말했듯이, 이것은 갈등을 수반하는 대화이며, 하나로 결론내리는 대화가 아니라 서로가 관계적 주체임을 확인하는 대화이다. 그런 점에서 대화 나눔의 설교는 교회와 교인을, 예배에서 뿐 아니라 일상의 관계에서 공공성 주체로 변화시킬 수 있다.
(2) 소모임
은퇴한 노년의 상담사가 소모임을 활성화하자는 교회의 취지에 따라 제안을 했다. 자신과 대화하는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든 대화가 필요한 이(들)이 전화나 이메일을 보내면 그이와 수다를 나누는 만남을 갖겠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만남은 교인에 한정되지 않았다. 교인의 소개를 받고, 누구든 연락을 하면 되었다.
이 사람은 물론 상담사로서 충분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의 경력을 보여주는 외적 표지 없이 교회 안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만으로 공동체는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마도 큰 교회였다면, 그이가 혹시 다른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의사결정 과정의 경로를 따라 논의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개 그렇듯이 내담자든 교회든 그 상담사에게 어떤 보상을 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는 그러한 활동을 하는데, 외적 표지도 검증 절차도 봉사에 대한 보상 시스템도 합의할 필요가 없었다. 작은 교회는 상담이라는 행위를 사적 의료행위가 아닌 공공적 행위로 소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데 보다 적합한 기구적 틀을 갖추었던 것이다.
(3) 타자성의 문제
타자성은 소통의 단절을 통해 나타난다. 물리적 거리로 인해 알지 못하는 이(들)와의 소통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사회적 거리로 인한 소통 부재는 극복되어야 한다. 가령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이와의 대화에 장애를 가진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결국 외톨이로 남곤 한다. 동성애나 도착 같은 성향의 성적 소수자의 경우도 그렇다. 혹은 사적인 불행들로 이상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 주변 사람으로부터 오해의 대상이 되고 외면당하기 쉽다.
그런 이들은 그이를 잘 아는 주변의 지인들 몇과는 간혹 대화를 할 수 있지만, 대개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며, 그런 사정은 공동체 전체의 합의 과정에서는 무시되는 일이 흔하다. 타자성은 이렇게 소통의 장벽으로 인해, 그이의 소리를 듣지 못하며, 그이의 존재를 무시하게 된다. 즉 소통의 부재는 소수자의 소리의 부재를 낳고, 결과적으로 그이의 존재의 부재로 해석되는 것이다.
공공성의 난맥은 바로 여기에서 온다. 합의가 있든 갈등이 있든, 소통 중에 상호간의 연결망이 형성되고 그러한 상호주체성에서 공동체의 공공적인 특성이 나타나는 것인데, 대화가 단절되고 소리가 부재하며 존재가 부재하다면, 곧 존재함에도 존재가 각인되지 않는 이, 곧 타자는 그러한 공공성에서 배제되고 마는 것이다.
한데 작은 공동체는 바로 그런 소수자의 고백을 듣는 공적 모임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교회는 예배에서 기도 대신에 그러한 고백의 나눔을 제도화했고, 다른 교회는 예배 이후에 생활나눔을 제도화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공동체 전체가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말더듬기, 이미 한 말을 되풀이해서 말하기, 부적절하게 말하기 등, 그이의 사회적 장애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공동체가 고백의 형식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가 소수자의 소리를 듣는 체험에 열리게 한다. 타자성이 공공성의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공공성, 삶 속으로
나는 무매개성을 지구화시대 교회의 지방성을 논하는 특성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통한 작은 교회의 가능성들을 몇 가지 실행되고 있는 사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규모가 큰 교회는 그러한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수용하기가 어렵지만 작은 교회는 그러한 변화에 보다 열려 있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가 되기를 열망하고 큰 교회의 모델 따라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성공확률이 매우 적다. 더욱이 이럴 때 교회의 담론은 공공성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오늘 교회가 겪고 있는 선교상의 장애를, 큰 교회 따라하기에 몰두하는 작은 교회는 더 적나라하게 체험한다. 실제로 큰 교회들은 규모를 유지하거나 더 많은 이들의 신자화에 성공하는 반면, 중소형 교회들은 점점 더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큰 교회의 성공은 교회가 공공적 가치를 더 많이 담아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큰 교회가 가진 사회적 유인 조건이 더 크기 때문에 규모의 ‘유지’나 ‘확대’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끊임없이 공공성의 위기를 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중소형교회의 위기로서 전가된다.
반면 무매개성을 기회로 하여 작동하는 작은 교회들의 개혁은 ‘작은 교회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향해 열린다. 그것은 성직자 중심주의가 아니고, 교회 중심주의가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의 수평적 관계망을 열어놓고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망을 확대시킨다. 나아가 타자들, 소통의 장벽 저편의 존재들에게도 열린 공공성을 형성할 가능성을 확장시킬 기회를 제공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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