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본래 ‘민중신학은 바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한 교인이 질문한 것에 대해 한백교회에서 강연형식을 띤 설교로 세 번에 걸쳐 3개월간 답변한 것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이후 김창락 교수의 고희기념논문집인 [다마스쿠스 길목에서 의에 대해 묻다. 시대와 민중신학 9] (2006)에서 민중신학자로서의 그의 학문적 기여의 핵심으로 '바울의 의인론'에 대한 그의 재해석에 둠으로써, 위의 강연 글을 다듬고 정리하여 이 책에 수록하였습니다.
세 편의 강연 제목이자 이 글의 세 장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낯선 바울에게 말을 걸다: 바울, 그의 이력서
2. 낯선 의인론이 내게 말을 걸다: 바울의 현장 신학
3. 의인론과 종말론: 낯선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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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을 비판하는 글들 중에는 종종 ‘성서를 편중해서 본다’는 내용을 언급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민중신학자들이 자기들이 선호하는 구절들만을 선별해서 얘기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 중에는 신학자들도 적지 않지만, 현대 성서학에 대한 초보적인 소견이라도 갖춘 이라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성서는 긴 세월동안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다양한 텍스트들의 모음집이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너무 천차만별이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을 하는 성서를 편중되게 보지 않으면서 특정한 관점을 갖는 신학을 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한 텍스트를 중심에 놓고 다른 것들을 거기에 꿰어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들에 부딪치겠지요.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면 그런 난관은 자기 믿음이 부족해서 아직 해독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면 되니까요.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명쾌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성직자들도 그런 주장을 펴왔지요. 사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리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학이 밥벌이의 수단인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신학은 ‘이런 생각들이 주관적이다’라고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학이라는 학문은 객관적으로 성서를 읽어낼 수 있다고 믿는 믿음 위에서 성립한 학문인 것입니다. 그러니 신학자들은 편중해서 성서를 읽는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성서학적 관점에서 성서는 편중해서 읽지 않을 수 없는 성격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성서를 편중해서 읽으면서 성립되어 온 신앙제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로, 그리고 현대 최고의 신학자라고 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에 이르는, 교회의 신학을 구축해온 걸출한 신학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이 성서와 신학을 보는 시선의 중심에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를 읽는 주관적 시선을 바울의 텍스트라는 안경을 통해서 발견했던 것이지요.
한편 안병무 선생은 민중신학의 성서적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그 동안 교회에서 성서를 읽는 안경 노릇을 해왔던 바울 텍스트 대신 다른 텍스트를 강조합니다. 〈마르코복음〉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부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을 비판하면서 성서를 편중되게 해석했다는 주장은 실은 자기들이 성서의 골간으로 보았던 바울의 텍스트를 자기들만큼 부각시키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병무 선생이 〈마르코복음〉을 중요시한 것은 바울보다는 ‘예수’를 통해 교회와 신학을 말해야 한다는 주장과 관련됩니다. 이 주장은 실은 교회에 문제를 느끼고 있던 선생이 교회론의 성서적 배후였던 바울 대신에, 바울 신앙의 토대였던 이인 예수를 통해 교회를 근원부터 다시 살피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해서 선생은 평생을 ‘역사의 예수’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선생이 바울의 텍스트를 간과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주의자들이 그렇게 해왔듯이 바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교회를 전제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제로 하여 바울을 읽었던 것이지요. 선생에게서 신학과 성서를 보는 틀은 바울이나 교회가 아니라 ‘예수’였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는 교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그의 후계자들 중 일부가 만들었고, 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분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후계자들은 바울을 토대로 해서 교회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예수⇒바울⇒교회주의’는 예수가 해석되고 승계된 예수운동적이고 신학적인 하나의 계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에서 비롯되는 다른 계보들은 오늘날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그 이유의 하나는 바울 이후 두 세기가 채 안 된 시기부터 교회주의자들이 패권주의적 열망에 가득차서 다른 운동과 신학의 계보들을 제거하는 데 몰두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병무 선생은 바울 연구자가 아닙니다. 즉 바울에 대한 전문적 소양을 갖춘 학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교회의 신학적 토대처럼 받아들여지는 바울을 의도적으로 피한 점도 있습니다. 해서 선생의 글 속에서 바울은 그리 많이 다뤄지지 않습니다. 말년에 바울에 관한 다섯 편의 짧은 연재글을 쓴 것이, 내가 아는 한, 선생이 바울에 관해 체계적으로 논한 거의 유일한 것입니다. 2 다른 글들에서 선생은 바울을 비판할 때 종종 그를 교회주의자로 여기고 있지만, 이 글들에선 바울은 교회주의자가 아닙니다. 즉 ‘예수⇒바울⇒교회주의’라는 발전 도식에서 교회주의의 시선에서 바울을 읽고 예수를 읽었던 신학적 관습에 대해서 선생은 그 역순으로 성서와 신학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계승한 지점에 주목하면서 그 이후의 교회주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한편 민중신학자 중 바울을 전문적으로 다룬 분은 김창락 선생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현대 성서학적 지평 속에서 바울이 체계적으로 소개되고, 그것을 다시 민중신학적 틀로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나는 민중신학이 이룩한 성서 해석에서 가장 빛나는 학문적 성과를 꼽으라면 단연 안병무 선생의 〈마르코복음〉 연구인 ‘오클로스론’과 바로 김창락 선생의 바울 해석을 들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글은 김창락 선생에 의해 민중신학적으로 세공된 바울을 소개하고 보충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세 장으로 나누어 전개하고자 하는데, 첫 번째 장은 바울이라는 인물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이고, 둘째 장은 바울 자신이 선교한 교회에서 폈던 주장들, 특히 이런 의미에서 가장 대표적인 바울의 현장 신학이라 할 수 있는 ‘의인론’을 살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선, 바울의 현장 신학의 지평을 넘어서, 그의 전 세계적인 전망에 초점을 두고 그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목회 현장의 문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된 서신들에서 굳지 말할 필요가 없었던, 하지만 슬쩍 드러나곤 하는 그의 최후적 비전, 그 종말적 꿈에 관한 것이지요.
하나 더 언급할 것은, 이 글 전체의 구도가 김창락 선생의 의인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주제는 글의 구성에서 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선생의 의인론 속에 스며있는 민중신학적 문제의식에 의존해서, 바울에 대한 통전적 해석을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발전시켜 보려는 것입니다.
한데 이러한 바울 이해는 우리에게, 특히 교회에게는 매우 ‘낯선’ 것입니다. 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해온 바울에 대한 편견 탓에 낯선 것이지요. 바로 그러한 편견을 넘어서 바울을 읽어내기 위해 저는 ‘낯선 바울’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1. ‘낯선 바울’에게 말을 걸다: 바울, 그의 이력서
자료
바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참고해야 할까요?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도행전〉입니다. 복잡한 얘기는 생략하고 결론만 얘기하면, 이 텍스트는 바울에 관한 자료를 저자의 관점에서 대단히 심하게 각색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바울을 이해하는 데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보다는 당연히 바울 자신의 진술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3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바울 자신이 저술한 서신들도 자기의 사상을 총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특정 지역의 선교활동과 관련된 현안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과 실천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서신들의 가능성뿐 아니라 제한적 요소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출신지와 신분
바울은 자신의 고향을 한 번도 스스로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그가 길리가아의 다르소 출신이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나자렛 (출신) 예수’라는 말처럼, 바울에게 붙여진 출신지명을 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루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다르소’는 바울의 고향이라는 것 외에 어떠한 중요성도 지니지 않습니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가 ‘로마시민’이었느냐는 점입니다. 바울은 한 번도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역시 〈사도행전〉만이 그를 ‘로마시민’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을 언급하는 장면들(〈사도〉 16,37~38; 22,22~29; 25,9이하 등)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극적이고, 상류층 사람들을 가급적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그리고 로마제국의 당국자들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호들갑스럽게 내보이려는 상투적인 〈루가복음〉-〈사도행전〉적 언술 양식과 부합합니다. 반면 바울은 자기를 과시하는 장면에서조차, 자기가 ‘자유민’이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시민권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나 지식에 있어 그다지 대단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실토하고 있습니다(〈고전〉 1,18~2,5 참조). 이것은 그가 ‘로마시민’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강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로마시민’이라는 말이 〈사도행전〉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특권계급을 나타낸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입니다. 왜냐면 로마제국의 시민권 부여 정책은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입니다. 즉 시민권을 가진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사람도 적지 아니 있었고, 반대로 시민권을 지니지 못한 특권층도 상당히 많았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서신에서 시사되는 신분적 정보는, 그가 ‘문자계층’이라는 것, ‘바리사이파 출신’이라는 것, 율법의 정결례를 엄격히 지킬 수 있는 사람 4이라는 것, 자유민이라는 것 등입니다. 또한 그가 선교 활동 중에 ‘노동’을 했다는 것은 그가 극상층 신분의 사람이었다고 통상적으로 알려진 가정이 빈약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아마도 그는, 로마시민이든 아니든, 특권계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반대로 대도시의 상당수를 점하고 있던 극빈층 또한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박해자
한편 바울은 전향 이전에 예수운동에 대한 박해자였음이 분명합니다(〈고전〉 15,9). 이것은 그가 율법에 열정적인(젤로테스 ζηλωτης; 〈갈라〉 1,14)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는 디아스포라 출신이지만 예루살렘으로 유학 와서, 가말리엘 1세 문하로 들어간 라삐 지망생이었는데, 그곳에서 스테파노가 투석형을 받을 때 일종의 ‘자원 경찰’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그 박해 활동지가 예루살렘이었는지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자기 진술로부터 알 수 있는 확실한 정보는, 예수 추종자로서 활동을 벌였던 첫 지역이 다마스쿠스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다마스쿠스는 그가 박해자로서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다마스쿠스가 나바테아 왕국(Nabataean kingdom)의 영토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예루살렘 성전 대사제의 위임을 받아 박해활동을 폈다는 〈사도행전〉의 주장은 역사적 개연성이 적습니다. 공적 지도자인 대사제가 남의 나라 영토에, 그것도 돈독한 우방국가라고 결코 할 수 없는 나라에서, 특정집단에 대한 테러를 명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 그보다는 바울의 박해활동은 그곳에 있던 유대교 회당의 비공식적 테러 행위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예수 처형 직후 유대교권 전역에서 일시적인 공안정국이 기승을 부렸을 수 있고, 이런 시대 분위기에 편승하여 다마스쿠스에서도 유대 보수주의자들이 민중적 메시아론을 주장하는 도당들에 대해 우익테러를 감행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박해활동은 필경 이런 배경에서 유래하였겠지요.
전향
바울은 자신이 저술한 서신들 도처에서 ‘박해당하는 자’로서의 자기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즉 바리사이였다가 예수 추종자로로 바뀐 것은 ‘박해자’에서 ‘박해당하는 자’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박해에 관한 묘사에서, 〈사도행전〉 6의 묘사와는 달리,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를 지배하는 권력 일반이 그의 적대자로 언급되고 있습니다(〈고후〉 11,23b~27). 이 세계의 자연스런 질서 일반과 불화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즉 박해자에서 피박해자로의 전환은 ‘권력’에 대한 전선의 이동, 즉 전향(轉向)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전에 박해자였을 땐 ‘적’을 척결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고, 그것이 그에겐 정당한 권력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한데 이제 그는 그러한 권력 일반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필경 이제 그에겐 ‘정당한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전자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이의 태도를 반영한다면, 후자는 권력 박탈의 상황에 있는 존재, 권력에 의해 타자로만 대상화될 뿐인 존재의 시선을 나타내겠지요. 요컨대 바울의 전향은 정당한 권력을 찾아 신앙적 실천을 모색하던 이가 권력 박탈의 시선에서 권력 일체와 대결을 하는 것으로의 전선 이동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향 시기
그렇다면 바울의 이러한 전향 시기는 언제일까요? 아마도 주후 36년경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큽니다. 우선 그의 전향은 ‘예수의 처형’을 둘러싼 대중적 담론의 열기가 아직 강렬하던 시기, 그래서 예수 운동에 대한 과잉진압이 필요했을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행전〉의 스테파노에 대한 투석형 기사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면, 이런 박해가 일어났을 법한 시기는 예루살렘에 총독이 일시적으로 부재하여 공권의 통제력에 공백이 생기던 때인 주후 36년일 것이라고 보는 게 가장 그럴 듯합니다.
이때는 70대의 노황제 티베리우스 말기(그는 주후 37년에 사망합니다)의 통치권 누수 현상이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그런 상황은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이자 실력자인 세야누스의 후광을 받아왔던 팔레스티나의 총독 빌라도(Pontius Pilate. 그는 26~36년에 유다, 이두메아, 사마리아 지방의 Procurator였다)에겐 어느 때보다도 중대한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급기야 새로 부임한 시리아 태수(Legate) 비텔리우스에 의해 파면당하는데, 이 시기가 바로 주후 36년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빌라도의 후견 아래 대사제직을 수행하던 가야파의 실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빌라도를 파면한 비텔리우스가 예루살렘의 내정에 깊이 개입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는 36년 안티파스 영토를 침공한 나바테아 족속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긴급히 출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에서는 일시적으로 로마 권력에 공백이 생겼고, 따라서 가야파의 후임 대사제로 임명된 요나단이 잠시 유대 지방에 대한 자율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스테파노를 (로마식 극형법인 십자가형이 아닌) 유대식 극형법인 투석형으로 처형했던 배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8
바울의 전향 이후의 초기 활동지였던 다마스쿠스는 나바테아 족속의 영토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아레타 왕의 경찰 감시망을 패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와 아라비아로 도주했다고 합니다(〈고후〉 11,32~33). ‘아라비아’는 모호한 지명표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포괄적인 표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둘 다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다마스쿠스로 되돌아 왔고, 그로부터 3년 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합니다(〈갈라〉 1,17). 그리고 보름간의 예루살렘 체류 후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고 합니다(〈갈라〉 1,21).
전향 이후
“14년 후” 그는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지도자들에게 이방인 선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게 됩니다(〈갈라〉2,1~10). 이때 이 ‘14년 후’라는 표현이 언제를 기점으로 하는 계산법인지는 불명확합니다. 위의 [표1]에서 <1>~<5>가 14년의 차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각각 <2> <3> <4>와의 간격이 그렇다는 뜻인지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전향시기로부터 14년(만 13년) 후인 주후 49년 이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였습니다. 특히 야고보의 지도력이 두드러졌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야고보의 노선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유대교로의 개종’론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전-회당 체계의 규범적 정당성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으로, 예수운동의 윤리적 급진주의를 완화시킨 형태임을 의미합니다. 예수 식의 떠돌이 운동으로부터 지역에 정착한 공동체 운동으로 운동 양식이 변화한다고 할 때, 야고보 류의 노선이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이해할만 합니다. 즉 기성의 윤리를 해체하는 데 주력했던 떠돌이형 예수운동이 정착지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윤리를 발전시켜야 했고, 그것이 바로 예수운동이 교회운동으로 전화하는 데 수반된 사회적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이른바 ‘야고보주의’가 예루살렘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데 그렇다고 야고보 류의 팔레스티나적 교회신학의 탄생이 예수운동의 체제내화를 의미한다고 단순히 폄하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스테파노의 처형 이후, 요한의 형 야고보의 처형(42년),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의 처형(62년) 등, 예수 추종 집단은 예루살렘에서 지속적으로 당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세력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 박해에 대해서 로마에게는 면죄부를 주려는 경향이 있는 〈루가복음〉-〈사도행전〉과는 달리, 실제로 성전 당국의 입장은 로마 당국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일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예루살렘의 예수운동을 박해한 주역이 ‘젤롯데’였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 또한 전혀 사실 무근입니다. 이런 해석을 내리는 이들은 ‘젤로테스’라는 말이 박해의 가해자로 나올 땐 언제나 ‘잘 조직된’ 정파로서의 ‘젤롯당’이라고 해석하는 반면, 바울이 율법에 ‘젤로테스’하다고 할 땐, 그것을 ‘열광적’이라고 해석하는 모순을 범합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야고보파의 견해에 극한 대립적 입장을 취한 바울의 견해는 이방인을 유대교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처럼 윤리를 해체하자는 주장은 아닙니다. 바울은 여러 부분에서 기성의 공동체 윤리를 옹호하고 있었지요. 즉 그 역시 지역 공동체의 시각에서 예수운동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야고보와의 차이점은 비팔레스티나적 배경에서 활동했던 상황, 변화된 선교 상황과 연결됩니다. 즉 바울은 비팔레스티나 지역에서의 유대교화 전략이 예수운동을 계승하는 데 있어 중대한 한계가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바울의 신학 중의 신학인 ‘의인론’을 다룰 때에 쫌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 회담에서 자신의 논변이 정당성을 얻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의 활동기 내내 바울계열의 공동체 안에서의 논쟁거리였습니다.
처형, 그 이유
마지막으로 바울의 활동을 이야기하는 데서 주목할 것은, 이 회담에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물질적 지원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갈라〉 2,10)과 결부됩니다. 바울의 서신들에 따르면, 그는 마케도니아의 교회들,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 등, 자기를 따르는 공동체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모금을 했습니다. 명분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 마련입니다. 바울의 활동에서 이것은 결코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의 핵심적인 것의 하나로 이런 활동을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대체로 학자들은 바울의 이런 행각을 40년대 후반 지중해 동부지역을 휩쓴 대기근과 관련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 모금을 굳이 예루살렘을 후원하는 용도로만 주장하고 있을까요? 팔레스티나 뿐 아니라 지중해 동부지역에는 예수공동체들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40년대 말의 상황이 팔레스티나, 특히 예루살렘에서 급전직하로 정치적 아노미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시카리’라는 혁명적 테러리스트의 활동이 시작된 시기도 바로 이때부터였고, 예언자들의 종말론적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져 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대중의 저항이 다각도에서 급속도로 활성화되던 시기에 바울은 다른 지역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모든 유대교 계열의 종말론적 메시아 운동의 센터인 그곳으로 자금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활동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3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도 결코 중립적인, 비정치적인 구호기금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유대교권(회당)에서든 비유대교권에서든, 팔레스티나에서든 비팔레스티나에서든, 한결같이 공권력의 억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체류기에 관한 〈사도행전〉의 보도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면, 바울의 주된 적대자는 대중이 아니라 성전 당국자였습니다. 또한 이 텍스트는 유대 전쟁이 발발하기 몇 년 전, 즉 팔레스티나에서의 정치적 혼란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던 즈음, 그는 로마시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다고 전합니다. 즉 로마 황제에게도 그 위험성이 주목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6년, 네로 통치 말기, 제국 전역에 혼란의 회오리가 불기 몇 년 전에, 또 팔레스티나에서 대대적인 반로마 봉기가 일어나던 그 몇 해 전에, 예수운동의 승계자이자 대표적인 활동가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처형당한 바로 그때, 그곳에서.
정리 및 결론
예수운동의 한 승계자 바울,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진정한 창시자였다고 말합니다.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후 해석일 뿐입니다. 즉 그리스도교의 주류적 전개가 바울 해석에서 그 정형화된 신학적, 신앙적 틀을 갖추게 된 사실에서 거꾸로 바울에게로 역추론해 가서 평가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종교의 창시를 위해서 인생을 걸고 투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삶과 실천은 한마디로 ‘예수운동의 부활을 위한 분투’였다고 단정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규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자신이 주도한 예수운동의 변형에 기여했습니다. 예수는 지역공동체를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바울은 지역공동체인 교회를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당시의 예수운동에서는 떠돌이 예언자들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바울의 예수운동에서는 공동체 조직가의 활동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는 농촌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반면 바울은 대도시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주의가 압도하던 상황에서 활동했으나, 바울은 비유대 지역,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주의가 활개치던 미시적 현장 한 가운데서 활동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울의 예수 해석에 개입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운동을 새로운 상황에서 재해석했으며, 이것은 예수운동의 변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분명 유대인이었고, (엄밀히 팔레스티나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유대 메시아사상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팔레스티나적 유대주의와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변혁은 야훼 하느님의 실천과 결부되었다고 믿었고, 하느님의 변혁행위의 중심 무대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현실 체제의 변혁을 꿈꿨으며, 그것을 위해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이 메시아 사건이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예수운동가이며, 예수의 승계자임이 분명합니다. 요컨대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스테파노⇒바울’로 이어지는 계보학적 연속성을 바로 ‘예수 메시아주의’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낯선 의인론(義認論)’이 내게 말을 걸다: 바울의 현장 신학
앞 장에서 예수운동에 대한 박해자이자 열렬한 유대주의자였던 바울이 예수 운동가가 되는 삶의 극적인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대략 전향 시기인 주후 36년에서 처형당한 시기인 62년까지가 그가 박해를 무릅쓰고 예수의 사도로서 활동한 시기이지요. 이렇게 무려 30년간이나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삶의 열정을 불어넣어준 계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그의 이러한 열정적인 삶을 이끈 전향의 의미를 ‘예수운동의 부활을 향한 분투’였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 장에서는 바로 이 부활을 위한 분투의 구체적인 내용 중 핵심적인 것 하나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서두에서 이미 말했듯이 바울은 그리스도교 신앙 제도의 역사에서 항상 성서를 읽는 안경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죄인인 우리가 바른 행위를 통해 ‘의’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로 인해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라는 주장은 교회의 바울 이해의 핵이었고, 나아가 성서의 기본 사상처럼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이러한 해석을 신학자들은 ‘의인론’이라고 이름 붙여 많은 연구물을 쏟아내 왔지요. 우리가 여기서 바울의 분투의 내용을 읽어내기 위해 탐구하려는 것이 바로 이 의인론입니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바울의 의인 신학의 언술 구조
[표2] 제2성서에서 ‘의’(디카이오쉬네)의 사용빈도
〈로마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 〈필립보서〉
| 33회 1회 7회 4회 4회
| 〈마태오복음〉 〈루가복음〉 〈사도행전〉 〈요한복음〉
| 7회 1회 4회 2회
| 〈에페소서〉 〈디모테오 전서〉 〈디모테오 후서〉 〈디도서〉
| 3회 1회 3회 1회
|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서〉 〈베드로 후서〉 〈요한 1서〉 〈묵시록〉 | 6회 3회 2회 4회 3회 2회 |
바울 친서(親書) | 49회 | 복음서와 〈사도행전〉 | 14회 | 바울 위서(僞書) | 8회 | 기타 | 20회 |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와짐’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신조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의’(義 ; 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υνη)라는 낱말은 제2성서(신약성서)에 총 91회 등장하는데, 이 중 바울의 친서에만 49회가 나옵니다. 이렇게 사용 빈도만 보더라도 이 어휘가 바울의 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가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와짐’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신조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의’(義 ; 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υνη)라는 낱말은 제2성서(신약성서)에 총 91회 등장하는데, 이 중 바울의 친서 9에만 49회가 나옵니다. 이렇게 사용 빈도만 보더라도 이 어휘가 바울의 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가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의 이 주장 반대편에는 그 변형의 계기가 ‘율법’이라는 기성의 유대교 회당의 주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율법을 통한 의’라는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믿음’(피스티스, πιστις)이라는 용어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지요.
‘믿음’이라는 단어는 제2성서에 총 243회나 사용되는 어휘입니다. 이것은 제2성서 어휘의 사용 빈도에서 65위에 해당하는 것이며, 특히 대명사와 고유명사를 제외한 명사 중에서는 14번째로 자주 사용되는 어휘입니다. 즉 제2성서의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가운데 37%를 상회하는 91회가 바울(바울의 친서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10
바울은 ‘하느님의 의에 이르게 되는’ 계기로 율법 대신 믿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은총이라 함은 존재가 충분히 의롭게 변한 것이 아님에도 의롭다고 하느님이 ‘여긴다/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서 의로 인정받은 몸을 갖게 된 이후, 즉 구원받은 이후에도 삶은 근원적으로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의지를 통해 의를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하느님의 처벌과 보상이 뒤따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을 버리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것이 ‘율법에 의한 의’와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믿음을 통한 의’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의인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점을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의인론이 전개되는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 신학의 언술 전략: 인권의 문제설정
바울의 의인론을 새롭게 해석한 김창락 선생은, 흥미롭게도 바울이 의인론을 전개하는 본문 전후에는 하나의 갈등의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 대표적 구절이 〈갈라디아서〉 2장 11~21절입니다. 좀 길지만, 이 단락을 인용해서 보면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그런데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12]그것은 게바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μετα των εθνων) 먹다가,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13]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14]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15]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죄인인 ‘이방 사람이’ 아닙니다. [16]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여 주심을 구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8]내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우면, 나는 나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19]나는 율법 앞에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20]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21]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하여 주심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구절은 두 개의 소 단락으로 나뉩니다. 11~14절까지는 안티오키아(안디옥)에서 있었던 바울 자신이 얽힌 한 갈등 사건에 관한 묘사 부분이고([i]), 15~21절은 바울이 의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부분입니다([ii]). 이때 [i]에서 갈등의 당사자는 ‘유대인’과 ‘이방인’(εθνος)입니다. 문맥상 전자는 강자이고, 후자는 약자임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약자인 이방인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맥에 바로 이어서 그의 의인신학([ii])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쯤 되면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해명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바울은 ‘이방인 대(對) 유대인’ 간의 갈등에서 약자인 이방인을 편들고 강자인 유대인의 약자 포섭의 논리를 공박하기 위한 신학 이론적 논거로 의인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바울의 의인론은 교리적 진술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진술’이라는 것이지요.
나아가 김창락 선생은 이 투쟁 담론을 ‘인권적 문제설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권적’이라는 개념의 함의는 근대의 ‘시민권’의 개념과 비교하면 보다 명료해집니다. 아시다시피 시민권은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주권을 인정받은 존재들의 자격에 관한 담론입니다. 반면 인권은 그러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요. 그러므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인 ‘이방인’을 배제하는 유대인의 논리에 대한 공박의 담론이 바로 바울의 의인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투쟁의 도구였던 인권적 문제설정이 교리로 돌변해 발전되어 온 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였습니다.
바울의 의인 담론을 투쟁의 도구로 해석한 것은 바울 연구사에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이미 제기되어 온 것이지만(W. Wrede, A. Schweitzer, K. Stendahl 등), 그것을 인권의 시각에서 해석한 것은 전적으로 김창락 선생의 공헌이며,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하여 선생의 이 획기적인 해석은 의인론과 바울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의인론을 인권의 시각에서 정치화하는 공헌이 있지만, 그 배후의 깔린 권력의 주체 및 작용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빈 칸으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그 빈 곳을 다소간이라도 채워 넣는 데 약간이 보탬이 되고자, 하나의 가설적 설명을 보완하려고 합니다.
의인 신학의 자리: 디아스포라 유대회당의 ‘이방인’ 혹은 ‘헬라인’
유대인은 이방인을 향해 할례로 상징되는 율법을 강요합니다. 그래야만 진정 하느님의 의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정치적 함의를 지니면서 소통될 수 있는 가장 개연성 있는 장소는, 말할 것도 없이, ‘디아스포라 유대회당’(해외 유대 교포사회의 결속공간)일 것입니다. 회당 사회 밖이나 팔레스티나 내부에서라면 이런 일은 그다지 중대한 문제거리일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이방인’은 누구인가요? 비유대인인 일반은 물론 아닐 겁니다. 왜냐면 이 텍스트에서 이방인은 ‘약자’임이 암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회당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이라면 그들에게 의인론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즉 여기에서 ‘이방인’은 (이방인 일반이 아니라) 유대회당과 연계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개종자로 회당 안에 들어온 자이거나 혹은 회당 안에서 불신실함으로 배척된 자일 겁니다. 전자는 혈통적으로 이방인, 즉 비유대인일 것이고, 후자는 신앙적으로 유대인답지 못한 자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 관계에 대하여는 좀 더 논의를 진행하면서 살펴봅시다.
한편 앞에서 인용한 본문에는 ‘이방인’ 대 ‘유대인’의 대립이 얘기되었는데, 그 논의의 결론격인 3장 28절에는 갑자기 ‘헬라인’ 대 ‘유대인’의 대립이 언급되고 있습니다(“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방인’과 ‘헬라인’, 이 두 표현은 바울에게서는 그 함의가 별반 다르지 않은, 교환 가능한 어휘일 것입니다. 한데 이러한 어휘 교체는 꽤나 당혹스런 문제입니다. 왜냐면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어느 종족 집단의 밖에 있는 자들, 곧 귀속집단의 외부에 있는 존재라는 함의를 지니는 어휘인데 비해, ‘헬라인’의 뉘앙스는 특정한 귀속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헬라인 또는 헬라문화는 로마 제국 시대에는 ‘고상함’의 함의를 갖는 선망어린 개념이었습니다. 헬라인이 모든 제국 시민 가운데 가장 부유한 부류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지만, 헬라문화의 표상인 헬라인은 품격 있는 부, 품격 있는 신분을 상징하고 있었지요. 요컨대 종족적 귀속성의 함의를 띠고 있지는 않지만, 문화적 고상함의 함의를 지닌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의인론에서 헬라인은 고품격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죄인’의 표상, 추함을 상징하고 있는 부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하면 이런 의미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었는데, ‘헬라인’은 뭔가 전도된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제의 구절이 포함된 〈갈라디아서〉 의인론의 결론부라 할 수 있는 3장 26~29절을 인용하여 그 문제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표]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의 두 부류의 사회적 존재들
헬라인 |
| 유대인 |
여자 종(노예) | ⇔ | 남자 자유인 |
사회적 약자 |
| 사회적 강자 |
26]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28]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믿음 담론에는 아래 표와 같은 대립구도가 전제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헬라인’은 여자, 노예와 같은 범주로 묶이고, 유대인은 남자, 자유인과 한데 묶입니다. 요컨대 ‘유대인 대 헬라인’이라는 갈등이 단순히 종족적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사회적 긴장의 요소가 끼어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방인 개종자가 모두 여성과 노예계급이며, 유대인이 남성과 자유인뿐일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의인론의 자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학적 함의와 관련되는 것일까요? 도대체 이런 식의 대립적 범주화가 통하는 공간은 어디일까요?
김창락 선생은 ‘갈라디아의 교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바울 자신이 이 서신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1,2)이라고 수신자를 명기했으므로 당연한 듯 보입니다. 물론 이는 선생만의 생각은 아니고 제2성서 학계 일반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한데 내가 보기에 문제가 그리 간단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당시 교회는 막 태동하던 종파집단으로, 아직 유대교와 분리된 독자적인 제도나 조직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게 인지되지도 않았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독자적인 예수공동체로서의 교회,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형격인 제도로서의 교회는 주후 80년 이후, 성전이 붕괴된 상황에서 유대교가 재정비되던 때에 탄생했다고 보는 게 더욱 역사적 개연성이 있습니다.
주후 70년 반로마 봉기의 실패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유대교 신앙에 있어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세계 각 지역에 형성된 유대인들의 공동체는 어느 곳을 향해 기도하고 하느님의 도래를 염원해야 할까요? 사제들, 특히 성전을 수호하던 대사제들은 온데 간데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 버린 상황입니다. 이런 정신적, 신앙적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있었겠지만, 주목할 것은 주후 80년 경 바리사이파 라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운동이 드디어 유대교를 새롭게 탄생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재유대교화 프로젝트는 예루살렘의 성전 대신에 율법을 통해 몸을 성전화하는 일종의 유대신앙의 ‘몸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늘상 그렇듯이 이런 재구축의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적은 단순히 외부에 있는 명료한 적이 아니라, 내면에 들어와 영혼을 유혹하는 모호한 존재이기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적은 당연히 악령, 사탄일 겁니다. 사탄은 외부에 있는 절대타자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내면의 유혹자로서 존재에게 다가오는 이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적의 유혹을 이겨내는 일이 신앙의 핵심적 요소가 됩니다. 하여 이러한 신앙은, 마치 이스카리옷 유다에 관한 담론처럼,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하려는 욕망을 낳으며, 동시에 의식 속의 유혹을 단련하려는 영적 수련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아는 한, 재구축을 도모하던 유대교가 지목한 내부의 적, 그 1순위는 ‘나자렛 도당’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 이후 유대교 회당에선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색출되고 체벌당하며 추방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마태오복음〉이나 〈요한복음〉 등은 이러한 폭력적 상황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분파화되었던 예수집단의 뼈저린 배제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후 50년대로 추정되는 〈갈라디아서〉의 시대는 교회라는 말이 쓰이고는 있을지언정, 우리가 아는 방식의 제도화된 공동체로서 정착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추측컨대 이 텍스트 속의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아직 분파화되지 않은, 유대교 회당에 소속된 예수 추종자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김창락 선생의 의인론 해석은, 모호했던 이방인 혹은 헬라인의 실체를 규명하는 근거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그 빛을 더욱 명확하게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 동시대의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을 둘러싼 사회역사학적 상황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의인론의 자리일 테니까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디아스포라 유대회당의 사회역사학의 시각에서
바울의 활동 공간인 로마 제국의 대도시 지역은 그야말로 복합적인 다중적 인종이 뒤섞여 있었고, 다층적 계급/계층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구 통합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계층적이든 인종적이든 종파적이든 간에, 자기들끼리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는 사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이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시 행정당국은 이런 결사체들 간의 경합을 ‘체제의 현상 유지’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에서 허용했고, 나아가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왜냐면 도시의 사적 네트워크들은 귀속 집단을 보호하는 일종의 복지센터의 역할을 담당했고, 그러한 센터의 운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도시 지역사회의 복지기금을 출원하기도 했으며, 또한 원로원에서부터 하위의 행정관료들에게까지 갖은 뇌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지역적 자치결사체가 중앙정부가 제국 구석구석에서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보충해주는 제국 안보의 안정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공인함으로써 공공화하는 것은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통치의 유용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특정한 사적 네트워크가 종족집단일 경우, 본국의 통치자가 이들 해외 동포집단의 이익을 위해 동족 집단이 존립하고 있는 도시에 기부금을 희사하기도 했습니다. 동족 집단이 제국 내에서 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수록 자신의 권력 기반은 더욱 확고해질 테니 말입니다. 결국 유력한 결사체들의 활동은 대체로 도시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순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1세기 경 로마제국 내에서 5~6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수에 있어서도 대단히 많은 숫자며, 특히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의 경우 전 인구의 10~15%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들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유대인 디아스포라 회당의 존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결사체를 공식화함으로써 위험요소를 순화시키는 장치의 하나가 될 테니 말입니다. 더욱이 유대인 결사체는 제국 내 도시들의 다른 결사체들에 비해 그 인구 비율 이상의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결사체들이 누렸던 로마 제국 내에서 대표적인 특권으로는 사법권, 제의 준수권, 조세 징수권 등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회당은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를 신앙의 상징적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것 만으로 회당의 질서, 그 질서에 포섭된 유대인 사회 전체를 결속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 독자적인 규범체계가 필요했고, 그것을 실효화하는 처벌과 보상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 있는 자율적 기구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 제의 준수를 위해 다른 사회적 의무를 유보시킬 수 있는 자율성을 포함합니다. 또 디아스포라 회당은 ‘피스쿠스 유다이쿠스’(Fiscus Iudaicus)라는 일종의 유대인 대상의 조세기구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특권은 유대 교포 사회가 이집트 출신자들의 디아스포라 사회와 더불어 제국의 가장 유력한 결사체였음을 시사합니다.
요컨대 유대교 회당은 격조 있는 결사체로 제국 내 도시의 상류사회에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유리한 조건을 많이 향유한 결사체로 하류사회에 널리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에선 주변의 집중적인 질시의 대상이 되게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적지 않은 개종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조건이 되게도 했습니다.
디아스포라 회당은 도시 사회에 속한 또 하나의 사회였습니다. 그것은 디아스포라 회당의 일원인 각 사람이 외부의 다양한 주체들과의 연결망 속에 편입되어 있는 동시에 내부의 연결망에 포섭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회당의 소속원은 ‘이중적 사회 계열’에 접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인교포 사회처럼 말입니다. 언어에서부터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까지 이중성이, 이중적 주체성이 이들의 존재를 복합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데 현대의 미국처럼 사회를 안정되게 유지하는 질서체계가 잘 짜인 사회가 아닌, 거의 유일한 안정장치가 회당인 로마 제국 내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는 그 이중적 계열성이 더욱 극적으로 분화된 모순적 주체를 낳았을 겁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디아스포라 회당의 소속원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은 중심-주변으로 분포된 둘 이상의 사회적 계열이 중첩된 연결망 속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회당 내부의 중심성은 ‘유대인다운 삶의 모범성’에 준거하고 있습니다. 한데 어떤 태도가 유대인다운 삶일까요? 물론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성실성에는, 말할 것도 없이 자산 능력이 포함됩니다. 가령, 공동체가 당국에 지불해야하는 조세나 기부금 등의 비용은 공동체 성원의 자발적 기부금을 통해 충당되었는데, 이는 남들보다 막대한 기부금을 지출할 수 있는 능력이 유대인다운 삶의 필요조건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도시 당국자들과 만찬을 나누며 공동체의 이권을 대변할만한 지식과 신분 또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신분, 자산, 지식 등에서 고루 높은 수준의 사회적 위치가 회당 내부의 중심성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11 결국 회당은 ‘유대인다운 삶’을 사는 경건한 유대인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품격 있는 지위의 사람(남성)을 중심으로 하여 편재됩니다.
한편 ‘개종’은 유대인 사회의 품격에 동화된 이들 외에도, 적절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지 못한 이들의 생존 전략의 차원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치 러・일 전쟁 당시 양대 강국 군대가 평안도 양민에게 만행을 저지를 때 군대의 폭력을 피해, 그리고 밥을 얻어먹기 위해 교회로 피해 들어온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을 선교사들은 ‘밥신자’라 부르며 ‘주변화’시켰고, 평양대부흥운동은 이들 주변화된 대상을 중앙의 신앙제도에 충성하는 대상으로 종속시키는 계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교 회당 중심부가 저들 하층의 개종자들을 ‘이방인’ 혹은 ‘헬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회당 구성원으로서의 ‘주권’을 부여하지 않고 ‘하위주체’로서 대상화하는 담론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당 안에서는 이런 호칭은 ‘유대인다운 삶이 결여된 자’라는 함의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저들은 회당체제의 하위주체로서, 종속된 자아로서만 주체가 형성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유대 혈통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사회적 약자, 혹은 중심부 가치에 불충한 자를 처벌하는 용어로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필경 그랬겠지요.
그러므로 회당 안에서 ‘헬라인’은, 〈갈라디아서〉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다운 삶’이라는 규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이를 지시하는 ‘비아냥’에 지나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제도화된, 독자적 공동체가 아닌 당시의 교회에서는 이런 배제-종속의 담론적 메커니즘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을 테니, 의인론을 통한 바울의 담론 전략은 그리 유효하지 않았을 겁니다.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의 맥락에선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를 재주체화하고, 그러한 배제의 메커니즘을 비판하는 이른바 ‘인권으로서의 신앙의 정치’를 담는 중요한 발언으로서 의인론을 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 및 결론: 의인론 속에 담긴 바울의 예수 계승법
바울의 이 구절에서 ‘헬라인’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유대인 공동체 내부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헬라인’이라는 말은 그 말 속에 담긴 일반적인 함의인 ‘고상함’이라는 사회적 특성과 계열을 이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헬라인-회당-유대인답지 못한 삶’이라는 의미의 계열 속에서 회당 밖의 일상적인 용례(‘고상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기의)와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회당 내의 변두리 녀석들’이라는 비하적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회 일반의 함의에서 격조 있는 용어를 특수 집단 내에서 비하함으로써 그 집단은 자신의 우월감을 강화할 수 있고, 귀속집단의 정체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이들은 회당적 규범체계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회당의 규범체계는 회당 중심부 집단의 사회적 위상과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규범체계는 회당의 변두리 사람들의 사회적 위상과는 긴장관계에 있게 됩니다. 그들은 유대사회에서 ‘죄인’인 것이지요. 해서 그들은 유대 공동체 내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어서 천대받는 게 아니라, 죄인이어서 마땅히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런 가치 속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전향하기 이전에는, 갈릴래아 출신의 시골뜨기들이 떠벌린다는 저 자칭 메시아라는 이의 주장이 너무나 역겨웠던 것 같습니다. 저들은 한갓 유대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에 다름 아닌 자들인데, ‘자칭 메시아’인 자가 저 죄인들에게 구원을 선언했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렇게 회당의 규범의 준거인 ‘유대인다운 삶’이라는 가치는 유대공동체, 특히 본국보다 율법에 더욱 근본주의적인 교포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변부 사람들에 대한 멸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가 아니라 죄인에 대한 멸시로 해석되게 합니다. 즉 저들의 사회적 고통을 은폐하는 기재가 바로 ‘유대적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율법을 준수한다는, 일종에 ‘몸에 새기는 선서’입니다. 해서 바울은 그토록 할례를 비난했던 것이지요. 거기에는 차별을 조장하는 논리인 율법의 폭력성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불연듯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해서 그는 과거에 회당 중심부의 가치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듯이, 이제 목숨을 바쳐 회당에서 밀려난 이들을 위해 일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의인론은 바로 이러한 회당 체제의 은폐된 폭력성에 대항하는 투쟁 담론입니다. 그것은 중심-주변을 재생산하는 회당적 규범에 대한 저항이며, 그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부정’ 선언으로 표현됩니다. 아마도, 그는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꿈꾸었던 공동체는 차별을 조장하지 않는 윤리에 의해 묶인 사회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바울은 규범 자체를 거부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규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유대교의 규범체계를 부정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배제주의적 틀을 문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예수를 계승한 이임에 틀림없습니다.
3. 의인론과 종말론, 낯선 만남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바울의 의인론은 구원에 관한 일반이론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회당 내에서 벌어지는 유대교의 사회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저항담론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을 조롱하고 무기력한 이로, 위험하지 않은 순화된 자들로 만드는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의 담론을 비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율법을 통한 의’는 바로 이러한 지배 담론의 핵심이었습니다. ‘율법 대신 믿음’이라는 것, 그것은 차별에 기초한 공동체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요, 은혜에 기초한 ‘평등한’ 대안공동체의 이상을 향한 슬로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 지중해 북부의 대도시들을 이십여 년간 두루 돌아다니며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에서, 저자거리에서, 그밖에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예수를 선포했고, 때로 예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특히 의인론은 그의 주요 활동 공간인 유대교 회당 안에서 제기한 것이었고, 그곳에서 예수의 대안적 질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논변이었습니다.
요컨대 바울의 의인론에는 유대교 회당을 배제와 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로 재건하려는 그의 꿈을 담고 있습니다. 한데 그것만인가요? 바울은 평등한 ‘세계’를 꿈꾼 것이 아니라, 단지 회당에 한정된 ‘공동체 내부’만의 평등을 지향한 것일까요? 물론 바울의 열정적인 선교 사역은 그러한 평등지향적 공동체의 확산을 통해 세계를 예수의 정신에 따르는 평등한 질서로 변환시키려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의 정신을 실현하는 소공동체들의 확산, 곧 바울의 의인론 속에 담긴 복음화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에 대한 선교적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30년에 걸친 그의 부단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세계화는 끝없이 지연되고 말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3~27절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복음을 향한 그의 사역은 끝없는 고난의 역정이었고 그 효과는 여전히 미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여 그의 복음의 세계화를 향한 선교적 비전은 묵시적인 종말론적 꿈과 엮이게 됩니다.
그는 세계의 단절을 꿈꿉니다. 신이 개입하고, 그리하여 어느 한 순간에 역사가 단절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에 관한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꿈은 바울의 의인론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그 연장이고 완성으로서 그의 종말적 꿈이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 장은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개의 예루살렘과 전복적 상상
이 점에서 〈갈라디아서〉 4장 21절~5장 1절은 이 물음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락을 요약하면 아래 [표5]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은 아브라함을 잇는 ‘믿음의 계보’를 두 가지로 유형화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공유해온 상투적인 틀인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진지하게 살피면 처음부터 깜짝 놀랄만한 바울의 전복적 발상이 들어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이 아브라함과 그의 본처인 사라에서 시작하는 족보를 수없이 되뇌며 성장합니다. 물론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인이 (사라가 아니라) 하갈의 자손이라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발상을 내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육신에 따라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에 따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즉 그것은 신체를 규율하는 율법의 욕망에 매여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12 해서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인 것입니다. 시나이 산의 질서에 속박된 존재라는 것도 같은 맥락의 표현임이 분명합니다. 한데 이 세력은 현존하는 권력체계의 지배자들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의 질서는 바로 이들에 의해 추동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더 나아가 이들은 ‘현존하는 예루살렘’의 질서와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현존하는 예루살렘”은 성전권력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마르코복음〉 13장, 특히 1~2절의 예수의 반성전주의적 묵시론을 연상케 한다. 바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체제인 것입니다.
또 이것은 〈사도행전〉 7장에 묘사된 스테파노의 반성전주의적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비록 스테파노의 최후의 연설은 〈사도행전〉 저자의 각색임이 분명하지만, 그를 비롯한 일곱 명의 헬라계 지도자들이 보인 모습에서 이들이 유대교 신앙을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전통에 있는 자들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9절에 의하면 이들은 예루살렘의 ‘리베르티논 회당’ 출신입니다. 13 예루살렘에는 최소한 전 인구의 10% 정도에 이르는 해외 출신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도 있었지만, 아람어보다는 헬라어에 더욱 익숙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디아스포라 2세, 3세, ... 출신들 가운데는 아람어를 거의 못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이들은 자기가 자란 고향의 언어에 더욱 익숙한 이들인데, 유대 신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멀고 먼 낯선 땅인 예루살렘에 와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재력가들도 있어서, 같은 언어 집단끼리 모이는 유대교 회당을 만들곤 했지요. 그것을 리베르티논 회당이라고 부릅니다. 한데 여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온 해외 출신 이주자들만이 아니라, 일시적인 순례자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혁명적 이상에 불타 있던 이들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세푸스의 책에 언급된, “그 에집트인”이라는 예언자는 그런 혁명적 이상을 가진 에집트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 순례자인 듯합니다. 아마도 ‘그 유월절’ 당시 예수가 보인 최후의 예언자다운 모습에 깊이 감동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테파노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표5] 〈갈라디아서〉 4장 21~5장 1절의 구성
아브라함의 두 아들 | |||
↙ | ↘ | ||
본처에게서 난 아들 | ‘여종’(=하갈)에게서 난 아들 | ||
언약에 따라 낳음 | ‘육신’에 따라 낳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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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실상 두 여인은 두 계약입니다” (즉 두 개의 은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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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해방) | 시나이산: 율법(종살이) | ||
천상의 예루살렘 | 지금의 예루살렘 |
이억만 리 먼 곳에서 온 이들 이주자 혹은 순례자들은 팔레스티나 토착민에 비해 훨씬 철저한 변혁적 이상을 가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머나먼 곳에서 오직 야훼에 대한 열정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온 이들의 눈에 성전은 과연 어떻게 비추었을까요? 갈릴래아 시골뜨기인 예수가 생전 처음 경험한 성전을 보며 장사치들만이 들끓는 모습에 격노하여, ‘내 아버지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호통을 친 것처럼, 필경 많은 디아스포라 순례자들도 그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테파노 같은 이들이 예수에게 동화된 주된 이유였을 것이고, 바로 그것이 예수처럼 과격한 반성전적 발언을 서슴치 않고 내뱉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여 예수처럼 그들도 현존하는 성전 권력 체제에 의해 처형되거나 박해를 받고 다시 타지로 추방 혹은 도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 즉 반체제론을 반성전주의를 통해 표출하는 비판 전통은, 우리가 아는 자료를 통해서 보면, 제1성서(구약성서)의 미가 예언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미가〉 3,9 이하; 7,11 이하). 또 우리야와 예레미야(〈예레〉 26,20 이하; 26,1 이하)에게서도 그런 신앙이 나타납니다. 이런 전통은 묵시문학에도 이어지는데, 〈제3 즈가리야서〉(〈즈가리야서〉 12~14장)가 그런 경우입니다. 나아가 제2성서의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요한)묵시록〉에도 이런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21,9 이하).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 2세기 초까지 이르는 이상의 장구한 전통에 따르면 ‘현존하는 예루살렘’은 파괴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이스라엘의 반체제적 급진주의 사상에 깊게 스며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낡은 체제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예루살렘’의 도래에 대한 신념이 묵시적 신앙의 발전과 더불어 나타납니다. 물론 바울의 두 예루살렘의 상상은 묵시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의 묵시적 언술들: 지구적 꿈으로 확장되는 의인론
‘묵시언어’는 현재에 대한 과거와 미래의 개입 방식을 급진화하는 언어 활용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묵시언어는 이원론적입니다. 가령 ‘천국/본향’이라는 미래적(종말적)/과거적(태고적) 시공간이 ‘지금 여기’라는 현재적 시공간과 철저하게 대립된 실체로 상정됩니다. 이 대립이 격렬할수록 미래/과거의 현재로의 개입 강도가 강렬해집니다. 여기서 현재적 시공간은 극복되어야 할 장이며, 반면 미래적/과거적 시공간은 완성된 장입니다. 극복되어야 할 현재의 질곡이 깊을수록 현재를 향해 덮쳐오는 미래의 개입은 강렬하게 표상됩니다. 이때 이 개입은 중계자를 필요로 하지요. 미래/과거로부터 오는 타자적 존재입니다. 그가 바로 ‘메시아’인 것입니다. 즉 묵시 언어는, 현존하는 현재에 대한 ‘절대 부정’과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미래/과거에 대한 ‘절대 긍정’은 다시 현재에 대한 ‘절대 긍정’을 통해 완성되는 형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언어는, ‘현존하는 예루살렘 대 천상의 예루살렘’의 이원구도 외에도 묵시적 이원구조의 틀로 가득합니다. ‘혈통을 통한 자녀 대 약속을 통한 자녀’, 어둠의 세력의 시공간을 뜻하는 ‘이 세대’(아이온, αιων) 운운(〈고전〉 1,20; 2,6; 〈갈라〉 4,25; 〈필립〉 3,20 등)과, 그리스도 사건과 결부된 미래와 마주선 현재(눈, νύν; 종말론적 새로움을 만끽하는 현재)를 뜻하는 언급(〈로마〉3,26; 〈고후〉6,2; 〈갈라〉2,20 등) 등등.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의 묵시적 단락이 텍스트 구성상 그 앞에서 전개된 의인론 논의에 바로 이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곧 ‘지금의 예루살렘’과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공격 대상인 디아스포라 회당 체제는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당 체제의 중심부의 배제주의를 비판하는 의인론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종말론적 묵시사상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그의 의인론적 민중론 내지는 해방론은 회당 내부의 프로그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 아니 우주적 변혁의 전망을 갖게 됩니다. 다만, 그 또한 유대인의 한 사람인지라, 우주적 지평의 천지개벽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앞 장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구원에 관한 일반 이론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회당 내의 배제주의에 대한 평등주의적인 인권적 문제제기임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또한 의인론에 바로 연계된 〈갈라디아서〉 4장 21절~5장 1절처럼, 그것은 특정 회당 안의 대안적 질서론에 국한된 비전이 아니라, 지구적 아니 우주적 차원의 변혁의 꿈과 연계되어 있음을 말했습니다.
아래에서는 바울의 그러한 묵시적 변혁에의 꿈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천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바울의 실천은 지중해 대도시 지역에서 예수 공동체를 만들고 꾸리는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2장에 반영된 예루살렘 회의에서처럼, 예루살렘의 유대계 예수운동 지도자들이 모든 선교를 자기들 식으로 일반화하려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특수성을 방어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심지어 비유대인, 노예, 여자 등에게도 평등한 주권을 부여하려는 신앙제도를 구현하기 위한 바울식의 예수운동은 바로 이러한, 일반화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입니다.
모금운동에 관한 의혹: ‘가난한 자’들의 대열과 바울의 운동
한데 다른 한편에서 그의 예수운동은 예루살렘에서의 어떤 실천들과 결합됩니다. 바로 이것이 다음에서 이야기하려는 내용의 골자입니다. 바울 서신들을 보면 그는 끊임없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7~30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클라우디우스 로마 황제(41~54년) 치하에서 일어났다는 대기근의 구호기금 성격의 모금이라는 주장은 거의 설득력이 없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얘기하는 대로, 이 황제 제위기 중 40년대 후반에 지중해 동부지역을 휩쓴 광범위한 기근이 일어났고, 바로 바울의 모금은 이에 대한 구호기금의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면, 그는 왜 이 대대적인 모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에게‘만’ 한정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사, 〈로마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최종에는 유대인을 우선시한 구원관을 펼치고 있듯이, 그가 예루살렘의 구호기금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대기근의 구호기금이라면, 긴급한 모금이어야 할 텐데, 주후 49년경 예루살렘 회의 이후 그곳의 지도자들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을 요청받은 이후(〈갈라〉 2,10), 건 10년이 지난 〈로마서〉 15장 25절에서야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방문하겠다고 할 만큼 뜸들인 것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일까요? 이들의 정체를 묻기 전에 먼저 모금 당시 예루살렘의 정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모금을 시작한 주후 49년경은, 당시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의 책들에 대한 리차드 호슬리(Richard A. Horsley)의 해석에 따르면, 테러리즘이 고양되고, 당국의 부적절한 과잉진압이 잇따름으로써 정국의 혼란이 극심해지던 바로 그 시기입니다. 호슬리는 에릭 홉스봄(Eric J. Hobsbawm)의 표현을 빌어 반로마 항쟁이 발발한 66년 이전까지의 시기를 ‘원초적 반란’(Primitive Rebel)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국 전체가 그랬다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팔레스티나 일대가 그렇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가난한 이를 위한’ 모금을 제안받았고, 향후 10년간 그 일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의 치안상황은 같은 기간 동안 결코 나아지기는커녕, 악화일로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으로 보낸 기금이란 도대체 어떤 성격의 것일까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였을까요? 용례로 볼 때, ‘가난한 자’라는 용어는 이러한 의구심에 단서를 제공해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용어는 사회적 박탈의 결과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면, 팔레스티나의 역사에서 식민지 시대에 ‘가난’을 타율적 체험보다는 ‘자발적 선택’과 관련시키는 어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편에서는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을 뜻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적극적인 저항을 내포하는 신앙적 선택을 함축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쿰란의 수도사들은 ‘가난한 자’로 스스로를 인식했는데, 이들은 때가 되기까지는 은둔하고 있었지만, 때가 찼을 때, 곧 유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항쟁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는 말씀에서 드러나듯,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한 동시대의 혁명가들이었습니다. 물론 ‘때가 찰’ 때까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고, 그 날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마지막 만찬을 나눴습니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은 현존하는 예루살렘이 붕괴될 때를 기다리는 묵시적 하느님 나라 운동가들이었다고 해도 그리 무리한 추론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모금한 기금을 들고 달려갈 것을 선언합니다. 유대전쟁이 발발하기 몇 년 전입니다. 대대적인 저항의 불길이 치솟아 일시적으로 로마군을 몰아낼 그 혁명의 순간이 오기 몇 년 전, 아직은 체제가 얼마만큼은 안정을 지킬 수 있을 마지막 때, 그는 지난 10년간 모금한 것을 들고 귀국합니다. 마치 새 세상이 곧 올 것을 기대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일단의 사람들, 특히 성전체제의 중심부에 있는 사두가이들은 바울을 향해 적개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여 그는 소송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로마로 압송됩니다. 바로 그 해에 예루살렘에서는 예수파의 지도자인 ‘주의 형제 야고보’가 처형당합니다. 또 로마시에서는 베드로가 처형당합니다. 바울이 처형당한 때도 바로 그때입니다. 그로부터 4년 뒤 팔레스티나에는 유대인들에 의한 대대적인 봉기가 발발했습니다.
바울은 혁명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이였고, 그 날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교한 작은 공동체들에서 지극히 작은이들 하나하나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일상의 권력과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의인론은 그러한 일상의 권력과의 투쟁에 담긴 함의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주권 없는 자들과의 연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저 하위주체로 분류된 이들을 재주체화하는 것이었고, 그들을 배제하는 체제의 담론을 붕괴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바로 인권이 신앙에 도입된 전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 신앙 전통의 유일한 예도 또 최초의 예도 아닙니다. 실은 예수 자신이 오클로스와 더불어 벌인 일련의 기적과 비유의 말씀들 속에 이미 인권의 문제설정이 담겨 있습니다.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론은 바로 그것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데서 ‘역사의 예수’를 읽어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를 승계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은 예수와 바울 사이의 연계성을 인권이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성공적으로 해석해낸 것입니다. 이로써 낯선 바울은 우리에게, 오늘 우리의 시대를 향해 할 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
- 이 글은, 본래 ‘민중신학은 바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한 교인이 질문한 것에 대해 한백교회에서 강연형식을 띤 설교로 세 번에 걸쳐 3개월간 답변한 것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동시에 이 강의형 설교의 내용과 형식을 구성하는 데 배경이 된 또 다른 이유는 김창락 박사의 고희기념논집의 주제를 ‘의인론 다시 읽기’로 잡은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수록하기 위해 원고를 다시 정리하면서도, 그 질문에 대한 감각을 남겨놓기 위해 강의식의 표현들을 수정하지 않고 남겨놓았음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 《살림》 1988년 12월~1989년 4월까지. 〈바울로를 말한다 1─전향(1)〉, 〈바울로를 말한다 2─전향(2)〉, 〈바울로를 말한다 3─소명〉, 〈바울로를 말한다 4─바울로와 역사의 예수(1)〉, 〈바울로를 말한다 5─바울로와 역사의 예수(2)〉 [본문으로]
- 제2성서에서 바울의 서신은 13개가 나오는데, 학자들은 대체로 이 중에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토 전서〉 〈고린토 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카 전서〉 〈빌레몬서〉 정도가 바울 자신이 직접 쓴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후대에 그를 자기 나름대로 승계한 이들에 의해 작성된 위서(僞書)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서라고 판단되는 7개 텍스트가 바울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인 셈입니다. [본문으로]
- 이것은 신분적 표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떠돌이 수행자들은 정결례를 지키는 구걸자들이기 때문이지요. [본문으로]
-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나바테아 족속은 바로 그 시기에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자인 안티파스의 나라와 전쟁을 치룹니다. 유대-이두메아 지역과 갈릴래아-베레아 지역은 공히 동일 역사공동체에 속하고 동시에 같은 유대교권 국가이자 로마의 속국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갖는 나라입니다. 반면 나바테아 족속은 어느 하나도 그들과 동질감으로 연계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맥락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가 나바테아 족속의 땅의 자국민에 대한 공식적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으로]
- 이 텍스트는 제국 각 지역에서 바울을 박해한 세력을, 로마당국이 아니라, 회당을 이끄는 유대 지도자 내지는 유대 종파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서두에 묘사되어 있듯이, 로마 제국의 한 지체 높은 인물에게 예수와 예수운동, 그리고 교회를 소개하고자 하는 집필 취지에 따른 자기 검열의 결과일 것입니다. [본문으로]
- 이것은 바울의 적대자를 유대 종파주의자나 과격파 유대주의자, 특히 젤롯당이라는 일반적 견해가 얼마나 허구적이며, 나아가 얼마나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에 의해 착색된 해석인가를 보여 줍니다. 이런 시각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의 주체가 젤롯당적 유대주의자였다는 허황된 주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들은 예수운동이 ‘무조건적인/원칙주의적 비폭력주의’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 흔히 생각되듯, 십자가형이 아닌 투석형이라는 것은 정치범 예수와는 다른 종교사범 스테파노라는 이해를 낳기 쉽지만, 그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적절한 이해라 할 수 없습니다. [본문으로]
-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데살로니카 전서〉,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일곱 개의 서신을 바울의 친서라고 부릅니다. [본문으로]
- 그밖에 높은 빈도로 사용된 문서로는 〈디모테오 전서〉 19회, 〈히브리서〉 32회, 〈베드로 전서〉 16회입니다. [본문으로]
- 1976년에, 에페소에서 그리 멀리 않은 거리에 있는 아프로디시아스 시에 세워진 유대교 회당 유적과 한 비문이 발굴되었습니다. 그것은 2세기 어간에 세워진 것으로, 아마도 바울 당시의 이 지역 유대사회의 위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데 이 비문에는 회당 건립에 기부한 사람들의 명단이 무려 150명이나 나오는데, 그 중에는 유대인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에 호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가 54명이 언급되고 있고, 이 중에는 시 원로원 의원이 9명이나 됩니다. 이것은 유대 회당의 엘리트들의 도시 상류사회와의 접속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시사합니다. [본문으로]
- 앞 장에서 성전 붕괴 이후, 유대교의 율법주의화를 ‘몸의 정치’로서 언급한 것을 연상하기를 바랍니다. “육신에 따라”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유대주의에 대한 바울의 직격탄이 아닐까요? [본문으로]
- 이를 ‘표준새번역 성서’는 ‘리버디노 회당’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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