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의/강좌

왕국시대의 예언자들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9 가을 강좌 '역사로 읽는 성서II - 부족사회와 군주제사회 야훼신앙의 역사' 다섯 번째 마당 강의 원고


-------------------------------------




 

왕국시대 예언자들

 

 

 

 

예언, 예언자

 

1970년대 중반 출간된 두 권의 저술 김정준의 정의의 예언자와 서인석의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는 연구사적으로 한국 구약학계의 기념비적 저작에 속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두 권이 모두 예언자 아모스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모스를 읽는 주요 코드를 정의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적이다. 당시 독재정권의 국민총동원적 개발주의에 대해 그 발전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하느님의 정의라는 모티브가 성서 읽기에 개입한 결과다. 아무튼 이후 한국의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모스뿐 아니라 예언자 일반(하느님의) 정의의 사도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예언운동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성서에 언급된 예언자들의 면모는 하나의 이념적 지형만으로 포괄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특히 열왕기상22장의 미가야 벤 임라와 시드키야(주전 9세기), 아모스서7장의 아모스와 아마지야(왕실 사제)(주전 8세기), 그리고 예레미야서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니야(주전 7세기)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와 저항이라는 코드에서만 보아도 한편은 당대 왕실의 비판자인 반면 다른 한 편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한 쌍으로 기억되는 존재조차도 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중앙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복잡한 권력 투쟁과 이념 투쟁의 맥락에서 입지를 형성하는 존재였다면, 아모스나 미가 등은 변두리 지역의 농부 혹은 지방 토호 출신이다. 여기에 좀더 다양한 관점을 개입시키면 예언자들의 동질성을 찾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성서의 예언서들에서 예언자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읽어내는 일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왜냐면 예언자들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한 사람들인데, 현재의 성서에 편찬된 양식은 유다 왕국 출신 사가들의 창조에 가까운 손길을 거치면서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분류에서 심하게 변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들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더욱 심하게는 다른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혼합되고 심지어 해석에 속하는 새로운 언급들이 마치 원래의 것이라도 되는 양 은근슬쩍 끼어들어오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원래의 예언자나 예언운동을 재건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요컨대 학문적으로 예언, 예언자, 예언운동을 정의내리는 일은, 현재의 학문적 동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서의 예언들을 귀담아 들으려 한다. 그만큼 신앙에서 예언은 중요한 전통으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여기서 다시, 앞서 언급한 한국의 두 성서연구자들의 성서의 예언 읽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서를 선별하고, 그것을 연구자 동시대의 문제의식 특히 위기의식과 연계시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현재와 대화하기 위한 과거 읽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읽어내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억지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관한 정보를 통한 역사학적 연구 경향과, 현재의 문제의식 간에는 첨예한 긴장이 필요하다. 여기에 역사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은 분리되면서도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힌다.

그러나 정의라는 시대 비판적 예언 읽기의 코드는 오늘날, 19805공 정권의 등장한 이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정의는 시대 비판적 입지에서만 실재하지 않는다는 게 오늘 우리의 개념 속에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이후, 이른바 민주화과정과 지구화 과정에서 개인일상이 삶의 인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후, ‘정의로 표상되는 해방의 문제의식은 그다지 명료한 해방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게 입증되었다. 개발주의적 총동원 못지않게, ‘정의론에 기반을 둔 총동원도 삶의 다양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정의, 심지어 정의들 간의 상이한 해방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 가능한 상황이 오늘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언을 읽는 오늘 우리의 대안적 코드를 찾기 위한 탐색이 필요하다. 결론을 말하면, 이 강좌에서 나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그것은 낯설음이다. ‘육이 된 신이라는 예수에 관한 신학적 담론은 신에 관한 친숙함낯설음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해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예언자적 독특성은 친숙한 것, 일체의 인습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전복적인 도전에 있다. ‘시대를 낯설어함바로 그것이 예수의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바로 이와 같이 성서의 예언들에서 나는 시대를 낯설어하는 이미지를 발견한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은 당시 자본주의의 최첨단의 미학을 자랑하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문뜩 자신을 낯선 세계를 방황하는 배회자로 느낀다. 그 몇 년 뒤 장 뽈 싸르트르는 그의 첫 소설 구토에서 어제까지 일상 속에서 무감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던 것들 하나하나에서 구역질을 하는, 이상한 생리현상을 이야기한다. 불연 듯 감지된 세계의 낯섦이 몸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김수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 1960년 초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편함을 자신의 몸에서 기억해낸다. 마찬가지로 민중신학자들은 19701113일의 전태일에게서 시대를 불편하게 보는 예수에 대한 이해에 문득 도달했다. 바로 이러한 민중신학의 시선에서 성서의 예언을 읽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게 있다. 성서 전통에서 예언자는 거의 남자들의 전통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예언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출애굽기15,20의 드보라, 판관기4,4열왕기하22,14 그리고 역대기하34,22의 훌다, 이사야서8,3의 이사야의 부인이라고 언급된 익명의(가상의?) 예언자, 그리고 루가복음2,36의 안나, 묵시록2,20의 두아디라(Thyatira) 교회의 이세벨, 몇몇이 등장한다. 그러나 드보라나 훌다 등 주요 인물조차도 묘사가 극히 제약적이고, 두아디라의 이세벨처럼 종종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독자적인 이름의 예언서로 기억된 경우는 전무하며, 무엇보다도 성해방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에 대해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예언자들의 담론도 거의 전적으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측면도 적지 않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엘리야, 예언자적 실패의 상상력

 

기억 속의 엘리야

 

[그림5-] 예언자 엘리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부활한 엘리야임을 보이고자 용의주도한 노력을 기울였다.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털옷, 가죽허리띠 같은 의복이나 메뚜기와 들꿀 같은 음식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의 엘리야 바로 그였다. 말라기서의 다음 구절은 사람들의 이러한 기억과 바람의 흔적을 담고 있다.

 

너희는 내가 호렙산(=시나이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서3,22~24

 

이처럼 엘리야를 기다리는 대중의 기억은 종말심판에 대한 전통적 인식 코드와 결합되어 있다. 현재에 대한 강한 부정이 다시 도래할 엘리야에 대한 갈망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세례자 요한의 말은 현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증폭시켜 종말에 대한 신앙과 연계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을 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도 하였다.

―〈마르코복음6,14~15

 

즉 요한의 부활한 몸이 예수라는 대중적 인식은 엘리야=요한이라는 대중의 믿음과 연결되어,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연상작용을 낳았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고통 속에 신음하던 그이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절규 같은 고성을 지르며 임종한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오인했다(마르코복음15,34~35). 필경 이러한 드라마적 상상력은 예수와 엘리야를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가공의 산물일 것이다. 그만큼 예수는 부활한 엘리야로 인식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깊이 다가갔다. 예수의 실천은 유대 대중의 민중적 상징체계와 맞물림으로써 강력한 대중 전승의 일부를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동시대의 대중의 문제인식은 엘리야라는 거의 구백 년 전의 인물에 관한 기억과 대화하여, 서로를 해석하는 시선이 된다. 엘리야와 예수, 예수와 엘리야. 그리고 민중신학에서 이것은 예수-전태일의 해석학적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제2성서 시대의 유대교 주류 담론들, 특히 라삐적 바리사이즘은 엘리야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중 담론에 대한 그들의 불신 탓이겠다. 예수운동과 유대교 주류 담론간의 갈등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대중적 희망과 엘리트주의적 희망 간의 상이한 전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위에서 인용한 말라기서처럼 종말에 관한 상상이 함축된 문서 텍스트 속에 엘리야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서들 속에 예수와 엘리야가 내적인 연계를 이루게 된 것은 지식 계층 사이에도 대중적 희망의 체계가 어느 정도 스며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이슬람교 문헌에서도 엘리야가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엘리야

 

엘리야는 오므리 왕조의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다. 오므리(재위 885~873 BCE.)와 아합 왕(재위 873~851 BCE.)의 시대 이스라엘은 아마도 팔레스티나 역사에서 고대국가적 발전을 이룩한 최초의 군주제 국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였다.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를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고, 북으로 갈릴래아 북부 지역 끝의 (Dan)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를 차지하였다. 상부 갈릴래아 북단의 단과 하솔, 하부 갈릴래아의 므기또와 이즈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의 성도 사마리아 등에서 오므리-아합 대에 건조된 거대한 왕국 및 요새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상당한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특히 이 도시들에서 발굴된 지하수로나 마구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가 강력한 위용을 가진 나라인지를 시사한다.

[그림5-] 아합 시대 이스라엘


실제로 아시리아의 샬마네셀 3(Sharmaneser, 859~824 BCE.)의 비문에는 아시리아의 서방원정군에 맞서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연합군의 주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며, 파견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마전차 2천 승과 보병 1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규모라는 점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필경 아합의 군대는 평지전투에 관한 한 아시리아의 팽창주의를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궁의 고고학적 흔적에서 드러나듯 아마도 비교적 잘 짜인 관료제도가 성립되었던 듯하다. 왕실에서 대규모의 예언자와 사제 집단을 양성했다는 열왕기의 묘사를 염두에 둔다면(열왕기상18,19), 관료조직은 군사조직만이 아닌, 많은 이데올로그들의 양성 시스템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페니키아의 왕녀인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승에는 이세벨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다.[각주:1]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하다. 열왕기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관련시킨다. 하지만 열왕기의 저작집단인 신명기사가는 이 문제를 혼합주의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오므리 왕조의 제국적 발전은 다종족 연합체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고대의 국가들이 영역 내의 종족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는지를 과장해서 이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국가는 군사적으로 영역을 통제 관장할 수 있을지언정, 경험과 기억을 통제할 수단과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나마 군사적 통합조차도 지방에 왕 직속의 관료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실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제국 요소요소에 설치된 몇몇 군사요새 정도가 왕의 직속 부대가 배치된 곳이었고, 각 지방의 구체적인 행정 및 일상은 지방 토호 세력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니 지방 권력과 중앙 권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의 결과가 전근대 사회 국가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

오므리 왕조도 예외가 아니다. 오므리 왕조의 수도가 둘이라는 점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오므리는 사마리아를 돈으로 사들여서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열왕기상16,24). 반면 이즈르엘은, 나봇의 이야기에서 보듯, 토착민의 땅을 강탈하여 수도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열왕기상21,23). 이는 사마리아 건설이 족속간의 계약 전통에 의해 왕권이 행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이즈르엘은 왕권에 의한 일방적인 강탈 점유를 통해 구축된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실제로 최근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두 성도가 한 편은 보다 이스라엘적 전통이 강한 반면다른 한 편은 보다 비이스라엘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곤 한다요컨대 오므리 왕조는 이중수도를 통해 두 유형의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하나는 야훼신앙의 계약 군주적 전통이 그것이고다른 하나는 전제군주적 전통이다.


[5-1] 이스라엘 왕조사와 왕을 지지한 예언자들 

여로보암 1

 

아히야 예언자

 

나답

 

 

바아사

 

예후 바르 하나니

 

엘라

 

 

지므리

 

 

오므리

 

 

아합

 

 

아하지야

 

 

여호람(요람)

 

 

예후

 

엘리사

 

.

[5-1]에서 보듯 이스라엘의 왕들은 야훼계 예언자들[각주:2]의 지지에 힘입어서 권력을 획득하곤 했다. 그것은 대중과의 계약이 왕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파동맹의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오므리도 그러한 예언자적 지원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열왕기에 언급이 없는 것은 지지하는 예언자가 아예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바아사, 지므리 등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군사쿠데타의 상황에서 야훼계 예언자의 지지는 그다지 정당성을 갖지 못하였을 수 있다. 혹은 오므리 왕조의 비전통적 성격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신명기사가가 의도적으로 삭제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므리 왕은 유대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정당성이 가장 낮은 통치자였다. 하여 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티브니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의 내란 상황에 빠진 것(열왕기상16,21)은 이러한 예언자적 지지의 약한 정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란을 극복한 뒤, 이러한 약한 정당성은 오므리 왕조의 강점이 될 수 있었다. 야훼 예언자적인 계약 전통에 의존하지 않는 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왕조는 보다 본격적으로 권력집중적인 전제군주적 모델을 추구하였다. 오므리가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시킨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아합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즈르엘에 왕궁을 건립하고, 그곳을 전제군주적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요컨대 오므리-아합의 혼합주의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한편으로는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넘어서 국가체제를 견고히 하려는 정책의 소산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온 혼합주의라는 표현에 대해 좀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용어 자체가 시대착오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혼합주의의 문제는 (아합 시대인 주전 9세기보다 한참 후대인) 주전 5세기 이후 페르시아에서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몇 세기 간의 내외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신학적이고 종족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을 원리주의적으로 추구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공동체의 정체성 이데올로기가 성서 편찬에 개입한 결과, 과거의 역사를 혼합순수라는 틀로 억지 짜맞춘 데서 성서의 혼합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실 순수함이란 경험을 왜곡시키는 역사적 발명품에 다름 아니다. 혼합적인 것순수한 것을 오염시킨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실상은 순수함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오염된 형태로서의 혼합적인 것이 후대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서는 거꾸로가 더 타당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후대의 발명품인 순수가 현실을 규정하면서, 지난 선대의 역사를 원래의 수수함을 오염시킨 혼합주의적 타락이라고 해석했다는 얘기다. 애초에는, 순수라는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기 이전에는, 수많은 이질성들이 서로 경합하고 때로는 조합되고 혼재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은 구성되었다.



바알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다양한 이질성들이 만나 절충하고 혼재한 요소의 핵심에 있다. 아세라 신앙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야훼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이러한 전승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소수 전통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훼 신앙이 주류 전통과 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의 사람들은 주류 전통에 의존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소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한편 이스라엘이라는 지파동맹은 소수 전통인 이러한 야훼신앙을 연맹의 기조로 수용하면서, 가나안 지역의 다른 신들에 관한 전통들, 그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 있는 신앙전통을 따르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야훼신앙과 다른 신앙들은 원래부터 잘 어우러져 있었다.

그런데 오므리 왕조가 바알-아세라 신학을 도입한 것은, 그것이 팔레스티나 산()이 아니라 페니키아 산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팔레스티나에서 바알-아세라 신앙 전통은 신학적으로 잘 조직된 것이 아니라, 대중의 민간신앙에서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 지역에 잘 조직된 정치체제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지중해 무역 시장 형성에 뛰어든 페니키아의 문화전통은 오래 전부터 매우 발달된 정치조직을 낳았고 특히 어느 곳보다 발전된 사적 소유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바알-아세라 신은 이러한 사적 소유의 신적 후견자로서 신학화되었다. 국가의 팽창주의와 왕의 사유재산의 팽창은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당화된 것이다.

오므리 왕조가 이룩한 국가의 성공은 이러한 신학적 발전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대대적인 건조물은 모든 백성에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국가주의적 성공 미학을 홍보한다. 또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는 그 화려한 전례 행사를 통해 성공주의를 찬양한다. 반면 이러한 국가주의적 신학에 도전하는 자들은 공공연한 억압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의 담론 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들었다. 이제 전 사회는 왕조의 찬란한 성공 신화에 온통 사로잡힌 듯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그 속에서 문법화된 성공 게임의 가능성에 몰두해 있었다.

엘리야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한 비판적 예언자였다. 왕조의 이러한 성공 미학이 한참 활기를 띠던 바로 그 때다. 어느 나라를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렸고, 그 나라에서 보내온 공납물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로 한복판을 거닐면서, 그는 그 화려한 성공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에 관한 열왕기의 묘사는 문학 양식상 전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극소수 엘리트인 서기관들의 지적인 매체를 통해 기억된 것이 아니라, 민간전승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간적되어 온 이야기인 것이다. 훗날의 예수에 관한 설화처럼 말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대중의 분노와 희망의 언어로 가득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의 엘리야(historical Elia)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열왕기상17장의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를 보자. 여기에는 왜 그가 대중적 분노와 꿈의 이야기, 그러한 기억의 대상이 되었지는, 그 그럴 법한 근거가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그가 베푼 기적은 작은이들의 일상적인 고통과 엮여 있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담론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 반해, 엘리야의 활동은 이념보다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역경과 기적적인 극복에 관한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본문에서 과부와 어린아이가 그의 기적의 수혜자로 나온다는 점은 대중적 고통의 극한에 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요컨대 엘리야는 아합 왕조가 추진하던 강력한 전제군주제 정책이 대중의 희생을 동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대중의 기억 속에서 보존된 것이다.

21장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소농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대중으로선 땅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버거웠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나 고아는 무수히 끊임없이 양산되기 마련이고, 당연히 그들의 생존권은 전혀 보장될 수 없다. 부의 극심한 편중 현상은 국가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페니키아식 바알 종교에 의해 미학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엘리야를 통해 대중에게 속속들이 들춰졌다.

가르멜 산은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 있는 산이다. 또한 이즈르엘 성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요한 요새였다. 하여 이곳은 양국의 상이한 종교 전통간의 대립이 빈번한 지역이었고, 이 점에서 이 지역의 상징성은 단순한 장소의 점유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넘어선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곳에 바알신앙을 기리는 신전을 세웠다. 야훼신앙이 그 하위에 포섭되어 있었을 것이고, 이 국가신학이 이질감 없이 사람들에게 수용되도록 하는 것이 이곳의 국가제의의 주요 과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대중을 선동하여 이들을 몰살한다(열왕기상18). 성서가 묘사하듯 천 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학살극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실재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면, 필경 훨씬 소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거사가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세벨의 공권력에 그는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로까지 도주해야 했다.


시나이로 가는 길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

―〈열왕기상19,7

 

[그림-5] 험란한 시나이 산 지대

무언가 바라던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도루아미타불이라던가. 그동안 이것을 위해 투자했던 그 열정, 그 고뇌, 그 고통 .......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자신의 삶을 소비했으며,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주위 사람에게 아픔을 줬던가? 이 모든 것을 계산할 틈도 없이 엄습해오는 좌절감. 일어설 기운도 없다. 하지만 나자빠져 있을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수습할 일이 태산이다. 아니 줄행랑이 최선일 듯.


기절할 지경이건만, 달음질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수백 번 기도했고, 수천 번 운명을 원망했다. 발바닥이 땅에 교차되며 닿을 때마다 간구와 욕지거리가 반복된다. 그러다 나자빠진다. 아마도 짖은 어둠이, 깊은 수풀이 위안이 됐나보다.

흙더미에 처박은 얼굴로 땅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렇게 보드랍다니. 왜 그토록 달음질쳤지. 이렇게 포근한 땅이 기다리고 있는데.’

잠이 들었다. 주검 같은 자세로 긴 잠에 빠졌다. 며칠이 지났는지 몇년이 지났는지 몇겁이 지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이 모든 시간이 밤이었다. 누구도 깨울 수 없는 깊은 숲속에서, 누구도 깨울 수 없는 그만의 밤을 꼼짝도 않고 보냈다.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눈을 떴다. 이곳이 극락인지 이승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깨어났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건만 저절로 깨어났다. 몸이 저려온다. 마치 뼈다귀만 남은 몸둥이에 살이 붙고 숨이, 온기가 돋듯, 온몸이 저리게 아팠지만, 아마도 이것이 부활의 통증이려니 했다. 깨어난 세상이 어디든 간에, 상쾌하다. 고통의 우물 속에 상쾌함이 삼투하여 스며든다. 저것이 온통 퍼지면 온전한 부활의 몸이 되겠지.

잠들기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잔유물처럼 달음질하다 부상당한 곳곳에서 통증의 신호가 보내진다. 허기진 뱃속에선 몸둥이를 지탱할 만한 한 톨의 에너지도 바닥나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부활한 몸둥이엔 절망 대신 희망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다. 일어났다. 그리고 걸었다. 달음질 대신 여유로운 맘으로 걸었다. 마치 목적지를 향해 가듯 단호한 발걸음으로 걸었다.

모세가 백성을 해방하려다, 이집트 군대에 쫓기고, 동족에게 내침당해서 쓰러질 듯 도망치다 다달은 곳. 그곳에서 모세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하라고 부름받았다더라.

이집트에서 탈출하면 곧 바로 신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다더라. 그러나 황량한 광야뿐. 절망과 원망이 가득했다더라. 황당한 심사로 무작정 걷다가 다달은 곳. 그곳에서 모세는 신세계를 향해 가는 비법을 받았다더라.

그는 시나이 산을 생각했다. 목적지다. 모세 이래 아무도 못 가봤다는 곳. 야훼를 만날 수 있다는 곳. 어딘진 몰라도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 남쪽이어도 좋고 북쪽이어도 좋다. 어쨌든, 그곳이 어디든 발길 닫는 곳은 시나이일 테니까.

비로소 깨달았다. 시나이가 동서남북 어느 편에도 없다는 것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찾아 헤매어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만약 그곳이 북쪽 어느 곳에 있었더라면, 세겜처럼, 실로처럼 서로 제 것 삼겠다고 다투었으리라. 오므리가 은 두 달란트로 사마리아를 산 것처럼, 돈 있는 놈이, 권세 있는 놈이 차지하고는 저만을 위한 장소로 삼았으리라. 만약 그곳이 남쪽 어느 곳에 있었더라면, 다윗이,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는 자기만을 축복하는 신이 계신 곳이라고 떠벌였던 것처럼, 신도 독점했으리라. 하지만 야훼가 계신 곳, 야훼를 만날 수 있는 곳, 야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시나이는 그 누구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깨달았다. 바로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그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죽음처럼 깊이 잠자던 이가 깨어나는 곳, 절망에서 희망이 샘솟는 곳, 주검에서 부활사건이 일어나는 곳, 바로 그곳에서 머지 않는 자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독차지 할 수 없는 그곳에 자신이 다다르게 되었다는 것을, 야훼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광풍 속에서, 대지진 속에서, 큰 불 속에서, 웅대한 대사건 속에서,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접신자(예언자)들을 몰살시켰던 가르멜산 사건속에서 도무지 들을 수 없었던 것을. 그것은 미지의 산 시나이에서 미세함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야훼의 나라를 대망하는 사람, 저주 아래 있으리라.

얻으려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야훼의 나라를 대망하는 사람, 축복 아래 있으리라.

아무것도 갖지 못함을 아는 순간, 모든 것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들었던 소리다. 이미 온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게다. 온갖 말()이 창궐한 세계에서 무수한 말을 지껄였고 무수한 말을 들었건만, 그리고 이와 같은 소리를 말하기도 했건만, 이 소리는 사실상 자신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가장 고상한 진리를, 그리고 신의 위대함을 이야기하고 다녔어도 말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지금 그 소리가 들린다. 침묵 속에 떠오르는 소리인 게다. 바로 시나이로 가는 길에서만 들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영웅은 없다. 오직 성찰이 있을 뿐

 

엘리야, 그는 칼을 든 예언자다. 그는 혁명가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줄 틈도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긴급히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대중은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괄호 쳐진 후속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야 했다. 성서는 엘리야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시킨 대중의 기억술의 단초를 보여준다.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실패로 말미암아, 대중에게 실패는 곧 더욱 온전한 성공의 흔적임을 알려주었다. 대중은 엘리야로 말미암는 온전한 성공의 담론을 창조하는 주역으로, 민중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고 그의 뒤를 추종함으로써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통해 단번에 확보되는 그런 성공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성공과 약간의 실패가 끝없이 교차되는 가운데 되는 듯 마는 듯 만들어지고, 끝없이 지양되면서 펼쳐지는 일상적 사건의 연쇄이다.

영웅은 없다. 메시아도 없다. 그러한 성공의 화신으로서의 영웅/메이사/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

 

이러한 시기의 체계비판 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성서는 예언운동에 대한 당대인들의 특별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국가가 안정적인 발전을 구가할 때, 국가의 사회정치적 조직은 전문화되며, 이 과정은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의 분화가 촉진되는 것을 포함한다. 이로 말미암아 신과 인간의 중재역할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전담되게 된다. 나아가 종교적 중재 행위였던 제의가 정부 중심의 거대 축제로(절기의 형태를 띤) 전환됨에 따라 제의와 일상생활이 현저하게 분화된다. 이는 제의가 일상의 삶의 영역에 추상적으로만 개입하게 됨을 뜻한다. 이것은 종교적 역할에서 구체적인 중재담당자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여기서 사제와 예언자의 역할이 분화된다. 그런데 왕실의 체계 통합의 주요한 측면이 종교-이데올로기 차원이라는 점에서, 수많은 사제와 예언자가 정부의 관료제도에 편입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들의 중재 행위는 신과 왕 간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이러한 예언자 역할이 부각되는 상황은 또한 체제 비판적 예언자들의 탄생을 야기한다.

팔레스티나의 주전 8세기에는 많은 유력한 비판적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나아가 (이들의 영웅담의 구비문학적 유포보다는) 이들의 신탁이 기록되고 수집되는 활발한 운동이 시작된다. 이른바 비판적 문서 예언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비판담론의 저장능력을 크게 확충하는 계기가 되며, 또한 비판전승을 영웅 중심에서 담론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전기를 이룩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 본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이하에서 다룰 이사야, 미가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스라엘 왕국의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자는 여로보암 2세의 황금기부터 왕국 멸망에 이르는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들이다. 주로 여로보암 2세 때의 번영의 상황 속에서 활동했던 아모스는 매서운 비판의 목소리로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한다. 또한 호세야는 여로보암의 번영뿐 아니라, 그 이후 급속하게 무너져 내려 결국 멸망에 이르는 왕국 역사를 목도하면서 예언활동을 벌여야 했기에, 비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연결시키는 신탁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둘은 한결 같이 정의를 외면한 번영의 암울한 이면을 통찰했고(번영을 칭송할 줄만 알았던 왕실 예언자들과는 달리)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이 볼 때 8세기 중반 이후 다시 발흥하여 정복전쟁을 전개한 아시리아의 존재는 바로 왕실과 귀족의 정의와 공평을 외면한 번영일변도 정치에 대한 야훼의 심판 도구였다.(아시리아는 8세기 중반 디글랏빌레셀 3[Tiglath-Pileser III] 이후 다시 번성기를 맞이하여 살마네셀 5세와 사르곤 2세 때에는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며, 산헤립 대에 이르러서는 유다 왕국을 거의 멸망시키게 된다.)

이 두 예언자의 비판 담론은 이미 당대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아시리아에 의한 유다 왕국의 초토화 과정에 남쪽으로 피난한 유민들에 의해 유다의 비판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별히 이 시기에 어느 정도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예언적 비판담론의 문서화는 유다 왕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비판담론의 전거가 되었다.

 

아모스

 

[그림5-6] 아모스의 고향 드고아 

아모스는 이스라엘 왕국의 국가 발전이 극에 달했을 무렵인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다. 그는 국가 성소에서 복무했던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었다. 드고아라는 유다 왕국의 촌읍에서 목자이었거나 혹은 목장주였던 인물이다.[각주:3] 한데 그가 갑자기 이스라엘 왕국 지역으로 가서 예언자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주된 활동무대는 사마리아(3,9;, 4,1; 6,1; 8,14), 길갈(4,4; 5,5), 베델(3,14; 4,4; 5,5~6; 7,1013) 등이었다.

목동 혹은 목장주였던 그가 어떤 동기로 예언자가 되었을까? 그 자신의 진술은, 이스라엘 왕국 왕의 성소에서 일하는 직업예언자인 아마지야와 논쟁하는 맥락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충동질때문이라는 것이다(7,14; 참조.3,3~8). 한데 그를 충동질한 하느님은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에 대해, 즉 농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상류층들의 탐욕스런 행동에 대해 분노하는 하느님이다.

[그림5-7] 이스라엘의 숟 디르사

당시 사회의 상류층은 사치스런 생활에 점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별장겨울별장을 두고(3,15) 계절을 따라 옮겨가며 생활할 수 있는 자신들의 여유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때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디르사(Tirzah, Hebrew: תרצה)에서 발굴된 집터 유적으로 보면 당시의 사치스런 건조물의 규모가 이전 시대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집 내장 또한 온갖 사치스런 치장을 뒤덮여 있었는데, 화려한 상아 장식의 침대(3,12; 6,4)와 세공품(3,15)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연회, 그리고 대규모 양 사육장(6,4), 잘 먹어 바산의 암소처럼뚱뚱하게 살이 오른 귀부인들의 술취한 모습(4,1)과 과장되게 치장한 모습(6,6) 등에 관한 아모스서의 묘사는 당시 상류사회의 향락적 풍조의 단면을 보여준다.

반면 하층민의 생활을 이와는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잇따른 전쟁,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가뭄, 메뚜기떼, 전염병 등만으로도 민중의 현실은 절박했다. 하지만 여기에 부유층의 향락을 이러한 위기적 현실을 더욱 가중시켰다. 아마도 농민의 부채가 매우 심각했던 것 같고, 많은 이들은 상환능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던 것 같다. 이럴 때면 늘상 채권자들의 무자비한 강탈이 문제된다(5,11). 결국 채무농민은 아내와 자식,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종으로 팔아야 했다(8,6). 27절의 묘사는 팔려간 여인이 주인집 부자(夫子)에 의해 번갈아가며 성적으로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농민은 상행위와 불공정한 법률로부터도 극심한 소외를 경험하고 있었다(8,4~6; 5,9).

아모스는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다. 더 이상 하느님의 심판이 지연될 수는 없었다. 이에 분노하지 않는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지배층의 탐욕에 대해 분노하는 하느님보다는, 풍요로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하느님을 설파했던 듯하다(7,10~13; 16,9~10). 하여 그들은 곧 오게 될 그날(=야훼의 날)은 지금보다는 훨씬 커다란 풍요가 약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농민들이 지금 다소 힘들 수 있지만 대망의 그날엔 모든 것이 평온해질 것이라고 설파했다.

아모스는 이러한 위선적 선포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엔 그날은 축복의 날이 아니었다. 그날을 지금껏 저질러온 상류층의 온갖 착취에 대해 하느님이 더 이상 참지 않고 행동하는 날, 곧 심판의 날이었던 것이다(2,13~16; 3,11~15; 4,2~3; 5,18~20; 8,9~14).

이에 국가성소의 예언자이자 사제 아마지야는 그를 반란을 꾀하는 자, 나라를 망치게 하는 자로 규정한다(7,10). 이자의 예언은 자기의 고국인 유다를 이롭게 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하여 그는 적국이 보낸 교란모의자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이다(7,12~13). 아마지야는 지금 여기서 발전을 멈춘다면 경쟁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셈이 될 것이고, 이는 예후나 여호아하스 때와 같은, 국가의 쇠락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강한 나라를 위해서는 약간의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아모스는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은 지배층의 악행, 도덕적 해이를 방관하는 셈이 된다고 주장한다. 나라의 발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그는 열변을 토한다. 하여 그는 그날이 오면저들 사치와 폭행을 일삼는 지배층의 자녀들은 칼 맞아 죽고 포로로 끌려가 모진 학대 속에서 죽어갈 것이라고 선언한다(7,17). 진정한 축복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확고히 세워지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호세아

 

아모스와 거의 동시대의 예언자인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 말기에 잠시 활동했던 아모스와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활약했던 예언자다. 그는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까지 활동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이스라엘 왕국이 최고조에 이를 때와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을 때를 모두 경험한 예언자였다. 하여 호세아의 신탁은 정의의 한 조각까지 땅바닥에 추락하고 만 시대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말하는 아모스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절망에 빠진 나라에 위안을 주는 하느님의 사랑(헤세드)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여로보암 2세 때의 부귀영화는 소수의 상류층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상류층은 날로 부유해졌고, 날로 사치스러워 갔다. 하여 욕구도 그만큼 상상하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는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켜 줄만큼 국가의 부를 점점 더 많이 축적시키는 데 성공했다. 허나 그가 죽은 뒤 상황은 달라졌다. 왕의 권력이 약화되는 상황을 이용해서 부유층의 도덕적 해이는 극에 달했고, 왕은 이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거듭되는 쿠데타와 피의 숙청이 반복됐다(호세아서4,2b; 7,5~7). 이러한 상항은 물론 상류층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사회 전반으로 도덕적 아노미가 극심해졌고, 불법과 탈법이 횡행했다(4,2a; 7,1). 이제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악과 폭력이 전 사회적으로 난무하게 되었다.

이에 호세아는 아모스처럼 지배층을 향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인다(4,1). 그가 기소한 것은 매춘행위였다. 1장과 3장에 나오는 우화는 이스라엘 전체 사회 구성원의 부패를, 부정을 저지른 예언자의 아내 모티브를 통해 그리고 있다. 이때 검사는 그녀의 남편이다(4,1). 그렇기에 그는 분노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적인 마음은, 호세아에 의하면, 바로 이스라엘을 대하는 하느님의 마음이었다.

한데 아내가 저지를 부정은 바알제의와 관련이 있다(2,15). 바알제의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대표적인/대중적인 풍요제의다. 국가는 그러므로 대중의 가슴에 가장 깊이 파고든 이 바알제의를 국가화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오므리가 페니키아의 바알 제의를 수입한 것은 바로 바알제의를 국가제의로 재해석하는 데 페니키아 종교가 매우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야훼주의자들은 이런 바알제의와 대립선을 통해서 신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알제의가 너무 과도하게 국가화되었기 때문이다. 야훼종교의 강조점은 풍요보다는 평등이었다. 한데 알다시피 여로보암 이후 야훼종교도 국가종교화했다. 이는 (거시정치적 차원의) 야훼종교와 (일상적 차원의) 바알종교의 혼합을 의미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야훼종교의 이데올로기를 대중화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동시에 야훼종교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희석화시키는 점도 있었다. 하여 바알제의가 활성화되던 오므리 이후, 특히 부유층의 시치풍조가 극심해지는 여로보암 2세 시기에 야훼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야훼주의만을 강조하는 편향을 띠게 되었다. 호세아는 바로 그러한 극단적 야훼주의를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다.

호세아는 안식일이 바알제의에 물들어 버린 것을 문제시한다(2,13). 바알종교가 스며든 야훼제의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였던 것이다. 하지만 호세아가 말하는 요점을 주목하면, 단지 대중적 신앙이 수용된 야훼종교를 문제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첫째로, ‘풍요로움만이 남편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 즉 풍요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요, 둘째, 그 풍요는 기실 정부(情夫)가 준 것이 아니라 야훼가 준 선물이라는 것, 즉 야훼주의적 풍요제의가 가능하나는 것이다. 요컨대 그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풍요지상주의이며, 풍요 즉 이스라엘의 발전은 필요하지만 이는 반드시 야훼종교 내에서 담아내야 할 신학적 과제라는 사실을 강변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국가의 전 구성원에 만연한 죄악을 비판하면서도 그 책임이 있는 이들은 국가 종교의 사제와 예언자들, 왕족, 귀족 등 지배층이라고 말한다. 이들로 인하여 백성들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차단당해 버렸다는 것이다(4,5~6).

말했듯이 지배층은 서로 권력 암투에 여념이 없었다. 이스라엘 왕국의 혼란을 틈타 유다 왕국이 일부 영토를 병합했다(5,10). 부흥하는 아시리아의 위협을 예감하면서 친 아시리아 파와 친 이집트 파 등 분파로 나뉜 지배층의 국제정치적 해법은 그들 나름의 위기 타개책이었다. 하지만 호세아는 말한다.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저들은 취약한 이스라엘 왕국 지배층의 약점을 이용해서 결국은 이 나라를 집어삼겨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2,14; 7,9). 하여 호세아는 준엄하게 심판의 말을 던진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리라.”(2,11~12)

그러나 유죄로 확정된 아내를 기소하면 판결을 내려야 했던 남편은 아내의 고난을 더불어 나눠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 부부가 된 이상 남편은 아내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하여 남편은 별안간 축복선언을 내린다. 아시리아의 군마에 짓밟힌 이스라엘 백성을 부둥켜안고 그는 절규한다. “너 이스라엘아 다시 내게 돌아와라.”(14,2) 아시리아나 이집트에 의존하는 정책을 취할 생각이나 하지 말고, 풍요지상주의적인 가치관 아래에서 매몰되어 있지나 말고, 야훼신앙 본래의 정신에 충실해라. 그러며 그분의 정의가 환히 빛나 오리라.”(6,3)

 

이사야

 

5백년(기원전 8~4/3세기) 이상의 장구한 편집과정의 결과인 이사야서는 편집상 크게 세 부분(1~39; 40~55; 56~66)으로 나뉜다. 이 셋은 대체적으로 상이한 시기와 관련된다. 이 중 1~39장이 이사야 예언자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러나 여기에도 이 예언자의 신탁을 반영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여기서는 복잡한 역사적 비평 작업을 생략하고 이사야에 관한 최소한도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이사야는 우찌야 왕과 요담의 공동통치 말기(740년경)부터 아시리아의 산헤립(재위 705~681 BCE.)이 유다를 침공한 주전 701년경까지 활동한 유다 왕국의 예언자로서, 왕국의 유력 인사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아마도 왕실 내의 존경받는 국정자문위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왕이 그에게 중요 정책의 자문을 구하곤 한다), 그의 신탁은 당시 정부를 주도하던 세력의 정책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이었다. 왕실 내에서 전문화된 관료들이나 사제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기에 그의 신탁은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인지 능력이나 이스라엘의 야훼주의적 전통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력을 포함하고 있다.


[도표5-3] 이사야서의 구성

1~12

(1)

이사야 문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신탁들

13~23

이방 족속들에 대한 심판 신탁들

24~27

이사야의 소묵시

28~31

이스라엘(유다)에 대한 재앙 신탁들

32~35

도래할 심판과 구원의 시대에 대한 시와 기도들

36~39

36~37

38

39

전기적 설화들

산헤립 원정 당시 이사야의 개입

병든 히즈키야를 회생시킴

므로닥발라단 사절단 이야기

40~55

2 이사야문서

56~66

3 이사야문서


그의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아스에서 우찌야에 이르는, 그리고 우찌야에서 히즈키야에 이르는 유다 왕국 왕실 내의 역사를 고려해야만 한다. 먼저 우리는 아하지야에서 아마지야까지 유다 왕국의 네 명의 통치자가 연거푸 비정상적인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여호사밧과 여호람 대에 확고해졌던 다윗왕가의 왕권의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왕실에 대한 도전 세력은 중앙의 관료들 및 이들과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준관료화된 지방의 토호들로서, 이들은 한결 같이 대지주들이었다. 정부 내에는 복잡하게 분화된 세력 간의 이합집산을 통한 권력연합과 도전연합들이 형성되는데, 물론 이 갈등에는 다윗왕가도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들간의 상호갈등과 연합의 결과로 왕위 승계가 이루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요아스 왕의 개혁은 왕실 지배의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궁중암투에 희생되고 만다. 그를 승계한 아마지야도 부왕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그 역시 암살자들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이때 땅의 사람들(암하아레츠)이 이 살해자들을 처형하고 그의 아들 우찌야를 등극하게 한다(열왕기하14,21). 이들은 과거 아달리야를 축출하고 요아스를 등극시키는 친위쿠데타에 가담함으로써 별안간 등장했던 세력(?)이었다(열왕기하11,18~20).[각주:4]땅의 사람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국가 체제화 과정에서 자유농에서 예농화되고 있던 농민계층과 연관된 사회세력과 관련된 듯하다. 즉 이 시기에 유다 왕국에서 농민계층이 정치세력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친왕실적 활동은 귀족세력에 대한 견제라는 차원에서 왕실과 이해관계가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전략적 인지 능력에 기반을 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전통적 농민운동의 대지주에 대한 저항운동이 종종 친위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 여기에도 해당될 수 있다.

우찌야가 왕위에 오른 후 유다는, 이스라엘과 비할 수는 없지만, 과거보다는 훨씬 짜임새 있는 국가로 성장한 것 같다. 중앙의 권력이 현저히 강화되었고 그만큼 군사력도 강성해졌으며, 영토도 좀더 확장된 듯하다. 또 사유지의 개간을 통해(여기에는 관개시설의 설비 작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더 높은 토지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중개)무역으로 왕실 이윤이 보다 높아졌다. 바야흐로 유다도 국가로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자유농의 존립기반은 점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5-4] 피살된 유다 왕국의 통치자들 

연대(주전)

통치자

최후

비고

841

아하지야

피살

-북왕국의 예후의 쿠데타 때에 예후에게 살해됨

835

아달리야

-비다윗계: 아하지야의 친모. 오므리의 손녀

-궁중 쿠데타로 등극

-사제 여호야다가 주도한 궁중쿠데타에 의해 6년만에 실각

797/6

요아스

-다윗계의 복원

-여호야다에 의해 7세 때 등극

-암살자에 의해 궁중에서 피살

768/7

아마지야

-요아스의 아들

-왕권회복 도모

-궁중 암투에 의해 피살


이사야의 신탁은 이러한 정부의 발전주의 정책이 민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이사야서3,15~26). 하나의 관료세력이 제거되고 난 자리에 또 다른 관료세력이 등장하고 착취를 수행한다. 하느님이 준 번영이라는 축복은 나누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5,11 참조). 이것을 비판할 줄 모르고 축복의 말만 늘어놓는 종교행사(1,10~13)는 야훼의 예배와는 무관하다. 하느님의 축복의 본질은 바로 박탈자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데있는 것이다(1,15~16). 그러므로 참된 군주는 하느님의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9,6). 이것은 왕실과 그 관료집단의 발전주의에 대한, 나아가 그 체계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인 것이다.

그런데 특히 8세기 아시리아의 등장은, 관료집단의 발전주의가 거대 제국과의 관계에서 모색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강제하게 된다. 국가발전은 더 이상 국내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팔레스티나의 각국은 대항 동맹을 맺을 것인가 아니면 미리 고개 속여 봉신국으로 예속될 것인가 등의 고민에 빠지게 됐다. 우찌야 이후 유다 왕국의 급속한 혼란은 이러한 국제정치 상황과 관련된다.

이때 이사야는 (아하즈와 히즈키야가) 섣부른 반 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는 것에 반대한다(7,18~25; 8,5~811~15). 이것은 정부 내의 친 아시리아파나 지나친 민족주의 당파에 대한 견제일 수도 있고, 국제 정세에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라는 경고일 수도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이사야의 충고의 핵심은 아마도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좌지우지되는 정부의 정책을 문제시하고, 올바른 정책의 핵심은 민의 삶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미가

 

어렸을 때 TV에서 방영됐던 외화 중에 카스터 장군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매우 시청률이 높던 프로 중 하나였다. ‘카스터라는 이름의 노랑머리를 한 실존했던 장발 기병대장의 영웅담이다. TV가 그리 흔치 않던 시절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심지어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시청하는 것이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시청 문화이던 시절에, ‘잔인한 야만인인디언으로부터 문명인백인을 보호하기 위한 이 영웅적인 신사 기병대장의 이야기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미국 역사에 대한 하나의 상식을 갖게 해 주었다. 그는 정의의 수호자였고, 미국인이 자신의 이라고 자랑하는 프론티어 정신의 지킴이였다.

그런데 실제 인물 카스터는 인디언을 남녀노소 없이 집단 학살하고 시체를 잔인하게 유기시키곤 하던 광적인 인종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디언을 가능한 한 잔혹한 방식으로 말살시키려는 데 전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다. 인디언에게 기습당해서 그의 부대가 전멸당하기까지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한 미국 정복자들의 전형이고 그 첨병이었다. 이 정복자들에 의해 건국된 미국이 평등과 정의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법과 성서에 토대한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결코 법의 정당한 집행자가 아닌 카스터같은 사람들의 활약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나라가 천명했던 평등과 정의는 처음부터 인종주의적 편견을 전제하고 있었다. 평등과 정의라는 고상한 얼굴과 인종주의라는 추악한 얼굴을 동시에 갖기 위해, 이 모순되는 야누스적인 두 얼굴을 조화시키기 위해 미국은 카스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팔레스티나 중부 산지에 형성된 두 나라,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의 시대에 서로 긴밀한 관계에 놓인다. 당시 유다는 이스라엘의 복속국이었지만, 종주국의 발전과 더불어 어느 정도 국가체제를 갖추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기하19장을 보면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된다. 그는 왕국 전역에 법률을 반포하고, 이를 집행하는 각 지방의 재판관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이는 아직 초기 형태에 불과하지만 관료적 통치가 시작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순회하는 왕실 관료와 충성스런 종교집단들이 지방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여호사밧 왕은 이렇게 순회재판관으로 임용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법률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대들은 맡은 일을 할 때에 삼가 조심하여 하시오. 그대들이 하는 재판은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이 재판할 때에 그대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한 순간이라도 그대들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시오. 주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불의하지도 않으시며, 치우침도 없으시며, 뇌물을 받지도 않으시니, 재판할 때에 삼가 조심하여 하도록 하시오.

―〈역대기하19,6~7.

 

한 마디로 말하면 정의공평이 그 취지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여기서 우리는 여호사밧의 법제화 정책에 두 가지 상호 모순되는 요소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하나는 중앙권력의 강화, 중 권력 집중에 목적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재산과 신분과 족속을 넘는, 국가 영역 내의 모든 백성에게 공평하고 정의롭게 시행되는 법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이 둘은 이치상 잘 조화될 수 없다. 권력 원리가 보다 체계적으로 작동되는 국가는 결코 정의롭고 공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대기가 공평과 정의를 강조하였다는 논리로 그리고 몇 가지 다른 이유를 들면서 여호사밧을 칭찬하고 있음에도, 또한 열왕기도 마찬가지로 이 통치자를 칭찬하고 있음에도, 이 시기 이후 예언자들의 비판의 말에는 권력 남용 현상과 부패한 재판 상황이 이 나라에 대한 비판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설사 왕 자신은 개인적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웠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 체제 자체는 권력을 남용하는 관료들과 뇌물에 좌우되는 부패한 재판관들의 부정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위에서 인용한 여호사밧의 말도, 자기 자신이 파견한 관료들, 아직 초보적 수준의 행정력밖에 갖고 있지 못한 신하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우려가 깊게 스며 있다.

비록 예속국 상황이긴 해도 비교적 안정된 체제를 이루면서 여호사밧 정부는 중앙 집중화를 향한 본격적인 정책 드라이브를 펼치려 한다. 이제 유다는 한 여러 족속들을 병합한 어엿한 나라의 꼴을 갖추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지방 엘리트들의 저항은 거셌고, 왕이 그것을 통제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아니면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까, 왕의 관료들의 권력 남용은 늘 따라다녔다. 그런 부패상의 하나는 이른바 카스터 증후군일 것이다. 국가/왕에 대한 과잉충성이 그의 사적인 증오와 얽혀 있는 경우 말이다. 어느 족속으로부터 상처 입은 자가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복수를 꿈꾸며 더 강한 자의 수하로 들어가 충성과 증오가 혼용되는 현상이다. 이때 그의 증오는 종종 대상을 잃어버린다. 그의 권력이 닿는 이들을 무차별하게 증오하고 가학을 일삼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질긴 운명의 자수성가자들은 놀라운 자기 처세 능력을 보인다. 그의 유능함과 변함없는 충성은 통치자로 하여금 쉽게 그를 배제할 수 없게 한다. 그의 잔혹성은 결과적으로 통치자에게 유용하게 작동하니 말이다. 여호사밧 이후 국가로 성장하는 유다도 점점 그런 일이 빈번해졌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그렇듯이......

여기서 여호사밧보다 한 세기 반 정도 후대에 활동했던 미가 예언자의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을 법하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의 신탁 하나를 인용해보자.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미가서2,1~3

 

부패한 사회체제에 대한 미가의 신랄한 고발이다. 상당히 격앙되어 과장된 발언을 쏟아지듯 표출하고 있다. 지도자와 재판관들 모두가 자기 백성의 살가죽을 산 채로 벗기고 뼈를 조각조각 내버린다면, 백성의 고기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 먹는다면, 그런 식의 무자비한 통치가 자행된다면, 그 나라는 과연 존속할 수 있을까? 아니 존속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예언자가 고발하는 것은 그러한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미가는 모레셋가드(모레셋갓공동번역, Moresheth-gath, môr'ĕshĕth-găth)라는 시골의 예언자였고, 정부의 논의는 상상으로 밖에는 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동시대의 이사야와는 달리 그에게 국제문제란 전쟁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칼날과 화살을 통해서였으며, 정치외교적 인식과는 무관했다. 그는 아마도, 아모스가 그랬던 것처럼, 손에 흙을 묻히며 노동해야 하는 출신배경을 가진, 촌읍의 장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모레셋(미가서1,1) 혹은 모레셋가드(미가서1,14)는 블레셋의 주요 도시의 하나인 가드에서 동편으로 10킬로 정도 떨어진 시골 지역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오랫동안 가드에 속했던 농촌의 하나였기에, 그냥 모레셋으로 불리기보다는 모레셋가드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곳은 해묵은 적성국과의 국경지역이니만큼 종종 전쟁터였고, 심지어 이집트, 아시리아 등, 고대의 대제국들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가는 지역이기도 하다. 요컨대 전쟁의 참화에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된 지역이 바로 미가의 고향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그만큼 국가 안보의 논리가 가장 원초적인 지역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반대이기도 하다. 기원전 8세기, 아직 변변한 국가가 생기기도 전인 시기에 국경이란 경계를 나누는 곳이라기보다는 경계가 혼동되는 지역이다. 그곳은 유다 백성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블레셋 백성이기도 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니 어느 편의 백성도 아닌 이들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 종종 양편으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되기도 한다. 모레셋가드는 그런 이들의 땅이었다.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이 오므리 왕조 치하에서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던 시절, 그 봉신국인 유다도 어느 정도 안정된 체제를 이룩하고 있었다. 반면 양국의 적성국인 블레셋은 그 와중에서 한껏 위축된 상태였다. 아마도 그랬기에 모레셋가드는 유다의 영토였던 모양이다.

유다의 왕족 혹은 귀족들은 이 변두리 지역 주민에게까지,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잔혹한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자기 백성이지만 동시에 남의 백성, 혹은 적의 백성으로 취급되는 이들이었기에 이곳을 차지한 유다의 왕족 또는 귀족들은 잔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하수인들 중에는, 블레셋과 헤어 나올 수 없는 악연을 지닌 이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이들이 왕의 관료가 되었을 수 있고, 귀족들의 청지기가 되었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카스트 증후군이 이런 곳에는 늘상 있지 않던가.

소농들은 귀족층의 위세에 눌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강제로 차압당하기도 했고(미가서2,2), 고리대금 부채의 가혹한 회수에 몰락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미가서2,89). 부자들에 의해 제멋대로 조작된 도량형 때문에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없었기에(6,10~11) 소농은 부채를 지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곧 몰락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뇌물을 수수한 관리들(3,11)과 재판관들(3,9)은 정의를 지키는 데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적어도 미가나, 그 주변의 소농들은 귀족들과 관리들을 그렇게 보았던 것이다.

미가는 이런 가학적 체계를 직시한다. 그리고 독설을 퍼붓는다. 동시대의 어느 예언자보다도 격렬한 언술로 지배층을 비난하며 농민을 변호한다(3,2~3). 그가 보기엔 지주들, 정부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포함하는 지배층 일체는 약탈자에 불과했다(3,5~11). 이것은 국가 파멸의 선고로 이어진다(3,12). 그의 이러한 언술은 사상가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거칠다. 심지어 아모스의 그것보다도 말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는 다윗왕실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다윗가문의 군주가 나타나서 염원을 실현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5,1~5). 이것은 동시대의 땅의 사람들의 정치적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후대에 미가의 말을 기억하고 인용한 이들이 땅의 장로들이었다는 점(레위기26,17~19)은 그가 이 정치세력과 연관이 있었다는 시사를 받는다. 그렇다면 그는 땅의 사람들이라는, 당시의 정치세력화한 농민운동의 한 지도자였을지도 모른다.

 

요약

 

아모스와 호세아, 이사야와 미가. 이들은 모두 8세기의 시대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정부 안에서, 즉 지배담론 안에서 예언활동을 수행했든 밖에서 수행했든 간에,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담론을 펼친 예언자였다. 이들의 신탁의 주제는 정의’, 즉 권력 독점을 비판하고 민의 생활권을 보전해야 한다는 데에서 합치된다. 이들의 문제의식의 전개는 그런 점에서 국가의 발전주의의 내적, 근원적 위기를 극한까지 확장한다. 군주제적 모델의 내적 모순이 이들 예언자들에 의해서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한데 체제 내의 세력들에 의해 구성된 성서는 이들 비판적 예언자들의 담론을 문서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체제 내의, 체제 수호적인 예언담론들은 기억되지 않았다. 심지어 체제 내적인 편찬자들에게서조차 말이다. 요컨대 8세기의 무수한 예언자들 가운데서 기억된 이들 네 명의 예언자들은 예외 없이 체제의 반민중성에 대한 비판가들이요, 그러한 국가의 위기를 극한까지 문제제기했던 이들이다. 물론 이들 편찬자들은 필경 이들 비판적 예언자들을 체제 형성의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들의 신탁 모음집을 편찬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의 인식과 보다 친화적인 담론의 주역들이 체제 예언자들과 사제들의 담론이 이들에 의해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야훼의 역사가 바로 이렇게 그 고유의 목소리를 보존했던 것이다. 󰡖

  1. 〈열왕기상〉 21장의 나봇의 포도원 설화에서 볼 수 있듯, 타인의 재산의 강탈을 망설이는 아합과 용의주도하게 기획하는 이세벨이 대조되고 있다. [본문으로]
  2. 이 용어는 학계에서 정립된 가설에 기반을 둔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신들의 예언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없는 사실이고, 지파동맹 시대의 연합의 전통을 군주제하에서도 지속시키려는 예언운동이 존재했다는 것 또한 의문의 여지없다. 나는 여기서 이들을 ‘야훼계 예언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실로의 예언자들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부는 매우 잘 조직되고 매우 지속적인 예언자 그룹이었다. 이들로부터 지속된 예언자 전통 속에는 성서의 수많은 설화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7km 떨어진 작은 촌읍이다. [본문으로]
  4. 이들은 또한 후에(641/640년경) 아몬이 암살된 때에도 등장하여 살해자들을 제거하고 요시아를 등극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열하〉 21장). [본문으로]