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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 - 민중 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형성론적 접근

이 글은 [민중신학] 창간호 (한국민중신학회 펴냄 1995)에 게재된 것입니다.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 - 민중 메.pdf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

민중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형성론적 접근(방법론을 중심으로)

 

 

 

1. ‘역사의 예수문제: ‘예수에서 예수사건으로

 

민중신학의 역사의 예수를 묻는 해석학적 시좌는 (민중)사건이다. 이것은 예수라는 개체적 존재에만 탐구의 초점을 두어온 지난 두 차례에 걸친 서구신학계의 문제설정으로부터 단절하여 새로운 시좌에서 예수운동을 보게 하는 민중신학의 인식론상의 혁명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각주:1] 요컨대 민중신학의 사건개념은 1970년대까지 서구신학의 역사의 예수문제설정이 안고 있는 주객 이원론적 도식’, 즉 예수는 이며 그 주변의 대중(및 모든 인간)이라는 전제 아래, 예수 개인의 본질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의 실천은 그 주변의 대중들 및 당대의 모든 사람들 또는 집단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구체화된 것이므로, ‘주객의 이원론적 분리 도식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역사의 예수 문제가 방법론적으로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임을 시사한다.[각주:2] 즉 민중신학의 사건이라는 해석학적 문제설정은 사회학적 접근을 역사의 예수에 관한 신학적 물음에 상응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론적 대안으로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예수를 사회학적으로 묻는다는 것은 (개체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사회적 전형성의 한 표출로서의 예수’, 즉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간, 집단간의 관계의 전형성을 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형성이라는 관점은 예수에 관한 담론의 전승모체와 역사의 예수간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방법론적 개연성을 열어 준다.[각주:3] 바로 이 점에서 역사의 예수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 역사비평학의 한계를 돌파하는 실마리가 발견된다.

사회적 전형성의 한 표출로서의 예수사건을 묻는 일은 사회적 연결망(social network)의 시공간적 응축물인 사회구조에 관한 물음을 수반한다.[각주:4] 그리고 이 사회구조 하에서 전형화될 수 있는 다양한 실천 가능성들 가운데 예수사건이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예수사건의 핵심적 특성을 민중적이라고 성격화한다. 즉 인간 일반의 다양한 지향 속에서 막연히 일반적인 사회적 전형성의 표출로서의 예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중심 대 주변, 권력 대 탈권력(powerlessness)이라는 사회적 불평등의 상황에서 이러한 구조의 해체를 지향하는 민중적이라는 관점으로 예수사건을 묻는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중심으로 예수사건의 구원사적 함의를 해석한다.[각주:5]

바로 여기에서 민중 메시아론이 나온다. 즉 예수사건이 구원사건인 한, (결코 주­객으로 분리될 수 없는) 이 사건의 공동 담지자인 예수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펼치는 사건이 메시아적 사건이라는 것이다.[각주:6] 여기서 민중신학자들은 이 메시아적인 사건의 공동주체를 민중이라 부른다. 다시 말하면 (개인으로서의 존재론적 예수[각주:7]가 아니라) 민중이라는 예수사건적 실체가 우리에게 메시아적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기성의 신학에서 역사비평적 분석방법을 활용할 경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던 메시아라는 신학적 개념[각주:8]이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사건적 함의로 재해석됨으로써 사회역사적 실체로서도 해석될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그렇다면 메시아 사건적 실체로서의 민중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민중신학 안팎에서의 이에 관한 논란은 민중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집중되었다.[각주:9] 그러나 실상 민중신학자들의 글에서 민중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각주:10] 하나는 고난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이라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 변혁의 주체라는 관점이다. 이 둘은 상호관련되지만 명백히 분리된 범주이다. 전자는 사회의 구성적 요소에 초점을 둔 측면이고, 후자는 실천주체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민중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민중의 사회구성적 위치를 묻는다는 점에서 전자와 관련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민중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라는 물음과 연결된다.[각주:11] 그럼에도 민중 개념화 문제에서 민중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만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이 두 범주를 분화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고난의 담지자=역사의 주체라는 도식을 전제하면서 전자에로 후자를 환원시켜 이해하려 했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신학적 실천이론으로서의 전망을 견지한다고 할 때 민중은 (‘고난의 사회역사적 함의를 고려한) 역사 변혁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고난의 담지자란 권력과 탈권력으로 구성된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되는 모순의 피해자들을 가리키는 신학적 수사어로, 이들은 사회학적으로 민중 모집단으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반면 민중은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 하느님나라 운동의 사건적 실체(메시아적인 사건적 실체)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이때 사건적 실체라는 말은 존재론적인 정태적 실체와 대비되는,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달리 발현하는 동태적 실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민중형성의 내용 및 실천 형식을 조명하는 요소로 수()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조직의 응집력을 들 수 있다. ‘의 크기는 민중 연합의 성공 가능성과 관련되며, ‘이데올로기의 강도는 변혁의 철저성과 관련된다. 또한 조직의 응집력은 민중의 형성원리가 최대강령주의(maximalism)적인지 최소강령주의(minimalism)적인지와 관련된다. 그리하여 이 세 요소의 조합으로 민중의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다.[각주:12]

그런데 민중의 사회역사적 존재양태가 가시적인 공식적 정치연합인 것만은 아니다. 권력 대 탈권력이라는 착취의 상황이 존재하는 한, 권력 해체적 실천주체로서의 민중의 존재는 항상적이다. 다만 그것이 일상에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특정 행위의 차원에서, 고립 분산적으로 잠재돼 있어, 사건적 실체로 포착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보다 효과적인 공식적 정치연합으로 구현되기를 지향하지만, 그 존재는 일상성 속에 내재하고 있다.[각주:13] 안병무가 민중사건론을 전개하면서 화산맥이라는 수사어를 사용한 것은 돌발성과 일상성을 사건개념 속에 동시에 함축하기 위함이다.[각주:14] 요컨대 민중사건과 민중 형성론은 일상성과 돌발성을 결합시킨 개념화이다. 이것은 메시아 사건의 일상성과 돌발성이라는 양 차원와 연결된다.

이러한 민중(연합)론은 계급연합론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고대사회의 집합행동 분석에 활용하기에 보다 적절한 이론적 함의를 갖는다.[각주:15] 이러한 형성론적 민중 개념화는 메시아적 사건으로서의 예수사건의 역사성을 조명하는 사회사(또는 역사사회학)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즉 역사의 예수를 밝히는 민중사건이라는 신학적 수사어는, 이와 같은 민중 개념화에 기초한 사회사적 접근을 통해 방법론적인 해명 가능성과 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학과 방법론 사이의 부조화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던 지난 시기 서구의 역사의 예수의 문제설정을 넘어선다.

그런데 이미 말한 것처럼 민중사건적 구상으로서의 사회적 전형성의 표출인 예수은 시공간적으로 구조화된 사회구조와의 관계(위계적 연결망) 아래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점에서 역사의 예수를 밝히는 일은 사회구조로서의 그 시공간적 배경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2. 민중형성론적 역사연구 방법론

 

이제까지 나는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 재해석된 민중 개념에 기초한 민중 메시아론을 제시함으로써, 민중신학은 역사와 신학 사이의 긴장을 해소할 수 없었던 서구의 역사의 예수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학적 입지점을 보유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기술함에 있어 민중 메시아론의 입장에 선 사회사적 연구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민중 형성론적 방법이라고 명명코자 하는데, 여기서는 이것의 내용을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

민중 형성론적 역사연구 방법론은 민중연합의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 민중이 중심­주변의 지배­예속 관계에 대해서 권력[각주:16] 해체적 지향의 연합이라고 할 때, 민중 형성과정을 추적하는 역사서술 방법은 정치사적 접근의 맥락에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권력이 시공간적으로 형성된 사회구조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해체하려는 집합행동(collective behaviors)을 다루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차원이기 때문이다.[각주:17] 정치사는 사회사의 제 영역의 한 분야로서, 사회의 구성요소이자 변화와 재생산의 실천주체인 행위자들의 개인간 집단간의 연결망이 어떤 정치적 기재(mechanism)를 통해 수행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한다.

정치사적 관점에서 행위자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범주화될 수 있다: 국제관계의 주체로서의 국가(,'), 단위국가의 지배분파의 통합체로서의 국가(), 지배분파들(), 촌락공동체(), 촌락공동체의 개별 가족('). 여기서 다음의 네 가지 연결망이 설정될 수 있다.


: 국가간 관계(­')

: 국가 대 지배분파의 관계(­)

: 국가/지배분파 대 촌락공동체 관계('//­)

: 촌락공동체 대 개별 가족의 관계(­')

 

이 네 가지 연결망은 권력관계와 관련하여 중심­주변의 관계로 형성되는데, 이를 도표화하면 [1]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의 관계는 국가간의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각주:18] 불균등한 권력관계로 구조화된 체제적 통합의 형태와 정도에 따라 지배­예속의 관계는 다양하게 발현한다

의 관계는 국가와 지배분파간의 권력관계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특히 비봉건제적인 계급분절사회(class-divided society)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이런 사회에서 다양한 지배분파는 국가와 조세관계로 묶이게 됨으로써, 국가와 지배분파 사이에는 대 농민 관계나 국제관계 등에서의 원칙적인 이해의 일치뿐 아니라, 구조적 갈등의 관계에 놓여 있다.[각주:19] 따라서 여기서는 국가와 지배분파간의 자원동원 능력의 문제가 중요하다.[각주:20]

의 관계는 촌락 내부에서의 권력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는 역사적 자료가 특별히 부족하기 때문에 그 실체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전자본주의 사회의 촌락은 장기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어 왔고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각주:21] 비교인류학적인 연구성과[각주:22]에 기초하여 예수시대의 촌락사회를 추정할 수 있다. 촌락사회는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공공자원이 형성된 사회로, 기본적인 생산단위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촌락 단위의 공동체성이 매우 강고한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촌락의 경계(boundary)를 기준으로 사회 구성원을 내부인(insiders)주변인(outsiders, marginal man)으로 분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내부인이란 공공자산을 분배받으며, 특히 공공자산을 활용한 보험 및 복지 제도의 수혜자들을 가리킨다.[각주:23] 그리하여 촌락의 주요한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제도 내부로 포섭된 존재다. 반면 주변인은 촌락의 공공성으로부터 이탈되어, 보험제도의 수혜에서 배제되었고, 예외적으로만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는 존재로서,[각주:24] 촌락의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제도로부터 배제된 존재다. 한편 내부인들 가운데는 촌락의 공공자원을 관리 및 분배하며, 촌락 외부 특히 도시와의 관계에서 촌락을 대표하는 특화된 개인/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촌락사회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상징들의 수호자인 동시에 대표자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촌락민을 동원하는데 유리한 입장에 있는데, 촌락사회의 상징 조작자로서의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떠돌이 예언자(예컨대 예수)와 촌락민의 사회적 동원을 둘러싼 주도권 갈등을 벌이기도 한다.[각주:25] 그러므로 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은 촌락의 이런 권력관계의 형태, 변화 등을 추적하는 것을 말한다.

계급분절사회에서 , 는 원칙적으로 도시간의 권력관계이고, 는 촌락 내에서의 권력관계이다. 또한 , 가 촌락공동체로부터 수탈한 잉여의 분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반면, 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촌락공동체 내의 공공자원의 분배 문제와 대외 관계 책임을 중심으로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 에서는 단순히 군사적 통합능력에서부터, 정치적 행정적 통합능력이 갖추어진 상태로, 더 나아가 종교적 문화적 통합능력에로 체제적 통합능력이 강화되는 단계로 발전하는 반면,[각주:26] 는 다른 관계들에 비해 군사적 행정적 통합능력(‘감시’)은 매우 낮은 반면 종교적 문화적 통합(‘정당화’)의 정도는 대단히 높으며 그것이 일상의 영역과 깊이 매개되어 있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의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있다.[각주:27]

하지만 계급분절사회의 권력관계의 핵심은 도시 대 촌락의 관계에서 형성되며, 은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 도시는 촌락에서 수탈한 잉여생산물(할당적 자원)의 저장고인 동시에 체제적 통합을 위한 행정적, 군사적, 종교적 자원(권위적 자원)이 집중된 곳이다.[각주:28] 즉 촌락 주민의 절대다수는 권력 자원에서 철저히 배제된 사람들인 반면, 도시는 권력 자원을 장악한 사람들 중심으로 편성된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전자본주의 사회의 도시 주민이 전체 인구의 10% 미만이었다는 점[각주:29]에서 의 관계는 소수의 지배자 대 절대다수의 민중 모집단의 관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민중 형성론적 접근은 바로 (다른 관계들과의 연결망 속에 있는) 의 관계에서 민중 모집단이 민중연합에 참여하게 되는 사회적 동원의 형태나 방식 및 구체적인 지향이나 목표 등을 포착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계급분절사회에서 민중 모집단의 구성으로는, 촌락사회의 유지이며 소자산가인 부농[각주:30]이나 도시의 소자산가[각주:31] 및 몰락한 (사제 또는 평신도) 귀족 등도 포함되곤 하지만, 주로 토지를 소유하고 최저생계 수준을 유지하는 중농’, 소량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예속농지를 보유한 탓에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빈농’, 경작할 토지를 전혀 갖지 못함으로 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거나 또는 그밖의 생계를 위한 온갖 일에 종사해야 하는 사람들인 (계절적) 농업노동자’,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력을 상실하거나 천직(賤職)에 종사하는 사람들인 천민’, 그밖에 노예도시빈민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중농, 빈농과 농업노동자는 수에 있어서 가장 압도적이며 계급분절사회의 주된 생산력인 농경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권력 해체적 변혁을 위한 주력집단일 수 있다.[각주:32] 중농이 민중연합의 주력집단일 경우에는 촌락사회의 연결망에 기초한 기존의 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각주:33] 반면 빈농이나 농업노동자가 주력집단일 경우에는 종종 새로운 조직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각주:34] 그러므로 전자의 경우에는 연합 형성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반면 지역주의라는 한계를 갖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다.

그런데 민중 모집단의 탈권력 체험이 곧 바로 체제 도전적 행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즉 내부인(부농, 중농)이든 주변인(빈농, 농업노동자, 천민, 노예)이든 이들이 정치적 도전연합으로서의 민중연합에 참여하는 데는, ‘지도부로서의 전략집단(strategic group)[각주:35]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촌락공동체가 특히 종교를 통해 높은 수준의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있으므로, 전략집단은 상징을 재해석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대안적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운동에 동원되도록 유도한다.[각주:36]

일반적으로 촌락사회의 전통적 지도부가 농민 동원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시기의 농민 저항은 일상화된 저항(everyday resistance)의 성격을 띄며, 그런 점에서 농민의 동원은 탈정치화(de-politicization)된 사회적 동원의 성격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비정치적(non-political)이라기보다는 잠재된 정치화라는 함의를 갖는다.[각주:37] 반면 다른 부류의 사람/집단(몰락한 귀족, 중농이나 빈농출신자 등)이 농민의 사회적 동원을 주도할 경우에는 반체제적 혹은 일탈적 저항의 성격을 지니곤 한다. 그러므로 민중연합의 지향이나 목표 및 형성 방식 등을 파악하는 데 있어 연합에 참여한 대중의 성격뿐 아니라 지도부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각주:38]

 

3. 예수운동의 민중형성론적 배경사 시론

 

민중 형성론적 관점의 예수운동 배경사에서 중요한 요소는 메시아 사건적 운동의 전개에 있다. 성서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구원사의 궤적을 그리는 데 초점이 있다면, 바로 그점에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예수운동의 배경사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메시아 신학이 본격화한 유다 귀환공동체 재건기를 그 시점을 하고, 이로부터 민중연합의 양태를 기준으로 하여 식민지 팔레스틴의 역사를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 다루고자 한다 : 페르시아 제국 시대, 헬레니즘 제국 시대와 하스몬 왕국 시대, 로마 제국 시대. 단 여기서 세 번째 시기의 민중 형성의 특징은 (이 논문의 분량상 본격적인 논의는 후일로 미루고 다만 여기서는) 맺음말에서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 시대

계급분절사회에서 사회발전의 두 지표는 정복체제의 정비.[각주:39] 앗시리아나 바빌론은, 생산력의 차원에서 볼 때, 단위 지역에 국한된 고대국가보다 발전된 정치단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제국의 식민지 관리 방식은 군사적 시위를 통한 약탈적 지배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다리우스 1(Darius I) 때 처음 시행된 지방구역화 정책에서 드러나듯이 페르시아는 지배 방식의 질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각주:40]

유다는 페르시아의 제5 관구(satrapy)에 속하는 예후드 지방(province of Yehud)이라 불리웠다.[각주:41] 여기서 유다는 비로소 독립된 하나의 자치구가 된다.[각주:42] 페르시아의 유다계 유배민 귀환정책은, 각 지역의 예속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중앙정부와 친숙한 정권을 창출하려는 보다 큰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각주:43] 그러므로 새로운 유다지방정부와 사마리아 등의 토착정부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갈등적 관계에 있었다. 한편 페르시아의 유다지방재건정책은 일관성 없이 단편적이고 단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유다 귀환공동체 내부에도 이해를 달리하는 여러 지배분파들이 형성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는 이 시대 유다 지방안팎의 팔레스틴 사회를, 탈중앙집중화된 다원적 지배분파들간의 권력투쟁으로 특징지워지는 다중권력행위자사회’(multi-power-actor society)[각주:44]라 규정코자 한다. 상위의 거중적 조정자 부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다중권력행위자간의 헤게모니 투쟁은 점점 격화되었고, 이는 경쟁 비용의 과다지출을 의미했다. 이것은 그대로 팔레스틴 농민에게 과부하 상황으로 이어졌다.[각주:45]

여기서 당시 팔레스틴 촌락사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빌론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시기의 인구 추세[각주:46]급격한 감소/완만한 증가로 특징지울 수 있다.[각주:47] 이러한 인구 변화 추이는 촌락사회의 해체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시 유다 촌락사회 구성은, 계급분절사회가 대개 그렇듯이, 다음과 같이 3층적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토지, 철제 농기구[각주:48]나 우축(牛畜)[각주:49] 등을 소유한 소자산가적 농민(부농), 정상적 상황에서 최저생계 수준을 겨우 유지할 정도인 소자영농민(小自營農民, 중농),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런 생산수단도 갖지 못한 소작농 내지는 농업노동자(빈농).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인구 추세는 촌락사회 통합의 기반이 아직 강고하지는 못했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복지제도와 보험제도를 통한 촌락사회 유지 비용의 축적이 아직은 불충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중권력행위자들의 경쟁으로 인한 농민경제의 압박은 농민의 전반적 하향분화 현상, 중농의 빈농화를 초래하였다.[각주:50]

이러한 상황은 당시 팔레스틴 농민의 높은 정치적 동원(political mobilization) 가능성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 시기 정치연합들은 각기 농민을 자파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성서에는 당시의 정치연합의 담화로 추론할 수 있는 세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셋은 각기 이 시기를 특징짓는 세 유형의 민중연합을 대표한다.

첫째, 하깨서와 제1 즈가리야서(1­8)의 담화 속에는 구왕국의 재건이라는 과거 회귀적 특성과 이상적 메시아 왕국의 건설이라는 미래지향적 특성이 결합된 공동체 재건 이데올로기가 함축돼 있다. 하깨와 즈가리야 예언자는 성전 재건을 주장함으로써 귀환공동체 지도부와 유다 촌락사회를 중개한다.[각주:51] 이들은 성전을 구심점으로 하는 공동체의 중심으로 즈루빠벨과 여호수아라는 구왕국의 왕족/귀족 출신 인물을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재건 구상을 다윗 왕국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농민의 편에서, 새로운 다윗 왕국은 메시아가 다스리는 신정공동체로서, ‘고난축복으로 전도된 민중해방의 세계임을 주장한다(즈가 8,18­19). 특히 즈가리야의 신탁은, 묵시적 담화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깨의 그것보다 기층대중과 더욱 친화력 있는 자리의 생산물이라 할 수 있다.[각주:52]

이렇게 하깨와 즈가리야를 매개로 하여 형성된 정치연합은 유다 촌락사회를 지배해 온 사마리아 지배층에 대한 권력 해체적 특성을 지니며, 그 대안으로 민중해방적인 신정적 메시아 공동체를 염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연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53] 요컨대 이 연합은 구왕족 출신 인물 중심의 귀환공동체의 민족공동체 재건 구상과 권력 해체적 성격을 갖는 기층대중의 메시아 왕국 대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의도되지 않은결과로 형성된 민중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의 민중연합 유형으로는 에즈라­느헤미야 연합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유다 농민을 동원하는 방식은 하깨나 즈가리야와는 달랐다. 이들에게 있어 다윗 왕국 재건이라는 상징은 더 이상 체제적 통합의 수단이 아니었다. 여기서 왕권을 전제하지 않는 성전 중심의 공동체라는 대안이 등장한다.[각주:54] 이들은 메시아적인 혹은 묵시적인 언술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사마리아 담화를 통해서 유다 촌락사회의 대중을 포섭하려 한다. 하깨와 즈가리아는 과거회기적 차원과 미래적 차원의 교차점에서 귀환공동체 지도부와 촌락사회의 대중을 매개했던 반면, 이들은 개혁이라는 현재적 차원에서 대중을 포섭하려 한다. 이 개혁은, 한편으로는 빈농화 억지책(抑止策)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촌락사회의 잉여생산물을 전유함으로써만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다중권력행위자들의 재정 기반의 무력화 정책으로 시행된 것이다.[각주:55] 그러므로 에즈라­느헤미야 중심의 연합은, 촌락사회의 대중을 포섭한 민중적 지배연합이라는 점에서는 즈루빠벨­여호수아 중심의 연합과 공통점을 갖지만, 후자가 제국주의적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할 수 있는 미래적 메시아 사상의 지평을 지니는데 반해, 전자는 사마리아 지배집단으로 대표되는 수평적인 다중권력행위자들에 대해서만 권력 해체적 지향을 갖는다.

페르시아 시대 민중연합의 세번째 유형은 제3 이사야서에 반영되어 있다.[각주:56] 여기에는 즈가리야처럼 묵시적 담화가 활용되고 있지만, 왕국 재건이라는 관점이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각주:57] 또한 재건공동체의 무게중심이 성전에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두 연합과 공유점이 있지만, 여기서의 성전은 구체적인 인물이나 그 배후의 권력집단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 성전은 모두에게 열려져 있고[각주:58] 심지어 외국인이나 고자에게조차 개방된다(이사 56,1­8). 이것은 우주적 차원의 회복을 상징하는 종말론적인 새 예루살렘, 새 성전 전망과 연결된다(이사 65,17­25).[각주:59] 요컨대 제3 이사야의 공동체 재건 전망은 일체의 현존 권력에 대해 해체적이며, 탈권력 상태의 모든 존재를 향해 열린 궁극의 세계를 지향한다.

3 이사야 계열의 민중연합의 중심에는, “(=야훼)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사람들(herēdÎm)이 있다(이사 66,5). 그들은 페르시아 시대 유다지방의 엘리트 충원 과정에서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배제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밖으로는 세계주의에 대해 개방적이고 안으로는 촌락민의 역동적인 세계관인 묵시사상에 대해 개방적인 반체제적 지식인들의 등장을 본다. 그들은 몰락의 위협 아래 신음하고 있는 촌락사회의 기층대중을 향해, 역사의 고난에 직면하고 있는 온 우주를 향해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이사 61,1)하는 자신의 사명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세 유형의 민중연합은 모두 당시의 사회구조에서 기인한 기층대중의 높은 정치적 동원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 상류층 출신인 극소수의 지식층에 의해 추동된 연합이다. 그러나 이 셋은 그 구체적인 성격이나 역사적인 역할은 각기 달랐다. 앞의 두 연합이 지배연합의 성격을 지닌데 반해, 세 번째의 유형은 도전연합의 성격을 지니며, 첫째와 셋째 것이 미래적이고 변혁적인 묵시적 담화와 결합된 반면, 둘째의 것은 현실적인 개혁 정책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앞의 두 유형은 영웅적인 실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첫째 유형은 실명의 메시아를 전제하는 반면, 마지막 유형은 익명의 메시아적 지도자를 추종한다.

 

헬레니즘 시대와 하스몬 왕국 시대

이 시기는 동방의 내륙 사회와 지중해권 사회를 연결하는 거대 영역이 체제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특성화되는 시기다. 알렉산더와 그의 계승자들(diadochoi)에 의해 세워진 도시(폴리스)들 간의 무역에서 발단해서, 제국 전체에 분포된 준폴리스화한 도시들의 상품 구매력이 급상승함으로써 광범위한 지역을 연결하는 경제적 연결망이 형성되고, 이들 도시들을 중심으로 국제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면서 토착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의 갈등과 상호 습합과정을 거처 헬레니즘이라는 창조적인 역사적 특징이 구현된다.[각주:60] 한편 제2차 포에니 전쟁(주전 218­201)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지중해라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로마의 동방고립화 정책은 헬레니즘 제국들을 한데 묶어 놓았던 거대 영역의 경제적 활황(活況) 국면을 전반적으로 쇠락시킨다.[각주:61] 그리하여 경제적 통합이 해체되고 국가들간에 난투극이 벌어지며 마침내 로마가 지중해로 한정된 지역의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로 등장하게 됨으로써, 고대에 잠깐 동안 빛을 발하던 경제적 제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헬레니즘 시대의 주역은 폴리스가 아니라 헬레니즘적 국가라는, 막대한 경제적 능력에 기초한 강성 제국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페르시아에 의해 시도된 지방구역화 정책의 완성자라 할 수 있는 프톨레미 제국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첫째, 철제 농기구의 개량 및 보급의 확대, 종자 개량, 효율적이고 대규모적인 관개 체제의 확립 등, 농업기술적 생산력상의 발전을 정부 주도로 이룩하였고 이 기술적 노하우를 독점함으로써,[각주:62] 에집트의 지주계급들을 효과적으로 예속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고,[각주:63] 둘째로, 전매권(專賣權) 임대나 고율의 관세 적용 등을 통해 국제무역에서 유망한 상품의 제조 및 유통을 독점 관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각주:64] 이같은 경제적 능력으로 강력한 함대와 용병 부대[각주:65]를 보유하고 자산가들을 경제적으로 황실의 이해에 포섭하게 됨으로써, 체제적 통합이 추동될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66] 한편 제논 파피루스(Zenen-papyrus)에서 시사되듯이, 남부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을 포함한 식민지역들에 대하여도 프톨레미 제국은 에집트와 같은 체제 통합 방식을 적용하려 했던 것 같다.[각주:67] 이들 식민지역은 에집트의 필요생산물을 보충하거나 무역 보조항(補助港)을 제공해 주는 이른바 주변부 경제권으로서 에집트 경제에 포섭되었다.[각주:68]

이러한 프톨레미 제국 치하에서 팔레스틴의 다중권력행위자들간의 무한경쟁은 종식되고, 표면상 안정된 수평적 균형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제국 경제체제의 반주변부[각주:69]로 편성됨으로 말미암아 급부상한 지역인 암몬의 토호 토비아 가문(Tobiads)이 팔레스틴과 시리아 남부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Jos., 유다고대사12,167­185). 유다의 성전 관료 기구는 어느 정도의 종속 상태에 있으면서 토비아 가문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적어도 두 파벌로 분화되었던 것 같다.[각주:70] 이러한 파벌간의 갈등은, 영토의 광할함과 이질성 때문에[각주:71] 지방분권적 특성을 보인 셀류커스 제국 시대에 와서 표면화된다.

제국 행정의 방만함에도 불구하고 광할한 영토를 장악하게 된 안티오쿠스 3(주전 223­187)의 셀류커스 제국의 힘의 크기가, 효율적 행정에 기초한 프톨레미 제국의 정치경제적 능력의 크기보다 우위에 서게 된 것은 헬레니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또 다시 경제의 논리보다 정치 군사적 논리가 압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 마그네시아(Megniaia)에서 전술상의 우위에 기반한 로마가 셀류커스 제국에게 승리한 것은 이러한 조짐의 결정판이었다.[각주:72] 이 패전은 셀류커스 제국의 통치 능력에 중대한 손상을 가져왔다. 황실 창고는 고갈됐고, 이제 제국의 주도권은 빈 창고를 채울 임시변통적 능력을 가진 이의 차지였다. 안티오쿠스 4세 이후 제국 재건비용의 조달은 식민지역에서 원칙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추진된다. 군사적 시위를 통한 약탈이라는 고대 제국들의 해묵은 방식이 그 하나이고, 식민지 각 지역에서 헬레니즘이라는 선진적인 국제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엘리트들의 자발적인 헌납의 유도가 다른 방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토비아 계열의 대표격인 오니아스 가문(Oniads)에서 헬레니즘 계열을 대표하는 야손이 자신의 형을 축출하고 대사제직에 앉더니, 곧이어 토비아 가문의 지원을 받는, 또 다른 헬레니즘 파벌의 대표자 메넬라우스가 야손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거듭된 헬레니즘 분파들의 쿠데타는 안티오쿠스 4세의 헬레니즘 선교 정책에 호응한 것으로,[각주:73] 그들은 모두 성전 기금의 강제 인출에 협조하는 경쟁을 벌였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권력분파간의 갈등이 무한궤도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보여 준다.

페르시아 시대에 이어, 셀류커스 시대의 다중권력행위자간의 무차별적 권력투쟁은 팔레스틴 농민의 하향분해가 고대 제국의 식민지배 능력의 한계로 인한 구조적 특징임을 시사한다. 한편 프톨레미 제국 시대는 팔레스틴의 대중 사회에 또 다른 특징을 부여하였다. 농업 생산성의 향상은 촌락사회의 일부 농민들에게 일정한 자산 축적의 기회를 부여해 주었고, 제조업과 국제무역에서의 활성화는, 특산품 제조 능력, 항해 능력, 외국어 구사 능력, 수리적 계산 능력, 거래 능력 등, 그 전문성으로 노동과정이 매우 독립적 성격을 갖는 분야 종사자들에게 자산 축적의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즉 프톨레미 제국 시대의 경제적 활황은 농촌과 도시에서 기층대중으로부터 상향분해된 소자산가적 계층이 광범위하게 대두하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헬레니즘 시대에는 기층대중의 상하향분해가 계기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각주:74]

이러한 상황에서 기층대중의 기대수준은 상승한 반면, 단지 일부에게만 이와 같은 상승 욕구가 관철될 수 있었고 더욱 많은 수의 사람은 심화된 사회적 박탈 가능성 앞에 현저히 노출되었다. 또한 하향분해로 말미암아 촌락사회의 규범적인 사회적 통합 기능은 약화되었다. 게다가 알렉산더와 프톨레미 제국 이래 도시와 농촌간의 지정학적 거리가 상대적으로 단축됨으로써, 메넬라우스 일파 주도로 추진된 헬레니즘적 개혁조치는 도시의 문자계층에게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상대적으로 매우 높게 체감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셀류커스 시대 팔레스틴 농민의 정치적 동원 가능성을 극적으로 높이는 원인이 되었다.[각주:75]

그런데 기층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주도적 역량은 소자산가 계층으로부터 나왔다. 생존을 위한 노동시간으로부터 일정한 여가를 획득한 것에 기초해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도시와 촌락에서 문자계층으로 새로이 대두한 것으로 보인다.[각주:76] 계급분절사회에서 기호의 언어로서의 문자는 정보 저장의 최고 매체로, 권력 독점의 주요 수단의 하나였고, 반대로,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예언서들에서 보이듯이 권력 해체를 위한 투쟁 담론의 저장 수단이기도 하였다.[각주:77]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서 서기관(scribes)은 문자를 통한 정보 저장 업무에 종사하는 전문가로, 정부나 준정부적 조직(: 성전관료기구)의 관료/관료사제의 일원이거나 도시나 촌락의 공의회(synedrion)에서 사제나 예언자 혹은 그밖의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는 사람들에 속했다. 하지만 왕국시대나 페르시아 식민지 시대를 반영하는 성서 본문들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거의 왕실이나 성전에서 활동하는 귀족 출신 서기관들뿐이다.[각주:78] 이것은 비귀족 출신 서기관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일 수는 없으나, 적어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만한 서기관의 신분적 경향성을 보여 주는 증거로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런데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정부나 성전의 관료가 아니고 예언자 동아리의 일원도 아닌 서기관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세푸스의 책들, 마카베오서, 묵시문서들 등을 포함한 이 시대의 유다교 문서들에는 서기관이 고귀한 계층이라기보다는 평민에 가까운 존재로서 등장하며, 도시뿐 아니라 촌락의 대중을 염두에 둔 권력 해체적 지향의 문서들을 저술하거나 또는 대중적인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각주:79] 촌락 공의회의 서기관이 될 기회는 전통적으로 부농출신에게 보다 많이 열려 있었을 것이고, 대중적 차원의 서기관들이 역사에 현저하게 포착되는 시기가 소자산가적 문자계층이 상대적으로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양자 사이의 깊은 연관을 추론케 한다.[각주:80]

또한 이 시기가 회당이 팔레스틴 역사에 등장 확산되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시에서 회당은 원로원적 성격의 귀족들의 공의회와는 별개로 형성된 시민 또는 평민들의 공의회로 추정되며, 촌락에서는 혈연적 지연적 가부장 중심의 촌락 공의회가 소자산가 지식인들 중심으로 변형된 모습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회당은 도시와 농촌에서 소자산가 지식인들의 대중적 지도력이 구현되던 사회종교적 공간일 것이다.

한편 소자산가적 집단이 문자계층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촌락과 도시사회에서의 그들의 대중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간의 범사회적 동질성을 강화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즉 문자는 이들 소자산가적 집단이 귀족 중심의 엄격한 신분제도[각주:81]로 말미암아 억제된 상승욕구를 공동으로 분출하게 하는 초지역적 매체이기도 했던 것이다.[각주:82]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이들은 대중적인 사회적 동원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지역 수준을 넘어서 범사회적으로 결속된 대중의 사회적 동원을 주도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대중적 지도력을 가진 세력의 출현을 보여 주는 몇 가지 증거들을 성서나 외경 등에서 얻을 수 있다. 첫째로, 주전 164년의 봉기에서 마카베오 봉기에 가담한 하시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율법에 대한 충실한 태도로 말미암아 전사(ισχυροι δυναμει)가 된 이들로(마카베오상 2,42), 마카베오 봉기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선동하고 다니는 존재들이다(마카베오하 14,6). 요컨대 이들은 대중을 정치군사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며, 아마도 이것은 율법이라는 생활률적인 지식에 대한 그들의 점유 능력에 기반한 대중적 영향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둘째로, 다니엘서 1133절의 maskilim 은 마카베오 봉기가 일어날 어간에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여 반헬레니즘적 항쟁에 참여토록 선동했던 지식인들인 것으로 보인다.[각주:83] 이 둘이 모두 관련되어 있는 마카베오가() 중심의 봉기에서 대자산가들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프톨레미 제국 시대 이래 어떤 형태로든 헬레니즘적 세계관에 포섭돼 있던 탓이리라. 요컨대 이 항쟁은 상류계급을 거의 포함하지 않는, 헬레니즘적 권력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내포하는 민족주의적 민중연합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카베오 봉기에서 하스몬 왕국으로의 자주적 민족국가의 건국으로 귀결되는 과정은 이 새로운 유형의 민중연합의 와해를 의미했다. 그것은 셀류커스 제국 황실 내의 안티오쿠스계와 셀류커스계 사이의 권력투쟁 과정을 이용할 줄 알았던 마카베오 가문 통치자들의 수완이 반헬라주의적인 야휘즘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하시딤의 명분과 더 이상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요나단과 시몬이 셀류커스 제국과 타협하자 율법에 충실했던 집단들이 이 연합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의 세계관을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는 종파로서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각주:84] 그 대표적인 것은 에쎄네[각주:85]와 바리사이로 불리운 집단으로, 대중적 지도력을 가진 지식층의 존재를 보여 주는 세번째와 네번째의 증거들이다.

에쎄네는 하시딤 계열에서 발전한 당파로, 지도자인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를 따라 사악한 사제(the Wicked Priest)를 비판하며 등장한 집단이다. 여기서 사악한 사제의 정체는 에쎄네의 기원을 논하는 데 있어 중요한데, 셀류커스 황실의 데메트리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의 경쟁관계를 이용하여 후자로부터 대사제직을 승인받은 요나단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각주:86] 하지만 그 이후 시몬을 비롯한 하스몬 왕가의 통치자 모두에게 이러한 혐의가 지워졌음이 분명하다. 하스몬 왕국 특유의 사제­왕을 향한 그들의 이러한 적대감은 그들이 권력 해체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의의 교사는 축출당한 사독계의 오니아스 대사제가문 출신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가문의 정통성을 받아들이는 사제 출신 인물로 보이는데, 그가 성난 사자에 의해 십자가 처형 혹은 그밖의 어떤 잔혹한 방식으로 수난당하고 죽임당하였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다.[각주:87] 그러나 이 메시아적 지도자는 상징적 존재일 뿐이다. 실제로 에쎄네는 하나의 일사분란한 당파라기보다는 도시와 농촌에 두루 퍼져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리는 유사한 파벌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각주:88]인 것으로 보인다.[각주:89] 그들은 다마스커스 문서(CD)나 쿰란 문서들 등 많은 책자를 남길 만큼 문자에 익숙했던 이들이지만, 그들이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필로(Philo)나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들은 노동계층(농부)에 속했다.[각주:90] 또한 이 문서들에 따르면 에쎄네는 평등주의적이고 묵시적인 이념과, 바리사이보다 한층 엄격하고 비일상적인 율법관을 지녔는데,[각주:91] 이것은 에쎄네가 대중적인 존중을 한 몸에 받게 하는 요인인 동시에 그들의 운동이 보다 대중적이 되는 데는 장애 요인이었다. 하지만 통상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그들이 평화주의적이고 은둔적인 것은 아니었다. 히폴리투스가 그들의 한 분파를 테러리스트인 시카리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나, 유다전쟁시에 그들의 지도자가 기살라의 요한을 지지했던 것은 에쎄네가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묵시적 열정의 표출을 절제하였던 행동주의 분파였음을 시사한다.[각주:92] 그들은 강력한 대중동원능력을 갖춘 민중형성의 주역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민중형성세력인 것은 분명하다.

한편 바리사이는 하시딤의 소자산가적 세계관을 대중화 보편화시키려는 일련의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각주:93] 대중적인 지도력에 기초하여 하스몬의 성공과 이로 인한 새로운 귀족주의의 전개를 견재하는 강력한 도전연합을 이룬다. 요세푸스는 한창 하스몬이 영토 확장을 통해 성장하는 와중이던 히르카누스 1세 때(주전 135­104)에 바리사이의 저항이 시작됐음을 보도한다(Jos., 유다고대사13,288­299). 그리고 이 문맥에서 사두가이파가 등장한다(유다고대사, 13,293297). 사두가이즘은 귀족들의 세계관의 종교적 표현인데, 이들 귀족들은 헬레니즘적이었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인 하스몬 왕실과 입장을 같이 하고 있었다.[각주:94] 이때부터 하스몬 왕실과 사두가이 대 바리사이 사이의 대립이 계속된다. 이러한 대립은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 시대에 절정에 이르는데, 이 시기에 바리사이 주도하의 민중연합은 국제적인 진보분위기를 타고 강렬한 저항의 불길을 올렸다.[각주:95] 그리하여 알렉산드라 여왕(주전 76­67) 시대에 이르면 잠시 동안 집권세력으로 부상하여 진보적인 개혁정책을 폈고 비민중세력을 숙청하기까지 했다(유다고대사, 12,405­411). 그리고 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하스몬 왕조의 몰락 때까지 아리스토불로 2세와 히르카누스 2세 사이의 투쟁에서 후자의 강력한 지원세력으로, 헬레니즘 시대 민중연합의 주역으로 활동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헬레니즘 시대의 민중연합은 대중의 상하향분해 현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 상향분해로 말미암아 새로이 등장한 소자산가적 지식인 집단의 역할은, 페르시아 시대 민중연합의 전략집단을 구성하였던 상류층 출신 인물들을 대체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구호는 보다 대중적 이해관계와 얽혀 있으며, 가히 계급연합이라 할 만큼 진보적이었다. 또한 페르시아 시대와는 달리 이 시기의 민중연합은, 알렉산드라 여왕 때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도전연합의 성격을 지닌다. 한편 이 시대는 페르시아 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한 묵시사상이 무르익는데, 여기서 메시아적 존재는 구체적 인물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운동의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자처하기보다는 메시아 도래의 징표 정도로서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4. 맺음말

 

이제 로마제국 시대의 팔레스틴의 민중형성에 관해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자.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틴에 헤로데 가문에 의한 봉신국 왕조가 확립되기까지는 구하스몬 왕족이 주도하는 일련의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마제국 시대에 두드러진 민중연합의 특징은 기층대중 자신의 지도적 역할이 현저해졌다는 것이다. 그 예는 헤로데 집권 초기에 그 맹아가 나타나고, 그의 죽음 직후(주전 4) 및 주후 60년대에 폭발한 대중봉기 등에서 발견된다.[각주:96] 그것은 유언비어(rumor) 형태의 묵시적 담화가, 율법을 통한 민중 전승과 더불어, 대중 사이에서 폭넓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상응한다.[각주:97] 또한 이것은, 이전시대 저항운동의 주요한 장이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이었던데 비해, 이 시대는 그 본거지가 변경지역(frontier zone)인 갈릴래아 북부와 시리아 남부 지역으로 옮겨온 것과 상응한다.[각주:98] 변경지역이야말로 체제 통합을 위한 감시의 손길이 가장 약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한편 헤로데가 바리사이의 일부 상류층을 산헤드린 체제의 주요 구성원으로 편입시킨 것은, 바리사이의 상당부분을 체제 내부로 포섭해내는 심리적 매수효과을 발생시켰다. 이것으로 인해 이 시기 소자산가적 지도력은 이전시대에 비해 두드러지게 약화된다.

이상과 같이 페르시아 시대에서 로마시대까지 민중연합은 당시대의 사회구조적 요소에 영향받으면서 연합 주도층의 사회적 성향에 따라 변천했다. 예수운동은 이러한 전통의 발전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간과된 채 예수사건을 역사 밖의, 이례적이고 돌출적인 사건으로만 조명할 때, ‘사람 사는 땅의 역사와 무관한, 덜 연관된 시공간적 위치로서 해석할 때, 아무리 신인(神人)그리스도론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화육의 진리를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의 메시아 사건은 땅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을 전제로 한다. 바로 이 구체적인 사건의 주역은 예수와 그 주변의 대중, 그리고 (이들의 실천 지향의 상징적 중심인) 하느님이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제거되면 그 사건은 예수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예수사건의 핵심은 불균등한 권력상황하에서 그러한 권력의 해체를 지향하는 실천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것과 비정신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폭력적인 것과 비폭력적인 것을 구별하려는 탁상머리의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의 사건은 그런 구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사건은 권력 해체를 지향하는, 곧 해방을 지향하는 민중을 각각의 시공간적 위치에서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힘, 곧 하느님의 로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1. 토마스(N.T. Thomas)는 지금까지의 ‘역사의 예수’ 연구를 세 단계로 나눈다. 첫째 단계는 19세기 자유주의신학자들의 전기적 물음의 시대이고, 둘째 단계는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포스트불트만주의자들 중심의 ‘새로운 물음’(new quest) 단계며, 세번째 단계는 주로 1980년대 이래의 ‘제3의 물음’(the third quest) 단계다(“Jesus, Quest for the Historical”, Anchor Bible Dictionary vol.3, 796~802쪽 참조). 여기서 “지난 두 차례”란 첫째와 둘째 단계의 예수연구를 말한다. 이 두 차례의 역사의 예수 연구와 이른바 ‘역사의 예수 연구 폐기론’(no quest) 對 ‘제3의 물음’ 사이의 문제설정에서의 차이에 대하여는 토마스의 위의 논문과 보그(Marcus J. Borg)의 논문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 《기독교사상》 (1995.6)을 보라. 결국 이 양자간의 차이는 사회적 연결망(social network)에 대한 인식, 학제간 연구에 따른 이론적인 발전, 전문적인 고고학적 연구성과물의 축적 등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사건’이란 사회적 연결망에 대한 인식과 상응하는 신학적 개념화라 할 수 있다. 김창락의 논문(〈예수와 민중운동〉, 《새로운 성서해석과 해방의 실천》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0>)은 ‘역사의 예수’ 연구사에서 ‘사건’ 개념의 ‘혁명적 전환’으로서의 의의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논술한 첫번째 시도이다. 또한 김명수의 〈민중신학의 해석학(II)〉, 《기독교사상》 400 (1992.3)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보그는 슈바이쳐(A. Schweitzer)와 불트만(R. Bultmann)으로 대표되는 ‘역사의 예수 연구 폐기론’ 및 1950~60년대의 ‘새로운 물음’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로 ‘신학과 역사 사이의 무관성’을 든다(Borg, 앞의 논문, 280~282쪽). 이것은 이들이 역사비평학의 한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었다는 사실과 상응한다. [본문으로]
  3. G. Theissen, 〈원시그리스도교의 예수말씀 전승에 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03~106쪽 참조. 그는 ‘전승과 삶 사이의 구조적 연관성’이라는 양식비평적 명제를 사회학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즉 ‘삶’을 ‘사회적 전형성의 표출’로서 재해석함으로써 양식비평이 도달한 역사의 예수와 초기그리스도교 사신 사이의 ‘불연속성’이라는 회의를 역전시킨다. 한편 안병무는 자신의 민중사건론인 ‘오클로스론’을 전개하면서 역사의 예수와 그 전승 모체인 기층대중(그에게서는 오클로스와 동일시되는 “갈릴래아의 민중”) 사이의 ‘상황의 유비’(‘고난’)로 ‘전승의 연속성’을 설명하며, 그 매개체로 ‘유언비어’(rumor)라는 전승형식을 제시한다(〈예수사건의 전승모체〉, 《198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전개》).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의 이러한 발전과정 및 그 실천적 함의에 대하여는 나의 논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기념논문집》 (천안: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하지만 전형성에 대한 종교사회학적 해석은 예수와 예수운동의 지지자들 사이의 예수사건 속에서의 ‘통일성’ 뿐만 아니라 ‘차별성’을 보여준다. 즉 예수운동 지지자들은 운동에서의 역할상 ‘전략집단’(strategic group), 주요 동원 대상집단, 지역협조자 등 세 부류로 나뉠 수 있고, ‘전략집단’은 다시 예수, ‘제자 중의 제자’(‘열둘’, δωδεκα), ‘그밖의 제자들’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할상의 차이는 천년왕국운동적 종교사회운동인 예수운동에서의 ‘집단 정체성의 상징적 중심’으로서의 예수와 다른 지지자들 사이의 ‘차별성’에 관한 담론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예수운동의 혁명성 연구》 (서울:나단, 1992), 112~134쪽 참조. 이렇게 예수사건 속에서 통일성과 차별성이 공존함을 주장함으로써, 그 동안의 민중사건에 대한 논쟁에서의 통일성과 차별성 사이의 양자택일적 대결구도가 극복될 수 있다. [본문으로]
  4. 사회적 연결망 이론은 개별적 속성(individual attribute), 관계적 속성(relational property), 구성적 속성(configuration) 등 세 가지 기본적 속성을 위계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를 분석하는 이론이다(김용학, 《사회구조와 행위》 <서울:나남, 1992>, 253~54쪽 참조). 이 이론을 여기에 적용하면 사회적 전형성의 한 표출로서의 예수라는 행위자像(개별적 속성)은 사회구조(구성적 속성)뿐 아니라 예수와 관계된 우호적 또는 적대적, 혹은 중립적인 사람들 및 그 집단과의 관계적 속성과의 위계적 상호작용 속에서 밝혀져야 함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5. 홀렌바하(Paul Hollenbach)는 최근의 예수연구, 즉 ‘제3의 물음’의 경향에 대해 비평하면서, 역사의 예수를 묻는 동기는 ‘해방’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의 논문 〈오늘날 북아메리카에서의 역사의 예수 문제〉, 《시대와 민중신학》 (1995.5) 참조. [본문으로]
  6. 이것은 ‘가현론’이라는 명목으로 비판될 수 없다. 가현론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 사이의 관계를 조합해보려는 ‘사변적’인 논쟁의 한 결과물이지만, 민중신학은 역사의 예수를 조명하는 방법론적 문제와 역사의 예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실천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신학적 문제 사이의 관계를 묻는 과정에서 ‘민중 메시아론’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즉 가현론과 민중사건론 사이에는 그 실천적 함의가 전혀 다르다. [본문으로]
  7. 이 예수상은 지금까지의 어떤 연구방법으로도 밝혀낼 수 없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는 신학의 전제이기는 하나 신학의 주제는 아니라는 신학적 우회로를 택해야 했다. R. Bultmann, 《신약성서신학》 (서울:성광문화사, 1983), 1쪽 참조. 마이어(John P. Meier)는 이런 예수상을 ‘실제 예수’(Real Jesus)라고 부르면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역사의 예수’라는 신학사적으로 오용된 개념을 역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재복권시키기 위해서 사건적 예수상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그의 글 〈실제 예수와 역사적 예수〉, 최갑종 엮음, 《최근의 예수 연구》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23~51쪽 참조. 이 글은 마이어의 책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Doubleday, 1991)의 21~40쪽을 옮긴 것이다. [본문으로]
  8. 보그가 ‘제3의 물음’ 시대의 합의 가운데 하나로 든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관의 폐기”라고 한 것(Borg, 앞의 논문, 285쪽)은, 바로 이런 사실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러나 유다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유다교의 종말론에 관한 새로운 이해의 지형을 열어 놓았다. 예수를 종말론적 상징예언자로 보는 샌더스(E.P. Sanders)의 책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Fortress, 1985)과 예수를 민중적 급진주의 노선의 종말론적 예언자로 보는 호슬리(R.A. Horsley)의 책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San Francisco:Harper & Row, 1987) 참조. [본문으로]
  9. 최근 시민사회론적 입장에서 민중신학 위기론을 주장했던 서경석 및 그밖의 몇몇 위기론자들도 바로 이런 선입견에서 민중신학의 위기를 말한다.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는 나의 논문 〈최근의 ‘민중신학 위기론’은 실천이론의 빈곤을 반영한다〉, 《이론》 8 (1994 봄) 참조. [본문으로]
  10. 민중 개념화에 대한 이하의 논의는 나의 논문 〈역사주체로서의 민중. 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신학사상》 80 (1993 봄)에 기초한 것이다. [본문으로]
  11. 왜냐하면 고난의 담지자가 자명하게 역사 변혁의 주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2. 여기서 ‘변혁의 높은 성공가능성과 최소강령주의’ 및 ‘낮은 성공가능성과 최대강령주의’는 그 시공간적 거리가 반대의 경우보다 가깝고, ‘변혁의 철저성의 높은 정도와 최대강령주의’ 및 ‘변혁의 철저성의 낮은 정도와 최소강령주의’도 그 반대의 경우보다 가깝다. [본문으로]
  13. 끄로아는 계급투쟁과 착취를 동일차원에서 설명함으로써 계급투쟁의 일상성을 강조한다. G.E.M. de Ste Croix, The Class Struggle in the Ancient Greek World from the Archaic Age to the Arab Conquests (New York:Cornel University Press, 1981), 49쪽 이하 참조. 이것이 구조환원론이 아닌 것은 착취가 계급투쟁의 발현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현 가능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4. 나의 논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169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15. 로어바우는 성서시대 그리스도교 운동을 분석하는 데서 마르크스주의와 베버주의적 관점의 절충을 통해 환원주의와 기능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편다. R. Rohrbaugh, 〈초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계급위치 논쟁에 관한 방법론 고찰〉, 《신학사상》 84 (1994 봄) 참조. [본문으로]
  16. 여기서 ‘권력’은 물질세계에서의 인간지배와 관계되는 ‘할당적 자원’(allocative resources) 및 사회세계에서의 인간지배와 관계되는 ‘권위적 자원’(authoritative resources)을 전유하기 위한 지배조직의 시공간적 재생산에 의해 형성된다는 기든스(A. Giddens)의 권력이론을 따른다. 그의 책 《사적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서울:나남, 1991), 제2장 참조. 이 개념은 첫째, 계급론적 권력 개념을 포괄하면서도 계급‘환원론적’ 권력 개념을 지양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둘째, 지금까지 주로 공간적 차원에서만 추구되어 왔던 그것의 재생산 메카니즘을 시공간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포착하려는 이점을 갖는다. 이런 권력 개념화가 갖는 세번째의 유용함은 권력의 세 차원, 즉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표출된 능력의 차원, ‘비결정’(non-decision)을 유도하는 은폐된 권력의 차원, 그리고 아예 갈등 자체를 은폐하는 편견의 조작으로서의 권력의 차원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이러한 세 차원에 관한 논의에 대하여는 Steven Lukes, 《3차원적 권력론》 (서울:나남, 1994) 참조.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계급분절사회(class-divided society)의 권력 문제를 접근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화라는 장점이 있다. 계급분절사회란 계급 이전적 사회인 부족사회와 계급 중심적 사회인 자본주의사회 사이에 위치한 사회형태로, 권력의 저장고이자 재생산 공장인 ‘도시’와 탈권력 상태로 예속된 ‘촌락’으로 구성되며, “계급은 존재하지만 계급이 사회조직의 근본원리를 규정하지는 못하는 사회”를 가리키는 기든스의 용어다(같은 책, 30~31쪽). [본문으로]
  17. C. Tilly,〈근대화는 혁명을 낳는가〉, Jack A. Goldstone 엮음, 《혁명의 사회사》 (서울:문예출판사, 1988) 참조. [본문으로]
  18. 스카치폴(Theda Skocpol)은 전자본주의사회의 혁명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데 있어 ‘국제적인 정치경제 체제의 압력’이라는 요소를 중요시한다. 그녀의 책 《국가와 사회혁명》 (서울:까치, 1981), 32~38쪽 참조. [본문으로]
  19. 위캄은 봉건제적 생산양식과 공납제적 생산양식(tributary mode of production)을 구분하고, 이 둘은 잉여의 수탈방식에 있어 각각 ‘지대’와 ‘조세’로서 특징지워 진다고 보면서, 후자의 경우 ‘조세’라는 성격상 국가와 토지귀족 사이에는 ‘구조적 대립 상황’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Chris Wickham, “The Other Transtion”, Past & Present 103 (1984) 참조. 한편 나까무라 사토루(中村哲)는 마르크스의 소유론을 재검토하면서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관계의 측면’(자기노동에 기초한 소유) 및 ‘소유자와 생산수단의 관계의 측면’(타인노동에 기초한 소유)이라는 두 차원에서 소유의 문제를 파악하면서, 생산관계를 이 두 가지 이질적 소유의 중층적 상호규정 관계로 본다. 이것은 타인 노동에 기초한 두 소유인 ‘국가적 소유’와 ‘지주의 사적소유’가 이해의 일치와 대립의 관계로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中村哲, 〈전 근대 아시아의 사회구성〉, 《아시아 전근대 사회구성의 성격논쟁》 열린글 17 (서울:한울, 1985) 참조. [본문으로]
  20. T. Skocpol, 앞의 책, 38~47쪽 참조. [본문으로]
  21. 농촌사 연구의 대표적 고전의 하나인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 (서울:서원 신, 1994)의 저자 블로크(Marc Bloch)는 중세 농촌을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 취득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18세기의 농촌에서 중세를 보는 ‘소급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오늘날 촌락 연구 방법으로 널리 사용된다. [본문으로]
  22. 전자본주의 촌락사회에 관한 연구 경향은 크게 도덕경제학 접근법(moral economy approach)과 정치경제학 접근법(political economy approach)으로 나뉜다. 전자를 보여주는 저술로는 E.J. Hobsbaum, 《혁명의 시대》 (서울:한길, 1984); E.R. Wolf, 《농민》 (서울:청년사, 1983); B. Moore,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서울:까치, 1985); J.C. Scott, 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 (New Heaven:Yale University Press, 1976) 등; 정치경제학 접근법을 보여주는 저술로는 S. Popkin,〈촌락사회의 정치경제학〉, Jon Elster 엮음, 《합리적 선택》 (서울:신유, 1993); J. Paige, Agarian Revolution: Social Movements and Export Agriculture in the Underdeveloped World (New York:Free Press, 1975) 등. [본문으로]
  23. 보험제도란 품앗이나 관혼상제 등과 같이 평소에 일정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자신에게 보험의 수혜가 필요한 경우에 댓가가 지불되는 것을 말하며, 복지제도란 촌락의 내부인이 주변인으로 이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촌락 차원의 구휼제도를 말한다. [본문으로]
  24. 예외적이라 함은 가령 과부, 고아, ‘이방인’ 등에게 주어지는 복지 혜택 등을 말한다. 한편 이런 관점에서 성서에서 피보호의 대상으로 나오는 ‘이방인’(gēr, tôsāb)은 토지소유권을 박탈당하여 떠돌이가 되야 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필시 촌락사회의 ‘주변인’은 이런 부류를 포함하였을 것이다. 나는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ὀχλος)가 바로 이런 사회적 계층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인 바 있다(〈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예수 민중 민족》). 오펜하이머(A. Oppenheimer)에 따르면 ’am ha-aretz는 촌락사회에 통합된 일반 대중(common people)이다. 그의 책 The ’Am Ha-aretz: A Study in the Social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Hellenistic-Roman Period (Leiden: E.J. Brill, 1977), 200~17쪽 참조. [본문으로]
  25. 스코트에 따르면 촌락사회는 강력한 평등주의로 고취되어 있으며, 이것은 기존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견고한 버팀목일 수도 있지만, 종종 변혁지향적 사상의 모체가 될 수도 있으므로 새로운 천년왕국운동적 지도자를 따라 혁명적 자원으로 전화되는 토양이 되기도 한다. J.C. Scott, 〈혁명 속의 혁명〉, 《혁명의 사회이론》, 332~38쪽; E.J. Hobsbaum, 《원초적 반란》 (서울:온누리, 1984); S.N. Eisenstadt, Revolution and the Transformation of Societies: A Comparative Study of Civilizations (New York:Free Press, 1978) 참조. [본문으로]
  26. 그러나 계급분절사회에서 국가간의 세계체제적 통합의 정도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된다. 통합의 정도는 ‘감시’와 ‘정당화’로 측정될 수 있는데, 특히 후자가 충분할수록 체제적 통합은 더욱 사회적 통합에 근접한다. 앗시리아나 바빌론이 주로 군사적 통합에 의존하였고, 페르시아가 정치 행정적 통합능력을 개발한 세계국가라 할 수 있다면 헬레니즘 제국들은 정치 행정적 통합능력을 극도로 강화했을 뿐더러 헬레니즘이라는 문화적 통합능력까지 갖춘 발전된 세계제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화적 통합은 도시거주 귀족들에 한정될 뿐, 일반 대중의 삶 속에서 일상화되지는 못하였다는 점에서 ‘체제적 통합’은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충분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본문으로]
  27. 나는 사회적 통합과 체제적 통합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기든스의 견해를 따른다.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은 사회체제의 재생산에 관련된 행위자간의 통합을 의미하고, 체제적 통합(system integration)은 사회체제의 재생산에 관련된 체제 혹은 체제간의 통합을 뜻한다. A. Giddens, 《사회이론의 주요 쟁점》 (서울:문예출판사, 1991), 107~112쪽 참조. 그러므로 사회적 통합은 행위자가 사회의 정당성 창출 메카니즘을 일상성 속에서 내면화할 때 발생한다. [본문으로]
  28. 이런 의미에서 도시는 “권력의 도가니”다. Giddens, 앞의 책, 186쪽. [본문으로]
  29. G. Sjoberg, The Preindustrial City (New York:Free Press, 1960), 83쪽. [본문으로]
  30. ‘부농’은 대지주와는 다르다. 이들은 잉여를 일정 정도 축적할 만큼의 토지 외에 철제 농기구나 우축(牛畜) 등을 소유하고 있고, 때로 가족노동 외에 약간 명의 가내노예를 소유하거나 일시적 임시노동을 고용하여 생산을 하며, 자신은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부터 일정하게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소자산가적 농민을 의미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소유자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타인노동에 기초한 소유자인 대지주와는 다르다. 팔레스틴의 경우, 대자산가(대지주)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본문으로]
  31. 이들은 주로 상인이나 장인계층에서 나왔다. [본문으로]
  32. 알라비(H. Alavi), 울프, 스코트, 커밍스(B. Cumings), 스카치폴 등은 농민혁명의 주요세력으로 ‘중농’을, 그리고 페이지, 팝킨 등은 빈농을 강조한다. H. Alavi, “Rural Bases of Political Power in South Asia”,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4 (1974); E.R. Wolff, 앞의 책; J.C. Scott, 앞의 책; B. Cumings, 《한국전쟁의 기원》 (서울:청사, 1986); T. Skocpol, 앞의 책; J. Paige, 앞의 책; S. Popkin, 앞의 논문 등 참조. 한편 윌톤(J. Wilton)은 근대의 식민지 상황에서의 이른바 ‘민족반란’은 농민봉기와 도시민 봉기의 연합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김명수, 〈윌톤의 민족반란 비교연구〈〉, 《비교사회학: 방법과 실재 2》 (서울:열음사, 1992) 참조. 반면 베링톤 무어는 ‘부농’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한다. B. Moore, 앞의 책 참조. [본문으로]
  33. 오버샬은 사회가 공동사회(Gemeinshaft)적인 곳에서는 기존의 조직(비공식적 조직)이 사회적 동원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A. Overshall, Social Conflect and Social Movements (Englewood Cliffs:Prentice Hall, 1973), 117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34. 왜냐하면 빈농은 중농에 비해 토지에 대한 유착 정도가 낮으므로 촌락사회로부터의 이탈동기가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5. ‘전략집단’이라 함은 운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운동원에게 지침이 될 지향수단을 개발하며, 여러 하위집단과의 연대를 통하여 전략적 행동 잠재력을 증대시키는 운동의 지도세력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36. 폐쇠(M. Pêcheux)는 이러한 담론적 실천을, 단순한 ‘거리두기의 실천’을 뜻하는 ‘반동일시’(counter-identification)에 대하여 새로운 변혁적인 주체형성을 위한 담론적 실천을 뜻하는 ‘역동일시’(disidentification)라고 부른다. 강내희, 〈언어와 변혁―변혁의 언어모델 비판과 주체의 ‘역동일시’〉, 《문화과학》 2 (1992 겨울), 32~42쪽 참조. [본문으로]
  37. 박길성은 농민의 일상적 동원을 ‘탈정치화’로 설명하기보다는 ‘일상적 저항’의 성격으로 이해함이 옳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농민의 소극적 저항은 권력이 보유한 억압의 크기를 결코 능가할 수 없었던 적극적 저항의 크기에 대한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합리적 선택으로 나타난 것으로, 일상성을 띄게 되었다고 보며, 그러므로 이것은 체념적 순응이라기보다는 적응적 저항(adaptative resistance)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일상적 저항을 포착하기 위한 패러다임으로 ‘생계유지전략이론’(household survival strategy theory)을 제시한다. 박길성, 〈농업문제 분석을 위한 이론틀〉, 《한국사회학》 22 (1988); 같은 저자, 〈일상적 저항의 정치―농민의 생존전략, 계급형성, 그리고 사회변동〉, 《경제와 사회》 23 (1994 가을) 참조. 한편 촌락의 전통적 지도자들이 농민봉기를 주도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때의 농민 봉기는 주로 지역적으로 한정된 봉기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 [본문으로]
  38. 콘은 중세유럽에서 일어난 여러 천년왕국운동들의 다양성을 그 지도자의 성격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N. Cohn, 《천년왕국운동사》 (천안:한국신학연구소, 1993) 참조. [본문으로]
  39. 브레너(R Brenner)는 전자본주의사회의 생산력 발전의 지표로 ‘정복과 개간’을 통한 경지의 ‘확장’을 든다. 그의 논문 “The Social Basis of economic development”, J. Roemer (ed.), Analytical Marxism (Cambrigde:University of Cambridge, 1986), 26~35쪽 참조. 그런데 브레너의 ‘계급’을 주 17)에서 규정한 ‘권력’ 개념으로 확장한다면, 사회발전의 지표는 ‘할당적 자원’뿐 아니라 ‘권위적 자원’의 저장 능력에 비례하며, 이것은 경제의 확장뿐 아니라 수탈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정치적 기술의 발전과도 관련된다. 그러므로 ‘정복과 체제의 정비’가 계급분절사회의 발전을 나타내는 보다 적합한 지표라 할 수 있다. 기든스는 위의 두 개념과 병행하는 ‘군사적 제재’, ‘지배의 정당화’ 외에 ‘상호의존적 경제적 결속의 형성’을 제국사회의 특성으로 든다. Giddens, 앞의 책, 134~36쪽. 하지만 페르시아는 체제적 통합에 기능적인 경제적 요인을 갖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0. 그러나 페르시아의 이런 시도는, 장자승계의 전통을 구축하지 못했고 매 승계 때마다 심한 통치권누수(lame duck) 현상을 경험했던 것으로 보건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고레스에서부터 다리우스 3세까지 9명의 통치자 중 장자승계를 무난히 이루어 내거나 순사(殉死)한 황제가 단 세 경우뿐이었다. 군주정치체제에서 장자승계 방법이 체제 안정성의 가장 주요한 지표임을 주장한 벤딕스(R. Bendix)의 〈군주의 승계방법과 통치기간〉, 《한국전통사회의 구조와 변동》 (서울:문학과 지성사, 1986)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41. M. Avi-Yonah, “Historical Geography of Palestine”, Jewish People in the First Century (CRINT I) (Philadelphia:Fortress, 1974), 78~90쪽. 관구보다 하위의 행정구역 단위인 province를 여기서는 작은따음표를 붙여서 ‘지방’이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42. 맥에베뉴는 알트(A. Alt)를 따라 유다가 사마리아의 속주였다고 본 반면, 비덴그렌은 이에 반대한다. Sean E. McEvenue, “The Political Structure in Judah from Cyrus to Nehemiah”, CBQ 43 (1981); G. Widengren, “The Persian Period”, J. H. Hayes & J. M. Miller (eds.), Israelite and Judaean History (Philadelphia:The Westminster Press, 1977), 510쪽. 하지만 어느 입장이든 유다‘지방’이 페르시아 시대 이전에는 독립적인 정치단위가 아니었다는 데에는 견해가 일치한다. [본문으로]
  43. 더욱이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유다‘지방’은 에집트에 대한 병참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페르시아의 군사전략에서 병참 기지의 중요성 및 이것의 고대전쟁사적 의의에 관하여는 Ather Ferrill, 《전쟁의 기원》 (서울:인간사랑, 1990), 183‧195‧229~234쪽 참조. [본문으로]
  44. 마이클 만(Michael Mann)은 이 개념을 아시아 사회에 대한 유럽봉건사회의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의 책 The Sources of Social Power. Vol. 1: A History of Power from the Beginning to 1760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하지만 나는 이 용어를 식민지 상황의 계급분절사회에서 잉여의 ‘이중누출구조’와 결합되어 있는 탈중앙집중적인 분권적 정치분파들의 난립이라는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45. 하깨 1,9~11; 2,16~17; 느헤 5,3 등은 농업생산력의 심각한 위기를 시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잉여의 심각한 누출구조로 인해 휴경년을 제대로 지킬 수 없으므로 말미암은 토질의 황폐화 현상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즈가 8,17; 느헤 13,10~14 등에서는 생산성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늘어만 가는 대지주들의 잉여생산물 요구량을 감당 못해 토지 소유권 등을 준강제적으로 이양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즈가 5,1~4에 나오는 다섯번째 환상도 토지 겸병(兼倂)의 사회현실에 바탕을 둔 것일 수 있다. [본문으로]
  46. 올브라이트는, 주전 8세기 유다의 인구가 25만 정도이던 것이 522년 세스바쌀 귀환시기에는 2만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W.F. Albright, The Biblical Period from Abraham to Ezra: An Historical Survey (New York:Harper & Row, 1963), 87쪽과 각주 180) 참조. 만일 전 인구의 92%가 감소하였다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유다의 ‘촌락사회’는 거의 해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의 논거는 느헤미야 7장과 에즈라 2장에 대한 단순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느헤미야서의 명부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그는 아마도 노예만을 상정하는 듯한데―의 비율을 정산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조사 목적에 따라 누락자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조사의 정확성에 따라 인구 산정치가 크게 영향받을 수 있으므로 그 허용오차는 대단히 클 것이며, 필시 인구 산정치의 최대값과 최소값의 차이는 인구 추산 자체의 유용성을 의심스럽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구가 얼마였다는 식의 논의는 무의미하다. 다만 인구 변화의 추세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 역사적인 가치를 지닐 것이다. 한편 인구 추세와 사회변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젱에 대하여는 T.H. Aston & C.H.E. Philpin,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 브레너 논쟁》(서울:집문당, 1991)에 실린 브레너, 라뒤리(E.. Le R. Ladurie), 포스탄(M. Postan), 기 브와(Guy Bois) 등의 글 참조. [본문으로]
  47. N.K. Gottwald, 《히브리성서 2》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7), 97쪽. [본문으로]
  48. 철제 농기구는 불레셋 군사동맹 시대에 이미 존재했었고(삼상 13,20), 왕국시대에는 비교적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사 2,4; 7,25; 요엘 3,10; 미가 4,3). [본문으로]
  49. 신명 22,10; 25,4; 욥기 1,14; 예레 5,1~3; 호세 10,11 등은 성서시대에 우경농법이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본문으로]
  50. 갓월드(N.K. Gottwald)가 느헤미야의 부채탕감 조치를 농민의 하향분해에 대한 억제 정책의 일환이라고 본 것은 올바르다. 그의 책 《히브리성서 2》, 101~103쪽 참조.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 시대의 예루살렘 경제를 고대 그리스의 참주정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유비시키는 과잉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느헤미야보다 거의 한 세기 뒤에야 유다 화폐들이 발견된다. 더욱이 이 화폐 주조가 그리스의 양식을 모방하여 페르시아의 경제정책을 지원하려는 제국 서부의 소국가공동체들의 일단의 경향과 맞물려 있었다고 해도(J.W. Betlyon, “The Provincial Goverment of Persian Period Judea and the YEHUD Coins”, JBL <1988>), 촌락사회의 사회적 구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보다는 페르시아 시대 농민의 궁핍화는 다중권력행위자간의 경쟁에서 비롯된 ‘정치의 위기’와 관련된다. [본문으로]
  51. 성전은 유다인들의 집단 귀속의식의 중심으로, 세계 곳곳의 유다계 공동체들로부터의 헌납물을 유치하는 재정적 저장고이며, 유다 농민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자원의 저장고였다. [본문으로]
  52. 묵시문학은 촌락사회의 정상적인 질서 속에 포섭될 수 없는 반체제적 혹은 일탈적 민중종교 경향인 묵시적 담화가 기층대중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묵시현상). 윌슨은 기층대중 사이의 광범위한 묵시현상을 바탕으로 하는 묵시연구의 새로운 문제설정을 제시했다. R.R. Wilson, “From Prophecy to Apocalyptic: Reflections on the Shape of Israelite Religion”, Semeia 21 (1981) 참조. 그러므로 묵시문학은 계급분절사회의 극소수만을 구성하는 문자계층의 생산물인 동시에 ‘기층대중 담화의 문자화’라는 양차원적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지식인과 기층대중 사이의 담화적 소통구조의 형성을 의미한다. 요컨대 묵시문학은 문자계층이 기층대중을 자신들의 이해관계 관철을 위해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수단인 동시에, 기층대중의 해방을 내포하는 民衆公示(Minjung-publicity)를 권력 투쟁의 핵심담화로 자리잡게 하는 문학적 매개물이다. 한편 묵시문학’을 ‘지배 대 피지배’의 이원적 대립에 병행하는 公示로 보려는 대표적인 묵시문학 연구서로는 P.D. Hanson, The Dawn of Apocalyptic. The Historical Sociological Roots of Jewish Apocalyptic Eschatology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9) 참조. 또한 ‘존재’와 ‘신념’ 사이의 구조결정론적 입장을 개진한 핸슨과 마찬가지로, 윌슨도 묵시종교를 단순히 사회 주변부의 종교로 보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론의 관점에서 윌슨의 가설을 비판한 갓월드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N.K. Gottwald, “Problems and Promises in the Comparative Analysis of Religious Pheomena”, Semeia 21 (1981) 참조. 또한 묵시문학의 이원론적 접근의 비역사성을 문제제기하면서 양차원적 언술 전략을 강조한 나의 논문 〈구약묵시문학의 종말론. 계급론적 연구 시론〉, 《신학사상》 74 (1991 가을) 참조. [본문으로]
  53. 이 연합이 즈루빠벨과 여호수아가 다리우스 1세로부터 받은 최초의 ‘사명’에서 이탈하여 주변 족속들과 연합하여 반페르시아 전선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있다. Blenkinsopp, 《이스라엘 예언사》 (서울:은성, 1992), 346~59쪽. ‘즈루빠벨 반란설’에 대한 반대의견으로는 Widengren, 앞의 논문, 521~22쪽. [본문으로]
  54. 이것은 아마도 구왕족의 혈통이 갖는 상징성을 배제한 상태에서 종교적인 표상을 능가할 만한 다른 상징을 만들기가 대단히 어려웠던 이 시기의 역사과정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만약 느헤미야가 다윗같은 영웅적 표상으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만 있었다면 또 다시 왕국으로의 재건공동체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후손이나 여타 추종자가 그의 정권을 승계했다는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실제 능력이나 역할과는 별도로, 그가 영웅적 표상으로서 대중에게 각인되지는 못했음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55. 에즈라-느헤미야 중심의 권력 집단은 페르시아 정부로부터의 지원 외에도 성전으로 들어오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헌납금/물을 통해서도 경쟁 비용의 상당부분을 충당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56. 갓월드는 페르시아 시대 유다의 정치 상황을 ‘아론계 사제집단’(Aaronid priests)과 ‘레위계 사제집단’(Levitical attendants)이라는 이원적 집단간의 갈등/제휴의 과정으로 본다. 이는 ‘사독계 고위사제 계열’(hierocratic party of the Zadokites)과 ‘묵시적 환상가 계열’(apocalyptic visionaries)이라는 이원적 정치 세력의 갈등으로 보는 핸슨의 견해와 병행하지만, 계급적 관점을 중심으로 양 집단의 상호침투적 영향망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갓월드는 갈등 과정을 한층 신중하게 판단한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의 민중연합 유형으로 앞에서 살펴 본 두 유형 외에 제3의 유형을 제시코자 한다. 이것은 블랜킨소프의 주장에 영향받은 것이다. Blenkinsopp, 앞의 책, 363~377쪽 참조. [본문으로]
  57. Blenkinsopp, 앞의 책, 367쪽. [본문으로]
  58. 같은 책, 371~72쪽. [본문으로]
  59. 여기서 ‘외국인’(ben-hannēkār)은 개종자를 의미한다기보다는(Westermann, 앞의 책, 357~58쪽) ‘고자’와 병행될 수 있는 의미의 사회적 하층인 외국인을 말한다. [본문으로]
  60. 갓월드는 헬레니즘이, 문화적 차원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 초점을 둔 개념임을 주장한다. Gottwald, 앞의 책, 108쪽, 특히 주 11) 참조. [본문으로]
  61. Rostovzeff, 〈헬레니즘 세계와 경제발전〉, 《고전고대 희랍사연구의 제문제》 (서울:고려대학교 출판부, 1984), 361~62쪽 참조. 주전 1세기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확고한 패자로 등장함으로써 쇠락해 가던 헬레니즘 시대는 종식되고 만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화되고 있던 이 시기의 로마가 지배하던 세계는 정치적 경제적 통합이 지중해 지역으로 제한되며 또 경제적 활력에 있어서도 헬레니즘 시대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한편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의 팽창주의에 대하여는 Rostovzeff, 《서양고대세계사》 (서울:고려대학교 출판부, 1990), 제25장 참조. [본문으로]
  62. 그밖에 개간을 통한 경작 가능지의 확대 사업도 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했다. Martin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Studies in their Encounter in Palestine during the Early Hellenistic Period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4), 36쪽. 한편 프톨레미 2세가 자신의 새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박물관은 과학기술 연구기관의 역할도 했다. 필시 이곳에서는 천문, 지리, 역법 등이 연구되었으며, 농법이나 농기구, 종자 등에 대한 연구도 있었을 것이다. Rostovtzeff, 앞의 논문, 359쪽. 반면 핀리는 이 박물관이 실용적인 측면의 연구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M.I. Finley, 〈고대세계의 기술혁신과 경제발전〉, 《고전고대 희랍사 연구의 제문제》, 318~19쪽. [본문으로]
  63. 로스토프체프는 헬레니즘 시대 제국의 안정을 “예속민들의 경제적 번영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하며, 이 번영의 계기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노동력의 조직적인 착취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본다. Rostovtzeff, 《서양고대세계사》, 185~86쪽. [본문으로]
  64. Ehrenberg, 《그리스 국가》 (서울:민음사, 1991), 337~345쪽 참조. 이것은 프톨레미 제국이 건설한 폴리스가 예외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다. Rostovtzeff, 《서양고대세계사》, 187쪽; Ehrenberg, 앞의 책, 292쪽. [본문으로]
  65. Rostovzeff, 〈헬레니즘 세계와 경제발전〉, 359~60; Ehrenberg, 앞의 책, 325~26 참조. [본문으로]
  66. 또한 에집트의 옛 전통에 비해 황제 직속 영지는 훨씬 광대해진 반면, 신전토지는 크게 축소되었고(Ehrenberg, 앞의 책, 335~39쪽 참조), 관료들에게 증여된 녹봉지는 ‘황제의 소유’라는 상위의 추상적 소유권을 관철시키는 한도 내에서 양도되는 비세습지로서, 국가적 소유와 결합된 중층적 소유관계의 하급소유로서 존재하였다. 한편 베버에게서 봉건제와 녹봉제(prebendalism)는 각각 전근대 사회의 지방분권적 지배와 중앙집권적 지배를 유형화하는 개념인데, 전자에서는 세습적 분배지로 법률적 권리의 이양까지를 함의하는 ‘봉토’가, 후자에서는 비세습적 분배지로 탈인격화된 국가적 토지소유권을 함의하는 ‘녹봉’이 중심 개념이다. 그는 이 두 이념형이 실제에서는 경제력과 군사력에 기초한 지배세력간의 세력균형에 따라 공존하면서 주도적 규정력이 상호교차적으로 순환한다고 본다. M. Weber, 《지배의 사회학》 (서울:한울, 1989); 같은 저자, 《유교와 도교》 (서울:문예출판사, 1989) 참조. 브라이언 터너(Bryan Turner)는 이러한 ‘봉토/녹봉지의 순환론’을 고대 이란 사회에 적용한다. 그의 논문 〈이란의 발전과 베버: 봉건제와 녹봉제〉, 유석춘 엮음, 《막스 베버와 동양사회》 (서울:나남, 1992) 참조. [본문으로]
  67. Hengel, 앞의 책, 20~22쪽 참조. [본문으로]
  68. Ehrenberg, 같은 책, 341쪽. 하지만 페니키아 등은 점차로 알렉산드리아 만큼이나 국제무역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한다. [본문으로]
  69. Hengel, 앞의 책, 20~22쪽 참조. 이것은, 16세기부터 형성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3분적 구성과 그 경제적 역동성에 있어 전혀 비견될 수는 없지만, 고대의 다른 제국들과 비교할 때, ‘핵심(core)-반주변(semi-peripheral)-주변(peripheral)’ 지역으로의 지리적 분화에 따른 경제적 통합은 프톨레미 제국의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70. 대사제 가문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오니아스 가문(Oniads)이 반토비아 세력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에 야손(Jason)으로부터 대사제직을 찬탈한 메넬라우스(Menelaos)는 예루살렘의 친토비아 파의 일원이었다. [본문으로]
  71. 영토가 최대였을 때 프톨레미와 셀류커스 제국의 크기는 6만 평방 마일 대 150만 평방 마일이었고, 아파메아(Apamea) 조약으로 소아시아를 상실한 뒤의 셀류커스의 영토도 12만 5천 마일이었다. Ehrenberg, 앞의 책, 206~214쪽 참조. [본문으로]
  72. 한편 로마의 보병군단(legion)은 그리스식의 밀집보병대를 압도하는, 전술상의 신기원에 속하는 것이었다. A. Ferrill, 앞의 책, 128쪽 참조. 하지만 전술상의 차이 외에도 셀류커스의 패배의 또 다른 주된 이유로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이 안티오쿠스 3세의 셀류커스 제국을 견제하려 했다는 것과, 동맹국들이 자신의 세력에 비해 열세에 있는 한 거의 어떠한 내정간섭도 가하지 않았던 당시 로마의 정책 탓에 지중해 지역 약소국가들이 로마를 동맹 상대로 선호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Rostovtzeff, 《서양고대세계사》, 283~86쪽 참조. [본문으로]
  73. Hengel, 앞의 책, 제4장 참조. [본문으로]
  74. 로스토프체프는 헬레니즘 제국 시대의 대중의 상하향분화를 헬라적 이주민들 대 원주민 사이의 기회의 차이로서 설명한다. Rostovzeff, 《서양고대세계사》, 193~96쪽 참조.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라도, ‘헬라인들’이라는 개념 자체가 단순 지리적인 차원의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것에서 점차로 개념 확대가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소자산가적 계층의 대두를 단순히 헬레니즘의 그리스적 요소에만 초점을 두어 설명하기보다는 적어도 둘 이상의 이질적 요소가 얽혀 있는 연결망 속에서 대중사회의 상하향분화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유념할 때, 단순지리적 혹은 종족적 차원에서 권력의 불균등 분배가 구조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과잉해석이다. 불균등한 분배에 기반한 권력 사회의 변동 추이를 보여 주는 보다 적절한 패러다임은 계급/계층론적 관점이다. [본문으로]
  75.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라는 사회심리적 요인이 촌락사회 대중의 사회적 동원 가능성을 극적으로 높인이는 주요 계기로 보는 관점에 대하여는 J.C. Davies, 〈J 곡선 혁명 이론〉, 신용하 엮음, 《혁명론》 (서울:문학과 지성사, 1984), 61~91쪽; Daniel A. Foss & Ralph Larkin, 《혁명을 넘어서: 사회운동의 변증법》 (서울:나남, 1991), 39~45쪽; Ted R. Gurr, “The Revolution: Social Change Nexus”, Comparative Politics 5 (April 1973), 359~92쪽 참조. [본문으로]
  76. 호슬리는 렌스키(G. Lenski)의 다차원적 계급형성론적 관점에 기초하여 관료체제의 중간 수준에 위치한 가신‘계급’의 등장을 통해 이것을 설명한다. R.A.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ance in Roman Palestine (Minneapolis:Fortress Press, 1993), 17쪽. 하지만 그는 이런 집단의 계기적 등장이 왜 공동체 재건기에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가신‘계급’의 등장을 이야기하려면 솔로몬이나 여호사밧같이 지방구역화를 높은 수준으로 이룩한 통치자 시대나 프톨레미같이 지방구역화를 제국 차원으로 확대했던 시대를 상정하는 것이 그의 주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는 다중권력행위자간의 무분별한 투쟁으로 인해 농민의 하향분화가 구조화됨으로써 소자산가계층이 성장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고, 프톨레미 제국 시대에 와서야 경제적 성장에 기초한 소자산가계층의 계기적 등장이 구조화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들의 등장을 추동하는 주된 요인이 정치적 차원이라기보다는 경제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가신’적 집단으로 개념화하기보다는 소자산가적 집단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개념화라고 본다. [본문으로]
  77. 하지만 권력 해체를 위한 투쟁 전통을 저장하는 주요 매체는 구비 문학이었다. [본문으로]
  78. 열하 22장; 예레 36,10; 36,32; 에즈 7,6; 느헤 12,12~13. 한편 예외적으로 역대기의 본문에서 레위인 출신 서기관의 존재가 나타난다(역상 24,6; 34,13). [본문으로]
  79. Anthony J. Saldarini, “Scribe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 5, 1013~1014쪽 참조. [본문으로]
  80. 이 점에서 주전 70년 이전의 바리사이즘이 주로 농경적 성격을 띤 정-부정의 체계의 차원에서의 음식에 대한 제의적 규정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노이스너의 주장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J. Neusner, The Rabbinic Traditions about the Pharisees before 70, 3 vols. (Leiden:E.J.Brill, 1971), 303쪽 이하 참조. 또한 그는 다른 책에서 다양한 스팩트럼으로 분화되는 고대유다교의 사회적 종교적 요소들은 각기 상이한 사회집단들의 세계관과 상응하고 있음을 논술하고 있다. 같은 저자, Messiah in Context: Israel's History and Destiny in Formative Judaism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84) 참조. [본문으로]
  81. 예레미아스는 라삐 문헌들을 통해 유다 신분사회의 차별적 규범의 이상이 어떠했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J. Jeremias,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8) 참조. 이러한 이상이, 그 사회의 현실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당시 사회적 전형을 반영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본문으로]
  82. 그러나 이러한 동질성 인식은 귀족에 대한 전선에서의 그들간의 ‘약한’ 동질성 인식이지 그들의 내적 동질성에 대한 ‘강한’ 인식은 아니다. 강한 동질적 집단의 등장은 주후 70년 이후 라삐적 유다교가 성립되고 그보다 한참 후에 이런 체제가 충분한 사회구속적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본문으로]
  83. Horsley, 앞의 책, 17쪽. [본문으로]
  84. 그리하여 이제 하스몬 왕실의 주역들은 대중의 정치적 동원에 의존하기보다는 용병에 의존하여 전쟁을 치루었고(Bo Reike, 《신약성서 시대사》, 77~78쪽),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지향을 이제 헬레니즘과의 대결이 아니라 절충을 통해 왕실을 성격화하였다. [본문으로]
  85. 에쎄네가 하스몬에서 유래한 집단인지 바빌론에서 귀환한 율법주의자들인지를 둘러싼 논쟁에 대하여는 J. Murphy-O'Connor, “The Essenes and their History”, RB 81 (1974); John Kampen, “Hasidim”,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 3 참조. [본문으로]
  86. 요나단 외에 시몬이나 알렉산더 얀내우스 등이 그 후보로 꼽히는데, 이에 대한 논쟁의 요약으로는 F.F. Bruce, 《사해문서》 (서울:총신대학 출판부, 1993), 149~63쪽; B.E. Thiering, “Once More the Wicked Priest”, JBL 97 (1978), 191~205쪽 참조. [본문으로]
  87. Bruce, 같은 책, 165~66쪽 참조. [본문으로]
  88. Everett Furguson, 《초대교회 배경사》 (서울:은성, 1994), 506쪽. [본문으로]
  89.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이단들에 대한 반박》(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에 의하면 에쎄네는 네 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Bruce, 앞의 책, 198~99쪽 참조. [본문으로]
  90. Bruce, 같은 책, 193‧195쪽. [본문으로]
  91. Horsley, 앞의 책, 15. [본문으로]
  92. Bruce, 앞의 책, 199쪽 참조. [본문으로]
  93. 바리사이가 하나의 잘 조직된 ‘종파다운 종파’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주후 70년 이후, 대 로마 항쟁에서 실패한 후의 라삐적 바리사이즘에서이다. 한편 예레미아스는 바리사이가 도시와 농촌의 소자산가들로 구성되었음을 논증한다. Jeramias, 앞의 책, 330‧339쪽 참조. [본문으로]
  94. Gray G. Porton, “Sadducees”, Anchor Bible Dictionary 5, 894쪽 참조. [본문으로]
  95. 미트라다테스 6세의 이란족의 발흥과 궤를 같이 하여 식민지 민족들 사이에서 민족해방에의 열기가 분출했고, 서방 지역의 최강자인 로마도 카르타고를 무찌른 뒤의 급속한 사회적 재편기를 맞이하여 여러 사회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동원되어 갈등을 벌이고 있었는데, 특히 신흥자산가들과 더불어 평민 중심의 민중 세력의 도약이 두드러졌다. Bo Reike, 앞의 책, 83~87쪽 참조. 이 시기 로마에서의 계급투쟁과 그 결과에 대하여는 Rostovtzeff, 《서양고대세계사》, 313~372쪽; J. Briscoe,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지지자와 반대자〉, 《고전고대 로마사 연구의 제문제》 (서울:고려대학교 출판부, 1983), 32~57쪽 참조. [본문으로]
  96. 호슬리는 이 시대의 대중운동을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테러리스트 유형에 속하는 대중운동(시카리 운동)을 제외한 모든 유형은 기층대중 자신에 의한 지도력을 나타낸다. R.A. Horsley & J.S. Hanson,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Minneapolis etc.:Winston Press, 1985) 참조. [본문으로]
  97. 호슬리는 ‘대전승’(great tradition)과 ‘소전승’(little tradition)을 구분하고 자신의 연구가 대전승 속에 반영된, 기층대중의 전승인 소전승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힌다. Horsley & Hanson, 같은 책, 3쪽. 한편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예수전승의 ‘유언비어’적 형태에 관한 탁월한 상상을 제시한다. 이 제안의 역사적 타당성에 대하여는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164~68쪽 참조. [본문으로]
  98. 프리스코트는 근대국가의 경계(boundary)에 대응하는 고대사회의 개념으로 ‘변경지역’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경계’가 국가간의 명백한 공간분할이라면, 근대 이전 국가들간의 ‘변경지역’은 행정의 통제가 불분명하고 기복이 심했던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른바 ‘행정의 공백지대’라고 할 수 있다. J.R.V. Prescott, Boundaries and Frontiers (London:Croom Helm, 197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