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기독교영성신문](2003년 경)에 게재된 칼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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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기억 찾기
드러냄과 감춤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이천 년을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 해를 ‘과거’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한 해를 ‘현재’로 맞아들인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을 특별히 떠올리게 되는 때는 시간에 대한 관심이 한결 고조된다. 어느새 먼지가 하얗게 묻은 일기장(日記帳)은 이맘때에만 펼치는 연기장(年記帳)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세월에 무뎌진 내가 새삼스런 일기 쓰기에 돌입하게 되는 것은 시간에 대한 회상과 기대를 담은 상상의 공간으로 나 자신을 여행 보내고자 함일 게다.
이 기억 여행의 주요 테마는 ‘공동체’였다. 지난 12월 22일 주일 예배 때 교회의 4개 조 가운데 네 번째 조의 주간예배 이후 그것은 나의 기억하기의 실마리가 되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느 과자’처럼. 4조원들은 그 전 한 달간 교회 식구들을 대상으로 설문 작업을 벌였다. 한 해를 돌이키며 떠오르는 기억을 물었다. ‘민족’, ‘교회’ 그리고 ‘나’라는 세 항목이 기억의 단위였다. 항목 별로 우리들은 가장 앞서서 떠오르는 기억들을, 보충 설명과 함께 쓰도록 권유받았다. 나는 간략한 설교에서 이 예배는, 평소 기억에 인색하며 앞만 향해 달려왔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열차들의 정거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의미부여했다. 이곳에서 각자 자신의 기억 여행을 떠나길 바랐던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은 놀랍게도 비슷했다. 민족이나 교회라는 집단이 ‘공동체’로서 존속하는데 있어 기억의 공유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다. 이것은 ‘자기의 개인적 기억’에 대한 물음에서도 나타났다. 응답의 절반 이상이 가족 단위의 기억으로 자기의 기억을 대신했던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에 있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그만큼 커다란 비중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 교회의 식구들은 ‘××교회’보다는 ‘××공동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교회 구성원을 표현할 때도 ‘교인’보다는 ‘식구’라고 말한다. 형식적 관계를 넘어선 신앙적 유대를 가족공동체만큼이나 내밀한 관계로 읽고 싶어서일 게다. 그런데 그러한 내밀한 관계를 흔히 서로 간에 ‘감춤 없는 관계’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 해 동안 의미 깊은 것은 이야기할 때 기억이 서로 비슷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투명한 공동체 관계에 대한 지향과 맞물리는 것 같다.
나는 이 대목에서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얼마 전 어떤 이가 교회에 나오기가 어려웠다고 고백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 교회에서 좋아하는 생각의 선이 낯설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도 여간 확고한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한 견고한 지식의 바탕이 없으면 말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다른 이에게 신상에 관한 가벼운 질문을 던질 때도 우리 교회의 공동체적 특성상 이런 물음이 괜찮은가를 자문해야 했다고 말했다. 투명한 관계에 대한 공동체적 강박은 그가 자신이 공동체답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갈등을 일으켰다. 숨길 수도 드러낼 수도 없는 딜레마. 교회 식구 아무도 의도한 것은 아닌데도 그는 교회의 폐쇄성을 체험했고, 그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교회를 나오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세상살이는 드러냄과 숨김의 ‘적절한 교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공동체에게 드러내고 나누는 것이 미덕인 것만큼, 자기만의 방에 감추어 둘 때 아름다운 것도 있다. 마리아의 임신을 숨긴 요셉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의 묘사는 후자의 차원을 강조한 표현이다. 어설프나마 목사로서 지내다보니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결단을 드러내는 것 못지않게, 자신을 숨기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도 집요하게 들춰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숱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감춤에도 분명 미학이 있는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독자에게 하고 싶은 첫 번째 말은 바로 이 감춤의 미학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감춤은 어떤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다. 단적으로 말하면 숨김의 동기가 자신에 대한 배려에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나오는 관계가 바로 공동체다운 감춤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어머니는 퍽 강한 성격을 가졌지만, 가족 내에선 당신의 감정을 잘도 절제하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거의 사십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철들은 내가 깨달은 것은 자기를 드러내고 숨김없이 관계하는 것만큼이나 자기를 숨김 속에서 가족의 공동체적 유대가 더욱 끈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가족처럼 공동체를 넘어선다. 예수님은 가족주의를 넘어선 하느님의 가족으로 교회를 초대했다. 그것은 내부의 타인을 향한 드러냄과 감춤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친숙한 내부의 타인만이 아닌, 누구에게도 열린 공동체다. 낯선 타인에게 배려의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 바로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의미다.
과연 그 정신이 우리에게 잘 간직되어 있을까? 어느 후배 목사와 그 교회 식구들의 낯선 타인에 대한 헌신적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지없는 감동을 받는다. 새해엔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이들의 열린 모습이 보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시 해의 마지막에 기억 여행을 떠날 때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에서 신앙의 묘미를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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