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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브리스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지도자

한백성서교실에서 개설한 '민중신학으로 보는 성서인물사 2 - 신앙사의 주요 여인들'의 여덟 째 마당(1999.8.19)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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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지도자

 

 

 

1

 

바울의 서신들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하나의 논설이 아니라 구체적 현안들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실용적 글이다. 이런 류의 글쓰기는 흔히, 오랜 시간을 두고 성찰적 언술을 편 텍스트의 정교함이 결여되어 있다. 만약 이때 그가 지향하는 가치의 어떤 부분이 보편적 가치와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의 주장은 그 보편적 가치들과 일정한 타협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무의식적인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협약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의 서신들의 주된 소의 하나는 공격자들에 대한 자기 방어에 있다. 그 공격은 주로 사도로서의 자격에 관한 것이다. 박해자였던 경력은 그의 활동에 끊임없는 시비거리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하여 바울은 자신이 진리를 담지한 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집착하게 한다. 그런데 진리란 대중의 공인을 필요로 한다. 대중이 공유하지 않는 주장은 그가 진리를 담지한 자임을 공인받는 데 결격사유가 된다. 즉 그는 진리를 공유하는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글쓰기는 의도적으로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하게 된다. 요컨대 바울의 서신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배적인 가치와의 공모의 흔적을 도처에 담고 있다.

(sexuality)의 문제는 바울의 텍스트에서 기성 가치와 타협이 가장 현저한 주제에 속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의 텍스트에서 우리는 기성의 성적 가치를 혁명적으로 전도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그와 동료였던 여성 예수운동가들로 인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추정을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바울의 가장 중요한 선교 동역자의 한 사람인 브리스카의 활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2

 

바울의 성적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집회 시에 여자는 침묵하라는 것과, 집회에서 여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라는 훈계가 있다. 먼저 침묵 훈계에 대해 살펴보자.

침묵 훈계는 여자들이 집회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현실의 반증이 된다. 그렇다면 여자들의 집회 참여 방식은 어떤 것일까? 고린도전서14장을 보면, 바울 공동체에서 예배 상황은 매우 즉흥적이었다. 그것은 아직 예배가 제도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직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신앙의 한 분파이던 시절이다. 하여 디아스포라 회당 예배가 교회 예배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도적 종교의 예전은 항상 위계질서를 함축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회당 예배의 모습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그러한 위계질서가 은연중 작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의 급진주의적 분파의 하나였다. 이들이 급진주의적 공동체인 한, 디아스포라 회당의 주류가 담지하고 있는 제도적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저항의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적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사도행전 2,27~28

 

이 구절은 바울 공동체를 포함한 그리스도파 공동체들(교회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신앙적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 전반부는 요엘서2,27~28을 인용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전통에서 메시아의 나라가 지향하는 대중적 꿈에 관한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가부장제적 질서 속에서 침묵해야 했던 딸들이 예언자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것을 부연한 구절인 후반부에서는, 남종뿐 아니라 여종에게까지도 영이 부어졌다. 그들도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는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났다. 여자도 예언을 하고, 그중에는 노예 여자도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묵시적 꿈이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바로 그 묵시가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가 통념적 위계질서, 특히 성의 위계성에 도전하는 내적 동력이 넘쳐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칩니다.

―〈고린도전서14,1~4

 

이와 같이 열광적인 영 체험은 바울 공동체에서도 매우 활발했다. 무아경 속에서 알 수 없는,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한 소리를 발설하는 방언 현상은 지배적 언어의 음성학적 질서에서 이탈한 탈언어로서의 언어. 이것은 의미 자체보다는 기성 언어의 해체라는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탈언어적 언어 현상은 지배적 언술을 충분히 내면화하지 못한 소외 계층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가령, 젊은 세대, 여성, 외부자 등등. 바울 공동체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영성적 방언을 했던 것 같고, 예배 중에 갑자기 신명에 차서 그러한 소리를 지르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방언 현상은 감성이 고조된 상태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감정의 절제가 매우 어렵다. 이것은 때로 공동체의 감성적 분위기를 자극함으로써 통합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종종 독선적 자기 주장에 과도하게 몰입되게도 한다. 왜냐하면 방언 자체가 억눌린 정서의 일탈적 음성을 통한 발설이기 때문에, 방언 행위자는 이것을 자신의 억눌린 정서를 성찰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즉흥적인 자기 분노의 표현으로 활용하곤 하기 때문이다. 하여 방언 현상은 공동체의 분열과 와해의 폭탄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의 영향력에 대한 도전의 양식이기도 했다.

아마도 바울은 그것을 걱정했던 듯하고, 이러한 방언을 통한 과잉된 정서적 흥분을 억제하기 위한 언술 전략이 여자들은 조용히하라는 훈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훈계는 기성의 규범적 질서의 효용성에 호소함으로써 언술 전략으로서의 유용성을 얻는다는 데 있다. 즉 바울은 여기서 의도하지 않은 성억압적인 규범적 질서에 편승하고 만다.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고린도전서14,34~35

 

한편, 바울 이후 세대의 정전적 텍스트들인 디모데전서2,11~12이나 여러 가훈 구문들(골로새서3,18; 에베소서5,2224; 베드로전서3,15)고린도전서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양자 간에는 중요한 차이를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예배는 즉흥적이고 일탈적인 경향을 가졌다면, 이들 문서들은 질서 형성적이라는 점이다. 이 문서들 시대인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교회는 자기 형성적인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었고, 그런 차원에서 디아스포라 회당종교나 다른 종교운동들처럼 어느 정도 제도화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입니다.

―〈골로새서3,18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구주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에베소서5,22~24

 

[1]아내가 된 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십시오. 그리하면 비록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말을 하지 않고도 아내 여러분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5]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자기를 단장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3,15

 

이들 문서들에서 여성의 침묵 훈계는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추방하는 셈이며, 가정이 여성의 존재 영역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와 같이 공공장소에서 침묵하고 그녀의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성적 질서관은 기혼 문화를 전제한다. 이것은 디모데전서2,15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여성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완성된다는, 이른바 모성적 정체성만을 진정한 여성다운 성적 주체로서 강조하는 것과 부합한다.

이제 여자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에 참여하라는 고린도전서11장의 주장을 살펴보자.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존재론적 설명을 제시한다. 즉 여자가 예배에 수건을 써야하는 것은 보편적인 이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8~9절에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하는 일반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이유는 여자가 남자에게 부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데,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그러한 부속된 존재임을 표상하는 것이 왜 수건을 머리에 쓰는 것이어야 하는가? 바울의 진술에 의하면 그것의 유일한 근거는 풍습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바울의 글쓰기 형태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미 말했듯이 바울은 원리에서 실행 근거를 도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현안 문제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편적 원리를 언급하곤 하는데, 특히 그의 설명 방식은 실용적 효용성에 훨씬 주목하는 반면, 성찰적이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다. 고린도전서11장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그는 여성이 예배에 참여할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 존재론적인, 심지어 창조론적인 지식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근거 설명은 순전히 즉각적인 효용성에 치우쳐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성이 수건을 머리에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말했듯이 그가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상적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상적으로 사회 속에서 여자는, 종교적 의식에서건 비종교적 의식에서건 간에, 예를 갖추는 행위를 할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썼다. 만약 일상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예를 갖추지 않는 여인은 부정한 사람처럼 여겨졌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배 때에도 여자들은 예를 갖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다. 어쩌면 바울 자신도 이러한 일상적 예법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여기서 14장에서처럼 열광적인 여성 참여자들의 과도한 감성의 폭발을 문제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적어도 11장의 텍스트에선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지는 않다. 고린도전서를 하나의 통합체로 간주할 때, 14장의 문제의식이 11장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어 있으리라는 가정 아래서 이러한 추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후자는 14장과 동일한 의도에서 기술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같은 효과를 가졌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아무튼 바울이 여성 예절에 관한 풍습으로 예배의 여자 참여자들을 규율시키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파급효과가 있었다. 그가 그 근거로 존재론적 설명을 가한 것은 그 효과를 더욱 절대화한다. 즉 깊이 성찰하지 않은 채 특정한 의도를 위해 발설된 이야기는,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징표로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언술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 11,11~12에서 갑자기 여성의 예속에 관한 논술이 교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11,11~12

 

주 안에서(공동번역: “주님을 믿는 세계에서는”; en kyuriō) 남자와 여자의 존재론적 창조질서가 전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남성에게 귀속시키는 논리가 지양되고 상호귀속의 논리가 제안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텍스트 내적인 긴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은 한 편에서는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공유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자기가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상상하면서 통념에 대항하곤 한다. 바울도 예외가 아니다. 분명 그도 분열적이고 그것으로 인한 내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혹은 내적 갈등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분열적인 자아들 드러내기도 한다. 이 경우가 그런 예다.

바울 자신은 지난주에 보았던 의인론에서처럼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는, 예수로 인한 새로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마치 몸에 일부처럼 붙어 있는 관습적인 생각이 그의 일상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고, 오히려 그런 것에 무심코 자신을 내어줄 때가 더 많다. 그의 새로운 생각은 아직 그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일상을 전부 바꿔놓지는 못했다. 아니 대부분은 낡은 생각의 통제를 받았고, 의식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런 낡은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주장하는 대목에서야 새로운 생각이 그를 책동하고 있었다.

갈라디아서3,26~28에는 바울의 성관에 대한 명료한 논리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유다인-남성-자유인헬라인-여성-노예가 대응하고 있고, 바울은 여기서 양자의 차이가 소멸되는 데서 그리스도적 해방의 본질을 찾고 있다. 갈라디아서전체가 그러한 차별의 내재적 근거로 작동하는 율법과의 대결에 초점이 있듯이, 바울은 이 말을 통해서 회당체제 의 일상적 언술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 가령, ‘헬라인의 용법은 회당체제 내의 언술적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지, 헬레니즘의 주류 문화권의 언술 구조에 관련된 게 아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인은 율법이 지향하는 삶인 유다인 다운 삶을 결여한 존재, 경건한 삶을 살지 않는 부정한 놈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요컨대 바울은 두 범주의 연결어들에서 배제주의를 실행시키는 회당체제의 담론 전략을 비판하고 전복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성적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디아스포라 회당체제의 지배적 질서(그가 생각하는 지배적 질서)를 해체하고 있다. 즉 그는 회당체제의 주류적인 성적 장치를 해체함으로써 탈성적 성관을 제안하고 있다. 만약 헬레니즘의 논리를 해체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그의 또 다른 글이 있다면, 거기에서 그는 헬레니즘의 지배적인 성적 장치와 대결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리스도교적 지향성에 의해, 그는 탈성적 주체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의 해체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지향은 고린도전서15,42~49의 본문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창조론이 함축하고 있는 질서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그는 하느님을 비판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여기서 그가 발견한 비결은 창조 질서는 그러한데, 주 안에서는 이러하다는 방식에 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성서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42~49

 

여기서 부활은 제2의 창조다. 첫째 창조가 육적 창조였다면, 둘째 창조, 곧 부활은 영적 창조다. 하여 첫째 창조의 질서는 육의 질서이고 율법의 질서였다면, 둘째 창조는 영의 질서이고, 율법이 해체되는 은혜의 질서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지향을 가지고 공동체를 형성하려 했고, 하느님나라 선교 실천을 수행했다. 그러나 비성찰적이고 실용적인 텍스트에서 그는 종종 자신의 인습적 가치에 복종하곤 한다. 15장 말미에서도 그렇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이제까지 한 모든 도발적 문제제기들을 남자들을 향해서만 말한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15,58) 이러한 그의 주의 깊지 못한 글쓰기, 실은 우리 모두가 범할 수 있는 그런 글쓰기는, 불행하게도 이천 년간이나 그를 성차별주의적인 사도로서 해석되게 만들었다.

 

3

 

우리는 이상에서 바울이 탈성적인 성해방적 지향을 추구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럼에도 그에게 나타나는 한계는 그의 글쓰기에 함축된 그의 과하게 실천적이고 비성찰적인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예수와 바울을 통시적으로 연계시키는 그리스도 사건은 탈성적인 성해방적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성적 문제의식에서 예수사건의 계승자가 될 수 있었던 계기를 우리는 바울의 여성 동역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바울의 여성 동역자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의 성적 주체가 형성되었다는 가정 하에, 여성 동역자들의 활동을 주목할 것인데, 특히, 여기서는 가장 두드러진 동역자로 보이는 브리스가를 주목해보자.

우리는 바울의 동역자들 가운데 여성 동역자들의 비중이 수에서만 보더라도 매우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40여 명의 동역자들 가운데, 9~10명이 여성 동역자들이다. 이러한 여성 동역자들의 역할을 분류하면,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으로는 후견인이 있다. 사도행전은 특별히 이러한 여인들에 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있는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도행전은 여성 지도자를 후견인으로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후견인 유형으로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리디아(사도행전16,15)이다. 두 번째 유형으로, ‘공동체 지도자를 들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겐크레아 교회의 지도자인 뵈뵈(Phoebe)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로마서16,1). 마지막으로 떠돌이 선교사유형을 들 수 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브리스가. 물론 이 세 분류는 모범형적 유형론으로만 가치가 있다. , 어떤 인물도 하나에 고정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고, 단지 설명적 분류용으로 적절한 유형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브리스가는 아굴라의 부인이다. 그런데 바울은 언제나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그녀가 남편보다 바울의 선교동역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사도행전에 다르면 이 부부는 원래 로마의 회당에 속한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런데 회당에서 그리스도파로 보이는 이들에 의해 촉발된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혐의들을 추방했는데(49년경), 브리스가 부부도 이때 추방당했다는 것이다. 아길라는 천막 만드는 수공업자였고, 남편과 함께 브리스가는 계속 선교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바울을 만난 곳은 고린도 시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함께 지내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걸출한 웅변가의 하나인 아볼로를 만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브리스가는 아볼로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이 좀처럼 후원자 외의 여성 지도자의 역할을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다소 이례적인 기술에 속한다. 에베소의 선교활동에서도 이 부부는 바울의 중요한 동역자였던 것 같고, 후에 바울이 로마 교회로의 방문을 기획하던 때, 그들은 이미 로마 교회의 주역의 한 사람이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떠돌이 선교사로서 활동했고, 이런 선교 사역에 있어서 바울의 중요한 특징이었던 노동하는 선교사의 양식에 영향을 미쳤던 존재였던 것 같다.

 

[그림3] 성 오네시모(작가미상)



 앞서 말했듯이 바울은 브리스가를 항상 남편보다 먼저 언급하는데, 이것은 여성은 침묵해야 한다느니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과 부합하지 않는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이 그의 의도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전략적 언술에 치우친 단견적 실언에 불과한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오히려 이들의 모습에서 바울은 여남을 뛰어넘는 선교적 열정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또한 여자는 가정에 머물러 가부장의 권위 아래 부속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바울 서신에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브리스가와 같은 그의 여성 동역자들의 적극적인 활동 덕택일 것이다. 곧 바울이 주안에서 여남의 차별이 무너지는 비전을 상상할 때, 그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그는 어쩌면 브리스가를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