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출처는 기억나지 않고,다만 1999년 경에 쓴 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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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시대의 위기와 비판담론으로서의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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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요청을 받은 사람은 가장 먼저 주제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 속에는 어떤 문제의식이 숨어 있을까? 종종 요청자들에게 의도를 묻기는 하지만, 그 대화에서 속 시원하게 질문 취지를 읽어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주제 속에 담긴 암호의 감을 잡는다. 물론 타고난 눈썰미가 둔한 자는 이런 고민조차도 부질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튼 오늘도, 비록 잘못 짚은 것일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요청자들의 문제의식을 읽는 데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변화하는 시대와 민중신학’. 여기에는 우리 시대의 변동 양상에 대한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위기의식이란 사회적 위기에 대한 인식주체들의 이해(주관성)의 지평을 말한다. 그러므로 위기의식은 인식주체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한한 다양성으로 표출되지만은 않는 것은, 사회적 위기의 객관적 지평인 ‘위기구조’가 인식주체의 사유 가능성의 폭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 시대마다 특성화되는 위기를 이해하는 문법이 사고의 폭을 제약할 수 있기 때문에, 위기의식은 무한히 광할한 허공을 유영하듯 우연에 의해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비판담론’은, 이러한 위기구조에 대한 성찰(reflexivity)을 통해서 순진한(naive) 위기의식을 비판적 지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것은 지배담론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위로부터의 지식이 아니라, 위기구조 아래서 지배담론에 의해 은폐된 배제당한 이의 목소리를 부활시키는 ‘아래로부터의 지식’이요, 바로 그런 점에서 지배담론의 균열을 폭로하는 ‘저항의 언술’이다.
그렇다면 이 주제는, 우리 시대의 위기적 현실에 대해 민중신학은 어떤 비판담론을 구성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민중신학이 현재의 위기의식에 대한 적절한 대답, 즉 성찰적 비판담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항의성 질문이 암시되어 있다.
사실 민중신학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리 생소하지 않다. 특히 몇 년 전, 이른바 변혁적 진보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의 복수극이 한창일 때, 일단의 위기론자들의 비판은 폭넓은 공조세력을 얻으며 민중신학 안팎으로 빠르게 확산된 바 있었다. 1 물론 이들의 주장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그들의 관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기에는, 그들 사이에는 ‘신학하기’에 관한 공통된 입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민중신학은, (서구사회에서 발전된) 신학적 담론과의 대화를 통해서 현재의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 담론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위기에 대한 비판담론의 형성이 가능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적 비판 담론의 전개 과정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신학하기의 길을 걸어왔다. 즉 동시대의 위기의식에 대한 비판담론들과 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신학적 비판담론이 바로 민중신학인 것이다. 요컨대 민중신학의 신학하기는 시대성에 대한 반체제적이고 문명비판적인 사고를 전면화하는 데 그 요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민중신학의 전개를 ‘저항의 계보학’적 관점에서 논의한 바 있다. 2
그러므로 나는 ‘급변하는 시대에 민중신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답변하기 위해 서구의 신학적 담론 내부를 탐구하는 방식을 지양할 것이다. 오히려 저항의 계보학적 시좌에서 민중신학의 전망을 구상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위기의식에 대한 성찰적 지식들인 비판담론들과의 접맥 가능성을 민중신학이 내포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우리 시대의 위기구조에 대한 담론적 실천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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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근대화는 현재까지 세 단계의 국면적 전환기를 거쳐왔다. 첫 번째 전환기였던 이른바 ‘박정희 시대’, 두 번째 전환기인 ‘5․6공’ 시대, 그리고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과 WTO 체제의 도래로 상징되는 현재의 시대가 그것이다. 이렇게 분류하는 근거는, 한국 사회의 위기구조에 대한 권력의 통제 방식과 이에 대응하는 비판담론의 유형이 각 국면적 시대별로 상이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3 한편 민중신학의 전개를 논하는 데 있어 널리 활용되고 있는 세대별 구분법에 명시적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세대론을 체계화한 최형묵은, ‘시대 상황의 차이에 따른 문제인식의 차이’라는 준거에 의거해 1980년대까지 민중신학의 두 세대를 구분한다. 4 여기에 나는 최근의 한 세대를 덧붙여 세 단계의 전개 과정을 노정하면서, 그 단계 각각이 앞에서 언급한 한국 근대화의 세 국면과 상응하고 있다는 점을 논함으로써, ‘저항의 계보학’적 방법론을 정립하였다. 5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한국적’ 맥락을 갖는 ‘한국적 신학’이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세계적 근대화 과정의 한 변별적(차이와 연속성을 함축하는) 발현 형태로서 세계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적 신학의 맥락을 한반도 남쪽에 한정된 ‘폐쇄적 공간 신학’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시대 민중신학의 비판담론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있어, 근대화의 추상적이고 성찰적 범주인 근대성의 논의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비대면적(nonfacible)인 세계는 체험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발전에 의해 추동된 일련의 변화는 삶의 체험 공간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키게 된다. 6 이렇게 근대성은 비대면적 세계가 상호관계의 지배적 국면으로 전환되는 일련의 기술적․사회적 변화와 관련된다. 가령 근대와 근대 이전 사이의 인물로서 근대적 지평을 여는 계기적 사건의 한 주역인 마르틴 루터는 타자화된 신, 즉 비대면적 실체(부재, absence)인 신을 인간 경험 속으로 내재화(현전, presence)함으로써 비대면성을 관계의 상호성의 범주로 전환시킨 계기적 인물이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타자성, 즉 신의 비대면성을 경험 내부로 포섭하여 사고할 수 없었던 계몽주의적 지식인들은 탈신학적 지식 구성을 통해 근대적 정체성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이러한 근대성적 시대 인식의 기술사회학적 배경에는 과거에는 타자적 공간이었던 비유럽적인 확장된 세계로의 탐험을 가능하게 했던 망원경과 나침반의 발명이나, 역시 타자적 공간이던 분자 같은 미시물리학적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해 준 현미경의 발명 등, 과학기술상의 혁신이 있다. 또 금속인쇄술을 통해 타자적 세계였던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공식적 지식 내부로 포섭됨으로써 근대성이 인간 정체성 구성의 지배 원리로 작동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근대성은 일반적으로 이원적 특성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러한 이원적 특성을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으로 규정하였는 바, 7 이 두 길항적 요소의 공존은 효율성(기술주의)과 해방에 에토스 간의 갈등으로 표상되는 근대성의 내적 위기구조를 보여 준다. 심지어 이러한 근대적 담론 공간 내에서는 신조차도 기술적 효율성의 수호신의 차원과 해방 에토스의 상징의 차원으로 분화되어 갈등하게 된다.
여기서 이 두 요소 가운데, 근대화의 주도적 국면을 선점한 것은 대체로 효율성 원리를 실현하는 제도화의 영역이다. 8 이것은 반대로, 근대성에 대한 비판담론이 해방의 에토스를 실현하는 담론 형태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양상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근대성적 효율성을 실현하는 제도화의 영역 ‘내부’에서 해방의 에토스를 통한 대안적 제도화를 실현하려는 유형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성적 제도화 자체가 효율성의 영역이라고 보면서, 그것에 의해 ‘식민화된’(colonialized) ‘외부’의 영역, 즉 삶의 비제도적 영역인 일상성의 영역을 복권시킴으로써 해방성을 인간 삶의 구성원리로 대체하려는 유형이다. 전자가 ‘해방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라고 한다면, 후자는 ‘해방의 탈계몽주의적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근대성 내부에서 발전한 비판담론의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은 권력의 지배 유형과 관련하여 어떤 경우엔 전자가 또 어떤 경우엔 후자가 비판담론 지형학을 주도하여 왔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이제까지의 근대사회의 전개에서 전자가 비판담론의 지배적 위상을 확보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근대성의 제도적 관철 과정이 국민국가의 독존적 존립과 깊이 연루되어 왔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즉 비대면적 공간 확대의 제도화 과정이 국민국가의 경계(boundary)를 중심으로 한계지워졌다는 것이다. 이때 그 한계 지점은 공간적으로 국경(boundary)으로 실현되는데, 국민국가적 담론은 국경을 통해 관계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특권과 비특권을 가르며, 우리와 ‘비우리’를 경계지운다. 이것은 권력의 작동이 ‘경계화’(boundarization)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경계화를 토대로 포섭과 배제의 구원론적 담론을 확산시키려 했던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근대적 주류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연합체적 교회의 경계를 국민국가적 경계선에 따라 재설정함(국가교회)으로써, 9 신앙담론 속에 근대적 경계화를 내포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근대적 주류 교회가 근대성적 배제-포섭의 권력 작동 메커니즘을 실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근대사회는 체제를 재생산하는 공식적 지식이 무수한 경계화를 통한 이른바 ‘분과적 담론’으로 형성됨을 의미한다. 이때 경계의 ‘외부’는 권력의 통합의 공간이 아니라 배제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근대성의 관철 과정에 대한 비판의 담론, 즉 해방담론은 바로 이러한 경계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앞의 두 국면적 시대와 상응하는 민주신학적 문제설정도 전자의 비판담론, 즉 해방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와 보다 깊이 연루되어 있다. 1970년대 민중신학(제1세대 민중신학)은, 한국 사회에서 비판이론의 부재 탓에 비판을 이론화하는 것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고, 10그래서 서사적인(narrative) 지배담론(거대담론)에 대해 역시 서사적인 대응전략을 구상하기보다는 에피소드적(epidsodic) 테러리즘 11으로 교란시키려는 비판 전략이 주효했다. 이것은 거대한 신학적/신앙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하느님에 관한 지배적 이미지를 해체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결국 지배 담론의 하느님 이미지가 수호하고 있는 경계화 12를 교란시켰던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적 시대성을 반영하는 민중신학은 일견 지배담론에 대한 탈계몽주의적인 해체성을 내포한다. 13 하지만 이것은 비판담론의 대안을 찾지 못하던 1970년대 한국의 지식 형성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사실 이 시대 민중신학의 보다 중요한 문제의식은 ‘민주 대 독재’라는 바리케이트에 따라 형성된 계몽주의적 경계화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는 데 초점이 있다. 그것은 근대성적 제도화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한국 근대화 과정이 파시즘과 결탁하며 전개된 것에 대한 항의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한편 1980년대 민중신학(제2세대 민중신학)은 훨씬 두드러지게 계몽적 프로젝트를 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대에 한국사회의 비판담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담론과 조우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루되어, 신학의 유물론적 재해석을 적극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이 시대 민중신학은 매우 서사적이며, 거대담론적인 대안체제를 지향하는 사회적 실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신앙적 실천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사회적 실천에 대해) 그리스도교적 특수성의 해명이 그리스도인 정체성 논의의 핵을 이루게 된다. 요컨대 이 시대 민중신학은 근대적 경계화를 신학의 주제로 전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경계화에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신학은 바리케이트의 어느 한 편에 개입하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당파적이다. 당파성이란 경계화에 함의된 배제-박탈을 전제한다. 지배담론의 당파성이 부르조아적 당파성에 기초한 배제-박탈을 주장하고 있다면, 민중신학의 당파성은 해방적 제도화를 지향하는 민중적 당파성에 기초한 배제-박탈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중신학의 담론은 모두 해방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를 실천전략으로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민중신학에 대한 또 다른 소수자적 신학의 도전, 예컨대 여성신학의 문제제기는 계몽주의적 프로젝트의 필연적인 한계지점이기도 했다. 다만 두 국면적 시대가, 뚜렷한 바리케이트(독재 대 민주; 예속적 파시즘 대 민중민족주의)에 의해 사회가 양분되고 있다는 위기에 대한 의식이 지배적이어서 이러한 문제제기가 비판 진영 내에서 이렇다 할 파급력을 지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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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사회에 대한 위기의식은 급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격렬하게 불어닥친 ‘포스티즘’의 태풍은 비판담론 진영에 ‘자아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 사회 내에 박탈과 배제의 메카니즘이 거대한 바리케이트에 의해 양분된 체제에 의해서만 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무수한 경계화에 의해 배제-박탈의 경계선은 복잡하게 구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소수자들(minorities)의 해방은 우리가 단순하게 구상화하려 했던 대안 체제에 대한 기획만으로는 부족할 뿐 아니라, 심지어 소수자적 담론내에서조차 다수자(majority)적 횡포를 초래하기도 하였다는 성찰이다. 즉 권력 현상은 사회의 물적 정신적 자원을 독차지하려는 한 세력과 빼앗기고 있는 다른 세력 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안팎에서 촘촘한 그물망처럼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의식의 배경에는 위기구조의 변동 양상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라고 부르고자 하는데, 최근 IMF 운운하는 담론의 파괴력에서 보듯 이 문제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우리에게 맞닥뜨려 있다.
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근대성의 이후’(post-modernity)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근대성의 급진화(redicalized modernity)된 양상에서 보는 기든스의 시각에 동조한다. 14 이것은 근대성적 제도화의 추동 요소였던 기술적 효율성이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하여 부재(absence)의 영역인 비대면적 공간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요컨대 사회적․제도적 관계의 영역이 거시적(교통⋅통신의 혁명을 통해)으로 뿐 아니라 미시적(무의식까지도 지배하는 매체 혁명을 통해)으로까지 확대됨으로써 나타난 일련의 사회적․심리적 현상이다. 그리하여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근대화 과정에서 뚜렷하게 형성된 종전의 경계선들을, 바로 근대화의 보다 철저한 자기 관철 과정에서 해체시켜 버린다. 가령 국민국가 간을 가르는 경계선인 국경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기호적 가치로 전환되어 엄청난 액수로 거래되는, 그리하여 단일 국가의 통화조절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국제적 금융자본의 운동은 국경의 경계선으로서의 특권적 위상을 해체시켜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사례의 하나다. 또한 국경을 아무런 제약없이 월장하는 전자파를 통한 문화 혼융 현상 역시 국경의 경계선으로서의 특권을 박탈했다. 물론 이것은 국경만의 운명은 아니다. 모든 근대적 경계선들이 이와 동일한 운명에 처해졌다. 이러한 공간적 변동은 교회의 선교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가령 전자파를 통한 예배는 대면적 장소로서의 교회 담론을 교란시켰고, 유리로 지워진 교회당은 건물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선이 해체되고 있는 포스트근대적 징후를 보여준다. 이제 국제적 영역(확대공간)과 지방적 영역(축소공간)의 문제는 더 이상 국가와 분리된 문제가 아니며,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차원은 서로 분리되어 한계지워진 분과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사회적 문제로서 발현한다.
이러한 상황은 경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비판담론까지도 교란시킨다. 15 이제까지 우리를 이편과 저편으로 가르고 있었던 바리케이트가 담론 속에서 제거된 것이다. 그 대신 바리케이트의 대치선에 의해 무화됐던 수많은 ‘차이’들이 새로운 가치로서 부각되었다. 요컨대 근대성의 자기 관철의 급진화 과정은 경계화 주변에서 형성된 지배담론과 비판담론의 지형학을 탈경계화(de-boundarization) 과정에서의 지배와 해방의 담론적 투쟁의 지형학으로 전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 확대 현상과 그로 인한 비판담론 지형학의 변화 양상은, 특별히 전자파 매체가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으로 전화되는 것과 관련된다. 이것이 문자 매체의 특권적 위상을 상당부분 대체함으로써, 정보의 형식에 있어서 논리적 연쇄 방식보다는 이미지 재현 방식의 중요성이 강화되고, 정보의 저장보다는 유통이 지식 활용의 중심축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인간이 체험을 표상하는 방식에서 에피소드적인(즉 논리적 연관성을 갖기보다는 우연적으로 나열되는) 이미지의 영상을 느끼고 그러한 영상들을 꼴라쥬하여 창조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감성 영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지식 작용의 변화는 논리적 제도 공간인 국가기관들보다는 감성적 제도 공간인 대중매체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권력의 작동이 이루어지게 한다. 이것은 지배담론과 저항담론이 각축하는 무대가 바로 문화정치학적 담론공간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급변하는 현시대성에 대한 신학적 비판담론을 모색하기 위해 문화정치학적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일전에 제3세대 민중신학의 전망을 문화정치학적 문제설정을 통해 제안한 바 있는데, 16 이것은 비판담론 구성에서 재경계화(re-boundarization)를 지양하고 탈경계화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17 그런데 정통적인 신학적 담론은 무수한 ‘타자성’을 생산한다. 18 우선 신의 타자성이 있다. 이것은 실제로는 인식주체인 우리로부터 신을 타자와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신으로부터 우리를 타자화하는 언술 작용을 갖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인간의 주체적인 사유 가능성이 억제된다. 이러한 담론은 인간 중심주의의 왜곡된 발현태인 나찌즘을 비판하는 데 용이한 담론적 수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성숙한 사유의 주체로서 대우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유형의 파시즘적 억압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자신의 운명을 위임하도록 함으로써, 신의 대리자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권력, 그리고 성직자의 권력을 정당하하는 명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신의 타자성 담론은 비성찰적이다. 한편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타자성 주장도 정통주의의 신학적 담론에 함축되어 있다. 가령 교회 안과 밖의 구분을 타자성 담론을 통해 실현함으로써 교회는 배제주의의 실천 무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교회가 현실적인 권력의 실체로 기능할 수 있는 부문에서 이러한 담론은 교회로 하여금 억압의 메커니즘을 수행하게 한다. 또한 교회가 세속적인 경계화와 절합(節合, 분절절 접합, articulation)되어 있는 경우에, 가령 국가의 경계선과 교회의 경계선이 절합한 형태인 국가교회 담론의 경우, 교회의 신학은 제국주의의 종교적 표현 이외에 다름이 아닌 형태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비인간적 실체에 대한 타자성 주장이 있다. 이러한 신학적 담론이, 비인간적 존재로 여겼던 노예 혹은 인종 착취에서부터, 동식물을 포함한 생태환경 자체에 대한 정복주의적 담론과 절합되어 역사 속에 발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현시대성이 우리에게 주는 성찰적 요소는 이와 같은 무수한 경계화에 대한 해체성를 신학 속에 포괄하도록 요청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우리’라는 그리스도인적 정체성의 해체를 수반한다. 우리는 타자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의 내재적 상관성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우리의 본질은 너(희)/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며, 그 관계의 형성 과정 속에서 내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우리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변형된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의 본질은 인간 존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령 신의 실천은 역사 속에 개입하는 모습에서, 즉 인간 세계의 구체성과 조우하는 데서 발현한다는 주장과 상응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중심주의를 해체함으로써 (타자적 존재가 아닌, 인간과의 상호성 속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실천과 연관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담론에서 경계화를 강화시키는 요소의 폭력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교회 담론 전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수행되는데, 이 과정은 동시에 탈경계화를 지향하는 교회론의 재구성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교회와 그 외부인 사회의 각 영역, 가령 직장, 가족, 국가, 민족, 개인, 지역사회 등과 연결된 담론들과 어떻게 담론 절합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여기서 절합한다고 함은 상호간의 차이를 인정하되, 서로가 상대방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는 관계론적 사유를 전제한다. 이것은 교회의 제도나, 예전 형식, 담론의 내용, 그리고 사회적 활동 방식 등에 있어서 수많은 재점검을 요청한다. 특히 최근 IMF 관리체제하에 놓이게 됨으로써 WTO 체제의 글로벌자본주의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한국의 현재와 예상되는 앞날은 신빈곤의 문제가 우리에게 사회적 현안이자 개인적이기도 한 문제로서 다가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가 교회 외부와의 담론 절합에 있어 두드러진 현안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국가복지라는 문제설정, 특히 ‘탈노동의 재노동화’를 추구하는 적극적 복지의 문제설정이 신학과 교회의 과제로서 우리에게 부여되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과연 이러한 문제를 담아내기에 적합한 신학적 담론구조를 갖고 있는가? 이 점에서 우리는 민중신학의 핵심 요소인 ‘사건’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존재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짓는 하이데거-불트만 류의 실존주의적 사유를 사회역사학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여기에는 신과 나/우리, 세계와 나/우리 간의 시공간적인 연결망을 포착하려는 적극적인 신학적 사유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비대면성의 영역을 인간 경험의 영역으로 내재화하려는 근대성적 문제설정을 이론화하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 준다. 19
그런데 민중신학은 사건을 ‘민중사건’의 의미에서 재규정한다. 즉 사건에 ‘민중’이라는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는 규제적 조건이 개입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관계 속에서 존재의 실재성이 드러나지만, 그 모든 관계 가운데 그리스도교적 관계의 정당성은 ‘민중성’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은 계급이나 신분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보다 포괄적이고 다의적이다. 더욱이 민중신학에서 이 개념은 존재 내면의 파시스트적 지향에 대한 것도 포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민중을 ‘권력해체성’의 관점에서 본다. 즉 그물망처럼 구조화된 권력 네트워크의 시공간에서 민중사건은 그것을 해체하려는 실천 지향을 함의한다. 이러한 지향은 영원회귀적이면서 미래전망적 차원을 갖는 이상적 담론 지평인 하느님 나라를 현재성 속에 투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라는 신앙적 언표는 그때마다의(=동시대적인) 시공간에 권력 해체를 지향하는 기대의 최대치로서 구체화되는, 과정론적 진리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은 자아(자아 중심주의)에 대한 해체적 실천을 수반한다. 한 시인이 세기말적 시대의 위기성을 가슴아파하면서 자기로부터의 퇴행을 의미하는, 달팽이가 되고자 하노라고 노래한 것처럼, 20신은 인간으로 퇴행함으로써 메시아적 구원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이것이 민중사건이다. 신조차도 자신을, 자신의 권력을 해체하면서 사건 속에 개입해 들어온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함의가 들어 있다. 관계의 외부에서는 사건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아의 구축을 전제하는 한, 사건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자아의 권력 욕망에 대한 해체는 역사 속에 구조화된 악마성인 바벨탑주의, 즉 권력 욕망으로부터의 ‘단’(斷)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의 역사적 물질적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해서 민중신학이 제시한 개념이 바로 ‘공’(公)이다. 비경합성과 탈배제주의적이어야 하는 사회의 공공성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민중신학적 실천 규범으로서의 문제설정인 것이다. 이것의 구체적 실현 형태는, 가령 1998년의 경우 복지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표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중신학적 담론은 복지에로 환원되는 것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서구 사회의 경우처럼 또 다른 유형의 배제주의를 낳는 권력 장치로 구현될 가능성에 대해 ‘단’의 지향은 단호하게 ‘부정’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단과 공의 변증법적 상호성 속에서 민중신학적인 사건은 끊임없이 역사와 만나, 현전(presence)하였다가 부재(absence)하고, 부재하였다가 다시 현전함으로써 인카네이트하는(incarnating) 것이다. 21 이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은 급변하는 위기의 시대성에 대응하는 성찰적 신학 담론을 함축하고 있다. 바로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문제설정을 ‘제3세대적 민중신학’이라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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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본 것처럼, 민중신학은 신학 담론 내에서 시대성을 문제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담론적 실천의 구상물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 담론 밖으로 나가 시대의 위기성을 바로 대면하면서 위기에 대한 비판담론들과의 담론 절합을 통해 신학하기를 실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담론의 실천성을 획득하려는 신학적 운동이 바로 민중신학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민중신학의 지향에서 신학적 정체성의 위기를 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신학의 위기가 아니라 민중신학을 보는 정통신학적 사고의 선입견이 내포한 위기일 뿐이다. 반대로 어떤 이는 민중신학의 신학적 담론에서 여전히 제도적 대안이 부재함에 대해 비평한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비판담론은 대안적 제도를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은 정부나, 사회운동단체, 그리고 사회과학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이러한 대안들에 대해서도 다시 비판을 수행하는 성찰성을 철저하게 구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적 비판담론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어야 하며, 바로 그런 면에서 진정 신학적 담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권력 해체를 지향하는 문명비판의 언어인 것이다. □
- 이러한 위기론자들의 견해에 대한 나의 비판적 문제제기에 대하여는, 김진호, 〈최근의 ‘민중신학 위기론’은 실천이론의 빈곤을 반영한다〉, 《이론》 8 (1994 봄) 참조하라. 한편 1994년 말 중국 연변대학의 이정규 교수가 민중신학에 대해 논평의 글을 중국에서 발표하였는데, 여기서도 다른 위기론자들의 논점과 대동소이한 관점이 개진되고 있다. 이에 1996년 4월 26일, 본 연구소의 전신인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에서 그를 초청하여 같은 글을 발표하게 하였고, 내가 논평을 맡았다. 이때 나는 앞서의 글에서 잘 정돈되지 못한 채 기술되었던 비판적 관점을 보다 예각화하여 후속 논문 형식으로 논평 원고를 썼는데, 그것을 다듬은 것이, 김진호, 〈‘신학’이라는 배제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이정규 교수의 “민중신학에 대한 초보적 비판”에 대한 ‘초보적 비평〉, 《시대와 민중신학》 3 (1996)이다. [본문으로]
- ‘계보학’(generalogy)이란 푸코에게서 유래한 독특한 담론 연구 방법으로, 특정 담론은 담론 내의 진리성에 의거한 일관된 언술체계라는 이제까지의 담론 이해 방법을 전복시킨다. 오히려 담론은 담론 외부의 전술적이고 실천적인 권력 장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지배담론을 구성하는 언술적 지식과 담론 외부의 권력 간의 연계성 속에서 역사를 조명한다. 이러한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서 그는 지식 구성의 진리적 당위성을 교란시키고, 이러한 지식의 당위성에 의해 정복된 은폐된 지식을 폭로한다. 한편 나는 그의 계보학적 문제설정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권력의 계보학’이 아니라 ‘저항의 계보학’의 관점에서 활용하고자 한다. 이것은 저항담론의 실천이론적 평가를 위해서는 담론 내적 연관성과 차이의 시각에서 세대론을 조명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의 함의를 담고 있다. 민중신학의 세대별 담론의 특성을 각기 동시대의 실천담론적 구성물인 위기의식과의 절합(=분절적 접합, articulation) 관계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민중신학의 실천이론적 평가 방식을 정립하고자 함이다. 이에 관하여는,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시대와 민중신학》 4(1997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에서 요약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본문으로]
- 최형묵,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 《신학사상》 69 (1990 여름) 참조. [본문으로]
-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참조. [본문으로]
- 기든스는 이러한 근대성의 특징을 '장소귀속성 탈피'(disembedding)라고 명명한다. 그에 의하면,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시간이 표준화되자, 장소(place, 사회적 활동의 물리적 장)의 표준화가 야기되며, 이것은 장소로부터 공간(space)의 분리를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시공간 분리로 인한 장소귀속성 탈피는 “사회관계들을 지역적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끄집어 내어’ 무한한 시간-공간 대에 걸쳐서 재구성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35). Giddens, 《포스트모더니티》, 35~42쪽. [본문으로]
- 전성우, 〈베버 사회학의 이론적 기본구도. 합리화론을 중심으로〉, 《막스 베버의 역사사회학 연구》 (서울: 사회비평사, 1996). [본문으로]
- 기든스는 근대성의 제도적 차원을 자본주의(경쟁적인 노동과 상품시장 안에서의 자본축적), 감시체제(정보에 대한 통제와 사회적 관리), 산업주의(자연의 변형; ‘인위적 환경’의 발달), 군사력(전쟁의 산업화와 관련된 폭력수단의 통제) 등, 네 요소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한다. Giddens, 진덕규 옮김, 《민족국가와 폭력》 (서울: 삼지원, 1991) 참조. [본문으로]
-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많은 교파들의 뿌리는 이러한 국가 차원의 경계화와 상응하고 있음을 주지하자. [본문으로]
- 초기의 민중신학자들은 이론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개념화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표명하곤 했다. [본문으로]
- 이 시대 민중신학의 언술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지배적 담론을 테러리즘적으로 전복시키는 단언적 수사로 가득하다. 가령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라는 언명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로고센트리즘의 비상황성에 대한 민중신학의 도발적인 비판이다. 또 “전태일이 예수다”라는 수사는 ‘예수 부활의 유일회성’ 비판을 ‘예수부활 사건의 재현/육화(incarnation)’로서 제시하는 언어의 테러리즘이다. [본문으로]
- 고대의 신은 도시의 수호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의 이미지화는 근대에 와서 더욱 정교하게 관철되고 있다. 근대적 신에 관한 지배담론은 언제나 근대적 경계화를 수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본문으로]
- 1993년 10월 4~5일 충남 도고에서 열렸던 ‘한국신학연구소 창립20주년 기념 국제 신학 심포지엄’에서 테오 순더마이어는 민중신학적 담론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담론의 흔적을 발견해 내고 있다. 당시로선 이러한 해석은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대하여는 T. Sundermeide, 〈삶과 증언으로서의 민중신학〉, 《신학사상》 83 (1993 겨울) 참조. [본문으로]
- A. Giddens, 이윤희․이현희 옮김, 《포스트모더니티》 (서울: 민영사, 1991), 19. [본문으로]
- 가령 페미니즘적 담론이 광고 저널리즘에 의해 상업주의와 결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해방과 지배는 혼융되며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본문으로]
-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모색하며〉 참조. [본문으로]
- 이것은 최근 대안적 모델로서 제시되고 있는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논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공동체론’적 경향의 대안에 대한 대안. 민중신학사랑방의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 ‘예수살기모임’을 중심으로”을 참관한 뒤의 하나의 단상〉, 《숨》 27 (한국민중신학회; 1995.6) 참조. 또한 페미니즘의 공동체론에 대한 비판으로 ‘비압제적 도시’(unoppressed city)론을 제시함으로써, 공동체론을 지향하는 대안사회론을 폈던 Iris Marion Young, "'The Ideal of Community and the Politics of Dirrerence", in Linda J. Nicholson, Feminism/Postmodernism (Routledge, 1990) 참조. [본문으로]
- 여기서 타자성이란 관계의 외부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본문으로]
- 이하의 ‘민중사건’론적 전망에 대하여는 김진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261~63 및 김진호,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 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신학사상》 80 (1993 봄) 참조. [본문으로]
- 김철식, 〈달팽이〉, 《문학동네》 9 (1996 겨울), 352~53. [본문으로]
- 김진호, 〈단과 공의 변증법. IMF 관리체제하에서 민중신학의 실천담론 모색〉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3월 포럼 원고(1998.3.23)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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