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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공동체론’적 경향의 대안에 대한 대안 - 민중신학 사랑방의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 ‘예수살기 모임’을 중심으로〉을 참관한 뒤의 하나의 단상

1995년 6월 8일 한국민중신학회 교육훈련위원회 주관의 '민중신학학 사랑방: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의 제1회 모임으로 이현주 목사의 '예수살기 모임'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에 대한 논평. 이것은 민중신학회 소식지인《숨》(1995.7)에 게재되었고, 이를 다시 수정보완하여 여기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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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론적 경향의 대안에 대한 대안

민중신학 사랑방의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예수살기 모임을 중심으로을 참관한 뒤의 하나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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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는 공동체라는 어휘는 대단히 다양한 용례로 쓰인다. ‘인류공동체지구촌공동체니 하는 것처럼 폭넓은 개방적인 정체성의 집단에서부터, ‘민족/종족공동체’ ‘혈연공동체’ ‘종교공동체’ ‘가족공동체따위의 것처럼 폐쇄적 정체성의 집단에까지, 그리고 그 공간(space)적 점유의 크기나 시간적 지속성의 크기에 있어서도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 만치 그 용례의 일관성이 없다. 그럼에도 이른바 공동체 운동이라 부를 수 있는 (포스트)근대적인 사회적, 공간적 실천들은 그 함의에 있어서 대체적인 수렴점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정서적이며 대면적(對面的)인 친밀감이 깃든 장소(place)재현해보자는 것이리라.

하이데거(M. Heidegger) 식으로 표현하자면, ‘장소존재의 진리가 구현되는 현장이다. 이 속에서 존재 간에, 특히 인간 존재와 비인간적 존재간에 영적인 통합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전히 그의 진단에 따르면) 기술적 지배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면서 시공간적 거리가 축소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거리의 정복(축소/소멸)이 존재간의 근접성(nearness)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도리어 근접성 자체를 와해시켜버리고 말았다. 이제 사람()은 다른 사람(), 그리고 그밖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의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와 너/그것으로 표상되는 주객 이원론적인 대상화, 객관화라는 인식론적 사고 경향에는 근접성, 친밀감, 일체감, 영적 교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하이데거 식의 장소재현을 향한 염원이 최근의 공동체 운동의 실천적 함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 운동은 (포스트)근대적 문명비판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대안적 공간 실천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지난 68(), 한국민중신학회 교육훈련위원회 주관의민중신학사랑방에서는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이라는 큰 주제하에서 첫번째 모임을 가졌다. 소박하게 여러 형태로 새로운 공동체 운동을 펼치는, 혹은 그런 시도를 모색하는 이들 간의 대화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인데, 이렇게 수차례 계속하다보면 어쩌면 정말 대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번째 시도에서부터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던 듯이 보인다. 우선 참석자의 수에 있어서도 서른 명쯤 되어 예상 인원의 세배나 되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대안은 아니지만 그 대안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게 짚어봐야 하는 공동체 운동의 실제에 대한 비판적인 점검이, 다소 산만했지만, 논의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 본다.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발표를 맡은 이현주 목사의예수살기모임은 이런 영양가 있는논의를 전개하기에 퍽이나 전형적인, 때로는 대안을 향한 시사를 줄 만한 적합한 사례였다고 본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공동체 운동의 사회적 함의에 대한 점검이 바탕에 깔렸었더라면 더욱 좋은 모임이 되었을 것이다.

 

2

 

들은 것에 기초해서 이 모임에 관한 소개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본래 우리신학연습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예수살기모임3년 정도된 공동체로서, 현재는 월 11박 모임을 정기적으로 꾸리고 있으며,‘종교교육연구소예수살기 신학원및 출판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회원 구성은 목회자가 다수지만, 평신도도 여럿 참여하고 있고, 교파간 종교간 벽을 의식하지 않을 만한 지향과 인적 구성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이 모임의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앞서서 그 무엇을 한다는 느낌의 공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무엇을 의도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들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한 바, ‘무슨 이즘(-ism)에 대한 그들의 저항감과 연관된 표현이리라. 정기 모임은, 고정된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갖는데, 때로는 신학자, 무속인, 불교승려 등이 초청되기도 하고, 그 지역의 목회자들도 다수 참여한다. 여기서는 주로 성서대화라는 것을 하는데, ‘공부를 한다기보다는 느낌을 말하는모임이다. (한 회원의 말에 따르면) 도 닦는 기분으로 예수말씀을 듣는(나누는)이야기 마당이다. 그밖에 (그들의 판단에 따르면) 서구 신학이 활동적인 반면 정적 특성인 고요함을 결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응으로(혹은 때로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하는데) 장자, 무속, 불교 등의 동양적/한국적 사상이나 종교에 관한 학습을 하기도 했고, 생태학 등에 관한 독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1980년대 한국사회는, 마치 화약고를 통과해 날아가는 불화살처럼, 빠르게 하지만 매순간마다 맹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거시 정치적이고 거대 서사적인 궤적을 남긴 시대였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는 단순하고 법칙적이며 보편적인 계몽적 가치에 의해 담론적 유통 질서가 주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이 시대는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변화를 앞질르는 과잉의 정치적, 담론적 질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1990년대는 이러한 계몽적 가치의 갑작스럽고도 급진적인 해체 경향이 기존의 담론적 유통 질서를 사정없이 교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사회의 변화보다 훨씬 빠르게, 순간성즉흥성을 강조하는 포스트근대적 인식론이 담론적 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계획, 의도보다는 무계획, 무의도를 강조하게 되고, 필연보다는 우연의 의의에 몰입하게 되었다. 또한 상징의 재현을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인 속성을 갖는 이미지로서 실연한다.

예수살기모임성서대화, 비록 이런 유형의 성서읽기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바로 즉흥성순간성이미지성을 강조하는 현시기의 담론적 특성과 친화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런 성서 읽기는 지배적인 계몽적 가치를 반영하기보다는 독서자의 다양한 차이를 반영한다. 이것은 거대 서사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계몽적 가치가 식민화해버린 생활세계(J. Habermas)를 재현의 영역에서 부활시킨다. 단수인 추상적인 원리, 원칙, 가치는 사라지고, 구체적인 삶의 영역이 성서 읽기에 개입한다. 그러므로 성서대화는, (차이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존재인) 자신이 배제된, 거대 서사의 계몽적 가치에 일방적으로 주입된 무미건조한 성서 학습이 아니라, “도 닦는 기분으로신과의 의사소통을 체험할 수 있는, 그야말로 감동을 자아내는 성서 읽기를 구현한다. 나아가 이것은 타자(他者)에 대해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거대 서사에서는 결여된, 결여될 수밖에 없는 성찰성(reflexivity), 즉 나/우리의 지식이나 관습, 가치, 신념 등을 상대화하고, ‘관계속에서 자신도 변화될 가능성 앞에 열리는 삶의 자세를 부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성서 읽기는, 감각적이거나 관조적인 개인적 실존의 경험 세계와 접목되지 않는 어떠한 사회적인 계몽적 의무감으로부터도 자신을 분리시킬 가능성을 내포한다. 무위(無爲)의 미덕이 이들의 담론적 실천에 깔린 문제점으로 다가온다(이현주 목사가 의지의 침묵이라고 부르는 경지는 바로 이런 무위를 미화하는 용법이다). 요컨대 자신 외부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들이 비록 보편적인 계몽적 가치에 따라서는 사회정의의 위기를 야기하는 것일지라도, 이 사건이 개인의 삶의 세계와 접맥되어 재현되지 않으면 그는 이 불의한 사건에 대해 저항해야 할 어떠한 의무감으로부터도 무관한 존재로서 안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예수살기모임에서는 여전히 (지금은 아직 아니더라도) 올바른 거대 서사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으나(그래서 생태학이나 자본주의 등에 대한 책을 읽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앞서서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를 끝내 부정하는 데서 시사되듯이, 이런 유형의 성서 읽기는 자신 및 자신과 대면적 관계에 있는 공동체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비즉자적이고 통찰적인 접근을 좀더 치열하게 전개할 수 없게 한다. 그리하여 이런 유형의 공동체 운동이 종종 직면하는, 사회적 공간적 실천이 끊임없이 정치적인 거대 서사로부터 이탈되어 종국에는 공동체라는 장소 건설에만 집중하여(‘장소의 정치’), ‘말놀이차원으로 분쇄된 미시적인 담론적 실천에로 환원될 가능성 앞에 더욱 노출된다(어느 질의자가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적으로 질문한 데서 드러나듯이).

한편 (포스트)근대적인 공동체 운동이 갖는 존재의 본향으로서의 장소를 향한 그리움은 종종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것에 대한 과잉신뢰로 이어지곤 한다. 전통 사상/문화 등이,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 대해 갖는 물신주의적(fetishistic) 태도처럼, 반성적 성찰을 상대적으로 덜 거치면서 수용된다. 과거의 현재적 재현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존재의 본향을 재현하는, 그럼으로써 존재론적 안전을 회복하는 효과를 가져다주기 보다는, (공동체 외부의) 타자와는 변별되는 문화적 태도를 통해서 심리적 우월감을 회복하는, 배타주의적 정체성의 형성자로 작용한다. 나아가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 소설과 영화로서 흥행에 대 성공을 거둔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때로 쇼비니즘적인 타자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 심리로 발전할 수 있다. 마치 슈바르츠발트의 농가를 향한 하이데거의 그리움이 (잠시나마) 나치즘에서 재현의 공간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대면적 신뢰가 지배적이던 전근대적 과거의 공간을 뿌리 찾기라는 명분으로 재현함으로써 여기에서 발생한 맹렬한 에너지를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활용한 것은 전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공동체를 구상한다는 공동체론자들의 웅대한 바램은, 담론의 미시 영역에서는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에도, 거시 영역에서는 도리어 탈가치화되고 심지어는 자본주의적 정체성 운동의 수단으로 매몰될 여지를 안고 있다.

다행히도예수살기모임은 이런 우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억지를 부리지 말자!”라는 이 모임의 묵계적 강령에서 시사되듯이, 이들은 반() 권력적 지향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교파간 종교간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것이나, 공동 '거주'(dwelling)를 통해 대면성을 회복하려는 꿈이 폐기된 것은 아님에도, 적어도 현재의 형식이 지리적 장소를 해체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은, 배타적 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을 향해 열려 있다. 여기서 우리 공동체와 타자 사이를 가르는 명료한 분계선인 경계(boundary)를 허물고, 타자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들이 서로 만나는 의사소통의 공간인 변경지대(frontier zone)를 허용하는 그런 정체성의 장소 건설의 가능성을 시사받을 수 있다.

 

3

 

최근 성해방주의 이론가인 영(I. Young)비압제적 도시라는 대안적 공동체 이상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제작자나 제작과정에 대해 모르고 조종사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존재의 위기를 겪지 않으면서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근대적인 신뢰의 체계를 염두에 둔 개념이다. 즉 신뢰성의 회복이 근대성의 부정으로, 그래서 대면성을 통해서야 신뢰가 가능했던 전근대적인 공동체를 재현하기보다는 근대적인 신뢰의 가능성에 더욱 천착하는 개념이다. 또한 보편성에 삶의 구체적인 영역을 끼워 맞추거나, 반대로 보편성을 해체하면서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감각적인 이미지만을 존중하는 것을 모두 지양하면서, 보편성과 구체성의 변증법적 통합을 추구하는 개념이다. 그리하여 통일성 있는 계몽적 가치를, 지성사적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차이의 다양성을 최대화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비압제적 도시가 추구하는 정체성은, 타자에 대해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그리고 내부인에 대해서는 성찰성이 결여된 공동체의 그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서로를 포섭하는 관념체계, 제도 등을 재현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배타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유일한 그리스도인의 존재양태로서 이해하여 왔고, 소통성보다는 일방성을 함축하는 계시를 신앙의 최고 규준으로 정립시켜 왔다. 여기에는 성속의 구분이라는 이원론적인 가치가 바탕이 되어 있고, 이것의 구체적인 적용 형태로서 차이에 대해 배타적인 심지어는 적대적인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역사는 이런 그리스도교의 오류의 흔적을 여기저기에 새겨 놓았다. 3세계 신학은 이런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항이요 전복이다.

민중신학은 관계의 소통성을 재현하는 사건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인간 개인과 하느님간의, 그리고 인간간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나아가 이 개념은 인간과 일체의 비인간적 존재와의 의사소통을 향해 열려 있다(기든스 A. Giddens는 이런 소통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공간을 현장’ locale이라고 부른다. 마치 민중신학자들을 위한 개념을 제시하듯이 말이다). 이것은 신과 인간 개인, 인간들 간,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 사이의 차이성을 부정하거나 어느 것 중심으로 다른 것을 억지로 규격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서로 배타적으로 독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소통하면서 역사의 궤적을 그어간다. 이것이 바로 사건인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사건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달리, 민중신학이 로고센트리즘(logo-centrism)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공동체론자들에게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기에 필요한 신학적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들을 귀 있는 이에게는 말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사건은 타자에 대한 배타성, 공격성을 지양하며, 동시에 보편성과 구체성을 통합하는 신학적 수사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사건 은 모든 관계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선악을 선명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차이가 수평하게 나열된 것이 아니라 위계적 연결망(networks)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연결망들 가운데 어떤 것은 더욱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고, 다른 것은 덜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본다. 자명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인류 지성사의 발전은 이런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통찰할 만한 성과물을 축적시켜 놓았다. 그래서 모든 판단을 직관과 이미지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 점에서 가치판단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것이 바로 사건앞에 붙은 민중이라는 어휘의 의의다. 민중신학자들이 이 개념에 대해 오랜 동안 침묵해 왔고, 그래서 아직 이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엔 불충분하지만, ‘민중이라는 말은 사건이 무한정하게 해석될 가능성을 제한한다. 나는 민중사건을 막힌 담을 허무는 운동이라 규정한다(에페 2,14). 창세기 2-11장의 일련의 연속적인 이야기는 타자성()에 대해 벽을 쌓아가는 인류 문명사에 대한 비평이다. 이것이 J 문서에 속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함의가 분명해지듯이, 이 이야기는 또한 문명의 주역인 권력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다. 권력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타자에 대한 배타성, 공격성을 구조화해 왔다. 그러므로 민중사건은 권력해체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중사건을 구현하는 하나의 장소로서의 대안적 공동체는 배타성을 통한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최근 어떤 교회들이 영성이라는 미명하에, 사실 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신앙적 수사인데도 불구하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경계’, 그러한 정체성을 추구한다. 반면, 다른 어떤 교회들은 주변의 다양한 집단, 조직과의 의사소통의 공간인 변경지역을 설치한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정체성의 소산인 종교적 특수 용어를 고집하지 않으면서 건강한 의사소통을 이루는 현장을 만든다. 한없이 가치를 해체하다가 결국 말놀이만을 남기는 그런 현장이 아니고,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가 경합하고 상호 지양되기도 하는 그런 현장 말이다. 바로 이것이 민중사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